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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30 23:37:48

드미트리 셀리바노프

1. 개요2. 생애 및 활동3. 자살 및 그 이후4. 여담

1. 개요

드미트리 알렉세예비치 셀리바노프(Дмитрий Aлексеевич Селиванов)는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 지역에서 활동하던 포스트 펑크 및 인더스트리얼 락 뮤지션이었다. "칼리노프 다리"(Калинов мост), "푸티"(Путти),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Гражданская оборона) 등 여러 시베리아 언더그라운드 밴드에서 기타리스트로 활동했으며, "건축 예술"(Промышленная архитектура)의 창시자이자 리더였다. 1989년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2. 생애 및 활동

1964년 03월 25일 노보시비르스크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11살 때부터 기타를 연습했다고 알려져 있다.

1979년부터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하였다. 1980년대 초반 "존재"(Присутствие)라는 밴드에서 활동하였으며[1], 1984년 드미트리 레뱌킨(Ревякин)과 함께 노보시비르스크에서 "건강"(Здоровье)이라는 밴드를 창설하여 활동하였으나 1년밖에 가지 않았다. 이후 레뱌킨은 "분점"(Равноденствие)[2]이라는 밴드를 설립해 활동하였고 셀리바노프 또한 기타리스트로 활동하였으나, 고의적인 "사보타주" 즉 태업을 통해 셀리바노프는 칼리노프 모스트를 나갔다. 1986년 이후로 "칼리노프 모스트"는 "안정화"되어갔지만, 셀리바노프에게 있어 이는 "지루하게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본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셀리바노프는 레뱌킨의 밴드에 "점잖게" 들어갔고 "점잖게" 나갔다.
Одна из причин, за что я был изгнан из КАЛИНОВА МОСТА - это то, что я два раза одинаково вещь не сыграю.
(내가 "칼리노프 모스트"에서 쫓겨난 이유 중 하나는 내가 한 곡의 음악을 똑같은 방식으로 두 번 연주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칼리노프 모스트의 탈퇴에 대한 셀리바노프의 말.

이후 셀리바노프는 밴드 "푸티"(Путти)에서 리드 기타리스트로 활동하였으나 오래 가지는 못했고[3], 1980년대 중반에는 음악가 니콜라이 "코카" 카트코프(Николай "Кока" Катков)와 함께 2인조 프로젝트 밴드 "디마코크"(Димакок)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4] 디마코크 활동 당시 셀리바노프의 활동 목표는 "평범한 소비에트 인민의 정통적(orthodox) 사고를 보여주는 것과 이 모든 케케묵은 생각들을 일정 수준의 부조리함으로 이끌어 내는 것, 즉 다시 말해 아주 끔찍하고 단조로운 음악을 연주하는 것(ортодоксальное мышление среднего советского человека и довести все эти заплесневелые идеи до некой степени абсурда — то есть играть совершенно страшную, монотонную музыку)"이었다.[5]

이후 1988년 4월 셀리바노프는 예고르 레토프, 올렉 "매니저" 수다코프, 콘스탄틴 "백치 쿠자" 랴비노프가 결성한 프로젝트 밴드 "공산주의"(Коммунизм)에 참여하게 되고[6][7], 같은 해 6월에 자신의 밴드 "건축 예술"(Промышленная архитектура)을 결성하게 된다. 당시 밴드 멤버로는 셀리바노프(보컬, 기타, 작사, 작곡), 올렉 체호프스키(Олег Чеховский, 베이스), 예브게니 스쿠코프스키(Евгений Скуковский, 키보드), 레나트 바히도프(Ренат Вахидов, 드럼), 이고리 이바노비치 슈킨(Игорь Иванович Щукин, 드럼 머신)이 있었다.
Я считаю, что панк должен нести в себе очень сильный деструктивный заряд для разрушения в идейном смысле стереотипов, которые сложились у человека, у советского, в частности, человека, который запрограммирован советской моралью с детского сада. А когда он во все влетает, его стереотипы начинают разрушаться и он начинает что-то понимать.
(내 생각에 펑크는 이념적 의미로 유치원 시절부터 소비에트적 도덕관념으로 짜여진 한 명의 소비에트 인간에게 지워진 고정 관념을 파괴할 매우 강력한 파괴적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 그리고 그가 모든 것에 연루되게 되면, 그가 가진 고정관념들은 붕괴되기 시작할 것이고 그는 그제서야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드미트리 셀리바노프, 1988년 05월

