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78787><colcolor=#ffffff> 오리아나 팔라치 Oriana Fallaci | |
출생 | 1929년 6월 29일 |
이탈리아 왕국 토스카나 피렌체 | |
사망 | 2006년 9월 14일 (향년 77세) |
이탈리아 토스카나 피렌체 | |
국적 | [[이탈리아|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피렌체 대학교 컬럼비아컬리지시카고 (문학사 / 명예박사) |
종교 | 무종교 (무신론) |
경력 | 베트남 전쟁 종군기자 중동전쟁 종군기자 헝가리 민주화 운동 종군기자 멕시코시티 대학살 종군기자 라틴아메리카 민중봉기 종군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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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리아나 팔라치(Oriana Fallaci)는 이탈리아의 언론인이다. 베트남 전쟁의 종군 특파원으로 활약했고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세계 유수 권력자들과의 인터뷰로 명성을 얻었다.2. 생애
1929년에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났으며 그녀의 타고난 성격은 베니토 무솔리니에게 대항했던 아버지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기자직에 입문하게 된 것은 16세였다.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병원 신세를 지게 되자 학교에서 자퇴하고 언론사 문을 두들겼는데 12시간 안에 나이트클럽을 취재해서 기사를 쓰라는 지시를 받고 나서 초짜치고 기사를 잘 썼던지라 그 길로 기자가 되었다. 이때는 체구가 작았기 때문에 판사에 의해 어린애는 나가 달라고 호명되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지만 위낙 기사를 잘 썼던지라 오래 지나지 않아 유명세를 날리게 되었다. 사건부 기자로 이름을 날리다가 점차 인터뷰를 맡게 되었다.
1952년에 가짜 기사를 쓰라는 압력에 맞서 대들다가 해고당하기도 했지만 얼마 안 가 다른 곳에 취직했으며 인터뷰 전문 기자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그녀는 기존의 예의 바르고 수사적인 어구로 가득했던 인터뷰 방식에서 벗어나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무례한 질문 공세를 퍼붓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 결과 그녀와 인터뷰를 했던 이들은 그들이 쓰고 있던 정치적, 사회적 가면 아래의 맨얼굴이 거침없이 까발려졌으며 그들의 치부를 공격당하는 쓰라린 고통을 맛보았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들 중에는 언변이나 술수로는 어디가서 안 밀릴 사람이 태반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 시절에는 주로 연예 기사를 썼다. 물론 연예 기사라고 해도 나름대로 퀄리티는 좋아서 잘 팔렸으며 페데리코 펠리니, 앨프리드 히치콕을 비롯한 거물들에게 특유의 공격적 인터뷰를 통하여 유명한 기사들을 많이 썼다.
1960년대 중반에 베트남 전쟁에 대해 취재했는데 편집장의 만류에도 끝내 베트남에 가면서 열정적으로 취재 활동에 나섰다. 처음에는 남베트남의 부패상과 학살을 보면서 북베트남 측을 지지하는 입장이었지만 북베트남군이 남베트남에 이런저런 개입을 해대면서 개판을 치는 모습을 보면서 남베트남이든 북베트남이든 똑같다면서 모두까기를 하는 입장이 되었다.
1968년에 멕시코시티 올림픽을 앞두고 멕시코 학생 시위를 취재하면서[1] 멕시코 당국이 비무장 시위대를 향해 강경 진압하면서 수백 명을 학살한 사건을 특종으로 보도해 세계적으로 큰 찬사를 받았다. 팔라치 본인도 이때 총알을 두 방이나 맞아 병원에 실려가는 등 죽을 경험이었다고 했으며 이후 본격적으로 권력자에 대한 인터뷰에 나섰는데 이때 남긴 수많은 에피소드들은 현재까지도 팔라치가 전설적인 기자로 기억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1969년 2월, 하노이에서 보응우옌잡 장군과 인터뷰를 하는 데 성공해 그를 프랑스적인 속물로 평가했지만 예측력은 좋다고 했다.
