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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제11대 총리 아리엘 샤론 אריאל שרון|Ariel Sharon | |
이름 | 아리엘 샤론 אריאל שרון|Ariel Sharon |
출생 | 1928년 2월 27일 |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크파르 말랄 | |
사망 | 2014년 1월 11일 (향년 85세) |
이스라엘 텔아비브구 라마트간 | |
학력 |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 |
텔아비브 대학교 | |
직업 | 정치인, 군인 |
정당 | 자유당(1973-1974) 평화시온당(1977) (1977-2005) 카디마(2005-2014) |
신장 | 170cm |
배우자 | 릴리 샤론 |
자녀 | 3 |
종교 | 유대교 |
서명 | |
이스라엘 제11대 총리 | |
임기 | 2001년 3월 7일 ~ 2006년 4월 14일 |
[clearfix]
1. 개요
이스라엘의 전직 군인이자 정치인.9.11 테러 당시 이스라엘의 총리였다. 한때는 이스라엘 우익의 얼굴마담이기도 했으나 2005년 카디마 입당 이후에는 중도파에 가까운 정치인이 되었고 베냐민 네타냐후를 맹비난하기도 했다.
전시의 공적이나 국익 앞에 물러서지 않는 단호한 외교로 이스라엘 내 보수파들에게는 영웅 대접을 받고 있지만, 레바논 침공 당시의 대민 범죄에 관여함으로써 팔레스타인 및 아랍 이슬람권과의 관계를 악화시켰다는 비판도 있다.[1] 이런 관점에서 베이루트의 학살자, 반미주의의 전도사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으로도 불린다.
2. 생애
2.1. 국방장관 재직 이전
1928년 이주한 소련 출신 농민 가정에서 출생하였다.[2] 출생 당시 이름은 아리엘 샤이네르만(Ariel Scheinermann, אֲרִיאֵל שַׁיינֶרְמָן). 출생지는 팔레스타인 지구 텔아비브 근교의 유대인 협동 농장이었다고 한다.14세에 자경단 조직인 지하 유대인 방어군에 입대한다. 1948년에는 그가 속한 지하 방어군이 이스라엘 육군으로 편입되면서 제1차 중동전쟁에 청년장교로 참전, 후방에서 정보장교로 근무하였다. 1953년 헤브라이대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모르데하이 마클레프 총참모장이 아랍 국가 침투를 목적으로 창설한 제101부대의 사령관을 맡았다. 1957년~1958년 영국육군사관학교에서 유학하였고 돌아와서는 1969년까지 이스라엘 육군보병학교장을 맡았다.[3]
]
참고로 1953년 10월에 일어났던 키비야 참사 또는 키비야 제노사이드의 책임자이기도 하다[4]
제4차 중동전쟁 시절의 모습, 왼쪽은 모세 다얀 장관[5] |
이후 제3차 중동전쟁에 참전하여 아부 아게일라 전투를 압도적 승리로 이끌며 탁월한 야전 지휘관으로 명성을 떨쳤다. 다만 대담한 수준을 넘어서 거의 무모하다시피 한 기질과 명령 위반을 밥먹듯이 저지르는 성향 때문에 모세 다얀을 제외한 상관들 거의 전원과 사이가 나빴고, 그 결과 진급 길이 막혀 1973년 남부사령관 역임을 끝으로 전역했다. 이후 몇달간 리쿠드당 창당에 도움을 주면서 정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였다. 그러던 와중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하자 재소집된 샤론은 동원기갑사단을 이끌고 수에즈 운하 도하작전을 성공시켜 이스라엘의 국민영웅으로 떠올랐다.[6] 전후 전쟁영웅으로서의 명성에 힘입어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77년에도 다시 국회의원에 재선되었으며, 1977년부터 1981년까지 농업장관을 맡았다.
