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鐙子 / Stirrup
1. 개요
말 안장 밑에 달린 발 받침대. 이 등자는 말에 타기 위하여 오르거나 말 위에서 균형을 잡는 데 매우 유용한 발명품이다.[1] 등자가 발명되기 전에 승마는 평생을 갈고 닦아야 하는 고급 기술이었으므로, 흉노, 스키타이처럼 평소에도 허구헌날 말을 타는 기마민족이 아닌 이상 '기병=귀족=소수정예'가 공식처럼 통했다.[2] 등자를 이용하면서부터는 그보다 적은 훈련량으로도 기병이 될 수 있으므로 기병대의 대량 운용이 용이해졌다.2. 역사
등자의 기능과 역할을 보아 최소 안장이 먼저 발명된 후 등자가 발명되었을 것이다. 등자와는 달리 안장이 정확히 언제 어디에서 발명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이런 유용성과 간단한 디자인에도 안장이 발명된 지 무려 천 년 가까이 서구 문명에서 쓰이지 않았다.[3] 말은 기원전 4500년 무렵 길들여졌고 안장은 기원전 800년쯤 등장했다. 등자는 기원전 4세기 북방 유목민들이 처음 개발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한나라 기병들이 한쪽만 다는 등자를 사용하긴 했지만, 양쪽 다 등자를 쓰기 시작한 건 서기 2세기~3세기부터이다.[4] 그리고 유럽에는 8세기에야 등자가 전해졌는데 이 등자는 중세 유럽에서 기사들이 활약 가능하게끔 한 일등공신이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4세기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했을 것으로 보인다. 5세기의 고분인 고구려의 태왕릉, 만보정 1078호분과 신라의 황남대총에서 등자 실물이 출토되었으며, 비슷한 시기의 무용총과 쌍영총 벽화, 금령총에서 출토된 신라토기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 김해 덕산에서 출토된 가야토기 도기 기마인물형 뿔잔에서도 등자의 묘사가 분명히 보여 적어도 삼국시대 중반부터는 널리 쓰인 듯하다.
8세기쯤엔 서유럽에서 등자를 쓰기 시작했다. 등자가 도입된 덕에 기병 육성이 쉬워졌고 전투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그 덕분에 기병은 전투의 주력이 되었고 기사 계급과 봉건주의 출현에 공헌하였다.
일설에는 유럽에 등자가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훈족을 비롯한 중앙아시아계 유목민들이 400년쯤부터 이주한 뒤라고 한다. 하지만 이 설은 아직 검토 단계이고 실제론 약 700-800년대쯤은 되어서야 서유럽에 등자가 통용되었으므로 유럽의 등자 보급은 훨씬 이후일 수도 있다. 움베르토 로베르토가 주장한 바로는, 훈족 멸망 1세기 후인 558년 아바르족이 출현할 때 등자가 알려졌다고 한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궁정에 군사 동맹하려고 파견된 사절단은 "등자를 사용하여 전장에서 기동 작전에 능하고 투석기를 써서 전투에서 최고 능력을 보이는 아바르족 기동대"라고 했고, 동로마는 직접 전투했다. 다만 이때 문헌에 처음 등장했고 실용화는 훨씬 뒤일 테니, 동로마를 넘어 서로마까지 전파되기까지 상당히 시간이 걸렸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고대 로마는 등자가 없었을 때 특별한 안장을 활용했다고 한다. 또 승마술을 교습해 다리로 말의 옆구리를 졸랐다고. 등자는 물론 말을 제어하는 데 상당한 이점을 제공하지만, 가장 큰 역할은 기수의 안전과 입문자의 진입장벽을 떨어뜨리는 역할이다. 고대에 기병입네 하고 명함을 내밀 정도로 말에 익숙해지고 나면 등자가 없다 하여 전투력이 눈에 띄게 떨어지진 않았으리라 추측한다고 한다. 등자가 몸을 '완벽하게' 말과 밀착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어 오늘날 우리가 기병 하면 생각하는 기병돌격 같은 것을 이루게 해준 일등공신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등자 없는 기수가 말 등에 얹힌 깃털처럼 되지는 않는 셈.
