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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2 22:31:20

교향곡 제4번(브루크너)

브루크너의 교향곡
00번 1번 0번 2번 3번
4번
(낭만적)
5번 6번 7번 8번 9번
(미완성)


정식 명칭: 교향곡 제4번 E플랫장조 '낭만적'
(Sinfonie Nr.4 Es-dur "Romantische"/Symphony no.4 in E flat major 'Romantic')
칼 뵘,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973년 11월 녹음
1. 개요2. 곡의 형태3. 초연과 출판4. 판본
4.1. Version I (1874년판)
4.1.1. 1876년판
4.2. Version II (1878/80년판)
4.2.1. 1878년판4.2.2. 1880년판(미출판)4.2.3. 1881년판(하스판)4.2.4. 1886년판(노바크판)
4.3. Version III
4.3.1. 1888년판4.3.2. 1889년판(뢰베판, 구트만판)4.3.3. Version III와 관련된 코스트베트의 주장
4.4. 말러판

1. 개요

안톤 브루크너의 여섯 번째 교향곡. 브루크너 교향곡들 가운데서도 특히 주제가 대중적이며 곡의 짜임새도 매우 뛰어나기 때문에, 교향곡 7번과 함께 브루크너 교향곡 가운데 가장 대중적인 곡으로 꼽히며, 브루크너 교향곡 입문용으로도 널리 쓰일 정도로 유명한 곡이다.

부제는 '낭만적(Romantische)' 인데, 브루크너가 자신의 교향곡에 공식적으로 제목을 붙인 유일한 사례다. 하지만 제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곤란한 면도 있는데, 실제로 초연 때 반바그네리안으로 유명했던 평론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와 막스 칼베크가 떡밥으로 물고 까기도 했다.

작곡 시기는 1874년 1월 2일부터 11월 22일까지로 되어 있지만, 1878~1880년에 대폭 개정되었고 이 개정판을 바탕으로 1881년에 초연되었다.

2. 곡의 형태

브루크너가 교향곡의 중심 조성을 장조로 잡은 최초의 사례인데, 곡의 분위기가 전작들보다는 좀 부드러워졌다는 인상을 준다. 동시대의 낭만적인 음악과는 많이 거리가 있지만, 예전의 브루크너 작품과 비교해 보면 좀 더 감성적인 차원에서 진일보했다는 평가도 수긍할 만하다.

악장 구성은 역시나 4악장이고, ABA 3부 형식의 스케르초 3악장 외에 나머지 악장들에서는 소나타 형식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 곡에서부터 브루크너는 종래의 형식 구조를 잡아늘여 확대한 형태로 응용하고 있는데, 특히 4악장의 구조는 기존 형식론으로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하게 꾸며놓고 있다.

예전 곡들과 달리 바그너 등 다른 작곡가들 뿐 아니라 자작곡에서 인용하는 아이디어는 거의 쓰지 않고 있다. 다만 교향곡 3번 4악장에 나온 바 있는 반음계적 모티브가 이 곡의 1악장에 거의 비슷한 형태로 등장하기는 한다. 대신 4악장에서 선행 악장들의 주제를 회상하는 스킬은 여기서도 나오고 있다. '브루크너 오프닝' 이나 '브루크너 휴지', '브루크너 시퀀스' 같은 독특한 기법도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고, 자작 종교음악의 인용이 없는 대신 금관악기를 선두에 내세운 코랄 스타일의 악상들이 곳곳에서 임팩트를 주고 있다.

관현악 편성은 1881년 하스판과 1886년 노바크판 기준으로 플루트 2/오보에 2/클라리넷 2/바순 2/호른 4/트럼펫 3/트롬본 3/튜바/팀파니/심벌즈/현 5부(제1바이올린-제2바이올린-비올라-첼로-콘트라베이스). 브루크너 교향곡에서 튜바가 쓰인 것은 이 곡이 처음인데, 다만 초판본에는 튜바가 없었으며, 후에 개정하면서 첨가되었다.