2.2. 각료 시절
1981년 국방장관으로 임명된 아리엘 샤론은 1982년 레바논 침공을 지휘하였다. 거기서 베이루트 등지를 폭격하고, 사브라-샤틸라 학살을 묵인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TV로 이 학살극을 지켜본 오사마 빈 라덴은 격분하여 복수를 다짐하고, 19년 후 9.11 테러를 감행한다.[7] 결국 국제적 비난을 받자[8] 민간인 학살의 책임을 지고 1983년 국방장관에서 사퇴했다. 이때 이외의 면모도 있었는데 레바논 취재 중 이스라엘 공습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던 오리아나 팔라치가 그를 만나 이스라엘군의 학살에 대해서 강력히 항의하자 철통같은 논리로 이스라엘군을 변호하다가 팔라치가 이스라엘군의 공습으로 죽은 레바논 아이들의 사진을 보여주자 몹시 부끄러운 표정이 되면서 사과하기도 했다.1984년 이스라엘 건설주택부 건설주택장관으로 임명된 샤론은 1992년까지 요르단강 서안 지구에 이스라엘 정착촌을 건설하면서 서안 지구를 건설하였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인구 우위를 통해 불안한 영토 주권을 안정화하고 분리주의를 억제하기 위한 정책이지만, 현지 거주민들에 대한 동화 노력 없이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했다는 점에서 비판도 받는다.[9]
기타 1996년에는 에너지인프라장관을, 1998년에는 외무장관을 맡았다. 이후 1999년부터는 리쿠드 당의 당수를 맡으면서, 제2차 인티파다를 조장하기도 하였다.
2000년 9월에는 예루살렘에 위치한 이슬람교의 성지 알 아크사 모스크를 방문하여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아랍인들의 격렬한 반발을 일으켰다.[10][11]
2.3. 총리 재직과 말년
2001년 2월 6일, 이스라엘의 총리로 당선되었다.
당선 직후, PLO와의 평화협상을 재개하고 평화적인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듯 했지만 9.11 테러 직후 태도를 바꿔 테러와의 전쟁에 동참했다. 그러나 얼마 뒤엔 반평생을 몸담았던 리쿠드 당을 탈퇴, 온건 성향의 신당을 창당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왔다갔다하는 행보로 볼 수도 있지만, 꼭 이스라엘이 아니더라도 자국 내 분리주의 문제를 가진 국가들에선 테러와의 전쟁이 분리주의를 탄압하는 용도로 잘만 쓰였다. 러시아의 체첸, 중국의 위구르, 동남아시아 일부 국가들의 소수민족 반군 문제가 그렇다.[12] 다만 저런 나라들과는 달리, 이스라엘에게 팔레스타인은 더 이상 때려잡기 어려울 만큼 강대한 집단이 되어 버렸다 보니 강경책을 포기한 것이다. 사실 1990~2000년대 이후 이스라엘 정계가 무력 행사 같은 강경책은 최대한 자제하고 봉쇄나 간접적 제재로 일관하는 것도, 물론 인권의식 향상 같은 측면도 있겠지만 본질적으로는 더 이상 때려잡아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명분 싸움에 들어간 것에 가깝다.[13]
2005년 평화협정에 일부 합의하면서 가자 지구에서 자국민 정착촌과 군 병력을 전부 철수시켰다. 아이러니하게도 덕분에 이후 2008-2009년 가자 전쟁 당시 이스라엘군은 가자 지구를 마음놓고 폭격할 수 있게 되었다.
요르단강 서안 지구에 장벽을 짓고 새로운 국경선에 대한, 구상을 세웠지만 2006년 1월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실현되지 못했다. 총리로서는 같은 해, 4월 14일까지 재직하였으며 8년간의 투병 끝에 2014년 1월 11일 86세로 사망하였다. 참고로 단 음식을 워낙 좋아하다보니[14] 말년에는 심각한 비만이라[15] 각종 성인병을 달고 살았다. 사망했을 때 많은 이스라엘인들이 애도하였다. 시신은 남부 네게브사막의 고향에서 먼저 세상을 떠난 그의 부인 릴리의 묘지 옆에 안장된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악마가 죽었다고 그의 죽음을 기뻐하고 환호하였다.
이슬람과 기독교인은 지옥에 갈 존재라고 대놓고 까는 말을 해서인지 팻 로버트슨 목사도 "지옥에 갈 건 바로 이 자"이라고 분노어리게 비난했으며 샤론 총리가 죽자 로버트슨은 "하느님의 심판으로 드디어 지옥에 간 샤론"이라고 기뻐하며 이스라엘에서 울컥했다.
