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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감리교신학대학교의 역사를 설명하는 문서이다.2. 신학회 시대(1887년~1907년)
2.1. 배재학당에서의 신학 교육
한국명 | 아편설라(亞篇薛羅)[1] |
출생 | 1858년 2월 6일 |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숀더튼 | |
사망 | 1902년 6월 11일 (향년 44세) |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 어청도 앞바다[2] | |
국적 | 미국 |
묘소 | 서울특별시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
직업 | 선교사 |
배우자 | 엘라 다지 아펜젤러 |
자녀 | 장남 헨리 도지 아펜젤러 장녀 앨리스 레베카 아펜젤러[3] |
종교 | 개신교 (감리회)[4] |
학력 | 드류 신학교 (학사) |
1885년 헨리 아펜젤러 선교사에 의해 배재학당이 설립되었다. 배재학당 설립 당시 고종 황제는 마태오 복음서 20장 26-28절을 인용, "크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欲爲大者當爲人役]."는 당훈을 지어주었다. 이 배재학당에서 최초의 신학 교육이 이루어졌다. 1888년 아펜젤러 선교사가 미 감리회에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1887년 9월부터 배재학당 내 한국 학생들에게 신학 교육을 실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1887년을 감리교신학대학교의 설립 연도로 볼 수 있다.
2.2. 영아소동과 그 이후의 신학 교육(신학반, 신학회)
1888년에 '영아소동'이 일어났다. 이는 근대화 정책에 반감을 가진 수구세력들의 음모로 인해 벌어진 것으로, 수구세력들은 서양인들이 아이들을 잡아 눈을 뽑아 사진기의 렌즈로 만들고 간을 빼내어 약으로 쓴다는 소문을 악의적으로 퍼뜨렸다. 이에 분노한 민중들이 무고한 서양인들을 폭행하는 등 여러 사건이 발생하자, 고종은 서양인들의 활동을 잠시 중단시켰다. 그리하여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이 잠시 활동을 중단하였고, 종교집회 및 선교사들의 지방 여행이 금지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배재학당 내에서 이루어졌던 신학 교육도 상단 기간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1888년 영아소동으로 중단되었던 신학교육은 1893년에 이르러 다시 시작되었다. 이는 1893년 미 감리회 해외 선교회 연례보고서에 실려 있는 한국 선교의 통계에서 "신학교 1, 교사 2명, 학생 12명"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1893년 이후에도 선교사들의 보고나 편지를 보면 지속적으로 한국인 전도자 교육이 실시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스크랜턴은 1893년 5월 6일자 편지에서 1893년에야 비로소 규칙적인 신학교육을 실시할 수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학교 안에 이러한 취지에서 학생들을 훈련시킬 한 반을 개설해 장차 우리 사역자로 양성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신학교의 시작입니다. 아펜젤러가 돌아오면 이 학교를 출범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현재 가장 지성적인 그리스도인들로 12명이 선발되었는데, 그들은 1주일에 2~3일 정도 오후마다 모여 공부하고 있습니다. 교과목은 성서, 설교학, 구원론, 성서개론 등입니다."
즉 공식적인 신학교 개설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미 12명의 학생들이 정기적인 수업을 받고 있었으며 교과 과정도 어느 정도 갖추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펜젤러가 안식년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후에, 1893년 8월에 열린 미 감리회 한국 선교회 19차 연회에서는 아펜젤러를 '배재대학 학장 겸 신학부 부장'으로 임명하여 '본처 전도사 과정'으로 신학 교육을 실시하였다.
1893년 겨울에 시작된 '신학반'이 1899년 2월 '신학회'로 개칭되었다.
"전체 수업은 유쾌하고도 유익한 것이었으며 전 수업 기간을 통해 그 관심이 지속되었습니다. 그들(21명 참석자)은 이 반을 신학회로 부르기로 투표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들은 매번 서울에서만 모일 것이 아니라 다른 장소에서도 모이며 음력 설날 어간이 가장 좋은 시기임을 건의하였습니다."
그때까지 영어로 "Theological Department"(신학부), "Theological school"(신학교), "Theological class"(신학반) 등의 이름으로 불리며 확실히 정해지지 않았던 신학교육 모임의 명칭이 '신학회'로 한국인의 투표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다. 이 모임은 '신학회'란 명칭을 결정한 것과 함께 모임 장소를 서울특별시 외 다른 지방으로 확산시킨 중요한 의미를 지닌 모임이었다. 그리고 그 대상도 한국인 전도인이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도록 확대시켰다. 신학교육의 장소와 대상이 확대되자 그 지원자들이 급속히 늘어났고 교수진과 교재 부족 현상이 나타났다. 교수진 부족 문제는 지방마다 선교를 관장하는 선교사들과 이웃 지방에서 지원 받은 선교사들로 해결했고, 교재 부족 문제는 1900년 12월부터 <신학월보>로 해결하였다.
