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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尹伊桑管絃樂團
영어: Yun I Sang Orchestra[1]
북한의 관현악단. 이름은 작곡가 윤이상에서 유래했다. 서양악기 위주로 편성된 서양식 관현악단이라는 점에서 조선국립교향악단과 비슷해 보이지만, 그보다는 좀 더 규모가 작은 실내 관현악단 또는 중편성 관현악단 스펙이다. 소속된 음악 연구소의 이름을 따 '윤이상음악연구소 관현악단' 이라고도 부른다.
1990년 12월에 창단되었는데, 지휘자 김일진[2]이 평양음악무용대학[3]을 중심으로 각지의 음악대학과 예술학원에서 오디션을 거친 42명의 젊은 연주자들을 뽑아 결성했다. 창단 때부터 재독 작곡가 윤이상의 작품 연주를 전문으로 한다는 취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평양의 국제문화회관을 본거지로 하는 윤이상음악연구소 산하의 악단이 되었다.
창단 2주년이었던 1992년 12월에는 연구소 바로 옆에 베를린 필하모니의 부속 공연장인 실내악당(Kammermusiksaal)의 설계를 참조한 560석 규모의 악단 상주 공연장인 윤이상음악당이 개관했다. 남한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1998년에 평양에서 열린 윤이상 통일음악회 때였으며, 이 때도 창단과 초기 연주력 향상에 깊이 관여했던 김일진이 지휘자로 등장했다.
다만 김일진은 만수대예술단 소속이라, 다른 악단의 직책을 겸직할 수 없어서 수석 지휘자는 다른 지휘자가 맡고 있다. 창단 당시에는 바이올리니스트 출신 지휘자인 리인팔이 맡았고, 1990년대 후반 무렵 재일교포 플루티스트 출신인 강룡웅이 후임으로 부임했다. 2000년대 중반 이후로는 조선국립교향악단에서 부수석 지휘자로 있었던 김호윤이 수석 지휘자로 재직 중이였다가 2014년에 장룡식이 조선인민군공훈국가합창단 단장 겸 수석 지휘자로 이임하면서 다시 조선국립교향악단으로 돌아가 수석 지휘자로 재직중이다. 현재 수석 지휘자는 다시 강룡웅이다.
김호윤은 2011년 1월 쯤부터 만수대예술단 삼지연악단의 단장 겸 지휘자로 활동한 적이 있어서, 양대 직책을 겸직한 것인지 완전히 이임한 것인지는 불확실했다. 하지만 그 해 가을에 열린 윤이상 음악회에 참가하기 위해 방북했던 독일 플루티스트 마르톤 베그의 말에 의하면, 삼지연악단 단장 직은 다시 바이올리니스트 리순애에게 넘겨줬지만 윤이상관현악단 수석 지휘자 겸 윤이상음악연구소 소장 직책은 계속 유지 중인 것으로 밝혀졌으나, 장룡식이 조선인민군공훈국가합창단으로 이임 및 조선국립교향악단 수석 지휘자에서 퇴임하면서 강룡웅에게 윤이상관현악단 수석 지휘자 자리를 이임하고 다시 조선국립교향악단으로 돌아가 수석 지휘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악장(콘서트마스터)은 바이올리니스트 김철룡이 맡고 있다.
1998년에 남측 음악인들과 함께 방북한 음악학자 노동은의 수기에 의하면 단원 수는 대략 40~60명 가량으로 추산되며, 당시 남성 연주자 중심이었던 조선국립교향악단과 달리 남녀 연주자들이 비슷한 비율로 활동하고 있었다. 단원들 중에는 팀파니 주자 김현이나 플루트 주자 리창명처럼 조선국립교향악단이나 만수대예술단의 여성기악중주단 등 타 단체의 단원을 겸직하는 이들도 종종 있었다.