1972년 11월 2일에 있었던 헨리 키신저와의 인터뷰는 미국 사회에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키신저는 원래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그녀가 보응우옌잡과 인터뷰했다는 사실에 그녀와의 인터뷰를 허락했다. 하지만 키신저는 그녀를 매우 박대하면서 미소도 짓지 않고 인사 한 마디만 건넨 다음 업무에 열중했으며 문서를 다 읽고 난 후에야 그녀에게 자리를 권하며 미덥지 않은 학생을 대하는 교수같은 오만한 태도로 대했다. 그녀에게 보응우옌잡에 대한 질문을 던져 만족할 만한 답을 얻은 키신저는 그제야 본격적인 인터뷰를 허락했고 11월 4일 그녀는 백악관에서 키신저와의 2차 인터뷰를 가졌지만 10분마다 당시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의 전화를 받던 키신저는 급기야 그녀를 버리고 캘리포니아로 가 버렸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녀가 고압적이고 적대적으로 나간 키신저에게 아예 일방적으로 밀려 버린 키신저의 다 이긴 싸움인 것처럼 보였다. 겉보기에는. 하지만 그녀는 키신저의 이 고압적인 태도가 극단적인 자기방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2] 게다가 그녀는 10분마다 걸려오는 닉슨의 전화에 키신저가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포착하기도 했다. 여기서 승기를 잡은 그녀는 키신저의 권력욕과 야욕을 자극하는 질문들을 던졌다. "키신저 박사님, 권력이 얼마나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솔직히 말해 보십시오."라는 질문에 키신저는 "나에게 흥미 있는 것은 권력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나를 믿으십시오. 권력으로는 훌륭한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키신저가 조금씩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했음을 확인한 그녀는 그가 캘리포니아로 가기 직전에 "박사님께서 영화 배우처럼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계신데, 왜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대통령보다 더 많은 명성과 인기를 누리고 계시는 이유는 뭔가요?"라는 질문을 던졌는데 이 질문은 승리감에 도취된 키신저에게 완전한 자폭을 유도하고 말았다.
중요한 건 내가 항상 혼자서 행동한다는 겁니다. 미국인들은 그런 것을 아주 좋아하죠. 미국인들은 말을 타고 혼자 맨 앞에 서서 마차 행렬을 이끄는 카우보이를 좋아합니다. 혼자 말을 타고 도시와 마을로 들어오는 카우보이를 좋아해요. 그가 탄 말 외에 그의 옆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어쩌면 총도 없을지도 모르죠. 카우보이는 총을 쏘지 않으니까요. 꼭 필요한 때에 꼭 필요한 곳에 있는 것. 그것이 카우보이의 행동입니다. 간단히 말해 서부영화와 같죠.
그러자 그녀는 "박사님은 자신을 헨리 폰다처럼 생각하시는군요. 무장도 하지 않은 채 정직한 이상을 위해 맨주먹으로 싸울 준비가 된 사람. 혼자서, 용감하게."라고 빈정댔다. 이 인터뷰가 공개되자 키신저는 대통령 무시하냐, 네가 그 모든 걸 다 했냐는 등 엄청난 욕을 먹었다. 실제로 키신저의 정치적 파트너였던 닉슨은 키신저의 전화 해명을 받고도 골이 나 독대까지 거부해 버렸다. 물론 정치, 외교의 거물 중의 거물이었던 키신저 입장에서는 스스로가 해낸 성과를 생각해서 한 말이었겠지만 탁월한 현실주의자로 인정할지언정 그를 영웅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에게 그 말은 지나치게 오만한 말이었을 뿐이었다. 게다가 키신저가 결국 2인자의 입장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스스로의 처신을 잊은 발언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아무튼 그도 거물은 거물이었는지라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받아친 대목도 많았지만 팔라치는 그걸 이렇게까지 남들을 파악하려고 하면서도 스스로에게 방어적인 사람은 본 적이 없다는 말로 대차게 까 버렸다. 