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러시아 제헌의회 선거 | ||||
일정 | 11월 25일 | |||
투표율 | 64% | |||
선거 결과 | ||||
<rowcolor=#f4ca38> 정당 | 득표 | 득표율 | 총합 | |
사회혁명당(우파) | 17,256,911표 | 37.61% | 324석 | |
볼셰비키 | 10,671,387표 | 23.26% | 183석 | |
우크라이나 사회주의 혁명당 | 5,819,395표 | 12.68% | 110석 | |
멘셰비키 | 1,385,500표 | 3.02% | 18석 | |
카자크 연합 | 908,326표 | 1.98% | 17석 | |
입헌민주당 | 2,100,262표 | 4.58% | 16석 | |
알라쉬 오르다[1] | 767,632표 | 1.67% | 15석 | |
무사바트당[2] | 615,816표 | 1.34% | 10석 | |
[clearfix]
1. 개요
1917년 10월 혁명으로 러시아 임시정부가 무너지고 권력을 획득한 소비에트와 볼셰비키가 당초 공약대로 제헌의회를 설립하기 위해 치른 민주 선거로, 이 선거의 결과 볼셰비키의 의도와는 반대로 반 볼셰비키 정당들이 과반을 차지했다.2. 배경
볼셰비키와 레닌은 10월 혁명의 결과로 케렌스키와 그의 임시정부를 무너뜨렸다. 그 결과 볼셰비키와 그의 동맹 정당들이 소속된 소비에트가 단독 권력을 얻었지만, 그렇다고 볼셰비키의 권력이 안정된 것은 아니었다. 도시에서야 볼셰비키의 지지가 높았지만 농촌 및 기타 지역에서는 여전히 반 볼셰비키 정당들이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고, 독일과의 전쟁을 끝내는 문제도 시급했으며, 또 러시아 혁명의 결과 억눌려있던 러시아 각 민족들의 민족운동이 준동하기 시작해 당시 나라 꼴은 말그대로 개판이 따로 없었다. 이에 볼셰비키는 당초 시민들에게 공약했던 제헌의회 설립을 이행함으로써 국민들의 지지를 얻는 한편 그들의 권력을 정당화하고자 했다.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의회 제도가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것임을 인식시켜 볼셰비키의 최종 목표인 완전한 사회주의 국가로 이행하기 위함이기도 했다.3. 선거 방식
선거는 당시에 드문 보통 선거&권역별 비례대표제로 진행되었다. 표계산은 최고평균법, 그중에서도 동트식 계산법을 이용하였다.[3] 이는 비례대표제의 대표국가인 독일보다 더 빠른 비례대표제 도입이었다. 당시 독일 국가의회는 결선투표제였고 전쟁 후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구속명부 비례대표제로 바뀌었다.4. 선거 과정
선거 과정 중 가장 크게 논란이 된 것은 사회혁명당의 공천 문제였다. 이미 사회혁명당은 공천을 끝마쳤는데 이후 사회혁명당이 좌파와 우파로 갈라지면서 공천을 받은 당내 주류(우파)가 사회혁명당의 인지도를 독차지 했기 때문이다. 당시 사회혁명당의 지지세를 양측이 고르게 가지고 있었기에 꽤나 부당한 처사였다. 카잔, 야로슬라블, 카잔-크론슈타트, 우파, 프스코프, 페트로그라드 당 지부는 좌파가 장악했지만 이외의 지역에선 사회혁명당 좌파와 우파가 따로 후보를 내보냈다.한편 멘셰비키는 국제파와 참전파의 오랜 내홍을 끝내고 통합되어 선거를 치를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일부 지역구에서는 여전히 두 당파가 별도로 출마하는 등의 분열이 이어졌다.
심지어 여러 지역에서는 사회혁명당이 좌우파로 분당된 상황에서도 투표지에는 반영이 되어있지 않는 경우도 많았으니 사회혁명당 좌파의 입장에서는 공천 학살을 당한 데 이어 자기들 표까지 빼앗겼으니 부당한 선거라고 주장하게 된다.
카데츠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입헌민주당의 경우 사실 10월 혁명 이후 당명을 인민자유당으로 바꾼 상태였지만, 이 이름은 거의 쓰이지 않았다. 카데츠는 볼셰비키에 반대하기 위해 사회혁명당 민중사회주의 파벌 등 반볼셰비키 좌익 정당들과의 연대를 시도했지만 불발된다. 그들은 독일과의 백색 평화, 즉 명예로운 평화를 주장하고 법과 질서를 약속하는 공약을 내보냈다.
5. 결과
선거 과정의 부정과 혼란이 있기는 했지만 아무튼 결과는 사회혁명당 우파의 압승이었다. 사회혁명당 우파는 오스만 제국과 싸우던 남부 전선[4]과 비공업지대, 농촌에서 표를 쓸어담았다. 과반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헌법 제정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 정도의 의석수였다. 사실 볼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의 농업 관련 공약은 거의 비슷했지만, 다수의 농민들에겐 시회혁명당이 더 익숙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농민들이 볼셰비키에게 더 익숙한 대도시 근교는 농촌이라도 볼셰비키가 의석을 가져갔다.사회혁명당 우파는 좌파들의 표까지 독점하여 압승을 거둔 뒤 좌파들을 추방하니 사회혁명당 좌파는 실제 득표수와 지지율의 수십분의 1도 되지 않는 1%의 득표만을 인정받는 수모를 겪게 된다.