3. 평가
이스라엘의 공식적 후견인이 미국이라, 이스라엘을 싫어하면 될 게 미국에까지 번져서 반미주의로 승화했다. 샤론은 그것을 충실히 전파하는 데 노력했다. 물론 샤론 본인은 후원국인 미국에 대해서는 굉장히 우호적이었다.[16]일단 팔레스타인에서는 평이 아주 좋지 않다. 또한 레바논에서도 1982년 당시 레바논 침공과 학살의 앙금이 있는지라 치를 떤다. 시리아, 이집트, 요르단 등 기타 아랍권 주변국들에서도 인식이 무지하게 안 좋다.
한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들에서도 상당히 곱게 보지는 않는 편인데, 레바논 침공과 9.11 테러 당시의 행보, 기타 이스라엘의 막장화 등을 보면서 이스라엘에 대한 이미지가 상당히 좋지 못한 탓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내에서는 영웅 그 자체. 우선 제4차 중동전쟁 당시 이스라엘의 승기를 확정지은 전쟁영웅이기도 하고, 애국이 주 사상인 이스라엘 국민정서 특성상 우파가 많기 때문에 샤론의 행보는 이스라엘 국민정서에 부합하는 행동이었다. 그것 때문에 인식이 좋아도 너무 좋다. 물론 하레디는 샤론 본인이 좋아하지 않았다. 걸핏하면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지않나, 가자 지구 철수 때 못 간다고 생떼를 쓰며 이주비 더 달라는 소리를 하니 도움도 안 되는 쓰레기들이라며 경멸했다.
다만, 어쨌든 자국의 지원을 받는 민병대가 샤브라•샤틸라 학살 같은 전쟁범죄를 저지르도록 조장한 행보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저항 의사가 없는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학살은 용서받을 수 없는 전쟁범죄다. 게다가 더 큰 틀에서 보면, 이스라엘이 독립 초기의 '거대한 아랍권에 탄압받는 약소국' 이미지에서 '국제 규범 따위 신경쓰지 않고 행동하는 범죄국가'로 전락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물론 이스라엘의 입지상 어쨌든 어느 정도의 강경책은 피할 수 없었겠지만, 전략적인 관점에서 봐도 저 학살극은 이스라엘에 어떠한 이익도 가져다주지 못했고 정치적 정당성만 약화시킨 악수였다.[17]
샤론도 그것 때문에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되었었지만 미국의 감싸주기 때문에 무죄 판결을 받았었다.[18] 이 때문에 레바논인들과 팔레스타인인들에게선 그야말로 천하의 개쌍놈이라 그가 뇌졸중으로 식물인간이 되다 죽었을 때 잘 죽었다며 매우 기뻐했을 정도.
총리에 재직할때 불법 선거자금 모금 의혹과 부동산 거래 비리 등 각종 스캔들에 휘말려들었지만 잘 빠져 나갔다. 하지만 장남이자 같은 리쿠드 당의 의원인 오므리 샤론이 이스라엘 기업들을 상대로 부친의 선거자금을 1300만 달러나 불법 모금하고 공문서를 위조해 허위자료를 제출하여 돈세탁을 한 혐의가 드러나 구속되면서 곤혹을 겪기도 했다. 장남 오므리는 구속되고 나서 의원에서 파면되었고 징역 9개월을 선고받았다.
헌데 2017년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현역 총리의 아들인 야이르 네타냐후가 총리 관저에서 키우는 개를 데리고 예루살렘 공원으로 산책가서 개똥을 놔두고 갔다가 한 시민에게 똥 치우라는 말에 박큐 내밀어서 엄청 욕먹자 진보 활동을 하며 반정부적인 글을 쓰며 이스라엘 정부와 갈등을 빚어온 몰라드라는 언론인이 "무직에 공직도 없는 야이르는 그저 애비가 총리라고 총리 관저에서 호의호식하고 산다. 게다가 피땀어린 국민들 세금으로 놀구먹으며 24시간 중무장한 경찰 보호받으며 사는 잘난 황태자님이시다."이라고 야이르를 까버렸다.
