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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0 08:16:40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

서양 음악사의 주요 인물·기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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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30E0A>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
Claudio Monteverdi
파일:몬테베르디.jpg
베르나르도 스트로치 작 (1640 즈음)
<colcolor=#fff> 출생 1567년 5월 9일
신성 로마 제국 밀라노 공국 크레모나
사망 1643년 11월 29일 (향년 76세)
베네치아 공화국 베네치아
직업 작곡가
사조 르네상스, 바로크 음악
종교 가톨릭
서명 파일:몬테 2.png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마드리갈 5집과 오르페오2.3. 베네치아에 정착2.4. 말년
3. 작품
3.1. 세속 마드리갈 곡집
3.1.1. 5집3.1.2. 8집
3.2. 오페라
3.2.1. 오르페오3.2.2. 아리안나3.2.3. 포페아의 대관식
3.3. 종교음악3.4. 작품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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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감정을 뒤흔드는 몬테베르디는 ... 인간 정신을 다스리는 가장 좋은 폭군이 된다.
아퀼리노 코피니(Aquilino Coppini), 『 Musica tolta da i madrigali di Claudio Monteverde(1607)』 中
오페라 '포페아의 대관' 중 '오, 당신을 보고'

1. 개요

르네상스 후기와 바로크 초기에 활약했던 음악가로서 당대뿐만 아니라 유럽 음악사 전체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널리 쓰이는 표현은 아니지만 '오페라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한다.

그는 당대의 가장 진취적인 작곡가 중 한명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바로크 음악, 특히 오페라의 개척자로 유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기존의 중세나 르네상스 양식을 무시하거나 버리지 않고 그 장점을 절묘하게 취했기 때문에 그의 작품에는 다성음악으로 대표되는 르네상스 양식과 통주저음으로 대표되는 바로크 양식이 공존하고 있으며 작곡된 시기별로 양식의 변화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한마디로 전통과 혁신이 훌륭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음악가로 볼 수 있다.

현존하는 3개의 오페라를 비롯하여 그가 남긴 많은 작품들은 400여년이 지난 현재에도 연주자들의 중요한 레파토리로 자리잡고 있다.

2. 생애

2.1. 초기

몬테베르디는 1567년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 지역의 크레모나(Cremona)시에서 5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발타자르 몬테베르디(Baldassare Monteverdi)는 약초상이자 종종 수술도 했던 아마추어 의사였다. 어머니 막달레나는 몬테베르디가 아홉살 때 죽었고 새어머니는 열여섯 때 죽었으며 이듬해에 두번째 새어머니를 보게 된다. 집안사정이 괜찮았던 그는 당시 크레모나 성당의 악장(maestro di cappella)으로 있던 마르크 안토니오 인제네리(Marc' Antonio Ingegneri)에게 음악을 배우는 한편 크레모나에 있던 대학에서도 공부를 했다.[1]

어렸을 때부터 연주와 작곡에 재능을 보였던 그는 이미 15세 때인 1582년에 모테트와 종교 마드리갈로 구성된 교회합창곡집을 출판하였고 이듬해에도 교회합창곡집을 출판하였다. 1584년에는 세속 가곡집인 3성의 칸초네타(Canzonetta)를 출판했는데, 소년작곡가로 나름 지역에서 유명해진 그는 이 시기를 전후하여 전업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20세가 되던 1587년에는 최초의 중요한 작품집인 세속마드리갈 1집이 출판되었다. 이 때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음악가로서 안정적인 직장을 찾기 위해 구직활동을 한 것 같은데, 1589년에는 밀라노에 가서 일자리를 구하려고 했다가 실패하기도 했다.