한편 볼셰비키는 혁명의 중심에 있던 서북부 지역에서 약진한다. 페트로그라드나 모스크바에서 볼셰비키는 절반 가까운 득표를 받으며 선전하였고, 독일과의 전쟁이 진행되는 전선 지역과 발트해 함대가 주둔하는 발트 지역에서는 아예 60%가 넘는 몰표를 받았다. 이전까지 정국을 주도하던 입헌민주당과 멘셰비키는 매우 적은 의석수를 배당받았다. 입헌민주당의 경우 대도시에서는 30%정도의 표를 받으며 그럭저럭 선전했으나 독일과의 전쟁 지속을 주장하고 토지개혁에 반대한 일 때문에 전선과 농촌에서 참패했다. 멘셰비키의 경우는 더 처참해서, 멘셰비키는 당내 분열[5]에 애매한 정치적 위치[6] 등 여러 요소가 겹쳐 도시고 농촌이고를 불문하고 대부분의 지역에서 처참한 성적을 받았으며, 그나마 본거지인 트랜스캅카스지역에서 30%에 이르는 탄탄한 지지를 받아 체면치레만 할 수 있었다. 실제로 멘셰비키가 얻은 의석이 절반 이상이 캅카스 지역에서 얻은 것이다. 주목할 만한 점은 소수민족 정당, 특히 우크라이나 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던 우크라이나 사회혁명당 약진이었다. 요약하자면 볼셰비키의 패배, 사회혁명당의 승리, 우크라이나 사회혁명당의 약진이라고 볼 수 있었다. 물론 단순한 승리라기에는 부정선거로 볼 여지가 컸지만 말이다. 실제로 사회혁명당 의석 중 약 40석 정도가 정상적으로 선거가 이루어졌으면 좌파가 가져갔을 것이라고 한다
다만 무조건 부정선거라기에도 논쟁의 여지가 있는것이 아직 좌파 사회혁명당이 우파 사회혁명당이 분리된 것도 아니었고 일부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일부 지역에서는 재합당이 이루어지기도 했다고한다. 또한 이 '타칭' 우파 사회혁명당 지도자인 빅토르 체르노프는 토지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주장하며 당내 자유주의자들을 우파라고 지칭했다. 엄밀한 의미에서 농민이 좌파 사회혁명당을 찍고싶어했으리라는 근거는 없는 것이다. 농민들한테는 친숙한데다 정책도 좌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사회혁명당 우파가 더 매력적이었을 수도 있다
5.1. 처음이자 마지막 회기
내각 구성이야 어차피 의회는 헌법을 만들기 위한 용도였으니 차치하고서라도 헌법 제정과정은 볼셰비키의 요구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단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의원들은 제헌의회의 소집이 전러시아 소비에트 위원장 야코프 스베르들로프의 명의로 이루어졌는지부터 격렬히 토론하기 시작했다. 볼셰비키 의원들은 스베르들로프의 명의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하고 야당 의원들은 스스로 소집되었다고 주장했다. 이후 논쟁은 러시아 인민주권 국가가 되어야하는지 노동자국가가 되어야 하는지 였다. 볼셰비키는 인민이라는 폭넓은 주체로 주권자가 명시된다면 부르주아의 반혁명을 막을 수 없으면서 실질적 평등을 저해한다고 주장했다. 그날 통과된 법안이 러시아 체제에 관한 법률이었다. 러시아 민주 연방 공화국으로 명명되었고 러시아 각지에서 이미 제헌기구가 세워지기 이전부터 자치기구 겸 전국적인 의회로까지 작동하고 있던 소비에트의 권리는 완전히 무시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레닌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이렇게 말했다.제헌의회를 해산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이 떠들고 싶어한다면 마음껏 떠들게 내비두십쇼. 어차피 내일이면 떠들 장소도 없어질테니.
결국 의원들이 모두 타우리데 궁전(의사당)을 빠져나간 다음날 적위대와 흑위대(아나키스트 무장병)들은 제헌의회를 폐쇄했다. 이를 두고 민주주의에 대한 탄압이라며 로자 룩셈부르크 등 여러 해외의 사회주의자들이 비판을 가했으나 그 중간 과정을 보면 알려진 바와 달리 레닌이 일방적으로 민주적인 의회를 해산했다거나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1] 카자흐스탄의 민족주의 정당, 운동으로 러시아 내전 때 적군에 대항해 싸웠으나 패했다. 그 잔당들은 무려 1930년대까지도 끈질기게 살아남았다고.[2] 아제르바이젠의 범투란주의 정당. 현재는 자유주의 중도 정당이다.[3] 최초의 동트식 비례대표제 선거였다.[4] 독일과의 전선과 달리 여기는 전쟁에서 이기고 있었기에 전쟁 수행에 대한 지속 의지가 상대적으로 높았다.[5] 케렌스키를 지지하는 당내 최우경파인 수호파(defencist)와 볼셰비키를 지지하는 국제파(internationalist) 간의 대립에, 기타 파벌들의 난립 등이 겹쳐 당 중앙위원회와 당대표가 대립하는 파국이 벌어지기까지 했다.[6] 공산주의 혁명을 지지한다면 볼셰비키를, 볼셰비키에는 반대하지만 농본사회주의에는 찬성한다면 사회혁명당 우파를, 아예 사회주의 자체에 반대한다면 입헌민주당을 지지하면 되었기에 정치적 위치가 굉장히 애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