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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학교/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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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학교 공식영상 역사편 (2019)

일러두기
1. 평이한 문체와 한글전용을 원칙으로 서술하였다.
2. 인용문의 경우는 현대어로 표기하고 영문은 번역하였다.
3. 인명이나 지명 등 고유명사와 학술용어는 ( ) 안에 병기하였다.
4. 경어와 존칭은 일체 쓰지 않았다. 단, 직함 또는 아호 등을 밝힐 경우만 성명 앞에 붙였다.
5. 연대는 서기로 통일하였다.
6. 통계나 연대는 아라비아 숫자를 기준으로 하였다.
7. 화폐 단위는 유통 당시를 기준으로 하였다.
8. 중앙대학교 80년사를 기반으로 작성하였다.[1]
9. 1998년 이후의 역사는 여러 견해차이와 논란이 있어 『중앙대학교 100년사』(2018년 예정)가 발행된 이후 작성한다.

1. 제1편 민족교육의 횃불
1.1. 제1장 중앙유치원의 탄생
1.1.1. 제1절 중앙유치원의 설립
1.1.1.1. 1910년대의 시대적 배경1.1.1.2. 기독교의 민족운동과 중앙교회1.1.1.3. 중앙유치원의 개원1.1.1.4. 중앙유치원 설립 시기에 대한 논의
1.1.2. 제2절 중앙유치원의 운영
1.1.2.1. 중앙유치원의 특색과 초창기의 모습1.1.2.2. 유치원 운영상의 곡절과 후원회의 조직1.1.2.3. 중앙유치원의 활동과 문화적 공적
1.1.3. 제3절 유치사범과의 설립
1.1.3.1. 유치원 규정의 공포와 유치원의 보급1.1.3.2. 유치사범과의 설립1.1.3.3. 유치사범과의 경영난
1.2. 제2장 중앙보육학교의 설립과 발전
1.2.1. 제1절 중앙보육학교의 설립
1.2.1.1. 중앙보육학교 인가1.2.1.2. 교수진 구성
1.2.2. 제2절 중앙보육학교의 발전
1.2.2.1. 1930년대 시대적 배경1.2.2.2. 임영신의 중앙보육학교 인수1.2.2.3. 학생 생활의 지도와 교수의 활동
1.2.3. 제3절 일제 말기의 중앙보육학교
1.2.3.1. 학원의 전시체제와 휴교
1.3. 제3장 승당 임영신의 민족을 위한 교육활동
1.3.1. 제1절 임영신의 애국애족 사상과 구국 교육 정신의 형성
1.3.1.1. 임영신의 애국애족 사상1.3.1.2. 구국교육정신의 형성
1.3.2. 제2절 중앙보육학교의 인수와 학교 육성을 위한 노력
1.3.2.1. 중앙보육학교의 인수1.3.2.2. 학교 육성을 위한 노력
1.3.3. 제3절 일제 말기의 전시체제와 임영신 그리고 중앙보육학교
1.3.3.1. 일제 말기의 전시체제1.3.3.2. 항일독립운동가 임영신과 중앙보육학교의 휴교
2. 제2편 종합대학교로의 발돋움
2.1. 제1장 해방과 학교재단
2.1.1. 제1절 중앙여자전문학교의 설립
2.1.1.1. 중앙보육학교의 재개교와 교훈/교가의 제정2.1.1.2. 중앙여자전문학교의 설립과 그 정신2.1.1.3. 중앙유치원의 재개원
2.1.2. 제2절 재단 설립과 운영
2.1.2.1. 재단법인 설립기금의 확보2.1.2.2. 중앙문화학원의 설립
2.2. 제2장 발전을 위한 기반 구축
2.2.1. 제1절 중앙여자대학의 설립
2.2.1.1. 중앙여자대학의 설립과정2.2.1.2. 학부의 구성
2.2.2. 제2절 중앙대학의 설립
2.2.2.1. 남녀공학의 실시와 교명변경2.2.2.2. 법정학과의 증설2.2.2.3. 대한민국 최초의 여학사 배출2.2.2.4. 기본재산의 증가
2.2.3. 제3절 한국전쟁기의 중앙대학
2.2.3.1. 한국전쟁의 발발과 휴교/전시연합대학2.2.3.2. 부산에서의 임시개교2.2.3.3. 이리분교의 설치2.2.3.4. 서울분교의 설치와 중앙대학의 설립 갱신2.2.3.5. 전시하의 교세 확장2.2.3.6. 총동창회 창립
2.3. 제3장 중앙대학교의 출범과 성장
2.3.1. 제1절 종합대학교의 출범
2.3.1.1. 중앙대학교의 설립2.3.1.2. 교과과정의 개편2.3.1.3. 학교기구의 개편
2.3.2. 제2절 독지가들의 기부2.3.3. 제3절 교사 신축과 교육시설 확충
2.3.3.1. 가교사의 건립2.3.3.2. 기숙사의 보수2.3.3.3. 이리분교 교사 신축2.3.3.4. 파이퍼홀 신축2.3.3.5. 영신관의 증축2.3.3.6. 중앙도서관의 신축
2.3.4. 제4절 4.19 혁명과 학생운동
2.3.4.1. 1960년 4.19 혁명과 중앙대학교2.3.4.2. 1964년 6.3 학생운동
2.3.5. 제5절 부속기관의 정비
2.3.5.1. 창문학원과 삼양학원 인수2.3.5.2. 국민학교의 신설2.3.5.3. 부속여자중고등학교의 확장2.3.5.4. 부속중고등학교의 확장2.3.5.5. 영선중학교와 종합고등학교의 확장2.3.5.6. 중앙유치원의 발전
2.3.6. 제6절 중앙문화학원의 사업 확충
2.3.6.1. 제주도 임야 매입2.3.6.2. 재미재단의 활동 정비
3. 제3편 중앙의 성숙과 시련
3.1. 제1장 서라벌예술대학 인수/합병
3.1.1. 제1절 임철순 총장 취임3.1.2. 제2절 서라벌예술대학
3.1.2.1. 서라벌예술대학의 발자취3.1.2.2. 서라벌예술초급대학으로의 발전3.1.2.3. 4년제 예술대학으로의 승격3.1.2.4.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으로의 편입
3.2. 제2장 부속병원의 증설과 발전
3.2.1. 제1절 부속성심병원의 개원3.2.2. 제2절 중앙대학교 부속병원으로 발전3.2.3. 제3절 용산병원의 개원
3.3. 제3장 제2캠퍼스의 건립과 교세확장
3.3.1. 제1절 제2캠퍼스의 설립배경과 특성화3.3.2. 제2절 제2캠퍼스의 건립3.3.3. 제3절 제2캠퍼스의 시설 확충과 발전
3.4. 제4장 잃어버린 20년
3.4.1. 제1절 학교법인 중앙문화학원 부도
3.4.1.1. 제2캠퍼스의 확장과 시련3.4.1.2. 학내분규와 수습
3.4.2. 제2절 학교법인 중앙대학교 출범
3.4.2.1. 동교(東喬) 김희수, 중앙대학교 경영 참여3.4.2.2. 마스터플랜의 수립
3.4.3. 제3절 강남 개포동 30만평 토지 매입 무산3.4.4. 제4절 '이내창 의문사' 사건3.4.5. 제5절 공과대학 C급 판정 사태
3.4.5.1. 사건 개요3.4.5.2. 갈등의 증폭3.4.5.3. 범 중앙인 한마당
3.4.6. 제6절 메디컬센터(M.C.) 건립 지연 사태

1. 제1편 민족교육의 횃불

1.1. 제1장 중앙유치원의 탄생

민족교육의 횃불 중앙대학교의 107년 역사는 1916년 설립된 중앙유치원으로부터 시작된다.

1.1.1. 제1절 중앙유치원의 설립

1.1.1.1. 1910년대의 시대적 배경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된 1910년대 이후 교육은 조선총독부가 교수 용어를 일본어로 바꾸고 각급 학교에 대하여 일본어 상용(常用)을 강행하였다. 초중등 교육기관에 비하여 유아교육 기관인 유치원에 대해서는 모국어(한글) 사용을 규제하지 않는 실정에 따라 민족 선각자들은 폭압적인 무단통치하에서도 우리말로 유아를 가르치는 유치원 설립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결과 한국인에 의한 중앙유치원(中央幼稚園)이 햇빛을 보게 된 것이다.
1.1.1.2. 기독교의 민족운동과 중앙교회
1910년에 창설된 중앙교회는 서울 인사동에 위치하고 있었다. 처음 목조 한옥으로 건조된 교회 구내에는 종로여학교, YMCA 본부, 중앙유치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중앙교회는 당시로서는 서울 시내에서 가장 번화가였던 종로 2가 근처에 있었으므로 신자 중에는 종로 상인들이 많았다. 이들 상인들 중 기독교로 개종한 신자들은 자신들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교회를 유지, 운영코자 하였다. 다시 말해서 중앙교회는 선교사들의 도움보다는 신자들의 힘으로 유지하고자 한 진취적이고 자립적인 특색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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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추정), 서울 인사동 중앙교회

중앙교회는 3.1 운동 후 회당 신축을 시작하여 1921년에 완성하였는데, 여기서 행해지는 강연회나 여러 가지 계몽활동은 신문화 운동의 원천이 되어, 신도들 뿐만 아니라 비신도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주어 한국의 근대화나 사회진보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므로 중앙교회의 사회적, 문화적 비중은 다른 교회에 비하여 대단히 컸다. 이는 YMCA 본부가 이 교회 구내에 설치되었다는 사실만 보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중앙교회의 신자이며 유치사범과의 교사였던 유현숙이 1921년 3월 2일 『동아일보』에 게재한 『부인과 사회사업』이라는 글 가운데 "여자도 사람이 된 이상, 조선에 생겨난 이상에는 조선 사회를 위하여 남자와 함께 일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는 주장에서도, 이 시기의 유치사범과를 움직이던 선구적인 여성의 포부와 지향(志向)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중앙교회에는 교회 안에서 교회를 매개로 하여 사회발전에 이바지하려는 높은 자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이들 선각자들이 중앙유치원을 설립하고, 중앙유치원을 우리나라의 모범적인 유치원으로 키워 나갔으며, 어린이 운동과 여성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는 다소 후기의 자료이지만 서양인 선교사들이 중앙교회와 중앙유치원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높이 평가하는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서울에는 감리교회가 33개소가 있는데, 그 중 10개소 정도는 좋은 시설을 갖고 있다... 그 중 중앙교회는 종로의 중심부에 있으며 소속 신자수는 400명 정도이지만 비(非)미션계 학교 학생들과 젊은 실업인들, 상인들에게 여러 모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중앙교회에는 부설 유치원이 있으며, 유치원에는 사범과가 있고, 구내에는 소규모의 여자소학교가 있는데, 중앙교회와 그 부설교육기관은 순전히 조선인의 성원과 지지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조선선교연감(The Korean Mission Year Book)』, 1928년도
1.1.1.3. 중앙유치원의 개원
우리나라에서 유치원은 1887년 부산에 일본인이 세워 일본 거류민의 아동들을 가르친 사립유치원이 그 효시이다. 조선인 원아(園兒)를 교육하는 첫 유치원은 1913년 3월에 설립된 경성유치원이었으며, 1914년 이화학당 안에 이화유치원[2]이 설립되었다.

경성유치원은 자작(子爵) 조중응과 기타 친일 실업가들이 설립한 교육기관이었다. 원장과 보모(保姆)로는 일본인을 고용하여 일본어 교육과 일본의 풍습, 습관 등을 가르치는 것에 치중하였다. 일본인 보모의 임무는 일본의 풍습과 습관을 가르쳐 장차 원아들을 "상당한 신사숙녀가 되도록" 힘쓰는 것이었다. 또 원아는 창설자의 자손에 한하며 창설자는 기금으로 100원 이상을 기부하고, 원아의 1개월 보육료는 2원으로 하는 등, 특수층이 아니고서는 부담하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이러한 교육 노선은 우리가 지향하는 어린이 교육과는 그 성질이 판이한 것이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요컨대 이 유치원은 일종의 귀족 유치원으로서, 이른바 동화교육을 위한 본보기 교육기관으로서 설립된 것이었다.

이화유치원은 1914년 1월 이화학당 당장 미스 프라이(Frey, Lulu E.)를 원장으로 하여 손탁호텔(Sontag Hotel)의 한 방에서 개원하였다. 이때 원아는 16명이었고, 교육은 교사 브라운 리(Brownlee Charlotte Georgia)와 한국인 조수 조애리시(趙愛理施)가 담당하였다. 이 유치원은 이화학당이 초등교육에서 고등교육에 이르는 완벽한 여성교육기관을 설립하려고 한 계획의 일환으로 설립되었으며, 미국 여성 선교사들에 의하여 운영되었다. 그러므로 이 유치원은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종교교육 기관이었으며, 민족적 자각에 의하여 한국인이 설립한 유치원이라고 볼 수는 없다.

반면 중앙유치원은 그 설립 과정과 정신이 이들 유치원과는 매우 달랐다. 『매일신보(每日申報)』 1916년 10월 11일자에는 "중앙(中央)에 유치원(幼稚園)이 생긴다 : 경성의 중앙되는 인사동에 유치원이 생기어 어떠한 집 아이든지 환영한다"는 표제 기사로 중앙유치원의 설립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이는 중앙대학교의 창립과 관계되는 매우 중요한 기사이므로 당시의 신문 보도를 그대로 인용해 본다(고어를 현대어로 고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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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선에도 교육기관이 점점 발달되어 보통학교와 중학교는 물론이요 전문교육에 이르러서도 목하의 급무되는 몇 학교가 설치되었음은 치하할만한 일이라, 그러하나 교육의 근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유치원의 설치가 없음은 유감이라.
경성에는 경성유치원이 있기는 있으나 이는 귀족유치원이라고도 할 만한 곳이 되어 중류 이하 가정의 자녀는 보내기 어렵고 또 보낼 만한 가정의 자녀라도 그 유치원에는 정원이 있은즉 옹이히 들여보내기 어려운 터이라. 교육에 뜻있는 사람들은 수년 전부터 일반 가정의 자녀가 입학할만한 유치원이 설립되기를 바라던 바 요전에 지방학생들을 위하여 안국동에다 육영사(育英舍)라 하는 기숙사를 만들고 지금 사감으로 있어 전력하는 영신학교 교감 박희도(朴熙道)씨와 중앙예배당 목사 장락도(張樂道)씨와 유양호(柳養浩)씨 등 세 씨가 협력하여 요사이 인사동 246번지 영신학교 분교실 안에다 정동유치원의 분교실로 유치원을 실시하게 되었더라.
여기서 경성유치원과 대비시켜 설명함에 있어서 더욱 분명하듯이, 중앙유치원이 우리 민족 자제들에게 유치원 교육이 절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중류층과 중류층 이하의 자녀를 교육 대상으로 하여 설립되었음을 보여 준다.

다소 뒤의 자료이지만 1921년 5월에 중앙유치원을 따로 건설하자는 계획을 추진하면서, 중앙유치원 간부회에서는 이병조(李秉祚), 홍병선(洪秉璇), 심명섭(沈明燮) 3인을 유치원 확장 기성 회원으로 추천하고 "제삼국민의 앞길을 장래의 조선을 위하여 잘 일하고 잘 싸울 용사를 양성하는 기관으로 설치할 작정"이라고 표방하였다.[3] 이는 앞의 경성유치원과 달리 중앙유치원이 중산층의 자녀를 교육대상으로, 우리나라에 중산층의 양성을 교육목적으로 설정하였음을 뜻한다. 그리하여 중앙유치원의 창원 정신은 기독교의 민족 운동 정신에 입각하여 우리나라를 위할 줄 아는 참된 우리나라 어린이를 키우는 데에 있었다고 집약할 수 있다. 즉 "장래의 조선을 위하여 잘 일하고 잘 싸울 용사를 양성하는 기관"을 세워 "제삼국민의 앞길을 열어 줌"을 목적으로 하며, "취미 있는 방법, 쉬운 교육과정, 부드러운 사랑으로" 원아들을 가르치며, '규칙적인 유치원 생활'을 통해 원아들을 건실한 사회인으로 양성하는 것이 그 창원 정신이었다.

중앙유치원은 정동교회 부속 유치원의 분원으로 1916년 9월 20일 개원하였으며, 원아는 25명이었다. 원장은 정동유치원 원장 미스 프라이가 겸하였고, 그 대리로 미스 브라운리가 근무하였다. 그런데 이들이 설립과 경영의 주체는 아니었고, 그 주체는 박희도, 장락도, 유양호 세 사람이었다. 원장 대리 미스 브라운리는 매일 와서 백남신(白南信), 장필순(張弼順) 두 여교사와 함께 어린이들을 가르쳤는데, 이들의 열성은 보육 사업의 전도에 많은 희망을 품게 하였다. 이와 같이 유치원 본래의 사명에서 떠나지 않고, 또 사회가 요청하는 창원 정신에서 중앙유치원이 창립되고 성장하였기 때문에 중앙유치원은 우리나라 어린이 교육에서 불후의 공적을 남길 수 있었다.
1.1.1.4. 중앙유치원 설립 시기에 대한 논의
앞에서 중앙유치원의 개원시기를 1916년 9월 20일이라 하였지만, 이 설립 시기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론이 있다. 이것은 초창기의 중앙유치원이 이화유치원과 마찬가지로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 외에는 거의 눈에 뜨이지 않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앙유치원의 설립 시기 문제는 중앙대학교의 창설 연도와도 직결되는 교사(校史)의 기초이므로 신중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중앙유치원의 창설 연도에 대해서는 5개의 이설이 있다. 창설 연도라는 근본 문제에 대해서 이설이 있는 것은, 중앙유치원의 개원을 오늘의 중앙대학교의 모태로 잡기 때문이고, 창설 당시의 중앙유치원은 오늘의 중앙대학교를 정정대수(亭亭大樹)에 견준다면 한 알의 씨앗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또한 선구적인 보육기관으로서 특기할 만한 문화사적 의의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거의 눈에 뜨이지 않은 존재였으며, 또 창원(創園)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밖에 경영상의 애로가 있어 중앙유치원은 몇 번의 휴원, 부활, 개원이란 고비를 겪었기 때문에 그 창설 연도에 대해서는 이미 1920년대에서도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5개의 설을 연대순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1) 1924년 11월 7일자 『동아일보』에는 "시내 사립중앙유치원에서는 오는 10일 하오 7시 장곡천정 공회당에서 창립10주년기념식을 거행할 터인데 1,2부에 분하야 원가 독창 무용 기타 자미스러운 여흥이 만히 잇슬 터이라고" 라고 보도하였는데, 11월 10일 중앙유치원 제10주년 기념 행사가 거행되었다는 이 기사를 근거로 역산(逆算)하면 1914년이 창설의 해가 된다.
(2) 앞서 본 바 있는 『매일신보』 1916년 10월 11일자의 관계 기사에는, 10월 17일에 개설될 것이라는 소식과 함께 상세하게 중앙유치원을 소개하고 있으며, 『매일신보』의 동년 크리스마스 날 기사에는 중앙유치원의 성탄절 행사 관계 기사가 상보(詳報)되어 있다. 『동아일보』 1926년 10월 31일자 기사에는 "시내 리문안 중앙유치원의 만십주년긔념축하회는 예뎡과 갓치 재작 이십 구일 오후 일곱시에 종로중앙청년회관 안에서 수천 관중이 운집한 중에서 열니였는데 꽃갓흔 원아들의 아귀자귀한 재능으로 순서가 끝나고 동 아홉시반경에 폐회하였는대...." 라고 기념식 모습을 사진으로 보도하였으며, 다시 1927년 3월 20일자에는 중앙유치원 '제10회 졸업식'이라 하여 졸업식 광경을 소개하고 있다. 이를 역산하면 1916년이 창설의 해가 된다. 이 1916년 창설설은 상기한 바와 같이 가장 확실하고 명백한 증거로 보아 가장 신빙할만한 설이다.
(3) 1963년 2월 5일 당시 총장 임영신 박사의 결재를 받아 편찬된 필사본 『연혁지(沿革誌)』에 수록되어 있는 1918년 4월 1일 설이다.
(4) 『매일신보』 1920년 5월 5일자 기사에는 중앙유치원의 '신설'을 보도하고 있다.
(5) 일제 당국의 통계나 문서 등에 나타나는 설로, 1926년도 『조선제학교일람(朝鮮諸學校一覽)』에 나타난 공사립 유치원 통계에서는 중앙유치원의 창설이 1922년 1월로 기재되어 있다.
이상의 제설을 검토해보면 (1)설은 중앙유치원이 처음 정동유치원의 분원으로 개원되어 정동유치원의 미스 브라운리가 원장 대리를 겸직하고 있던 관계로 그 창설 연도를 정동유치원(1914년 1월)과 혼동한 오해라고 생각한다. (2)설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3)설은 현재 중앙대학교 내외에서 공용(公用)되는 설이다. (4)설은 3.1 운동으로 중앙교회 내의 중심인물이던 박희도, 김창준(金昌俊) 등이 투옥되어 많은 어려움을 당하였고, 따라서 유치원도 운영자를 잃어 휴원 상태에 있다가, 이때 진용을 정비하여 재출발한 것이니 이것은 창설은 아니라 재건된 일자이다. (5)설은 1922년 2월 16일 부령(府令) 제11호로 「유치원규정(幼稚園規程)」이 처음 공포되었으므로, 동 규정 제3조에 의하여 새로 도지사의 인가를 받아 관청에 등록된 일자로 실제 창설 연도와는 다른 것이다.

이러한 것을 종합하면 중앙유치원이 실제로 설립된 해는 1916년이었으나, 그 때에는 아직 독자적인 운영이나 조직도 갖추지 못한 상태에 있었고, 1918년에 비로소 독립된 보육 기관으로서 발걸음을 내딛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면밀한 검토는 다시 한 번 할 필요가 있다.

1.1.2. 제2절 중앙유치원의 운영

1.1.2.1. 중앙유치원의 특색과 초창기의 모습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뚜렷한 민족의식과 교육목적 아래 온 겨레의 주시 속에서 출발한 중앙유치원은 몇 가지 특색에 힘입어, 겨레의 정성어린 뒷받침을 받아 계속 발전할 수 있었고, 사회/문화의 각 방면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첫째, 중앙유치원은 장래 국가와 민족을 이끌어 나갈 민족 지도자를 길러 내려고 하였다. 당시 일제하라는 식민지 체제에서 우리말을 교수 용어로 사용하여 투철한 민족의식을 원아들에게 불어 넣었던 것이다.
둘째, 서울의 중심부 종로에 자리잡고 있어서 상인 가정의 자녀가 많았다. 더욱이 신분과 직업에 구애됨이 없이 문호를 개방하여 문자 그대로사회의 중심에 위치해 있었다.
셋째, 유치사범과가 있어 보육의 이론과 실습을 연마하는 곳이었으므로 자연 유치원 교육의 대종이 되는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리하여 중앙유치사범과 출신들은 전국 유치원에 분포되어 당시 한국 기초교육의 초석을 다져놓았다.
넷째, 그 경영/유지가 전적으로 한국인의 힘으로 이루어지고 있어서 보육 기관으로서는 서울에서 한국인의 힘으로 경영되는 유일한 존재라는 점이 뚜렷한 특색이었다. 더욱이 유치원의 매월 월사금이 경성유치원의 4분의 1밖에 되지 않는 50전이라는 점도 이 유치원이 갖는 서민적 성격의 일단을 드러낸 것이었다.

중앙유치원은 초기에는 교육면에서 많은 애로를 겪었다. 1916년 브라운리에 의하여 유치원이 개원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낮은 경제적 수준으로 인하여 자녀들에 대한 부형들의 일반적 교육열이 저조하였고, 유치원 교육에 대한 이해는 매우 빈약하여 유치원의 월사금이 매삭 불과 10전(경성유치원의 20분의 1)이었는데도 규칙적인 유치원 교육을 시키려는 사람은 없다시피 하였다. 그래서 집집마다 사람이 가서 모집해 와도 원아는 겨우 30명 정도이었다.

당시 유치원 원아들의 수업연한이란 것도 막연하여 1년 이상 다니는 원아도 있었고, 유치원 구경이나 하는 듯 1달 남짓 다니다가 그만두는 원아도 있었다. 원래 계획한 교육과정대로 교육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웠고, 대개 보통학교 입학 시기에 와서 졸업장을 만들어 갔다. 이와 같이 유치원 교육을 실시할 수 있는 사회의 경제적 여건, 이에 따른 학부형들의 교육열과 시설 등에서 숱한 난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중앙유치원의 교육 수준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높았다.

중앙유치원에서는 노래/유희/그림/수공(手工) 등을 가르쳤다. 노래는 독일 민요 등 수준이 높은 것을 우리말로 옮겨서 가르쳤는데, 이는 대개 미국인 선교사들이 본국에서 사용하였던 유치원 교육법을 적용한 것이었다. 중앙유치원은 좋은 교육방법을 적용하고 많은 어린이들에게 골고루 교육의 혜택을 주려고 노력하였지만, 초기에는 경영난과 유치원 교육에 대한 이해 부족 등으로 유치원 과정을 다 마치는 원아는 그리 많지 않았다. 유치원이 설립된 이래 1926년 1월까지 약 10년 동안 310명의 졸업생, 사범과에 25명의 졸업생을 냈을 뿐이었다. 이러한 수치는 그 동안의 사회의 온정과, 그에 못지않은 심각한 경영난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1.1.2.2. 유치원 운영상의 곡절과 후원회의 조직
3.1 운동을 전후한 1910년대와 1920년대는 우리 민족사 전체가 심한 격동과 변천을 겪은 시기였다. 이러한 격동은 사회 전반에 걸쳐 많은 여파를 가져왔고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었는데, 중앙유치원도 이러한 파장에서 예외적 존재일 수는 없었다. 1916년 창설 이래 유치원의 본보기로 여러 가지 객관적 어려움을 감수하면서도 꾸준히 자기 유지/발전을 추구해 온 중앙유치원도 3.1 운동이 남긴 거센 여파에 따라 일시적으로 휴원하게 되는 불행을 겪어야만 하였다. 중앙교회는 3.1 운동의 첫 단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당시 중앙교회의 전도사로서 교회 활동의 양 날개 격이었던 박희도, 김창준이 각기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여 독립운동에 참가하고 일제에 체포/구금되어 복역하자 교회는 그 심각한 소용돌이의 한복판에 위치하게 되었다. 원아의 가정에서도 피검자가 많았을 것이고, 기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중앙유치원은 자연 일시 휴원할 수밖에 없는 정황이었다.

3.1 운동의 파동이 어느 정도 잠잠해지자, 중앙교회에 부임한 이홍주(李泓周) 전도사가 주동이 되어 유치원을 부활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이에 브라운리가 중심이 되고 유양호가 설립자가 되어 1920년 5월 5일 중앙교회에서 유치원을 다시 열고 “취미 있는 방법, 쉬운 교육과정, 부드러운 사랑으로” 라는 애초의 취지 아래 다시 어린이를 가르치게 되었다. 원장에는 유양호, 원감(園監)으로 이홍주 목사가 취임하였고, 이화학당 유치사범과를 나온 박채봉(朴彩鳳), 배애주(裵愛主), 이자성 (李兹成) 세 사람이 보모로 원아들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모집 인원을 100명으로 하여, 5세에서 8세까지의 어린이를 매일 9시 30분부터 정오까지 오전 수업만 하되 월사금은 50전으로 정하였다. 개원 날까지 38명이 응모하였으나 매일 10여 명씩 늘어났고, 중앙교회가 1919년 가을부터 목조 건물을 벽돌 양옥으로 개축하는 등 유치원 시설에도 주력하여 모범유치원이 되었다.

이와 같이 뜻있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중앙유치원이 부활하기는 하였으나, 그 운영에는 역시 어려움이 따랐다. 무엇보다 50전이란 ‘봉사적인’ 월사금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유치원 운영의 최저 경비도 감당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에 중앙유치원은 사회 유지에 호소하고 또는 가극대회(歌劇大會)를 열어 비용을 보충하기도 하였다. 경영난으로 고충을 겪던 1921년 가을에 유력한 후원회가 발족되었다.

중앙유치원을 위하여 서울 각처에서 금전 또는 물품으로 기부하는 인사들이 많았다. 1922년 여름의 상황을 잠깐 보면, 이 때 유치원에 대한 인식이 다소 높아감에 따라 자발적인 기부가 유치원에 많이 답지하였고, 각 신문에서는 기부자의 명단을 상세히 보도함으로써 이러한 경향을 더욱 고무하였다. 이와 같은 것을 생각한다면 중앙유치원은 바로 ‘겨레의 정성’ 이 키웠다고 하여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중앙유치원은 서울 중심부에 위치하였고, 모든 면에서 전국 유치원의 모범이며 대표격이었던 만큼 그 후원과 육성에도 전국적 규모의 성원과 관심이 집중되었다. 이러한 ‘겨레의 정성’ 의 대표적인 예로 1920년 9월 통영청년회(統營靑年會)의 후원을 들수 있다.

통영청년회에서는 활동사진반(活動寫眞班)을 조직하여 단장 김재균(金才均) 이하 8명이 전국 각지를 순회/상영하면서 많은 환영을 받았는데,1920년 9월 9~10일 양일간 동아일보사와 조선청년연합회(朝鮮靑年聯合會)의 후원으로 YMCA회관에서 활동사진회를 개최하였다. 레퍼토리는 서양인의 운동 경기 실황, 희극「오해」, 교육극「무지와 애견」, 사회극「오늬와 광영」, 인정극 「고집장이 주인」의 다섯 편으로 모두 단편물이었다. 입장료는 일반이 50전, 학생이 30전으로 비교적 고액이었다. 활동사진이란 문명의 새로운 영역이 지방청년회의 순회 영사회(映寫會)라는 형태로 보급된 것도 흥미롭지만, 그 입장료의 수익금을 모두 중앙유치원에 기부한 것에서, 새로운 문화활동과 민족교육에 대한 열정이 협동적 유기체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중앙유치원을 돕겠다는 종로 시민을 비롯한 민중들의 열렬한 성원 속에서 중앙유치원은 유지/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겨레의 정성이 아무리 뜨겁다 하더라도, 유치원을 경영함에 있어서 무한정 이에 의존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중앙유치원은 독자적으로 독립할 방도를 모색하여 중앙유치원 후원회를 결성하였다. 후원회 결성의 계기가 된 것은 1921년 5월에 개최한 가극대회이었다. 이 대회는 유치원 교육의 성과를 과시하는 한편, 입장료 수입으로 유치원의 경영을 보강하려는 의도에서 개최하였지만, 그 성과는 중앙유치원의 기대 이상이었다. 기부금까지 합하여 1,000원에 달하는 수입이 있었다. 이에 중앙유치원의 관계자들은 각계각층의 인사가 보여준 따뜻한 관심과 성원에 감동하여, 동포를 위하여 더욱 충실하고 완전한 유치원으로 발전시켜 나갈 것을 다짐하였다. 교실 하나 없이 교회당 건물을 빌려 쓴다는 것이 떳떳하지 못하다고 느껴 오던 중앙유치원 관계자들은, 30만 한국인이 사는 서울에 한국인이 경영하는 유치원이 볼 만한 건물 하나 없는 것은 민족적 수치라는 반성에 일치하여 1921년 5월 중앙유치원을 따로 건설하자는 계획을 추진할 요량으로 중앙유치원 간부회를 열었다. 이들은 이병조, 홍병선, 심명섭 3인을 유치원 확장 기성회 위원으로 추천하고 각계 유지의 기부를 얻어 기필코 훌륭한 유치원을 세우기로 뜻을 모았다.
1.1.2.3. 중앙유치원의 활동과 문화적 공적
중앙유치원은 여러 가지 면에서 시련을 받으면서도 올바른 교육을 시키려는 열의는 식지 않았다. 이 열의가 뭉쳐 중앙유치원의 지위를 굳히고 높였을 뿐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많은 활동을 하여 민중을 계몽하는 데 선봉이 되었는데, 그 중 크리스마스 행사는 내외의 관심을 끌었다. 크리스마스 축하식은 각 교회마다 개최하였지만, 서울 시내의 성탄 축하식 중 가장 중심이 되었던 것은 정동과 중앙예배당의 그것이었다. 이 때에는 유치원 원아들의 유희와 노래들이 부형을 비롯하여 일반 교인들의 감흥을 자아내게 하였다. 특히 원아들이 총동원되어 상연하는 예수 탄생을 내용으로 한 연극은 재치있고 재미있는 것이었다.[4]

국내에서 착실한 기반을 닦았고 국외적으로도 그 활동이 높이 평가되고 있던 중앙교회를 배경으로 설립된 중앙유치원도 단시일 내에 그 사회적 비중이 높아져, 어린이 교육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문화 향상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중앙유치원이 갖는 사회적 비중에 따라 이 유치원의 행사는 학부형뿐만 아니라 전 지역 사회의 관심사가 되었다. 중앙유치원에서 개최한 각종 운동회/음악회 행사는 사회의 근대화에 이바지한 바가 매우 컸다. 일례를 들면 1922년 10월 28일 장충단 공원(獎忠壇公園)에서 열린 중앙유치원의 ‘원아 및 가정연합회’ 는 중앙유치원의 연혁에서도 중요할 뿐만 아니라 한국여성사에서도 널리 주목하여야 할 행사이었다. 이에 대하여 당시 『동아일보』에서는 감격 어린 필치로 유치원 어린이와 그 자모(姉母)들의 연합운동회의 광경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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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아해들[5]의 자미 있는 운동도 관중의 박수거리가 되었으나 아해들의 어머니들이 다름질하는 광경은 실로 장관이었다. 머리 쪽진 아낙네들이 두 손을 부르쥐고 버선발 다름질함은 조선 개벽 이래의 처음이라 일반의 흥미도 일층 더하였음은 무론이요, 우리 가정도 얼마나 열린가를 볼 수 있다.[6]

가정주부들이 경주한다는 것도 당시로는 처음 보는 신기한 일이었겠지만, 이는 중앙유치원의 사회적 영향력이 바로 사회의 근대화에 어느 정도 기여하였는가를 보여 준다. 그것은『동아일보』의 지적대로 “우리 가정도 얼마나 열린가를 볼 수” 있는 것이었으며, 나아가 우리 사회에 있어서 여성해방운동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1923년 10월 16일에는 때마침 공진회(共進會)가 개최되어 지방 인사들이 많이 상경하고 있는 데 착안하여 어린이 교육이 얼마나 필요하며, 어린이들에게 좋은 품격과 성질, 건강한 체격을 길러 주는 유치원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선전하고 알리기 위하여 중앙유치원에서는 장충단공원에서 추기 대운동회를 열었다. 이 행사에서 천사 같은 어린이들의 운동경기/체조/유희/노래 등 여러 프로그램을 갖고 일종의 교육 전시를 하여 교육의 효과를 과시하였는데, 중앙유치원은 이와 같은 운동회를 통하여 유치원 교육 보급에 힘썼던 것이다.

1.1.3. 제3절 유치사범과의 설립

1.1.3.1. 유치원 규정의 공포와 유치원의 보급
1920년대는 교육에 대한 겨레의 열망이 높았고, 독립을 위해서는 어린이부터 훌륭한 한국인으로 길러내야 한다는 자각도 깊어가고 있었다. 특히 1923년도는 우리나라 어린이운동의 일대 앙양기었다. ‘어린이’ 라는 고운 말이 처음 생겼고, 『어린이』라는 잡지가 새로 나왔으며, 색동회가 창립되었고, 첫 어린이날 행사가 5월 1일 서울 천도교 강당에서 거행되었다. 어린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점고하자 중앙유치원은 그 해 가을에 100여 명이나 되는 지원자를 받아들이지 못하였는데, 협소한 교실 사정을 무릅쓰고 150여 명의 원아를 가르쳐야 하였으므로, 부족한 교실의 신축을 위하여 당국으로부터 7만 원의 기부 금품 모집 허가를 얻어 모금함으로써 바야흐로 확장과 발전을 위한 준비기에 올라섰다.

