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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6 21:43:50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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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연혁3. 역대 음악 감독4. 특징5. 할리우드 볼 오케스트라6. 기타

1. 개요

미국로스앤젤레스를 거점으로 하는 관현악단.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등과 함께 미국 서부 클래식계의 자존심을 살려주고 있는 악단 중 하나다.

2. 연혁

1919년에 대부호이자 자선가, 아마추어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윌리엄 앤드루스 클라크 2세가 창단했고, 초대 음악 감독으로 영국 출신의 월터 헨리 로스웰이 부임했다. 로스웰은 아직 걸음마 단계였던 악단의 합주력 개선을 위해 동부에서 실력있는 연주자들을 초빙해 단원으로 편입시키는 등 기반을 다지는 데 크게 기여했지만, 1927년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로스웰의 후임으로는 핀란드 출신의 게오르그 슈네보이그트가 초빙되었는데, 단원들과 청중들 모두에게 호응을 얻지 못해 단기 재임에 그쳤다. 이어 폴란드 출신의 아르투르 로진스키가 제3대 음악 감독에 부임했는데, 로진스키는 상당히 깐깐한 성격에 리허설도 매우 빡세게 하는 스타일이라 악단과의 관계가 늘 좋지는 못했다. 하지만 서부에 소개되지 않았던 많은 동시대 작품을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악단의 합주력도 일정 수준을 보장하는 등의 역량을 보여주며 1933년까지 재임했다.

로진스키가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로 이임한 뒤에는 1935년 독일에서 망명해온 오토 클렘페러가 상임지휘자로 초빙되었는데, 때마침 이 때부터 악단의 재정 상태가 심각하게 삐걱대기 시작했다. 세계 대공황이 터지면서 악단 유지를 위한 기부금이 거의 끊겼고, 설상가상으로 창단자인 클라크가 후계자를 지명하지 못한 채 1934년에 타계했다.

해단 위기 속에서 클라크의 후계자로 지명된 하비 머드는 어렵사리 기부금을 다시 끌어오기 시작했고, 동시에 악단에도 청중 동원 능력이 제한되어 있는 실내 공연 대신 야외 공연의 비중을 늘리라고 주문했다. 이 때부터 할리우드 근처에 있는 대규모 야외 공연장인 할리우드 볼에서 공연하는 기회가 많아졌고, 머드 자신도 사비를 털어 클렘페러의 봉급을 보장해주었다.

하지만 클렘페러 자신도 망명의 후유증이었던 향수병우울증으로 심한 부침을 겪고 있었고, 1939년 시즌이 끝난 뒤 뇌종양 수술을 받다가 일부 신경이 마비되는 등 최악의 상태가 되어 물러나고 말았다.

클렘페러 이후 음악 감독 공석 상태가 계속되자 머드는 1942년에 뉴욕 필하모닉에서 사임한 영국 지휘자인 존 바비롤리를 초빙해 보려고 했지만, 바비롤리는 고국으로 돌아가겠다며 거절했다.

결국 공백 기간 동안 자주 객원으로 지휘했던 악단의 첼리스트 출신 지휘자 앨프리드 월런스타인이 1943년에 음악 감독으로 공식 부임했고, 1956년에 사임할 때까지 악단을 이끌었다. 1950년대 중반에는 백화점 상속인이었던 도러시 버펌 챈들러가 머드의 뒤를 이어 실질적인 악단 후견인이 되었고, 챈들러는 악단의 새로운 공연장 건립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네덜란드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였던 에두아르드 반 베이눔을 신임 음악 감독으로 발탁했다. 하지만 베이눔은 암스테르담과 LA를 오가며 직무를 수행해야 했으며, 건강이 좋지 않아 큰 활약을 하지 못하고 1959년에 심장마비로 급서하고 말았다.

챈들러는 1960년에 공식 이사로 부임한 뒤 헝가리 출신의 신예 지휘자인 게오르그 솔티를 영입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고, 숄티는 1962년부터 부임하기로 계약했다. 하지만 숄티는 부임하기도 전에 악단 운영진 측과 단원 선발 등의 행정 문제로 대판 싸우다가 계약을 파기해 버렸고, 결국 부지휘자로 활동하던 26세의 젊은 인도 출신 지휘자인 주빈 메타가 솔티 대신 음악 감독을 맡게 되었다.

부임 당시 메타는 너무 젊은 나이에 경험이 부족하다고 해서 많은 우려를 낳았지만, 오히려 혈기왕성한 활동과 새로운 음악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보여주며 악단과 자기 자신의 리즈 시절을 만들었다. 젊고 에너지가 충만했던 메타는 젊었던 LA필 시기에 가장 뛰어난 재능을 나타냈다. 로진스키, 클렘페러, 발터, 반 베이눔 같은 여러 거장들이 와도 난맥상에 시달렸던 LA필이었지만 메타 시기에 이르러 기량이 안정되었고 악단의 기반과 명성도 확고해졌다. 메타는 소속사였던 데카를 통해 여러 장의 음반도 내놓았고 이들 음반들이 호평 받으면서 악단의 명성을 국제적으로 널리 알렸다. 메타의 재임기간 중인 1969년에 이사장으로 부임한 어니스트 플라이쉬만은 악단 활동과 별도로 단원들의 실내악 연주회나 동시대 음악 연주회 등의 진취적인 기획을 적극적으로 밀고 나가는 등 미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악단으로 탈바꿈시켰다.