근본적으로 등자는 어디까지나 안장의 앞쪽에 위치하여 안장에 몸을 잘 밀착하게 하는 물건이다. 돌격시 충격을 받아내는 것은 안장의 역할이고, 낙마방지 위주였던 고대 안장에서 등자가 생김으로써 충격력 강화에 특화된 중근세 안장이 나온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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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등자 논쟁
등자의 도입과 기사 계급의 출현이 얼마나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는 논란이 있다. 등자가 봉건주의 출현을 초래했다는 주장은 프린스턴과 스탠퍼드의 중세학과 교수를 역임했던 역사학자 린 타운젠트 화이트 주니어가 제기했는데,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찮다. 보병에 대해 기병이 가지는 우위는 등자의 유무와 무관하게 발휘될 수 있으며 봉건주의의 출현은 시류에 불과하고, 따라서 등자가 기병 전력을 강화시켰지만 봉건주의를 낳을 정도로 대단한 영향은 주지 않았다는 견해가 있다. 이 담론을 '등자 대논쟁(Great Stirrup Controversy)'이라고 하는데, 이 논란은 의외로 심각하여 오랜 논쟁에도 뚜렷이 결론짓지 못한 상태이다.린 화이트 주니어는 등자로 인하여 기병들이 '카우치드 랜스', 즉 겨드랑이 사이에 창을 끼우고 돌격하는 것이 가능해짐에 따라 기병이 다수의 보병을 원활히 제압 가능했다지만, 등자의 발명과 카우치드 랜스의 등장 사이에 유의미한 인과관계가 있는지, 나아가 카우치드 랜스가 이전의 오버 핸드 차징[5]이나 양손으로 창을 잡고 돌격하는 방식에 비하여 보병 전열을 수월히 분쇄 가능한지도 논란의 대상이다. 가령 동방에 기사보다 천 년 전부터 존재했었던 카타프락토이의 경우 매우 강한 돌격력을 발휘하였는데,[6] 이들은 등자를 착용하지 않았다.
사실 위에서 고대 기병의 충격력이 중세 기병 못지않았다는 것 자체는 사실일지언정 그 정황이 같은 것처럼 여기는 것은 사실의 호도이다. 봉건주의의 출현이라는 개념도 봉건주의를 무엇으로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말장난의 대상이 될 수가 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기병은 고대부터 상류층이고 지배계급이었다. 왜냐하면 군마 자체가 값비싼 자산이거니와 등자와 같은 보조도구가 부족한 시절의 기마술은 오로지 순수한 허벅지의 근력으로만 말의 옆구리를 조이며 전투를 수행해야 하므로 어릴 때부터 훈련을 해야 하고 특히나 그 무거운 무장까지 걸치고 낙마하지 않으려면 허벅지만 튼튼할 게 아니라 전신이 마른 근육질이어야 하는 등 갖추어야 할 조건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나 말을 기르고자 많은 농지를 포기해야만 하는 정주사회에서 이러한 기마전투 훈련에 매진하려면 생업에 종사하지 않아도 되는 재산과 높은 사회적 지위가 필요했다.
따라서 아예 말 타는 게 생업이나 마찬가지인 유목민족이 아니고서야 기병을 대대적으로 육성하는 곳은 기동력이 꼭 필요한 곳이었다. 유목민인 스키타이나 그러한 유목민들과 싸워왔던 페르시아를 제외하면,[7] 마케도니아나 고대 로마 등에서의 기병이란 정예부대거나 일찍부터 엘리트 장교를 발굴하는 청소년사관학교에 해당하였다. 유목세계와의 접경지를 제외한 지중해 세계 일반에서는 기병이란 그 돌격력이 아무리 좋아도 그 본질은 오직 귀족만이 육성하고 부릴 수 있는 고유 특수병종이었을 뿐, 주력 병력은 중산층 중보병이 차지하였으며, 당시 토지 대부분이 삼림으로 뒤덮인 알프스 이북의 서유럽과 중부 유럽 등지의 켈트족이나 게르만족에서도 귀족과 그 가신전사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보병이었다.