결국 이전까지 정치 외교의 슈퍼스타였지만 은막에 가려진 인물이었던 키신저가 스스로를 마치 영웅처럼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알려져 버리면서 키신저의 이미지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으며 본인 스스로 실패한 과거로 생각하던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도 베트남 전쟁은 실패한 전쟁이었다고 말해 버림으로써 삽질로 인정했다. 물론 베트남 전쟁을 키신저 혼자 힘으로 좌지우지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깊게 관여한 전쟁의 실책에 대해서는 피하고 싶은 게 당연지사였는데 팔라치는 그의 실책을 기어코 인정하게 만들었다. 결국 키신저는 인터뷰로 한창 진탕을 겪다 팔라치를 상대로 내가 한 말을 호도 및 조작했다며 싸움을 걸었지만 팔라치는 녹음 테이프를 들이미는 것으로 맞서면서 키신저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키신저를 고자라고 비웃은 건 덤. 에후 키신저는 본인 스스로 "오리아나 팔라치와 인터뷰한 것은 내 인생 최악의 멍청한 실수였다"라고 말할 지경이 되어 버렸지만 이는 결국 팔라치의 언론인으로서의 명성을 덧붙여 주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그녀는 키신저를 멍청하다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키신저가 멍청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히 말할 수 있지만 그를 믿는 사람들이 멍청하다는 것은 확실하다고 대답했다.
연이어 1973년 1월, 키신저를 인터뷰한 김에 남베트남 대통령 응우옌반티에우와도 인터뷰했다. 티에우는 팔라치의 요청대로 양복을 입고 나타나 아침식사를 대접하면서 팔라치를 크게 환대했고, 팔라치의 질문에 프랑스어를 섞어서 그런대로 잘 대답했고 팔라치도 그의 태도에는 예상외의 긍지가 있었다고 평가했으나, 팔라치가 캐물었던 베트콩과의 협상, 자유선거의 실시 등에 있어서 큰소리만 쳐놓고 결국 하나도 나중에 이행하지 않아서 망할만했다고 혹평을 받았다.
루홀라 호메이니와의 에피소드도 익히 알려져 있다. 호메이니와의 인터뷰는 난장판 그 자체였는데 애초에 그녀는 호메이니와 인터뷰한다는 가짜 약속을 받고 이란에 초대받았다가 사실 호메이니와 인터뷰한다는 약속이 없으면 팔라치급의 거물 기자를 초대할 수 없으리란 이란 당국에게 속아서 온 걸 알게 되고 호텔방을 점거하고 난동을 부렸다. 호메이니와 약속이 잡힌 후에도 이란에서 가장 보수적인 콤에서 이란인 통역자와 단 둘이 다니다가 물라들에게 잡혀서 경을 칠 뻔했고 물라들을 달래기 위해 통역자와 가짜 결혼식까지 올려야 했다. 대화 도중에 차도르를 찢어 버렸던 일화나 당신은 독재자가 아니냐고 대놓고 물었던 것, 반대 세력 500명을 처형한 것을 비롯하여 호메이니의 냉혹함과 잔인함에 관련된 온갖 것들을 모조리 캐물었던 것도 유명한 일화다. 그것도 그 서슬 퍼렇던 이란의 중심부 한가운데서 대놓고 했던 질문들이라 더욱 놀랍다.
흥미롭게도 호메이니는 몇몇 답변에 거부하거나 중간에 개빡쳐서 나가 버릴지언정 결국에는 다시 돌아와서 끝까지 인터뷰를 마쳤다. 정말로 총을 맞거나, 최소한 인터뷰를 거부당하고 쫓겨나지 않아도 이상할 상황에서 그 모든 것을 각오하고 온갖 질문을 던졌던 팔라치나, 극딜에 분노하면서도 결국에는 하나하나 대답을 해준 호메이니나 대단하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 중평이다. 특히 호메이니가 정치가이기 이전에 사상적으로 철저히 무장한 권위적인 종교 지도자였음을 생각하면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3]
덩샤오핑과의 인터뷰도 유명한데 그녀의 공격적인 질문에 분노한 덩샤오핑이 뺨을 갈기겠다고 화를 내자 그녀는 때릴 테면 때려도 좋고 다음 날 기사로 나갈 것이라며 조금도 지지 않고 맞섰다는 일화가 있다. 하지만 이는 와전된 것으로, 정확한 일화는 다음과 같다.