3. 초연과 출판

1877년 10월 12일 브루크너가 친구에게 '4번 교향곡은 전면적인 개정이 필요하다'는 편지를 보낸 것으로 보아 늦어도 이 시기부터 개정을 결심한 것으로 추정되고, 2달 후에 전작인 3번의 초연이 대실패로 끝나면서 4번이 초연도 되기 전인 1878년 1월 18일부터 1880년 6월 5일까지 작품을 완전히 갈아엎는 대규모 개작이 행해졌다. 정확히는 1차 개정을 1878년에 마치고 잠깐 쉬고 나서 1879년 11월부터 2차 개정을 한 것인데, 2차 개정 시기에 4악장을 다시 한 번 대폭 개정했다.

후술할 내용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브루크너는 개정 과정에서 다소 복집하고 어수선했던 3, 4악장을 완전히 갈아엎는 등 곡의 윤곽을 거의 새로 쓴 수준으로 말쑥하게 다듬게 되었고, 저음 금관악기인 튜바를 처음으로 추가했다. 그리고 브루크너는 전작들에서 지휘에 서툴렀던 본인이 직접 지휘한 것이 패착이었던 것을 감안해, 4번 초연에는 한스 리히터[1]라는 노련한 지휘자가 공연을 이끌도록 했다. 초연은 1881년 2월 20일 리히터의 지휘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의해 빈에서 성사되었다.

초연 당시에는 3번만큼 대참패는 아니었어도 밍숭맹숭한 반응이었다고 하는데, 상술한 것처럼 반바그네리안들은 여전히 혹평을 했다. 하지만 3번보다는 괜찮다고 받아들이는 소수의 그룹도 있었고, 7번의 성공 뒤에는 연주 횟수도 급등해 지금은 브루크너 교향곡 중 연주 빈도가 가장 높은 교향곡들 중 하나로 등극하고 있다.

출판은 1889년에 빈의 알베르트 구트만 음악출판사에서 성사됐는데, 다만 이 구트만판은 출판 과정에서 엄청나게 무단 개정이 가해졌다고 여겨져 브루크너 협회로부터 무단 개정판으로 간주되었다. 하스와 노바크의 원전판이 나온 뒤로는 채택 빈도도 급격히 떨어졌고, 적어도 2004년까지는 이 판본 이야기만 꺼내도 분노하는 모습을 보이는 브루크네리안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2004년 미국의 음악학 교수인 벤자민 코스트베트(Benjamin Korstvedt, 1963~)가 국제 브루크너 협회를 등에 업고 1889년 구트만판의 존재의 당위성을 제시하면서 브루크네리안들을 당혹하게 만들었지만, 이후 코스트베트의 주장에 대한 재반박 여론도 활발한 상태이다.

4. 판본

4번 교향곡은 브루크너 교향곡 중에서도 가장 빈번하게 개작된 작품에 속하기 때문에 판본 문제가 복잡한 편이다. 그러나 대체로 아래와 같이 세 가지 버전 카테고리로 구별하는 방법이 최근 정착되고 있는 분위기다. 체코의 지휘자 야쿱 흐루샤(Jakub Hrůša)는 세 버전(코스트베트 판본)을 전부 녹음하는 진귀한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4.1. Version I (1874년판)

1982년 9월, 엘리아후 인발 지휘, 프랑크푸르트 방송 교향악단 연주.[2]

브루크너가 최초로 완성한 형태의 교향곡 4번이다. 하지만 미처 연주되기도 전에 개정되면서 작곡가 생전은 물론 이후에도 100년 가까이 외부에 공개되지 못한 비운의 판본이다. 그나마 스케르초는 1909년 12월 12일 아우그스트 괼레리히[3]의 지휘로 린츠에서 연주된 바가 있긴 하지만, 전곡의 모습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완성된 때로부터 무려 100년도 더 넘은 1975년 5월 음악학자 레오폴트 노바크의 편집으로 출판된 후였다. 이후 같은 해 9월 20일 쿠르트 뵈스[4]는 린츠에서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이 판본을 작곡 100년 만에 처음으로 공개 연주했다.[5]

곡의 초기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귀중한 자료지만, 오늘날 자주 연주되는 1878/80년판(Version II)보다 완성도가 확연히 떨어진다는 평가가 대세이기 때문에[6] 오늘날에도 실제 공연에서는 거의 다 1878/80년판인 하스판이나 노바크판이 사용되고 있고, 초판본은 거의 연주되지 않는다. 물론 초판의 개성적이고 날것 그대로의 모습이 담긴 게 은근히 매력적이라며 재평가하는 사람들도 드물게나마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재평가 여론이 활발한 3번 초고와 호불호가 갈리는 편인 8번 초고와 비교하면 악평의 비중이 큰 편이다.