어린이운동이 활발하여지자 유치원에 대한 이해와 협조 또한 높아져 총독부에서는 1922년 2월 16일자로 부령(府令) 제11호로 소학교령에 포함된 「유치원규정」을 공포하였다. 1920년대의 유치원은 초창기에 비하며 상당한 발전을 보였다. 유치원 교육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고 유치원 자체도 질과 양에서 크게 향상되면서, 더욱 큰 발전과 향상을 위해서 시급히 요망되었던 것은 무엇보다 보모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이에 중앙유치원은 사범과를 설치하여 우리 손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보모를 양성하는 터전을 마련하는 데 주력하게 되었던 것이다.
1.1.3.2. 유치사범과의 설립
3.1 운동은 각 방면에 걸쳐서 그 후 모든 운동에 있어서 전진의 초석이요 출발점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겨레의 내일을 위한 민족교육에 대한 열의는 가장 주목할 만하였다. 이 때 많은 새 조류가 생기고 새 싹이 텄다. 특히 어린이를 잘 보살피고 대우하는 것이 문명사회라는 자각이 뜻있는 이의 공통된 구호였으므로 보육 운동 또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보육 운동에는 이전부터 두 갈래의 흐름이 있었는데, 하나는 일본인들의 지도를 받아 몇몇 개인이 설립한 유치원이었고, 또 하나는 선교사들이 전도에 뜻을 두고 설립한 유치원들이었다. 그러나 중앙유치원이 설립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으니, 이 유치원이 순전히 우리 민족의 손으로 세워지고 유지된 사실은 종래의 보육 운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어 주었다. 그 영향도 매우 커 요원의 불길과 같이 전국적으로 유치원 설립 운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러한 풍조는 당연히 다수의 보모를 필요로 하였고, 따라서 보모 양성이란 새로운 과제가 교육계에 제기되었다. 이 과제를 해결하고자 중앙유치원은 1922년 9월 원내에 사범과를 두었다. 이 일을 맡아 노력한 이가 유각경(兪珏卿)과 차사백(車士白)이었다. 유각경은 일찍이 정신여학교를 마치고 중국에 가서 보육을 전공하고 귀국한 인재이었다. 차사백은 일본 오사카(大阪)에 있는 램버드 보육학교를 마치고 1922년 서울에 돌아와서 중앙유치원에서 활동하면서 중앙유치사범과를 설립하는 데 적극 관여하는 등 초창기 보육 운동에 큰 업적을 남겼다.

“천진한 어린이의 동무가 되고 그의 어머니가 되어 장래의 제2세 국민을 조선 사람답게 기르자. 조선인의 살길은 어린이로부터 비롯하지 않으면 안 된다.”[7]라는 사범과의 설립 정신은 모든 사범과 학생의 흉금에 새겨진 모토이었다. 민족의 앞날을 광명으로 이끌 굳건한 민족혼을 지닌 인물을 어린이 때부터 육성해야 하며 “그 사명이 곧 우리들의 책임"이라는 자각은 사제 간에 맥맥히 흐르는 유대 의식이었다. 이때 유치사범과는 아래와 같은 표어로 가르쳤다.
귀여운 아이만 귀여워 말고 잘 입은 아이만 잘 대하지 말고 오히려 못 생기고 추해 보이는 아이들을 더 귀여워하는 것이 보모로서 가질 성품
그리하며 모교에서 받은 교육은 일선 유치원에 나아가 원아들을 사랑으로 가르치게 하여 중앙보육학교 출신은 어느 곳에서든지 환영받았다.
1.1.3.3. 유치사범과의 경영난
유치원의 수효가 증가됨에 따라 자격 있는 보모의 수요가 늘어났으므로 중앙유치원의 사범과 시설은 급격한 발전이 약속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의 힘만으로 사범과를 키워 나가는 것을 목표로 하였으므로 그 경영에서 심한 재정난을 겪었다. 우선 시설을 갖추는 것이 급선무이었다. 사범과 설치 당시의 시설은 형편없었다. 원래 유치원의 교실도 교회의 방 하나를 빌려 썼으므로 유치원 교육에서 불편한 점이 많았다. 사범과는 또 유치원의 한 구석에서 강의하는 실정이었으므로 사범과 교육에도 애로가 많았으며, 경비 사정은 현상 유지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중앙유치원의 경상비 및 임시비의 정확한 평균 금액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연간 2,000원을 초과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월사금 수입의 5배 이상일 것이므로 기본 재산이 없는 중앙유치사범과로서는 항상 경영난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이 재정난을 타개하고자 관계자들은 1924년 2월에 회의를 열어 일반으로부터 기부금을 걷기로 하고 총독부에 금품 모집에 관한 허가원을 제출하였다. 목표액은 70,000원이었으며, 신학년도가 시작되는 3월 안으로 이 목표를 달성하여 교실 증축과 시설 개선을 계획하였으나, 모금의 성적은 부진하여 약간의 시설을 보완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이 때 김근하(金根河)란 사람이 “모든 경비를 보조하되 경영진의 일원으로만 참여하겠다”는 제의를 해 오자, 이를 수용하여 운영 실무진에도 변동이 있게 되었다. 원장과 원감은 사임하고 5월 24일에 최병헌 목사가 새 원장으로 취임하였으며, 중앙예배당의 장유회에서 주도권을 잡고 있던 운영권은 엡윗청년회에서 맡게 되었다. 이에 김호명(金浩明) 등 이사가 선임되어 전 설립자 박덕유를 위시한 유지와 유치원을 공동 운영하게 되었다.

1.2. 제2장 중앙보육학교의 설립과 발전

1.2.1. 제1절 중앙보육학교의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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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유치원 실질적인 설립자 당시 영신학교 교감 박희도, 중앙보육교사 차사백
1.2.1.1. 중앙보육학교 인가
중앙교회 구내에 셋방 든 격이었던 유치사범과가 보육학교로 인가를 받고 창설된 것은, 일본에서 군국주의가 대두하기 이전 이른바 다이쇼 데모크라시 운동이 한창이던 1928년의 일이었다. 이때는 우리 민족운동에 있어서 좌우협동전선이 이룩되어 [신간회]]의 깃발이 활기 있게 나부끼던 때요, 3.1 운동 이후의 소위 완화 정책인 문화통치가 최후의 광염(狂炎)을 발하던 때이었다. 그 동안 사범과 육성을 위하여 애써 온 장두현, 박희도, 김상돈(金相敦), 신태화(申泰和) 등은 사범과의 면모를 일신하며 충실한 보모 양성기관으로 발전시키고자 중앙보육학교(中央保育學校) 설립을 출원하여 1928년 9월 5일 인가를 받았다(학제 199호). 이로써 중앙보육학교는 획기적 발전의 제일보를 내딛었다.

설립자들은 부풀은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교사의 신축, 재단의 확립 등에 관한 구체적 계획을 세웠다. 우선 교사를 유서 깊은 옛 절터에 자리 잡은 정동 1번지의 8호인 아담한 한옥으로 옮기기로 하고, 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정도로 신입생을 뽑아 2년간의 충실한 교육으로 어린이 보육의 기수들을 양성하게 되었다.

중앙보육학교는 한국인이 경영하는 신문과 잡지에는 대체로 전문 정도 학교로 간주되었으며, 일본인의 저서나 통계에는 중등 정도의 각종학교(各種學校)나 전문학교 정도 학교로 간주되고 있어, 그 평가가 일정치 않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비록 「전문학교령」에 의한 3년제 전문학교가 아니더라도 전문학교 정도로 취급되는 것이 통념이었다. 중앙보육학교는 국내의 3개 보육학교[8] 중에서 제일 많은 학생을 수용/교육하고 있어 보육학교 중에서는 가장 활기 있는 운영을 계속하였다.
1.2.1.2. 교수진 구성
중앙보육의 교수진은 그 초창기나 일제 말엽에 있어서나 모두 당대의 인재를 망라한 최고의 진영이었다. 제2회 졸업생을 내던 1930년도의 교수진은 아래와 같다.
박희도(윤리), 독고선(음악/교육학), 차사백(보육), 이형우(영어), 홍난파(음악), 김영제(체조), 정일준(유치원보모), 장익(미술), 박호희(서무), 옥준진(경제), 조병옥(경제), 박용래(아동위생/사정의학), 방정환(아동문학)

수업은 하루에 6시간씩 하였다. 2학년 때에는 유치원으로 실습을 나가는데, 오전만 실습을 하고 오후에는 정상 수업을 하였다. 실습 성적은 유치원에서 평가하여 직접 학교로 보냈다. 다른 학교와는 달리 모든 선생이 수업 시간에 일본어를 쓰지 않았으며, 그만큼 사제 간은 정다운 면이 있었다. 홍난파/독고선 등 젊은 음악 교사들도 인기가 있었지만, 역시 교장 박희도의 윤리학 시간이 학생들에게는 인상 깊었다. 큰 체구에 유머도 잘 하는 호협한 박희도의 풍채도 풍채려니와, 그는 학생들에게 민족을 깨우쳐 주고 이 사회를 위하여 봉사해야 한다는 사상을 주입시켜 주어 큰 감격을 받았던 것이다. 박희도 교장의 인망과 영향력도 컸지만, 초기의 중앙보육학교에는 우리나라의 문화사에 찬연히 빛나는 방정환/홍난파의 두 젊은 예술가가 있었다. 이들은 길지 않은 생애를 중앙보육학교를 위하여 헌신적으로 봉사하였다.

1.2.2. 제2절 중앙보육학교의 발전

1.2.2.1. 1930년대 시대적 배경
1931년 9월 일본 군부는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켜 중국에 대한 침략을 시작하였고, 중국에 대한 본격적인 침략을 위하여 일제는 한국을 병참기지로 삼고 한국인을 앞잡이로 이용하려 하였다. 시급히 국방 체제를 강화한다는 일제의 전략적 요구에 따라 한국의 광업/공업은 약진하여 방적/멘트/비료/제철/화약 공장이 세워졌으며, 북부 조선에는 특히 화학 공업이 발달하여 본국에도 없는 대규모의 현대적 질소비료공장 등이 건설되었다. 이리하여 풍부하면서 저렴한 노동력과 수력 전기를 가진 한국은 일본 자본의 집중적 투자로 급속한 공업화, 특히 군수산업이 발달하여 대륙에서의 전쟁을 위한 병참기지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갔다.

이에 발맞추어 일제의 식민정책 내지는 교육정책도 모습을 달리 하게 되었다. 즉 이전의 점진적인 동화 정책으로부터 급격한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정책이 추진되었다. 모든 조선인이 황국신민으로서의 자각과 신념을 갖고 일본인과 다름없는 정신적 자세를 갖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한국의 인적 자원을 전쟁에 동원하려는 소위 ‘시국의 요청’ 에서 취해진 방책이었으며, 그것은 파시즘의 열광성을 띠우고 진행된 것인 만큼 민족교육 및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에 대하여 중대한 위협이었던 것이다.

미나미 지로 총독은 부임(1936년 8월)하면서 한국 민족의 의사에 반하는 황민화 운동을 강압적으로 추진하여 나갔다. 1937년 7월에 시작된 중일 전쟁은 점차 확대 장기화하여 가서 대규모의 소모전에 대비하며 국력의 총동원이 요청되었으며, 1938년 3월에는 「국가총동원법(國家總動員法)」이 성립되어 전시체제는 강화되었다. 미나미는 대륙에서의 전쟁을 위하여 조선의 병참기지화를 철저히 하고자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부르짖으며 “우리들은 황국 신민이다. 충성으로써 나라에 보답하자”로 시작되는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를 만들어 이를 각급학교/관공서/공장 등에서 조회 때마다 외우도록 하였다. 그는 또 신사(神社)참배운동을 일으켜 일면일사(一面ᅳ社)를 목표로 극성을 부렸고, 매월 첫 날을 ‘애국일’ 로 정하고 이 날에는 일본 국기의 게양, 신사 참배, 황국신민서사 낭송 등을 강요하였다. 이 신사참배는 기독교도에게까지 강요되어 장로교회는 가장 강경한 탄압을 받아 200여 교회가 폐쇄되었고 2,000여 신도가 검거되는 파탄에 이르기도 하였다.

1938년에는 한국 청년들을 그들의 침략 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지원병 제도를 폈으며, 미나미 총독은 민족말살정책의 하나로 1940년 2월부터 모든 조선인에 대하여 일본식으로 창씨개명(創氏改名)할 것을 강요[9]하여 모든 관리를 강제 권유에 동원하였다. 창씨를 강요한 후에는 중등학교 교육에서 조선어 교육을 완전히 폐지시키고 일본어 상용령(常用令)을 내리어 모든 관공서/학교/회의장에서 우리말 사용을 금하였다.

이러한 민족말살정책 하에서 중앙보육학교가 민족교육을 실시하여 나간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중앙보육학교는 임영신이 학교를 인수하면서 이러한 시대적 난관을 뚫고 민족교육의 장으로서 더욱 발전을 모색하여 갔다.
1.2.2.2. 임영신의 중앙보육학교 인수
임영신의 중앙보육학교 인수는 학교 발전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이 부문에 대해서는 제3장에서 자세히 다루게 될 터이므로, 여기서는 간단히 개황만을 서술하기로 한다.

교육 구국 운동의 웅대한 포부를 가지고 미국 유학을 떠났던 임영신은 1932년 1월, 출국한지 9년 만에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 후 서울 YWCA 총무로 취임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에 응하였는데, 미국에서의 오랜 견문으로 견주어 볼 때 조국의 현실은 너무 초라하고 뒤떨어져 있었다. 그는 한국의 실정을 더 알고 싶었던 차에 마침 이 때 국제 YWCA 서기 미스 라이언(Sarah Lyon)이 한국의 제반 사정을 시찰하고자 파견되어 제네바에서 한국에 왔으므로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라이언 일행과 함께 남북한 일대를 순시하였다. 모든 유리한 사업, 풍부한 광산물 자원은 일본인에게 독점되어 있었으며 민중의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그는 이 후진성에서 탈피하기 위해서는 오직 교육이 시급한 과제이며, 학교를 빨리 세워야 하겠다는 열망을 누를 길이 없었다.

임영신은 도미하기 전 23세 때 이화학당에 있을 무렵 미국 여성과 함께 나와 본 일이 있는 한강변 흑석골에 교지(校地)를 정할 것을 결심하였다. 앞에는 한강의 맑은 물, 뒤에는 관악(冠岳)의 묏부리가 병풍처럼 둘려 있는 아늑한 분지(盆地)에는 송림이 울창하여 한눈에 마음이 가던 그 곳을 찾아갔다. 송림으로 덮인 이곳저곳에는 양녕대군(讓寧大君) 후손들의 선영(先瑩)이 산재해 있었고, 언덕 아래에는 샘이 있고, 넓은 논밭 너머 남산이 가을 하늘에 뚜렷하였다. 그는 그 날 밤 꿈속에서, 낮에 본 그 샘에서 청룡(靑龍)이 운무를 헤치면서 등공(騰空)하는 장엄한 광명을 보았다. 승천(昇天)하는 청룡의 모습은 그가 품은 개세(蓋世)의 뜻과 그 실현의 상징으로 보였다. 그는 깊이 생각하는 바 있어 이 곳에 20만여 평의 땅을 샀다.[10]

이리하여 운영난으로 부침을 거듭하여 온 중앙보육학교는 그 동안 미국에서 피나는 노력 끝에 모은 돈으로 민족혼을 심기 위한 젊은이의 교육을 생각해 온 임영신에게 인수되었다. 그가 중앙보육학교를 인수한 시기는 1935년 2〜3월경이었으며, 교장으로 취임한 때는 동년 4월이었다.[11] 그가 학교를 인수할 당시에는 부채와 학교 간판 하나와 10명의 학생이 전부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날의 중앙대학교를 기약하는 첫걸음이었다.

임영신이 중앙보육학교를 인수했을 때 교사는 창신동 131번지에 있었다. 앞서 중앙교회 구내에서 기거하던 사범과가 보육학교의 인가를 받고 정동 교사로 이전하였는데, 이 곳은 본래가 관유지이어서 명도 요구가 있었으므로 선교사의 개인 주택으로 쓰고 있던 창신동으로 이사하였던 것이다. 이 곳은 개인 주택이라고는 하나 넓은 방이 몇 개씩이나 있어 교수에는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운동장도 없는 곳이라, 임영신은 이 곳으로 이사 온 지 1년쯤 되어서 더욱 학교다운 시설을 갖춘 서대문 소재 피어선 성경학교로 교사를 옮겼다.

피어선 성경학교는 1912년에 여행차 입국한 침례교 목사 피어선(Arthor T. Pierson)이 성경 보급을 위하여 사재를 기증하여 신축한 건물로 1915년에 완성된 붉은 벽돌 3층의 견고한 양옥으로 교실 4개와 강당 그리고 기숙사로 쓸 수 있는 방도 있었다. 피어선 교사는 활기에 넘쳐 있었다. 교직원과 학생을 합해서 100명 남짓한 살림이었으므로 가족적인 분위기에 학생 생활도 즐겁고 충실하였다.

그러나 피어선 교사에서의 안온한 생활은 오래 계속되지 못하였다. 건물을 비워 달라는 요구가 건물 관리인으로부터 계속 제기되었다. 셋방 살림인 이 곳에서 안정성 있게 발전할 수 있는 계획을 세울 수도 바랄 수도 없었다. 이에 임영신 교장은 건물주인 측으로부터의 끈질긴 요구에 시달리면서 곧 흑석동 교지에 새 교사를 신축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러나 미국에서 귀국할 때 갖고 온 30,000달러는 교지 구입, 중앙보육학교 인수 시의 학교의 부채 청산 등으로 소비되고 국내 유지로부터의 기부금 조달이라는 것도 일제의 압력과 감시 때문에 가망이 없는 일이었다.

이에 임영신 교장은 학교 기금을 모금하기 위하여 재차 도미할 계획을 세웠으나, 자금 형편은 이제는 여비 5,000원을 마련하기도 힘들 정도이었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그를 향하여 상냥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어느 날 이름도 모르는 두 청년이 찾아와서 그의 도미 비용에 써 달라고 저금통장을 내놓았다. ‘홍금파’라는 소녀의 이름이 적힌 이 통장에는 6,000원이란 대금이 예금되어 있었다. 이렇게 해서 임영신은 미국으로 떠날 수 있었다. 그가 미국에서 혼신의 힘을 들여 모금운동을 벌였고, 이러한 노력의 결과 중앙보육학교와 이어 중앙대학과도 깊은 인연을 갖게 된 파이퍼 재단이 설립되었다.

임영신이 학교 기금의 조성을 위해 미국에서 활동하는 동안 중앙보육학교는 1937년 12월에 명수대(明水臺)에 새로운 교사를 준공하였고, 1938년 5월 2일에는 서대문의 피어선 성경학원을 떠나 흑석동의 새 교사로 이전할 수 있었다. 본관이 완성된 후 다시 기숙사 등 부속 건물을 짓고 1938년 5월 2일 교기를 선두로 교직원/학생들은 대오를 짜고 행진하여 피어선 교사를 출발하여 신 교사에 들어섬으로써 오늘날의 중앙대학교의 터전이 마련되었다.
1.2.2.3. 학생 생활의 지도와 교수의 활동
오늘의 상식에서 보더라도 당시 중앙보육학교의 학생 생활에 대한 지도/감독은 매우 엄격하였다. “행동에 대한 지도만은 철저히”라는 것이 불문율이었으며, 기숙사 생활을 하는 학생에 대해서는 물론, 하숙이나 자택에서 통학하는 학생에 대해서도 담임교사가 방문하여 생활을 살피며 되도록 가깝게 모여서 지내도록 지도하며 서로 돕고 서로 규제하는 방향으로 이끌었다. 독서하는 데 있어서도 양서(良書)만 골라서 교장이나 교사의 동의를 얻은 후 읽도록 권장하는 정도였다.

임영신 교장이 취임한 이후 중앙보육학교의 기풍은 더욱 일신되었는데, 그의 항일 기질은 더욱 뜨거워졌다. 일제 때의 학원, 특히 사립학교에는 항일적 체질, 반일적 기풍이 감도는 것이 공통된 현상이요 전통이었다. 한국인으로서는 배워도 출세는커녕 적당한 일자리를 얻는 것도 하늘에 별따기 같아 “배워서 무엇 하느냐?” 하는 낙망과 분노 속에서 헤매는 학생이 많았다. 이러한 학생들의 심정을 이해하고 위로/격려해 나갈 만한 인격 있는 교사가 요망되는 상황이었지만, 총독부 학무 당국은 교사 채용에 있어서 그러한 학생들에게 희망과 달관을 주는 인격적 면이나 교육자적 열성은 도외시하고, 오직 일본어에 숙달하고 정규 전문대학을 졸업하였는지 여부의 외형적인 것에 치중하여 소위 ‘간판 위주’와 ‘자격 교원’ 채용을 권장하여 학생과의 갖가지 대립을 일으켜 맹휴 사건의 원인이 되는 등 학해(學海)의 풍파는 높아만 갔다.

그러나 엄하면서도 자애로운 분위기 속에서 훌륭한 교장과 교사 밑에서 민족교육을 받는 중앙보육학교 학생들의 학교에 대한 애착심은 남달리 컸다. 다음 소개하는 『여성(女性)』 1939년 2월호에 실린 문이순(文李順)이라는 졸업생의 졸업 소감은 당시 중앙보육학교의 교육내용과 학생지도가 어떠하였는지를 여실히 보여 준다.
흐르는 눈물, 그 눈물 속에 지나간 학창 생활의 꿈같은 추억들,
평화의 동산에서 배우라 울리는 거룩한 종소리.
봄날의 푸른 잔디에 엎드려 클로우버 네 잎사귀를 얻으면 행복이 온다고 하여 애써 모으던 그 때!
그 말이 참말이 아닌 줄은 이미 알면서도 공연히 재미있어 모으던 그 때의 철부지한 심사가 다시 그리워진다. 향기로운 라일락의 보라색 꽃잎이 떨어진 곳에서 어여쁜 인형의 옷을 만들 때가 그리워진다. 아침 Chapel 시간의 그 성스럽던 순간까지도 나는 영원히 버리고 떠나는구나. 저 끝없이 넓은 광야를 나는 달음박질해서 가야 되겠다.
우정은 건강과 같아서 그것을 잃게 될 때에 새삼 그 귀중함을 깨닫는다는 고언(古諺)과 같이 졸업은 박두하며 교문을 나서 제복을 벗을 생각을 하니 학교에 대한 애착심이 더 한층 새로워진다. 즐거운 것도! 괴로웠던 것도! 울고 웃었던 것도! 모두가 섞이고 조화되어 심원(心園)의 화폭(畫幅)이 되고 추억이라는 시(詩)가 되어 나의 기악 속에 뚜렷하고나, 그리고 몇 사람 안 되는 클라스메이트도 전보다 더욱 친절해지고 다정해지는 듯싶다. 부드러운 바람 속에 이별의 애수가 숨어 온다. 나의 이별은 봄날의 화려한 애수이여!
나는 나의 일생을 내 자신의 안락만을 위하지 않고 의를 위하여 동포를 위하여 힘쓰리라고 나는 마음깊이 작정하였다.
그러면 나의 학창이여, 잘 있기를.
젊은 여인 하나 새벽길을 홀로 굳세게 걸어가리라.

일제의 말기적 발악이 광란하던 때에 자신의 안락이 아닌 “의를 위하여 동포를 위하여 힘쓰리라고 나는 마음 깊이 작정” 하는 용기 있는 결단이야말로 중앙보육학교의 교육정신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 할 것이다.

1.2.3. 제3절 일제 말기의 중앙보육학교

1.2.3.1. 학원의 전시체제와 휴교
이른바 동아신질서(東亞新秩序)의 건설을 부르짖고 나선 일본독일,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더니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초기에 나치 독일군이 우세를 보이자 미국, 영국에 전쟁을 선포하여(1941년 12월 8일) 대전을 일층 확대시켰다. 전쟁은 동남아시아로부터 태평양 지역으로 확대되었고, 일본의 한국 민족에 대한 물심양면의 압박은 발악적이었다. 태평양 전쟁 초기에는 한동안 기세를 올리던 일제도 미국의 본격적인 반격전 앞에 그들의 군국주의적 광열(狂熱)도 무색해져 갔다. 병력 부족을 메우기 위하여 일제는 학도지원병이란 이름으로 학생들을 강징하였고, 징병 제도를 실시하여 우리 청년들을 패색 짙은 전선으로 몰아 세웠다.

1941년부터는 교육 연한이 단축되었으며, 1943년 12월에는 ‘전시교육비상조치’ 로서 이공계 학교를 확충하고 법문계 학교를 감축하여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는 정원의 50%, 경성고등공업학교는 정원이 배나 증가되었으며, 평양에 고등공업학교, 대구에 고등농업학교 등이 신설되었다. 각급 사립학교도 가중되는 탄압과 간섭으로 준 공립이 된 셈이며, 1943년 가을부터 남자 전문학교생과 대학생은 소위 학도지원병에 강제 ‘지원’을 당하였고, 학교 교육은 사실상 종지부를 찍은 셈이었다.

태평양 전쟁의 핍박 속에서도 임영신 교장의 자상하고도 굳센 지도 아래 평온하게 충실한 배움의 나날을 보내던 교직원/학생들에게, 전기한 바와 같은 「전시 비상교육령」은 예기치 못한 일은 아니었으나 너무나 큰 타격이었다. 중앙보육이 ‘각종학교’ 로서 정비 대상이 되자 일본군 통신대에서 교사를 접수하려 하였으나, 임영신 교장의 완강한 항거로 이를 물리칠 수 있었다. 중앙보육학교는 이른바 ‘전시교육' 나아가서는 ‘적전 교육’ 단계에 들어서자 각종학교로서 조만간 휴교 내지 폐교되어야 할 처지에 있었다. 일본군 사령부는 중앙보육의 위치와 시설이 통신 부대용으로 적합하다고 탐내고 또 교장이 조선인 여성임을 얕보았는지 교사 명도를 명령하고 접수 명령까지 파송하였다.

그러나 임 교장은 일본군의 총칼 앞에서 조금도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학무국을 통하여 교섭하여도 교육 목적 외에 이 정성들인 교사를 내줄 수 없는데, 하물며 강압적인 요구는 절대로 수락할 수 없다고 꾸짖으며 나를 죽이기 전에는 한 발자국도 교사 안으로 못 들어간다고 결사의 기백으로 항거하여 강폭한 그들의 콧대를 꺾어 끝내 교사를 지켰다. 그러나 1944년도부터는 신입생 모집을 중단하였고, 1945년 3월에는 17회 졸업생 40명의 졸업과 함께 휴교되었다.

1.3. 제3장 승당 임영신의 민족을 위한 교육활동

1.3.1. 제1절 임영신의 애국애족 사상과 구국 교육 정신의 형성

1.3.1.1. 임영신의 애국애족 사상
이 글은 일제 식민지하에서 승당(承堂) 임영신(1899〜 1977)이 애국정신에 입각한 민족교육을 구현시키기 위해서 중앙보육학교를 인수하여 다시 세우고, 그것을 어떻게 거듭나게 키워왔는가에 관해서 고찰한 것이다.

승당의 교육 정신은 철두철미 ‘의’ 와 ‘참’ 에 바탕을 둔 민족주의적인 것이었다. 그와 같은 교육정신을 구현시키기 위해서 승당은 일제하의 한국에서는 고등교육기관이었던 전문학교에 해당되는 ‘전문 정도 각종학교’ 의 하나인 중앙보육학교를 그의 나이 36세 때인 1935년에 인수한 이래 1977년 77세를 일기로 영면할 때까지 42년 동안 여성의 몸으로, 그것도 오로지 ‘혼자의 힘’[12]으로 고군분투/전심전력 피눈물 나는 노력을 경주하여 중앙보육학교에서 중앙여자전문학교로, 중앙여자전문학교에서 중앙여자대학으로, 중앙여자대학에서 남녀공학인 중앙대학으로, 중앙대학에서 종합대학인 중앙대학교로 발전시켜 미래에 크게 웅비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승당이 중앙보육학교를 인수하던 당시의 전문학교는 중등학교인 고등보통학교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에 입학하는 학교이었다. 당시에는 일제의 식민지주의 교육정책에 따라 일제가 서울에 설립한 경성제국대학이 있었으나 그것은 식민지대학이었고,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의 대학은 설립이 허락되지 않아 전문학교는 한국인에게 있어 한국 안에서의 최고의 고등교육기관이었다.

‘의' 와 ‘참’ 에 바탕을 둔 민족주의적인 교육 이상의 구현을 위한 승당의 독자적인 노력의 진면목은 그의 행적과 교육에 관한 수많은 연설문/식사/간행사 등에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연설 가운데서 몇몇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중앙보육학교를 인수한 승당은 1935년 4월 첫 취임사에서,
나는 비록 여자이지만 '의'에 죽고 '참'에 산다. 나는 우리나라 자녀들을 위하여 평생 교육 사업을 하기로 결심하고 미국 가서 많은 것을 배우며 또 돈을 벌기 위하여 많은 고생을 했으나 오늘 이 자리에 서게 되니 감회가 크고 여러 학생을 만나게 되니 내 마음 심히 기쁘고 내 소원을 이루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13]
라고 하여 ‘의’ 와 ‘참’ 을 강조하였다. 당시 중앙보육학교 교사이었던 이영보는 계속해서 “승당은 신축 교사를 손수 다듬으면서 조회 시간에는 언제나 학생들에게 학교 신조와 목표를 외우게 하였는데 '의에 죽고 참에 살자' 는 표어는 오늘날까지 계속 대중앙의 신조가 된 것이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1935년부터 1937년 사이에 학생이었던 조성녀(趙成女)는
…… 이리하여 나는 중앙보육학교(서대문 피어선 교사)를 다니게 되었다.… 여기서 '의에 죽고 참에 살아보자' 는 것이 승당의 강인한 신조이었다.[14]
고 술회하고 있다.

1943년 4월부터 1945년 4월까지 재학하였던 김옥련(金玉連)은
임영신 교장 선생님의 가르침 속에 강조하신 점은 참된 마음을 가지고 대의(大義)를 위해서 자기 몸을 바치는 의지와 행동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15]

그 이후의 승당의 ‘의’ 와 ‘참 에 바탕을 둔 애국애족의 교육정신과 관련된 연설문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1957년 11월 13일 『조선일보』에 발표한 글에서 승당은,
…… 인격을 도야하고 국가를 사랑하며 땅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공경하는 학생을 길러.... 국가의 부홍과 문화 개발 그리고 과학의 진흥에 이바지할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균등한 생활을 유지시키는 것이 나의 목적하는 바 의도.... [16]
라고 하여 개인의 완성, 국가와 민족의 번영, 문화의 발전, 균등한 복지사회의 건설 등을 지향하는 교육을 실시하는 것이 자신의 교육관이었음을 밝혔다.

한때 중앙대학교 총장직을 사임하였다가 1963년 5월 23일 다시 총장으로 취임할 때 행한 취임사에서 승당은,
…… 중앙대학교는 나의 전 생애이며 나의 모든 목표이기도 합니다. 대한민국이 지상에 존재하는 한, 본인의 이름과 중앙대학교는 분리할 수 없습니다. 내가 항상 신에게 기원하고 바라는 것은 우리나라를 위한 영원한 터전으로 그리고 우리 민족을 위한 영원한 생명수와 태양으로 중앙대학교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중앙대학교는 우리 민족의 행복과 평화 그리고 자유의 원천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동시에 본인은 중앙대학교를 자유세계에 광명을 갖다 주는 밝은 태양으로 만드는 나의 모든 노력에 대하여 신은 끊임없이 축복을 보내 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엄숙히 기도드립니다.
라고 하여 중앙대학교와 자신과를 동일시하는 동시에, 그가 중앙대학교를 창설한 의도가 나라와 겨레의 영원한 자유, 평화, 행복 그리고 자유세계에 공헌함에 있음을 밝혔다.

그리고 1964년 5월 18일 미국여성단체에서 행한 연설에서 승당은,
…… 일본의 폭정에 대한 열렬한 지하운동 지도자 한 사람보다는 참된 교육시설을 갖추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나는 믿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장차 독립운동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학교 설립을 준비했으며…
라고 하여 일제하에서는 민족 역량의 배양과 독립운동의 지도자 육성이 최상의 항일 방법임을 깨달아 학교를 세우고 그것을 육성하였다고 술회하였다.

1972년 3월, 37년에 걸쳐 키워온 중앙대학교를 떠나면서 행한 총장 이임사에서 승당은,
중앙대학교가 창립된 지 반 세기가 지났습니다. 민족적 자각으로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어린이 교육을 위해 중앙유치원이 출범의 소리를 울린 지 반세기… 반세기 동안 나의 몸과 정열, 온갖 것에 모든 심혈을 바쳐 오늘의 대중앙으로 성장한 것은 나의 전 생애의 감격이며, 내 생애를 모두 이 곳에 쏟을 수 있었던 원천은 평생의 신조인 ‘의에 죽고 참에 살자’ 는 일관된 정신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잃었던 조국을 다시 찾은 기쁨과 함께 이 학교가 바로 나의 생명이요 나의 보람이요 나의 땀이 엉킨 모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중앙은 나의 것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들의 것입니다. 그리고 임영신이 영원히 조국에 드리는 나의 모든 것입니다.[17]
라고 하여 자신이 조국 광복에 헌신할 수 있었고 중앙대학교의 건설에 힘이 되었던 원동력은 오로지 필생의 신념인 ‘의’ 와 ‘참’ 의 정신에 있었음을 재삼 강조함과 아울러 자신이 피땀으로 이룩한 중앙대학교를 비롯한 ‘재단법인 중앙문화학원’ 을 바로 여러분의 것, 즉 사회의 공기로 하며, 그가 그렇게도 평생을 통해서 사랑한 조국에 바친다고 하였다. 실로 조국과 민족은 그에게 있어 영원한 사랑의 대상이었고, 중앙대학교와 중앙문화학원은 승당 임영신의 모든 것이었다.