팔라치가 덩샤오핑의 76세 생일을 축하한다고 하자 덩샤오핑은 76세는 이미 시들어 가는 나이니 생일을 축하받을 만한 나이가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팔라치는 자신의 아버지 역시 76세이며 만약 자신이 아버지에게 76세는 시들어가는 나이라고 했다간 그 자리에서 아버지에게 뺨을 맞았을 것이라고 했고 덩샤오핑은 박장대소하면서 "정말로 아버지에게 그렇게 말하진 않았겠죠?"라고 되물었다고 한다. 참고로 덩샤오핑과 팔라치의 인터뷰는 팔라치가 공격적으로 마구 추궁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인터뷰인데 팔라치의 예리함보다 덩샤오핑의 노회함이 빛나는 명인터뷰라고 할 수 있다. 중국공산당도 자랑스러웠는지 나중에 출판된 덩샤오핑 문선집에 팔라치와의 대담을 포함시켰다. 다만 팔라치의 계획적인 도발적인 질문과 여기에 대한 덩샤오핑의 털털한 일부 대답들은 편집되었는데 가령 팔라치는 스탈린은 천하의 악당이었으며, 흐루쇼프의 최고의 업적은 스탈린을 격하한 것이 아니냐고 덩샤오핑을 추궁했지만 덩샤오핑은 중국공산당의 입장에서 보건데 스탈린에게 유감이 있을지언정 그가 훌륭한 지도자임은 부정할 수 없으며 흐루쇼프가 최악의 수정주의자였다고 욕한 후 어차피 서로 떠들어봤자 상대의 사상을 바꿀 수 없을 건데 믿고 싶은 대로 믿자고 계란유골스러운 대답을 했다.
하일레 셀라시에와의 인터뷰에서는 셀라시에가 가난한 사람들은 노력을 안 해서 그런 것이라며 자신은 오로지 용기와 품위 있는 사람만을 총애한다고 대답하자 분노한 팔라치는 셀라시에의 면전에서 그를 몰아내려고 쿠데타를 기도했던 멩기스투 네웨이와 저멘인 네웨이 형제야말로 용기와 품위가 있었다고 말하면서 그를 까 버렸고 격노한 셀라시에는 인터뷰 주제를 바꾸라고 6번이나 명령을 내렸다가 팔라치가 황제가 생각하는 죽음이 뭐냐고 묻자 참지 못하고 "저 년은 뭐야? 저 년이 나한테 원하는 게 뭔데? 당장 꺼져버려! 더 이상은 못 참아!"라고 격노하여 내쫓아 버렸다. 이후 에티오피아의 이탈리아 교민 사회는 공포에 질려 팔라치에게 황제가 살아 있는 동안은 다시는 에티오피아에 오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편지까지 보냈다. 그러자 팔라치는 아무래도 무솔리니에게 너무 익숙해져서 그런 모양이라고 교포들까지 까 버렸다.
1973년 무아마르 카다피와의 인터뷰에서는 장광설을 늘어놓는 카다피에게 질문에 대답이나 하라고 몇 번이나 윽박지르기도 했고 카다피에게 신을 믿느냐고 몇 번이나 추궁했다. 당황한 카다피가 당연한 것을 왜 묻냐고 하자 "대령님이 하는 걸 봐선 나는 대령님이 스스로를 신으로 착각하는 줄 알았거든요."라고 면전에서 빈정댔으며 돼지 새끼 같은 이디 아민을 리비아에 숨겨준 것이 사실이냐고 마구 추궁하여 카다피를 궁지에 몰아넣기도 했다.