교향곡 4번은 브루크너 교향곡 중 초판과 개정판의 차이가 가장 큰 곡으로 평가받는데, 4번의 초판은 개정판과 아예 다른 곡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다.

4번의 초판과 개정판 사이에서 구조상으로 크게 주목해야 할 차이는 다음과 같다. 4번 교향곡 개정 과정에서 전반적으로 과도하게 많은 대위구와 무거운 오케스트레이션이 간소화되고[7] '브루크너 휴지'도 대폭 삭제되어 투박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느낌이 많이 다듬어진 것은 물론 개정 과정에서 아예 새로 쓴 부분들도 무수히 많기에 여기서는 크게 주목할 만한 수준의 개정만 다룬다.

판본별 악장당 마디 수는 다음과 같다.
초판본 개정판
1악장 630 573
2악장 246 247
3악장 336(주부)[17] + 132(트리오) 259(주부) + 54(트리오)
4악장 616 541

여담으로 4번 초고에는 당시 기준으로는 복잡하다 못해 파격적이다 싶은 리듬들이 많은데, 3악장 트리오는 빠른 3/4박자이나 주제가 두잇단음표로 전개되기에 보통 빠르기의 2/2박자처럼 들리며,[18] 4악장에는 제2주제[19], 제3주제, 코다 후반부에서 다섯잇단음표를 쉽게 들을 수 있다. 4악장 코다 초반부의 현의 반주[20]도 바이올린군이 비올라 이하 현이 연주하는 동일 선율을 반 박자 늦게 연주한다.

그리고 스케르초가 당대 기준으로는 엄청나게 전위적인 구성이다. 주부는 조성상으로는 c단조이지만 주요 주제는 bb단조이고 실질적인 중심 조성도 모호하며, 주요 주제가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면서 전개되는 방식이 아니라 주제 속 두잇단음표 리듬이 변형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21] 그리고 트리오의 중심조성은 Ab장조인데 F장조로 종결되는 것도 특기할 만하다. 물론(?) 당대에는 도저히 받아들여지기 힘든 분위기였던 초판 스케르초의 '너무 멀리 간' 느낌은 간결, 명쾌한 분위기에 고전적인 형식을 유지한 개정판의 '사냥 스케르초'로 일신되었다.

4.1.1. 1876년판

후속작인 교향곡 5번의 초고를 탈고한 직후인 1876년 베를린에서의 연주 준비를 위해 1874년판의 사본에다가 근소한 수정을 거쳤다.

그러나 베를린에서의 연주 계획이 취소되었고 전술한 것처럼 근소한 수정 위주였기 때문에 이 판본은 145년 동안 빛을 보지 못한 채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다가 벤저민 코스트베트의 편집으로 2021년에야 출판되었다.

4.2. Version II (1878/80년판)

실제 공연에 채택되는 악보는 대부분 1878/80년판본이다. 1878/80년판본으로는 하스판(1881년까지의 개정까지 반영)과 노바크판(1886년까지의 개정을 반영)이 있는데, 두 판본 사이의 실질적인 차이는 별로 없다.

이들 악보를 쓰는 지휘자들 중 간혹 뢰베판의 아이디어를 빌어 몇몇 대목을 살짝 수정 또는 첨삭하는 경우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오이겐 요훔이나 에밀 차카로프, 이동호, 카라얀의 두번째 녹음 등에서는 4악장의 76마디에 뢰베판의 심벌즈를 집어넣고 있으며, 카라얀, 스크로바체프스키, 임헌정 등은 1악장 서두에서 뢰베판을 따라 바이올린의 하강 음형을 한 옥타브 높여서 연주하였다.