관현악단 전체 연주 외에도 단원들로 구성하는 실내악 활동도 많다고 하는데, 1999년과 2004년 두 차례 독일에서 순회공연을 했을 때도 악단 전체가 아닌 수석급 단원들로 구성된 '평양 윤이상 앙상블' 이라는 실내악 편제로 참가했다. 윤이상 작품을 비롯한 서양 근현대 음악을 북한에 소개한다는 취지를 갖고 있어서, 연주 곡목도 다른 단체보다는 북한과 외국 작품들의 균형이 비교적 잘 맞는다고 한다.
창단 이후로 매년 열리고 있는 윤이상 음악회의 중심 악단으로 계속 참가하고 있는데, 다만 현대음악에 대한 관심과 보급이 제한적인 편인 북한 사회에서는 비교적 크게 관심을 받는 악단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2000년대 후반 들어 뽀글이 폐하의 관심은 이보다 더 '대중적인' 면모를 노린 은하수관현악단이나 만수대예술단 삼지연악단 쪽에 집중된 것 같아 상대적으로 신문이나 방송 등 대중 매체들에서 다루어지는 비중도 많이 낮아졌다. 그럼에도 특별히 구조조정이나 해산 없이 계속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4]
악단 명의로 CD를 발매하고 있는 조선국립교향악단이나 은하수관현악단과 달리 북한 내에서 유통되는 음반은 확인되고 있지 않은데, 오히려 일본이나 남한 등 해외에서 이들의 연주가 담긴 음원을 더 쉽게 입수할 수 있다. 1999년 독일 공연 때 현대음악 전문 음반사인 베르고(Wergo)에서 녹음한 윤이상 실내악 작품집 CD는 현재 품절 중이라서 구입하기가 쉽지 않다. 그 외에도 신나라레코드에서 발매한 북한 관현악 작품집 음반들인 '민요 삼천리' 와 '아리랑 환상곡' 에서도 윤이상관현악단 연주의 민요 편곡 작품들을 들어볼 수 있다.
1998년의 윤이상 통일음악회 이후에도 제한적이나마 남한 음악인들과의 교류가 이어지고 있었는데, 2006년 10월에는 정명훈이 방북해 지휘할 예정이었지만 때마침 적절하게(???) 터져준 핵실험 파동 때문에 무산되고 말았다. 비슷한 시기 남한의 윤이상평화재단에서 추진하고 있던 2007년의 남한 공연 계획도 마찬가지로 취소되었는데, 그 대신 2008년 10월에 열린 윤이상 음악회에서 남한 첼리스트 고봉인이 독주자로 참가해 윤이상의 첼로 협주곡을 협연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급속히 경색되고 있는 남북관계로 인해 교류사업 자체가 버로우탄 듯. OTL
[1] 윤이상의 공식 영문 이름은 Isang Yun이다. 그러나 북한은 한국(남한)처럼 개인 영문 이름을 허용하지 않고 무조건 북한 공식 철자법에 의거한 영문명만을 부여한다. 물론, 얘[5]는 제외.[2] 북한 출신 지휘자 중 유일하게 독일의 wiki:"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국제 지휘 콩쿠르에 입상해 화제가 된 인물.[3] 현 김원균 명칭 평양음악대학[4] 애초에 김일성 자신이 윤이상 음악을 높이 평가하고 영원히 대물림해야 할 민족의 재보라고 추켜세웠고, 이 때문에라도 유훈통치가 일상화된 북한 사회에서 이 악단이 차지하는 상징성은 아직 무시할 수 없다.
[5] 김일성은 북한 공식 철자법에 따르면 Kim Il Song이 되나, 북한 건국 당시인 1948년에는 정형화된 북한식 철자법이 제정되기 전이기에... 그리고 북한에서도 '새로운 철자법이 제정되어도 통상 쓰던 고유명사는 그대로 둔다'는 예외는 인정한다. 대표적으로 북한 수도 평양시의 북한 공식 표기법는 Phyongyang이 되나, 워낙 대내외적으로 Pyongyang 명칭을 내세웠기에 그대로 둔다. 단, 평안남북도는 현대 표기법에 따라 각각 South Phyongan Province, North Phyongan Provice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