메타가 1978년 뉴욕 필하모닉으로 이임한 뒤에는 이탈리아 출신의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가 부임했고, 이 시기 동안 피아니스트에서 지휘자로 전업한 정명훈이 부지휘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줄리니는 악단과 청중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1984년에 아내의 병세가 악화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급작스럽게 사임한 뒤 고국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악단 측은 약 1년 간의 공석 뒤 앙드레 프레빈을 제9대 음악 감독으로 초빙했다. 프레빈은 이미 예전부터 할리우드에서 재즈 피아니스트이자 영화음악 작곡가로 활동하면서 할리우드에서 꽤 넓은 인맥을 형성하고 있어서, 취임 당시의 반응은 매우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프레빈은 이사장이었던 플라이쉬만과 악단 운영 문제로 자주 심한 논쟁을 벌였고, 결국 1989년 4월에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사임하고 말았다. 후임으로는 플라이쉬만이 수석 객원 지휘자로 내정했었던 핀란드 출신의 에사-페카 살로넨이 1992년에 부임했다.

살로넨은 부임 직후 자작곡을 포함한 현대음악 공연과 녹음에 활동의 상당 부분을 할애했고, 동시에 미국 본토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 연주 여행을 다니면서 악단의 위상을 한층 높였다. 살로넨은 2008년 부임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활동에 집중하기 위해 2008/09년 시즌을 끝으로 퇴임했고, 후임으로는 베네수엘라 출신의 구스타보 두다멜이 부임해 2019년 현재까지 재임 중이다.

3. 역대 음악 감독

4. 특징

미국 제2의 도시의 오케스트라인 만큼 비교적 풍부한 재정 속에서 최근 특히 존재감이 커진 오케스트라다. 사실 초창기에도 머니 파워에는 밀리지 않았기 때문에 로진스키, 클렘페러 등 네임드 지휘자들을 상임지휘자로 초빙하고 여타 거물급 지휘자들을 객원으로 초빙하는 등 좋은 지원을 받았으나 캘리포니아의 어수선한 분위기 때문인지 투자 대비 성과가 별로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 터지지 않는 유망주 신세가 수십년간 지속되었음에도 워낙 자금력이 괜찮았기 때문에 유럽의 여러 명문 오케스트라들이 재정난으로 부침을 겪고 있던 와중에도 꾸준한 투자가 이어졌다. 초기에는 로진스키 같은 오케스트라 트레이너를 초빙해도 소용없었고, 클렘페러 같은 해석의 거장을 초빙해도 효과가 없었지만, 60년대 젊지만 잠재력 있는 지휘자 주빈 메타를 영입하여 내실을 다졌고, 메타가 뉴욕 필로 떠난 후에는 거장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를 영입해서 음악적인 깊이를 더하는 등 선순환이 이어졌다. 그 결과 이제는 적어도 연주력 측면에서는 별로 까이지 않는 나름 좋은 오케스트라로 성장했다.

활동 초기부터 현대음악을 과감하게 다루기 시작하는 등 미국 관현악단 치고는 새로운 음악에 대한 적응력이 꽤 강한 편이다. 1990년대 들어서는 현대음악 외에도 재즈나 영화음악 등 인접 장르에 대해서도 관대함을 발휘하고 있고, 심지어 플라이쉬만을 비롯한 악단 운영진들의 발의로 상주 작곡가와 상주 재즈 아티스트 직책까지 만들어 놓았다. 2010년 현재 상주 작곡가로 존 쿨리지 애덤스가, 상주 재즈 아티스트로 허비 행콕이 활동하고 있다.

상주 공연장은 초기에 트리니티 오디토리엄, 1920년대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는 클런즈 오디토리엄을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음향에 대한 평판이 안좋아 1964년에 후견인의 이름을 따 새로이 신축된 도로시 챈들러 퍼빌리언으로 옮겼다. 예전 공연장들 보다는 그래도 조건이 낫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여기도 콘서트 전문으로 쓰기에는 난점이 많다는 지적이 계속되었다.

결국 2003년에 다시 프랭크 게리가 콘서트 전용으로 설계해 건립된 최신 공연장인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로 옮겨갔고, 2012년 현재도 계속 상주 공연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야외 공연장인 할리우드 볼에서 비시즌기인 여름에 개최하는 대중 음악회도 계속되고 있으며, 2005년에는 아예 이 음악회를 위한 지휘자 직책을 신설했다.