이상의 승당의 몇몇 연설의 예에서 자주 나오는 단어들은 조국/국가/우리나라/국가의식/민족/우리 민족/민족의식/자유/독립운동/의/참 등이다. 이러한 낱말 속에 승당의 근본 사상과 행동 양식의 바탕이 짙게 담겨져 있는 것이다.
1.3.1.2. 구국교육정신의 형성
이상과 같은 '의’ 와 ‘참' 에 바탕을 둔 승당의 철두철미한 애국애족의 정신은 이미 그의 유년기에 형성되었던 것 같다. 기독교(개신교) 신자이자 민족의식이 강하였던 그의 아버지 선호 임구환(宣鎬 任九桓)의 영향을 받은 승당은 5세(1904) 이후, 기독교 교회와 기독교계 성경학교인 향리의 심광학교(心光學校)를 다니면서 최득의 선생으로부터 한글과 기독교 성경을 배우고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 때 마태복음 제5장 제13절의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라는 구절이 승당의 뇌리에 강하게 새겨졌던 것 같다. 그 맛을 잃으면 소금으로서 구실을 못한다는 성경의 가르침은 승당으로 하여금 ‘세상의 소금’ 을 자임하게 하였고, 기어이 자신의 삶의 보람을 관철하겠다는 그의 평생의 신념이요, 승당의 전 생애 속에 맥맥이 흘러 구현되었던 '의에 죽고 참에 살자' 는 정신과 상통하는 바가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승당의 인격 형성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였던 유년기와 소년기의 그 같은 기독교의 영향과 함께 승당에게 끼친 또 하나의 크나큰 영향은 일제 침략에 의한 망국의 비애를 온 겨레가 뼈저리게 당하던 당시의 시대 상황이었다. 승당은 부모나 형제 그리고 이웃으로부터 가증스러운 ‘왜놈’ 의 만행과 약탈과 폭압의 이야기를 듣고, 또한 일본인의 횡포를 몸소 목도함으로써 그의 애국심과 항일 사상의 싹이 트기 시작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반면 일본인들과는 대조적으로 친절하고 학교와 병원 등을 세워 한국을 돕는 미국인 선교사들의 행적은 승당으로 하여금 자연히 친미반일적인 생각을 갖게 하였을 것이다.

승당이 15세 되던 1914년에 그의 인생에 있어 천혜(天惠)의 호기가 찾아왔다. 미국인 선교사로서 1913년 9월 1일에 전주기전여학교(全州紀全女學校)[18] 교장에 취임한 미스 콜튼(Miss Susanne Avery Colton ; 한국명은 孔貞純)이 전주로부터 승당의 향리를 찾아와, 바로 승당의 집에 유숙하면서 청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승당은 미스 콜튼에게 전주에 가서 공부하게 도와 달라고 간청을 하였다. 부모의 반대 등 우여곡절 끝에 미스 콜튼의 협력으로 미국 남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계의 전주기전여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승당의 아버지가 일찍이 기독교인이 된 것이 승당의 인생에 중요한 전제가 되었다면, 미스 콜튼과의 만남은 그의 인생에 큰 전기가 된 것이다.

승당은 전주에서 경재 김인전(鏡齋 金仁全)목사를 만나 그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김 목사는 승당의 전주기전여학교 같은 반 친구인 김연실의 아버지로 뒷날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낸 사람이다. 승당은 김 목사의 집을 출입하면서 우리나라와 국제정세를 비롯한 많은 지식을 배우는 동시에 국사책인 『동국역사(東國歷史)』를 얻어 학급 친구들과 독서회를 열었으며, 전주서문밖교회에 다니면서 김 목사의 설교를 듣고 애국심을 키우는 한편, 친구들과 함께 새벽기도회 모임을 갖고 나라의 앞날을 빌었다. 어린 승당에게 국사를 다소 가르쳐 준 사람이 아버지와 오빠들이었다면, 김 목사는 전주기전여학교 시절의 승당에게 국사를 가르쳐 주고 민족관과 국사관을 확고하게 심어주는 데 정신적 지주가 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승당의 ‘의’ 와 ‘참 그리고 애국애족의 정신은 전주기전여학교 학생 시절부터 전 생애를 통해 일관해서 면면히 행동화되었다. 승당의 전주기전여학교 학생 시절(1914~1918 ; 15~19세)의 항일행적(抗日行蹟)을 보면 다음과 같다. 승당은 일본어 수업에 무언의 반항을 하였다. 일본어 수업에 대한 반감을 나타낸 승당의 행동에 관해서 『기전80년사』(1982)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우리의 역사를 배우지 못한 슬픔에다 일본어를 배워야 하는 굴욕으로 교실에서는 종종 마찰이 빚어졌다. 4회 임영신의 일본어 선생과의 마찰이 그것이었다. 임영신은 일본어 시간이 되면 숫제 입을 다물어 버리고 일본어 선생의 질문에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았다. 이에 화가 난 일본인 선생은 "너는 일본말을 한마디도 할 수 없는 바보냐? 너는 이번 학기를 통해서 한 번도 대답하지 않았는데 도대체 뭘 하는 거냐? 그랬다가는 진급도 할 수 없게 만들겠다." 라고 호통을 치고 나가 버렸다.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와 임영신을 위로하자 그때서야 임영신은 유창한 일본말로 "아니야, 괜찮아. 나도 일본말을 할 수 있어. 다만 하기가 싫어서 안 할 뿐이야." 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급우들은 그 때서야 그녀의 유창한 일본어 실력에 다만 멍하니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19]
그리고 1915년에 부임한 박현숙 교사를 중심으로 임영신 학생 등 6명이 비밀결사대(秘密決死隊)인 ‘공주회’를 조직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한 특별기도를 새벽마다 학교 뒷산 송림 속에서 되풀이하였다. 또 조회 시간이나 행사 때에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를 부르지 않게 선도하였으며, 천황의 궁성을 향한 소위 궁성요배를 반대하였다. 또한 읽지 못하게 하였던 국사책인 『동국역사』를 몰래 베껴서 비밀리에 공부하였으며, 모든 교실에 걸려 있는 천황 사진의 두 눈을 뚫어 버렸다.

전주기전학교를 졸업한 후 충청남도 천안의 양대학교(良垈學校)의 교사로 있던 시절(1918~1919)에는 교사로서, 그리고 그가 조직한 기도동지회 (祈禱同志會)의 지도자로서 그 지역의 청소년에게 애국애족의 정신을 심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3.1독립운동 직전인 1919년 2월에는 밀사로 온, 전라도의 독립만세 책임자인 함태영(咸台永)으로부터 3.1독립선언문을 전달받아 그것을 기도동지회 회원과 함께 등사/배포하여 천안 양대 지역에서의 3.1독립운동을 유발시켰다. 이어 독립선언문을 전주로 운반하는 동시에, 전주기전여학교의 졸업생 및 재학생들과 더불어 태극기를 만들고 독립선언문을 살포하여 1919년 3월 13일 전주에서의 3.1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때 앞장을 서서 달리던 임영신은 일본 경찰에 맞아 기절하였다. 전주에서 체포된 승당은 전주기전여학교 재학생과 졸업생 등 13명과 함께 유치장에서 단식 투쟁을 하였고, 혹독한 옥고를 겪었으며 또한 재판을 받았다.

당시 전주에서의 출중했던 승당의 항일투쟁과 혹독한 옥고에 관해서는 국내외에 널리 알려져 중국상하이(上海)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에도 전달되어 역사가이자 임시정부의 대통령이었던 백암 박은식(白岩 朴殷植 ; 1859~1926)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서 승당의 애국 항일운동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특기하였다.
전주군의 여학생들인 임영신, 정복수, 김공순… 등 14인은 3월 13일에 독립운동을 일으켜 체포되었다. 여학생들은 필사의 결심으로 단식하기 4일에 이르렀다. 일본인 검사는 학생들이 범법 사실을 시인하도록 위협적으로 엄히 심문하려 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은 화평한 기상과 담대한 언사로 대꾸하였다. "우리가 어찌 너희 일본인의 판결에 복종하겠는가. 너희들은 우리의 강토를 전부 빼앗고 우리의 부형을 학살한 강도들인데, 도리어 삼천리강토의 주인인 우리를 보고 불법이라고 하는가. 너희야말로 불법이다." 일본인 검사는 크게 노하여 칼을 뽑아 학생들의 왼쪽 귀를 자르려 하였고, 여러 학생들의 옷을 벗기고 나체로 서게 한 다음 조롱까지 하였다. 이 때 임영신은 '야만’ 이라고 꾸짖으며 손을 들어 일본인 관리를 후려갈겼다…[20]

또한 1919년 4월 26일에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작성한 「소요사건에 관한 민정휘보 제9호 소밀(騷密) 제911호」 라는 비밀문서에도 옥중에서의 승당을 비롯한 전주기전여학교 졸업생과 학생들의 당당하고도 의연한 태도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919년 4월 18일 조선총독부 시학관(視學官) 다나까(田中)가 전주감옥 분감에 이르러 수용 중인 임영신을 주모자로 하는 기전여학교 관계자를 심문실로 호출하여 "그릇된 불온사상을 갖고 소요를 일으킨 결과 이러한 옥고를 겪게 되어 후회하는바 없느냐? 속히 양민으로 돌아오라." 라고 회유하였으나, 임영신을 비롯한 여러 학생들의 애국심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조선의 독립을 기도하였으니, 몸은 어떻게 되건 독립운동은 결코 중단할 수 없다." 고 드높은 순국의 결의를 피력하여 시학관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21]
그리고 재판의 최후 진술에서 승당은,
내가 … 조선의 독립을 위해…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고 투쟁하는 민족적 거사를… 하시모도(橋本) 검사는… '전주소요사건’ 주동으로 추궁, … 주리를 틀고 악독한 고문을 가하였지만 이 자리에서… 추궁 방법을 문제 삼고 싶지 않습니다. … 당신네 일본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만든 소위 보안법이나 조선형사령에 의거하여 나를 심판한다는 것은 마치 강도 사회의 율법에 의해서 선량한 주인을 강도 자신이 행하는 불법한 심판과 다름없기 때문에, 나 임영신은 조선 사람을 심판할 권리가 없는 일본 법관에 의한 이 재판을 거부하고 부인하는 것입니다. 징역을 주든 사형을 선고하든 그것은 당신들의 자유이로되 … 본 재판을 … 부인하는 나로서는 이 판결에 복종할 수 없으며, 설혹 육신은 당신네 법에 묶여 곤욕을 당할지 모르나 … 조선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불굴한 정신은 결코 꺾지 못한다는 나의 신념과 의지를 분명히 피력하는 바입니다. 방청을 위해 만장하신 사랑하는 조선동포들이여!… 조선 사람으로서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시라! 그리고 절망하지 마시라! … 이 조선 사람의 민족적 비운을 후손에게 유산으로 남기지 않으시려면 오직 독립운동에 모든 지혜와 노력과 정성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피고의 최후 진술에 대신합니다.[22]
라고 하였다. 승당은 20세인 1919년 9월 3일 대구복심법원(大邱覆審法院) 최종판결에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3년의 언도를 받았다. 이상과 같은 일제에 의한 가혹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승당의 애국심과 항일정신은 더욱 강렬해져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투쟁할 것을 결심하였고, 그것은 그 이후 교육활동을 통해 끊임없이 실천되었다.

일제로부터 집행유예를 받았던 승당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중국으로 갈 생각이었으나 일본 경찰의 감시로 떠나지 못하고, 대신 일본 유학을 하였다. 일본의 히로시마여자전문학교(廣島女子專門學校) 교장인 미스 게인즈의 호의로 이 학교에 편입학하여 졸업(1919~1921)하고 귀국한 승당은 1921년 4월에 공주 영명학교(永明學校) 교사로 부임하였다. 그런데 공주 기독청년회(YMCA)의 발족에 즈음하여 승당은,
우리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을 수는 결코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는다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영원히 도와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자기 자신과 똑같이 다른 사람을 위하여 진리와 정의와 인간의 권리를 위한 투쟁을 계속하고 있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기를 잃지 말고 신념과 인내를 가지고 그 날을 위해서 투쟁해야 하는 것입니다.[23]
라는 요지의 강연을 함으로써 또 다시 일본 경찰을 자극하여 그들의 계속적인 간섭과 감시를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승당은 영명학교 교사를 사임하고 상경하며 잠시(1922.4~1923.10) 이화학당의 교사로 근무하다가 그의 나이 24세가 되던 1923년 12월에 미국으로 떠났다.

도미하는 과정에서도 승당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하면서 대담하고도 모험적인 애국 활동을 하였다. 즉 1923년 일본의 도쿄 지방에서 일어났던 큰 지진인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 1923.9) 때에 일본인들의 한국인 거류민을 학살하는 야만적인 장면을 찍은 사진과 필름 그리고 학살당한 한국인 거류민의 명단을 도쿄에 있던 김낙영, 유태영 등으로부터 받아, 위험을 무릅쓰고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승만에게 전달함으로써 일제의 만행을 온 세계에 폭로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승당이 전주기전여학교 학생 시절에 김인전 목사에게 밝혔던 그의 포부인 "우리나라를 구하는 데 힘쓰겠다."는 큰 뜻의 구체적인 내용은 오로지 ‘교육’ 을 통한 민족 역량의 배양에 헌신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큰 뜻을 더욱 확고하게 다지게 된 것은 미국 유학의 시기(1924~1931) 이었다.

승당이 1924년 1월 미국에 도착한 직후, 이미 미국에서 살고 있던 그의 오빠들(양희와 상희)에게 자기가 미국에 온 목적과 포부를 밝히는 과정에서, "3.1 독립운동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해서 실망, 낙심할 것이 아니라 꾸준히 계속해서 일제와 싸워야 한다는 것, 어떻게 해야 일제와 실질적인 투쟁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의 해결은 오직 교육에 있다는 것, 교육은 우리의 가장 강한 무기의 하나라는 것" 등의 견해를 설명하면서, 자기는 장차 "미국에서 번 돈을 우리나라에 가지고 나가서 학교를 짓는 데 사용하겠다." 라고 피력하였다. 또 승당 자신도 선진국에서 교육 받기를 결심하고 1925년 9월, 26세의 늦은 나이로 남캘리포니아대학교(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에 입학하기 위하여 그 대학교의 여학생처장인 메어리 신클레어 크로포드(Mary Sinclair Crawford)를 찾아가 만난 자리에서, 입학을 지원하는 이유가 "이 대학에서 공부함으로써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찾는 데 도움이 되기를 원한다.", "남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장차 공부하여 일본에 빼앗긴 나라를 찾는 데 보탬이 되도록 함에 있다."고 밝혔다.[24]

그리하며 승당은 1925년 9월 26일, 26세의 늦은 나이로 대학에 입학하여 만학을 시작하는 한편, 자립과 학교 설립의 기금을 모으기 위하여 잔디 깎기/세탁부/가정부/보모/화물자동차 운전수/청과물 판매인 등의 노동을 하여 저축에도 힘썼다. 이러한 고된 노동의 결과로 1931년 9월, 승당이 대학원을 졸업할 무렵에는 3만 달러의 큰돈을 저축하게 되었다.

한편, 승당은 로스앤젤레스에서 학업과 노동을 하면서도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승당이 미국에 온 2년 뒤인 1926년 3월 1일, 로스앤젤레스의 한인교회에서 3.1 독립운동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승당은 3.1 독립운동 당시의 유관순의 투쟁상을 그 곳 교포 학생들과 더불어 연극으로 공연하여 교포들에게 강한 항일정신을 고취시키었다.[25]

1930년 6월 대학을 졸업하고 문학사 학위를 받은 승당은 계속하며 대학원 과정을 이수한 후, 1931년에는 남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신학석사학위(MTH)를 취득하였다. 그리하여 33세 되던 1932년 1월, 미국 체류 만 8년 만에 금의환향한 승당은 “한국여성운동의 선구자가 되겠다” 고 다짐하면서 YWCA의 총무로 취임하였다.

YWCA의 총무로 취임할 당시의 모습을 한국 최초의 여기자인 조선일보사의 최은희는,
루이스 임이라는 서양식 이름을 가진 임영신 총무는 아직도 결혼을 하지 않은 몸으로 YWCA의 재건을 위해 일하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기독교 정신으로 이 나라 여성운동에 앞장서겠다고 말했으며 앞으로 YWCA의 할 일이 많은 것을 알려 주었다.[26]
라고 승당과의 인터뷰 기사를 쓰고 있다. 이 무렵 YWCA의 일로 시찰차 한국에 왔던 국제 YWCA 서기인 미스 라이언과 함께 1개월간 전국을 순방하면서 나라 잃은 국민의 참상을 목격한 승당은, 새벽마다 "내 조국과 민족에게 내린 가혹한 시련을 더 이상 주지 말고 시련을 거두어 달라."고 충절한 기도를 드리면서 나라와 겨레를 위해 헌신할 것을 다시금 다짐하였다.

이 때 승당으로부터 강연을 들은 학생은 후일 당시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썼다.
… 1934년 9월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4학년 졸업반 때 … 전교생이 강당에 집합했다. 임영신 선생님의 소개 말씀은 짤막하였다. YWCA 총무이시며 우리 학교 청소년 회원을 만나러 오셨다는 말씀을 하고 … 강연은 YWCA의 정신과 청소년들의 사명과 역할이 무엇인가를 설명하셨고, 우리가 현재 일제 압정에 짓눌려 빈사 상태에 처해 있지만 민족은 영원한 것이니 깊이 간직해야 한다는 뜻을 성서에 결부시켜 암시적으로 제시하셨고, 그렇게 나는 새겨듣고 … 이 분은 위대한 독립투사가 아닌가? 지니신 교양과 새로운 박식과 놀라울 만한 풍채에 다시 한 번 머리를 수그렸다.[27]
위의 회고담에서처럼 악랄하고 서슬이 시퍼렇기가 이를 데 없던 일본 경찰의 감시 하에서도 승당은 평소의 애국애족 사상을 민족의 영원함과 결부시켜 민족혼의 함양을 젊은이들에게 일깨워 주려 하였다.

1.3.2. 제2절 중앙보육학교의 인수와 학교 육성을 위한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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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미상, 중앙보육학교 교장 임영신
1.3.2.1. 중앙보육학교의 인수
승당이 미국 유학 후, 귀국하여 중앙보육학교를 인수하고 학교를 육성하던 시기는 일제가 중일전쟁(1937년 7월)과 태평양 전쟁(1941년 12월)을 도발하여 아시아를 온통 전쟁의 와중에 휘말리게 했던 어려운 때이었다. 승당이 중앙보육학교를 인수한 다음 해인 1936년에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미나미 지로는 그의 전임자인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총독이 포석한 황민화 정책을 계승하여, 이른바 국체명징(國體明徵), 선만일여(鮮滿一如), 교학진작(敎學振作), 농공병진(農工竝進), 서정쇄신(庶政刷新) 등의 5대 정강이라는 것을 시책의 방침으로 삼았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로 나타난 몇몇 실상을 보면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쳐야만 했고, 각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한 결과 이에 반대한 기독교계 학교들이 폐교당하였다. 중등학교에 현역 장교가 배속되어 군사교육이 실시되었으며, 하계 학생 계몽운동이 중단당하였고, 학교근로보국대(學校勤勞報國隊)[28]가 조직되었으며, 조선학생정신연맹이 결성되었다. 또 학교 교원들과 관공리들은 제복을 입게 되었으며, 소위 ‘황국신민의 서사’ 제창을 전국민이 강요당하였다. 각급학교에서는 국체명징, 내선일체, 인고단련 등 소위 교육의 3대 강령을 실시해야만 하였으며, 학도정신대가 조직되어 근로동원이 실시되었다. 또 일제 총독부 정책에 비판적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폐간되었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승당은 중앙보육학교를 키워 나가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미국에서 귀국하여 YWCA 총무로 있으면서 승당은 그의 숙원인 학교를 세우기 위하여 먼저 땅을 샀다. 그 땅이 오늘의 중앙대학교 교지인 서울시 동작구 흑석동 221번지 일대이었다.

교지를 확보한 승당은 여자전문학교 설립 인가를 받기 위해서 동분서주하였다. 그러나 일제당국은 3.1 독립운동 때에 결사적으로 항일투쟁을 하였던 승당에게 학교 설립을 허가해줄 리가 없었다. 여자전문학교 설립 신청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허가가 나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금도 부족한 형편이었기 때문에 승당은 때마침 경영난으로 부진한 상태에 있던 중앙보육학교를 인수하게 되었다. 중앙보육학교는 앞에서 쓴 것처럼 중등학교인 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에 입학하는 유아교사 양성의 여자전문학교에 해당하는 수업연한 2년의 ‘전문 정도 각종학교’ 이었다. 중앙보육학교의 전신은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146번지에 있던 중앙유치원에 1922년 9월 병설/설립된 중앙유치원 사범과였다. 그 후 중앙유치원 사범과는 1928년 9월 5일부로 중앙보육학교로 전환하는 인가를 받았다.

승당이 인수하던 때의 중앙보육학교는 안팎으로 난관에 직면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인수과정에 관해서 『중앙대학교 50년사』(1970)에서는 “창신동 교사에는 10명의 학생밖에 없어 늘 경영난이었고, 밖으로는 민족진영의 분열을 노리는 일제와 그 주구의 농간도 있었고, 박희도 교장의 호방한 성품으로 말미암은 사생활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박 교장은 오랜 노력 끝에 유종의 미를 거두지도 못하고 교육계에서 은퇴할 것을 결심하고, 이 전통 있는 교육기관을 인수할 적임자를 찾고 있었다. 곡절 끝에 유명했던 이 여성교육 기관을 33세의 젊은 나이로 선생이 맡게 되었던 것이다.(1933년 3월)” 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위의 글에서 인수 연월과 승당의 나이에 관한 기록이 잘못된 것 같다. 중앙보육학교의 설립자 변경인가서를 보면 김상돈 외 4명이 중앙보육학교의 설립자 변경을 1935년 6월 1일자로 신청하여 1935년 12월 13일자(학제 148호)로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그러나 승당이 교장으로 취임하여 활동하기는 이보다 앞선 1935년 4월부터이었다.

즉 1935년 4월부터 중앙보육학교의 교사로 재직하였던 이영보의 앞의 회상문을 보면,
승당 임영신 이사장님을 처음 만난 때는 내가 동경(東京)에서 학교를 마치고 돌아와서 모교에 취임하던 날이다. 그 분의 계획인 첫 사업으로 경영난에 봉착해 있던 중앙보육학교를 인계 받으시고, 바로 1935년 4월 교장으로 취임하시는 날, 동경 동양음악학교를 졸업하고 나온 그 분의 막내 여동생 임영선 씨와 내가 같은 날 취임하게 되었다.
라고 써있다.

또한 다음과 같은 기록도 있다.
1922년에 개설된 중앙유치원 사범과는 … 장소 문제로 우여곡절이 많았다. 1924년에는 … 학생이 37명에 이르렸으나 전용 공간이 없기 때문에 … 1924년 12월에 학생 24명이 교실과 교육과정의 개선을 요구하는 연판장을 낸 일도 있었다. 이 학교가 보육학교의 인가를 받자마자 정동 1번지의 8호의 교사로 이전하였다. 보육학교 인가 기준에 건물 요건도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중앙보육학교의 공동 설립자는 박희도, 장두현, 신태화, 김상돈이었다... 1934년 교장 박희도가 사임하고 차사백이 교장 대리로 취임하였으며, 운영은 황애시덕 3자매가 인수하였다. 1935년에는 다시 최초의 운영자 김상돈에게로 인계되고, 그 자제가 임영신에게 경영권을 인도하였다. 이에 따라 학교 건물도 정동에서 창신동으로, 그리고 서대문 피어선 성경학원으로 전전하였다. 그러나 새 인수자 임영신의 노력에 의해서 1938년 5월 2일 흑석동의 신교사로 안정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보육학교라는 독자적 고등교육기관으로 발족한 중앙보육학교가 전용 건물을 갖기 위해서 각고의 노력도 하였지만 그로 인한 발전 또한 현저한 것이었다.[29]

위의 여러 기록으로 보아 승당이 중앙보육학교를 인수한 연월은 1935년 2~3월경이었을것이다.
1.3.2.2. 학교 육성을 위한 노력
피어선 교사에서의 활기차고 안정되었던 학교 분위기도 잠시이었다. 건물을 비워 달라는 건물주의 요청에 시달려 승당은 자금도 준비되지 못한 채, 구입해 두었던 흑석동 교지에 1936년 11월 교사 신축의 주춧돌을 놓았다.[30] 자금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승당은 건축비를 부모형제에게 빌리기도 하였고, 유지들로부터의 기부금도 기대하였으나 그것도 일제 당국의 간섭으로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당시의 교사 신축에는 승당의 각고의 노력과 정성이 수반되었던 것 같다. 건축하는 데 승당 자신도 거친 잡역을 하여 승당의 “손바닥은 남자 노동자의 손과 같이 딱딱하게 못이 박히고 얼굴은 검붉게 타” 있었다. 건축비 조달이 막연하자 승당은 생각 끝에 미국에 가서 학교 건축비를 모금할 결심을 하였다.

그러나 미국에 갈 여비가 없어 고민하고 있던 어느 날 뜻하지 않게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 찾아와 “미국에 가는 비용으로 써 달라”고 하면서 저금통장을 내 놓았다. 승당은 통장 주인의 신원을 물어 보았지만, ‘홍금파’라는 이름의 소녀라는 사실밖에 알 수가 없었다. 승당이 학교 기금 조성을 위하며 미국에 간 것은 38세 때인 1937년 5월 중일전쟁이 일어나던 해이었다. 하와이에 도착한 승당은 이승만을 비롯한 민족 지도자를 만나 학교 경영의 어려운 처지를 설명하고, 또한 한인교회에 나가 민족교육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피력하면서 교육 기금 조성에 협조해 줄 것을 적극적으로 호소하였다. 승당의 열띤 호소에 교포들은 감동하여, 이국 생활의 어려움 속에서도 하와이에서만 4,000달러나 모금해 주었다. 한 노인은 자신의 장례비용까지 선뜻 내놓았다. 이 기금들이 중앙보육학교 건축비로 충당되었음은 물론이다. 로스앤젤레스에서는 모교인 남캘리포니아 대학교의 총장인 폰 클라인스미드(Von Kleinsmid) 박사 내외와 여학생 처장인 크로포드 여사 등을 만났다. 총장 부인은 부유층 인사들을 소개해 주었고, 여학생 처장은 자선사업가와 자신의 친구들에게 소개장을 써 주었다. 모교의 관계자들에게는 그들 학교 출신의 동방의 이름 없는 식민지 출신의 처녀가 자기들처럼 교육사업에 정열을 쏟고 있는 모습에 동정과 함께 대견스러움을 느꼈을 것이다.

기금 모금에 어느 정도 자신감을 얻은 승당은 미국의 동부로 향하였다. 뉴욕에서는 국제적으로 이름난 자선사업가인 제시 암스트롱(Gessie W. Armstrong) 부인을 찾아갔다. 때마침 승당은 중앙보육학교로부터 "건축업자에게 줄 6,000달러를 급히 송금해 달라"는 전보를 받고 있었는데, 그 전보를 본 암스트롱 부인은 즉석에서 1,000달러를 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친구들에게도 부탁하여 5,000달러를 마련하여 주어 중앙보육학교는 그 돈으로 어려운 사정을 면할 수 있었다. 뉴욕에서는 한국에서 이미 널리 알려진 자선사업가인 애니 파이퍼 부인도 만났다. 파이퍼 여사는 이화여자전문학교의 교사 신축비와 학교기념사업비 등에 기금을 기부한 바 있었다. 1937년 7월 파이퍼 부인을 찾아간 승당은 서울에서 갖고 간 교사 건축 계획 자료와 미국 각지에서 도와 준 기부금 명세서 그리고 전주기전여학교 시절부터의 자신의 행적 등에 관해서 무려 4시간이나 걸쳐 설명하였다. 파이퍼 부인은 승당이 항일투쟁으로 옥고를 치른 일에 특히 관심을 표하고 그 용기를 찬양하였으며, 친딸처럼 여기면서 우선 교사 건축을 완성하라고 37,000달러를 희사하고, 앞으로 기숙사와 유치원의 건축을 위해서도 원조해줄 것을 약속하였다. 파이퍼 여사를 만난 것은 승당과 중앙보육학교로서는 큰 행운이었던 것이다. 승당은 또 사회사업가이며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부인 엘리너 루즈벨트 여사를 만났다. 승당의 교육사업에 대하여 들은 엘리너 여사는 커다란 호의를 보이면서 한국과 승당을 소개하고 승당의 모금을 지원하여 주기를 바라는 다음과 같은 신문 칼럼을 썼다.
내가 뉴욕을 떠나기 전에, 나는 임영신 양과 매우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임 양은 코리아에서 온 매력적인 여성이고 현재 한국에서 여성들을 교육하는 학교의 경영자입니다. 임 양은 “한국에서 한때 사립학교 교육이 활발하였으나 그래도 여성의 8할이 문맹이고, 그녀들은 매우 아름다운 수공품을 만들 수 있는데 교육을 받을 길이 없어서 직장이나 전문적인 직업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녀의 목적은 바로 이러한 한국 여성에게 교육을 주는 데 있으며, 그리하여 임양은 교육과 극동에 관심 있는 미국인으로부터 도움을 얻기 위하여 미국에 온 것입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의 학교 교육에 대하여 관심 있는 사람은 많으나 한국에 대해서 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나는 한국어중국어일본어와 아주 다른지조차 잘 모르는데, 임 양은 나에게 새롭고도 흥미 있는 많은 한국의 역사 이야기를 하여 주었으며, 그녀의 개성은 나를 감동시켰습니다. 나는 많은 미국인이 그녀와 한국인에 관해서 이야기하기를 바랍니다. 지난 4월부터 미국에 와 있는 임 양은 귀국에 앞서 그녀의 학교를 위하여 20만 달러가 모금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31]

이상과 같은 1937년 8월 21일자 뉴욕 『월드 텔레그램 (World-Telegram)』에 기고된 루즈벨트 대통령 부인의 칼럼은 미국 조야에 큰 반향을 일으켜 록펠러(John D. Rockfeller) 2세, 자동차왕 헨리 포드(Henry Ford), 발명가 토마스 에디슨(Thomas Edison) 부처 등으로부터 많은 후원금을 받았다. 승당의 노력은 결실을 거두어, 1938년 10월에 파이퍼 여사는 중앙보육학교를 후원하기 위하여 30만 달러를 쾌척하여 재미국 중앙보육학교 후원재단인 애니 머너 파이퍼 재단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재단 이사장에 파이퍼 여사가, 부이사장에 승당이 각각 취임하였다. 이로써 중앙보육학교는 새 교사와 유치원 그리고 기숙사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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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퍼 여사(Annie Merner Pfeiffer)

이 때 건축한 교사가 현재의 영신관(永信館)이며, 건축 당시의 3층 석조 건물을 뒷날 증축하여 그 높이를 높이었다. 승당은 학교가 중앙대학교로 발전한 뒤에 파이퍼 여사를 기념하기 위해서 파이퍼 홀(Annie Merner Pfeiffer and Gustavus and Louise Pfeiffer Memorial Hall)을 세웠다. 파이퍼 홀에는 파이퍼 여사의 사진과 함께 "평생 동안 인류에게 봉사한 위대한 인도주의자이자 박애주의자였으며, 1937년 이래 중앙대학교의 크나큰 후원자였던 애니 머너 파이퍼 (1860~1944) 여사” 라는 영문글이 새겨진 동판이 부착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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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완공당시의 영신관

승당이 미국에서 학교 기금 조성을 위해서 활동하는 동안 중앙보육학교는 1937년 12월에 교사를 준공하였고, 1938년 5월 2일에 서대문의 피어선 성경학원을 떠나 흑석동의 새 교사로 이전하였다. 오랫동안 정동에서 창신동으로 그리고 서대문으로 전전하던 중앙보육학교는 비로소 안정을 찾게 되었다. 학교 이전에 관한 공식 기록은 1938년 5월 16일자로 조선총독부에 학교 위치 변경에 관한 신청을 하였고, 1938년 7월 6일자로 학제 148호로 이전이 인가된 것으로 되어 있다. 흑석동으로의 중앙보육학교 이전은 학교 관계자뿐만 아니라 각계의 관심사이기도 하였던 것 같다.

그리고 흑석동의 중앙보육학교 교사를 방문하였던 『조선일보』 기자는 당시의 학교 모습과 승당의 활약상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전차로 서울역을 지난 다음부터는 주위가 조용하여 여유가 있어 보이며, 흑석동의 마루터기를 넘어서서 명수대 이름 그대로 물소리가 졸졸 울리며 빨래하는 표모의 방망이 소리가 조용한 마을에 울리고 있다. 졸업은 섭섭하고도 기쁜 일이라고 말하는 졸업반 학생들은 "오로지 조선 여자의 손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중앙보육학교가 자랑해 마지않는바"라고 입을 모은다. 노래도 춤도 공부도 고스란히 어린이들에게 바치겠다는 학생들의 입은 유니폼도, 키가 큰 아가씨가 입었어도 어린이 같은 귀여운 느낌을 주는 것이었으며 … 그녀들이 교문을 나온 후 직장에서 어린이들과 같이 지낼 때도 입을 수 있도록 연구를 거듭하여 고안한 것이라 한다. 졸업생마다 장기가 있어 시와 수필, 노래, 피아노, 스케이트, 탁구, 정구 등에 저마다 솜씨가 있다는 것이다. 한적하고 이름다운 환경 명수대 교사에서 소요하는 학생들을 보면 지상낙원의 아가씨들 같다.[32]
위의 글에서 신축 교사에 대한 은근한 자랑과 기쁨, ‘의’ 와 ‘참’ 을 강조한 중앙보육학교의 교육 정신과, “오로지 조선 여자 혼자의 손으로 만들어 놓은” 중앙보육학교 임영신 교장에 대한 신뢰, 한국의 유구한 역사를 유유히 그리고 면면히 흐르는 한강에 비유한 나라 사랑과 자부심, 의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나라의 장래를 짊어질 어린이 교육에 충실함으로써 조국의 영광에 헌신하겠다는 각오를 그토록 가혹하였던 일제의 탄압 하에서도 당당하게 피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위의 글이 발표된, 가혹하였던 1938년 내지 1940년 전후의 시대 상황을 생각해 본다면, 감히 이 시기에 ‘의’ 를 내세우고, ‘조국’ 을 내세우고, ‘우리 겨레’ 를 내세우는 등의 일이 얼마나 어렵고 위험하였던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날로 가혹하고 살벌해져 가는 일제 식민지 전제정치하에서 비록 직절적(直截的)으로 표현을 못하였을지언정 한강의 흐름에 비유하여 유구면면한 한국의 역사를 인식하였고, ‘의’ 를 위하여, ‘동포’ 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나라의 장래를 짊어질 어린이에게 학교에서 배운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다짐하는 학생들의 깨달음과 각오는 임영신 교장과 중앙보육학교가 교육정신을 ‘의’ 와 ‘참’ 에 두고 교육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3.3. 제3절 일제 말기의 전시체제와 임영신 그리고 중앙보육학교

1.3.3.1. 일제 말기의 전시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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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임영신 박사 귀국환영 기념사진

1940년 5월 승당은 미국에서 학교 신축 기금 모금 및 중앙보육학교 후원 재단 설립의 큰 성과를 거두고 미국 체류 3년 만에 귀국하였다. 그런데 이 때 유럽에서는 전쟁이 일어났고(1939년 9월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태평양에서도 전운이 감돌아 일본과 미국과의 관계가 일촉즉발의 악화일로에 있는 동시에, 일본은 중국 침략을 계기로 전시체제에 돌입, 국수주의화하여 한국 사회 전반이 긴장 상태에 있었다. 그와 같은 때에 3.1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형을 받고,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힌 바 있는 승당이 적성국가인 미국에서 장기 체류하고 귀국한 관계로 해서, 승당은 귀국하자마자 3일간이나 일본 경찰에 연금당한 채 미국에서의 생활에 관해서 고등계 형사로부터 심문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한 속에서도 이 무렵 승당의 학교생활은 의연하였다. 승당은 오랜 부재중에 쌓인 여러 난제를 해결해 가면서 조용히 학교를 가꾸고 매만지는 한편, 종교 시간을 이용하여 학생들에게 국어와 국사를 가르치고 또한 대담하게도 항일 의식을 고취하였다. 당시에 승당은 학생들과 함께 검소한 차림으로 학교를 가꾸고 어려운 재정 형편 속에서도 학교의 살림을 잘 다듬어갔다. 승당의 ‘학교 사랑’에 관하여 1943년 4월부터 1945년 3월까지 재학하였던 김옥련은 다음과 같이 그 때를 회상하고 있다.
교장 선생님은 학교를 극진히 아끼고 가꾸셨다. 당시에 비가 오나 바람이 불거나 손에 삽과 호미를 들고 7부 바지에 고무신을 신고, 교정의 구석구석을 다듬고 어루만지고 잠시도 쉬지 않으셨다. 이 모습은 당시 여학생들의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위에서 지시만 하면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입장이셨지만, 손수 삽과 호미를 들고 다니셨다면 잘 납득이 가지 않을지 모르나 우리는 이 모습에서 선생님의 '학교 사랑' 과 자립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후일 선생님께서 학생들에게 "내 사랑하는 아들, 딸들아…중앙대학은 나의 땀과 피의 결실이다”라고 하시는 말씀에서 나는 40년대 초반의 선생님의 모습을 상기하면서 눈시울이 뜨거워 옴과 그 말씀의 참뜻을 느꼈다.
… 우리가 '중앙’ 에 다닐 때에 학교 운영은 재정적으로 그렇게 여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님은 학부모들에게 결코 이에 대한 부담을 주지 않았다. 학생들을 사랑하시고, 학생들의 부담을 줄이려고 애쓰신 선생님, 방학의 선물로 드린 명태, 명란, 그 밖의 토산물은 거의 기숙사에 돌려서 학생들에게 주라고 하신 선생님, 우리는 이런 선생님의 사랑과 그늘 밑에서 학교에 대한 사랑, 소속감, 일체감을 키웠다.[33]

당시의 상황에 관해서 승당은 「나의 이력서」에서
…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 정책은 갈수록 숨이 막힐 지경이 되어 갔다. 그들은 수업 전에 가졌던 채플 시간을 없었다. 그 시간이 없어지자 나는 서양사 시간을 늘려 그 시간에 기도를 올리고 민족적인 이야기를 했다[34]
고 술회하고 있다.