3. 감리교협성신학교 시대(1907년~1923년)
3.1. 감리교협성신학교(남성 신학 교육)
1910년대 감리교협성신학교의 전경. 지금의 캠퍼스가 위치한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31번지.
1887년부터 시작된 신학회 교육은 미 감리회의 신학 교육 과정이었다. 당시 미국의 감리회는 남북 전쟁 이후로 미 감리회, 남 감리회로 나뉘어 있었는데, 미 감리회보다 10년 늦게 한국 선교를 시작한 남 감리회는 별도의 신학 교육을 실시하지 않고 1899년부터 미 감리회의 신학회에 학생과 1903년 무스, 하운센 등을 교수로 보내, 미 감리회에 위탁 교육을 시키는 형태를 취하였다. 그리하여 신학회는 초기부터 남, 북 감리회 연합 형태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미국에서는 남북 전쟁이 끝난 뒤로도 통합되지 못하고 서로 독자적인 조직과 선교 통로를 지니고 있던 두 감리회가 한국에서는 연합하게 되었다. 특히 1903년 원산 부흥 운동 이후 초교파적인 신앙 부흥 운동이 일어남에 따라 두 감리회의 일치와 연합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신학 교육에서도 나타나, 1905년부터 남, 북 감리회 연합 신학교 설립 논의가 두 감리회 안에서 제기되고 마침내 1907년 6월, 연합으로 신학교를 설립하고 이름을 감리교협성신학교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남, 북 연합 신학 운동이 실시되고, 그 결실이 1930년 ‘기독교 조선 감리회’ 결성으로 나타났다.
1907년 감리교협성신학교가 설립된 후, 1910년 4월에는 미국 남북 감리교회 한국 선교부에서 현 감리교신학대학교가 위치한 서울시 서대문구 냉천동 31번지에 부지를 구입, 건물을 짓고 학교를 이전시켰다.
3.2. 감리교 협성여자신학교(여성교육)
감리교 협성여자신학교의 모습. 학교 건물의 설계자는 러시아인이어서 건물의 모습은 러시아풍이었다. 이런 이유로 광복 후 반공 영화나 일반 영화에서 소련 건물로 많이 등장하였다.
1907년 개교한 감리교 협성 신학교는 남성 교육 기관이었다. 여성에 대한 신학교육도 비슷한 시기에 시작되었다. 미 감리회의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5]의 보고에 의하면 여성의 신학교육은 1890년 무렵부터 개인 교습 형태로 진행되었다. 한국인 전도 부인들을 모아 성서와 기도법 등을 가르치기 시작하였고, 1900년에는 정식 <여자성경학원>으로, 다시 1911년 <부인성경학원>으로 발전하였다. 여기서 전도부인이란, 남녀가 엄격하게 구분되었던 한국의 당시 상황 속에서 여성 전도에서 어려움을 겪던 남성 선교사들을 대신하여 기초적인 신학교육을 받고 전도하던 부인들을 일컫는다. 그녀들은 대우가 좋지 못했지만, 사회에 진출한 여성이라는 긍정적인 정체성 때문에 열심히 전도하여 감리교회를 양적으로 발전시켰다.
남 감리회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여자성서학교를 운영하였다. 1921년에 이르러서는 북감리교회와 남감리회의 성서학원이 통합됨으로써 한국 최초의 여자 신학교인 ‘감리교 협성 여자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학교 부지는 서울시 서대문구 충정로 3가 8번지에 마련하였다.