그녀의 이러한 태도는 무시무시한 권력자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폴란드의 사회운동가였던 레흐 바웬사와는 만나자마자 기선 제압을 위해 스탈린과 정말로 외모가 닮은 걸 인정하냐고 돌직구를 날렸고 인터뷰 이후 바웬사를 자신이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굳게 믿는 졸렬한 파시스트라고 마구 까 버렸다. 골다 메이어와의 인터뷰 직후에는 리비아 공작원들이 팔라치와 카다피의 인터뷰 테이프를 훔쳐가기 위해 호텔을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혹시 배후에 모사드가 있지 않나 의심하여 메이어에게 다시는 자신을 볼 생각하지 말라고 강경 항의하는 전보를 보냈는데 그 전보를 받은 메이어는 큰 충격을 받고 즉시 2차 인터뷰를 요청하여 팔라치와 오해를 풀었다. 그래서인지 팔라치는 세계 언론계는 유대인들이 다 장악하고 있다고 까면서도 메이어에게는 이례적으로 온정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에 권투 헤비웨이트 챔피언인 무하마드 알리가 자신과 인터뷰할 때는 자꾸 트림을 하며 무례하게 굴었는데 격노한 팔라치는 알리가 세 번째 트림을 하는 순간 알리의 얼굴에 마이크를 집어던지며 "이런 무식한 놈이 챔피언이라니!"라며 면전에서 욕설을 퍼부었다. 이렇듯 팔라치와의 인터뷰는 제아무리 무소불위의 철권 통치를 휘두르는 지도자라도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일단 인터뷰를 하게 된 이상 치부가 드러나는 것은 피할 길이 없었다. 그런데도 팔라치의 인터뷰가 많았던 것은 그녀와 인터뷰를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전 세계적으로 인지도를 떨칠 만큼 중량감 있는 인사임을 증명하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독재자들 입장에서는 약점을 내주고 스포트라이트를 취한 셈이다.
물론 팔라치의 이런 무자비하고 거친 인터뷰 방식이 인정받기만 한 것은 아니다. 뉴욕 타임즈에서는 팔라치가 자신과의 인터뷰를 거부하는 것을 비겁한 행동으로 간주하고 이를 무기삼고 있다고 평했던 것은 팔라치의 지나친 공격성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보여주는 면이기도 했다. 언론인 로버트 쉬어는 팔라치의 인터뷰 방식을 그대로 벤치마킹해서 팔라치를 인터뷰하면서 공격했고 팔라치가 진절머리를 내면서 쉬게 해 달라고 하자 "당신은 당신의 인터뷰어들을 쉬게 해줬습니까?"라고 쏘아붙였다. 그 외에도 세계적 유명 인사가 되면서 사소한 것이라도 거슬리면 필요 이상으로 과민반응하며 갑질을 했기 때문에 "비판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 비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권력자 까는 사람이 자기가 권력에 도취되었다" 등의 비판을 받았다.
이슬람권 전체와 멕시코에 대해 편견 섞인 태도로만 일관했던 탓[4]에 이런 편견도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렇듯 팔라치의 삶과 방식에는 호불호가 극단적으로 갈렸지만 결과적으로 진실을 파고드는 그러한 태도와 결과는 많은 이들의 호응을 얻었고 그녀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주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스의 독재자 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에 맞서 싸운 독립투사였던 연인 알렉산드로스 파나굴리스와의 비극적 사랑도 유명하다. 파나굴리스가 1979년 의문사하자 팔라치는 그리스의 암살설을 주장하여 외교 마찰을 일으키기까지 했으며 기자 생활을 잠깐 접고 소설가로서 맹렬히 여러 편의 소설을 쓰기도 했다.
삶의 후반부에 접어들고 나서도 9.11 테러 이후 이슬람 세계에 대한 맹렬한 비난과 미국에 대한 옹호로 화제가 되는 등 이슈메이커로서 명성을 떨쳤다. 그러다가 앓고 있던 병이 악화되자[5] 고향 피렌체로 떠났으며 거기서 반세계화 운동에 대해 "사담 후세인을 존경하고 오사마 빈 라덴을 사랑하며 이슬람의 군사, 신정 정권에 고개를 숙이는 사람들"이라고 비판하면서 세계화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였다. 말년에 내놓은 책 '이성의 힘'은 이슬람에 대한 격렬한 비난 때문에 이탈리아 이슬람 연맹으로부터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암 투병 끝에 2006년 9월 15일 피렌체의 병원에서 삶을 마감했다.