그리고 김옥련은 당시 흑석동의 풍경과 승당의 가르침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1940년대 초기의 흑석동의 광경은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당시 시내에서 전차를 타고 노량진 정류장에 내려서 한가한 달구지 길을 따라 고개를 넘노라면 수세(水勢) 좋고 맑은 한강이 우리를 반겼다. 고개를 넘으면 띄엄띄엄 평화롭게 서 있는 기와집, 초가집 속에 양옥 석조 건물이 ‘여왕의 군림’처럼 돋보였다. 그것이 사연이 많은 오늘의 ‘영신관’ 이다.
이 건물의 안팎에서 당시의 여학생들은 이 학교의 독특한 풍토 속에서 생활관, 사회관, 그리고 국가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지금에 와서 그 때 일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우선 임영신 교장 선생님의 가르침 속에서 강조하신 점은 오늘의 사회생활에서 더욱 절실한 것이었다. 그것은 참된 마음을 가지고 대의(大義)를 위해서 자기 한 몸을 바치는 의지와 행동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는 일본 통치 시대라는 시대적 환경 때문에 교장 선생님의 말씀에는 항일적인 애국심을 시사하는 내용이 많았다. 이와 같은 이념에 따라 교장 선생님은 장래의 한국 여성의 사명이 중요하다고 역설하시고 협력, 근면, 창의력이 있는 여성이 되어야 한다는 훈시가 많았다.[35]

이 시기는 극도로 언론이 억압되고 살벌하기 이를 데 없던 일제 말기의 전시체제하임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승당은 한결같이 ‘의’ 와 ‘참 을 강조하고, 비록 시사적이기는 하지만 애국과 항일의 정신을 학생들에게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1940년부터 1945년 8월 조국 광복 때까지의 일제 지배하의 한국은 그야말로 일제의 말기적 증세가 노정되어 광포(狂暴)한 독기가 가득 찬 숨막힐 지경의 공포 정치기였다.
1.3.3.2. 항일독립운동가 임영신과 중앙보육학교의 휴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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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보육학교 교장 임영신의 강의 모습

일제는 승당에게 심리사상전 승리를 위해 반미(反美) 선전 방송을 하라고 강요하였다. 그러나 승당은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직접 방송하기 곤란하면 원고를 읽기만 하여 달라고 하였지만 승당은 그것도 거절하였다. 온갖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승당은 꿋꿋이 지조를 견지하였으니 당시의 정세를 아는 이라면 그것이 결코 범상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일제 말기는 대개의 여성 교육자가 학교 하나를 살리기 위하여 친일행위를 거부하지 못하던 때이었다.

중앙보육학교가 1943년.10월의「교육에 관한 전시 비상조치 방책」에 따라 정비 대상이 되자 일본군 통신대로부터 임영신 교장 앞으로 성전(聖戰) 수행상 필요해서 귀교를 군이 사용하기로 결정하였으니 10일 이내로 명도하라는 통첩이 왔다. 승당은 이 때 일제에 대항하던 정황을 「나의 이력서」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다른 학교들은 알아봤더니 징발당한 데는 없었다. 나는 총독부 학무국에 가서 왜 하필이면 중앙보육학교만을 징발하느냐. 내 눈에 흙이 덮이기 전에는 비워 줄 수 없다고 항의했다. 그들은 징발 통고를 해 놓고는 뒤로 사람을 보내 "성전 수행에 협력하면 징발은 면할 수 있을 것” 이라고 교섭을 해 왔다. 그래도 나는 “중앙보육학교의 오늘이 있는 것은 오로지 미국인들의 은혜 때문이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내 입으로 그들을 욕할 수는 없다” 고 버티었다. 통고를 받은 지 13일째 되는 날, 일군들의 트럭이 학교 쪽으로 달려오는 것을 본 나는 맨발로 교문 쪽으로 달려갔다. 200여 학생들과 교직원들도 뒤따라 나왔다. 인솔해 온 장교 앞을 가로막고 나는 “나를 죽이기 전에는 들어갈 수 없다” 고 고함을 질렀다. 뒤에서는 200여 명의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나가라! 나가라!”고 외치며 울고 있었다. 1시간쯤 승강이가 계속된 끝에 그들은 욕설을 퍼부으며 일단 돌아갔다. 그리고는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총칼을 든 군인들이 나를 밀쳐내지 못해서 되돌아간 것은 분명 아니다. 그러나 학교를 접수하겠다고 한 동기가 대미 방송을 거절한 나를 골탕 먹이자는 데 있었고, 총칼을 가진 그들이 꼭 들어올 의도가 있었다면 왜 못 들어왔겠는가. 그 증거로 패색이 짙어진 전쟁 말기에 가서는 중앙보육학교도 다른 많은 학교처럼 징발되어 철도학교로 사용되었는데, 이때는 아무리 악을 써 봐야 어쩔 수 없었다.

승당이 학교를 군용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징발하겠다는 일본군에 항거하던 광경에 관해서 당시 『조선일보』 여기자이었던 최은희는 뒷날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일군사령부에서는 임영신 씨가 경영하는 중앙보육학교에 소위 대동아전쟁 통신부대용으로 명도 명령을 내렸다. 별안간 일개 중대 병력이 트럭을 타고 학교를 점령하려고 왔다. 황급히 달려 나간 그는 굳게 닫은 교문 앞에 딱 버티고 서서 "나를 먼저 죽여라. 나 죽기 전에 한 발자국도 못 들어온다." 라고 호령호령하였다. "비켜라. 비키지 않으면 정말 쏜다." 일군은 총부리를 겨누었다. 임영신 씨는 두 팔을 벌리고 가슴을 내밀었다. 총 끝에 칼을 꽂고 위협하던 놈들도 기가 질려 돌아가고 말았다.[36]

당시에 일본군이 자신들의 계획을 승당과 학생들이 항거한다 하여 포기하고 철수한 것은 아닐 것이다. 유독 중앙보육학교를 접수하려 하였던 행위가 실은 승당의 반미 방송 거부에 대한 하나의 위협적인 보복이었을 것이다. 그토록 무시무시한 일본군의 강압적인 요구를 가냘픈 여성이 결사의 기백과 온몸으로 항거하여 물리치고 끝내 교사를 지켜낸 사실만은 장한 일이었다.

한편 승당은 미국 유학에서 귀국한 이래 항일 지하운동을 하던 동지들과 연락을 취하면서 민족 독립운동에 끊임없이 헌신하고 있었다. 중앙보육학교를 인수하고 재차 미국에 갈 때까지 사이에 승당을 지근(至近)에서 수행하였던 조성녀는 당시의 승당의 행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 나는 이제 말할 사건들을 어느 누구에게도, 아무에게도 한 번도 발설해 본 일이 없다. 교육사업은 독립투쟁의 전초요, 요구요, 미명인지 모르겠다… 나를 어찌 보셨든지 간에 곧잘 부르시곤 했다. 마치 망아지 새끼가 어미 뒤를 조랑조랑 따르듯이 뒤를 따라 나서곤 했다. 처음 동행한 곳은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옆 청목당 양식음식점이다.… 신사 손님이 계셨다. 두 분은 … 음식을 드시면서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영어를 극히 나직이 자못 굳은 표정으로 주고받고 하시다가 다시 한국말로 우스개 말씀도 하시곤 했다. 그 밖에 지금의 시경찰국 뒤 긴지요(金千代) … 지금의 명동 가네보(金寶)에서도 … 같은 사람이 아닌 분을 만나곤 했다. 때로는 만나신 분 중에는 편지도 전하게 하셨다. 나는 … 그분들과의 관계나 그들과의 편지 내용이(편지가 아닐지도 모른다.) 통속적인 연애편지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속바지 주머니에 깊숙이 넣고 핀으로 단단히 꽂고 극히 조심스럽게 전달되곤 하였다. 나는 함홍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때 … 민족운동을 하는 전국학생연합회에 가담해서 일해 본 바 있어 그저 육감으로 알아챘을 뿐이다. … 한 번도 이런 회합의 발설을 당부한 바 없었다. 온건히 천연스럽게 진행되었던 것이다. … 일제는 패망하고 …… 대한민국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틀림없었다. 승당이 만나셨던 분들은 정부수립에 거물들이고 요직에 군림하셨다.

1940년대에 이르러 태평양 전쟁에서의 연합군의 승리는 바로 한국의 독립을 촉진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승당은 독립운동을 해 오던 인사들과 일제에 타격을 가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 결과로 일어난 사건의 하나가 인천탄약창고 폭발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300여 명의 애국 청년이 체포되었고, 그 중 30여 명은 일제의 고문으로 죽었다. 이 사건이 있은 뒤에 승당은 동지들과의 접촉을 모두 끊었다. 그것은 그 배후에 있는 동지들의 발각을 막기 위함이었다.

승당이 동지들과의 접촉을 끊었음에도 일본 경찰의 수사망이 승당 신변 가까이까지 뻗어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승당은 마음이 심란해져 학교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1942년 봄, 어느날 그에게는 일본에 반항하는 직접적인 반란을 일으키고자 하니 만나자는 내용의 편지 한 장이 배달되었다. 그는 이 편지를 받고 검열이 심한 때에 인편이 아닌 우편으로 이처럼 중대한 내용을 보낸 것이 의심스러워 그대로 불태워버렸다. 그런데 이 일로 인하여 마침내 그는 경찰에 붙잡혀가 모진 고문과 매를 맞아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하였다.[37]

그 때의 상황을 승당은 「나의 이력서」 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신경쇠약 증세가 일어나 건강이 날로 나빠져 가고 있었다. 매일 의사가 왕진을 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내게도 "참고인으로 출두하라"는 소환장이 왔다. … 의사도 거들어 주어 참고인 진술은 몇 번으로 흐지부지되었는데 그 후에 나는 정말로 병이 도져 중풍증세를 일으켰다. 이 해 늦봄에 있었던 장마로 학교 뒷산에 사태가 나서 밤중에 나가 산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를 딴 곳으로 돌리느라고 쇠약해 있는 몸을 혹사했기 때문이었다. 가벼운 중풍이라 한 달 후에는 기동을 할 수 있었는데 그 동안 조용했던 일본 경찰이 혐의를 푼 것은 아니었다.
내가 조금씩 기동을 하게 된 후, 나는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효과적인 항일운동을 위해 어디어디서 만나 의논하자"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 편지에 대해서 몇 가지 의문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이 편지를 태워 버렸는데 이 때문에 나는 큰 화를 입게 되었다. 이번에는 어떤 꾀로도 빠져 나갈 수 없이 경찰에 잡혀가 반병신이 된 것이다... 태워 버렸다는 말이 통하지가 않았다. 결국 나는 용산경찰서로 끌려갔다. 그런 중대한 편지를 받고도 경찰에 알리지 않은 것은 반역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 날 나는 말투가 건방지다고 서장한테 경찰칼집으로 어깨와 등을 얻어맞았고, 형사들에게 머리채를 끌려 구둣발로 차이고 해서 피투성이가 되었다. 밤늦게야 그들은 반병신이 된 나를 보내주었는데 그러나 이것은 맛보기에 지나지 않았다.
이틀 후 이번에는 관할경찰서가 아닌 서대문경찰서에서 형사들이 들이닥쳐 집안과 학교를 살살이 뒤진 후 나를 연행해 갔다. 서대문경찰서 유치장에는 제자들과 그 남편들이 많이 들어 있었다. 일본 경찰은 내가 지하단체와 관련이 있다고 확신을 하면서도 증거를 못 잡아 나와 가까운 제자들을 족친 것이었다. 고통에 못 이겨 나를 원망하는 제자도 있었다. 서대문경찰서에서는 다양한 고문을 받았다. 몇 번을 실신한 끝에 닷새째 되는 날, 나는 피를 토하고 뻗어 버렸다. 경찰공의(警察公醫)의 생명이 위험하다는 진단이 내려 집으로 실려 왔는데, 감시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1달 이상 나는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1943년 12월에 승당은 한국의 독립을 약속하는 카이로 선언(Cairo Declaration, 1943년 12월 1일)을 비밀 경로를 통해서 알고 곧 송진우(宋鎭禹), 여운형(呂運亨) 등에게 알렸으며, 또한 극비리에 동지들에게 알려 해방의 날에 대비시켰다.

한편 중앙보육학교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교육에 관한 전시 비상조치 방책」에 따른 각종학교 정비 조치에 의하여 1944학년도의 신입생 모집을 중단하게 되었고, 1945년 3월 제17회 졸업생 40명을 졸업시킴과 동시에 부득이 휴교하게 되었다.

그런데 반민족문제연구소(민족문제연구소의 전신)에서는 『친일파 99인』(1993), 『청산하지 못한 역사 1 - 한국현대사를 움직인 친일파 60』(1994) 등의 저서를 통해 임영신을 친일파로 분류하였고 이후 임영신의 친일파 의혹이 불거졌다. 하지만 민족문제연구소는 입장을 선회하여 『친일인명사전』(2009)에서는 임영신을 친일파에서 제외하였다.[38] 임영신은 일제 어용단체에 이름만 올려놓고 활동은 거의 전무한 수준[39]이었고, 창씨개명의 흔적도 없으며, 일제에 의해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혹독한 고문을 받은 것을 미루어 친일파라 보기에는 지나친 무리가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40] 이로써 임영신의 친일파 의혹은 종결되었다.

2. 제2편 종합대학교로의 발돋움

2.1. 제1장 해방과 학교재단

2.1.1. 제1절 중앙여자전문학교의 설립

2.1.1.1. 중앙보육학교의 재개교와 교훈/교가의 제정
1945년의 8.15광복은 교육계에도 새로운 빛을 던졌다. 1944년 일제의 발악적인 억압으로 폐쇄의 비운을 겪어야 했던 중앙보육학교는 1945년 9월 28일 다시 문을 열었다. 보육학교 학생들은 잃었던 마음의 고향을 다시 찾았으며, 임영신 교장은 여성교육의 선구자로서 알뜰히 키워 온 필생의 일터를 다시 찾았다. 그러나 중앙보육학교의 개교는 임영신 교장의 숙원을 달성하려는 첫걸음에 지나지 않았다. 일제하에서 2번이나 인가 신청을 냈으나 각하 당한 여자전문학교 설립의 꿈은 중앙보육학교가 문을 닫고 있는 동안에도 임 교장의 머리에서 떠난 적이 없었다. 따라서 중앙보육학교의 개교는 여자전문학교 설립을 위한 첫 조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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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보육학교가 개교된 후 곧 교훈과 교가를 제정하였다. 현재의 중앙대학교의 교훈인 "의에 죽고 참에 살자(Live in Honor, Live for Truth)"[41] 는 임영신 교장이 창안하여 교수회의의 결의를 얻어 확정된 것이다. 이 교훈은 중앙인들은 '진리의 사도’, ‘정의의 용사’ 를 자임하며, 의롭게 죽을 각오로 참답게 살아 우리 겨레와 온 인류를 위하며 환난의 역사를 기쁨의 역사로 개혁하는 역군이 되라는 깊은 뜻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아 노래로 나타낸 것이 “남산이 영을 넘어”로 시작되는 교가이다. 이 교가는 당시 중앙보육학교의 부교장이며 심리학자이었던 김태오(金泰午) 교수가 작사하였고, 당시의 음악 교수이었던 나운영(羅運榮)이 작곡하였다. 교가는 중앙보육학교 당시에 제정되었지만 이미 이 때에는 중앙여자전문학교를 거쳐 오늘의 중앙대학교로 발전시키려는 청사진이 마련되어 있어, 이를 충분히 참작하여 작사하였으므로 학교가 발전함에 따라 후렴의 교명만 바꾸면 되었다.
2.1.1.2. 중앙여자전문학교의 설립과 그 정신
중앙보육학교가 다시 개교하면서 임영신 교장은 여자전문학교 설립을 위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1945년 9월 29일 임 교장은 김태오와 함께 설립자가 되어 중앙여자전문학교(中央女子專門學校)의 설립인가를 미군정청(美軍政廳) 문교부장에게 신청하였다. 이것에 대한 정식 인가는 다음 해인 1946년 7월 8일에 나왔지만, 임 교장은 이미 중앙여자전문학교 명의로 문학과(文學科)/보육학과/경제학과의 학생을 각각 150명씩 450명을 모집하고, 10월 1일에는 개교식/입학식/개학식을 겸한 뜻 깊은 행사를 거행하였다.

임 교장의 거듭된 노력으로 여자 고등교육기관을 세우려는 오랜 숙망이 그 첫 열매를 맺자, 임 교장은 여성운동/정치활동 등으로 매우 분망하였지만 학교의 비약적인 발전을 기약하며 중앙여자전문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중앙여자전문학교의 설립 목적과 정신은 학칙 제1조에 명시되어 있는 바와 같이, "전문교육령(專門敎育令)에 의하여 여자에게 문학/보육 및 경제에 관한 고등의 교육을 실시함" 에 있었다. 이는 남성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여성도 다시 찾은 조국의 건설에 이바지하려면, 먼저 여성의 지식/교양/능력/정서 등 정신적 면에서뿐만 아니라 경제적 면에서도 남자와 같은 수준으로 향상되어야 한다는, 임 교장의 여성교육에 대한 이상이 집약된 것이었다. 오랫동안 남존여비라는 봉건제도 밑에서 그늘에 숨어 살기를 강요당하였던 우리 나라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면, 교육을 통해서 그들의 자각을 깊게 하는 것이 첩경이라 믿고 중앙여자전문학교를 설립하였던 것이다.
2.1.1.3. 중앙유치원의 재개원
중앙보육학교와 함께 인수받아 경영하던 중앙유치원도 1944년 가을 중앙보육학교의 폐쇄와 함께 문을 닫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8.15 광복을 맞아 임영신 교장은 중앙여자전문학교를 설립하면서 중앙유치원도 다시 문을 열고 10월 1일부터 개원하였다. 해방 후 초대 원장에는 서영채 교수가 취임하였고, 원사(園舍)로는 현재의 영신관의 일부 강의실을 사용하였는데 당시의 시설은 시내 어느 유치원보다 우수하였다. 1946년 12월 현재 원감(園監)을 지낸 김옥련(전 중앙대학교 교수)이 교사로 부임하였지만, 중앙유치원은 1948년 3월에 다시 휴원하게 되었다. 원장이었던 서영채 교수가 동년 2월에 유학차 도미하였고, 중앙여자전문학교가 중앙여자대학으로 승격되어 교사가 부족하였기 때문이었다.

2.1.2. 제2절 재단 설립과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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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재단법인 중앙문화학원 설립인가서
2.1.2.1. 재단법인 설립기금의 확보
중앙여자전문학교의 설립은 중앙대학교로의 발전에 초석을 마련한 데 불과하였다. 중앙여전 설립 이전부터 한국의 유수한 고등교육기관으로 발전할 중앙대학교의 청사진이 마련되어 있었으므로 중앙여자전문학교의 설립은 종착점이 아니라 그 시발점이었을 뿐이다. 임영신 교장은 중앙여자전문학교가 설립되자 곧 4년제 정규 대학으로 승격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하였다.

4년제 정규 대학으로 승격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재단법인(財團法人)이 설립되어야만 하였다. 임 교장은 재단법인 설립에 필요한 기금을 확보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며 이에 온 힘을 쏟았다. 이 때는 미군정에 의해서 1946년 8월 27일 서울종합대학 설치 계획이 공식적으로 발표된 뒤를 이어, 좌익 계열의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국대안반대운동(國大案反對運動)을 전개하던 시기이었다. 이 파동은 비단 교육계뿐만 아니라 정치 문제로까지 확대되었으므로, 이러한 때에 재단법인의 기금을 확보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임 교장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기금이 확보되어, 1946년 11월 12일 미 군정청 문교부장에게 재단법인 중앙문화학원(中央文化學院)의 설립 신청을 제출하였다. 이는 중앙여자전문학교 설립 인가가 난 지 불과 반 년 후의 일이었다.

이 때 확보된 재산은 (1)중앙여자전문학교 재산 34,332,500원, (2)임 교장이 설립자로서 출자한 63,356,700원, (3)1937년에 중앙보육학교를 후원하기 위하여 설립된 애니 머너 파이퍼 재단(Annie Merrier Pfeiffer Foundation)에서 보장한 미화 300,000달러[42] 등 총액 1억여 원에 달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청 문교부장은 재단의 기본 재산이 부족하다고 하면서 주가 지시를 통보해 왔다. 이에 기금 추가를 위해 노력한 결과 한미친선재단(Korean American Friendship Fund)으로부터 미화 1,000,000달러[43]를 보장받게 되었다.
2.1.2.2. 중앙문화학원의 설립
기본 재산의 추가가 이루어짐에 따라 재단법인 설립 기금이 확정되자, 미 군정청 문교부장은 1947년 4월 10일자로 재단법인 중앙문화학원의 설립을 인가하였다. 이로써 "국가와 인류사회 발전에 필요한 학술의 심오한 이론과 그 광범하고 정치(精緻)한 응용 방법을 교수하여 지도적 인격을 도야하는 것"(교육법 108조)을 목적으로 한 교육의 근본이념에 바탕을 두고, 문학/교육 그리고 상업과 경제에 관한 고등교육을 실시하고자 중앙여자대학(中央女子大學)을 유지/경영하는 재단법인 중앙문화학원이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같은 해 8월 29일에는 서울지방법원 영등포 등기소에서 설립 등기도 마쳤다. 재단법인 중앙문화학원은 사무소를 경성부 영등포구(永登浦區) 흑석정(黑石町) 221번지 중앙여자대학 내에 두고 설립자 대표인 임영신 교장이 이사장을 겸하였다.

2.2. 제2장 발전을 위한 기반 구축

2.2.1. 제1절 중앙여자대학의 설립

2.2.1.1. 중앙여자대학의 설립과정
중앙여자전문학교를 중앙여자대학으로 승격시킬 모든 준비가 갖추어지자, 임영신 교장은 1946년 8월 중앙여자대학의 명의로 학생을 모집하였다. 당시 미군정 밑에 있는 교육심의회(敎育審議會)의 제2분과위원회인 교육제도분과위원회에서는 미국의 학제를 도입하여, 이 해부터 학년 초를 9월 1일로 정하였기 때문에, 이에 따라 8월에 학생을 모집하였다. 그리하여 일종의 과도 조치로 학부(學部)와 전문부(專門部)로 나누어 학생을 모집하였는데, 당시의 중앙여전 재학생 중 2학년생은 학부에, 1학년생은 전문부에 편입시켰다.

1947년 4월 10일 재단법인 중앙문화학원과 중앙여자대학의 설립이 인가되어, 중앙여자대학은 정식으로 발족을 보았다. 이에 같은 해 5월 8일 대학 승격 기념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였으며, 7월 13일에는 대학 강당에서 동창회를 개최하였다.

중앙여자대학이 설립되자 재단법인 중앙문화학원은 이사회를 열어 임영신 중앙여자전문학교 교장을 만장일치로 학장으로 선출하였고, 임 교장도 이를 쾌히 받아들여 1947년 4월 10일 학장에 취임하였다. 교무과장에는 구자성, 학생과장에는 서영채 교수가 각각 취임하였다. 그러나 1946년 4월부터 대학으로서의 교육을 실시하여 왔으므로 사실상 교장/부교장 기타의 보직자는 그 때부터 각각 직무를 수행하여 왔다.
2.2.1.2. 학부의 구성
중앙여자대학은 문학부(文學部)와 상경학부(商經學部)의 2개 학부 및 전문부로 구성되어 있었다. 단 전문부는 1948년도까지만 과도기적으로 존치하기로 하였다. 문학부는 문학과 /보육학과 2과, 상경학부는 상학과/경제학과의 2과로 구성되었다.

학부의 수업연한은 4년이었으며, 졸업에 필요한 학점은 180학점 이상이었다. 학사학위는 각 학부 소정의 학점을 취득한 자로서 학사 시험에 합격한 자에게 수여하되, 문학부 졸업자에게는 문학사(文學士), 상학과 졸업자에게는 상학사, 경제학과 졸업자에게는 경제학사 학위를 수여하였다.

2.2.2. 제2절 중앙대학의 설립

2.2.2.1. 남녀공학의 실시와 교명변경
중앙여자대학은 설립 후 여성교육 기관으로서 독자적인 지위를 확고히 하고 장족의 발전을 이룩하였으나, 시대적 조류나 현실적 요청은 남녀공학을 요구하고 있었고, 임 학장의 비전도 여자대학에 만족할 수만 없었다. 이에 1948년 5월 15일 중앙문화학원은 긴급 이사회를 소집하고 남녀공학을 실시하기로 결의하였다. 남녀공학을 실시하게 된 이유는 남녀공학이 남녀 평등의 민주주의 원칙에 부합될 뿐 아니라, 교육 기간을 통해서 남녀가 상호 존중과 상호 협조의 기풍을 배우며, 또한 그만큼 여성의 지위 향상을 촉진한다는 데 있었다. 또 현실적으로도 중앙여자대학의 장구한 발전을 기하고 국가발전에 요구되는 영재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남녀공학이 불가피하였다.

남녀공학을 실시하기로 이사회에서 결정하자 당시의 여학생들은 약간의 동요를 보이며, 학교 당국에 남녀공학을 반대하는 건의를 하였다. 그러나 남녀공학 제도가 실시되자 학생들은 곧 새로운 분위기에 적응하였고 오히려 생기 발랄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5월 15일의 이사회 결정에 따라 남녀공학을 위한 조치로서 ‘중앙여자대학’ 이라는 교명을 ‘중앙대학’ 으로 바꾸고, 5월 16일 미군정청 문교부장에게 학칙 변경 인가를 신청하였다. 5월 25일 문교부장은 문교부 제98호로 이를 인가하였다.

이 학칙 변경에 따라 1949년 8월에는 ‘중앙대학’ 의 명의로 남녀 학생을 모집하였고, 9월부터 남녀공학을 실시하였다. 남녀공학을 실시한 첫 해의 입학생들인 제3희 졸업생들의 남녀 비율은 총 인원 125명 중 남학생이 97명, 여학생이 28명으로 남학생이 전체의 78%이었고, 여학생은 겨우 22%이었다. 그 다음 해에 입학한 제4회 졸업생들의 남녀 비율은 총 인원 79명 중 남학생이 74명으로 전체의 약 94%에 해당하고, 여학생은 5명으로 전체의 약 6%에 불과하였다. 전신이 여자대학이었던 중앙대학은 남녀공학을 실시한 직후에는 남자대학이 되다시피 한 모습을 보였다.
2.2.2.2. 법정학과의 증설
남녀공학을 실시하면서 중앙대학은 남녀공학에 알맞게 학교 체제를 개선할 필요가 있어, 그 첫 조치로서 법정학과(法政學科)를 증설하였다. 당시는 우리 나라가 새로운 민주국가로 탄생하기 위한 진통을 겪고 있을 때이었으므로 정치학과 법학의 필요성이 널리 인식되어 있었고, 또 정치에 직접/간접으로 참여하는 권리와 함께 법을 존중함으로써 법치국가의 기틀을 세우는 의무를 다하는 지도적 민주시민의 양성을 위해서는 정치학/법학의 교육이 시급히 요청되었다. 현실적으로도 청년들의 법학, 정치학과 지망률이 높았으므로 법정학과의 증설은 시의에 맞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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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신축 당시의 희락관

중앙대학은 문학부에 법정학과를 증설하고 문학부를 법문학부로 개칭하기로 하였다. 임영신 학장은 1948년 8월 중앙문화학원 이사회를 열어 법정학과의 증설을 결의하고, 증설에 따른 시설 확충으로 희락관(喜樂館) 건축을 결정하였다. 1949년 3월에 착공된 희락관은 건평 1,330평, 총 공사비 2억 원이 소요되는 공사이었다. 희락관 완공까지의 긴급 조치로 학교 부근의 귀속재산(歸屬財産) 가옥 2동을 구입하여 우선 교수의 연구실과 학생의 도서관으로 할당하였다. 이와 같이 법정학과 증설을 위한 준비가 갖추어지자 10월에는 법정학과 학생 모집을 실시하였는데, 7대 1의 치열한 경쟁을 보여 법정학과를 증설한 것이 시의적절하였음을 입증하였다.

따라서 중앙대학은 문학부를 법문학부로 개칭하고, 법문학부 안에 문학과/교육과/법정학과를 두기로 하였다. 이는 종전에 비해서 법정학과 160명이 늘어 총 정원이 800명이 된 셈이다.
2.2.2.3. 대한민국 최초의 여학사 배출
해방 후 짧은 기간에 중앙여전, 중앙여대를 거쳐 남녀공학으로 급속히 발전한 중앙대학은 1950년 5월 18일 감격적인 제1회 학사학위 수여식을 거행하였다. 강당에서 거행된 학사학위 수여식에서 문학사 30명, 상학사 8명, 경제학사 11명의 총 49명이라는 중앙대학이 배출한 최초의 학사가 탄생하였다. 학사학위 제1호는 문학사 안선준이었다. 이 49명의 학사들은 중앙여자대학에 입학한 학생들로서 모두 여학사이었으므로, 실질적으로는 여자대학의 학사학위 수여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여기서 특기할 것은 이 학위 수여식이 대한민국 최초의 여자대학 학사학위 수여식이었다는 점이다. 이화여자대학도 같은 해에 제1회 학사학위 수여식을 가졌으나, 중앙대학보다 약 2주 늦은 5월 31일이었고, 숙명여자대학은 중앙대학보다 2년이나 늦은 1952년 3월 31일에 제1회 학사학위 수여식을 거행하였다.

이와 같이 여러 모로 뜻 깊은 학위 수여식에서 임영신 학장은 간곡한 훈사를 하였다. 중앙보육학교를 인수한 후 중앙대학의 제1회 학위 수여식을 갖기까지, 모든 간난을 이겨 가며 참된 고등교육기관의 설립을 위해 일해 온 임영신 학장에게, 이 학위 수여식은 가장 소중한 노력의 결실이었다. 이 감격스런 학위 수여식에서 "의에 죽고 참에 살자" 는 모교의 교훈을 강조하는 임 학장의 훈사에는 감격, 열의, 비전이 스며 있었다. 훈사 요지는 다음과 같다.
내가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학교를 경영하기 시작한 것은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 한 것 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이 우리 백의민족에게 아름답고 기름지게 지어 주신 삼천리 금수강산 우리 조국을 일제로부터 찾아야 했고, 그래서 교육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과연 하느님은 우리를 도와 조국을 되찾게 해 주셨습니다. 이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조국을 재건해야 할 때입니다.
남존여비의 봉건제도에 얽매이고, 일제에 얽매여 이중으로 압박을 받아온 우리 한국 여성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조국의 해방과 함께 우리 여성들도 그와 같은 압박에서 해방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남성과 동등한 입장에서 공학을 하게 되었고 조국 재건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이제는 조국 재건을 위한 남녀 대학 교육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해방이 되자마자 중앙여자전문학교를 설립하고, 다시 이를 중앙여자대학으로 승격시켜 설립하였습니다. 그리하여 4년간 "의에 죽고 참에 살자"는 교훈을 내걸고 여러분에게 교육을 해 왔습니다.
여러분은 고등교육을 받은 한국 여성들의 지도자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가정에서, 직장에서, 국가 나아가서는 국제 사회 생활에서 진리의 사도, 정의의 용사가 되어 의롭게 죽을 각오로 참답게 살아 우리 겨레와 온 인류를 위하여 환난의 역사를 환락의 역사로 개혁하는 역군이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조국 재건과 세계 평화를 위하여 부과된 여러분의 시대적 사명을 다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모교의 정신인 "의에 죽고 참에 살자” 라는 교훈을, 또 우리가 생명과 같이 아끼는 중앙을 온 세계에 영원히 빛내 주시기 바랍니다.
2.2.2.4. 기본재산의 증가
일반적으로 사립대학에 있어서 대학의 발전은 재단과 밀접한 관련을 갖게 마련이므로 중앙대학은 학과의 증설, 시설의 확충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재단을 튼튼히 하는 데도 주력하여 상당한 기본 재산의 증가를 보았다. 이는 임영신 학장의 헌신적인 노력과 중앙대학의 괄목할 발전에 기대를 건 국내외 인사들의 아낌없는 후원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임영신 학장은 1946년 9월 신탁통치(信託統治)를 반대하는 한국 국민들의 총의를 UN에 호소하기 위해서, 민주의원(民主議院) 전권대사(全權大使)로 UN본부가 있는 미국 뉴욕으로 건너갔다. 그 곳에서 임 학장은 나라를 위하여 중대한 사명을 띠고 주야로 노력하는 분망한 속에서도 중앙대학의 일을 잊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모교인 남가주대학교 총장 폰 클라인스미드, 루즈벨트 부인, 제시 암스트롱 여사 등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아, 미국의 저명한 직조(織造)회사 사장 엘리스 지이 허긴스(Ellis G. Huggins), 아노드 시이 마아츠(Arnaud C. Marts) 박사, 그 밖의 부호와 명사들이 미화 100만 달러의 기금을 출자하는 데 협조를 받았다. 이로써 당시의 중앙여자대학을 위한 재단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는데, 이것이 곧 한미친선재단이었다.

한미친선재단은 1947년 3월에 설립되었고, 재단의 사무소는 미국 뉴욕 시에 있었다. 이 재단은 한국 국민과 미국 국민의 상호 친선을 도모하고, 인류 문화의 발전에 기여한다는 데 설립 목적이 있었다. 설립 당시의 임원은 이사장 엘리스 지이 허긴스, 이사 아노드 시이 마아츠, 사무국장에 에마뉴엘 에이치 뎀비(Emmanuel H. Demby) 등이었다.