4.2.1. 1878년판

1874년 초고를 일단 완성했지만 작곡가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여 개정에 착수했다. 후속작인 5번의 초고를 탈고한 직후인 1876년 혹은 1877년에도 근소한 수정이 있던 것으로 추측되지만, 본격적인 개정은 1878년에 이루어졌는데, 상술한 것처럼 1878년 내내 개정 작업을 벌여 곡의 윤곽을 싹 바꾸었다. 1878년 1월부터 9월까지는 1악장과 2악장, 4악장을 전면적으로 개정했고, 12월에는 기존의 3악장을 버리고 아예 새로 3악장을 다시 썼다. 이렇게 1~4악장이 모두 개작되었는데 1~3악장은 현재 연주되고 있는 1878/80년판본을 구성하고 있지만, 4악장은 1880년에 새로 작곡된 버전으로 대체되면서 본곡에서 탈락되었다. 탈락된 1878년의 4악장에는 나중에 '민중의 축제(Volksfest)' 라는 부제를 붙었고, 이 '민중의 축제(Volksfest)'는 1936년에 로베르트 하스 편집으로, 1981년에 노바크 편집으로 간행되었다.[22]

1878년판을 재구성하고 싶다면 현재의 1878/80년판의 1~3악장(특히 1944년 하스판)과 '민중의 축제(Volksfest)'를 결합하면 되기 때문에 1878년판 자체의 전곡 출판본은 비교적 최근에야 윌리엄 캐리건에 의해 편집되었다.

4.2.2. 1880년판(미출판)

1878년에 행한 대규모 개정 후에도 4악장이 성에 안찼는지 1879년 11월부터 1880년 6월까지 4악장을 새로 쓰다시피 개작했다. 이것이 현재 대부분의 연주에서 사용되는 판본(1878/80년판, 특히 하스판과 노바크판)의 프로토타입이라고 할 수 있다. 초연도 이 판본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사실 현행 1878/80년판인 하스판이나 노바크판은 1881년이나 1886년의 작은 개정까지 포함하고 있는데, 이것들이 반영이 되지 않은 순수한 1880년판은 아직까지 편집/출판 작업이 없는 상태다.

4.2.3. 1881년판(하스판)

한스 리히터와 빈 필에 의한 초연을 거친 직후 작곡가가 몇몇 대목을 약간 손본 판본으로, 1936년에 로베르트 하스의 편집으로 출판되었다. 다만 이 개정 작업이 크게 눈에 띄는 변화를 준 것은 아니라서, 1878년과 1880년에 행해진 대규모 개정에 의거해 보통 1878/80년판이라고 부른다.[23]

1881년에 개정한 자필악보는 브루크너가 최만년에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에 직접 기증했기 때문에 하스를 비롯한 다수의 후대 학자들은 브루크너가 최만년에 결정고로 남기고 싶어했던 버전이 바로 1881년판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게오르그 틴트너, 크리스티안 틸레만, 타카시 아사히나 등의 지휘자들이 이 판본으로 녹음하였다.

4.2.4. 1886년판(노바크판)

1886년 이 곡의 미국 초연을 계획하고 있던 지휘자 안톤 자이들에게 브루크너가 직접 보낸 필사보가 1952년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에 발견되었고, 이를 반영하여 1953년에 레오폴드 노바크의 편집으로 출판되었다. 노바크는 1881년 하스판을 1878/80년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자신의 판본이 하스의 판본과 큰 변화가 없다고 생각하여 공식적으로 1886년판이라 하지 않고 1878/80년판이라고 했다.

기본적으로는 하스판(1881년 개정)과 거의 다른 점이 없지만, 마지막 4악장 종결부에서 1악장의 호른 주제를 좀 더 두드러지게 강조하기 위해 호른과 트럼펫 파트에 약간의 변화를 주었다. 클라우디오 아바도, 만프레드 호넥, 세르쥬 첼리비다케, 안드리스 넬슨스 등의 지휘자들이 이 판본으로 녹음하였다.

4.3. Version III

4.3.1. 1888년판

2004년에 벤자민 코스트베트의 편집으로 출판되었다. 1889년판(뢰베판, 구트만판, 개정판)의 자필악보 사진과 실제로 출판된 악보를 대조해서 오기를 찾아내어 바로잡은 것이며, 별도의 새로운 내용이 반영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사실상 1889년판과 완전히 동일한 판본이다.