녹음은 다른 미국 악단들보다는 비교적 늦게 시작했고, 월렌스타인의 협주곡 녹음 정도가 SP 시대의 대표 음반으로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메타 재임기에 데카에서 정기적인 취입이 시작되었고, 이후 줄리니는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프레빈은 필립스와 텔락에서 여러 장의 음반들을 내놓았다. 살로넨도 재임 초기에는 소니 클래시컬에서, 후기에는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녹음 작업을 했고, 두다멜도 전속사인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녹음을 하고 있다.

악단 재정 형편이 좋아서인지 아직 자체 음반사를 차리는 등의 움직임은 없지만, 대신 도이체 그라모폰을 통해 공연 실황의 디지털 다운로드 음원을 판매하는 등 온라인 음원 서비스에도 진출하고 있다. 할리우드와 가까워서인지 영화음악 작업도 자주 하는 편이며, 메타 재임 후기였던 1970년대 후반에는 스타워즈스타트렉, 미지와의 조우 등의 영화 스코어 음악을 관현악 모음곡으로 개편해 녹음한 음반을 내놓기도 했다. 우에마츠 노부오가 작곡한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의 음악을 미국 콘서트 무대에서 처음 연주한 악단도 로스앤젤레스 필이었다.

5. 할리우드 볼 오케스트라

대공황 시기에 로스앤젤레스 필은 재정난 타개를 위해 할리우드 보울에서 자주 대중 음악회를 개최했는데, 자존심 때문에 그대로 출연하기가 좀 거시기했는지 악단 이름을 '할리우드 볼 교향악단(Hollywood Bowl Symphony Orchestra)' 으로 바꾸어 출연했다. 유명한 클래식 소품 외에도 당대 유행한 발라드 등의 가요, 영화음악의 콘서트 버전 등을 많이 다루었는데, 1950~60년대에는 캐피톨 레코드를 통해 음반도 여러 장 발매했다.

하지만 1960년대 이후 관현악단을 동원하는 대규모 스케일의 영화음악 수요가 감소하기 시작했고, 로스앤젤레스 필도 할리우드 보울에서 공연할 때 굳이 이름을 바꾸어 출연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되면서 이 명칭의 악단은 사라졌다. 그 대신 1990년에 로스앤젤레스 필 이사회가 과거의 착상을 응용해 '할리우드 볼 오케스트라(Hollywood Bowl Orchestra)' 라는 새로운 악단을 조직했다.

이 악단은 로스앤젤레스 필 이사회의 관할 하에 있는 것을 빼면 완전히 다른 악단이며, 공연이나 녹음 때만 할리우드에서 영화음악 녹음 등을 위해 상주하며 활동하는 연주자들을 모아 임시 편성하는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성격이 강하다. 간혹 이 악단과 로스앤젤레스 필을 같은 조직 혹은 상하부 조직 관계로 설명하는 정보는 오류이므로 주의.

다만 이 악단도 비상설이기는 하지만 대중적인 컨셉으로 활동하고 있어서 반응은 좋은 편이며, 존 모체리가 지휘하던 1990~2006년 동안에는 필립스를 통해 독특한 발상의 음반들을 여러 장 내놓아 보스턴 팝스 오케스트라의 대항마로도 두각을 나타낸 바 있다. 다만 모체리 사임 후에는 후임 물색이 힘든지 예전 만큼의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다.

6. 기타

컬럼비아 심포니 오케스트라 단원의 상당수가 LA필 소속 단원들이었다. 컬럼비아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은퇴를 선언한 후 캘리포니아 비버리 힐즈에 거주하던 브루노 발터와 녹음하기 위해 CBS가 만든 녹음용 오케스트라다. CBS는 은퇴한 발터를 오랫동안 설득한 끝에 마침내 녹음 계약을 맺었지만 발터의 건강 때문에 이제는 뉴욕까지 왔다갔다 하기도 힘들었고 서부에는 발터가 지휘할 만한 괜찮은 오케스트라가 없었다. 때문에 CBS는 아예 발터를 위한 녹음용 오케스트라를 새로 만들기로 하고 오디션을 통해 새로 오케스트라를 조직했다. 발터의 명성 덕분에 서부의 실력있는 음악가들이 이 오케스트라에 많이 합류했는데 유명 실내악단 멤버들도 참여했고, 헐리우드 스튜디오 소속 음악가들도 참여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가장 다수를 차지한 것은 LA필 소속의 단원들이었다. 컬럼비아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1957년말부터 녹음 활동을 시작해서 1962년 브루노 발터가 사망하면서 자연스레 해체되었다.

컬럼비아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존재는 LA필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줬다고 볼 수 있다. 1950년대 LA필은 지리적인 문제로 동부 오케스트라들에 비해 좋은 지휘자를 초빙하기가 훨씬 어려웠는데, 적지 않은 수의 LA필 단원들이 컬럼비아 심포니 오케스트라에 참여하면서 브루노 발터라는 시대를 풍미한 거장의 지휘 아래서 음악성을 성숙시킬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LA필은 1962년 주빈 메타가 취임한 후 갑자기 일취월장했다는 평가를 받는데, 여기에는 브루노 발터의 간접적인 영향도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