이 재단은 1947년 3월 3일 에마뉴엘 뎀비 사무국장(Liaison Director)이 공증인(公證人) 아더 엘 먼레이(Arther L. Munley)의 공증하에 중앙여자대학 유지 재원으로 100만 달러를 보장하는 동시에, 이 재원의 수익금에서 매년 200만 원을 조달하겠다는 자금 조달 증서를 보내왔다. 1948년에는 약정한 바와 같이 200만 원을 일차적으로 송금해 왔고, 동액의 제2차 송금이 그 다음 해에도 있었으나, 1950년 분은 한국전쟁으로 중단되었다.

임영신 학장은 여성만의 교육을 위한 중앙여자대학을 남녀공학의 중앙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하고 법정학과를 증설하면서, 중앙대학을 속히 종합대학교로 승격시키려는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하였다. 즉 1948년 8월 중앙대학은 이사회의 결정에 따라 법정학과의 증설을 위한 시설 확충으로 희락관을 짓기로 하였는데, 이것은 종합대학에의 꿈을 실현하는 첫 단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임 학장은 1949년 3월 희락관 건축 기금으로 사재 (私財) 198,500,000환을 재단법인 중앙문화학원에 기증하였고, 이사회에서는 만장일치로 이 뜻을 받아들였다. 석조 건물 2층으로 된 이 희락관은 1949년 3월에 착공하여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50년 5월 15일에 준공되었다. 당시의 학생들은 이 새 건물에서 약 2주일 동안 공부하다가 북한군의 남침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한편 희락관이 완공되기까지의 보완책으로 학교 인근의 귀속재산 건물을 사들여 교수연구실과 도서관으로 사용함으로써 재산의 증대를 꾀하기도 하였다.

2.2.3. 제3절 한국전쟁기의 중앙대학

2.2.3.1. 한국전쟁의 발발과 휴교/전시연합대학
중앙대학이 최초의 학사를 배출한 1950년은 민족적으로 매우 비극적인 해이었다. 이 해 6월 25일, 북한의 불법 남침으로 민족상잔의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던 것이다. 중앙대학은 5월 18일 제1희 학사학위 수여식의 감격을 안고 더욱 좋은 대학으로 발전할 것을 기약하며 6월 10일 입학식과 개학식을 거행하였다. 학년 초가 6월이 된 것은 전술한 바와 같이 교육법 제정에 따른 과도적 조치 때문이었다. 그러나 개학한 지 약 2주일 후인 6월 25일 일요일 새벽 북한군은 38선을넘어 남침하여 왔다.

국군은 북한군의 불의의 습격에 미처 반격 태세를 갖출 겨를도 없었으며, 병력과 장비 면에서도 북한군에 비해 현저히 뒤지고 있었다. 전세는 불리하여 이미 6월 26일 밤에는 의정부가 점령당하고 말았다. 북한군은 남하를 계속하여 6월 28일 아침에는 서울을 점령하였고, 6월 30일에는 한강의 방위선이 무너졌다. 7월 4일에는 수원이 점령되었으며 7월 20일에는 대전이 함락되었고, 그리하여 8월 3일에는 서쪽은 낙동강까지 후퇴하였고, 남쪽은 진주 동쪽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한편 중앙대학은 6월 25일에도 평소와 다름 없이 몇몇 당직자들이 학교를 보살폈고, 그 다음날에는 약간의 불안이 감도는 가운데서도 정상 수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6월 27일에는 전세가 더욱 급박해져서 포성이 요란하게 들리고 서울 상공에서는 적의 야아크기와 아군기간에 공중전이 벌어지고, 격추된 적기에서 낙하산으로 탈출한 북한군 비행사가 명수대에 낙하하여 엠불런스에 실려가는 등 긴박한 사태가 눈앞에 벌어지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경찰은 한강 인도교에서 서울로 들어가지 못하게 교통을 차단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사태를 보고 중앙대학 당국은 6월 27일에 긴급 교수회의를 개최하여 무기 휴교를 결정하였다. 운동장에 전교생을 집합시켜 무기 휴교를 발표하고, 교직원들에게는 2개월 분의 봉급을 선불하였다. 학생과 교수들은 언제 다시 만난다는 분명한 약속도 없이 제각기 피난길에 올랐다. 희망에 찬 내일을 바라보며 비약을 거듭하던 중앙 가족에게는 뜻하지 아니한 타격이 갑자기 닥쳐온 것이다. 학생과 교수는 고향으로 또는 군(軍)으로, 또는 대구나 부산으로 제각기 갈 길을 찾아 무거운 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전국(戰局)은 한때 암담하였으나, 약 3개월이 지나서 UN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북한군이 남침하자 UN총회는 이 침략을 저지하기 위하여 UN군을 편성해서 한국 전선에 급파하였기 때문에, 낙동강까지 후퇴하였던 국군은 UN군과 협동하여 다시 북상을 시작하였다. 9월 15일에는 연합군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북한군을 양단(兩斷)하고 수도 탈환 작전에 돌입하였다. 이와 같은 국군과 UN군의 반격으로 전세는 일변하였고, 서울이 수복된 것은 9월 28일이었다. 9.28 수복 후 피난갔던 중앙대학의 교직원들은 대부분 다시 서울에 돌아왔다. 그러나 이 때는 중앙대학에 미 육군의 제8군 수송중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그래서 강의실은 갖지 못하였으나 개교하며 학생들의 재등록을 받는 한편, 본관에 있던 모든 서류와 비품 등을 별관에 옮겨 보관하였다.

9.28 수복 후에 압록강까지 진격하였던 국군과 UN군은 1950년 11월 26일 인해전술로 밀어닥치는 중공군의 침입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으며 부득이 다시 후퇴하였다. 1951년 1월 3일 UN군은 다시 서울을 철수하고, 정부도 같은 날 후퇴하였으며, 북한군은 4일에 다시 서울을 점령하였다. 이에 9.28 수복으로 서울에 돌아왔던 중앙 가족들도 2번째 피난길을 떠나야만 하였다. 일반 교통편이 끊긴 1월 4일 전선에서 울려오는 포성을 들으면서도 당시의 교무과장 이여진(李如眞)교수는, 학생이면서도 교무의 일을 돕고 있던 강인덕(康仁德)과 서무 직원이었던 송해일(宋海一)의 협조하에 학적부를 비롯한 학교의 서류를 사과 궤짝에 담아 묶고 두 사람의 짐꾼을 동원하여 상도동을 거쳐 영등포역까지 옮겨 갔다. 전쟁으로 인하여 학교 서류의 일체를 잃어 버린 대학도 많았으나, 중앙대학은 교무/서무/학생/재단에 관한 모든 서류들을, 위험을 무릅쓰고 직책에 충실하였던 교직원 몇 사람의 노력으로 무사히 보존할 수 있었다.

1.4 후퇴의 쓰라린 경험을 거울 삼아 전열을 정비하던 국군은 1951년 1월 중순부터 반격을 개시하여 3월에는 또 다시 38선을 돌파하였다. 이에 소련은 UN에 휴전안을 제의하였다. 휴전의 성립은 곧 민족분단의 영구화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이 비참한 전쟁에 바쳐진 모든 희생의 의의를 흐리게 하는 것이었으므로, 우리 정부는 시종일관하여 휴전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우리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교섭은 미군이 당사자가 되어 지루하게 끌었으며, 그 조속한 타결의 전망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문교부는 장기전에 대비하는 비상교육정책을 세우게 되었다. 1951년 1월 7일 문교부는 부산시청을 임시 사무처로 정하고, 같은 해 2월 26일자로「전시하 교육 특별조치 요강」(戰時下敎育特別措置要綱)을 제정/발표하여, 그 동안 중단되었던 수업을 재개할 것을 시달하였다. 피난 중인 국민학교와 중/고등학교의 학생은 피난지의 학교에 등록하여 수업을 계속할 것과 임시로 피난 특설 학교를 설치하여 수업을 재개하라는 것이 이 요강의 골자이었다.

그러나 대학은 초/중/고등학교와는 달리 상당한 시설과 교수를 필요로 하므로, 피난 초기에는 그 재개가 불가능한 상태이었다. 그런데도 문교부는 1951년 5월 4일 문교부령 제19호 「대학 교육에 관한 전시 특별조치령」을 공포하여 전시연합대학(戰時聯슴大學)을 설치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에 먼저 부산에서 발족하여 점차로 전주/광주/대전의 4개 도시에 전시연합대학을 설치하고, 그 지방에 피난하고 있는 각 대학의 학생을 모아 4월부터 수업을 개시하였다.(후에 청주/대구에서도 추가설립됨)

이 전시연합대학은 세계 교육사상에 전례가 없을 뿐 아니라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6,500여 명의 대학생이 수강하였다는 사실은 이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때 중앙대학의 학생 중에서도 상당수가 새로 설치된 전시연합대학과 기타 동등의 교육기관에서 수강하게 되었다. 이 전시연합대학은 후에 각 대학이 독자적으로 개교함에 따라 약 1년간 계속하다가 폐지되었지만, 각 대학의 학생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지낸 것도 전쟁 기간 동안 잊기 어려운 한 토막의 추억이었다.
2.2.3.2. 부산에서의 임시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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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부산송도교사 앞에서 임영신 박사, 교직원

1951년 4월 중앙대학은 부산에 피난 중이던 김태오 부학장, 이여진 교무과장, 한태수(韓太壽) 학생과장, 임건희 서무과장과 그 밖의 교직원들이 협의하여, 부산 지방법원 소년부 지원 근처에 중앙대학 임시사무소를 설치하였다. 임시사무소를 설치한 것은 부산에 피난 중인 정부 각 기관의 고문 또는 직원, 미군 기관의 통역 등으로 일하고 있는 교직원과 전시 연합대학에서 수강 중인 재학생들의 실태를 파악하고 연락을 유지함으로써 중앙대학이 다시 개교할 때에 대비하기 위한 조치이었다. 임시사무소는 우선 재학생들의 등록을 받아 학생들의 실태를 파악하였다. 그 후 전선이 대체로 고정되면서 부산에 피난 중이던 서울의 각 대학은 임시수도 부산에서 각기 개강을 준비하였다. 중앙대학 임시사무소도 개강을 위한 준비를 서들렀으나, 전시하의 여러 가지 어려운 조건 때문에 애로에 봉착하고 있었다.

때마침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5월 12일 재미 재단의 업무 관계로 도미하였다가 미국에서 활약 중이던 임영신 학장이 귀국하였다. 임 학장이 귀국하자 개강을 위한 준비는 급속히 진전되었다. 그는 적과 싸워 이기는 것이 지상 과업인 전시에서는 전력의 증강을 위해서라도 더욱 철저한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부산에서 임시 개교를 위한 조치를 세웠다.

우선 부산 송도(松島)에 있는 부산시 소유 송도 해수욕장 건물을 빌어 임시 교사로 사용하기로 한 임시 본부는, 건평 약 140평 정도되는 건물을 약간 개조하여 교무실/교수실/서무실 각 1개와 강의실 3개를 마련하고 9월에 개강하였다.
2.2.3.3. 이리분교의 설치
1951년 10월 31일에 개교한 이리분교는 부산본교보다 그 규모가 훨씬 컸다. 그러나 이리분교가 개교되기까지는 여러 가지 애로를 타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리분교 설치가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951년 8월부터이었다. 중앙대학은 신입생 모집과 호남지방의 중대생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하여, 장환(張桓) 교수와 사무 직원인 송해일 서기를 전주에 파견하였는데, 이 때 호남지방의 학생들이 전주에 분교를 설치해 줄 것을 건의하였다.

장환 교수는 부산에 돌아와 임영신 학장에게 호남 학생들의 건의를 보고하였다. 임 학장은 전시하의 여러 가지 여건에 비추어 호남지방 학생들이 부산본교에서 배운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분교를 설치해서라도 면학의 기희를 갖게 하는 것이 최상의 방도라 생각하고 대학 간부와 협의하여 분교 설치를 결정하였다. 전주가 아니라 이리에 분교를 설치하기로 하였는데, 전주보다는 이리가 교통 사정 등 여러 가지 조건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9월 하순 장환 교수와 송해일 서기가 분교 설치 준비차 이리에 파견되었다. 그들은 이리에 도착하여 호남지방 학생들을 위해 중앙대학 이리분교가 설치된다는 것을 신문을 통해 알리고 신입생도 추가 모집하였다. 그러나 이리분교 개교 예정일인 10월 13일까지 적당한 교사를 물색하지 못하며 큰 난관에 부딪쳤다. 10월 13일에는 이리분교 입학식 겸 개강식에 참석하려고 부산본교에서 김태오 부학장과 한태수 학생과장이 이리에 왔으나, 개강식은 거행하지 못하고 겨우 입학 선서식만을 거행하였다. 이러한 실정을 보고 김 부학장과 한 과장은 분교 설치를 중지할 것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분교 설치를 중지한다는 소식을 들은 지방 유지와 학생 및 분교 설치차 파견된 교직원들은 분교 설치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하고 설치 방침을 변경하지 말도록 열렬히 호소하여 김 부학장과 한 과장은 뜻을 굽혀 이리분교의 존속을 발표하였고, 이에 이리분교의 존속이 다시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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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이리분교 제1호 교사

이리하여 교사(校舍)를 확보하기 위하여 노력한 결과, 이리 농과대학 백남혁(白南嚇) 학장의 후의로 이리농대 강당을 빌어 개강함으로써 교사 문제도 해결되었다. 이리분교의 초대 책임자 및 교무처장으로 정내동 교수가 부임하고, 송해일이 교무과장이 되었다. 11월에는 이리시 북창동(北倉洞) 145번지에 있는 귀속농지(歸屬農地) 관리국의 창고를 임차하여 이리분교 제1호 교사(건평 80평)로 사용하고 이리 농대 강당은 비워 주었다. 이 후 이리분교는 교사가 증설/확장되었다. 제1호 교사의 뒤를 이어 1952년 3월 10일에는 이리 귀속농지 관리국 소유의 또 하나의 창고를 빌어 2개의 강의실로 개조하여 이리분교 제2호 교사(건평 134평, 대지 1,520평)로 사용하였다. 같은 해 5월에는 이리 귀속농지 관리국이 해체되었으므로 그 청사(건평 173평, 대지 206평)를 빌어 본관으로 사용하였다.

임영신 학장의 결단으로 분교의 존속이 확정되고, 교사도 확장되면서 부산본교로부터 많은 교수가 파견되어 수업도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이리분교는 이리역과 분교에서 가까운 전주여관을 지정하여 파견되어 오는 교수들의 숙사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수업이 정상화되면서 등록 학생수도 점차 늘어났다. 개강한 지 약 1달 후인 1951년 11월의 재적생 수가 2이명이었으나, 1년 뒤인 1952년 12월에는 656명 (남 622명, 여 34명)으로 증가되었다. 당시의 교통 사정에 비추어 부산에서 이리까지 교수가 왕래하며 강의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여러 교수들은 번갈아가며 집중 강의를 하는 등 불편한 점을 무릅쓰고 출강하였다.

한편 이리분교에는 중앙대학생만이 아니라 피난 중인 서울대학교, 고려대학교, 연희대학교 등 여러 대학의 학생들이 수강하고 있었는데, 1952년 9월 현재 17명이었다. 또 이리분교에 재적 중인 학생도 고려대학교를 비롯하여 기타 여러 대학에서 약간 명이 수강하고 있었는데 1952년 9월 현재 5명이었다.
2.2.3.4. 서울분교의 설치와 중앙대학의 설립 갱신
중앙대학은 부산본교와 이리분교의 개강으로 부산과 호남지방의 학생들에게 수업을 계속할 길을 열어 주었으나, 서울 학생들은 그 혜택을 받지 못하였다. 이에 중앙대학은 대전 이북의 학생들을 위하며 서울분교를 설치하고 1952년 4월 3일부터 개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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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추정), 성조기가 걸려있는 영신관

1952년 봄에는 휴전회담의 진전으로 전쟁이 소강 상태로 접어들자,작전상 이유로 금지되었던 한강 이남의 통행과 거주가 허용되었고,또한 김준걸(金俊傑) 외 몇 명의 학생이 부산본교를 찾아와 서울분교의 설치를 건의하였으므로 임영신 학장은 교수 회의의 결의를 얻어 서울분교를 설치하였다. 중앙대학은 이 때까지 한강 이남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사를 사용할 수도 있었으나, 분교 설치 때까지도 유엔군 수송중대가 교사를 사용하고 있어서 당시 임태희 이사의 사저에 분교의 본부를 두고 사무 책임자로 황종남을 파견하였다. 교사로는 임민규(任民珪) 이사 사택 부근의 학교 사택 몇 동을 개조하여 강의실로 사용하였다.

서울분교의 수업은 주로 부산본교와 이리분교의 교수들이 담당하였으며, 부산과 이리에서 수업차 서울에 온 교수들은 당시 김태오 부학장의 자택에서 합숙하였다. 부산본교/이리분교의 교수 외에도 서울에 있던 다른 학교나 다른 기관에 근무하는 교수들도 출강하여 서울분교의 수업은 비교적 충실한 편이었다. 그러나 이 때에 서울분교에 와서 강의한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었다. 휴전회담이 진전되어 전쟁이 소강 상태에 들어가긴 하였지만, 군사 작전상의 이유로 말미 암아 한강 이북의 통행이 금지되어 있었고, 가까운 전선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포성은 전쟁을 피부로 느끼게 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학생들의 통학도 어려운점이 많았다. 한강 이남에 거주하는 학생들은 통학에 문제가 없었으나, 출입이 금지된 한강 이북에 거주하는 학생들은 통학에 상당한 지장을 받았다. 그러나 헌병 장교로 근무하는 재학생들의 협조와 당시 서울신문 논설위원으로서 출강하던 조용만(趙容萬) 강사의 알선으로 많은 편의가 제공되어 통학의 불편이 제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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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서울분교 강의모습

이처럼 여러가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서울분교 학생들의 수업에 대한 열의는 대단하였다. 서울분교를 개설한 지 약 1개월 뒤인 1952년 5월 현재 서울분교에 등록된 학생수는 61명(남 57명, 여 4명)에 불과하였으나, 1953년 2월에 재적 학생수는 152명(남 141명, 여 11명)으로 늘어났다. 이는 전황이 호전되어 상경한 학생이 많았기 때문이다. 또 서울분교에서는 동국대학 학생을 비롯하여 상당 수의 타교생이 중앙대학 학생들과 같이 교육을 받고 있었다.

서울분교가 설립된 무렵인 1952년 4월 23일 정부에서는 모법인 「교육법」을 제정한 후 햇수로 4년만에「교육법 시행령」이 대통령령 제633호로 공포되었다. 뒤를 이어 교육위원회의 위원 선거가 치러지고 교육자치 제도가 역사적으로 발족되었다. 이에 따라 각 대학은 시행령에 맞도록 대학의 설립 갱신을 할 필요가 생겼다.

중앙대학은1952년 4월 30일 설립 갱신을 문교부장관에게 신청하여 , 5월 15일자로 인가를 받았다. 이 때 설립 갱신한 사항 가운데 중요한 것은 법문학부의 법정학과를 법학과와 정치학과로 분리하여, 법정학과 정원 160명을 법학과 240명, 정치학과 240명으로 증원하고, 상학과와 경제학과의 정원 160명을 각각 240명으로 증원한 것이다. 그리하여 총 정원은 800명에서 1,280명으로 늘어났다.
2.2.3.5. 전시하의 교세 확장
불의의 전쟁으로 중앙대학은 큰 시련을 겪고 있었지만, 중앙대학의 발전을 염원하고 후원하는 인사들은 끊이지 않았다. 1952년 5월 임영신 학장의 동생인 임영선(任永善) 여사는 자기 소유의 부동산을 조건 없이 재단법인 중앙문화학원에 기부하겠다고 신청해 왔다. 임영선 여사는 부동산을 기증하면서 "오로지 언니가 경영하는 중앙대학의 발전을 위해 사용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고 하였다.

이에 임영신 이사장은 5월 28일, 당시의 학장 공관(서울 중구 회현동 1가 142번지)에서 이사회를 개최하고 기증해 온 재산을 받아들일 것인가를 협의하였다. 당시는 전란 중이라 민족의 장래는 염두에도 두지 않은 채 사리사욕에만 눈이 어두워 온갖 비행이 자행되고 있는 때인데, 부호도 아닌 여성이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 학교에 조건 없이 재산을 기증한다는 것은 참으로 있기 어려운 찬양할 만한 일이었다. 따라서 중앙문화학원 이사회는 이 재산을 받아들이기로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다.

한편 임영신 이사장은 1953년 2월 전시임에도 불구하고 대학원 교사(校舍) 및 교직원용 사택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흑석동에 있는 건물 14동을 매수하여 재단법인 중앙문화학원의 기본 재산에 편입하였으며, 교지(校地)의 확장에도 심혈을 기울여 종합대학을 목표로 하는 정지작업(整地作業)을 미리 준비하였다.
2.2.3.6. 총동창회 창립
부산본교와 이리분교 및 서울분교가 각기 앞뒤를 달리하며 개강이 되자 학사 행정도 차츰 본궤도에 오르게 되어, 그 동안 전시의 혼란속에서 중단되었던 졸업식이 거행되었다.

1951년 9월 9일자로 『동아일보』에 중앙대학 졸업반 학생들은 부산이나 사무소에 등록해야 한다는 광고를 낸 지 20일 뒤인 9월 29일, 제2회(1950년도) 학사학위 수여식을 피난지인 임시수도 부산시 부용동(芙蓉洞)에 있는 항서교회(港西敎會)에서 거행하였다. 이 학위 수여식은 원래 그 해 3월에 거행되어야 할 것이었으나 휴교 중이었으므로 자연 연기되었던 것이다. 중앙대학은 이 학위 수여식에서 문학사 방학희(方鶴姬)를 비롯하여 법문학부 36명, 경상학부 16명으로 총 52명의 졸업생에게 학사학위를 수여하였다. 이번에도 제 1회 학사학위 수여식과 마찬가지로 여자 졸업생만이 학위를 받았는데, 이것이 여자대학으로서는 마지막 학위 수여식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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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미상, 남녀공학 1기로 입학한 학생들 단체사진

1952년 4월 3일에는 제3회 학위 수여식을 역시 항서교회에서 거행하였다. 이 학사학위 수여식에서 중앙대학은 문학사 양호연(梁昊淵)(학사학위 번호는 102호이나, 남자 졸업생으로서는 제1호가 됨)을 포함해 125명의 남녀 졸업생에게 학사학위를 수여하였다. 제3회 졸업생 중 남자 졸업생은 97명, 여자가 28명이어서 남녀공학이라 하지만 남자가 전체의 78%를 차지한 것으로 보아 남학생 중심의 대학이 된 느낌을 주었다. 중앙대학의 남자 졸업생으로서는 제1회 학사학위 수여식이 되었으며, 남녀공학으로서도 첫 번째 학위 수여식이 되었다. 전시하의 졸업식이라 스스로 누르기 어려운 감개가 모든 참석자의 가슴을 메웠으며 서로의 유대감이라 할까 동창 사이의 우정도 한결 더하였다. 그들은 이 학위 수여식을 마치고 부산시 광복동에 있는 음식점에 모여 처음으로 중앙대학 동문회를 조직하였는데, 초대 회장에는 정치학과 제3회 졸업생 신철순이 선출되었다.

2.3. 제3장 중앙대학교의 출범과 성장

2.3.1. 제1절 종합대학교의 출범

2.3.1.1. 중앙대학교의 설립
중앙대학이 정당한 근거를 제시하며 중앙교육위원회의 재소집을 끈질기게 요구한 결과, 1953년 2월 28일 오전 11시 중앙대학교의 설립 인가 문제를 재심의하기 위하여 문교부 회의실에서 중앙교육위원회가 다시 개최되었다. 임영신 학장을 비롯하여 김태오 부학장, 여러 교수, 직원, 학생들이 방청하는 가운데 진행된 이 회의는 약 30분간의 심의를 거쳐 중앙대학교의 설립 인가를 별다른 이의 없이 결의하였다. 이 때 인가된 내용은 1952년 3월 8일 중앙대학 긴급 이사회 에서 결의한 원안에 약간의 수정을 가한 것이었다.

위의 인가 내용 중 이사회가 결의한 원안과 달라진 것은, 교육대학을 없애는 대신 이에 소속시켰던 교육학과. 심리학과를 문과대학에 편입시키고, 문과대학의 철학과, 사학과와 법정대학의 신문학과를 삭제한 점이다. 정원도 원안에서는 총 1,840명을 요청하였는데 383명이 삭감되어 1,460명만 인가되었다.

대망하던 종합대학교 설립이 인가되자 중앙대학은 촌각이라도 아껴 써야 할 분망한 시기를 맞이하였다. 중앙대학이 명실공히 명문의 종합대학교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학교의 기구, 시설 등 각 부문에서 전면적 개편과 확장을 서둘러 조직적인 학사행정과 계획성 있는 학교운영 체계를 시급히 확립할 필요가 있었다.

1953년 2월 재단법인 중앙문화학원 이사회는 만장일치로 임영신 학장을 초대 총장으로 선출하였다. 임영신 총장은 중앙대학교의 비약적인 발전을 기약하며 취임하였고, 부총장으로는 김태오 부학장이 취임하였다. 이와 동시에 학교운영의 기본 원칙이 될 학칙도 종합대학교로서의 면모에 손색이 없도록 전면 개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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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교사 반환식

중앙대학교는 환도 이후 UN군으로부터 교사를 인수한 뒤 점차 정상화되었고, 시설의 확충을 비롯한 교육의 내실화를 다져 나가면서 종합대학교로서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이 때 많은 학과를 신설 또는 개편하였는데, 이를 연도별로 정리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954년 1월 26일 문과대학에 철학과(정원 100명)/물리학과(120명)/화학과(120명)/생물학과(120명)를 신설하였으며, 국문학과를 국어국문학과, 영문학과를 영어영문학과로 개편하였다. 이와 같이 학과를 신설/개편함에 따라 문과대학을 문리과대학으로 개편하는 한편, 학부제도를 채택하여 국어국문학과/영어영문학과/교육학과/심리학과/철학과의 5개 학과를 문학부에, 물리학과/화학과/생물학과의 3개 학과를 이학부에 소속시켰다.
1955년 4월 1일에는 문리과대학 이학부에 수학과(정원 140명)를 증설하고 물리학과/생물학과/화학과의 정원을 각 5명씩 증원하였다. 수학과를 증설함에 따라 종래 3개 학과이었던 문리과대학 이학부는 4개 학과로 늘어났다.
1957년 1월 16일 법정대학에 행정학과(정원 160명)를 신설하고, 정치학과를 정치외교학과로 개편하였으며, 경상대학에 경영학과(정원 160명)를 증설하였다.
1958년 3월 31일에 문리과대학 문학부에 사학과(정원 120명)를 신설하고, 같은 해 1월 8일에는 법정대학에 신문학과(200명)를 증설하였다.
1959년 2월 1일에는 문리과대학 문학부에 연극영화학과(정원 120명)와 보육학과(120명)를 증설하였다.
이와 같이 중앙대학교는 종합대학교로 발족한 이후 만 6년만에 11개의 학과를 신설하여 4개 대학 19개 학과의 규모로 발전하였으며, 정원도 2,850명으로 늘어났다.
2.3.1.2. 교과과정의 개편
종합대학으로 승격한 이후 학교 기구와 시설의 정비와 함께 중요한 것은 교육내용의 충실을 기하는 것이었으므로, 중앙대학교는 학교 실정과 교육지침에 부합되는 교과과정의 개편에 착수하였다. 1954년 3월 교무처장. 각 대학장 및 교학과장/교양과장과 교육학 전공교수 2명으로 교육과정 운영위원회를 조직하고 종래의 교과과정을 재검토하게 되었다. 1954년 12월 문교부는 대학교육 심의위원회를 거쳐 졸업학점을 180학점에서 160학점으로 인하하고 교양과목을 강화하도록 지시하였다.
2.3.1.3. 학교기구의 개편
종합대학교로 성장한 중앙대학교가 학사행정을 신속/원활히 운영하기 위해서는 단과대학이었던 중앙대학 시절의 학교기구를 새로이 개편하거나 조정할 필요가 있었다. 각 대학과 각 행정처가 관장하여 분담할 사무도 명확히 구분하여야 하였다. 이에 1953년 3월 중앙대학교는 기존의 학교 조직 및 운영 기구를 대폭 개편하였다. 단과대학 시절의 교무과/사무과/학생과가 그대로 처로 승격되어 교무처/사무처/학생처로 개편되었고, 각 처장 밑에 사무를 분장하는 담당 제도만 두었다. 각 대학에는 학장을 두고 그 밑에 각 학과에는 주임을 두어, 각 대학과 각 학과의 학사행정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대학원과 도서관에도 각기 원장과 관장을 두었다. 대학본부는 총장/부총장을 비롯하여 사무처/교무처/학생처로써 구성하고, 4개 단과대학과 대학원 및 도서관은 각기 해당 사무를 관장하였다.

1953년 4월 종합대학으로서 처음 신입생을 모집하면서 각 대학과 각 부처의 책 임자를 임명하였다. 초대 보직자는 다음과 같다.
총장 : 임영신
부총장 : 김태오
대학원장 : 김태오(겸임)
문과대학장 : 고형곤
법정대학장 : 최태영
경상대학장 : 최호진
약학대학장 : 고주석
도서관장 : 정내동
사무처장 : 임건희
교무처장 : 윤태림
학생처장 : 조동필

2.3.2. 제2절 독지가들의 기부

한국전쟁으로 국내 사회질서의 교란은 물론, 일시적이나마 모든 산업도 중단되고 말았는데 중앙문화학원 산하의 모든 기업도 결코 예외일 수 없었다. 더욱이 재미재단의 자금도 입수할 수 없게 되어 중앙문화학원은 경제적으로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재정의 궁핍은 결국 학교 발전을 저해하는 것으로 중앙문화학원은 재정 확보를 위해 고심하며 혼신의 노력을 쏟던 중, 임영신 총장이 강원도 홍천군 북방면에 있는 215핵타르의 금/은/텅스텐 광산을 중앙문화학원에 쾌히 기증한 것을 계기로 재단의 기반을 확고히 다지기 시작하였다.

1954년 1월 20일에는 고주석 이사가 충북 괴산군 청천면/청원면/미원면에 걸쳐 있는 100만평의 석탄광산을 중앙문화학원에 기부하였다. 고 이사는 1952년에서 1954년까지 재단이사로서 중앙대학교 발전에 공헌하였을 뿐 아니라, 약학대학장으로 취임하여 초창기 약대의 기틀을 잡아준 분으로 중앙대학교로서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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봅스트 이사장(Elmer H. Bobst)

1955년 12월 2일에는 미국 워너 램버트(Warnar Lambert) 제약회사 이사장 봅스트(Elmer H. Bobst)[44]가 루이스 파이퍼 부인의 유지를 받들어 약학대학의 시설 확충에 사용하도록 10만 달러의 거액을 기증하였다. 한미재단을 통해서 기증된 이 돈은 당시의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한미재단을 대표하여 중앙대학교에 전달하였다. 본교는 파이퍼 여사의 유지를 받들고 또 이를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기증받은 돈으로 파이퍼 홀을 신축하고 주로 약학대학에서 사용하도록 조처하였다.

2.3.3. 제3절 교사 신축과 교육시설 확충

2.3.3.1. 가교사의 건립
1954년 4월 1일 미군으로부터 본관을 인수하였으나, 복교생(제대자 및 이리분교에서의 복교자)이 격증하자 당시의 시설은 강의실도 부족한 상태 이었다. 재단은 교사가 신축될 때까지 임시방편으로 본관 서편 후부에 5동의 단층 가교사를 1955년 4월 1일에 완공하였다. 제1/제2 가교사는 각각 80평과 160평으로 목조 건물에 강의실이 3개이었고, 제3/제4/제5 가교사는 각각 124평과 35평 그리고 87평으로 벽돌 건물에 강의실은 10개이었다. 제1/제2/제3 교사는 본관(승당관)을 신축할 때 철거하였으나, 기타 교사는 1978년에도 남아 있어 당시의 어려웠던 사정을 나타내 주었다.
2.3.3.2. 기숙사의 보수
1938년에 세워진 기숙사는 전쟁 기간 중에 수산고아원(壽山孤兒院)이 입주하여 1954년 5월까지 사용하였기에 기숙사로서의 원형을 잦을 수 없게 되었다. 재단은 기숙사를 인수하자 곧 보수하여 그 학기가 시작되는 9월부터 원하는 학생들을 입주시켰다. 그런데 중앙대학교의 전신이 여자대학이었으므로 초기에는 ‘금남의 집’ 이었으나 이번에는 남학생들만 수용하여 ‘금녀의 집' 이 되었다.

콘크리트 와가(瓦家) 2동에 총건평 130평으로 이룩된 이 기숙사는 방이 24개, 식당이 1개, 욕실 1개로 수용 능력은 100명 내외였으며, 당시 숙식비는 7,000환이었다. 생활이 어렵거나 입주를 희망하는 학생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었으나, 본관(승당관) 신축으로 철거되고 말았다.
2.3.3.3. 이리분교 교사 신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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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신축된 이리분교 교사

1954년 3월에 이리분교의 존속이 문교 당국으로부터 허가되자 종래의 창고식 건물로는 학생들의 학풍이나 면학 분위기 조성에 지장이 있다고 생각하여 충분한 강의실을 확보하고 학습 환경을 개선하는 뜻에서 교사를 신축하였다. 1955년 4월에 착공하여 11월에 완공하였는데, 2층의 붉은 벽돌 건물로 총건평이 185평, 강의실은 6개이었다.
2.3.3.4. 파이퍼홀 신축
1955년 5월에 정초식을 갖고 1956년 4월 20일에 완공된 파이퍼 홀은 파이퍼 여사의 유지에 따라 봅스트가 미화 10만 달러를 기증한 돈으로 재단에서 신축한 건물이었다. 같은 해 5월 18일에 성대한 낙성식을 거행하였는데 본교의 전 교직원과 학생은 물론, 이승만 대통령 부처를 비롯해서 파이퍼 재단의 맨훨드 디 머니 부자, 한미재단 이사장 크리스천 베리 장군 등 수많은 내외 귀빈이 참석하여 이 뜻깊은 낙성을 축하해 주었다. 이례적으로 사립대학의 행사에 참석한 이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축사를 하였다.
먼저 중앙대학교 총장 임영신 여사에게 감사하며 우리 나라 교육을 위해 많은 원조를 해 준 파이퍼 여사 그 분에게 진심으로 축하하는 바이며, 특히 임영신 총장이 재미 시절에 민족과 나라를 위해 많은 일을 할 때에 파이퍼 여사와 알게 된 관계로 여사와 임 총장과는 친딸과 같이 지냈다는 점, 젊은 학생들도 이 거룩한 파이퍼 여사의 교육경신을 받들어서 더욱 열심히 공부하여 보답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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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파이퍼홀 완공

정문에서 좌편에 우뚝 선 이 건물은 60여 개의 실험실습실과 강의실이 자리잡았으며, 동쪽 절반은 문리과대학 이학부가, 서쪽 절반은 약학대학이 사용하였다.
2.3.3.5. 영신관의 증축
본교에 세워진 최초의 석조건물이며 가장 오래된 영신관은 고색이 찬연하고 우아한 느낌을 주는 예술적인 작품이었다. 보육학교 시절은 물론, 1968년 8월 현재의 본관인 승당관을 준공하기 전까지는 대학본부로서 총장실, 대학원장실/학장실/행정부서/교수실/소강당/교목실/교환실/강의실 등으로 사용하였으나 너무 비좁아서 개축이 불가피하였다. 원래 3층에는 2~3평 정도의 좁은 방이 10여 개가 있어서 보육학교 시절에는 기악실(器樂室)로, 대학 승격 후에는 여러 학장실 및 교수실로 사용하였으나, 1958년 하계 휴가 중에 건물을 대폭 증축하여 3층에 강의실 5개, 기타 타자실/화장실을 만들어서 다소의 여유를 갖게 되었다.
2.3.3.6. 중앙도서관의 신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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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중앙도서관 낙성식

중앙대학교 도서관은 초기에 단독 건물을 갖지 못하고 1949년 3월 전 이사장 댁인 목조 2층 건물(흑석동 173의 9호)에서 개관하였다. 당시 1층은 사무실과 도서실 및 신문, 잡지 등 정기간행물의 열람실을 두었고, 2층은 일반 서적의 열람실로 사용하였으며, 장서는 5만여 권이었으나 대부분 일본 서적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소유 장서는 거의 분실되었고, 유엔군으로부터 교사마저 인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도서관을 강의실로 개조하는 불운을 겪었다. 유엔군으로부터 교사를 인수한 뒤에는 본연의 도서관으로 환원하게 되었으나 100여 석의 열람실로는 너무도 비좁았다.

