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29499d> 이스라엘 총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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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 총리는 임기가 단절되었다가 다시 집권해도 처음 집권했을 당시의 대수를 유지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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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29499d> 이스라엘 초대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 דוד בן-גוריון|David Ben-Gurion | |||
이름 | 한국어: 다비드 벤구리온 히브리어: דוד בן-גוריון 아랍어: دافيد بن غوريون 영어: David Ben-Gurion | ||
출생 | 1886년 10월 16일 | ||
러시아 제국 프리비슬린스키 플론스크[1] | |||
사망 | 1973년 12월 1일 (향년 87세) | ||
이스라엘 텔아비브 구 라마트간 | |||
국적 | [[러시아 제국| ]][[틀:국기| ]][[틀:국기| ]] → [[이스라엘| ]][[틀:국기| ]][[틀:국기| ]] | ||
신장 | 152cm | ||
학력 | 이스탄불 대학교 바르샤바 대학교 | ||
종교 | 무종교(무신론) | ||
직업 | 정치인 | ||
정당 | 마파이당 → 라피당 → 국민명단[2] | ||
배우자 | 파울라 벤구리온 | ||
자녀 | 3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px -11px; color: #0038B8" {{{#!folding [ 이스라엘 수반 내역 ] | <colbgcolor=#0038b8><colcolor=#ffffff> 이스라엘 초대 총리 | ||
임기 | <colbgcolor=white>1948년 5월 14일 ~ 1954년 1월 26일 | ||
후임 | 모셰 샤레트 | ||
이스라엘 초대(2기) 총리 | |||
임기 | 1955년 11월 3일 ~ 1963년 6월 26일 | ||
전임 | 모셰 샤레트 | ||
후임 | 레비 에슈콜 | ||
이스라엘 초대 국방부장관 | |||
임기 | 1948년 5월 14일 ~ 1954년 1월 26일 | ||
후임 | 핀하스 라본 | ||
이스라엘 초대(2기) 국방부장관 | |||
임기 | 1955년 2월 21일 ~ 1963년 6월 26일 | ||
전임 | 핀하스 라본 | ||
후임 | 레비 에슈콜 | ||
이스라엘 제3대 교육부장관 | |||
임기 | 1951년 5월 19일 ~ 1951년 10월 8일 | ||
전임 | 다비드 레메즈 | ||
후임 | 벤시온 디누어 | ||
이스라엘 제4대 교통안전부 장관 | |||
임기 | 1952년 8월 14일 ~ 1952년 12월 24일 | ||
전임 | 다비스 즈비 핀카스 | ||
후임 | 요세프 세르린 | ||
이스라엘 제4대 법무부 장관 | |||
임기 | 1956년 2월 13일 ~ 1956년 2월 28일 | ||
전임 | 핀하스 로젠 | ||
후임 | 핀하스 로젠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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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스라엘의 정치가이자 초대 총리, 시온주의 운동가. 1948년 5월 17일 ~ 1954년 1월 26일, 1955년 11월 3일 ~ 1963년 6월 26일에 걸쳐 총리를 지냈다. 하임 바이츠만 초대 대통령과 함께 이스라엘의 독립, 건국을 주도한 국부로 추앙받는 인물이다.바이츠만이 외교 무대에서 활약했다면, 벤구리온은 팔레스타인 현지에서 유대인들의 단합을 이끄는 역할을 했다. 건국 이전에는 바이츠만이, 건국 이후에는 벤구리온의 역할이 더욱 큰 비중을 차지했던 셈.[3]
종교는 유대교가 아닌 무신론자라고 한다. 이는 테오도르 헤르츨, 모셰 다얀, 하임 바이츠만, 골다 메이어, 이츠하크 라빈도 마찬가지였다.[4]
2. 생애
1886년, 러시아 제국 치하에 있던 폴란드의 프원스크(Płońsk)에서 태어났다. 출생 당시 이름은 다비드 그륀(David Grün).근대 시오니즘의 창시자 테오도르 헤르츨의 영향을 받았다. 1906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여 팔레스타인 노동당의 활동분자가 되었으며, 그 기관지의 편집장이 되었다. 1912년,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의 수도인 코스탄티니예로 유학했고, 거기서 성씨를 히브리어 성씨인 '벤구리온'으로 바꾼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시점에는 팔레스타인에 있었으나, 연합군에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국외로 추방되어 미국으로 건너가 시오니스트인 이크하크 벤츠비와 함께 유대인 군단을 결성하여 영국군과 함께 팔레스타인 전쟁에 종군하였다. 전후에 팔레스타인에 머물면서 노동총연합을 조직하고 스스로 서기장이 되었다. 이 시기나 이후에나 노동시온주의자, 즉 사회주의자였기 때문에 레닌과도 안면이 있었다. 단, 노동시온주의 내 우파[5]였기 때문에 유대인들 중심의 조직을 인정치 않는 공산주의와는 사이가 좋지만은 않았다. 1933년 국제 시오니즘의 최고 감독기관인 시오니즘 집행위원회(Zionist Executive)에 들어가 2년 후에는 위원장이 되었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을 선포하는 벤 구리온. 뒤쪽에 걸려있는 그림은 19세기 말 시오니즘의 주창자 테오도르 헤르츨의 초상화.