그러던 1590년 몬테베르디는 드디어 만토바 공국의 공작인 빈첸초 1세 곤차가(Vincenzo I Gonzaga)의 궁정에 가수이자 비올주자로 취직되었다. 빈첸초 1세 곤차가는 음악에 관심이 많은 사람으로 당시 만토바가 작은 공국이었음에도 상당한 규모의 악단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몬테베르디 입장에서는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펼치기 알맞은 곳이었다. 다만 월급이 너무 적어서 당시 기준으로도 심한 박봉이었는데, 그래도 그는 만토바의 음악환경에 만족했는지 빈첸초 1세 곤차가가 죽을 때까지 22년 가까이 이 곳에서 일했다.[2]

2.2. 마드리갈 5집과 오르페오

만토바 궁정에 취직한 몬테베르디는 능력을 인정받아 곧 지휘자가 되었으며 1592년에는 세속마드리갈 2집을 출판했다. 1599년에는 만토바 궁정의 여가수였던 클라우디아 카타네오(Claudia Cattaneo)와 결혼했으며 둘 사이에 2남 1녀가 생겼다.[3]1602년에는 능력과 성실성을 인장받아 악장으로 취임하였다.
1600년대 초반은 그의 음악의 중요한 전환기가 되었는데, 1605년에 출판된 그의 마드리갈 5집에서 르네상스식 폴리포니(Polyphony)양식 대신 바로크를 예견하는 음악수법을 본격적으로 도입한다. 자세한 것은 아래 작품 항목 참조.

한편 1600년에 몬테베르디는 빈첸초 1세 곤차가가 프랑스 국왕 앙리 4세메디치 가문의 마리아(Maria di Medici)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플랑드르로 떠날 때 그과 함께 플랑드르벨기에 지역을 여행하였다. 이 때 빈첸초 1세 곤차가는 결혼식 연회에서 야코포 페리(Jacopo Peri)의 악극인 에우리디체(Euridice)를 보았는데, 그는 자신의 궁정에서도 이 새로운 음악장르를 공연해보겠다는 생각을 품고 만토바로 돌아간다. 원래 연극에 관심이 많았던 빈첸초 1세 곤차가는 플랑드르 이전부터 몬테베르디에게 종종 연극이나 발레등의 공연에 사용할 음악을 맡겼는데, 몬테베르디는 여기서 얻은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1607년에 본인 최초의 악극을 만토바 축제기간에 상연하였다. 이 악극이 바로 오페라의 실질적인 효시로 인정받고 있는 명작 오르페오(L'Orfeo)인데 자세한 것은 역시 아래 작품 항목을 참조하기 바란다. 이 오르페오는 초연에서 절찬을 받았으며 이후 숱한 모방작을 낳았다. 그는 이 오르페오의 성공에 고무되어 이듬해에 두 번째 오페라 아리안나(L’Arianna)를 작곡하여 역시 큰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하필 이 기념비적인 작품이 상연되던 1607년에 자신의 아내 클라우디아가 사망하였다(사망 이유는 불명확하다). 크게 상심한 몬테베르디는 그 충격 탓인지 이 시기부터 평생 고질병으로 따라다닌 편두통이 생겼다. 게다가 좁은 만토바에 머물러 있기에는 이미 그의 명성과 눈높이가 너무 높아져 있었음에도 경제적으로는 계속 쪼들렸는데, 악장이 되어도 박봉을 면하지 못한데다 그나마도 제때 월급을 주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1610년 몬테베르디는 휴가 기간에 몰래 로마를 방문하여 당시 교황 바오로 5세를 만나 자신이 작곡한 성처녀의 저녁 기도(Vespro della Beata Vergine) 등을 연주할 기회를 얻으려고 했다. 그는 이렇게 교황의 환심을 산 후 자신과 자기 맏아들 프란체스코의 취직을 부탁하려고 했는데, 바오로 5세와의 만남이 성사되지 않는 바람에 결국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다.

2.3. 베네치아에 정착

1612년 음악 애호가 빈첸초 1세 곤차가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프란체스코 4세 곤차가(Francesco IV Gonzaga)가 즉위하였다. 프란체스코는 아버지와 달리 음악에 큰 관심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아버지가 예술에 투자한다고 많은 돈을 낭비한 탓에 즉위 당시에 상당한 재정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그는 즉위하자마자 몬테베르디를 비롯한 궁정 음악가들을 대거 해고했는데, 22년이나 가문에 봉사한 몬테베르디에게 두둑한 위로금이나 퇴직금은 고사하고 여비수준도 안되는 푼돈만 주고 내쫓았다. 갑자기 직장을 잃은 그는 거의 1년 가까이 일정한 수입이 없이 악보를 팔거나 일용직을 전전하면서 만토바에서 구직활동을 해야 했다.