3.3. 3.1 운동과 감리교신학교
1919년에 일어난 3.1 운동에서 감리교신학교 재학생 중 7명이 독립선언 33인 중에 참여하였다. 곧 박희도(朴熙道), 오화영(吳華英), 최성모(崔聖模), 이필주(李弼柱), 신석구(申錫九), 신홍식(申洪植), 정춘수(鄭春洙)였다.4. 감리교 신학교 시대(1931년~1945년)
1920년대부터 남북 감리회가 협동으로 운영하는 남녀 신학교를 하나로 통합하자는 논의가 나왔다. 그리하여 2년간 실험교육을 거친 후 마침내 1925년 4월 두 학교를 '감리교 신학교'라는 이름으로 통합하였다. 이는 고등교육기관으로서는 한국 최초의 남녀 통합 교육기관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로써 '감리교 신학교'는 여성에 대한 불평등 구조가 팽배하던 시대에 여성과 남성이 함께 복음을 배우는 신학 교육의 장이 되었다. 1925년 감리교 협성신학교와 감리교 협성여자신학교가 통합된 후, 1931년 12월 14일부터는 전문학교령에 준하여 4년제 남녀공학을 실시하였다. 교장은 빌링스(B. W. Billings)가, 부교장은 구 협성여자신학교 교장으로 일했던 체틴(A. B. Chattin)이 맡았다. 이후 1935년 4월 5일에는 대학령에 따라 5년제(예과 2년, 본과 3년)로 학제를 개편하였다.4.1. 아빙돈 주석 번역
1920년대 후반에서 30년대 전반에 한국 개신교에 신학적인 갈등이 찾아오게 된다. 이는 감리회가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아빙돈 성경 주석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아빙돈 주석’은 미국과 유럽의 유수한 성서 신학자들이 공동 집필한 것이었다. 아빙돈 주석서는 그 당시에 세계적으로 통용되었던 성서비평학을 통해 성서를 주석하였다. 아빙돈 주석서는 성서비평학의 활용으로 일반 독자들에게 성서 주석의 현대성을 밝혀주어 미국 개신교계에서 크게 환영을 받고 있었던 책이었다. 이러한 ‘아빙돈 주석서’를 감리회 주축으로 번역하였다는 것은, 당시 감리회가 진보적인 신학 노선을 취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아빙돈 성경 주석’은 감리회의 류형기가 번역과 편집 책임을 가지고 출판한 것으로, 번역자로 감리회에서는 양주삼, 정경옥, 김창준, 전영택, 변홍규[6], 장로회에서는 송창근, 채필근, 한경직, 김관식, 김재준, 조회령, 윤인구 등 53명이 참여했다.4.2. 삐라 사건과 폐교
감리교 신학교는 이렇게 번역으로나마 한국인의 손으로 각주서를 발행할 만큼 신학적으로 성숙해갔지만, 아울러 우리 민족이 겪었던 수난의 역사에도 동참하게 되었다. 1940년 5월 어느 날 감리교 신학교 교정에 “일본인 학교에 조선 사람 보내지 말라.”, “일본인 상품을 보이콧하라.”, “창씨개명하지 말라.”, “조선 사람은 조선 사람” 등의 내용이 적힌 삐라가 발견되었다. 이는 일제가 기독교를 탄압하기 위해 꾸민 자작극이었다. 그로 인해 몇몇 학생들이 조사를 받고 변홍규 교장과 정일형 교수가 구속되었다. 결국 그 해 10월 당시 감독이었던 친일파 정춘수가 무기한 휴교(사실상 폐교령)를 선언하여 학교가 폐교되었다.5. 광복 후 감리교 신학교 시대(1945년~1959년)
1945년에 광복을 맞자 바로 전에 형성(1945년 7월 19일)되었던 기독교 조선교단의 지속 여부에 대해 논의가 일어 같은 해 9월 8일에 새문안교회에서 교역자들이 “남북 대회”라는 이름으로 모였다. 의견은 비록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로 하나가 되긴 했지만 교파 통합이 바람직한 만큼 통합 교단을 그대로 이어가야 한다는 주장과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로 된 것이니 각 교단으로 환원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뉘었다. 엇갈린 의견 속에서 회합에 참여했던 감리회 교역자들 중 이규갑, 변홍규, 김광우 목사 등이 조선교단의 불법성을 규탄하고 퇴장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남북 대회"는 회의 끝에 단일 교단을 결성하기로 하고, 38도선으로 북측 교회가 참여하지 못함에 따라 이름을 "조선 기독교회 남부대회"로 고쳤다. 남부대회는 같은 해 11월 27일부터 30일까지 개최되었다. 그러나 이 남부대회는 여러 교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여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다가 1946년 해체되고, 각 교파가 환원되었다.한편 새문안교회에서 퇴장했던 감리회의 목사들은 재건위원회를 조직, 위원장에 이규갑 목사를 선출하였다. 이들은 다시 1945년 12월 17일에 조선 감리회 유지 위원회를 조직하고 역시 이규갑 목사를 위원장으로 삼았다. 위원회는 전국에 연락을 취해 1946년 1월 14일에 흥인지문 교회에서 연합회(중부장: 이규갑, 동부장: 변홍규, 서부장: 이윤영)를 개최하기로 했는데 중도파와 선교사들의 중립적 자세에 의한 화해를 종용으로 미루어져 오다가 4월 6일에서야 개최하게 되었다. 이 회의에서 감리교 신학교의 재건을 결의하고 교장에 변홍규 목사를 추대하였다. 그렇게 1946년 3월에 감리교 신학교가 다시 개교하였다. 이어 4월 5일에는 감리교 신학교 강당에서 기독교 조선 감리회 중부 및 동부 연회가 연합으로 개최되고 1939년의 감리교회의 정통성을 잇고 있음을 선언하였다.