1948년 5월, 이스라엘 공화국 성립과 함께 총리가 되어 1953년까지 그 지위에 있었으며, 초대 국방장관도 겸하였다. 1955년과 1963년에 다시 총리직을 지냈다. 이스라엘 노동자당의 전신쯤 되는 이스라엘 영토 노동자당(줄여서 마파이Mapai)이라는 당도 창당했다. 건국 초기에는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라브렌티 베리야의 도움으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무기를 지원받고 골다 메이어를 주소련 대사로 파견하는 등 소련과 친밀했으나, 정작 이후 제3세계 진영으로 돌아섰다가 친서방 노선을 채택했다.
제1차 중동전쟁 당시 남부 전선을 시찰중인 벤구리온 총리. 출처. 참고로 바로 왼쪽에 서 있는 사람은 당시 현장 중대장으로, 훗날 이스라엘군 총참모장과 총리도 역임한 이츠하크 라빈 대위다.
노동당의 대권을 레비 에슈콜에게 빼앗긴 후 총리에서 물러나 평생 자신이 이끌었던 노동당에서 탈당해서 새 정당을 차렸다. 다시 총리직을 쟁취하기 위해서 마지막까지 정치적 음모를 꾸몄으며 이 과정에서 놀랍게도 총리 시절 자신의 최대 정적이었던 메나헴 베긴과 연합하여 에슈콜 총리의 하야를 압박하였다. 하지만 에슈콜이 총리에서 물러나지 못하겠다고 버티고 골다 메이어를 비롯한 노동당 중진들이 벤구리온 대세론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에슈콜이 총리 겸 국방장관 자리 중 국방장관에서 하야하여 벤구리온을 존중하는 모셰 다얀을 새 국방장관으로 임명하는 선에서 합의하였다.
이후 6일 전쟁의 개전에 격렬히 반대하면서 프랑스와 미국에게 모두 버림받을 것이라고 두려워하였으나 전설적 승리를 거둔 후에는 엄청나게 기뻐했다.
3. 논란
3.1. 아랍인들에 대한 차별
지금도 이스라엘에선 건국의 아버지로 여전히 칭송받지만, 세파르딤, 미즈라힘, 아랍인을 싫어했는지 차별적인 발언을 남겨 비판받기도 한다.[6]가령 이스라엘 아랍인들을 가리켜 '제5열'[7]이라 불렀다든지, "모로코와 이라크, 예멘에서 온 유대인들은 아랍인의 문화를 그대로 갖고 있다. 나는 아랍 문화를 싫어한다. 그들도 탐탁지 않다"고 말하는 등 공공연히 이들을 차별했다.