다행히 이듬해인 1613년 베네치아산 마르코 대성당에서 자신들의 성가대와 연주자들의 기강을 잡고 능력을 향상시켜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성당의 전임 악장이었던 줄리오 마르티넹고(Giulio Cesare Martinengo)는 몸이 약해서 제대로 교육과 연주활동을 하지 못했으며 재정운영도 방만하게 한데다 횡령까지 저질렀기 때문에 성가대와 연주자들의 기강이나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다. 당시 베네치아에서는 몬테베르디의 명성이 상당히 높았기 때문에 성당 관계자들은 후임 악장으로 당시 실직상태인 그를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드디어 병약한 마르티넹고가 저 세상으로 가자 이구동성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많은 기대를 받고 후임 악장으로 부임한 몬테베르디는 기대치에 걸맞게 충실하게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이에 성 마르코 성당 소속 음악가들의 음악수준은 금세 몇단계 뛰어 올랐다. 몬테베르디 입장에서도 성 마르코 성당 악장직은 만토바 시절보다 훨씬 급여가 높고 제때 지급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인 취급을 받던 만토바와 달리 1급의 음악가로 존경받았기 때문에 여러모로 만족스러웠다. 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이 악장직을 유지하였다.

이처럼 새로운 직장에서 정신적, 경제적 안정을 찾은 몬테베르디는 베네치아에서 직업에 걸맞게 많은 종교음악을 작곡하였다. 또한 그를 내쫓은 만토바에서 주기적으로 오페라를 작곡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으며 이외에도 여러 곳에서 발레음악이나 행사 음악등의 의뢰를 받았다.[4] 한동안 중단되었던 마드리갈집 출판도 재개되어서 세속 마드리갈 6집(1614), 7집(1619)이 출판되었다.

2.4. 말년

이처럼 몬테베르디는 베네치아에서 바쁘면서도 행복한 삶을 살았으나, 1631년 베네치아에 페스트가 창궐하게 되고 이 와중에 산 마르코 성당의 성가대로 활동하고 있던 맏아들 프란체스코를 전염병으로 잃는다. 이 때의 충격 때문인지 그는 한동안 작곡과 악장으로서의 활동을 중단하였으며 이듬해인 1632년 사제 서품을 받고 정식 성직자가 된다. 당시 그는 이미 60을 한참 넘긴 나이인데다 아들을 잃은 충격 때문에 건강을 해쳐서 자주 앓아 누웠는데, 다행히 창작활동을 완전히 중단하지는 않아서 이후에도 중요한 작품들을 남겼다.

1634년에는 자신의 작곡 방법과 음악철학에 대해 서술한 저서 멜로디아(melodia)가 간행되었는데 이 저서는 오늘날 전해지지 않는다. 1638년에는 세속 마드리갈 7집이 출판된지 거의 20년만에 8집이 출판되었는데 '전쟁과 사랑의 마드리갈(Madrigali guerrieri, et amorosi)'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으며, 몬테베르디 특유의 소위 격앙양식(stile concitato, agitated style)으로 작곡되었으며(자세한 것은 아래 작품 항목 참조),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3세에게 헌정되었다.[5]

1637년 몬테베르디가 살고 있는 베네치아에 유럽 최초의 대중 오페라극장인 산 카시아노(San Cassiano)가 건립되었다. 그간 오페라는 주로 귀족과 부자들을 위한 여흥거리였지만 이 오페라극장의 건립으로 일반 시민들도 당대의 고급문화인 오페라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 몬테베르디 역시 이 극장에서 상연을 위한 작품을 여럿 남겼는데, 1639년 베네치아 축제 기간에 오페라 오딧세이의 귀향( Il ritorno d'Ulisse in patria)이 상연되었고 그가 사망하기 1년 전인 1642년에는 오르페오 못지 않게 음악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오페라 포페아의 대관식(L'incoronazione di Poppea)이 상연되었다.

1643년 11월, 향년 76세를 일기로 사망하였으며 유해는 베네치아에서 가장 큰 성당인 프라리(Frari) 성당에 안치되었다.