재건파에 의해 어렵게 다시 개교한 감리교 신학교는 1948년에 45명, 1949년에 40명, 1950년에 38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부산으로 피난, 1951년 민가를 구입, 판잣집을 지어 임시 가교사로 사용하였다. 부산 피난 시절에 1951년에 43명, 1952년에는 6명, 1953년에는 6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는 데 그쳤다. 휴전 후, 1954년 3월 13일 부산에서 마지막 졸업식을 끝내고 4월에 서울로 다시 올라왔다. 환도 이후로는 정상적으로 매해 30여 명에서 50여 명을 배출하였다. 부산 피난 시절 군 장교들의 영어교육을 위탁 운영하기도 했다.
1951년 4월 5일부터 부산에서 사용한 임시 교사. 1954년까지 사용되었다.
학교 재건 후 다시 교장에 오른 변홍규 박사는 미국 드류대학교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고, 1933년부터 감신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1939년에 빌링스에 이어 감신의 6대 교장을 맡은 바 있었다. 이어서 1941년에 김인영 목사가 교장을 하다가 해방이 되면서 다시 변홍규 목사가 맡았고, 1948년부터 1951년까지는 유형기 목사가 맡았다. 1952년부터 25년간은 홍현설 목사가 교장 직을 수행하였다.
6. 감리교신학대학 시대(1959년~1993년)
1959년 감리교신학교는 대학으로 승격되었다. 당시 교장이었던 홍현설은 같은 해 3월 18일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린 3부 연합 연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제일 먼저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고 싶은 기쁜 소식은 과거 수십 년 간 우리의 숙제였던 대학 승격 문제가 드디어 해결되어 문교부 장관으로부터 금년 4월 1일부터 정규 대학의 인가를 받아 학생을 모집할 것입니다.
1959년 4월 1일 이후 학교의 공식적인 명칭은 감리교신학대학이 되고 홍현설 교장이 제 1대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1959년 10월 31일에는 미국 웰치 감독의 헌금으로, 웰치 감독의 이름을 딴 웰치 채플이 건립되었다.
4.19 혁명이 있기 2달 전인 1960년 2월 21일 뜻하지 않은 화재로 도서 및 학적부가 거의 전소되었다. 같은 해 5월 10일 새 본관 공사에 착수하였고, 10월 31일 새 본관[7]이 3층 규모로 준공되었다. 1969년 선교 대학원이 교단의 위촉으로 개설되었고, 1971년 봄에는 대학원과 신학대학원이 문교부로부터 정규 대학원의 인가를 얻어 개원하였다. 이어 부설 연구소를 두었다. 부설 연구소에는 기독교 교육연구소(소장: 은준관 교수)와 한국교회 선교 문제 연구소(소장: 홍현설 교수) 등이 있었다.
1977년에 홍현설 학장이 정년 은퇴했다. 1977년 6월, 그 뒤를 이어 윤성범 교수가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윤성범 교수부터 학장을 4년 임기제로 하였다.
1980년 2월 11일 윤성범 학장에 이어 김용옥 교수가 제3대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김용옥 학장은 학장 재임 기간인 1980년 3월 15일 교육부로부터 공동 박사 과정 설립 인가를 받았고, 같은 해 9월 30일에는 1981학년도 입학정원 증원 및 기독교교육과 설치인가를 받았다. 같은 해 11월 24일에는 신학대학원(Th. M. 과정, M.Div. 과정) 설립인가를 받았다. 그리고 새로 도서관을 신축할 것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이듬해 김용옥 학장은 도서관 완공을 보지 못하고 간염으로 돌연 사망하였다.
김용옥 학장의 뒤를 이어 1981년 2월 14일 박봉배 박사가 제4대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1981년 7월 15일에 도서관이 준공, 개관되었는데, 도서관 건립을 추진하다가 병사한 김용옥 학장의 이름을 따 “김용옥 학장 기념관”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1982년 6월 29일에는 종합관이 준공되었고, 충정로 3가 구 협성여자신학교에서 종합관 지하로 기숙사를 옮겼다.