3. 비판
팔라치 그 자신은 폭언, 욕설에 폭행을 부르는 언행을 하면서 자신에 대한 비판에 대해 소인배적으로 대해 인격적으로 흠이 많다는 평[6]이 많다. 실제로도 나중에 다른 언론인인 로버트 쉬어가 팔라치를 인터뷰하며 쉴새없이 질문을 퍼붓자 팔라치는 지쳐서 좀 쉬었다 하면 안 되냐고 했는데 쉬어는 이때 '당신은 당신의 인터뷰이들을 쉬게 해주긴 했나?'라는 말로 팔라치의 내로남불을 지적하기도 했다. 기자 정신으로 포장하려고 해도 문제인데 심지어 독재자를 인터뷰하는 와중에도 폭언과 욕설을 서슴치 않아서 본인을 포함한 여러 사람을 위험에 빠뜨릴 뻔한 적도 있었고 전반적으로 옹호하는 입장이 아닌 남이 보기엔 대책없는 면모를 보여주었다.팔라치가 인터뷰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일단 팔라치는 자기네 나라 국민이 아닌 외국인인 데다 서방세계에서 힘이 있는 나라의 국민이며 여자라서 해당 상황에서 똑같이 맞대응하거나 폭력을 쓰기에는 그 위치에 있는 주제에 여자에게 힘자랑이나 한다는 소리나 듣고 자기 체면만 상하고 별로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이 팔라치의 안전을 나름 보장해주었다.[7]
다만 그녀가 안전을 보장받았다는 것은 결과론적일 뿐이다. 만약 조금만 삐긋한다면 그녀의 인생뿐만 아니라 주변인까지 모조리 망하기 좋다. 단순히 혼자가 아닌 주변인은 물론 이탈리아 정부까지도[8] 위기에 몰아넣을 수 있기 때문에 그녀의 처세가 필요했음에도 그녀는 너무 무모했다.
냉정히 말해 그녀의 행동은 기자뿐만이 아니라 인간으로써도 실격이다. 물론 좋은 능력을 가진 기자임은 대부분의 그녀를 아는 사람이 인정하는 바이지만 사람과 대화를 할 때는 기분나쁜 말을 기분좋게 포장해서 할 줄도 알아야 한다. 직언과 폭력은 한 끗 차이지만 결과와 그 사람에게 받아들여지는 느낌은 하늘과 땅 차이다. 특히 기자들은 직업 특성상 기분나쁜 질문이나 예의에 어긋난 질문도 자주 해야 하는데 이를 잘 포장해서 “어쩔 수 없게 이런 질문을 해서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지만 혹시 간단하게라도 답해줄 수 있느냐? 곤란하시면 다시 한번 죄송하다.”라는 느낌이 나도록 질문해야만 하는데 그녀는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했다. 즉, 상대를 향한 배려가 전혀 없었다.