3. 작품

그는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장수한 나이인 76세까지 살았으며 사망하기 직전까지도 작품을 썼기 때문에 다방면에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이 중에서도 오늘날까지 유명하고 중요하게 여겨지는 작품은 역시 9편의 마드리갈곡집과 현존하는 3개의 오페라이다. 이 외에 종교음악도 많이 남겼는데 이 중 전술한 '성처녀의 저녁기도'는 오늘날에도 자주 연주되는 걸작이다.

3.1. 세속 마드리갈 곡집

몬테베르디의 9편의 마드리갈곡집은 베토벤의 32개의 피아노 소나타에 비견할 수 있는데, 음악가로 활동을 시작할 때부터 죽기 직전까지 일생동안 씌어졌다는 점(중간에 종종 공백기가 있긴 했지만)과 작곡가의 시기별 음악성향과 변화양상을 파악할 수 있는 점 등에서 공통점이 있다. 이 마드리갈 곡집은 음악사료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작품성 자체도 매우 뛰어나서 제대로만 연주하면 오늘날에도 시대의 격차를 느끼기 힘들 정도이다.


재즈적 요소를 가미해 현대적으로 편곡된 버전의 마드리갈 SV.316을 한 번 들어보자. (원곡도 흥겨운 리듬이 반복되지만 당연히 이렇게 현대적 화성으로 작곡되어있지 않다.) 듣고 있으면 재즈를 듣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50초부터는 청중들도 웃기 시작한다.
마드리갈 1집(1587)
마드리갈 2집(1590)
마드리갈 3집(1592)
마드리갈 4집(1603)
마드리갈 5집(1605) 최초로 기악반주가 포함된다.
마드리갈 6집(1614)
마드리갈 7집(1619) 콘체르토(Concerto)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마드리갈 8집(1638) 전쟁과 사랑의 마드리갈( Madrigali guerrieri, et amorosi)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마드리갈 9집(1651) 몬테베르디 사후 그의 작품을 모아 출판된 유고집이다.

이중 가장 눈여겨봐야할 곡집은 5집과 8집이다.

몬테베르디의 마드리갈 4집이 출판된 후 당시 작곡가이자 음악이론가였던 조반니 아르투지(Giovanni Artusi)는 이 4집이 기계적인 대위법으로 작곡된 무미건조한 작품이라고 비판했다. 기본적으로 아르투시는 기쁨, 슬픔, 탄식, 놀라움 등의 감정을 다양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대위법적인 규칙을 고수하기 보다는 파격적인 전개가 필요하다고 역설한 이론가였기 때문에 이와 같은 비판을 가한 것인데[6] 이 비판이 나름 몬테베르디에게는 자극이 되었다. 그는 이 비판을 상당히 의식했는지 이후 출판된 세속마드리갈 5집의 서문에 자신의 작곡취지를 자세히 설명하면서 아르투시의 비판에 대한 일종의 답문을 작성하였다.

이 5집은 2부로 나누어져 있는데, 1부는 대위법을 엄격하게 준수하고 다섯 성부 각각에 동등한 비중을 두는 전통적인 르네상스 다성양식으로 작곡하였고 2부는 좀더 극적인 표현을 위해 대위법적인 속박에서 벗어나 있으며 5성부 가운데 소프라노와 베이스파트에 높은 비중을 두어 주 선율의 전달이 용이하도록 처리하였다. 또한 하프시코드, 저음 현악기와 오르간으로 구성된, 이후 바로크 시대를 지배한 콘티누오 반주가 마드리갈 최초로 등장한다.

이와 같은 파격은 몬테베르디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아르투시의 철학에 맞추어 음악을 만들 수도 있다는 자신의 능력을 뽐내려는 의도로 시도한 것이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시도는 음악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성취가 되었다. 몬테베르디 본인도 이 실험에 만족했는지 6집부터는 이 새로운 작법을 적극 활용하였다.