같은 해 10월 5일에는 종교철학과 설치인가를 받았다. 그러나 무리한 종합대학화 계획과 학장 종신제 추진 등의 이유로 1982년, 1985년 2번의 학내 사태가 일어났다. 2번의 걸친 사태 후 박봉배 학장이 학장직을 사임하고 퇴진하였다. 1987년에는 이사회가 퇴진하기에 이른다. 1985년 박봉배 학장이 사임한 후 송길섭 박사가 제 5대 학장으로 취임하였으며, 10월 30일에 기독교교육과를 기독교교육학과로 개편하였다.
감리회 신학의 토착화 전통은 변선환 교수 등에 의해 계승되었다.
1982년 6월 26일 현대사회연구소가 주최한 불교와 기독교와의 대화 모임에서 변선환 교수가 주제 강연을 했는데, 이 강연의 내용이 문제가 되어 이단 시비가 일어났다.
문제가 된 강연 내용은, “무신론자도 구원받을 수 있다”라는 것인데, 이 말의 본래 의도는, “우리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배타적 입장을 떠나 무신론자까지도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강연 내용이 신문에 발표되자 감리교 부흥단은 변선환 교수가 사도신경과 감리회 교리적 선언을 부인했다는 일종의 규탄 성명서를 발표하고 변선환 교수의 감리회 정회원 자격 정지를 요구하였다. 결국 오경린 감독회장이 변선환 교수로 하여금 해명서와 자신의 신앙 고백서를 발표하도록 하여 사건이 마무리 되었다.
6.1. 변선환·홍정수 교수 사건(변·홍 사건 1991년)
1988년 8월 10일, 변선환 교수가 제 6대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1991년 변선환 학장은 다시 이단 시비에 휘둘렸다. 1990년 변선환 학장은 ‘불타와 그리스도’라는 글을 발표하였고, 다음 해에 홍정수 교수가 ‘부활의 메시지를 다시 조명한다’라는 글을 발표한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이 글에는 변선환 교수의 종교다원주의 신학이 잘 드러나 있었는데, 변선환 교수의 신학은 이웃종교를 사탄이나 우상으로 적대하거나 개종의 대상으로 여기기보다는 이웃 종교를 존중하고 그리스도교와의 공통된 내용을 찾아 대화하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홍정수 교수의 글에는 포스트모더니즘 신학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러나 종교의 공존과 상호이해는 지극히 원론적이고 당연한 것이라서 큰 의미가 없었다. 무엇보다 변선환 목사의 주장은 "교회가 기독교의 경계를 허물어야 하고 타종교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8]는 해석의 여지가 있었고 근본주의[9]자이자 금란교회 담임목사인
반면 감리회 내 복음주의, 정통주의 진영에서는 감신의 복음주의, 정통주의적 기풍이 살아났다고 평가하며 변선환과 홍정수 교수가 종교다원주의를 가르치려 했으므로 이단으로 정죄를 받은 것은 당연하다고 평가하였다. 개신교의 뿌리인 가톨릭도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있다고 고백을 하지, 타종교에 대한 온전한 구원을 말하지는 않는다. 사실 변선환 학장의 주장도 온전한 구원을 이야기 했다기보단, 타종교와 대화를 통해 타종교와 기독교 간의 공통 분모를 찾고 그 과정에서 구원론에 관한 사상을 공유한 것일 뿐이지 불교도 무신론도 이슬람교도 모두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직접적으로' 주장한 것이 아니라는 옹호론도 있다.
또 다른 시각은 다음과 같다. 변선환 목사를 비롯한 종교간의 이해에 문제에 있어 시각에 따라 구원론에서 급진적으로 비춰질수있는 신학자들의 이런 주장은 결과적으로 오히려 에큐메니컬, 진보적 기독교 진영에 큰 피해를 가져왔다고 평가받는다.[10] 이런 주장은 기독교를 믿지 않아도 구원을 얻으니 기독교를 믿지 않아도 된다는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여지가 다분하고 역사적으로도 기독교의 뿌리를 흔들수 있어서 기독교계에서 크게 경계받는 주장이었다[11], 결국 변선환 목사의 무리수로 진보진영이 싸잡혀 욕을 먹게되면서 보수진영으로부터 "진보적 신학 = 배교자" 라는 잘못된 공식이 성립되었다.