국제 브루크너 협회 공인의 최종 개정판이지만, 논란이 많다. 자세한 사항은 후술.

4.3.2. 1889년판(뢰베판, 구트만판)

브루크너의 제자였던 지휘자 페르디난트 뢰베, 그리고 (아마도) 역시 제자들이었던 요제프 샬크와 프란츠 샬크가 편집했다고 알려진 악보로, 1889년 9월 구트만 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

큰 틀은 Version II(1878/80년판)을 유지하고 있지만 여러 부분에서 오케스트레이션이 유의미하게 변했고, 일부 삭제가 있다. 제자들이 브루크너의 동의없이 수정한 판본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원전판인 하스판이 간행된 1940년대 이후에는 거의 연주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상술한 것처럼 2004년 벤자민 코스트베트가 이 판본의 출판에 브루크너가 직접 개입한 정황을 들어 이 판본의 정당성을 주장하면서 논란이 불붙었다. 자세한 사항은 후술.

한스 크나퍼츠부슈가 이 판을 사용하여 남긴 녹음이 존재한다.

4.3.3. Version III와 관련된 코스트베트의 주장

이 개정판(Version III)은 브루크너의 제자들이 스승의 음악을 보다 이해하기 쉽게 만들려는 목적으로 브루크너의 동의없이 무단으로 개정을 진행했거나, 혹은 브루크너가 개정 사실을 알았거나 심지어 개정에 소극적으로 참여하긴 했지만, 이는 자신의 든든한 지지자였던 제자들의 강력한 요구에 마지못해서 개정을 허락한 것이며, 브루크너 본인의 의지에 의한 개정은 아니었다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그런데 벤자민 코스트베트가 여기에 반론을 제기하면서 브루크네리안들에게 충격을 선사해 주었다. 즉 Version III의 개정에 브루크너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의지가 반영되었다는 것. 여기에 코스트베트는 2004년 기존의 Version III인 뢰베판(1889년판)의 인쇄 오류를 교정한 1888년판을 내놓았다.

코스트베트는 국제 브루크너 협회의 초기 편집자였던 하스가 세간의 평과 달리 이 뢰베판의 신개정판을 준비했었고, 그 동안 하스의 브루크너 전기에 게재된 이 곡의 최종 결정고(Stichvorlage) 사진판(원본은 소실됨) 표지의 연도 계산이 잘못되어 혼란을 야기시켰다고 설명하고 있다. 코스트베트는 최종 결정고의 사진판과 뢰베판(구트만판)을 면밀히 대조했고, 초판본의 세세한 편집상 오류를 수정한 새로운 판본을 2004년에 국제 브루크너 협회의 승인 하에 출판했다.

코스트베트는 악기 편성에서도 종전에 뢰베의 개찬이라고 여겨진 제3플루트의 추가(3~4악장의 피콜로도 제3플루트 주자가 겸함)나 4악장의 심벌즈 추가도 브루크너의 의도였던 것으로 밝혀져 그대로 들어갔고, 가장 논란이 되어온 3악장 스케르초와 트리오 사이의 새로운 이행부나 스케르초 다 카포의 후반부 일부 삭제[24], 4악장 중반부의 일부 삭제 역시 브루크너 자신의 아이디어로 판명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코스트베트의 연구에 대해서 재반론도 여기저기서 제기되고 있다. 우선 1888년 판본에 브루크너의 서명이 없다는 점을 드는 이들이 있다. 또한 당시 브루크너가 자기 악보를 출판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제자들과 출판사의 입맛을 맞춰줄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개정이 브루크너 자신의 승인하에 이루어졌다고 해도, 브루크너가 주변인들의 압력과 비평을 너무 의식해 필요 이상의 자아비판식 개정을 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브루크너가 만년에 빈 국립 도서관에 기증한 자필악보가 Version III이 아닌 1878/1880년판(Version II)이라는 점도 여전히 코스트베트의 주장을 비판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하스가 개정을 시도했기 때문에 공식 개정판이라고 주장한 것에 대해서도 역시 비판이 나오고 있다. 최초로 원전판을 편찬한 하스는 학문적 엄밀함보다는 브루크너의 정신에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취지로 하나의 단일한 베스트 버전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원전판을 편찬했다. 때문에 일부 교향곡에서는 다른 시기에 형성된 판본들을 섞어 편집하였는데, 하스의 이러한 편집 방침은 이후의 음악학자들이 하스의 작업을 비학문적 개정이라고 비판하게 되는 단초를 제공한 바 있다. 이러한 점을 들어 코스트베트의 의견을 논박하는 이들은, 하스가 굳이 뢰베판을 건드린 것도 그가 1번과 8번 등에서 행한 것과 마찬가지로 1889년판에도 브루크너의 정신이 깃들어 있었을 거라고 추측해 다른 판본을 개정하면서 이 판본도 일부 끌어와 자신의 주관을 편집에 투영하려고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코스트베트 본인이 과거에 하스를 가열차게 비난했던 장본인이었다.