이렇게 소수정예 기병을 운용하면서 중산층 중보병을 주력으로 삼던 고대 로마에 의해 통합되었던 지중해와 유럽의 시민사회는 3세기부터 한계에 봉착했다. 본래 로마군은 일부 군단으로 하여금 국경 선형방어를 담당케 하였고, 수많은 부족이 간헐적으로 침입해오던 것에 대응하여 예방전쟁에 나서거나 일부 부족을 회유하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고대 로마와의 교류로 전술을 발달시키고 부족 단위를 벗어나 연맹왕국 단계로 발전한 게르만족이 전투를 회피하면서 국경 너머 도시를 약탈하는 식으로 대응이 더 까다로워지고 거기에 더해서 사산 왕조와의 다면전선에도 노출되자, 로마군은 고정적인 국경수비·지연전 임무를 맡은 리미타네이와 기동 예비대인 코미타텐세스로 개편되었고 기병 및 승마보병을 증강시켰다. 이러한 기병력 증강은 사회적 비용의 급상승으로 이어진 데다가 게르만족도 기마전사를 육성하면서 대처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서로마 제국은 결국 현지인들이 로마화된 게르만인들을 포용하고 그들이 사회 내에서 우위에 서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해체되어 갔으며,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유지된 동로마 제국도 쇠퇴는 피할 수가 없었다.
역설적이게도 서로마 제국이 해체되고 게르만계 종족들이 지배층이 된 이후에는 이들이 옛 로마와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북쪽에서는 비기독교적인 부족들, 특히 노르드 바이킹이, 동쪽에서는 유목민족인 마자르족이, 남쪽에서는 사라센 무슬림이 침략해왔다. 이에 따라 고대 로마에서부터 이어져오던 기병 중심 군사문화로의 전환은 계속되었다.[8]
게르만족의 군사제도에 토지재산 급여를 조건으로 하는 복무 요구가 봉건제의 틀을 제공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기병으로서 기사의 부상에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했다. 은대지제도는 군사적 봉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법권이나 행정권, 특수한 전문기술직부터 토산물이나 금전 상납까지 다양한 이유에서 수여하는 것이었으며, 실제로 앵글로색슨족이나 노르드 문화권에서의 허스칼처럼 보병전사귀족이 나타나기도 했다. 유럽대륙에서 기병이 유행한 것은 기동력이 꼭 필요했던 안보환경, 사회적 분업 및 선택과 집중에 따른 것이었다. 원래 말 탈 줄 모르는 노르드 세계에서 온 노르만족이 중무장 창기병으로 거듭난 것도 이러한 풍토 덕분이었다. 등자는 이러한 상황에서 기병 자원을 더 손쉽게 공급할 수 있도록 '촉진'해주었다는 점에서 주목받는 것이며, 이 점은 린 화이트에 대한 반론에서도 대체로 인정되는 부분이다.
10-12세기 사이 북부 프랑스에서 기사들이 두각을 나타낸 것 또한 순전히 등자로써 기병이 고도화된 덕분이라기보다는 사회 변화의 결과이다. 서프랑크 왕국에서는 10세기 동안 지속된 내부 분쟁으로 인해 성공적인 해외 원정이 불가능했고,[9] 외드 왕(888-898)의 치세 이후 바이킹은 거의 위협이 되지 않아 왕국의 방어를 명분으로 귀족들이 왕권 아래 결집하도록 강요할 수도 없었다. 결국 왕실의 재정이 고갈되자 영주들은 왕의 궁정에 자주 드나들 이유를 찾지 못했다. 자원이 매우 제한적인 왕실은 그들에게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고, 마침 온난기가 시작되고 농업 기술의 혁신이 이루어지면서 영주들은 대신 영지 경영에 집중하게 되었다. 삼포식 윤작 체계가 널리 보급되었고, 개선된 마구는 말과 소를 이용한 쟁기질과 운송을 더욱 효과적으로 만들었으며, 개울마다 방앗간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서유럽 전역이 더욱 안정되고 부유해지면서 이제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잘 훈련된 군인들이 존재하게 되었고, 그들은 당대 사람들의, 특히 연대기나 각종 기록을 작성하는 성직자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동시에 황무지 개간으로 농지가 확대되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토지 소유권에 대한 분쟁이 급증했고, 그에 따라 기사들은 평화를 파괴하고 사회에 폭력을 퍼뜨리는 변화의 상징으로 교회의 비난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력자를 호위하는 무장 친위대는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으며 전혀 새로운 현상이 아니었다. 현실적으로 기사는 항상 존재해 왔던 권력자의 사병이자 엘리트 군인일 뿐이고, 기사 숫자의 증가와 유력자들의 사적 전쟁의 증가는 모두 경제 성장과 인구 증가의 결과물일 뿐 당대 성직자들의 주장이나 후대의 봉건제 이론처럼 기사들 때문에 사회가 군벌화되고 폭력적으로 변하고 전쟁이 급증한 것은 아니었다.