문익환 목사의 무단 방북 사건, 1991년 WCC 호주 총회에서의 초혼 퍼포먼스 사건과 함께 개신교계에 큰 충격을 줬던 사건이고 지금도 그 영향력이 남아있어서, 극단적 보수 진영이 아니더라도 감신대와 애큐메니컬 진영에 아직도 안 좋은 인식을 갖고 있는 나이가 많은 보수 개신교인들이 많다. 김홍도 목사가 금란교회라는 감리교의 손꼽히는 대형교회 목사라는 사실과 상술한 사건들 때문에 당시 개신교 여론이 진보적 신학에 적대적이었던 시절이라서, 감리교회 안에서도 진보적 신학을 아니꼽게 보는 시선이 학계와 별개로 교회현장에서는 다수 존재했다. 이런 이유들로 진보주의 신학은 약화되고 상대적으로 정통주의, 개혁주의, 보수적 신학의 부흥을 가져왔다.
7. 감리교신학대학교 시대(1993년~현재)
1992년 7월에 변선환 학장이 종교재판의 후유증 속에서 정년 은퇴와 동시에 임기 만료로 퇴임하게 되고 이어 구덕관 교수가 학장직을 승계하였다(1992년 8월 10일). 1993년 3월 1일에는 교명이 감리교신학대학교로 개칭되고, 학장은 총장이 되었다. 구덕관 총장은 취임사(1992년 9월 10일자 학보)에서 학교의 후진성에 대한 깊은 인식과 발전 계획에 대해 밝혔는데, 오해가 다분한 발언들로 학생들의 큰 불만을 샀다. 변선환 학장 시절인 1990년 3월 12일에 이사회에서 충북 음성군 감곡면 원당리에 제 2캠퍼스를 개발하기로 가결하였었는데, 이 계획이 이때 알려져 학생들의 분노를 자아내었다. 결국 학생들의 불만은 구덕관 총장 퇴진 운동으로 이어져 구덕관 총장은 결국 1994년 10월 퇴진하였다.이때 감신대 제 2캠퍼스 계획이 엎어지자 음성군은 1995년에 개혁신학교를 유치했는데 재밌게도 개혁신학교는 파행운영과 내분으로 1년만에 폐교되었다.
구덕관 총장이 퇴진한 후, 이종수 감독이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1997년, 1998년의 전국대학종합평가와 건물 확보를 위해 백주년 기념관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종전에 각종 집회가 열리고 학생들의 담소 공간이었던 아레오바고를 헐고 그 자리에 지상 7층, 지하 3층의 규모로 계획되어 1999년 완공하였다. 완공 이후 교수 연구실과 김용옥 학장 기념관에 있던 도서관 등이 백주년 기념관으로 이동했다.
이종수 감독이 약 2년의 짧은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고 1997년 염필형 교수가 총장으로 취임했다.
2000년에 김득중 교수가 총장으로 취임했다. 2003년에 웰치 채플을 헐고 그 자리에 웨슬리 채플을 지었다. 웨슬리 채플은 지하 1층, 지상 2층의 규모로 1,500여 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큰 규모와 현대적인 모습으로 지어졌다. 웨슬리 채플 건립 시, 웰치 채플의 역사성과 예술적 가치를 들어 학생회와 학교 사이에 큰 갈등이 있었다. 학생회는 웰치 채플을 보존하고 운동장 자리에 지을 것을 제안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었다. 웨슬리 채플이 완공된 후 같은 해부터 장천 김선도 감독의 헌금으로 새 기숙사 건축을 시작하였다.
2004년, 학과제를 폐지하고 학부제를 실시했다. 신입생은 과 배정 없이 신학부로 편성되어 2학년 때부터 신학, 기독교교육학, 종교철학 세 전공으로 나뉘는 체제로, 2004학번부터 적용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의 의견 수렴 없는 학교 측의 일방적인 실시로 또 다시 학생회와 학교가 큰 갈등을 빚었다. 그리고 학부제 실시로 인해 선후배 간의 친목 도모가 어려워지고 학우들 간 개인주의가 심화되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2004년에 김외식 교수가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비아돌로로사가 건립되고, 2005년에 주차장이 완공되었다. 또한 새 기숙사가 완공되어 '장천생활관'이라 이름 붙여졌다. 김외식 총장은 감신의 국제화를 내세워 여러 외국 학교들과 자매 결연을 맺고 외국 학생들의 교육 프로그램(International Church Leader Program, 약칭 I.C.L.P. 후에 International Graduate School of Theology, 약칭 I.G.S.T.로 개칭)을 신설하였다.
IGST는 코로나19 사태가 터지기 전까지도 아프리카 및 중국, 미얀마 등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이 있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하여 드리는 영어예배는 화·목요일에 있던 채플에 이어 제 3의 채플로 마치 대안채플과 같은 위치에 있었다.