3.1. 비판에 대한 반론
그러나 팔라치의 이 모든 인간적 결점과 논란, 졸렬함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이룬 위업들을 무시할 수는 없다. 히틀러나 호메이니 같은 유명한 독재자나 학살자들도 실제로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났을 때는 소탈하고 인간적이었던 경우가 흔하며 반대로 옹정제 같은 위대한 황제도 실제 인간으로서는 신하에게 인격모독적인 폭언을 퍼붓는 일이 대단히 많았다. 성격적 결함과 공적인 업적을 혼동하는 것은 '위인이면 다 착한 사람일 거고 착하게 말하지 않으면 나쁜 사람이야'라는 편견에 불과하다.[9]팔라치가 여자라서 안전했다고 주장하는 것도 말도 안 된다. 애초에 팔라치는 '죽어도 내 책임이다'라는 각서까지 쓰고 베트남 전쟁까지 갔던 사람인데[10] 전쟁터에서 무슨 총과 미사일이 성별 구분해 가면서 날아온단 말인가? 오히려 여자라서 사망뿐 아니라 성폭행의 위험까지 수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감수해가며 활동했다고 보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 팔라치가 만났던 독재자들 중에는 자신에게 항거하는 여성들에 대한 성폭행을 사주한 인물들도 흔하며 당장 나무위키에도 그것에 대해 서술되어 있다.[11] 면전에서 여자라는 이유로 매너를 지킨 다음 뒤에서 공작원이나 부하들을 사주해서 위험에 빠뜨리는 행동은 흔하며 실제로 현재까지도 수많은 언론인들이 그런 이유로 신변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팔라치가 바보도 아니고 위험한 줄 모르면서 아무렇게나 행동했는데 결과적으로 운이 좋아서 살았다는 게 아니라 죽음의 위기를 여러 번 감수했으나 다행히 살아남았다고 보는 게 적절하다.[12]
팔라치의 과격한 인터뷰 스타일도 단순히 호불호가 갈릴 뿐 상종 못할 기레기로 취급받지 않는 이유가 뚜렷한데 언론 검열과 독재,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탄압이 심각하던 냉전 시대에 자신을 죽일 수도 있는 독재자들에게 목숨 내놓고 덤벼들어 인터뷰를 따내고 그들의 민낯을 폭로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학살자나 학살 의혹이 있는 사람에게 '너 학살했냐'라고 물어보는 것 자체가 극도로 치부를 찌르는 일이지만 꼭 필요한 일인데 이걸 하면서 '대답해주시면 정말 고맙겠다, 미안하다'하고 쩔쩔매야 한다는 것 자체가 언어도단이다.
4. 그녀의 말들
"나는 수천 가지 분노를 가지고 인터뷰에 임했다. 그 수천 가지 분노는 수천 개의 질문이 되어 내가 상대에게 공격을 퍼붓기 전에 먼저 나를 공격했다."
나는 이스라엘이 존재하고, 자신들을 보호하고, 자신들이 또 다시 말살되지 않도록 할 권리를 옹호한다.
(I defend Israel's right to exist, to defend themselves, to not let themselves be exterminated a second time.)
(I defend Israel's right to exist, to defend themselves, to not let themselves be exterminated a second time.)
사랑이란 고난을 겪고 그를 위해 죽음을 준비가 된 사람에게 목줄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선택한 방법으로 죽도록 해주는 것이다.
(Love isn’t putting chain on someone who wants to struggle and is ready to die for it, love is letting him die in the way he’s chosen.)
(Love isn’t putting chain on someone who wants to struggle and is ready to die for it, love is letting him die in the way he’s chosen.)
"사람이 사람을 대량으로 죽일 수 있는 자는 권력자 말고는 없다. 그들은 세상을 추악하게 만들면서도 자기를 영웅이라고 착각하고 끝없이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몬다."
살다 보면 침묵을 지키는 것이 잘못이 될 때가 있다.
(There are moments in Life when keeping silent becomes a fault)
(There are moments in Life when keeping silent becomes a fault)
배운 젊은이들 대신 우리에게는 대학 학위를 가진 당나귀들이 있다. 미래의 지도자들 대신 우리에게는 비싼 청바지를 입은 연체동물들과 스키 마스크를 쓴 가짜 혁명가들이 있다. 혹시 아는가? 이게 무슬림(모슬렘) 지도자들이 그렇게 승승장구하는 또 다른 이유일지도 모른다.
Instead of learned young people we have donkeys with University degrees. Instead of future leaders we have mollusks with expensive blue jeans and phony revolutionaries with ski masks. And do you know what? Maybe this is another reason why our Moslem invaders have such an easy game.
Instead of learned young people we have donkeys with University degrees. Instead of future leaders we have mollusks with expensive blue jeans and phony revolutionaries with ski masks. And do you know what? Maybe this is another reason why our Moslem invaders have such an easy game.