하지만 아랍인과의 투쟁을 통해 나라를 세우고 아랍 국가들과 상시 전쟁을 벌였던 이스라엘의 특성상 벤구리온이 아주 특이한 것도, 또한 지나치게 부당하다고도 보긴 힘들다. 아랍인과 아랍 문화를 경멸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를 모색했던 골다 메이어처럼, 벤구리온도 아랍인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평화를 성취하려고 노력한 인물이었다. 실제로 벤구리온은 뉴욕타임즈와 가진 인터뷰에서 1967년 이전 국경 즉 6일 전쟁 전의 국경으로 돌아가 점령지를 반환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여기서도 동예루살렘과 골란 고원만큼은 제외했다. 동예루살렘은 정치적으로 중요하고, 골란 고원은 이스라엘의 안보에 핵심적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스라엘의 미래를 생각할 때, 단지 나는 6일 전쟁 전의 나라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동예루살렘과 골란 지역을 제외한 모든 점령지역을 반환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문제를 놓고 협상을 해야 한다...
(중략)
방위에 관해서 보면, 군사적으로 방위할 수 있는 국경선은 그나마 소망스러운 것에 불과하겠지만 그 자체가 우리의 미래를 보장해 줄 수는 없다. 우리 국민의 일부는 아직도 이러한 교훈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아랍인 이웃과의 '진정한' 평화, 상호 존중과 심지어 애정, 즉 가능하다면 아랍과 이스라엘 간의 동맹만이 우리의 유일하고 '진정한' 방위이다.(후략)
다비드 벤구리온
(중략)
방위에 관해서 보면, 군사적으로 방위할 수 있는 국경선은 그나마 소망스러운 것에 불과하겠지만 그 자체가 우리의 미래를 보장해 줄 수는 없다. 우리 국민의 일부는 아직도 이러한 교훈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아랍인 이웃과의 '진정한' 평화, 상호 존중과 심지어 애정, 즉 가능하다면 아랍과 이스라엘 간의 동맹만이 우리의 유일하고 '진정한' 방위이다.(후략)
다비드 벤구리온
3.2. 전쟁 범죄 실체, 사실상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 논란
이스라엘 독립 전쟁 당시 벤 구리온이 팔레스타인 민간인에 대한 인종청소를 지시하였는지의 여부는 아직도 논란의 대상이다. 벤 구리온이 인종 청소를 지시했다는 심증은 있고, 실제로 팔레스타인 내에서 일부 학살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으며 대부분의 팔레스타인 아랍 주민들이 고향을 떠나 난민이 되었다. 이스라엘이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영국군이 완전 철수하며 영국의 위임통치가 공식적으로 종료되기 이전에 이미 유대인 민병대인 이르군과 슈테른갱이 벤구리온이 통솔하던 유대인 민병대인 하가나의 묵인과 지원 하에 팔레스타인 중부에 위치한 데이르 야신 마을에서 학살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데이르 야신 마을의 유지들이 당시에 이미 유대인들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아무런 대비가 되어있지 않았고 이후 들이닥친 공격대의 학살에 최소 107명의 마을 주민들이 학살되거나 처형되었다. 학살은 남녀 노소를 가리지 않고 이루어졌으며 피해자의 대부분이 비무장 민간인들이었다. 민병대 장교 한명이 학살을 중지하도록 명령한 뒤에야 포로로 잡힌 마을 사람들은 유대인 주민들의 공개적인 모욕과 욕설을 들으며 예루살렘의 아랍인 거주지역까지 강제로 걸어간 뒤 풀려날 수 있었다. 이 데이르 야신 마을 학살 사건에 대한 소식은 아랍 세계 전역에 빠르게 퍼졌고 이후 팔레스타인 북부 항구도시인 하이파가 유대인 민병대에게 점령당한 뒤에는 위임통치령 전역에서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필사적으로 탈출하기 시작했다. 이후로도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에 대한 학살과 잔학 행위는 꾸준히 빈번하게 계속되었고 1차 아랍-이스라엘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이스라엘이 점령한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 중 85%에 달하는 70만명 이상이 가자지구나 서안지구 등지로 쫓겨나 난민이 되었고 이스라엘 정부는 이들 난민의 귀환을 막기 위해 400개에서 600개에 달하는 팔레스타인 아랍 마을들을 거의 완전히 파괴하였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이런 식으로 이스라엘 점령지를 떠나서 가자지구, 요르단강 서안에 정착하게 된 난민들을 기원으로 한다.