2008년에 김홍기 교수가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2011년 여름에 김홍기 교수가 합창단과 함께 감신 발전 모금을 위하여 미국 순회 연주를 다녀왔다. 그러나 그 과정 중에 실제 모금된 금액도 없을 뿐더러 모금한 금액과 예산을 배임 및 횡령을 했다는 이유로 공청회를 열게 되었다. 공청회 이후 횡령에 대한 의혹은 벗었지만 배임에 대한 과오가 있어 김홍기 교수는 게시판에 사과문을 게재하였다.
2012년에 박종천 교수(조직신학)가 감신대 13대 총장으로 취임하였다.
2015년에는 감신사태가 벌어졌다. 송성진 교수가 K교수의 논문 표절을 제기하는 가운데 이사회에 단독으로 들어가 K교수의 승진탈락과 재임용을 탈락시키는 만용을 부렸다. 이와중에 법인처 직원K와 기독교윤리 L교수가 이사장 권력을 등에 엎고 고속 승진출처을 했다. 당시 이규학 이사장은 교수들을 줄을 세워 관리해야한다는 망언과 여자 목사들은 불독같이 생겼다는 막말출처을 해 총학생회와 총여학생회는 법인처를 점거하고 농성했다. 이때 이규학이사장 퇴진요구를 했다.
2016년, 13대 총장이었던 박종천 교수의 임기가 만료되었으나 이사회의 거듭된 파행으로 후임 총장이 선출되지 못하였다. 총장이 선출되지 못하자 교무처장인 이환진 교수가 총장 직무대행을 맡았다. 이사회가 파행된 이유는 한국 감리회의 자유주의 세력과 복음주의 세력이 각자 지원하는 총장 후보가 각기 달랐고, 서로 간에 심각한 공격이 자행되어 이에 반발을 품은 일부 이사들이 총장 선출에 참석하지 않았다. 결국 몇 차례에 걸친 총장 선출은 정족수가 미달되어 선출되지 못한 것이다. W교수가 논문표절로 총장이 될 수 없어서 후보에 들지 못했다. 그런데 자유주의 세력들이 W교수를 밀어주면서 총장선출에 난항이 계속되었다. 특히 광림교회 김정석목사는 2015년 대자보를 붙이면서 이규학 이사장에게 반기를 들었고 김정석목사는 자유주의 세력을 계속 밀어주었다. 하지만 결국 W교수는 총장후보에서 논문표절 때문에 탈락했다.
2017년 10월 10일 개최된 2017년 제 10차 이사회에서 영등포중앙교회 김진두 목사가 제 14대 총장으로 선출되었고 그 다음날 임기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 이사회의 합법성에 대한 논의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이사회의 일부인 9인 이사회와 학생비상대책위원회는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12월 현재 김진두 총장은 여전히 직무를 수행 중이며 새로 보직교수도 임명하여 학교 일을 꾸려가고 있다. 또 12월 14일 열린 감신 총동문회가 개최한 2017 송년의 밤에서 김진두 총장과 학생비대위장이 감신 정상화를 위한 공동 성명서를 발표함으로써 사태가 일단락 되어 가는 것으로 보인다. 출처 ... 인줄알았으나 총장의 돌연 사임으로 학교가 다시 시끄러워졌다.출처
이런 파행이 있은 후 총장을 다시 뽑게 되었는데 이후정 총장이 당선이 되었다. 선출과정에서 감신의 역사 최초로 학생들이 직접선거를 하였다. 김진두 전 총장과 이사회가 일정부분 화해를 하였는지 현재 석좌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1] 아(펜젤러)목사라고도 불렸다.[2] 목포에서 개최되는 성경 번역자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구마가와마루 호에 탑승했다가 다른 선박과 충돌사고가 벌어져 탑승객들을 구한 뒤 미처 빠져나오지 못해 익사했다. 아펜젤러의 시신은 현재까지도 찾지 못했다.[3] 한국 최초의 외국인 2세라고는 하는데, 어디까지나 공식적으로 기록된 것을 기준으로 한다는 전제에서다. 벨테브레는 말할 것도 없고 하멜도 조선에서 체류중일 때 분명 여성들과 관계를 가졌을 것이기 때문. 하지만 '비 혼혈 2세'라면 최초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4] 장로회 → 감리회