3. 자살 및 그 이후

Ну ладно, у меня тут ещё делo в конце коридора. (아니 괜찮아, 저기 복도 끝에서 아직 할 게 있어서 말이야.)
셀리바노프의 유언
1989년 04월 22일 저녁 셀리바노프는 노보시비르스크 전기공학 대학(НЭТИ)[8] 2호 건물에서 리허설을 하고 있던 로컬 락밴드 "암베"(А’МБЕ)를 방문하였다. 이후 19시경, 셀리바노프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스카프를 챙겨 복도로 나갔다. 이후 그는 복도 천장의 파이프에 스카프로 목을 매단 채 발견되었다. 자살 원인으로 우울증 등이 꼽히긴 하나, 확실하게 알려진 것은 없다.

4월 말 노보시비르스크의 공동묘지에 안장되었고, 06월 03일 치칼로프 문화궁전(ДК Чкалов)에서 셀리바노프 추모 콘서트가 열렸다. 여기에는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얀카 댜길레바 등이 참여하였다.

셀리바노프의 사망 이후 "건축 예술" 밴드는 "남자의 춤"(Мужской Танец)으로 이름을 바꾸고 계속 활동하였으나[9], 디스코 등 완전히 다른 장르로 활동하였다. "건축 예술"의 유일한 앨범 "사랑과 기술"(Любовь и Технология)은 몇 차례 비공식적으로 발매되다 2001년이 되어서야 정식으로 발매되었다. 이후 라이브 실황을 담은 앨범 "Live Architecture"도 발매되었다.
Любовь и Технология (1988/2021) Live Architecture (1988/2021)

4. 여담



[1] 러시아어 위키피디아에 Присутствие(밴드) 문서가 있는데, 여기서 다루는 밴드와는 이름만 같다. 위키피디아에서 다루는 밴드는 1980년대 레닌그라드 락 클럽 소속으로 활동한 락밴드이다. 이 밴드 또한 그렇게 많은 자료가 남아있지는 않지만, 셀리바노프의 밴드는 그냥 남아있는 자료가 거의 없다시피하다.[2] 分點/equinox. 주야평분시라고도 부르며, 밤의 길이와 낮의 길이가 같은 날을 말한다. 이 밴드는 1986년 "칼리노프 다리"(Калинов мост)로 밴드 이름을 바꾸었으며, 이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3] 셀리바노프의 말에 따르면 푸티의 멤버였던 치르킨이 자신을 불러 "우린 당신의 강철같은 리더십에 지쳤다(устали мы от твоего железного руководства). 우린 당신의 방식대로가 아니라 우리 방식대로 연주하고 싶다"고 요구했다고 한다.[4] "디마"(드미트리의 애칭)와 "코크"(코카)의 합성어. 이들의 작업물은 마그니티즈다트로 알음알음 유통되다 2016년 "Димакок / Наша эра / Шизазой"이란 제목으로 비르고로트에서 재판되었다.[5] 대표적인 예시가 디마코크 프로젝트 시절 곡 "헌법"(Конституция)으로, 곡 중간 중간 셀리바노프가 통신의 자유, 종교의 자유, 거주 이전의 자유 등 서류상으로는 존재하나 실질적으로는 지켜지지 않던 규정을 읽으며 당시 체제와 사회의 부조리함을 꼬집는다.[6] 예고르 레토프의 유명한 밴드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에서도 세션 멤버로 참여한 전력이 있으나, 얼마 못 가 이고리 "제프" 제프툰으로 교체되었다.[7] 코무니즘의 1990년 앨범 "급강하 폭격기의 연대기"(Хроника пикирующего бомбардировщика)에 실린 "the Birds of Paradise"(낙원의 새들)은 셀리바노프가 녹음한 곡이다. 원곡은 스위스의 민요로, 영어로 편곡된 버전이다.[8] 당시 소련의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은 공식적으로 스튜디오 임대 등이 힘들었으므로 이런 열악한 곳에서 공연을 하거나 앨범을 녹음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얀카 댜길레바가 앨범을 녹음한 곳이기도 하다.[9] 초르니 루키치의 리더이자 동료 음악가였던 바딤 쿠지민이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