덧붙여 중세 시절 어린아이에게 승마를 가르칠 때 밧줄을 사용해 양다리를 고정하는 원시적인 등자가 종종 사용되었기도 하였는데, 이것을 등자라고 보아야 하느냐는 논란도 있다.
2.2. 유물 문서 목록
3. 창작물
3.1. 실사 매체
| | 파일:external/4.bp.blogspot.com/gladiator-2000-40-g.jpg |
| 영화 적벽대전의 한 장면. | 영화 글래디에이터 |
역사와 관련된 창작물에서 등자 사용 시기 재현 오류를 숱하게 찾아볼 수 있다. 의외로 재현 오류가 많은 것 가운데 하나이다. 구조가 단순하지만 실제로 개발된 시기는 상대적으로 매우 늦다보니 고증에 철저히 맞추려고 든다면 고대나 중세의 많은 기간들에 대해서는 쓸 수 없는 물건인데, 동양 계열이면 삼국시대 창작물에서, 서양 계열이면 고대 로마 창작물에서 오류가 잘 드러난다. 삼국지연의의 배경인 삼국시대는 첫 등자 관련 유물이 발견된 시기(손오 말기 ~ 동진 시대 사이)와 가까우므로[10] 그 유물보다 원시적인 형태의 등자가 있긴 했다고 생각해도 큰 무리가 없지만[11] 로마제국 시기는 등자 개발 시기와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 소설 눈 속의 독수리에서는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의 패배가 등자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현대 역사 연구가들은 여기에 대하며 부정적인 견해를 내비치고 있다.
하지만 실사 영상물에서 재현을 지킨답시고 등자 없이 말을 타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이것은 배우의 안전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무등자 승마는 몇 년 이상의 오랜 숙련이 필요한 고난도 기술이며, 실제로 등자가 없던 시절의 기병은 어린 시절부터 발탁되어 수십 년간 승마를 훈련해온 전문 인력이었다. 현대에는 등자가 있어도 승마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드문데, 만약 등자가 없으면 거의 못 탄다. 영화에서 말 타는 장면 하나 찍자고 무등자 승마 기술을 배우들에게 훈련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며, 무등자 승마는 사고 위험이 굉장히 큰 일이기에 안전을 고려해 시도하지 않는다. 이러한 현실적인 이유로 인해 무등자 승마를 재현하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가뜩이나 기마 전투가 등장하면 기병을 연기하는 사람들이 갑주를 두르고 창칼을 휘둘러야 하는데, 재현을 하겠다고 배우들에게 등자 없이 말을 태우고 찍으면 낙마 사고가 발생할 확률이 매우 커진다. 심지어 등자가 있는 말을 타고 연기해도 승마 연기는 배우나 스턴트맨이 낙마 부상하는 사고가 상당히 자주 일어난다.[12] 배우의 안전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일례로, 글래디에이터의 DVD에 수록된 감독 코멘터리에서 등자 없이 촬영하려 했지만 배우들도 아닌 스턴트맨들이 안전을 이유로 거절했다고 언급한다. 당연한게 영화 초반에 아예 기병대가 적군의 배후로 돌격하며 전투를 벌이기까지 하니 등자 없이 찍는 것 자체가 무리다. 이런 것 때문에 어지간히 재현 따지는 깐깐한 사람들도 등자 문제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주는 편. CG를 활용해 무등자 상태로 만드는 방법도 있지만 CG 인력 역시 고급 인력이기 때문에 자본의 투자가 필요하다. 제작진은 예산과 재현 사이에서 계속 저울질을 해야 하고, 결국 예산이 허락하지 않으면 재현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영화 트로이에서는 블록버스터 영화로서는 드물게 무등자 승마를 제대로 선보였다. 이쪽은 기원전 1200년경(추정)이 배경이라 등자가 있으면 지나치게 말이 안 되니까 이런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배우들에게 강도 높은 훈련을 시켰는지 에릭 바나 같은 유명 배우가 등자도 없는 말을 타고 격한 전투를 연기한다. 심지어 한손에는 창을 쥐고 전력으로 질주하는 장면도 나온다. 그래도 신경 조금 쓰고 살펴보면 영화 전체적으로 말을 탄 자세가 불안해 보인다.
