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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염 · 조비연 · 소의 부씨 · 정도정희 · 효애황후 · 효원소의 · 중산위희 · 효평황후98권 「원후전(元后傳)」 99권 「왕망전(王莽傳)」 왕정군 왕망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a11><tablebgcolor=#a11> ||
劉敬
생몰년도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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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중국 전한의 인물이며 본래 성은 누(婁)씨로 제나라 사람.2. 생애
전한 5년째 되는 해에 수(戍)자리를 하러 농서(隴西)로 짐수레를 끌고 있는데 당시 유방이 있던 낙양을 지나가게 되었다. 이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수레를 내려놓고 같은 제나라 출신인 우(虞)장군을 만나서 유방을 만나야겠다고 했는데, 우장군이 '양털 가죽옷을 입고 황제를 보려고?' 라고 하며 자기가 옷 한 벌 사주겠다 하니 누경이 '지금 내 옷이 비단옷이면 비단옷으로 보는 거고 베옷이면 베옷으로 보는 거지 뭘 그러냐'고 사양했다. 우장군이 그럴듯하다 싶어 유방에게 연락을 넣었다.누경을 만난 유방은 밥부터 먹이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누경은 "낙양에 도읍하려는 게 혹시 주나라를 따라하려는 거냐"고 묻고 유방이 그렇다고 대답하니 이에 누경이 본격적으로 유방에게 진언한다.
하지만 폐하께서 천하를 얻은 것은 주 왕실과 다릅니다.
주나라의 선조는 후직(后稷)인데, 요가 태(邰) 땅에 봉하여 덕을 쌓고 선을 베푼 게 10여 대에 이릅니다. 공유(公劉)는 걸을 피해 빈(豳) 땅에 살았고, 태왕(太王)은 북방 이민족이 침략해오자 빈을 떠나 말채찍에 의지해 기산(岐山)으로 왔는데 국인들이 다투어 그를 따랐습니다. 문왕이 서백이 되어 여(虞)·예(芮)의 송사를 해결하고 비로소 (천)명을 받으니, 여망(呂望)·백이가 바닷가에서 찾아와 그를 따랐습니다. 무왕이 주를 벌하자, 8백이 넘는 제후들이 약속한 것도 아닌데 맹진(孟津)에 모여, 다같이 주를 벌한다 외치니 마침내 은(殷)을 멸했습니다.
성왕이 즉위하니 주공의 무리가 보필하고, 이에 낙읍(낙양)에 성주(成周)를 세웠습니다.[1]여기가 천하의 중심지이고 사방의 제후들이 조공과 부역을 바치기에 적당한 거리였기 때문입니다. 덕이 있으면 왕 노릇 하기 쉽지만 덕이 없으면 쫄딱 망하기도 쉬운 곳이지요. 거기 머무른 건 주나라가 덕으로서 사람들을 다스리고, 험한 지세에 기대어 후세에 교만과 사치로 백성들을 학대하지 못하게 하려 한 겁니다.
주나라가 잘 나갈 때는 천하가 화합하였고, 사방 오랑캐들마저 의와 덕을 사모하여 함께 천자를 섬겼습니다. 병사 하나 주둔하거나 싸우는 일 없이 팔방의 오랑캐 모두 대국의 백성으로 복종하여 공물을 바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주나라가 쇠하여 둘로 나뉘더니[2] 천하가 입조하지 않았고 주나라도 이를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덕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형세가 쇠해졌기 때문입니다.
지금 폐하께선 풍(豐)·패(沛)에서 일어나 군사 3천 명을 쥔 뒤, 그들을 이끌고 직접 촉(蜀)·한(漢)을 석권하고 삼진을 정복하였으며, 항우와 형양(滎陽)에서 싸우고 성고(成皋)의 입구를 다투었습니다. 큰 싸움과 작은 싸움이 각각 70회·40회이니, 천하 백성들이 간과 뇌수로 거리를 적시고, 아비와 자식의 뼈가 사이좋게 들판에 버려져 있는 게 셀 수 없을 지경입니다. 울며 통곡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부상당한 이들은 아직 일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근데 성(成)·강(康)의 치세와 융성함을 비교해보겠다니, 신이 보기엔 비교 자체가 당치도 않습니다.
근데 진나라의 땅은 산이 감싸주고 하수를 두르고 있으며 사면의 요새가 견고하니, 군사가 급히 몰려와도 백만의 무리를 갖출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진나라의 터전은 물자가 풍부하고 비옥하니, 바로 하늘이 차려준 곳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폐하께서 (함곡)관으로 들어가 거기에 도읍하면, 설령 산동이 어지러워도 진나라의 옛 땅만은 온전히 챙길 수 있을 것입니다. 대저 다른 사람과 싸우면서 목을 조르고 등을 치지 않으면 완전하게 이길 수 없습니다. 지금 관에 들어가 도읍하고 진나라의 옛 땅을 차지하는 것이야말로 천하의 숨통을 쥐고 등짝을 치는 것입니다.