3.1.1. 5집

백문이 불여일청, 마드리갈 5집 1부에 속한 Cruda Amarilli와 2부에 속한 Ahi, come un vago sol을 비교해서 들어보자. 얼핏 들으면 차이가 잘 느껴지지 않겠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Cruda Amarilli는 대위법에 의거하여 각 성부에 거의 동등한 비중을 두고 있기 때문에 주선율을 파악하기 어렵고 성부간의 조화에 주력하고 있어서 가사도 명확하게 들리지 않는다. 반면 Ahi, come un vago sol에서는 상대적으로 주선율이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으며 가사와 감정을 확실하게 전달하기 위해 좀더 레치타티보(recitativo)에 가깝게 진행된다. 한편으로 후자에는 통주저음 반주가 추가되어 있다.


||

3.1.2. 8집

전쟁과 사랑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마드리갈 8집은 5집처럼 2부로 나누어 1부는 전쟁, 2부는 사랑을 주제로 한 작품을 수록하였다. 특히 이 작품은 몬테베르디 스스로 창안한 격앙양식(stile concitato)이 제대로 드러나고 있는데, 이 곡집의 긴 서문에서 이 격앙양식에 대한 철학과 실제 음악으로 구현하는 방법에 대해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7]

이 격앙양식에 대해 간략하게만 서술하면 몬테베르디는 음악적 표현 방법을 격앙양식(Stile concitato), 온화한 양식(Stile temperato), 부드러운 양식(Stile molle) 셋으로 나누면서 지금까지 음악에서 격앙양식이 사용되지 않았는데, 인간의 분노, 격정, 공포, 놀라움 등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이 격앙양식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구체적으로 '격앙된' 감정은 1개의 온음표(semibrevis)를 16분음표(semiquaver)로 나누어 연속적으로 진행시키면서 격앙된 감정을 드러내는 가사와 결합할 때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될 수 있다고 하였다.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다면 다음 곡을 들어보자. 8집 1부에 수록된 탄크레디와 클로린다의 싸움(Il Combattimento di Tancredi e Clorinda)의 일부분인데 후반부, 특히 6분 30초 이후부터 16분음표로 나누어진 같은 음정을 반복시켜서 격정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격앙양식의 기법이 제대로 드러난다.

3.2. 오페라

기록상으로 몬테베르디가 작곡한 오페라로 이름이 전해지는 작품은 미완성작을 포함 9개이다. 이 중 현재 악보가 온전히 전해지는 작품은 3개뿐이며 오페라 아리안나는 아리아 하나만 남아 있다. 하필 최초의 작품과 최후의 작품군만 남아 있고 중간에 작곡된 작품들이 모두 소실된 탓에 그의 오페라에 나타나는 양식상의 변화나 발전과정을 제대로 연구할수가 없게 되었는데,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현존하는 오페라

오르페오(L'Orfeo, 1607)
아리안나(L'Arianna, 1608) - 유일하게 아리아 아리안나의 탄식(Lamento di Arianna)만 남아 있다.[8]
오딧세이의 귀환(Il ritorno d'Ulisse in patria, 1639-1640)
포페아의 대관식(L'incoronazione di Poppea, 1642)

실전된 오페라[9]

테티스의 결혼(Le nozze di Tetide, Mantua, 1616–17)
안드로메다(Andromeda, Mantua, 1618–20)
리코리의 바보 흉내(La finta pazza Licori, Mantua, 1627–28)
버려진 아르미다(Armida abbandonata, Mantua, 1627–28)
프로세피나의 겁탈(Proserpina rapita, Venice, 1630)[10]
에네아스와 라비니아의 결혼(Le nozze d'Enea con Lavinia, Venice, 1641)

3.2.1. 오르페오

3.2.2. 아리안나

1608년에 몬테베르디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리아드네의 이야기에 기초한 또 하나의 오페라인 아리안나(Arianna)를 썼다.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모든 관중들이 이 작품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하는데, 너무나 불행히도 이 오페라는 거의 소실되었다. 이 작품의 단편으로 남아있는 것은 《애가》(Lamento)이다. 훗날 몬테베르디가 이 곡을 5성 마드리갈로 편곡했으니 그가 이곡에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3.2.3. 포페아의 대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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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종교음악


몬테베르디는 생애 후반부에 성당 악장으로 재직했기 때문에 다수의 미사, 모테트, 마니피카트, 종교 마드리갈 등의 종교음악을 남겼다.[11] 그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종교음악도 르네상스 다성양식과 단선율/통주저음의 바로크양식이 모두 드러나고 있다.