음악적인 견지에서 비판하는 이들은 Version III에서 나타나는 빈번한 셈여림 변화 등의 오케스트레이션과 전체 구조의 불균형이 브루크너 고유의 스타일과 명백히 다르다는 점을 들고 있다. 아울러 1888년판의 출판은 하스판과 노바크판으로 구별되는 대규모 원전판 출판 작업 이후 존재 가치가 없어진 국제 브루크너 협회가 해산 위기에 처하자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어거지로 만들어낸 어처구니없는 헛수고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가해지고 있다.

또한 코스트베트의 1888년판이 기존의 1889년판(뢰베판)의 자필고 사진과 출판본을 대조하여 오기를 수정한 것에 불과하지만, 마치 새로운 내용이 반영된 판본인 양 1888년판이라고 출판하여 로열티 장사를 해먹는 작태에 대해서도 비판도 가해지고 있다. 그동안 브루크너 교향곡의 비판교정 작업에서는 곡의 구조가 달라질 정도의 유의미한 개정이 있을 때만 연도를 달리하여 구분했다. 예를 들어 브루크너 교향곡 4번의 1878/80년판의 경우, 1881년과 1886년에 작곡가에 의한 추가적인 사소한 수정이 있었고, 이것을 나중에 하스와 노바크가 각각 자신들의 원전판 편집 작업에 반영했다. 그러나 이것은 유의미한 개정이 아니기 때문에 하스판과 노바크는 자신들의 판본에 새로운 연도를 붙이지 않고 기존과 같이 1878/80년판이라고 했다. 때문에 코스트베트가 고작 자필고 사진과 출판된 악보를 대조하여 오기를 수정한 것으로 새로운 연도를 붙여 판본을 발행한 것은 그간의 편집 원칙과 전통에 위배되는 것이다. 코스트베트판과 뢰베판(구트만판)이 실질적인 차이가 없기 때문에 최근에는 이 둘을 묶어 1888/89년판이라고 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코스트베트의 1888년 악보가 출판된지 10여년이 지난 현재도 이 판본을 택한 지휘자 혹은 관현악단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2005년에 이 판본을 나이토 아키라의 지휘로 초연한 도쿄 뉴 시티 오케스트라는 아마추어 악단이라는 이유로 차치하더라도, 미네소타 관현악단의 상임 지휘자 오스모 벤스케,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 프란츠 벨저-뫼스트 등 주로 코스트베트와 동향인 미국 악단이 주축이 된 리바이벌 작업을 제외하면 유럽에서는 아직까지는 1888년 판본을 이용한 경우는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륙이나 지역, 국가를 막론하고 전세계적으로 사실상 모든 공연과 녹음에서는 기존의 하스판이나 노바크판이 사용되고 있다. 코스트베트판의 사용이 아직 더딘 이유가 베토벤 교향곡의 조너선 델 마 판본 같은 신판들처럼 비싼 로열티 문제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코스트베트판과 실질적으로 동일한 판본인 뢰베판(1889년판)은 출판 후 100년이 넘어 저작권저작인접권이 소멸되었지만 이 판본을 이용한 연주도 적기 때문에 이러한 지적은 타당성이 떨어진다.

4.4. 말러판

말러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정기연주회를 위해 손 본 악보가 있다. 당시에 유일하게 출판되어 있는 악보인 뢰베판을 바탕으로 추가로 오케스트레이션을 손 보고 3악장 스케르초 다 카포의 후반부를 더 덜어내는 등의 삭제도 있다.