주나라의 선조는 후직(后稷)인데, 요가 태(邰) 땅에 봉하여 덕을 쌓고 선을 베푼 게 10여 대에 이릅니다. 공유(公劉)는 걸을 피해 빈(豳) 땅에 살았고, 태왕(太王)은 북방 이민족이 침략해오자 빈을 떠나 말채찍에 의지해 기산(岐山)으로 왔는데 국인들이 다투어 그를 따랐습니다. 문왕이 서백이 되어 여(虞)·예(芮)의 송사를 해결하고 비로소 (천)명을 받으니, 여망(呂望)·백이가 바닷가에서 찾아와 그를 따랐습니다. 무왕이 주를 벌하자, 8백이 넘는 제후들이 약속한 것도 아닌데 맹진(孟津)에 모여, 다같이 주를 벌한다 외치니 마침내 은(殷)을 멸했습니다.
성왕이 즉위하니 주공의 무리가 보필하고, 이에 낙읍(낙양)에 성주(成周)를 세웠습니다.[1]여기가 천하의 중심지이고 사방의 제후들이 조공과 부역을 바치기에 적당한 거리였기 때문입니다. 덕이 있으면 왕 노릇 하기 쉽지만 덕이 없으면 쫄딱 망하기도 쉬운 곳이지요. 거기 머무른 건 주나라가 덕으로서 사람들을 다스리고, 험한 지세에 기대어 후세에 교만과 사치로 백성들을 학대하지 못하게 하려 한 겁니다.
주나라가 잘 나갈 때는 천하가 화합하였고, 사방 오랑캐들마저 의와 덕을 사모하여 함께 천자를 섬겼습니다. 병사 하나 주둔하거나 싸우는 일 없이 팔방의 오랑캐 모두 대국의 백성으로 복종하여 공물을 바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주나라가 쇠하여 둘로 나뉘더니[2] 천하가 입조하지 않았고 주나라도 이를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덕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형세가 쇠해졌기 때문입니다.
지금 폐하께선 풍(豐)·패(沛)에서 일어나 군사 3천 명을 쥔 뒤, 그들을 이끌고 직접 촉(蜀)·한(漢)을 석권하고 삼진을 정복하였으며, 항우와 형양(滎陽)에서 싸우고 성고(成皋)의 입구를 다투었습니다. 큰 싸움과 작은 싸움이 각각 70회·40회이니, 천하 백성들이 간과 뇌수로 거리를 적시고, 아비와 자식의 뼈가 사이좋게 들판에 버려져 있는 게 셀 수 없을 지경입니다. 울며 통곡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부상당한 이들은 아직 일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근데 성(成)·강(康)의 치세와 융성함을 비교해보겠다니, 신이 보기엔 비교 자체가 당치도 않습니다.
근데 진나라의 땅은 산이 감싸주고 하수를 두르고 있으며 사면의 요새가 견고하니, 군사가 급히 몰려와도 백만의 무리를 갖출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진나라의 터전은 물자가 풍부하고 비옥하니, 바로 하늘이 차려준 곳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폐하께서 (함곡)관으로 들어가 거기에 도읍하면, 설령 산동이 어지러워도 진나라의 옛 땅만은 온전히 챙길 수 있을 것입니다. 대저 다른 사람과 싸우면서 목을 조르고 등을 치지 않으면 완전하게 이길 수 없습니다. 지금 관에 들어가 도읍하고 진나라의 옛 땅을 차지하는 것이야말로 천하의 숨통을 쥐고 등짝을 치는 것입니다.
황제 앞에서, 가난한 상태로 전쟁을 통해 천하를 얻었으니 전쟁 대비를 할 수 있는 곳으로 수도 옮기라는 말을, "주나라 본받을 자격은 있냐? 꿈 깨셔!" 로 크게 지른 것이다. 명망있는 선비도 아닌, 그저 군역을 하러 가던 사람이 한 말이라는 점에서 참으로 비범하다.
그러나 황제 유방은 오히려 일리가 있다고 여기고 중신들과 논의한다. 대부분 관동(함곡관 동쪽) 출신이었던 신하들은[3] "주나라는 수백 년을 갔는데 진나라는 2대로 끝난 거 못 봤냐? 낙양이 옳다"라고 한결같이 유방을 말렸는데, 고민 끝에 유방은 장량을 소환했고, 장량이 함곡관 안으로 들어가는 게 낫다 말하자 유방은 바로 관중 땅으로 천도할 것을 결정한다. 그리고 누경을 불러 봉춘군(奉春君)에 봉하고 낭중(郎中)으로 삼은 뒤, 누(婁)는 유(劉)와 통한다며 아예 유씨로 갈았다. 이렇게 하여 생긴 도시가 장안이다.
그 후 흉노의 묵돌 선우가 한을 침범하여 고제는 흉노를 친히 정벌하러 나섰는데, 이때 사전 정탐을 위해 보낸 사신들은 모두 "흉노를 정탐하니 늙어빠진 군사들이 병든 말을 타고 있었습니다. 쉽게 이길 수 있습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유경만 홀로,
"두 나라가 서로 전쟁을 한다면, 마땅히 자신들의 장점을 부풀려 보여주는 법입니다. 그런데 오늘 신이 가보니 보이는 것이라고는 비루먹은 가축과 노약자들 뿐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단점을 일부러 보여주어 우리 한군을 유인하여 매복전으로 승리를 취하려는 기병계(奇兵計)입니다."