본래 장로회 신자였으나 성장하면서 감리회로 교단을 옮겼다.[5] 이화학당과 삼일소학당의 설립자.[6] 보수주의 신학자로서 일상 생활에서도 경건주의 원리를 철저히 실천하여 "성서를 읽는 것과 기도하는 것밖에 모르는 분"이라는 평가가 남아 있다. 학생들이 변홍규를 성인이라는 뜻의 "세인트 변"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는 일화도 있다.[7] 현 대학원 건물로 쓰이는 청암기념관[8] 보수, 진보 진영을 떠나서 기독교계에서 이런 주장은 기독교의 근본을 망칠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싫어한다. 기독교계에서 극도로 경계하는 "종교다원주의"는 이런 다원구원론을 지칭한다. 극단적인 자유주의 진영의 매도와 다르게 기독교계는 종교의 공존과 상호이해를 긍정하지만 기독교의 근본을 뿌리채 흔드는 이런 주장을 극도로 싫어한다.[9] 정통주의에 가까운 근본주의이지만 세대주의적인 주장을 하기도 해서 정통주의 진영에서도 곱게보지 않는 목사이다.[10] 사실 팀킬이라고 애매한게 같은 진영으로 묶으라면 묶을 수 있지만 진보적 신학, 에큐메니컬 신학의 스펙트럼이 아주 다양하다,[11] 기독교는 초창기부터 예수만 구원자라고 설파하며 다른 사상과 변론하면서 성립한 종교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무시하고 간혹 경계해야 한다는 태도를 근본주의자로 밀어붙이는 아주 급진적인 시각도 있지만 그건 진영논리에 따른 프레임 씌우기라서 다분히 악의적인 의도가 포함되어 있어 주의해야한다. 보수주의자를 무조건 근본주의자로 밀어붙이는 것은 소위 보수진영의 다양한 스팩트럼을 무시하는 것이며 마치 분홍색, 주황색 등을 빨간색이라고 우기는 것과 같은 논리적 비약이다. 자세한건 정통주의 참조. 물론 정통주의자들이 간혹 자신들을 근본주의자로 자칭하긴 하지만 개신교 보수주의(=정통주의)자들이 말하는 근본주의는 개신교 전통과 성서의 맥락적 해석에 따른 근본을 지키자는 의미이다. 게다가 현실적으로 한국교계에서는 개신교 정통주의 = 복음주의로 받아들여진다.
본래 장로회 신자였으나 성장하면서 감리회로 교단을 옮겼다.[5] 이화학당과 삼일소학당의 설립자.[6] 보수주의 신학자로서 일상 생활에서도 경건주의 원리를 철저히 실천하여 "성서를 읽는 것과 기도하는 것밖에 모르는 분"이라는 평가가 남아 있다. 학생들이 변홍규를 성인이라는 뜻의 "세인트 변"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는 일화도 있다.[7] 현 대학원 건물로 쓰이는 청암기념관[8] 보수, 진보 진영을 떠나서 기독교계에서 이런 주장은 기독교의 근본을 망칠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싫어한다. 기독교계에서 극도로 경계하는 "종교다원주의"는 이런 다원구원론을 지칭한다. 극단적인 자유주의 진영의 매도와 다르게 기독교계는 종교의 공존과 상호이해를 긍정하지만 기독교의 근본을 뿌리채 흔드는 이런 주장을 극도로 싫어한다.[9] 정통주의에 가까운 근본주의이지만 세대주의적인 주장을 하기도 해서 정통주의 진영에서도 곱게보지 않는 목사이다.[10] 사실 팀킬이라고 애매한게 같은 진영으로 묶으라면 묶을 수 있지만 진보적 신학, 에큐메니컬 신학의 스펙트럼이 아주 다양하다,[11] 기독교는 초창기부터 예수만 구원자라고 설파하며 다른 사상과 변론하면서 성립한 종교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무시하고 간혹 경계해야 한다는 태도를 근본주의자로 밀어붙이는 아주 급진적인 시각도 있지만 그건 진영논리에 따른 프레임 씌우기라서 다분히 악의적인 의도가 포함되어 있어 주의해야한다. 보수주의자를 무조건 근본주의자로 밀어붙이는 것은 소위 보수진영의 다양한 스팩트럼을 무시하는 것이며 마치 분홍색, 주황색 등을 빨간색이라고 우기는 것과 같은 논리적 비약이다. 자세한건 정통주의 참조. 물론 정통주의자들이 간혹 자신들을 근본주의자로 자칭하긴 하지만 개신교 보수주의(=정통주의)자들이 말하는 근본주의는 개신교 전통과 성서의 맥락적 해석에 따른 근본을 지키자는 의미이다. 게다가 현실적으로 한국교계에서는 개신교 정통주의 = 복음주의로 받아들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