[8] [9]다만 일부 지역에 한해서만 소수의 아랍인들이 잔류를 허용받아 시민권을 부여받을 수 있었는데 이스라엘 북부 갈릴리 지역의 나사렛이나 일부 인근 마을들은 역사적으로 기독교에 있어서 중요하게 간주되던 지역이었고 기독교를 믿는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높은 비율로 거주하고 있었으며 이들이 속한 교회와 서구 국가들 또는 바티칸 등의 관계와 교류 등이 적지 않게 존재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여론에 대한 고려 등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부 마을들에 한해서는 원래 거주하던 주민들이 운좋게 추방을 면하거나 추방을 당했어도 다시 이스라엘 지역이나 원 거주지로 귀환하는 것이 허용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스라엘에 잔류를 허용받은 아랍인들 중에서도 25% 정도는 자신들이 원래 살던 마을로는 돌아가지 못했고 이스라엘 영토 내에서 난민이 된 국내 실향민(internally displaced people)으로 남게 되었다.[10]
또한 이스라엘은 1966년까지 자국 내의 모든 아랍인들을 혹독한 군사 계엄령에 따라 통치하였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은 자국 내의 모든 아랍인들의 토지를 자신들 마음대로 압류하거나 아랍인들의 자본 투자와 취업과 같은 경제기반을 모두 통제할 수 있었으며 아랍인 시민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거의 완전히 차단하였다. 이 기간동안 아랍인 시민들은 허가증 없이는 여행조차 할 수 없었으며 통행 금지령과 강제 구금, 강제 추방과 같은 일들을 일상적으로 겪어야 했다. 이러한 상황은 이스라엘이 군사 계엄령을 해제하는 1966년까지 지속되었다.[11]
4. 기타
- 키가 152cm로 키가 엄청나게 작았다. 덕분에 베니토 후아레스와 엥겔베르트 돌푸스에 이어 인류 역사상 키가 가장 작은 국가 원수 3위에 올라와있다.
- 저서로 이츠하크 벤츠비와 함께 쓴 《투쟁》(전 5권, 1949)이 있다. 그의 이름은 현재 벤 구리온 국제공항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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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 폴란드 마조프셰주 프원스크[2] 마파이당, 라피당은 사회민주주의 정당이고 국민명단은 사회자유주의 중도정당이다.[3] 1949년 성립된 이스라엘의 내각제 초대 정부에서도 바이츠만은 상징적 국가원수인 대통령을 맡은 반면, 벤구리온은 실질적 정부 지도자인 총리로 선출되어 장기간 재임했다. 물론 두 사람의 선배격인 테오도르 헤르츨도 있긴 하다.[4] 이렇게 이스라엘 건국에 있어서 무신론자 민족주의자들이 많은 것은 시온주의가 종교적 이념이 아닌 세속 민족주의적 이념임을 보여준다. 물론 세속적이라고 유대교와 완전히 동떨어진 것은 아니며 수정시오니즘 등 종교적 시오니즘도 얼마든지 있다.[5] 정치적 우파라는 것이 아니라, 세력 내 우파라는 의미이다. 요즘으로 치면 사회민주주의 격. 노동시온주의 내 좌파는 시온주의가 마르크스주의의 민족해방이라고 믿는 공산주의자들이었다.[6] 1936년 아랍 반란 이전까지는 다른 아랍인이 아닌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동정심은 있었다. 속으로 어떻게 생각했건 아랍인과 유대인의 공존 가능성을 말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당시 아랍민족주의자들이 나치즘에 현혹되어서 반유대주의를 보이고 아민 알후세이니에게 팔레스타인인들이 선동당하여 그들에게도 환멸감이 생긴 것이다.[7] '첩자' 또는 '스파이'를 가리키는 표현이다.[8] 영문 위키백과 출처 페이지 링크 1, 2, 3, 4, 5[9] 유진 로건, 이은정 옮김, 『아랍: 오스만 제국에서 아랍 혁명까지』 (까치글방, 2016;개정판 2022)[10] 영문 위키백과 출처 페이지 링크[11] 영문 위키백과 출처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