하지만 유경이 그 말을 하였을 때는 이미 전한의 군대가 움직이고 있던 참이었고, 출전하는 와중에 재수없는 소리를 한다고 여긴 고제는 유경에게 "이 제나라의 포로놈이 주둥이 좀 놀려서 출세하더니 헛소리를 지껄여 나랏일을 방해하는구나!"라고 욕을 퍼부어댔다. 졸지에 포로 취급당한 제나라 백성들은 뭔 죄인지. 그리고 돌아와서 손봐줄 요량이었는지, 유경에게 족쇄와 수갑을 채워서 광무(廣武)에 가둬두고 말았다.하지만…
유경의 걱정대로 고제를 포함한 전한 군대는 흉노에게 포위되어 전멸당할 위기에 빠졌고, 공주를 묵돌에게 시집보내고 막대한 조공을 바치는 조건으로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백등산 포위전 문서 참조.
돌아온 고제는 유경을 석방하고 복직시킨 후 대책을 물었고, 유경은 "천하가 평정되었지만 사람들이 지쳐 우리는 저들을 무력으로 물리칠 수 없다. 당장 계획을 세우더라도 폐하의 대에서 결실을 맺을 수는 없겠지만, 묵돌에게 황실의 공주를 보내 그의 후손으로 하여금 스스로 황실을 집안 어른으로 여기게 만들고, 재물로 다독이며 말 잘하는 사람을 수시로 파견해 예의를 가르침으로써 통째로 흡수하자"는
유방은 유경의 이러한 계책에 대해 "좋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여후(呂后)는 밤낮으로 울면서 유방을 설득했다. 아무리 대국적인 결정이라고 해도 여후가 이렇게까지 하자 유방도 차마 진짜 딸을 보내지는 못하고, 결국 다른 여자[4]를 데려와 공주라고 속이고, 유경을 통해 선우에게 보내 혼인을 하게 하면서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5] 이 때부터 전한은 매년마다 흉노에게 무명, 비단, 술, 곡식 등을 보내주기로 했다. 결국 유경의 대전략은 시작부터 엇나가버렸고, 결국 그의 의도와는 달리 흉노와의 관계는 마땅히 개선되지 않다가 결국 한무제가 원정군을 파견해 두들기고나서야 겨우 어느 정도 기를 꺾어놓을 수 있었다. 그로 인해 나라에 가해진 부담을 생각하면 유방과 유경의 입장에선 씁쓸한 결말인 셈. 장오와 노원공주 입장에서 생각하면 아무리 그래도 너무한다 싶었겠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유경의 진언을 따름으로써 전한은 흉노를 정벌할 만큼 국력을 회복할 시간을 벌었다고 볼 수 있다. 경제적인 부담이야 있었지만 결국 한무제가 흉노를 정벌할 때까지 흉노의 발을 묶어둔 셈이다. 마냥 실패한 계책으로 보기는 어렵다.
화친 이후 유방은 유경의 제안에 따라 수도인 장안이 있는 관중 지역으로 인구 10만을 이주시켰다. 하지만 화친에도 불구하고 한신, 왕황, 조리 등은 흉노의 장수가 되어 수시로 전한을 공격하였다. 그 후의 행적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여후의 끔찍한 친족 사랑과, 진평이 번쾌를 건드렸다는 이유로 여수에게 시달리며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아마도 곱게 지내진 못했을 듯 하다.
사마천은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서, "강성한 족속들을 멀리 옮기고 관중에 도읍을 정하였으며 흉노와 평화조약을 맺었다(徙彊族,都關中,和約匈奴;明朝廷禮,次宗廟儀法. 作劉敬叔孫通列傳第三十九)."라고 유경의 업적을 열전에 남긴 까닭을 밝혔다.
[1] 실제로는 주나라도 기원전 770년 이전에는 관중에 수도가 있었다.[2] 낙양에서 천자가 다스리던 주나라 본국 말고 희성 왕족이 다스리던 주 서군과 주 동군을 의미한다. 서주는 주나라가 진나라에 망할 때 같이 망했고 동주는 주나라 멸망 7년 후 똑같이 진나라에 망한다.[3] 당장 유방부터가 장쑤성 출신이고, 당연하게도 유방의 고향 친구 및 지인들인 초창기 공신들은 다 동향 출신들이니 갑자기 당시 중국의 서쪽 끝이던 관중에 들어가라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4] 가인(家人)의 자식을 보냈다고 나오는데, 안사고는 서민의 딸을 데려다가 공주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설명했다[5] 사마광은 묵돌은 자기 아버지도 때려잡았는데, 이제 와서 장인이라고 전한을 공격 안하겠나?라고 비판했다. 물론, 이미 장오와 결혼한 노원공주를 장오에게서 빼앗아 주려고 했던 일도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깠다. 다만 유경도 묵돌의 패륜행위를 몰랐던 건 아니라서 당장 흉노를 예법으로 어떻게 해보자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