"그들(권력자들)은 대체로 교양도, 지식도, 철학도, 세계관도, 인내심도, 가정교육도, 감성도, 지성도, 윤리관도 일반인보다 더 낫지 않았다. 그들의 공통점은 단지 거대한 탐욕과, 이를 실현시키기 위한 밑도 끝도 없는 잔인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만약 신이 있어 인터뷰를 할 수 있다면 다음 질문도 준비하겠다. 죽어 없어질 생명을 만든 것을 보면 당신이 가짜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어쨌든 우리에게 무엇 때문에 죽음을 안겨 주었는가. 한번 태어난 인간이 왜 죽어야 하는가. 그러니 이 질문부터 시작하자. 왜 그렇게 했는가."
"이 시시하고 고리타분한 걸레조각을 지금 당장 벗어버리겠습니다."
1979년 콤에서의 인터뷰 중, 호메이니 면전에서 차도르를 찢어서 호메이니 발치에 집어던지면서 한 말.
1979년 콤에서의 인터뷰 중, 호메이니 면전에서 차도르를 찢어서 호메이니 발치에 집어던지면서 한 말.
[1] 당시 멕시코는 고도의 경제 성장을 이루고 있었지만 제도혁명당의 장기 집권으로 인한 우경화와 이촌향도로 인한 농촌 황폐화 등의 문제점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멕시코 일각에서 멕시코시티 올림픽에 대한 반대 여론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이 시위도 그러한 여론의 연장선에서 일어났다.[2] 팔라치는 키신저가 '권위적인 태도로 자신을 방어하는 사람'이라고 결론지었다고 한다.[3] 물론 그 키신저를 뼛속까지 탈탈 털어버 린 거물급 기자인 팔라치를 죽이거나 감금해서 박해하면 무슨 후폭풍을 맞을지 모르니 그냥 냅둔 것이기도 하다. 프랑스 파리에서 망명 생활을 해서 서구권 정세에 대해 모르지 않았던 호메이니가 이를 모를 리가 없다.[4] 실제로 팔라치는 기독교나 유대교 등 유일신 종교 자체를 싫어했고 불교를 평화의 종교라며 좋아했다. 사실 이러한 경향은 팔라치뿐만 아니라 68 운동 이후의 포스트모더니즘 성향 유럽 지식인들의 대다수가 갖고 있던 것이었다.[5] 1990년대부터 수 차례 암 수술을 받았는데 암 수술 후 의사들에게 부탁하여 절제된 종양을 달라고 한 후 종양에게 다시 내 몸에 들어오면 반드시 죽인다고 마구 저주를 퍼부었다.[6] 낚시성 기사나 정치적 편향성을 띄고 활동하는 기자는 아니었지만 인터뷰 중간에도 상대방에게 폭언 욕설을 날리는 등 정도가 지나칠 정도로 과격한 언행을 보여주었고 남이 비판을 회피하려 들면 비꼬는 등의 욕을 하는데 본인을 비판한 상대를 집요하게 비난하는 등의 이중적인 행보도 보이곤 했다.[7] 이런 배경이 있다고 그녀가 안전한 것은 결과론적 이야기일 뿐이기 때문에 이런 행동은 자살 행위나 다름 없다.[8] 당연하지만 저런 식의 인터뷰는 외교상 결례다. 기분 나쁜 말을 기분 좋게 해야지만 좋은 기자인데, 그녀는 전혀 그렇지 않았고 자기 할 말만 했다.[9] 하지만 반대로 말해서 공적인 업적을 쌓았다고 해서 성격적 결함이 무조건적으로 참작되는 것은 아니다. 비판받을 것은 비판받아야 하며, 위인이라고 해서 그의 결점까지 옹호받아야 할 이유는 하등 없다.[10] 참고로 팔라치는 베트남 전쟁 현장에 직접 가 있었던 유일한 이탈리아 기자다.[11] 루홀라 호메이니 항목 참조.[12] 실제로 골다 메이어와의 인터뷰를 위해 중동을 방문했을 때 리비아 공작원들이 그녀의 숙소까지 침입한 사례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