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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육대학교/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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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2. 순안 의명학교(1906~1937)
2.1. 양도(1937)
3. 조선합회사역자양성학교(1931~1942)
3.1. 폐교(1942)3.2. 재개교(1947)
4. 삼육신학원5. 삼육신학대학, 삼육실업초급대학6. 삼육대학7. 삼육대학교


1.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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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초대 교장 W. R. 스미스 목사의 가족사진 1913년 의명학교 시절

1906년 평안남도 순안에 W. R. 스미스 목사가 세운 의명학교라는 신학교가 모태이다. 1931년에 조선합회 신학교라는 명칭으로 동대문구 회기동시조사 자리로 이전하였고, 1942년에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되었다. 1947년에 다시 조선합회 신학교로 재건되었고, 1949년에 현 위치인 노원구 공릉2동으로 이전, 삼육신학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1954년문교부로부터 4년제 각종학교의 인가를 받았으며, 1961년에 정규 4년제 대학기관으로 승격, 교명도 삼육신학대학으로 변경되었다. 1962년에는 삼육실업초급대학을 설립, 농업과와 가정과 설립을 시작으로 타 학과의 학생을 모집하였으며 1967년에 신학대학과 실업초급대학을 통합하여 교명을 삼육대학으로 변경하였다.

1991년 교육법 개정으로 종합대학과의 구별이 사라지면서 1992년에 삼육대학교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2002년에는 교표가 현재의 마크로 변경되었다. 2006년 삼육의명대학[1]과 통합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06년에는 대학설립 100주년을 맞이하였다. 2017년 대학자율역량강화지원사업(ACE+)에 지정되었으며, 재학생 1인당 장학금 서울지역 1위를 기록하였다. (2018년 8월 공시기준 재학생 5,000명 이상 대학기준)

2. 순안 의명학교(1906~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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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초대 교장 W. R. 스미스 목사의 가족사진 공동 설립자인 사엄태(Mimi Scharffenbe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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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명학교 의명학교 1기 졸업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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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안병원 미술 수업을 받고있는 여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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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명학교 설립에 참여한 선교사들

1906년 대한제국 평안남도 순안(평양시의 행정구역)에 W. R. 스미스 목사와 사엄태(Mimi Scharffenberg) 선교사가 의명학교라는 이름의 신학교를 공동 설립한다. 의명학교 개교당시 학생수 11명이었으며, 최초의 남녀공학이었다.[2] 당시 의명학교는 순안 사역자 양성학교라고 불리기도 하였으며 삼육대학교의 모태이다.1908년에 순안병원을 설립하였다. 1913년 규모가 커져가면서 학교내 기숙사와 병원을 증축하고, 농장을 지었다. 1919년 3월경 순안에서 의명학교 학생들이 만세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당시 평안남도 장관이었던 쿠도 오에이이치(工藤英一)가 조선총독부 내무부장관 우사미 카츠오(宇佐美勝夫)에게 보내는 보고 자료에 의하면, 평남 평원군 순안에서 6일 오후 4시에 군중 약 500여 명이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때 사립 의명학교 직원생도 다수와 동교 직원급 생도 1명이 포박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3.1운동에 직접 참여했던 인물에 대한 기록은 최경선(崔景善)이 있다. 최경선은 1917년 의명학교를 5회로 졸업한 인물로, 1919년 3월 2일 거촌 안식일교회에서 500여명의 군중을 이끌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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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교장 러셀

순안양성학교(의명학교) 제2대 교장에 취임하기도 했던 러셀(Riley Russell)은 1919년 3·1운동이 한창이던 어느 날 밤 일본군의 발에 총탄을 맞은 한 청년이 순안병원으로 찾아오자 수술실로 데리고 가서 2개의 총탄을 제거하는 수술과 치료를 베풀었다. 이 일로 러셀과 11명의 병원 직원들이 일본 헌병대에 검거되었고, 러셀은 3개월간 재판을 받는 수난을 겪었다. 최종 재판은 평양 고등법원에서 진행되었는데, 일본에서 파견된 고급 판사가 심리를 담당했다. 이때 극적인 일이 있었다. 여러 번 법정에 불려가서 배심 재판을 받는 중 판사는 러셀 원장에게 “당신은 미국에서 무엇을 하던 사람이냐?”고 물었다. 러셀은 미국에서 개업의로 일하던 당시 제29대 미국 대통령 워런 G. 하딩주치의로 있었다. 러셀은 그에게서 온 편지를 주머니에서 꺼내 보이며 “북미합중국 대통령이 내 친구요”하고 대답했다. 이로 인해 해당 재판은 기각됐고, 무사히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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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과 교사들 수업중인 학생들

만세운동 이후 1920년대에는 30,000평의 부지를 소유한 대형 학교로 성장하였다.

2.1. 양도(1937)

3. 조선합회사역자양성학교(1931~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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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내 탁걸선생 밴드부

1931년 기존 의명학교의 신학과를 분리하여 현 서울시 동대문구 회기동시조사 건물 자리에 추가로 교사를 지어 확장하고 조선합회신학교라고 명명했다.

3.1. 폐교(1942)

1937년에 교명을 다시 변경하여 조선합회사역자양성학교가 되었다. 그러나 제3차 조선교육령에 의거해 폐교 되는 운명에 놓이게 된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모든 교육체제가 전시교육 체제로 전환된 1942년 3월에 사역자양성소는 제11회 졸업식을 거행한 후, 14명의 재학생들과 함께 교육을 하던 중 일본 경찰의 강압으로 5월 중순에 폐교되었다.

이때 일제가 사역자양성소를 폐교시킨 명분은 교과서와 강의가 일본어가 아닌 조선어로 이루어졌다는 것 때문이었다. 결국 조선합회사역자양성소는 제3차 조선교육령의 희생양이 되어 문을 닫게 되었다.

이 시기에 사역자양성소와 같이 폐교된 학교들은 많았다. 특별히 1943년 제4차 조선교육령을 발표하고 그 후 학도 전시동원체제 확립요강을 발표한 이후 조선총독부는 대학과 전문학교 등을 전시체제로 재편성하였는데 이때 많은 학교들이 문을 닫게 되었다.

일제는 우선 민족적인 색채가 짙은 보성전문, 연희전문, 혜화전문, 명륜전문 등 사립전문학교의 경우에 학생 모집을 정지시킨 후, 보성전문학교는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연희전문학교는 경성공업경영전문학교로 강제 재편하였으며, 혜화전문학교와 명륜전문학교는 아예 폐교시켰다. 조선합회사역자양성소의 폐교도 이런시대적 분위기 아래서 강제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재림교회 신학교의 교육사업은 1917년 9월에 순안에서 시작해 1931년 4월 서울에 정착한 이후 1942년 5월 폐교될 때까지 11회에 걸쳐 100여 명 이상의 졸업생을 배출한 후 문을 닫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교육사업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당시에 폐교된 학교들 중에는 해방 이후 회복된 학교도 있었고, 회복되지 못한 학교도 있었다.

3.2. 재개교(1947)

4. 삼육신학원

5. 삼육신학대학, 삼육실업초급대학

6. 삼육대학

7. 삼육대학교



[1] 1973년 삼육기술전문학교로 설립된 것이 모체이며, 삼육대 구내에 캠퍼스가 있었다.[2] 개교 초기에는 남학생이 대부분이었으나 여학생이 많이 늘어나면서 교실이 부족해져 새로 건물을 짓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