그의 종교음악 중 가장 유명한 것이 1610년에 작곡한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저녁기도이다. 대단히 규모가 큰 작품으로 연주시간이 대략 90분이나 되고 편성도 엄청나게 커서 몇몇 곡은 성악 파트가 10성부, 기악파트가 7성부로 나누어지기도 한다. 작품의 구성은 서주 후에 모테트과 시편송(Psalm)이 번갈아가면서 낭창되다가 2부로 구성된 마니피카트로 끝을 맺는다.[12]

몬테베르디가 이 작품을 작곡한 동기는 아직까지 확실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며 생전에 실제로 연주되었는지도 불확실하다. 대략적인 견해는 구직할 때 일종의 오디션을 받기 위해 쓴 작품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은 1610년 베네치아에서 출판되었는데, 이 당시 몬테베르디는 만토바를 벗어나기 위해 로마/베네치아/피렌체 등지에 지원서를 보내면서 구직활동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때 실제로 연주할 목적보다는 구인 담당자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과시할 목적으로 이 동정 마리아의 저녁기도를 작곡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규모를 가진 작품이 되었다는 것이다.
참고로 몬테베르디는 이런 역작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당장 취직자리를 얻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 작품이 남긴 인상 덕분인지 3년 후에 베네치아에서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3.4. 작품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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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크레모나 성당의 성가대나 연주자 명단에는 몬테베르디의 이름이 없다. 따라서 그는 성당에서 정식 교육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인제네리에게 개인 수업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2] 많은 음악가들처럼 그도 작품을 출판하거나 개인교습, 연주 알바 등으로 부수입을 올렸다.[3] 딸을 하나 더 낳았는데 이름을 짓기도 전에 사망했다.[4] 이 시기에 그가 작곡한 오페라는 후술하다시피 모두 실전되었고 다른 작품들도 대부분 전해지지 않는다. 그나마 이 시기의 음악으로 발레극 (티르시와 클로리 Tirsi et Clori, 1616)와 소(小) 오라토리오 탄크레디와 클로린다의 싸움(Il combattimento di Tancredi et Clorinda,1624) 두 작품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데, 두 작품의 높은 완성도를 감안했을 때 이 시기 작품들이 유실되어버린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5] 원래는 페르디난트 2세에게 헌정될 예정이었지만 곡을 다듬으면서 출판이 미뤄지는 동안 페르디난트 2세가 사망하는 바람에 후임으로 황제에 즉위한 아들에게 헌정되었다.[6] 그런데 정작 아르투시 본인이 남긴 작품에서는 이런 파격성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게다가 남아 있는 작품 수도 매우 적고 수준도 높지 않은데, 기본적으로 아르투시는 이론가이지 전문작곡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7] 이 서문은 일반적인 의미의 서문이 아니라 사실상 논문이다. 그가 쓴 음악이론서인 멜로디아가 실전된 상황이기 때문에 이 8집의 서문은 수록된 작품 못지 않게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8] 몬테베르디 당대부터 이 아리아는 매우 유명했으며 바로크시대 내내 자주 연주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오페라 악보가 소실되었어도 이 아리아의 악보는 보존될 수 있었다.[9] 실전된 오페라 중 만토바궁을 위해 작곡된 작품들은 만토바 계승전쟁(1628~1631)의 와중에 소실된 것으로 보고 있다.[10] 이 작품에 나오는 아리아를 바탕으로 한 짧은 곡이 세속마드리갈 9집에 포함되어 있다.[11] 1607년 아퀼리노 코피니(Aquilino Coppini)라는 작곡가는 당시 5집까지 발간된 몬테베르디의 세속마드리갈곡집의 음악을 바탕으로 세속가사를 종교적인 라틴어 가사로 바꾸어 종교마드리갈 곡집으로 출판하기도 했다.[12] 다만 이 작품에 포함된 4개의 모테트, 즉 비록 내가 검지만(Nigra Sum), 나의 사랑(Pulchra es), 서로 말하는데(Duo Seraphim), 하늘이여 들으소서(Audi Coelum)는 원래 이 작품에 속한 것이 아니라 독립된 성가곡이었다는 의견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