때마침 파이퍼 홀이 신축되어 이 곳으로 약학대학이 이전하자 1956년 5월 종래 약학대학이 사용하던 희락관으로 이전하였으나, 이 건물 역시 도서관으로 사용하기에는 만족스럽지 못하였다. 희락관으로 이전한 뒤 많은 도서를 기증 받고 신간도 구비하여 좋은 장서를 비치하게 되자, 비록 비좁은 도서관이지만 합리적인 운영을 위해서 도서관의 조직을 재정비하여 관장 밑에 도서과와 열람과의 2개 과를 두고 관내 업무를 분할/관장하도록 하였다.

1957년 9월 1일에는 일부를 도서관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철근 콘크리트 2층 건물(총건평 1,000평)을 완공하였으나, 학교의 사정에 의해 2층은 합동강의실로, 1층은 영신여자중학교의 임시교사로 사용하게 되었다. 1958년 10월 25일 도서관 신축공사가 기공되어 약 1년 후인 1959년 10월 23일에 지하 1층, 지상 8층의 거대한 도서관을 건립하였다. 신축된 도서관은 총 건평이 4,700평이었으며 3억 환의 공사비가 소요되었다.

도서관의 지하실에는 인쇄실/소독실을, 1층에는 전시 및 잡지열람실과 관장실/서적정리실/식당/숙직실을, 2층에는 열람실/목록실/서고를, 3층에는 강의실과 교수연구실을 두었다. 67개의 연구실은 전임교수에게 고루 배정되었다.

2.3.4. 제4절 4.19 혁명과 학생운동

2.3.4.1. 1960년 4.19 혁명과 중앙대학교
이승만과 자유당 독재정권은 1950년 국민방위군 사건, 1951년의 거창 양민 학살사건, 1952년의 5.26정치 파동과 발췌 개헌, 1954년의 사사오입 개헌, 1955년의 대구 매일신문 테러 사건, 1958년의 보안법 파동, 그리고 1960년의 3.15 부정선거 등 한국 현대사에 굵직굵직한 부정부패 사건을 일으키며 권력을 유지하였다.

당시 임영신 총장은 3.15 부정선거에 부통령 후보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고, 방송을 통해서 이렇게 털어놓았다.
낙선한 사람으로서의 변이란 나에게는 지극히 어려운 테마가 아닐 수 없읍니다. 말을 제대로 하려면 태산도 부족이요 입을 다물려면 백지로 돌아 갈 수 밖에 없읍니다. 그러나 방송국의 간청에 저바릴 수 없어 느낀바를 조용히 말해 보려고 합니다... (중략)
... 소위 이대통령을 보필한다는 몇몇 정상간신도배(政商奸臣徒輩)들이 그의 총명을 완전히 가리워 놓고 또한 그를 철의 장막이란 도가니 속으로 완전히 몰아 넣고야 말았읍니다. 이 악질적인 정상배들은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제각기 이대통령을 등에 업고 자기네들의 생명 연장과 부귀 영화의 계속을 위해서는 민족에 대한 생각은 추호도 염두에 두지 않고 양 같이 순한 민족임을 기화로 하여 입으로 형용할 수 없고 눈으로 볼 수 없는 악행과 만행을 자행하여 이대통령의 숭고하고 거룩한 정신을 망각하여 왔으므로 오늘날 이대통령만이 만(萬) 인간 앞에 원성을 독차지 하게 되었음을 어찌 슬퍼하지 않겠읍니까? 진실로 천인이 같이 통곡할 일이라 하겠읍니다....(중략)
...일예를 들면 내가 운영하고 있는 중앙대학교 소재지인 서울 시내 흑석동에는 동민 태반이 우리 학교에 종사하는 직원이요, 나의 친척이 살고 있는 특수한 곳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표함을 열고 발표한 것을 보면 가엾게도 한표도 나오지 않았읍니다. 이 얼마나 요절하도록 웃으운 일이냐는 말입니다. 이것만으로도 나의 낙선을 전 국민이 알 수 있을 것이며 이번 선거의 정체를 알 수 있을 것으로 믿는 바이므로 이상 더 말하지 않으려고 합니다.[45]
1960년 2월 28일 일요일 등교 지시에 대한 경북고등학생들의 항거는 3.15 마산항쟁으로 이어졌으며, 4월 11일 김주열의 시신이 바다 위로 떠오르면서 제2차 마산항쟁이 촉발되었다. 이어 '4.18 고대 시위' 는 2월 28일 이래의 학생 시위의 주역을 지방 고등학생에서 서울의 대학생으로 바꾸어 놓았고, 정권에 도전하는 '대(對)사회투쟁' 으로 발전하였다. 고대생들의 시위가 반공청년단 종로구단 동대문 특별단부소속 단원인 정치깡패들에게 습격받자, 며칠 전부터 준비해 오던 각 대학의 시위 계획은 앞당겨졌다.

4월 19일 셋째 시간이 채 끝나기도 전에 중앙대학교 학생들은 운동장에 모여 다음과 같은 선언문을 낭독하고 임영신 총장과 학생회 간부의 만류를 뿌리치고 일제히 스크럼을 짜고 교문을 나섰다.
우리 중대생이 자유당 정권의 폭정을 규탄하는 것은 기성세대의 파렴치한 유산을 물려 받지 않으려는 젊은 세대의 정당한 저항이며 총칼의 탄압에는 굴하지 않고 감행되어야 할 이 항쟁은 우리의 후손에게 민주주의를 말살하려는 광적인 장기집권이 가져다 준 부정과 부패의 무서운 해독을 오염시키지 않으려 함에 있다.(후략)
우리학교 시위대는 애국가와 교가 및 전우가, 학도호국단가 등을 부르며 교시인 '의에 죽고참에 살자'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마산학생 석방하라", "불법폭정 바로잡아 민주구국 선봉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흑석동 고개와 한강대교 전면 2차에 걸친 약 40여 명의 경찰대와 소방차 4대의 살수세례를 뚫고 한강 인도교를 지나 삼각지 서울역을 거쳐 시청앞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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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19 혁명 당시 내무부 앞 연좌시위

경무대 앞에서의 경찰 사격으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되자, 오후 3시경 시위대는 다시 국회의사당과 시청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안국동과 종로 을지로를 가로질러 남산을 돌아 다시 소공동쪽으로 향했다. 이어 시위대는 미도파 앞을거쳐 보사부 앞에서 경찰과 충돌하여 격렬한 투석전을 벌이면서 내무부 앞에서 연좌농성에 들어갔다. 이때가 6시경이었다. "내무부장관은 우리들 앞에 나타나 3 • 15 협잡내막을 보고하라", "살인경찰은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던 상황에서 경찰들의 일제사격이 시작되었다.

당시 현장에서 연행되어 고문후유증으로 7월 2일 사망한 서현무(법학 3)의 수기에는 그날의 상황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중대 데모대가 내무부 앞에 도달했을 때 경관들은 우리들에게 정면으로 총부리를 겨눴다. 더 이상앞으로 나갈 것을 단념한 데모대는 10미터 간격을 두고 앉아서 농성을 시작했다 …(중 략 ) …한학생이 태극기를펴들고, "이 태극기는 대한민국의 태극기이며 한국민의 태극기이며 여기서 총을 겨누는 자는 반역자다." 라고 외쳤으나 경관들은 쏠 기세였다. 그때 뒤쪽(시청쪽)에서 발포를 시작하여 점점 가까이 들리자 우리를 경비하던 경관들도 별안간 발포하기 시작했다 …(중략)…총탄 하나가 바로 손끝에와 떨어짐을 느낀 나는 얼른 손을 오무리고 꼼짝을 않고 있었다. 바로 그때 누구인가 머리채를 휘어잡기에 고개를 들려하니 "이 깜찍한 년이 달아나지도 않아!" 하며 총대로 목덜미를 내려치지 않는가. 순간 나는 앗질함과 머리속에 어떤 뜨거운 액체가 하나가득 흐르는 듯함을 느꼈다.(후략)

중앙대학교는 4 • 19혁명과 관련하여 6명의 꽃다운 청춘을 민주의 제단에 바쳤다. 이들은 수유리 4.19국립묘지에 모셔졌다. 이들의 이름과 간단한 약력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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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에서 우로)첫째줄 : 고병래, 김태년, 서현무 / 둘째줄 : 지영헌, 송규석, 전무영
고병래(당시 22세, 상학과 3) : 충남 금산군 금산읍 상옥리 출생. 대전중고교 졸업. 4.19때 내무부 앞에서 희생되었음.
김태년(당시 24세, 약학 3) : 충북 음성군 출생. 청주고교 졸업. 평소 문학에 취미가 있었음. 4.19 당일 녹음기로 치안국 무기고 앞의 시위상황을 녹음하다가 희생되었음.
서현무(당시 24세, 법학 3) : 경기도 용인군 고삼면 월향리 출생으로 신광여고 졸업. 4.19 시위 당시 플래카드를 들고 선봉에 섰으며, 학생시위대의 협상대표로 내무부장관과의 면담을 요청했었음. 경찰에 연행되어 이틀 동안 심한 고문을 당해 그 후유증으로 7월 2일 수도의대부속병원에서 영면함. 그는 아픈 몸에도 불구하고 사월혁명 부상학생동지회 부회장과 사업부장을 역임함.[46]
지영헌(당시 21세, 신문 3) : 충북 단양군 매포면 하시리 출생. 외아들로 태어나 단양고교 졸업. 4.19 당일 내무부 앞에서 희생당하였음.
송규석 (당시 24세, 정외 3) : 전남 고홍군 과역면 석봉리 출생. 순천고교 졸업후 국민학교 교사로 봉직중 1958년 본교 진학. 내무부 앞에서 마지막까지 싸우다 총탄을 맞고 택시에 실려갔는데 정롱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음.
전무영(당시 21세, 신문 1) : 경남 김해군 이북면 장방리 출생. 진해고교 졸업하고 본교 입학한 신입생으로 재학한지 불과 18일만에 내무부 앞에서 희생당했음.

'피의 화요일' 전국적으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 186명이 사망하고 6,0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는데, 중앙대학교는 서울대 7명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희생자를 내었다. 또한 중앙대학교는 4월 19일 당시 대학들 가운데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최후 세력' 이었다. 그로부터 1주일이 지난 4월 25일에도 이승만과 자유당은 이기붕을 퇴진시키는 정도에서 사태를 수습하려 하였다. 바로 이날 오후 전국 27개 대학의 교수 약 300명은 계엄령하에도 불구하고 시위에 돌입하였다. 오후 7시경 국회의사당 앞에서 교수들은 선언문을 다시 한 번 낭독하고 만세삼창과 애국가를 부르고 해산하였다. 4월 26일 10만이 넘는 시위군중이 세종로를 메우면서 경무대로 육박해 들어가는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였다.

5월 10일, 중앙대학교는 임영신 총장을 비롯한 교직원, 전 학생이 모여 운동장에서 4. 19 희생자에 대한 합동추모식을 거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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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19 혁명 희생자 합동추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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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추도사를 하던 중 울음을 터트려버린 임영신 총장

9월 10일, 의혈탑(義血塔)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의혈탑의 후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
중앙아 네이름 거룩하도다 사물의 중앙이요 만물의 중심이로다. 유명을 달리한 여섯의 불사조들아 아 그날 4월 19일 '의에 죽고 참에 살자' 는 깃발을 앞세우고 불의와 부정을 물리쳐 이 나라 이 민족의 영원무궁한 행복을 위하여 무자비한 총탄에 고귀한 피를 흘렸으니 그들의 모습 화랑의 재생이요 모교의 상징이로다. 그대들이 흘린 피는 헛되지 않아 이 땅에 참된 자유와 평화의 씨를 뿌렸으니 희망과 건설의 제2공화국이 탄생되었노라. 우리는 그들이 불모의 땅을 파헤치고 뿌려두고간 민주의 새싹을 우리의 삶이 다할 때까지 서로가 지킬 것을 맹서하노니 의를 위하여 몸을 바친 그들의 영령 참에서 영원이 살아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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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의혈탑 제막식[47]
2.3.4.2. 1964년 6.3 학생운동
1960년 4월혁명은 5.16 군사쿠데타에 의해 짓밟혔다. 그러나 당시 학생회는 타 대학과 마찬가지로 5.16 지지선언을 내었고, 6월 9일 전국대학교 총학장단은 혁명정책 지지결의문을발표하였다. 이는 4월혁명에서 충족되지 못한 기대가 5.16으로 채워질 것이라는 기대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향토개척단이 발족되어 군사정부의 재건국민운동 정책을 지원하였다. 그리고 1962년부터 향토개척단과 농촌봉사활동을 중심으로 학생운동은 체제내적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군사정부가 군정연장 선언으로 민정이양이 불확실하게 되면서, 학생운동은 다시금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다. 1963년 3월의 서울대 자유수호 궐기대회와 5월의 경북대 군정연장 반대시위로 이미 군사정부와의 일전을 예비하였으며, 이는 한일회담 반대투쟁으로 이어졌다. 6.3 학생운동은 2년여에 걸쳐 전개된 장기간의 대규모 대중투쟁이었다. 5.16 쿠데타 세력에 대한 최초의 대규모 투쟁이었기에 구속자도 총 500여 명에 이르렀다. 이 기간에 중앙대학교 학생들도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1964년 들어와 박정희 대통령은 한일회담 추진의 군사/경제적 배경과 한일협정의 체결 의지를 드러내는 연두교서를 발표하였다. 이에 정치권에서는 평화선 양보 등 '대일 굴욕외교' 에 반대하는 '범야공동 투쟁기구' 를 결성하여 적극적인 원외투쟁을 전개하였으며, 학생들도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3월 23일 '5월 초순에 한일협정 조인' 이라는 김종필의 도쿄발언은 타오르기 시작한 불길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었다. 바로 다음날인 24일, 전국 주요도시에서 8만여 명의 학생과 시민이 참여한 대규모시위 투쟁이 전개됨 으로써 마침내 6.3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3월 25일 총학생회가 중심이 되어 약 2천여 학생들이 교정에 모여, 굴욕외교에 대한 성토대회를 열고 정부의 대일외교 저자세 규탄과 평화선을 사수하자는 결의문과 선언서를 채택 통과시켰다. 결의문 채택에 이어서 '일장기' 를 찢는 것을 신호로 스크럼을 짜고 시내로 진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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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한일외교정상화 반대운동
정부는 한일 저자세 외교를 즉각 중지하고 평화선을 끝까지 사수하라! 정부는 국민여론에 귀를 기울이고 평화선을 침범하는 일본어선을 강력하게 단속하라! 일본정부는 36년간 한국 국민을 탄압 통치한 죄상을 솔직하게 시인하고 사과할 것이며, 재일교포 북송 등 양면 외교를 즉각 중단하라!
삼각지를 거쳐 서울역에 도착한 중앙대학교 학생들은, "바다 팔아 정치 말고, 비밀 외교 공개하라", "중지하라 매국외교, 삼천만은 통곡한다" 는 구호를 외치면서, 시청과 국회의사당을 통과하여 중앙청 광장에 도착하여 연좌농성을 벌였다. 이때 최두선 국무총리의 "학생들의 요구사항을 대통령에게 건의, 국정에 반영토록 하겠다" 는 요지의 발언을 듣고 해산하였다.

3.24 시위 이후 연일 계속된 학생시위가 잠시 잠잠해졌지만, 시위주동 학생들에 대한 '괴소포' 전달사건, 학원사찰 등으로 물의가 빚어졌으며, 일본으로부터의 박정희 정권 정치자금 수수설 등이 유포되는 등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4.19 전후로 학생들의 데모가 재개되었다. 4월 19일 중앙대학교 500여 학생들은 경희대 등 3,000여 명과 함께 시청 앞에서 4.19 기념행사를 한 후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데모를 하고 중앙청 쪽으로 밀려가다 경찰과 충돌하였다. 각 대학의 연일 계속되는 시위와 정부의 강경한 대응으로 많은 학생들이 다치거나 구속되었다.

정부의 강경책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시위가 계속되자 24일 서울시내 28개 대학 총장들은 시국수습을 위한 4개 항목의 결의안을 채택하고, 정부는 학원사찰을 중지하고 학생들은 의사가 충분히 표명되었으니 학업에 전념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정일권을 국무총리로 하는 이른바 '돌격내각' 을 줄범시키고, 정국을 정면돌파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였다. 이러한 강경한 정부방침으로 잠시 주춤하였던 학생들의 시위는, 5월 20일 '한일굴욕외교반대 대학생총연합회' 주최의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및 성토대회' 에서 5.16 쿠데타를 4월 혁명에 대한 전면적 도전이었다고 규정하면서 다시 격화되기에 이른다.

위기 의식을 느낀 박정희 정권은 3일 오후 9시 40분 대통령공고 11호로 서울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이에 의해서 발표된 계엄사포고 제 1호의 6항, 즉 서울시내의 각급 대학교와 중/고등학교 및 국민학교는 1964년 6월 4일을 기하여 별도지시가 있을 때까지 일제히 휴교한다는 조항에 따라 휴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6.3 계엄선포 후 352명의 학생들이 징계를 받았는데, 8월 22일 현재 45명 제적, 237명 무기정학, 70명 유기정학 등이었고 224명이 구속되었다. 이 중 계엄사범으로 재판을 받은 중앙대학교 학생은, 내란예비음모 서청원(정외 2), 내란미수 차진모(정외 2), 백광수(정외 2), 유원철(정외 2), 공석근(정외 2), 김용길(정외 4), 고창섭(국문 3) 등 7명이다.

학생회에서는 9월 11, 12일 이틀간에 걸쳐, "구하자, 우리 학우를" 이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구속학생 석방서명운동을 전개하였다. 무려 4,986명에 달하는 서명을 받은 학생회는 이를 학생처에 전달하였고, 임영신 총장은 이를 받아들여 정부에 전달하였다. 당시 총 7명의 구속자 중 4명은 보석으로 풀려나 있었고 3명이 구속되어 있는 상태였다.

1965년 2월 19일 한일협정 기본조약이 가조인되었고, 4월 3일 동경에서 어업/청구권 및 교포 법적 지위 등 3개 현안이 정식 가조인되었다. 3월 26일 동국대생들이 '치욕적인 제2을사조약 가조인 무효' 를 주장하는 성토대회를 연 것을 시작으로 1965년 한일협정비준 반대투쟁의 막은 올랐다. 4월 13일 중앙대학교를 포함해서 여러 대학에서 시위를 벌였는데, 그 전날 고창섭 등 6개 대학 '평화선사수학생투쟁위' 의 대표 10명이 불법집회 용의로 연행되었다. 4월 14일 정오경 중앙대학교 학생 약 1,000명이 "민족의 생명선인 평화선을 사수하자" 는 구호를 외치며 교내시위를 벌인후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다. 또 이틀 뒤인 4월 16일 총학생회 주최 한일회담 반대 성토대회가 1,500여 명이 참가한가운데 열렸다. 이 대회에서 안건을 건의하는 것으로 끝맺으려는 주최측 의도와는 달리 '중대 매국외교저지 결사투쟁위원회' 에서 "제2의 을사조약, 선열은 통곡한다"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교문을 나섰다. 교문앞 500미터까지 나가 흑석동입구에서 3개 소대의 기동경 찰대와 대치하다 경찰의 최루탄발사에 맞서 투석전을 전개하였다. 이날 경비행기까지 동원한 경찰과의 충돌로 101명이 연행되어, 이 중 3명이 구속되었다.

4월 13일 집회에서 부상당한 동국대생 김중배가 사망히여 사태가 긴박하게 돌아가는 양상을 보이자, 문교부는 4월말까지 학교장 재량으로 임시휴교 지시를 내렸다. 당시 동국대(16~30일), 서울 사대(17~22일), 서울 법대(16~22일), 연세대(19일) 등과 서울시내 65개 고등학교도 휴교에 들어갔다.

한일협약 조인 날짜가 다가오자 서울대를 중심으로 단식투쟁으로 맞서는 상황에서, 6월 18일 '중앙대 한일회담 반대 구국투쟁 위원회'가 결성되었으며, 한일회담 정식조인을 하루 앞둔 6월 21일 우리학교를 포함한 12개 대학 학생들과 대광/숭실/양정 등 3개 고교생 도합 1만여 명은 '매국외교 반대' 를 외치며 시위행진에 돌입하였다.

7월 14일 밤 8시 40분, 공화당은 한일협정 비준동의안을 기습적으로 발의하였다. 이에 따라 '정치 방학' 기간인 7월의 정국은 더욱 긴박하게 전개되었다. 8월 25일 오후 박정희 대통령은 학생데모의 뿌리를 뽑겠다는 강경한 내용의 특별담화를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26일 서울시 일원에 위수령이 발동되었는데, 이는 '선포없는 계엄상태' 에서 한일협정 반대투쟁을 강경 진압하려 한 것이다. 1965년 비준반대 투쟁관련 구속자 가운데 9월 1일 현재 구속중인 중앙대학교 학생은 강석흥, 김경수, 김언호, 조병만, 김재현, 고재욱, 배정운, 김종권 등이었다. 또 제적학생으로는 정외과 2학년인 배정운/김종기/김종관, 정외과 4학년안 홍순철/김재현, 농업개발학과 3학년 이재오 등 6명이었다. 중앙대학교의 1965년 데모를 주동한 세력은 이재오 그룹으로서, 바로 '대포수양당' 이라 불리는 64학번 경상대 5인방 모임이었다. 이들의 대표격인 이재오는 1965년 한일협정 비준반대 투쟁국면에서 총학생회 기능이 마비되자 비상학생총회인 중앙대 구국투쟁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으며, 한일협정비준반대 각대학 연합체 본교 대표로도 활약하였다. [이재오]]는 제적되었다가 복적이 안 돼 1996년 2월, 32년만에 비로소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

2.3.5. 제5절 부속기관의 정비

2.3.5.1. 창문학원과 삼양학원 인수
학교법인 창문학원과 삼양학원이 1965년 신학기를 기하여 학교법인 중앙문화학원에 통합합병되었다.[48] 낙양중학교, 낙양공업고등학교의 유지재단인 창문학원이나 영신여자 중고등학교의 경영재단인 삼양학원은 인적/물적으로 자매 관계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중앙대학교와 인접하고 또 학사운영도 중앙문화학원의 지도와 지원을 받아 왔다. 1965년 본교에 사범대학이 신설됨에 따라 중앙문화학원을 종주로 하여 3개의 학교법인이 합병된 것은 자연스러운 추세이었다.

임영신 총장은 동일교명, 동일재단으로 각급 학교를 운영하겠다는 원대한 계획 아래 두 재단을 인수하였다. 1965년 2월 14일 학교법인 창문학원과 삼양학원의 두 재단은 학교법인 중앙문화학원에 합병되었고, 그 교명도 중앙대학교 사범대학 부속 중고등학교 및 중앙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여자중고등학교로 개칭하면서 중앙대학교의 부속 교육기관이 되었다. 통합/확충된 중앙문화학원은 합병에 따르는 법인합병의 등기와 창문학원, 삼양학원에 귀속되었던 재산소유권의 이전등기를 「사립학교법」 제13조에 의거하여 모두 마쳤으며, 법인합병에 따른 학교 설립자의 변경인가도 받았다.[49] 3개 학교법인의 합병과 학교법인 중앙문화학원의 정관도 일부를 다음과 같이 변경하여 문교당국의 승인을 얻었다.[50]
2.3.5.2. 국민학교의 신설
1963년 6월 26일 법률 제136호로 제정/공포된 「사립학교법」에 의하며 학교법인 중앙문화학원은 더욱 충실한 사회적 봉사를 목적으로 국민학교의 설립을 서둘러 1965년 3월 중앙국민학교를 개교하였다. 중앙국민학교는 중앙문화학원이 이미 인수/운영하고 있던 명수대 중고등학교 교사를 이용하여 개교하였는데 1/2/3학년을 동시에 모집할 수 있도록 시교육위원회와허가를 얻어 1학년 4학급(240명), 2/3학년 3학급(각 180명)을 모집하였다.

1965년에 착공한 신축교사가 교지 총면적 4,213평 위에 건물평 1,665평 철근조 3층의 아담한 모습으로 1966년 6월 25일 낙성을 보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임영신 박사는 "이제는 유치원부터 대학원까지 현대적 시설 밑에서 공부할 수 있는 중앙동산으로 자라나 한없이 기쁘다:" 라고 술회하였다.
2.3.5.3. 부속여자중고등학교의 확장
영신여자중학교는 삼양중학교가 그 모체로서 강신명이 설립한 삼양학원에서 운영하다가 경영의 부실로 1957년 9월에 임영신 총장이 인수하여 다음 해인 1958년 2월 11일에 신설한 학교이었다. 임 총장은 학원을 인수하여 이사장 겸 교장으로 취임하였으며, 1958년 2월 11일에는 서울특별시 교육위원회로부터 영신여자중학교의 인가를 받아 같은 해 4월 5일에 6학급 규모의 1학년 신입생 208명으로써 개교하였다. 임영신 총장의 기독교 정신에 바탕을 두고 숭고한 민족정신을 계승한다는 뜻에서 교명도 '영신(永信)' 이라 명명하였다. 처음에는 중앙대학교의 구 도서관(희락관)의 일부를 빌어 개교하였으나, 그 해 9월 5일에는 현재의 위치인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등 86번지에 있는 6,879평의 대지 위에 건립한 3층 콘크리트 건물로 이전하였다.

1965년 2월 창문학원과 함께 학교법인 중앙문화학원에 통합된 삼양학원은 중앙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여자중고등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었다.
2.3.5.4. 부속중고등학교의 확장
재단법인 중앙문화학원이 인수한 낙양중학교, 낙양공업고등학교는 조선 직업 강습학원이 그 모체로, 이는 1934년 1월에 각종 직업교육의 실시를 목적으로 일본인 토거삼양(土居三洋)이 경성부 종로구 연건동 195번지에서 학생 88명과 교사 9명으로 창립 출발하였다. 임영신 총장은 재단을 인수한 다음해인 1955년 8월 3일에 제3대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인수 당시의 현황은 충학교 8학급에 462명,공업고등학교 8학급에 486명, 교지 10,814평에 교사는 791평이었으나 이후 교사는 소실되었다.

1962년 3월 22일 교칙 변경 인가를 받아 명수대 중학교(明水臺中學交)와 명수대 상업고등학교로 개칭/발전을 거듭한 창문학원은, 1964년 11월 대지 1만여 평 위에 6층 콘크리트조(造) 1,067평의 신축 교사가 낙성됨으로써 중학교 7학급, 고등학교 3학급으로 증설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1965년 2월 3일, 불의의 대화재로 본관 목조 건물 2층과 부속 교사, 그리고 많은 시설이 전소되어 2,000만여 원의 피해를 입었다. 따라서 신축 교사로 교무실을 이전하였고, 그 자리(흑석동 232의 4)에는 부속국민학교의 신축 교사가 들어섰다.

중앙대학교에 사범대학이 설치된 1965년 3월에는 중앙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고등학교로 교명이 다시 변경되었다.
2.3.5.5. 영선중학교와 종합고등학교의 확장
영선중학교는 전북 고창에 있는 무장중학교(茂長中學交)를 1957년 7월에 인수하여, 임영신 총장의 동생인 임영선을 추모하고 그 유지를 계승하는 뜻에서 개편/설립한 학교였다. 재단법인체로 동아농장과 진덕염전을 경영하여 청소년들에게 면학의 길을 여는 데 전력을 기울인 임영신 이사장은, 1967년에는 영선학원을 중앙문화학원으로 합병하는 동시에 고등학교의 인가 신청을 냄으로써 보통과 1학급, 농업과 1학급의 종합고등학교의 인가를 받아(문보행 제1041호), 명칭도 중앙대학교 병설 영선중학교, 영선종합고등학교로 개칭하였다.
2.3.5.6. 중앙유치원의 발전
1950년 한국전쟁으로 휴원한 중앙유치원은 1956년 4월 서울에서 다시 개원하면서 중앙대학교 부속유치원으로 출발하였다. 1963년에는 황소향이 원감으로 취임하여 원내에 어린이상담소를 설치함으로써 어려서부터 나라사랑의 정신을 북돋우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65년 3월에는 중앙대학교에 사범대학이 설치됨에 따라 사범대학 부속유치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1966년 5월에는 부속중고등학교 구내인 흑석동 225번지에 철근 콘크리트 220평의 단층 건물의 교사를 완공하여 유아교육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2.3.6. 제6절 중앙문화학원의 사업 확충

2.3.6.1. 제주도 임야 매입
새로운 이사진과 창문, 삼양의 두 학교법인을 인수/통합한 중앙문화학원은 중앙대학교 및 부속 교육기관의 획기적인 발전을 위해서 적극적인 사업계획을 수립 실천하여 나갔다. 1965년 3월 임민규 이사장이 제주도를 답사하고 임야 555,000여 평을 매입하며 재단을 확충시켰다. 이와 같은 임야와 농장은 1964년 12월 임영신 총장이 제주도를 방문하였을 때에 제주도 개발의 필요성을 느껴 매입한 것이었다.
2.3.6.2. 재미재단의 활동 정비
재단의 활동에도 정비가 필요하였다. 파이퍼를 중심으로 하는 재미재단이 제공한 기금 30만 달러가 한순교의 장난으로 이미 사용되어 버린 것을 안 임영신 총장은 1946년에 배상청구 소송을 로스앤젤레스 법정에 제출하였다. 임 총장은 1950년에 소송담당 변호사 막스 뎀비의 긴급 전화를 받고 도미하여 재미재단의 기금을 다시 확보하고, 파이퍼 기념관의 건립 계획을 세웠다.

1965년에는 임 총장의 교육이념에 공명한 미국인들이 다수 합세함으로써 재미재단은 더욱 충실해졌을 뿐만 아니라, 1967년 1월에는 미국무성 국세청으로부터 태환(兌換)조치의 인가를 받아 학교 건립의 기금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사무실을 뉴욕 월가 1번지에 두고 있는 재미후원재단은 1968년 말 현재 150,000불의 모금을 하였는데, 그 가운데의 약 4만 불이 약학대학의 시설 확충과 이공대학의 신축 경비로 충당되었다.

3. 제3편 중앙의 성숙과 시련

3.1. 제1장 서라벌예술대학 인수/합병

3.1.1. 제1절 임철순 총장 취임

중앙대학교 창립 50주년 이후인 1969년부터 1979년까지 10년 동안은 산학협동교육(産學協同敎育), 실험대학제도의 운영, 부전공제의 도입, 장학금 수혜의 확대, 엄격한 학사관리, 영신아카데미상의 시상, 국제교류의 확대 등 교육 내실화를 통해 중앙대학교가 질적으로 성장한 시기이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의과대학의 설립과 부속병원의 운영, 서라벌예술대학 인수/합병을 통한 한국 최초의 예술대학 운영, 공과대학/경영대학/농과대학/2부대학/안성교사의 신설과 학과 증설 등 단과대학 체제가 대폭적으로 정비되었다. 외적인 팽창뿐만 아니라 교육시설의 확대로 학내의 면학/연구 분위기도 고조되었다.

1972년 임철순(任哲淳) 총장이 취임하면서 가속된 교육개혁은 대체로 두 가지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첫째는 임영신 전 총장의 창학 정신을 계승/발전시키는 것이었다. 둘째는 그 동안 학내 교육개혁의 시행 과정에서 나타난 문제점들을 보완/실천하는 것이었다. 임 총장은 대학의 사명을 "연구하고, 교육하고, 봉사하는 일"로 규정하고, 우리 민족의 전통적 문화 가치를 발굴하여 젊은 세대에 전하고, 시대적인 과업을 달성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를 기르며, 학생 개개인을 존중하는 교육의 시행을 구체적인 실천 사항으로 설정하였다.

3.1.2. 제2절 서라벌예술대학

3.1.2.1. 서라벌예술대학의 발자취
8.15 해방이 되었을 때 우리 나라에는 예술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이 하나도 없었다.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정책은 한국인이 고등교육이나 수준 높은 예술교육을 받는 것 자체를 통제하였고 식민지정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인력만을 경성제국대학에서 양성하는 이외에는 고급인재를 거의 양성하지 않았으며 우민정책을 일관되게 실시하였다. 지식인과 예술가가 많아지면 자연히 정치적/문화적 의식이 싹트게 되고, 그러다 보면 이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불만세력이 증가하여 강압적 식민지정책을 수행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일본제국주의 치하에서 예술을 배우자면 예술가 문하에 들어가 도제식 교육을 받든지, 아니면 일본에 건너가 대학이나 예술 관련의 학교에 들어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해방 이후 활동한 예술가들 중 상당수가 일본에 예술유학을 한 사람이었고, 이들이 한국의 예술계에 아카데미즘의 기반을 마련하였다는 사실은 이러한 사정을 말해 주는 것이다.

막상 해방이 되어 독립국가가 새로이 탄생하였지만 정치/경제/사회 분야는 물론이고 문화와 예술 분야를 이끌고 나갈 인재가 절대 부족하였다. 식민지 치하에서 문화와 예술은 비생산적이고 사치스러운 것 정도로 여겨져서 이러한 분야에서 인재 양성이 자연 소홀히 될 수밖에 없었다. 독립국가로서 체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문화적/예술적 수준을 갖추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하겠는데, 당시로서는 예술가와 그 예술가를 양성 할 교육자도 절대 부족하였으며 교육기관도 전무한 상태이었다. 더구나 예술가와 교육자의 경력을 지닌 자라고 하더라도 이들 대부분이 식민지교육을 받은 까닭에 이들을 재교육시켜 독립적/자주적 의식의 소유자로 변화시키는 일도 중요하였다.

문화와 예술의 분위기가 다소 굳어지는가 했더니 설상가상으로 한국전쟁이 터졌다. 이 전쟁은 단일민족 사이의 피비린내나는 참혹한 전쟁으로 독립국가로서의 경제적/문화적 기반을 완전히 허물어뜨렸다. 그나마 얼마 되지 않았던 예술가와 예술교육자도 좌우익 갈등의 와중에서 일부는 북한으로 이주하거나 또는 납치되기까지 하였다. 이제 경제/사회는 물론 문화와 예술도 밑바닥부터 새로이 재건해야만 하였다.