헌데, 야이르 네탸냐후는 왜 나만 가지고 그래? 옴리 샤론은?그놈도 나랑 똑같았고 그놈은 불법 모금으로 징역살이나 하던 놈인데? 라고 SNS으로 올려 물타기를 해버렸다. 옴리 샤론도 질세라 SNS으로 개똥 치우는 것도 못하는 주제에 왜 나를 끌고 넘어지냐?라고 맞서며 서로 엄청 욕을 해대는 일이 있었다.
기타, 국제사회에서 이외의 일로 비난받았던 때는 오슬로 협정을 무시하는 행보를 보였던 일. 하지만 집권 중후반기 때 이행하긴 했다.
[1] 실제로 오사마 빈 라덴의 9.11 테러에 가장 큰 동기부여를 제공한 인물 중 하나이다.[2] 아버지는 현 벨라루스 지역의 브레스트, 어머니는 모길료프 출신이었다.[3] 참고로 당시 나이 30세였다.[4] 이 사건은 이스라엘과요르단과의 수교에 저항,유대인 모녀를 살해하자 이스라엘 방위군이 라말라현에 있던 난민촌에쳐들어가 마구잡이로 살해하여 66명의 무고한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사망하였다[5] 머리의 붕대는 타고 있던 장갑차가 포탄 구덩이에 빠지면서 입었던 부상이다.[6] 전쟁 초기 이스라엘은 이집트, 시리아의 기습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데 실패하여 큰 피해를 입었고, 한때 핵무기 사용까지 심각하게 고려했을 정도로 전황이 악화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샤론의 수에즈 운하 도하는 작전 측면의 반격을 넘어, 적 영토로의 병력 진입을 성공시킴으로써 초기의 패배를 일소할 수 있는 정치적 효과를 발휘했던 것.[7] 적어도 빈 라덴 본인의 성명문에 따르면 그렇다. 이스라엘이 아니라 엉뚱한 미국에 테러를 가한 이유는, 이스라엘이 미국의 묵인을 받아 행동한다는 아랍권의 보편적인 반미정서에서 기인한다. 실제로 아리엘 샤론의 전범재판에서 미국이 개입했다는 정황도 있고.[8] 얼마나 욕을 먹었는지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의 독재자 장 베델 보카사도 말년(1995년)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행각을 변명하기 위해 끌고 온 인물이 바로 샤론이었을 정도였다.[9] 현대 중국이 티베트•위구르 등 소수민족 거주지에 한족을 이주시키는 것과 비슷하다. 결국 영토 주권은 현지 거주민들의 정체성에서 나오고, 민족 동화에 실패한 국가가 어떻게 망하는지는 오스트리아-헝가리나 유고슬라비아의 사례를 보면 극명하다. 주류 민족과 중앙정부 입장에서 분리주의를 막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현지의 인구 구성을 뒤바꿔놓는 것이다. 다만 중국의 경우 독재국가인데다 한족이 절대다수라 그냥 이주시키는 것만으로도 손쉽게 인구 우위를 확보할 수 있다. 그래서 동화를 거부하는 위구르에선 신장 재교육 캠프처럼 가혹하게 탄압해도, 그만큼 강경하게 반발하지 않는 티베트나 내몽골, 만주 등지에선 이주정책만을 쓰는 것이다. 반면 이스라엘의 유대계는 그만큼 많지도 않고, 민주정부인데다가, 정부의 권력에 대한 도전을 넘어 아예 팔레스타인이라는 다른 국가 정체성을 가진 집단이 상대이다 보니, 정치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 더 가혹하게 행동하는 것이다.[10] 알 아크사 모스크는 과거 솔로몬 왕 시절의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던 곳이며, 이슬람교에서는 예언자 무하마드가 승천한 곳으로 메카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성지로 대접받는 장소. 그런데 샤론의 우익적 성향을 고려할 때, 당시 그의 방문은 알 아크사 모스크까지 이스라엘과 유태인들이 장악하겠다는 메시지로 해석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11] 다만 그도 "이 기회에 알 아크사 모스크를 헐어버리고 원래 있던 솔로몬 신전을 지을 거냐"는 질문에는 일언지하에 "미쳤어요?"라고 반응했다. 