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개
은륜 부대를 기념하는 일본 군가 '달려라! 일장기의 은륜부대'(走れ!日の丸銀輪部隊)
일본 제국이 편성한 자전거 보병으로, 일본군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후 남방작전에서 빠른 진격을 위해 자전거로 편성한 부대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정식 부대 명칭이 아니고 신문이나 라디오 같은 언론에서 붙여준 별명인데, 정작 당사자인 부대원들은 엄격한 보안 검열과 정보 통제를 받고 있었던 탓에 본토에서 자신들을 가리켜 은륜 부대라고 부르는 줄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2. 꿩 대신 닭
지금도 강대국을 제외한 많은 나라의 군대가 그렇지만, 기계화 부대의 개념이 희박하던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보병 부대를 수송하기 위한 차량화 부대는 극히 드물었고, 육군 보병의 진격이란 것은 여전히 터벅터벅 걷는 도보 이동이 중심이었다. 일본 육군 수뇌부가 공격 속도가 중요한 남태평양 방면의 작전을 입안할 때, 무기와 식량은 트럭과 같은 차량으로 실어나른다지만 보병 부대를 빨리 이동시키는 방법이 마땅하지 않아 문제가 되었다. 이 걸림돌을 해결하기 위해 일본 육군은 현지에서 자전거를 징발하여 급하게 자전거 부대를 편성했다. 육군을 따라다니며 보도하던 종군기자들은 이들을 가리켜 은륜 부대(銀輪部隊)라고 표현했고, 따라서 일본 국내의 각 일간지에서 먼저 시작된 별명이다.원래 군용 자전거라고 하면 타이어를 제외한 전체가 위장색으로 도색되는 것이 기본이어서, 은빛 바퀴라는 표현은 바로 민간용 자전거를 그대로 징발해서 썼다는 것을 입증하는 방증이다. 육군 수뇌부가 이런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된 배경에는 그 당시에도 품질이 좋았던 일본제 자전거가 동남아시아 전역에 수출되어 있었고, 행군 도중에 고장나더라도 현지에서 부품을 구하거나 또는 본토에서 가져간 부품으로도 수리가 될 정도로 부품 조달이 쉬웠기 때문이다.
3. 부대원 편성
즉, 자전거 부대라고는 하지만 정식으로 훈련받은 대원들이 편성되는 것이 아니고, 자전거를 탈 줄 아는 장병들을 우선해 현지 주민들에게서 빼앗은 자전거를 들려주고 진격을 시킨 임기응변이 만들낸 부대인 셈이다. 어쨌든 자전거는 시속 4~6 km로 걷는 보병에 비해 시속 15~20 km 이상으로 이동을 할 수 있어 그 진격 속도는 차량화 부대에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게다가 실제로는 필리핀이나 말레이 반도에는 울창한 밀림 지대가 흔해서 정글에 빽빽이 밀생하는 고무나무와 야자수 숲 사이로 난 오솔길을 이용할 수 있어서 차량 부대보다 더 빨리 진격하는 경우도 매우 흔했다고 전해진다.4. 의외의 활약
트럭과 장갑차들은 도저히 통과할 수 없는 좁은 도로를 거침없이 달리고, 하천을 만나면 어깨 위에 둘러메고 건너면 되었다. 심지어 차량은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강을 만나더라도 강기슭의 나무를 베어 급조한 뗏목을 이용하여 즉석에서 자전거를 도수 운반하며 도하 작전을 펼쳐 건너기도 했다. 곧 자전거 부대의 능력과 가치에 대해 깨달은 군 수뇌부는 자전거에 공병들을 태워 먼저 진격시켜 연합군이 파괴해놓은 교량을 복구하거나 심지어는 수송 차량에 실린 화물을 나누어 싣고 진군을 거듭하면서 공략 작전에 큰 도움을 주었다.현대에도 무거운 책가방 같은 물건의 책 몇 권을 자전거 바구니에 담아놓고 타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 책가방을 식량과 탄약, 기타 피복 등등으로 바꿔 생각해보자. 보병 개개인이 무거운 군장을 지고 걷거나 모자란 숫자의 트럭으로 운반해야 했던 걸 자전거가 분담하게 되면서, 트럭은 그렇게 비게 된 차량에 차량으로 운반해야 하는 중화기 및 관련 탄약을 좀 더 실어나를 수 있게 되었고, 자전거 보병 개개인도 신체 전체에 걸쳐 짓눌리면서 입는 부담을 줄이고 여유 군장을 조금 더 가지고 다닐 수 있게 된다. 또한 차량 하나가 터져 중화기가 아작나더라도, 그 폭발의 영향에 휘말리지 않은 보병 개개인의 군장은 여전히 사용가능하니, 차량 파괴에 따른 위험부담도 다소 줄어든다. 사실 자전거도 결국 인력으로 움직이는 물건인만큼 추가 화물 적재량의 한계가 뚜렷해 해봐야 얼마나 더 싣겠냐 싶지만 군대란 집단이 기본적으로 수만, 수십만, 백만 규모의 거대한 규모의 사람들을 굴리다보니 병사마다 이만큼만 더 이득을 봐도 그 총 효과는 무시할수 없다.[1]
이렇게 밀림이 많은 환경에서 자전거까지 동원해 군의 원활한 이동을 지원해 일본식 기동전을 펼친 결과는 그야말로 막대했다. 본토 싸움으로 식민지에 여유를 둘 수 없었는데다 수비군이란 것도 인도인 같은 사기가 낮은 현지 인원[2]에 이전부터 배치되어온 일본군보다도 구린 무기들까지, 문제가 안 생길 수 없었다. 반면 일본군의 임기응변과 제공권 장악이 정확히 맞물린 결과, 싱가포르를 순식간에 함락하고 10년치 쌀을 비롯한 막대한 양의 군수물자를 노획해 유용하게 써먹는다. 동시에 이는 노획 물자의 맹점을 간과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1] 해당 설명 영상에서는 영국군이 당시 18kg의 군장을 진 반면 당시 일본 자전거부대는 5일치 식량을 포함한 30kg의, 현대 기준으로도 상당히 무거운 군장을 졌다고 한다. 체력적으로 거대한 부담이었을 군장을 자전거를 징발해 사용하면서 비교적 쉽게 휴대한 것.[2] 치안군 성격이 강해 이런 대규모 전면전에의 대비가 부족했던데다 1차대전 당시 영국이 독립을 약속해놓고 배신하여 의욕도 바닥이었다. 싱가포르와 홍콩에서 일본군을 가장 애먹인 상대는 영국과 프랑스의 정규 식민군이 아닌 유럽 본토나 상하이 출신의 노년의 중국계, 유럽계 의용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