한국전쟁은 소강상태에 들어가고 휴전협상이 진행 중이던 1953년 5월 23일 「문학 제1168호」로 재단법인 서라벌예술학교가 문교부로부터 설립 인가를 받았다. 이는 한국예술이 교육을 통해 항구적 발전을 도모하는 이상적인 사업인 동시에 전화(戰火)에 시달린 사회와 예술의 복구라는 면에서 현실적인 조처이기도 하였다.

당시 문교부로부터 인가를 받은 학과는 문예창작학과/연극영화학과/음악과의 3개 학과로 각 학과의 입학정원은 100명이었다. 개교식은 서울특별시 용산구 후암동 229번지에 위치한 400여 평의 2층 목조 교사에서 행해졌는데, 국내 최초의 종합예술교육기관이라는 점에 관심을 갖고 입학한 신입생이 많았다. 음악과는 이미 2,3곳의 대학에서 설치하고 있었지만, 문예창작학과와 연극영화학과는 국내 최초로 설립된 학과로서 사람들의 주목을 크게 받았다. 졸업생들은 훗날 문예창작, 연극영화 분야의 개척자와 중견으로 한국예술의 중흥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3.1.2.2. 서라벌예술초급대학으로의 발전
한국 최초의 종합적 고등예술교육기관으로 교육내용과 시설의 면에서 내실을 갖추어 가던 서라벌예술학교는, 1957년 9월 문교부가 대학의 질적 향상을위해 정한 대학설치기준령에 의한 시설을 완비하고 초급대학으로 승격 인가를 얻게 되었다. 당시 서라벌초급대학의 이름으로 새롭게 인가를 얻은 학과는 문예창작과/연극영화과/음악과/미술과 등 4개 학과로, 학생 정원은 각각 100명/80명/60명/60명이었다. 무용과는 잠시 폐과되 었다가 얼마 후에 다시 증설되었으며, 추가로 공예과가 신설되었다.

1962년 2월에는 문교부로부터 야간부의 설립 인가를 받았다. 야간부로 설립된 학과는 문예창작과/연극영화과/음악과/회화과/무용과/공예과였으며, 학생정원은 문예창작과가 100명, 나머지 학과는 각각 80명이었다. 야간부가 새로 설립됨에 따라 학생 총수는 1,000명을 헤아리게 되었고, 교수들은 주야간의 강의를 맡게 되어 업무가 대폭 늘어났다. 그러나 학생수의 증가로 학교의 수입이 확충되어 재정적 기반이 안정되는 등 발전의 기미를 보였다.

1964년 1월에는 야간부의 연극영화과/음악과/회화과를 폐지하고, 주간부에 사진과/방송과/국악과를 신설하였다. 사진과/방송과는 이미 개설된 문예창작과/연극영화과와 마찬가지로 한국 최초로 설립되었다는 점에서 한국의 예술교육사에서 크게 기록될 만하다. 이 두 학과는 문교부에 인가를 신청하였으나 인식 부족 때문이었는지 즉시 승인을 받지 못하고, 인가 신청 1년 후에야 문교부의 인가를 겨우 얻을 수가 있었다.[51]
3.1.2.3. 4년제 예술대학으로의 승격
서라벌예술대학은 1964년에 문교부로부터 4년제 정규대학의 인가를 얻음으로써 획기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1953년에 서라벌예술학교를 설립한 지 10년만에 이루어진 경사였다. 설립 학과는 연극영화학과/음악학과/미술학과에 불과하였지만, 기존의 서라벌예술초급대학에 설립된 여러 학과를 합하면 종합적 예술대학으로서의 규모를 갖추었다고 하기에 부족할것이 없었다.

1966년에는 학생 정원을 보충할 수가 없어서 초급대학 국악과를 폐과하고 그 대신 학부에 문예창작과와 공예과를 신설하였다. 1967년 실기교육의 내실을 기하기 위하여 5층의 실습관 700평과 별관 200평을 준공하였다. 실습관은 연극영화과/무용과/방송과/사진과/음악과가 각각 1층씩 사용케 하였으며, 별관에는 미술과와 공예과가 입주하도록 하였다. 1971년 1월에는 학부의 일부 학과에 학생 증원이 이루어졌다. 초급대학의 문예창작과와 방송과를 폐과하고 학부의 연극영화과/음악학과/미술학과에 각각 20명씩 정원을 늘렸다.

그러나 대학의 재정에 극도의 어려움이 가중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재단이 부동산에 투자한 것이 부채만 가중되어 대학을 경영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떨어지게 되었다. 이에 재단이사장은 재단을 새로운 경영자에게 넘겨 줄 것을 결심하고 인수자를 물색하던 중 1972년 3월 중앙문화학원에 경영권을 넘기기에 이르렀다. 황무지에 가까운 한국예술과 예술교육의 터전을 개간하고 종자를 뿌려온 지 20여년이 지나 영광의 시절이 오는가 하였더니 예술교육 사업이 지닌 비경제적 고난의 벽을 넘지 못하고 마침내 쓰러지게 된 것이었다.

서라벌예술대학이 중앙대학교에 병합되기 4개월 전인 1972년 2월에는 오랫동안 염원해 오던 대학원의 인가를 문교부로부터 얻을 수가 있었다. 설치학과는 연극영화과/음악과/미술과로 학생 정원은 각각 8명이었다.
3.1.2.4.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으로의 편입
1972년 6월 16일자로 중앙문화학원(이사장 임영신)은 문교부로부터 재단통합령 187호로 정식 인가를 얻어 서라벌예술대학과 초급대학 및 각급 부속기관을 산하에 통합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같은 해 9월 1일부터 서라벌예술대학 학생들은 돈암동 캠퍼스를 떠나 흑석동 캠퍼스에서 중앙대학교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기로 확정하였다. 중앙대학교는 흑석동으로 이전해오는 서라벌예술대학 학생들을 맞아들이기 위하여 종합실습관의 공사를 시작하였다. 종합실습관은 8층의 2,700평 건물로서 총공사비 1억 5천만원이 소요되었는데 20여 개의 강의실 이 외에 사무실/실습실이 들어가 있었다. 이 공사는 서라벌예술대학 학생들이 이전하는 9월 초에 맞추어 8월 말까지 공사를 마무리하였다.

학교 이전 후에 서라벌예술대학 학생들은 중앙대학교 학생들과 동일한 학칙/제도 아래에서 학교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얼마간 장학제도/보도기관/도서관은 독자적으로 운영하였다. 그러나 종합실습관의 준공이 다소 지연되는 바람에 9월 3일부터 7일까지를 이전 기간으로 정하고 12일부터 정상강의에 들어갔다. 모든 학과가 한꺼번에 이사할 수 없는 사정으로 먼저 문예창작학과/연극영화학과/음악학과가 9월 3일까지 이전을 완료하고, 그 다음 미술학과/사진학과가 9월 4일, 공예학과, 무용학과가 9월 5일에 이전하는 식으로 순차적으로 이전을 완료하였다.

1973년에 들어와서 서라벌예술대학의 사무 일부가 중앙대학교로 이전되었으며 그 해 12월에는 서라벌예술대학이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으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후속 조치로서 문리과대학 소속의 연극영화학과와 사범대학 소속의 음악교육학과를 폐지하여, 예술대학의 연극영화학과와 음악학과로 통합하였다. 이에 따라 예술대학 연극영화학과의 학생 정원을 이전의 30명에서 40명으로, 음악학과의 학생 정원을 40명에서 60명으로 증원/재조정하였다.

1974년부터 서라벌예술대학이 아닌 중앙대학교의 이름으로 처음 예술대학의 신입생을 선발하였다. 『중대신문』은 응시자를 위한 안내문에
20년 서라벌 특유의 전통을 기반으로 하여 일찍이 인재 배출에 선구적 역할을 다하여 온 중앙대학교의 반 백년 역사와 교육정신을 새로운 밑거름으로 보강, 예술 서라벌의 완성을 위한 원대한 이념을 명수대 캠퍼스 위에 펼쳐 나가고 있다. 한국 최초이며 동양 유일 최대의 종합예술대학이라는 대명사에 손색이 없는 본 대학의 현대식 종합실습관에 각자 특유의 완벽한 실습실 및 실습기재, 그리고 사계의 저명, 현역 예술인과 이론가들로 구성된 교수진이 혼연일체가 되어 품위 있는 인격도야와 민족도의에 기초를 둔 인간교육, 문화교육, 예술교육에 총화적인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라고 매우 자긍심이 엿보이는 내용으로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을 소개하였다.

3.2. 제2장 부속병원의 증설과 발전

3.2.1. 제1절 부속성심병원의 개원

1967년 12월경 최희곤에 의해 호텔용으로 신축 중이던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 2가 82의 1번지의 철근 콘크리트 건물(지하 1층, 지상11층, 대지122평, 총건평 1,396평)을 5개년 전세로 임대하여 병원으로 개조함으로써 1968년 6월 10일 한국의과학연구소 부속성심병원으로 개원하였다.

성심병원은 우리 나라에서 처음 시도된 의과대학 교수들의 '집단개업' 이란 평을 듣게 된 것으로 매스컴과 일반 시민들의 비상한 관심과 주시 속에서 출범하였다. 성모병원의 많은 직원들이 성심병원의 개원에 직접 참여하기 위하여 사직을 했는데, 이들을 포함한전체 직원수는 무려 78명에 이르렀다.

성심병원은 점차 진료 규모가 커짐에 따라 각 과에 부과장제를 두기로 하였는데, 신경정신과에 이규항, 내과에 나하연, 비뇨기과에 이수영, 외과 김상준, 산부인과 채유병, 이비인후과 송화석, 정형외과 김명주, 피부과 이승원 등 여러 의사가 1968년에서 1969년에 걸쳐 임명되어 진료활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러나 환자의 급증으로 병실의 부족을 느낀 성심병원은 11층이 완공되자, 1969년 6월 30일 옥상에 콘세트 2동을 지어 원장실/성당/도서실/간호과를 10층으로부터 이전하여 10층과 11층을 모두 일반병실로 사용함으로써 총 60병상을 확장할 수 있었다.

1970년에 들어와 종합병원으로서의 조직과 진료활동이 정상궤도를 올라서게 되자, 성모병원에서 파견/협조하였던 의료진도 철수하고, 성심병원은 자체로서 의사와 레지던트/직원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처음으로 인턴 11명을 채용하고 6명에 대하여 레지던트 과정을 수료시켰으며, 임대로 사용되던 건물도 2년 동안의 혼연일체된 스태프의 노력으로 같은 해 8월 1일 건물주 최희곤씨로부터 매입/등기함으로써 새로운출발을 하게 되었다.

3.2.2. 제2절 중앙대학교 부속병원으로 발전

시설확충을 서두른 성심병원은 1970년 11월 Blood Bank Refrigerator, Cryo Cut와 1971년 5월에 뇌파기(E. E. G.) 등을 구입/설치하였고, 같은 해 10월에는 외래병실의 Central piping system의 완성과 AID 차관으로 Magna Scanner 500, 300ma X-Ray, Mobile Unit 등의 의료기계를 구입함으로써 최신 시설을 갖춘 대학병원으로서의 면모를 새롭게 하였다. 이에 1971년 12월 중앙대학교 의과대학 부속성심병원으로 이름을 바꿔 진료활동을 개시하였다.1972년 9월에는 성형외과와 흉곽외과를 증설하였다.

종합병원을 선호하는 환자들의 경향으로 부속병원은 1975년에 접어들면 병상수가 부족하게 되었다. 이에 이미 확보되어 있는 필동 82의 5 인근 가옥의 매수를 서들렀고,9월 21일에는 82의 11번지 소재 슬라브 1층(대지 137평)을 서울은행으로부터 공매낙찰시킴으로써 신관 건립의 계획을 실천에 옮겼다.

개원 9주년을 맞는 1977년 6월 10일 신관 준공기념행사가 거행되었는데, 방우영 재단이사장, 임철순 총장, 수도경비사령관 및 내빈과 교수/학생 다수가 참석하였고, 이 자리에서 공사유공자에 대한 표창이 있었다. 중앙대학교 부속병원은 신관이 증축되자 외래진료실이 모두 신관으로 옮겨졌고 일반병실은 모두 350병상을 확보하게 되었다.

1968년 개원 당시 100명 미만이던 병원의 요원수는 1978년에 16과 3실 6과에 교수(의사) 42명, 직원 400명 도합 442명으로 증가하였고, 이제 제2부속병원 건립을 위한 계획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3.2.3. 제3절 용산병원의 개원

필동성심병원이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개설된 후 시설의 확충과 첨단 고가장비의 도입, 훌륭한 교수진 확보, 우수한 학생들의 유치 등을 통하여 나날이 발전을 보여왔지만, 이미 배출된 많은 졸업생들과 폭증하는 의료수요를 충족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제2의 부속병원 건립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서울철도병원(국립서울병원)의 임대에 관한 공개입찰이 있을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재단측과 의과대학측은 논의를 거쳐 입찰에 응하기로 결정하고 철저한 준비를 시작하였고, 이러한 노력의 결과 1984년 5월 11일 입찰에서 낙찰되어 제2부속병원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계약조건을 보면 계약기간은 1984년 7월 1일부터 1987년 6월 30일 까지이었고, 연간 사용 계약금액은 16억 5천 1백만 원이었다. 계약에 따른 병원 인수를 위한 기구의 필요성에 의해 같은 해 5월 18일 철도병원 인수 연락사무소를 설치하였고 인수 관계 책임자는 조형상 병원장이 되었다. 철도병원 인수 연락사무소에서는 빠른 시일 안에 인수 작업을 마무리 짓기 위하여 바쁘게 움직였는데, 계약기간에 명시된 바와 같이 1984년 7월 1일 학교법인 중앙문화학원 중앙대학교 부속용산병원으로 개원하기에 이르렀다. 당시의 진료과목은 15개 과이었고 314병상을 갖추었다. 초대 용산병원장은 조형상 의대부속병원장이 겸임하였다.

3.3. 제3장 제2캠퍼스의 건립과 교세확장

3.3.1. 제1절 제2캠퍼스의 설립배경과 특성화

여러 차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한국의 면모를 수출대국으로 일신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산업화에 따른 빈부의 격차와 이촌향도(離村向都) 현상은 계층/지역간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등 여러 가지 사회모순을 드러내었다.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인구집중화는 서울을 거대한 공룡의 도시로 탈바꿈시켰고, 이로 인해 야기된 교통/주택/교육/환경 등의 제반 문제는 정부의 노력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커다란 사회문제로 부각되었다. 대학을 비롯한 고등교육기관이 수도권으로 편중되었고, 이로 인해 정부가 여러 차례 시행한 인구분산 정책도 거의 실효를 거둘 수 없었다. 국민들의 높은 교육열은 지방 학생들이 엄청난 학비를 부담하면서도 수도권으로 진학하는 역기능을 낳았다. 우수한 인력을 우대하는 산업사회에서, 대학교육에 대한 과도한 열망을 조절한다는 것은 그다지 쉽지 않았다.

정부는 수도권 소재 대학(교)의 지방캠퍼스 건립을 적극 권장함으로써 이러한 문제점을 점진적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즉 수도권 대학의 정원을 가급적 억제하는 한편, 지방캠퍼스를 건립하고 그 정원을 점차 확대하여 수도권으로 집중되는 교육열을 완화시키고자 하였다. 이를 통하여 인구분산은 물론이고, 대학의 문호를 개방하여 우수한 인재를 확보하는 등 다양한 효과를 겨냥하였다. 지방캠퍼스의 건립은 지역사회의 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이른바 '대학촌' 의 건설은 이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다. 변화된 대학교육정책은 거의 사립대학교에 적용되었으므로, 각 사립대학교는 수도권을 중심으로 제2캠퍼스 건립에 착수하였다.

중앙대학교도 이러한 사회적인 추세에 따라 마스터 플랜에 따른 장기적 발전계획의 일환으로, 1970년대 초반부터 제2캠퍼스 건설을 구체적으로 구상/입안하였다. 1972년 취임한 임철순 총장은 2,000년대를 대비한 장기적 대학발전 방안을 모색하였는데,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과 하버드 대학의 체제를 부분적으로 수용하여, 중앙대학교를 이원적 대학 체제로 개편할 계획을 세우고 수도권에 대규모의 캠퍼스촌 건립을 추진하였다. 당시 수도권에 대학촌을 건립한다는 것은 매우 획기적인 구상이었으며 미래지향적인 야심찬 계획이었다.

3.3.2. 제2절 제2캠퍼스의 건립

제2캠퍼스의 후보지로는 이천(利川), 아산(牙山), 평택(平澤), 안산(安山), 안성(安城) 등이 거론되었으나, 현지 실정을 감안하고 여러 차례의 답사 결과를 검토한 끝에 안성군 대덕면 건지리와 내리를 최종 후보지로 선정하였다. 제2캠퍼스는 재학생 전원이 기숙사에서 생활할 수 있는 종합적인 교육장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70만여 평의 규모로 전원캠퍼스을 조성하려는 것이 당초의 목표였다.

안성캠퍼스 건립은 다음과 같은 효과를 겨누고 추진되었다. 첫째, 규모와 위치 면에서 대학의 균형적인 발전을 도모하려 하였다. 1980년대 이후 세계적인 대학으로 발돋움하려면 광활한 교지를 반드시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대학의 실험실, 어학실, 실기실 등은 넓은 공간을 요구하였고 쾌적한 환경을 필요로 하였다. 안성에 광대한 캠퍼스를 건립함으로써 이러한 계획을 장기적인 안목에서 추진하려 하였다. 둘째, 정부의 국토종합계획에 부응하려 하였다. 정부가 교통시설의 편의를 적극적으로 협조/지원하여 캠퍼스가 조성된다면 지역권의 개발에도 상당한 효과를 거두리라 판단하였다. 셋째, 대학촌을 형성하여 지역 문화의 발전에 기여하려 하였다. 대학인과 지역민이 교류하고 이로 맺은 유대관계는 우리의 전통문화를 발굴/보존하고 계승시킴으로써 지역의 문화 수준을 한 단계 높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였다. 나아가 안성을 비롯한 평택, 용인, 이천 등지의 중부권의 인재를 흡수한다면, 대학의 발전과 부흥을 위한 새로운 계기가 마련될 수 있다고 전망하였다. 대학촌을 건설함으로써 대학이 지역사회의 정보/문화의 중심지 구실을 실행하여 지역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 것이 제2캠퍼스 건립을 추진한 근본 취지 였다.

개교 60주년인 1978년 10월 제2캠퍼스 건립 사업은 신중하고 다각적인 관점에서 검토가 요구되었다. 그러나 임철순 총장은 안성캠퍼스를 1980년대 중앙대학교의 꿈을 실현하는 '중앙문화동산' 이라고 규정하였다. 제2캠퍼스 건립은 서울캠퍼스의 학생까지 포함하여 2만여 명의 학생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의 기숙사 시설을 핵으로 하는 학생복지시설, 교직원의 교내생활이 가능한 주택과 그 부대시설, 연구동, 실험실/실습실/공연장/어학실 등의 교육시설을 완비함은 물론이고, 지방도시의 문화/예술의 중심지로서 이른바 '대학촌' 을 건설한다는 포부를 갖고 추진하여 나갔다. 이와 함께 24시간 교육체제인 캠퍼스 풀타임제를 도입하여, 제2캠퍼스를 교수의 연구와 학생활동의 중심기관으로 정립하려 하였다.

안성캠퍼스의 교육시설을 건립하기 위해서는 안성군 대덕면 건지리와 내리 일대의 임야, 전답 등 57만 평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문제이었다. 때 마침 중앙대학교안성유치위원회의 지원으로 1978년 11월 우선 약 30만 평을 확보할 수 있게되자 제2캠퍼스 건립은 활기를 띠었고 교사의 부지를 수용하는 일도 원래의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1978년 10월 7일 문교부는 1979학년도의 「대학/전문학교/교육대학의 입학정원」을 확정/발표하는 가운데 중앙대학교가 신청한 안성캠퍼스 건립계획을 10월 12일자로 정식 승인하였다. 이에 중앙대학교는 「1979학년도 안성교사 신입생모집 요강」에 따라, 경상계열의 경영학과/회계학과/무역학과/보험학과/지역개발학과에서 각각 40명씩 모두 200명, 공학계열의 토목공학과/건축공학과에서 각각 80명, 식품가공학과 40명 등 총 8개 학과에서 400명을 모집하였다. 외형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이는 장기적인 발전계획이 구체적인 성과를 거둔 결과라고 평가할 수 있다.

3.3.3. 제3절 제2캠퍼스의 시설 확충과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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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안성캠퍼스 기공식

1979년도 4월 5일 중앙대학교는 임철순 총장을 비롯한 재학생 36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안성교사의 기공식을 거행하고 공사에 착수하였다. 이 공사는 14억 원의 공사비로 기숙사 2개 동, 식당, 교사 1개 동과 진입도로 500m를 9월 말까지 완공한 뒤 점차적으로 제2캠퍼스의 확장을 도모한다는 계획 아래 진행되었다. 우선 8억여 원의 공사비를 들여 약 5,000평의 대지 위에 연건평(延建坪) 2,146평의 교사를 신축하는 공사를 추진하였다. 이에 따르면, 강의실 11실(350평), 교수연구실 12실(135평), 어학실습실 1실(240평), V.T.R. 1실(109평), 세미나실 3실(165평), 과학실험실 3실(243평), 도서실 1실(34평), 제도실 3실(74평), 학사행정사무실(총장실/학장실/회의실 등 총 209평), 복도와 휴게실(584평) 등의 신설이 포함되었다. 건물의 신설에서 무엇보다도 최대의 역점 사업은 재학생 전원을 의무적으로 기숙사에서 생활케 한다는 목표 아래 추진된 기숙사 설립이었다. 이는 5억 8,032만원의 공사비를 투입하여 약 5,000평의 대지 위에 연건평 1,706평의 규모로 기숙사 2개 동을 건립하고, 점차 전체 학생을 수용할 규모로 확대한다는 계획 아래 진행되었다. 또 안성~평택간 38번 국도에 폭 10.9m의 2차선으로 인도를 포함한 500m의 진입도로를 닦는 공사가 1979년 5월 15일까지 완공한다는 목표로 1,650만 원의 예산을 책정하여 추진되었다. 이러한 계획은 초기에는 순조롭게 진척되었다. 1979년 8월 20일 현재 공사 현황을 보면, 교사 진입도로는 이미 완공되었고 기숙사는 85%의 공정(工程)을 보였으며, 교사 신축공사는 지하실과 기초공사가 완료되어 11월 말에 완공한다는 목표로 박차를 가하였다.

그러나 제2캠퍼스의 건립은 초기부터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예산의 확보가 가장 큰 문제이었다. 1979년 10월 25일 안성교사 현지 교정에서 총장, 이사장, 동창회, 재학생 등이 참석한 가운데 개교 61주년 기념식과 안성교사 개학기념식을 거행하였지만, 이는 상징적인 행사에 불과하였고 수업은 여전히 서울에서 이루어졌다. 또한 안성교사에서 1979학년도 2학기의 학사일정을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은 아직도 마련되지 않았다. 1979년 11월 30일 현재의 공사 진행 상황은, 운동장 토목공사 95%, 교사 건물 공사 85%, 상수도 배관공사가 70%의 공정에 머물렀다. 대학의 자율성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장기적인 발전계획을 시행하기에는 곳곳에 난관이 산재하고 있었다.

안성교사 교학과가 1980년 2월 18일 문리과대학 4층에서 신축 안성교사로 이전하여 안성시대의 학사업무를 준비하였다. 비로소 1980년 3월 10일부터 안성교사에서 정상적인 강의가 시작되었고 이는 제2캠퍼스의 확대로 이어졌다. 총 31억여 원의 건설비를 투입하여 교사동 4층, 기숙사 Y자형 2동, 학생회관, 그리고 진입로 500m와 자체 상수도시설, 전기시설 등을 완공하였고, 특히 1,100명의 안성교사 재학생 중 1학년 여학생과 2학년 남녀 학생 거의가 생활관에 입관/강의를 받기에 이르렀다. 1981년 10월 안성교사는 과체제에서 외국어대학, 사회과학대학, 가정대학으로 확대/개편되는 한편, 1982년 1학기부터 서울의 농과대학, 예술대학이 제2캠퍼스로 이전되었다.

입학정원의 증가는 교사동, 실험실습실 등 교육시설의 확대와 교수진 확충을 수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존의 교육시설이 전무한 상황에서 제2캠퍼스는 건립되었기 때문에 막대한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고 교육의 내실화는 불가능한 문제였다. 특히 학교 주변의 열악한 교육환경에서 기인된 기숙사의 건립문제도 중요한 현안의 하나였고, 초기부터 이에 대한 특별한 관심 하에 추진되었다.

3.4. 제4장 잃어버린 20년

3.4.1. 제1절 학교법인 중앙문화학원 부도

3.4.1.1. 제2캠퍼스의 확장과 시련
학교법인 중앙문화학원이 전입금과 교비로 제2캠퍼스의 교육시설물에 투자된 금액은 271억 5천만원에 달하였다. 당시는 법인재산과 학교재산이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았기 때문에 법인의 전입금을 구분하기는 어렵다. 물론 법인의 수익사업이 전반적으로 부진한 상황에서 학생들의 등록금에서 상당 부분이 여기에 포함되었다고 단정할 수 있다. 우리 나라 사학재단의 운영비는 일부를 제외하고, 90% 이상은 학생들의 등록금에 의존하는 형편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공계, 자연과학계와 예술계의 실험실습실 등에 사용하는 최신 기자재의 도입을 고려한다면, 상당한 투자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캠퍼스부지도 60여 만평으로 확대되는 등 전원캠퍼스의 조성을 위한 기초적인 작업은 거의 이루어졌다. 다만 대학촌 건립이 관계 당국의 비협조 등으로 계획대로 추진되지 못한 것이 아쉬운 점이었다.

교육시설에 대한 투자와는 달리 교수 충원도 이루어졌다. 1979년 4명을 시작으로 매년 증가 되었는데, 특히 단과대학이 신설되는 경우에는 많은 수의 충원이 있었다. 1979년부터 1987년 2월까지 충원된 교수는 모두 105명에 달한다. 이 중에 외국어대학은 외국어교육의 강화 차원에서 외국인을 교수로 각각 충원하였다.

제2캠퍼스 체제의 운영/정비는 다른 대학에 비해 '성공적인' 사례로서 평가되기도 하였다. 물론 원래 계획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지만, 기숙사시설을 포함한 교육시설과 쾌적한 자연환경은 중앙대학교의 미래상을 보장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예산이 제대로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추진된 제2캠퍼스 발전계획은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무리한 사업추진은 고금리의 사채에 의존하는 등 파행적인 자금운영으로 귀결되었다. 더욱이 수익사업 증대를 위해 추진한 법인의 사업은 모두 실패를 거듭하는 상황이었다. 중앙출판사, 주간시민사, 영신전자 등의 운영은 의도완는 달리 만성적인 적자상태를 면치 못하였다. 그런데도 무리한 투자를 지속함으로써 법인의 자산에 치명적인 손실을 끼쳤다. 당시 교비와 법인의 자산에 대한 명확한 구분이 없었으므로 수익사업의 손실은 곧 학교운영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결국 수익사업 손실을 보충하기 위한 사채 유입은 이자에 이자를 부담하는 악순환으로 작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제1캠퍼스를 매각하고 제2캠퍼스로 통합/운영하려는 계획이 조심스럽게 추진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학내 구성원과 동창회 등의 반발로 이를 추진할 수 없었다. 이에 법인은 교육용자산인 필동병원을 140억 원에 근저당을 설정하는 등 자체 수습이 난망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주상호신용금고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중앙대학교는 혹독한 시련기에 직면하였다.
3.4.1.2. 학내분규와 수습
1987년 8월 3일 이른바 '대주상호신용금고사건' 이 『중앙일보』 석간에 보도되면서, 중앙인은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커다란 파문을 던졌다. 이 사건은 7월 초순부터 수사가 은밀하게 진행되던 중 발생하였다. 특히 이와 관련된 인물이 학교법인 중앙문화학원 이사장이자 민주정의당 정책위 의장인 임철순 의원이란 점과 36억 원에 달하는 엄청난 비자금이 별도로 관리된 사실에서 사회적인 충격은 대단하였다. 36억 원은 당시 재학생 6천 명의 한 학기분 등록금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더욱이 법인의 수익사업 부진에 따라 교직원의 처우개선, 학생의 복지시설, 장학제도, 교육시설 등 교육환경 개선조차도 제대로 못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사건이 야기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다음날부터 주요 일간지에 일제히 보도되었고, 단순한 사기사건이 아니라 자금의 출처가 주요한 이슈로 등장하였다. 법인사무처장과 법인사무처 총무부장 등은 12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임철순 이사장의 선거비용을 위해 개인소유 부동산을 처분하고 남은 돈이라고 해명하였다. 반면 임철순 이사장은 승당의 10주기를 맞아 제2캠퍼스에 기념관을 짓기 위해 부동산을 담보로 차용한 사채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해명은 자금 조성과 목적이 혼선되는 등 오히려 의혹을 증폭시키는 계기였다. 우선 거액을 은행이 아닌 신용도가 낮은 제2금융권에 예탁한 사실은 이자율이 높다는 현실적인 측면을 고려하였겠지만, '익명성보장' 을 선호한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만큼 떳멋하지 못한 자금으로 규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와중에 자금의 예탁과 인출과정이 드러나면서 선거자금과는 무관한 사실임이 점차 밝혀졌다.

당시 사립대학에서 만연되고 있던 '부정입학'과 관련된 금액이라는 문제가 조심스럽게 대두되었다. 사건이 확대되자, 임철순 이사장은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는 등 사태수습을 위해 노력하였다. 8월 13일 법인의 이사진 전원도사퇴하고, 조병화(趙炳華)를 이사장 직무대행으로 하는 새로운 이사진을 구성하였다. 또한 분위기 쇄신을 위해 8월 7일자로 사무담당 부총장을 비롯한 보직교수에 대한 인사이동을 단행하였다.

한편 사건이 널리 알려지면서 15개 단과대학으로 구성된 단과대학연합이 결성되었다. 이 단체는 6.10 민주화운동 이후 학내의 민주화를 위해 설립 준비과정에 있었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급진전될 수 있었다. 사회의 민주화와 더불어 학내 비민주 요소의 척결이 투쟁의 일차적인 목표였다. 이에 산하 단체로 각 단과대학 1명씩 15명으로 '재단비리조사특별위원회'를 8월 16일 구성하고, 이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와 홍보활동을 병행하였다. 재단비리조사특별위원회는 우선적으로 재단운영실태 공개, 부정입학 공개, 선거관여 교수와 직원 파면, 재단 유용 36억 원의 반환과 자금출처 공개, 재단부채 등의 공개를 요구하였다. 단과대학연합을 중심으로 8월 24일부터 임철순 전 이사장의 재단비리 진상규명을 위한 조사작업, 등록금거부운동, 학사일정 거부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이어 학교측의 확실한 해명과 실질적인 조치가 있을 때까지 등록금 거부를 위한 서신 1만 여 통을 발송하는 한편 연일 대자보와 서명운동 등을 추진하여 나갔다. 단과대학연합은 등록금거부운동을 추진하는 취지를 "우리의 등록금이 어용과 부정비리 군부독재 하수인의 돈으로 쓰이는 것을 막기 위함"이라고 천명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8월 26과 27일 이틀동안 학교법인 중앙문화학원이 부도를 내고 말았다. 이에 대해 교육부는 조속한 수습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관선이사 파견을 고려 중임을 밝혔다. 개학과 더불어 전 중앙인에 의한 재단비리의 규명과 구교운동은 확산되었다. 8월 31일부터 5박6일로 예정된 1학년 남학생의 문무대 입소교육이 거부 또는 연기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예술대학과 사회과학대학생들은 군장 검사일인 8월 24일과 27일 문무대 입소 연기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입소 당일에 단대연합의 주도로 거부운동을 벌였다. 학군단과 학생처의 설득으로 총 대상자 2,567명 중 1,574명만이 입소하는 등 재단비리 문제로 학사행정은 진통을 거듭하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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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재단부도 책임자 임철순의 허수아비에 불을 붙이는 모습

8월 26일 동창회는 15인으로 구성된 수습대책위원회(위원장 박병일 변호사)를 조직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돌입하였다. 9월 1일 수습대책위원회는 성명서에서 대대적인 구교활동을 벌이자고 호소하였다. 같은 날 재직교수 45명도 현 사태의 해결을 위한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성명서에서 교수들은 "사태수습과 중앙인의 자존 회복을 위해 교직원, 재학생, 동문, 학부모들이 합심하여 수습대책을 모색해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 고 천명하였다. 우선 재단부채의.원인해명, 학교측의 신속한 수습책 강구, 안성캠퍼스 현 교육장의 유지 등 7개항을 요구하고, '중앙대수습비상대책위원회' 의 조속한 구성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9월 2일에는 언론협의회 주재로 단과대학의 비상대책위원회와 동창회의 수습대책 위원회는 재단문제 수습대책을 논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의과대학 부속필동병원의 담보설정에 관한 법적/행정적 토의와 관선이사 파견, 부정입학 등에 관한 진지한 논의 가 있었다.

다음날 문병집 총장을 비롯한 교무위원, 동창회, 재학생 등 1,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루이스가든[52]에서 수습대책비상총회가 개최되었다. 동창회 수습대책 위원회에는 재단을 둘러싼 비리, 필동병원의 수익재산 용도변경과 이에 협조한 문교부의 책임 등을 물었고, 재단인수설에 관해 승당의 교육이념에 합당한 인물이면 가능하며, 관선이사 파견도 무방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비상대책위원회는 부채내역, 부정입학설의 진상규명, 학교가 재단에 빌려준 60억원의 해명, 필동병원 인수설 등에 관한 의문을 제기하였다. 이에 대한 문병집 총장은 재단비리 진상규명을 위해 모든 자료를 제공한다라는 서약서에 서명하였다.

같은 날 대학원학생회도 재단문제에 관한 수습대책위원회를 발족하였다. 구성원은 대학원 학생회 임원과 단과대학별 1인씩 등이었는데, 주요 활동은 학생들의 활동에 대한 지지와 격려, 교수와 동문들, 학생들의 중재적인 역할 등이었다. 현 난국을 타개하는 방안은 양심있는 교수로 평교수협의회가 빨리 결성되어 새로운 재단으로 바뀌더라도 임철순재단의 비리는 철저히 규명되어야 하며, 교무위원은 책임을 지고 전원 사퇴할 것을 요구하였다.

특히 제2캠퍼스에서는 관선이사 반대, 캠퍼스분리정책 반대 등을 주장하는 재단비리척결과 학내민주쟁취를 위한 실천대회가 매일 개최되는 한편 과별로 수업거부가 이루어졌다. 심지어 재단비리자에 대한 화형식이 실시되는 등 분위기는 상당히 격앙되었다. 의과대학생들도 전면적인 수업을 거부하며 부속필동병원과 부정입학 근절을 위한 대책을 요구하였다. 이에 각 단과대학별이나 학과별로 특별위원회를 조직하는 한편 실질적인 활동을 벌였다. 이처럼 1987년 9월은 중앙인에게 가장 ‘잔인한’ 달로 남아 있다.