안 그래도 아랍권에서 미움받는 이스라엘이 이슬람의 성지이자 천년 넘은 문화유산을 부쉈다간 전 세계의 무슬림들을 적으로 돌리고 역대 가장 큰 규모의 중동전쟁을 각오해야 할텐데, 그래서야 실리 없이 고작 종교적 만족감을 얻는 대가 치고는 이스라엘에도 피해가 크다.[12] 평소에는 미국이 인권 문제로 제동을 걸어서 함부로 때려잡지 못했지만, 마침 그 미국이 테러를 절대악으로 규정하니 극단화된 분리주의 운동을 때려잡을 명분을 얻는 것이다. 비슷한 예가 도널드 트럼프 집권 이후에도 있었고.[13] 때려잡는 것이 최상의 선택지일 때 굳이 명분에 얽매여 유화책을 선택하지는 않지만, 더 이상 강경책의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면 아무리 싸우느라 서로 간의 증오가 격해졌어도 감정보단 이성적으로 물러서기도 하는 것이 현대 이스라엘의 외교 전략이다. 반대로 말하면 이스라엘에게 탄압당하는 와중에도 스스로 그런 입지를 확보한 것이 팔레스타인의 외교적 성과인 셈이고.[14] 특히 도넛을 좋아하고 즐겨먹었다.[15] 실제로 청년 시절과 말년을 비교해보면 체형이 비교가 될정도로 비만이 심각했다. 다만 청년 시절의 사진을 보면 건장한 체격이며 잘생겼다.[16] 사실 이건 이스라엘 나름의 생존법이다. 미국 내에도 민주당 소장파를 중심으로 이스라엘의 행보를 비판하고, 나아가 이스라엘의 강경책이 중동 지역에서 미국의 국익을 저해한다는 (나름 타당한) 인식이 있다. 게다가 이스라엘엔 미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스라엘은 국력으로 따지면 새발의 피도 안 되는데다 역내에 사우디, 터키, 요르단, 걸프만 국가들 같은 다른 친미 국가들도 있다 보니, 미국 입장에선 이스라엘은 카드패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아랍권의 반미정서가 확장되고 "미국은 이스라엘과 같은 팀"이라는 인식이 퍼져나가면 미국도 이스라엘을 버릴 수 없다. 예컨대 9.11 테러가 터진 이상,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이 국민정서에 반해 중동의 반이스라엘 아랍국에 접근하기는 요원하다. 한국이 주한미군을 소위 '인계철선' 삼아 미국 발을 빼지 못하도록 하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미국을 공범자로 만듦으로써 미국을 붙잡아두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 때문에 이스라엘이 오바마 행정부 당시 미국과 이란의 핵협정에도 가장 적극적으로 어깃장을 놓았던 것이다.[17] 다른 예를 보자면, 소련의 카틴 학살같은 경우 잠재적 적성국의 폴란드의 반소 인텔리들을 숙청하여 해당국의 역량을 세대 단위로 저해하겠다는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서, 중국이 티베트·위구르에서 저지르는 범죄들도, 동화를 통해 민족정체성을 말살하여 자국의 일부로 편입하겠다는 목적이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레바논에서 민간인들을 죽인다고 해서 얻을 전략적 이익은 아무것도 없으며, 이건 나치의 홀로코스트나 일제의 난징 대학살, 유고슬라비아 내전의 사라예보 포위전 당시 학살극처럼 순전히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행위이다. 굳이 따지자면 기껏해야 전술적인 측면, 즉 PLO의 잔존세력을 더 편하게 제거할 수 있었다는 정도인데, 학살당한 난민촌 사람들의 절대다수는 전투원이 아닌 민간인이었으며 이스라엘군이 어차피 더 강군인 이상 그 정도 이익을 얻자고 인권이라는 보편적인 가치를 포기했다는 멍에를 뒤집어쓰는 건 아무리 봐도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판단이다.[18] 다만 샤론 본인은 다른 유럽 국가들의 경우 본인을 감싸주지 않고 불시에 체포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엇기 때문에 유럽 국가에 대한 방문을 자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