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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13:39

김희수(1924)

재일교포 부동산 기업인. (전) 학교법인 중앙대학교 이사장. 호는 동교(東喬).

1924년 경상남도 창원군(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출생으로 진동보통공립학교(現 진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도일하여 일본 도쿄전기대학을 졸업하였다.

양품점을 시작으로, 일본의 고도성장기에 부동산 개발 및 다양한 사업으로 부를 축적하였다.

1987년 중앙대학교가 이사장 임철순의 공금횡령과 방만한 경영으로 재정 위기에 몰리자 중앙대학교 재단을 인수하였다. 재단 이사장 취임 당시 "중앙대학교를 동양의 하바드로 키우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밝히며, 임철순 재단이 남긴 700억대의 부채[1]를 모두 청산하긴 했지만, 불투명한 재정운영으로 과연 본인의 사재를 얼마나 출연한 것인지에 대해선 많은 의문이 붙는다. 재단 이사장으로서의 행보를 보면 실상은 그저 돈빼가는 흔하디 흔한 부패사학, 실패한 부동산 장사꾼이었다.

실제로 1991년 공대 C급 판정 사태 부터 시작해서, 메디칼 센터 무산, 인프라 부족으로 BK21 같은 정부 지원 사업에서 줄줄이 탈락하는 등 김희수 이사장 시대 동안 중앙대는 정체상태였고, 입시경쟁에서 계속 추락하고 있었다. 어느새 사라진 재단 부동산들과 불투명한 재정운용, 정체된 학교 상황 등에 불만을 품은 학생들에 의해서 1990년대 중반부터 재단퇴진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2]

1999년에는 김희수가 대주주로 있는 금정상호신용금고에 중앙대 자금을 예치했다가, 금고 부도로 학생들 등록금이 묶이는 일도 있었다. 더구나 이와중에 김희수는 대주주는 자기 지분이 있는 상호신용금고(현 저축은행)에서는 대출을 받을 수 없다는 신용금고법을 위반한게 들통나서 검찰수사를 받기도 했다. 김희수는 회사에 손해를 끼친게 인정돼서 재판에서 110억의 배상금을 두들겨 맞는 등 중앙대 이사장으로 재직하는 내내 수많은 비리 의혹과 구설수에 올랐다.

거기에 1990년대 들어서 일본의 버블경제가 붕괴하자 본업인 부동산도 폭망하고 만다. 한때 도쿄 긴자에만 20여채가 넘는 빌딩을 소유하고 있다고 알려졌지만 버블 붕괴 이후에는 깡통 상태가 되면서, 3천만엔을 상회하던 김희수의 개인 재산은 1%도 남지 않고 사라지고 만다. 이러면서 김희수 이사장의 중앙대학교 재단은 1990년대 후반부터는 학교지원액이 매년 1,000원[3]이라는 황당한 코메디를 연출하는 식물재단으로 전락한다. 당시에도 아무것도 안할꺼면 재단을 팔고 나가라는 동문회의 압력에도 꿋꿋히 버티면서 계속 시간만 보내다가 재단 인수 21년만인 2008년에 1,200억원을 받고 두산그룹에 재단을 매각했다.[4] 김희수 이사장 재임 21년동안 남은 거라곤 어느새 사라진 전국의 부동산들과 텅 비어버린 학교재정 그리고 추락한 입결뿐이었다.

이후 2010년부터 찾아온 뇌경색으로 인해 식물인간이 되어 투병했고, 동경에서 2012년 1월에 사망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중앙대학교 역사 - 김희수 이사장 시대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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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 시점에서 1조원에 조금 못 미친다.[2] 강성 NL운동권들이 학생회를 장악하고 있던 시절인데도 불구하고 1997년 한총련 출범식 사태에서 중앙대는 거의 피해가 없었는데, 당시 총학생회가 "우리는 재단퇴진운동하러 가야한다"면서 일찍 철수해서 그렇다.[3] 오타가 아니라 실제로 당시 재단 회계장부를 보면 매년 지원액이 천원이었다. 절대 천억의 오타가 아니다.[4] 김희수재단이 식물재단으로 전락한 1990년대부터 몇몇 재벌들이 중앙대 재단에 관심이 있다는 소문이 돌긴 했다. 특히 바이오사업 진출을 준비하던 LG그룹이 의대를 노리고 재단인수를 제안했는데, 김희수가 터무니없는 가격을 불러서 무산되었다는 썰이 돌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