이 말러판은 말러 자신이 소장한 지휘자용 총보는 남아 있지 않지만, 악단 단원들이 보는 개별 파트보가 이 곡을 직접 연주했던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소장되어 있어[25] 1984년에 러시아 지휘자 겐나디 로제스트벤스키가 파트보를 모아서 총보로 재구성한 뒤 소련 문화성 교향악단을 지휘해 소련 국영 음반사인 멜로디야에 녹음했다.[26]

이 판본은 말러가 자신의 책임하에 열린 음악회를 위해 개작된 것이며, 베토벤, 슈만 등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들도 마찬가지로 말러가 오케스트레이션을 손 보고 연주한 바 있다. 어쨌거나 작곡가의 작품이 현대적인 오케스트라에 맞게 청중들에게 더욱 잘 받아들여지기 위한 의도로 만들어진 악보이겠지만, 말러의 성향이 브루크너와 차이가 있는 작곡가이기 때문에 이 판본은 흥미거리 이상의 관심을 받지는 못하고 있으며 거의 연주되는 일도 없다.

기본적으로 말러가 브루크너와는 성향이 매우 다른 작곡가이기 때문에 말러의 개작은 좋지 못한 평을 받고 있으며, 개악이라는 비판도 많다. 여러 브루크네리안들 사이에서 이 판본은 '구스타프 말러라는 한 개인에 의한 사적인 판본이므로 흥미 거리 이외에는 언급될 가치가 없는 판본에 불과하다'고 비판받고 있으며, 말러가 비슷한 논리로 대폭 개작한 로베르트 슈만의 교향곡 전곡 악보를 출판한 바 있는 국제 말러 협회에서도 아직 출판 계획을 세우지 않고 있다. [27]