3.4.2. 제2절 학교법인 중앙대학교 출범

3.4.2.1. 동교(東喬) 김희수, 중앙대학교 경영 참여
9월 12일 문교부의 승인을 받아, 김희수[53] 이사장이 학교법인 중앙문화학원을 인수하였다. 김희수 이사장은 중앙출판을 포함한 713억 원 상당의 재단부채를 부담하며, 설립자의 창학정신과 교육이념을 계승/유지할 것, 교명과 교가를 변경하지 않을 것, 제1캠퍼스와 제2캠퍼스를 분리하지 않고 동시에 육성/발전시킬 것, 교직원의 신분을 보장할 것, 법인의 부채상환시 의과대학 부속필동병원에 대한 담보설정을 즉각 해제할 것, 대학에서 차입한 모든 차입금을 즉시 상환하는 동시에 현재 진행중인 대학시설의 건축사업을 계속 추진할 것 등을 약속하였다.


1987년, 김희수 이사장 취임식

9월 14일 첫 이사회를 개최하여 이사장에 김희수를 선출하고, 상임이사에 조병완을 선임하였다. 이어 문병집 총장의 사표를 수리하고 후임으로 국민대학교 이채철 교수를 내정하고, 승인을 문교부에 요청하였다. 9월 16일 이재철 총장이 취임함에 따라 교무위원에 대한 전면적인 인사이동이 단행되었다. 학내 문제로 진통을 겪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분위기 쇄신과 행정업무의 효율화에 중점을 두고 이루어졌다. 1987년 10월 12일 개교 69주년 기념식과 이사장취임식, 총장 이/취임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김희수 이사장은 취임소감에서 "육영사업의 꿈을 실현하게 되어 감개무량하다"며, 대학임무인 사회봉사를 위해 교육적 환경조성, 재단의 정도회복에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하였다. 신임 이재철 총장도 교육/학문의 자율성 보장, 행정 운영 공개, 교수/학생자치기능 신장 등 공약실천을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하였다.

새로운 학교법인의 출범과 더불어 5개년 계획의 마스터플랜이 발표되었다. 이는 임철순 전 이사장의 변칙금융사건으로 초래된 위기를 극복하는 대안의 일환이었다. 계획안에 따르면, 1987년 10월부터 1992년까지 5개년 동안 1천 억을 투자하여 서울에 의과대학과 약학대학을 별도 건물로 신축하면서 국내최대 규모의 메디컬센터 신축 등과 제2캠퍼스에 5개동 기숙사건물 등 7개 건물의 신설 등이 포함되었다. 또한 교직원의 처우는 국내 사학 중 최고의 수준으로 개선함으로써 우수한 교수요원 확보와 막강한 교수진의 확충을 마련한다. 장학금제도의 확대, 우수한 신입생의 유치와 졸업 후 유학의 보장, 기숙사 시설 확충, 교육/연구/행정의 완전 전산화 등 학생후생 복지시설의 확대가 주요한 내용이 었다. 장기적인 발전계획이 충분한 검토없이 이루어지는 등 처음부터 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새로운 법인의 출범으로 점차 학사운영은 정상화의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특히 교직원에 대한 파격적인 대우 개선은 세인의 관심을 끌었고, 이들의 불만을 일시적이나마 잠재우는 계기였다.

그러나 마스터플랜에 대한 실행 문제를 둘러싼 갈등은 또 다른 불화의 원인을 제공하였다. 인수 당시에 밝힌 마스터플랜은 당시 중앙인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요인이 있었다. 그럼에도 이를 추진하기 위한 전입금의 확대와 학내 구성원간의 갈등 등으로 제대로 실천되지 못하고 말았다.
3.4.2.2. 마스터플랜의 수립
9월에 취임한 김희수 이사장과 이재철 총장은 중앙대학교를 국내 사학 중 가장 훌륭한 대학으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의지를 피력하였다. 이어 학교법인과 학교딩국은 대학발전을 위한 마스터플랜을 10월 20일에 발표하였다. 그런데 계획안은 재단을 인수한 직후에 조급히 입안되었기 때문에 김희수 이사장의 강한 육영의지를 담고 있으나, 구체적인 측면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기도 하였다. 그런 만큼 학내 구성원들은 보다 구체적이고 장기적인 계획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즉 학사운영의 정상화를 임시방편적인 계획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중점사업의 구체적인 내용을 요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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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김희수 이사장 취임 직후 안성캠퍼스 방문

이후 해당 분야의 교수와 직원/용역업체 등으로 조직된 '대학발전위원회'와 '기획위원회'는 5개월에 걸친 연구. 검토 끝에 1988년 3월 20일 '대학발전마스터플랜 제 1차 5개년 계획'을 확정/발표하였다. 이 안은 제1캠퍼스와 제2캠퍼스에 교육시설 확충을 위해 약 335억 원의 예산을 투입하는 동시에 의과대학 부속필동병원, 용산병원과 약학대학을 포함한 메디컬센터를 건설한다는 '야심적인' 계획이었다. 이는 제1캠퍼스의 공간부족을 해소하는 동시에 명실상부한 명문대학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는데 있었다. 즉 제1캠퍼스는 부지가 협소함으로 강남구 개포동 일대에 부지 30만평을 매입하여 이를 추진한다는 의도였다.

3.4.3. 제3절 강남 개포동 30만평 토지 매입 무산

김희수 이사장은 법인을 인수한 즉시 부속필동병원 담보를 해지하였다. 이어 제1캠퍼스의 공간부족을 해소하는 동시에 강남구 개포동에 1,000병상 규모의 부속병원을 건립하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이 계획안에 따르면, 의과대학과 약학대학 이전까지를 포함한 메디컬센터를 의학교육의 중심지로 육성한다는 계획이었다.[54]

김희수 이사장은 1988년 5월 21일 개포동에 메디컬센터 건립에 필요한 토지 매입대금으로 계약금액 205억원 가운데 중도금 50억원을 지불하였다. 그러나 학교법인 인수 이후 이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였던 '범 민족 중앙인 양심의 소리 투쟁위원회'(양투위)[55]는 법인에 대한 비판을 담은 유인물을 배포하였다.

'양투위'는 본관 점거농성과 함께 국회 재무위원회에 개포동 부지는 부속병원 부지보다는 부동산투기용이라는 내용을 제보하였다. 이후 토지 소유자에 대해 국세청의 자금이동에 대한 조사로 분위기가 경색되었고, 또한 토지거래가 신고제에서 허가제로 변경되는 과정에서 중도금 50억원까지 전달된 개포동 토지 매입은 결국 무산되었다.

3.4.4. 제4절 '이내창 의문사' 사건

1989년 제2캠퍼스는 1987년과 1988년의 재단문제 이후 이제까지의 흑석동 중심으로 진행된 학생운동의 흐름과는 다른 모습이 나타나고 있었다. 즉 이전의 단과대별로 무차별적으로 진행되던 학교당국과의 싸움들도 총학생회의 '정치투쟁' 일정과 어느 정도 조화있게 진행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학생운동가들을 배출하였다. 특히 1988년 캠퍼스별로 독자적인 총학생회가 출범하게 되면서 제2캠퍼스는 경기지역 대학 가운데 통일운동 기수로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5월 들어 연이은 비상학생총회를 통해 '학내 정풍운동' 과 함께 백지화된 제2캠퍼스 마스터플랜에 대한 문제제기는 제2캠퍼스 10년의 역사 속에서 각 단과대학의 불균형을 해결하기 위한 적극적인 모색으로 이어졌다. 총학생회 출범식에서, "미제와 노태우에 의해 민중생존권이 위태로운 이 시기에 중앙의 의혈학도가 선봉에 서서 미제와 노태우를 몰아내자"고 주장했던 이내창이 그러한 움직임의 중심에 있었다.

8월 15일 2캠 학생회장 이내창(조소 4)이 전남 거문도 유림해수욕장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5월 조선대생 이철규의 의문사 사건에 이어서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약 100여 명의 양캠퍼스 학생들이 사건현장으로 급히 달려갔으며,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이내창 사인 진상규명 공동대책위원회' (위원장 서원, 사진 4)를 구성하여 연일 추모집회와 사인 규명을 촉구하는 규탄집회를 가졌다. 9월 1일에는 1,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사인 진상규명을 위한 범중앙인 진군대회' 를 개최하고 시신이 안치된 용산병원까지 평화행진을 시도했으나 경찰의 무력진압으로 무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김우현(화학 2)이 각막파열의 중상을 입었으며 16명이 연행되었다. 9월 8일에는 '공안타살 규명 및 공안정국 박살을 위한 2만 의혈인 진군대회' 를 Y로[56]에서 갖고 11일부터 1주일간을 '범국민 연대기간' 으로 선포하여 추석기간을 사인규명을 위한 전국적 확산의 계기로 삼고자 했다. 당시 하경근 총장은 8월 21일 「제 2캠퍼스 총학생회장의 변사사건을 접하며」라는 성명서를, 9월 7일에는「고 이내창 학생회장의 철저한 사인규명을 재촉구하며」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당국에 철저한 사인규명을 요청하였다. 9월 21일 교수, 학생, 대학원, 직원노조, 민주동창회가 참여하는 '공동대책 위원회' 가 발족되었으며 대검찰청 항의방문을 단행하였다.

검찰은 처음에는 부검결과 '단순익사' 로 발표했다가 '진상규명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등의 강력한 문제제기를 받자, 정밀부검 결과와 수사결과를 계속 미루었다. 대책위원회에서는 『고 이내창학생 의문사건 자료집』을 발간하여 경찰의 수사내용과 사인발표에 대한 의문점을 제기하면서 이 사건을 '유인타살' 로 규정하였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자살익사로 추정했을 때 하의와 신발을 그대로 착용하고 유독 상의와 시계, 허리띠만을 벗은채 물에 들어간 점.
둘째, 지형상 해변에서 100미터 정도 바다에 들어가도 가슴정도 밖에 물이 차지 않는 상황에서 양말에 갯벌의 진흙이 전혀 묻지 않은 점.
셋째, 실족사일 경우 상의와 시계 등을 풀어놓은채 돌아다닐 상황이 아닌 점.
넷째, 검안결과 얼굴과 몸의 상처로 보아 반항의 흔적이 있는 점.
다섯째, 현장의 지형과 조수로 볼 때 사체발견장소가 지형상 거문도 주변의 모든 부유물이 발견되는 장소임에도 유류품이 전혀 발견되지 않은 점.
또한 의대 장임원 교수가 입수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부검감정서에 따르면, 사체 곳곳에서 피하출혈이 발견되었는데, 특히 머리에서 발견된 12cm × 14cm 피하출혈은 실신에 이를 정도의 중상이었음이 밝혀졌다. 여기에다 생매장 협박과 고문을 당하면서 프락치 행위를 강요당한 국민대 문과대 학생회장 출신인 김정환군이 8월 14일 오전까지 제2캠퍼스에 머물렀으며, 그때 이내창군을 만났다는 점과 '민족해방운동사'의 그림슬라이드를 평양축전에 보낸 혐의로 구속된 회화과 출신 차일환이 고문당한 곳이 이내창이 죽기 직전 동행한 것으로 밝혀진 도연주가 소속된 안기부 인천대공분실이었다는 정황이 밝혀지면서, '타살' 에 대한 의혹은 더욱 짙어갔다.

검찰의 발표가 이루어지지 않은채 공동대책위와 부검의사들의 소견서에 의해 타살임이 거의 확증된 상태에서 더 이상 장례를 미룰수 없다고 판단되어, 사망한지 50여 일이 지난 10월 6일 '애국학생 고 이내창 총학생회장 장례식' 이 최초의 '전대협장' 으로 치러졌으며, 유해는 광주 망월동에 묻혔다. 이내창군이 사망한 지 3달이 지난 11월 18일 전남여수경찰서의 최종수사결과는 최초의 수사결론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실족에 의한 익사'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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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이내창 장례행렬

1992년 12월 의혈탑을 도서관 앞으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4.19 혁명으로 목숨을 잃은 6인의 열사와 이내창군을 포함한 '7인열사추모비'를 세웠다.

2000년 출범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이내창 의문사에 대해서 안기부와 경찰이 곳곳에 개입한 흔적이 있고 타살의혹이 높긴 하지만, 구체적인 증거/증언이 없기 때문에 진실규명에 어려움이 있다면서 최종적으로 '규명불가'로 발표하였다.

1999년 9월 29일자 KBS2 공개수배 사건 25시에서 처음 다룬 뒤, 2017년 3월 25일 SBS 그것이 알고싶다 1069회 "수상한 동행, 그리고 거짓말 - 이내창씨 죽음의 비밀"이 방영되었다. 새로운 증거나 증언은 나오지 않았고 기존의 자료들을 정리하는 내용이었다.

3.4.5. 제5절 공과대학 C급 판정 사태

3.4.5.1. 사건 개요
1991년 10월, 교육부는 1992학년도 이공계 신입생 정원을 조정하면서 대학 교육환경평가를 반영하여 A급으로 평가받은 대학은 120명, B급으로 평가받은 대학은 80명, C급으로 평가받은 대학은 60명, D급으로 평가받은 대학은 30명을 증원하기로 하였다고 발표하였다. 그런데 중앙대학교 공과대학은 60명이 증원되어 C급 판정을 받은 것으로 나타나 법인 교육투자 약속이행, 대학당국의 발전계획에 대한 문제가 이슈화되어 장기간 학원문제로 비화되었다. 공과대학을 시작으로 C급 판정에 대한 법인과 대학에 대한 성토는 전 대학으로 번졌다.[57]

11월에는 제1캠퍼스 총학생회(회장 허동준, 법학 4)주최로 '우리학교 되살리기 위한 총장님과의 공개 공청회'와 '우리학교 되살리기 위한 의혈인 봉기' 등이 열렸다. 동창회에서는 비상대책위원희를 구성하여 회장단 연석회의, 긴급 이사회 등을 개최하고, 공과대학 C급 판정 상태를 법인과 대학당국의 공동책임으로 규정하여 법인의 퇴진과 총장의 사퇴를 주장하였다.
3.4.5.2. 갈등의 증폭
1992년 2월 공과대학 교수협의회에서는 ‘공대교육연구환경 개선위원회’ 를 발족하고 증원파동에 대한 자구책과 사후 수습대책을 강구하기 위한 첫 시도가 제기되면서 중장기 발전계획을 입안하려는 움직임이 가시화되었다. 3월 대학발전계획수립 전문 위원회가 출범하였고, 자발적인 대학발전기금 모금운동도 시작되어 공대 증원파동에 대한 교훈으로 대학발전계획이 입안되는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학기가 시작되면서 등록금 인상문제로 학생회의 본관 점거농성과 행정처장실이 봉쇄하는 등 학생회의 물리적으로 학사 파행이 계속되었다. 특히 15% 인상 고지된 등록금 인상율에 대한 대학당국과 학생회의 조정과정에서 도출된 '총장과의 10개 합의사항' 이라는 괴문서 파동으로 학생회의 자체수납과 등록거부는 1992년 3월 27일과 28일 이틀간 재학생에 의한 총장 불신임 투표라는 사상초유의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났다.

총장 불신임 투표에 대한 학내외에 비판론이 비등하면서 동창회의 선동과 배후 조종에 대한 의혹이 증폭되고, 학내 여러 주체들간에 반곡과 불신은 더욱 깊어졌다. 이와 함께 동창회 일부에서 동창회 집행부의 모교사태 개입에 대한 비판론도 제기되었다. 언론동문회(회장 백인호)와 정치외교학과 동문회(회장 이달순)는 각각 성명을 발표하여 "동창회가 모교 사태에 대해 선의의 진언과 비판역할에서 벗어나 재학생을 충동한 인상이 짙다."고 비판하였고, 4월 중 임시총회 소집을 요구함과 동시에 법인과 모교당국에는 대학발전계획을 조속히 수립하여 추진할 것과 재학생에게는 면학 분위기 조성을 촉구하였다.

의혹을 받은 동창회는 4월 6일 '학내사태에 대한 총동창회 입장'이란 성명을 발표하고 이를 해명하면서 법인과 총장의 퇴진 및 사퇴론에서 법인의 공약성실이행, 총장의 모교사태 수습을 책임질 것을 요구하면서 강경입장을 완화시키었다. '학내사태에 대한 총동창회 입장'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총장은 책임지고 학내사태를 수습할 것을 촉구한다.
1. 이사장은 당초 공약을 성실히 이행할 것을 촉구한다.
1. 대학발전공동협의 희 구성을 제안한다.
1. 총학생회는 학원정상화 노력에 적극 협력할 것을 당부한다.
1. 교수 • 교직원은 대학의 공신력과 명예회복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할 것을 당부한다.
1. 8만 동문은 대학발전에 적극 동참할 것을 다짐한다.
동창회의 제안에 따라 학내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동창회/대학 당국/법인/교수협의회/교직원노동조합/총학생회/대학원 학생회 대표로 구성되는 '대학발전 공동위원회'가 발족되었지만, 퇴진주장이 계속되는 분위기에서 대화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법인과 교권유린을 용납할 수 없다는 교수협의회 그리고 법인의 참여없는 협의회 구성은 의미가 없다는 노조의 불참으로 1차 회의는 무산되어 사태수습은 더욱 늦어졌다. 4월 10일 학생회는 본관을 점거하여 이사장실, 총장실, 부총장실 등의 집기를 청룡호수에 빠트렸고, 그 결과 제1캠퍼스와 제2캠퍼스의 모든 행정부서가 폐쇄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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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우리 학교 되살리기 집회

4월 30일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대학발전계획수립 전문위원회 주최 대학발전토론회가 진행되었으나, 5월 1일부터 등록금 인상근거제시와 법인의 육영의지를 촉구하는 항의 집회는 재개되었고, 학생회에서 국회와 교육부, 각 정당에 제출한 진정서가 사회문제로 비화되었다. 5월 14일 '발전협의회' 주선으로 열린 이사장과 학생대표와의 간담회는 감금파동으로 이어져 본관 점거 농성이 다시 시작되고, 학생회의 과격행동에 대한 비판과 학생회의 강경투쟁의 악순환이 2주일간 계속되었다.

결국 대학의 혼란을 수습하려는 하경근 총장이 전 교무위원과 함께 5월 27일 법인 이사회에 사퇴서를 제출하면서 촉구한 학원정상화 호소가 받아들여져, 학생회도 본관 농성을 해제하였다.
3.4.5.3. 범 중앙인 한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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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범 중앙인 한마당

6월 9일 김민하 교수가 총장대행 부총장으로 취임하고, 6월 19일 총학생회 주최 종강맞이 떡잔치를 계기로 공과대학 증원파동에서 비롯된 중앙대학교의 진통은 평온을 되찾았다. 그러나 대학은 평온을 되찾았지만, 8개월간의 진통에 대한 비판과 반성론도 진지하게 거론되었다. 중장기 대학발전계획 입안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대학구성원의 갈등과 반목을 해소하기 위한 '개교 74주년 범중앙인 한마당' 이 잠실 올림픽 경기장에서 3만 명의 중앙인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3.4.6. 제6절 메디컬센터(M.C.) 건립 지연 사태

개포동 부지 매입의 무산이후 1989년에서 1991년 2월까지 서울시내 1,000병상 규모 건립 부지를 물색했으나 적지를 찾지 못하였다. 부득이 1991년 2월 부속병원을 흑석동 부속중/고등학교 부지에 건립 계획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대신 부속유치원은 중문 옆 풍치지구로, 부속남/여중학교는 부속여중/고등학교 건물로 통합/이전하고, 부속남/녀고등학교는 강남구 도곡동으로 이전/통합하는 계획이었다.

이에 1993년 12월 1일에 병원건축을 설계업체로 낙찰히여 계약을 체결하였다. 이후 병원 건립의 준비단계로 설계납품, 건축허가 접수, 건축허가 취하,건축허가 재접수, 건축허가 등의 과정을 거쳤다. 또한 1994년 1월 26일에는 교통영향 평가를 위한 계약을 체결하였다. 이어 교통영향평가는 심의/승인을 받았으나, 1996년 12월 30일 교통영향평가 시효만료로 재허가 용역을 체결하여 1997년 6월 2일 심의/승인을 받았다. 1994년 12월에 신축부지에 대한 지질검사 용역을 체결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쳐 메디컬센터는 곧 착수/완공될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런데 1996년 3월에 이전 예정인 부속고등학교는 도곡동 신축 교사의 공사 지연으로 1년간 연기되었다. 이에 따라 메디컬센터 착공도 지연되지 않을 수 없었다. 1997년 3월 17일 법인은 각 구성원 주체에게 메디컬센터 건립 과정의 지연에 대한 설명회를 개최하여 긍정적 반응을 얻었다. 그러나 계속적인 시행착오는 계획 추진에 대한 불신감이 증폭되는 등 더 이상 법인의 계획을 믿지 않는 분위기였다. 이는 의과대학생 수업거부와 의과대학 교수들의 성명서 발표로 이어졌다.

이러한 의과대학 구성원의 움직임에도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지 않자, 4월 23일에는 제2차 의과대학 교수의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M.C. 건립에 대한 재단의 자세변화와 10월 착공 무산시 재단퇴진에 교수가 앞장 선다. 학생 및 수련, 전공의는 교수들의 성명서를 믿고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라" 등이었다. 이어 각 언론사 편집국장에게 사학재단 비리척결을 위한 서신을 발송하는 한편 학생과 학부모 230여 명은 감사 촉구를 위한 의대인 결의대회를 제1종합청사앞에서 실시하였다. 특히 의과대학 교수들은 M.C 건립지연에 따른 학내사태 수습을 위한 결의대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에서 교수들은 다음과 같은 선언서를 채택하였다.
의대생과 전공/수련의 입장에 대해 지지하고 전원 사직서를 제출하고 사태해결에 앞장선다.
총장과 교무위원들은 사태해결에 적극적으로 임하라.
의료원 관리실장은 책임지고 사퇴하라.
금양실업의 수익금을 의료원 환원에 대한 제도적 장치하라.
의대생 및 수련, 전공의는 모든 사항을 교수에게 일임하고 즉시 복귀하라.
이번 사태로 학교당국과 의료원은 의대 학생과 수련 및 전공의에 대한 어떤 불이익이 없도록 보장하라.
이사장은 건설본부장에게 실질적인 권한을 부여하라.
이에 이사장은 학내사태 수습을 위한 대안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주요한 내용은, "M.C.건설본부를 이사장 직속으로 설치 , M.C 건설본부장은 의대 교수 중에서 임명, M.C. 건설 진척상황을 착공전까지는 2개월마다 착공후는 6개월마다 중대신문에 발표, 법인의 상임이사와 사무처장을 경질, 금양실업 감사 교체, 금양실업의 체계법인 감사자료를 매년 의료원장에게 제출하고 공개, 10월 착공과 착공 이후 공사지연이 없도록 이사장이 M.C. 건립을 책임지고 추진한다" 등 건립을 위한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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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메디컬 센터 기공식

이사장의 의지 표명 이후 1997년 8월 21일에 M.C. 건립본부를 설치하고, 본부장에 장임원 교수를 선임하는 등 본격적인 M.C. 건립을 추진하였다. 건립부지 내의 구유지 매수 완료, 건설본부사무소 개소, 건축허가, 부속 중/고등학교 철거 완료 등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났다. 특히 메디컬센터 건립 기공식은 1997년 11월 1일 거행됨으로써 새로운 면학풍토를 조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IMF체제로 메디컬센터 추진계획은 수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병원건립에도 많은 자금이 필요하지만, 이에 따르는 최신 장비는 엄청난 재정적인 부담이었다. 더욱이 기존 대학병원도 차관에 따른 환차손 등으로 재정적인 부담이 가중되는 상황을 맞았다. 물론 교육적인 차원에서 메디컬센터는 의과대학 교육의 정상화를 위해 필수적인 요소였다. 하지만 무리한 시행은 학교법인 중앙대학교의 전체 교육기관에도 영향을 끼칠 것은 명약관화한사실이었다. 이에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변경되었다.

첫째, 대학부속병원으로서 3차 의료기관의 최소 기준인 500병상 규모로 건립한다. 둘째, 착공시기는 IMF경제관리체제에서 벗어난 99년 하반기에 착공한다. 셋째, 착공시기 이전까지 용산병원이 불하되면 흑석동 M.C.건립계획(안)을 대체 추진한다. 넷째, 컨소시움 참여자에게 경영권 부여하는 자금을 조달한다는 방안이었다. 당시 메디컬센터 건립은 법인의 가장 큰 과제로 복잡한 추진 과정을 거치면서 지리멸렬해가는 가운데 중앙대학교 발전계획의 가장 큰 이슈였다.


[1] 『중앙대학교 80년사』 편찬실무위원회 위원장 김호일(중앙대학교 사학과 교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 소장, 국학 학술원 원장, 안중근의사기념관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지도위원 역임)[2]이화여자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유치원[3] 『동아일보』 1921년 5월 23일자[4] 『매일신보』 1916년 12월 24일자[5] 어린이란 말이 방정환에 의하여 창도되기 시작한 것은 1923년의 일이었다.[6] 『동아일보』 1922년 10월 28일자[7] 『동아일보』 1928년 3월 22일자[8] 당시 중앙보육학교, 이화보육학교, 경성보육학교가 있었다.[9] 당시 창씨개명으로 이름을 빼앗긴 조선인은 전체의 80%인 322만 가구에 달한다.[10] 승당임영신박사 전집편찬위원회, 『승당임영신박사 전집』 Ⅱ, 「나의 이력서」, 1986, 943~944쪽[11] 중앙대학교 80년사 편찬실무위원회, 『중앙대학교 80년사』, 1998, 93쪽[12] 여기서 ‘혼자의 힘’ 이라 함은 일제하의 대부분의 사립전문학교, 즉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 숙명여자대학교의 전신인 숙명여자전문학교, 성균관대학교의 전신인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校),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혜화전문학교(惠化專門學校),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인 이화여자전문학교 등이 민족진영/유림/불교계 그리고 기독교 선교부 등 단체의 지원에 의해서 설립되고 유지되었는데, 중앙보육학교는 전적으로 승당 혼자의 힘으로 유지, 운영되었음을 뜻한다.[13] 이영보, 「의와 참의 가르침」, 주간시민 출판국, 『아직도 그 목소리가-임영신 박사를 회상하며』, 1979, 133쪽[14] 조성녀,「육신의 친밀감」, 위의 책, 194〜196쪽[15] 김옥련, 「옛 스승의 모습」, 위의 책, 102쪽[16] 중앙대학교 50주년 기념사업회, 『임영신 박사 연설문집』, 중앙대학교 출판국, 1968, 이하 승당의 연설은 이 책을 참조[17] 손충무, 『한강은 흐른다』, 동아출판사, 1972, 53쪽[18]기전중학교, 기전여자고등학교, 기전대학교의 전신[19] 『기전80년사』, 1982[20] 백암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 1920년[21] 조선총독부 경무국, 「소요사건에 관한 민정휘보 제9호 소밀(騷密) 제911호」, 1919년[22] 앞의 『임영신박사 연설문집』, 24쪽[23] 임영신 박사 희갑기념사업추진위원희, 『임영신 박사- 빛나는 생애』, 102~103쪽[24] 1930년 31세의 만학으로 대학을 졸업한 후 남캘리포니아대학교 총장인 멜컴과의 대담에서 "만약 지금 루이스 임(Louise Yim ; 승당의 미국식 이름)에게 1백만 달러가 생긴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승당은 "조국에 돌아가 여자전문학교를 세워… 그들로 하여금 일제에 빼앗긴 조국을 구하도록 하겠다." 라고 대답하였다. 1931년(32세)에 대학원을 졸업한 후 미국에 체류하기를 권하는 교포들을 비롯하여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이승만과의 대화에서 승당은 자기의 오랜 염원인 여자전문학교를 설립하기 위해서 귀국하겠다고 밝혔다. 이상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교육’ 을 통한 민족 역량의 배양에 헌신하겠다는 승당의 의지를 충분히 읽을 수 있다.[25] 그 결과 연극을 관람한 교포 2세 중학생인 찰리 김(Charley Km)은 일본인 거류민 집에 침입하여 일본인 살인 미수사건을 발생시키기도 하였다. 이 사건으로 승당은 미국 경찰로부터 “앞으로는 선동적인 행동을 삼가라”는 주의를 받기도 하였다.[26] 손충무, 앞의 책, 271쪽[27] 조성녀, 앞의 글, 193쪽[28] 중일전쟁 후 일제가 조선인의 노동력을 수탈하기 위해 강제로 끌고 가서 만든 노역 조직이다. 1938∼1944년까지 약 762만 명이 강제 연행되었다.[29] 1924년 12월 7일~1938년 5월 2일 사이의 『동아일보』 기사 인용한 이상금, 『한국근대유치원교육사』,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87, 244~246쪽[30] 파일:external/8b1d6709ade48ca1067894905a0768739f596a8736c4c807e209dbc74f843792.jpg[31] 세계 기독교운동연구부, 『연구평론보』 제6호[32] 『조선일보』1940년 2월 16일자[33] 김옥련, 「앞의 글」[34] 앞의 「나의 이력서」[35] 김옥련 「앞의 글」[36] 최은희, 「민족정기의 표상」, 앞의 『아직도 그 목소리가』, 84쪽[37] 한국여성개발연구원, 『한국 역사속의 여성인물』, 「下편 : 항일독립운동기 - 임영신 : 항일운동의 선구자, 여성교육의 선구자」, 1998년[38]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C%B9%9C%EC%9D%BC%EC%9D%B8%EB%AA%85%EC%82%AC%EC%A0%84_%E2%85%A1%EA%B6%8C.jpg[39] 항일 지하운동을 감추기 위한 위장으로 추정.[40] 편찬위원장 : 윤경로(전 한성대 총장) / 편찬지도위원 : 강덕상(재일한인역사자료관장), 강만길(전 상지대 총장),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 김석범(재일 문학가), 김우종(재중 사학자), 김윤수(전 국립현대미술관장), 김태영(전 경희대 교수), 김호일(전 중앙대 교수), 김홍명(조선대 교수), 리영희(전 한양대 교수), 리중화(재중 저술가), 박석무(한국고전번역원장), 박영석(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박창욱(중국 연변대 명예교수), 박현서(전 한양대 교수), 백낙청(전 서울대 교수), 변철호(재중 언론인), 서중석(성균관대 교수), 염무웅(문학평론가), 윤병석(전 인하대 교수), 이만열(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이연복(전 서울교대 교수), 이우성(전 민족문화추진회 이사장), 이이화(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 이해학(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한국위원회 상임대표), 임헌영(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조동걸(전 국민대 교수), 주섭일(언론인), 최병모(변호사), 최삼룡(재중 문학평론가), 한상범(전 동국대 교수), 함세웅(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현기영(소설가) 등 각 분야의 권위있는 역사학자들이 참여하여 일제강점기 공문서, 신문, 잡지 등 3천여종의 문헌자료를 수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250만 건의 인물정보를 데이터베이스로 구축 등의 과정을 통해 2만5천 건의 친일혐의자 모집단을 추출하고, 20여 분야의 전문분과회의와 상임위원회 심의를 거친 결과 4,430명을 선정하였다.[41] '죽는다'의 영문표현이 부정적이라는 판단에 따라 기존의 영문명이었던 'Die in Honor, Live for Truth'를 'Live in Honor, Live for Truth'로 바꾸었다.[42] 당시의 환율 1:50으로 따져 한화 15,000,000원에 해당[43] 당시의 한화 50,000,000원[44] 생애에 걸쳐 총 6개의 교육기관에 기부를 하였는데, Columbia University, The University of Pennsylvania, Franklin and Marshall College, The Elmer Holmes Bobst Institute of Clinical Research at Hahnemann Medical College and Hospital in Philadelphia, New York University 그리고 우리나라의 중앙대이다.[45] 임영신, 「천인(天人)이 통곡(痛哭)할 3.15 망국선거(亡國選擧)」, 1960.3.15 낙선의 변[46] 『동아일보』 1960년 7월 3일자에 '쓸쓸히 진 혁명의 꽃' 으로 한면에 걸친 기사 게재됨.[47] 1992년 12월에는 의혈탑을 중앙도서관앞으로 이전하였다.[48] 1965년 2월 25일 문고대 1042호[49] 1965년 2월 25일 문고대 1042호[50] 1965년 2월 25일 문고대 1042.3호[51] 서라벌예술대학 국악과는 당시 음악계가 서양음악 일변도로 흘러 전망이 밝지 않았지만 민족음악의 부흥과 이를 위한 교육이 시급하다는 인식 아래 설립되었다. 설립 후에도 지원 학생의 부족과 학생을 가르칠 자격 있는 교수의 부족이 항상 문제가 되었지만 소수의 의식 있는 학생과 교수에 의해 매우 진지한 분위기에서 운영되었다. 그러나 1968년까지 4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폐과되고만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52] 현재의 약학대학 및 R&D 센터 부지[53] 김희수가 육영에 관심을 가지게 된 동기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자신의 한을 풀기 위한 것이며, 또 하나는 모은 재산을 사회에 뜻깊게 환원하기 위한 것이다. 그와 그의 가족들이 일본의 생활 속에서 뼈저리게 느낀 것은 일본인의 조선인에 대한 학대와 차별의 한이었다. 그는 자신을 국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비하한 호칭인 '반도인' 이라 하며 차별시하던 일본 땅에서 신용과 근검정신, 그리고 합리적인 경영으로 사업에 성공했다. 그는 경제적인 성공으로 어느 정도 한을 풀었다. 그러던 중 1986년 7월경에 당시 중앙대학교 운영자인 임철순씨와 학교 인수에 관한 협상을 벌이게 되었다. 임철순씨는 그에게 서울의 흑석동 캠퍼스만을 인수할 것을 신중히 의사타진했다. 그러나 그는 이에 선뜻 응하지 않았다. 같은 대학의 양 캠퍼스를 두 사람이 따로 운영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같은 교육이념과 같은 교가, 서로 순환 근무하는 교직원 등 동질적인 요소가 많은 대학을 둘로 분할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그는 부채 660억 원과 안성캠퍼스 기숙사 및 도서관 공사비 53억원 등 모두 713억 원을 지불하여 중앙대학교를 인수하였다. 당시 713억원의 값어치는 2016년 현재 약 4,000억원에 이르는 천문학적 액수였다.[54] 『매일경제』 1988년 10월 11일자[55] 중앙대학교 일부 교수들과 재학생으로 이루어진 단체였다.[56] 현재의 영신관 앞 잔디광장에 있었다.[57] 당시 상당히 큰 문제였다. 그 시절만 해도 대학 서열화가 있긴 있었으나 그냥 암묵적으로만 존재할 뿐, 공공이나 언론 등 공신력 있는 곳에서 구체적으로 등급을 준 사례가 전혀 없었는데 이공계 신입생 정원조정 같은 작은 부분이지만 구체적인 대학 등급을 정하고 언론에서 이를 공표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다 보니 입시계에서는 이를 마치 공공이 인증한 대학서열 같은 것으로 받아들였으며, 하필이면 대입 원서접수를 한 달정도 앞둔 10월이라 그 파장이 매우 컸다. 게다가 그 A급으로 평가받은 서울대 외 나머지 4개 대학이 중앙대가 (새로운 재단으로 인해) 부상하여 어께를 나란히 하겠다고 한 세칭 명문 사립대이며, 대입 배치표 등 입시 지표가 중앙대 이공계보다 못하다고 알려진 대학들도 대부분 B급을 받은 상태에서 A B C급 대학의 구체적 이름이 일반신문에 크게 실렸고 당연 대학 구성원 입장에서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았다. (여담으로 성균관대 등 몇 개 대학은 직전년도 입시부정에 관련된 관계로 정원 증원대상에서 아예 제외, 평가 자체가 없어 언론에 실릴 일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