[1] 호른 주자로 시작해 지휘자로 전직한 인물로, 바그너 오페라의 탁월한 해석가로 유명했다. 물론 바그너만 판 건 아니었고, 바그너와 대립 기믹이었던 브람스의 교향곡도 자주 다루었다. 훗날 영국으로 건너가 할레 관현악단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등을 지휘하면서 당시에는 무명이었던 엘가의 작품을 과감히 무대에 올려 성공시킨 명지휘자로도 기록되고 있다.[2] 최초의 브루크너 4번 초고의 음반 녹음이다. 여담으로 인발은 3번과 8번의 초고도 최초로 음반으로 녹음했다.[3] August Göllerich, 1859~1923, 오스트리아의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 브루크너에게서 작곡을, 프란츠 리스트로부터 피아노를 배웠으며, 1896년부터 1923년까지 린츠 무지크페라인의 상임 지휘자를 역임했다. 브루크너의 승인 하에 브루크너에 대한 '권위 있는' 전기를 썼고, 그 과정에서 브루크너를 '신의 음악가'로 일컬었다.[4] Kurt Wöss, 1914~1987, 오스트리아의 지휘자이자 음악학자. 여담으로 뵈스는 브루크너 4번의 초고를 초연한 1년 후인 1976년 10월 16일 내한하여 로엔그린의 국내 초연을 지휘한 기록도 세웠다.[5] 여담으로 이 연주는 방송용 녹음으로 남아 후에 음반으로 발매된 것은 물론 유튜브에서도 찾아 들을 수 있다. 브루크너 4번 초고 세계 초연[6] 특히 교체된 스케르초와 피날레는 '브루크너가 갈아엎을 만했다'는 취지의 평이 절대다수에 괴작 취급까지 받고 있다. 대체로 스케르초에 대한 악평이 많은 편. 사실 3악장은 어찌어찌 넘어가더라도 4악장이 심하게 조잡한 것은 사실이긴 하다. 심지어 몇몇 브루크네리안들은 이 판본을 습작 취급하거나 아예 브루크너의 교향곡 중에서도 가장 완성도가 떨어지는 판본이라고 평가하기도 하는데, 일례로 게오르크 틴트너는 말년에 낙소스에서 브루크너 교향곡 전곡의 녹음을 남긴 지휘자 1번2번, 3번, 8번에서는 초판을 택해 녹음했지만 교향곡 제4번에 한해서만 1874년판이 너무 난삽하고 응집력이 떨어진다고 판단하여 하스판을 택했다고 한다.[7] 특히 1악장 제2주제 부분에서 크게 드러난다. 초판에서는 주선율을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오케스트레이션이 무겁고 대위구가 굉장히 난잡한 데 비해, 개정판에서는 지나치게 무거운 음향이 매우 깔끔하게 정리되어 주선율이 명확하게 들리게 되었다. 2악장에서 제1주제가 2번째로 나타나는 부분의 두터운 오케스트레이션도 대폭 간소화되었다.[8] 당연히 재현부에서 제3주제가 재현되는 부분도 완전히 새로 써졌다.[9] 초고에서는 개정판에서의 발전부 후반 파트 이후에 개별 파트가 따로 있었는데, 악장 전체와 다소 동떨어진 느낌을 준다.[10] 이 곡에서는 개정 후에 원형이 가장 잘 유지된 경우에 속한다.[11] 이 때문에 초판에서는 2마디의 주제였던 것이 1878/1880년판에서는 4마디 주제가 되었다.[12] 특히 굉장히 화려하고 복잡했던 제1바이올린의 움직임이 간소화되었다.[13] 브루크너가 교향곡 개정 과정에서 악장 전체를 아예 바꾼 유일한 사례인데, 후술할 4악장도 사실상 재작곡 수준의 개정을 거쳤어도 기본 주제의 틀은 그대로 두었다.[14] 호른으로 주부가 시작한다는 것과 트리오 주제가 4도 도약으로 시작한다는 것 외에는 공통점이 전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여담으로 초고 스케르초의 주부 주제는 bb단조이나 개정판 스케르초인 '사냥 스케르초'의 주부 주제는 bb장조이다.[15] 제1주제는 전체휴지 1마디를 뺀 것을 제외하면 사실상 차이가 없다. 그러나 제2주제(개정판 기준 제2악절)에서 자주 나왔던 다섯잇단음표들은 죄다 브루크너 리듬(8분음표 2개+8분음표 셋잇단음표)으로 교체되었으며, 제2악절 이전에 현 중심의 제1악절이 추가되었다. 그리고 코데타 주제는 유심히 듣지 않으면 같은 모티브로 만들었다는 것을 알아채기 힘들 정도로 크게 변경되었다.[16] 다만 개정판 4악장의 발전부에서 중초반부(제2주제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와 종결부는 초고와 유사하다.[17] 반복될 때 별개의 코다(26마디)가 따로 붙었다.[18] 두잇단음표 자체는 3/4박자인 스케르초 주부에도 자주 나온다. 그나마 스케르초 주부는 트리오처럼 들리는 박자와 실제 박자 사이의 혼선(?)은 없다.[19] 대위구에도 3개 이상의 폴리리듬이 반영되어 있다.[20] 미사 제3번 크레도 중반 'et resurrexit'의 현의 반주를 인용한 것이다.[21] 주요 주제는 주부 사이사이마다 신호처럼 나온다.[22] 곡 자체는 1874년판과 1880/1886년판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23] 다만 하스는 1944년에 다시 재출판했는데, 1944년 악보에서는 3악장 트리오 도입부의 목관악기 구성을 1878년판을 따랐다.[24] 뢰베판을 주로 사용했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경우, 활동 후반기에 이 스케르초 다 카포 후반부 삭제가 3악장 전체의 균형을 깨뜨렸다고 여겼는지 삭제된 부분을 되살려 공연했다.[25] 반면 교향곡 6번의 말러판(전곡 초연에 사용된 버전이었다)은 총보, 파트보 모두 남아있지 않다.[26] 그 후 말러판 녹음을 시도한 지휘자는 2022년 기준으로도 슬로베니아의 지휘자 안톤 나누트(Anton Nanut, 1932~2017) 한 명밖에 없다.[27] 다만 말러는 누구보다도 브루크너의 열렬한 팬이었으며 브루크너 곡의 가치를 알고 청중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개작을 진행하였는데, 실제로 말러의 무단 개작에 의해 진행된 공연은 나름 성공적이었다고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무단 개작이라는 오명이 묻혀서는 절대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