올리버 스톤의 알렉산더 영화에서 가우가멜라 전투 장면의 헤타이로이 역들을 한 조연들과 비롯한 알렉산더 역을 한 콜린 패럴도 현실에 맞게 안장을 안 쓴 채로 질주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달리는 내내 장면들을 잘 보면 매우 불안해 보이기도 하는 데다가 가우가멜라 전투 장면 중에 베수스를 농락하고자 알렉산더 대왕이 기병을 우측으로 가다가 다시 돌아가면서 숨어있던 보병과 일부 헤타이로이들이 돌격하는 모습이 있는데, 뒤의 한 헤타이로이 조연 배우가 말의 안장을 잡고 매우 불안한 자세로 돌진하는 장면도 나온다.
아메리카 원주민이 나오는 서부영화에서는 등자는커녕 안장조차 없이 말을 타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나오기도 한다. 야만스럽거나 자연과 친화적인 모습을 보이려는 장치에 가깝지만 그들이 안장과 등자라는 걸 모르지는 않았다. 애초에 아메리카에는 유럽인 도래 이전까지 말이 없었다.[13] 아즈텍 군인들도 전부 다 보병이었고, 스페인 콩키스타도르들과 싸울 때 기동성과 충각력을 가진 기병을 상대하기 힘들어 했다.[14] 후에 아메리카를 정복한 유럽인들이 식민지를 건설 과정에서 말을 가져왔고, 당연히 등자도 같이 들어왔다. 서부극에서 숱하게 등장하는 말 타고 싸우는 미국 원주민들[15]도 당연히 스페인이 가져온 말과 등자의 영향을 받았고, 각지에서 가죽이나 천으로 만든, 아메리카에 원래 살던 사람들의 등자와 안장 유물이 숱하게 발굴되었다.
다만 실제로 안장 없이 말을 타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사진도 남아 있으니 등자가 없다고 반드시 재현 오류라는 건 아니다. 요컨대 안장 없이 타는 때도 있었겠지만 대체로 안장과 등자를 쓰는 게 일반적이었다. 말과 많이 지내는 원주민들도 등자가 발명된 후라고 해서 등자 없이 타는 때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할 수 없다. 거기다 원주민들은 아시아의 몽골처럼 말을 태어난 후나 평상시에도 많이 타고 다니고 같이 지냈을 테니 일반 기병들보다 더 숙련되고 잘 다룰 수 있었기에 안장과 등자 없이 타도 별 상관 없었을 것이고[16] 각자의 재량에 따라 서로 달랐을 것이다.
3.2. 비실사 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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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전 문제 등 현실적인 제약에서 자유로운 CGI나 그림에서는 재현에 신경 쓴다면 충분히 오류 없이 재현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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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한전쟁 중 팽성대전(기원전 205년)을 그린 삽화. 고증을 떠나 멋으로 등자를 넣은 것 같다. |
죠죠 7부에서도 나온다. 물론 작품 내용 자체가 승마 레이스 쪽이니 단순히 '등장'한 것이라면 따로 언급될 이유는 없지만 황금장방형과 관련되여 '조명'되었다.
대표적인 판타지 소설인 반지의 제왕에서 요정들은 안장과 등자 없이 말을 타고 다닌다고 한다. 원작 소설의 간달프가 언급하는데, 자신은 요정들의 승마기술을 배워서 안장과 등자 없이도 말 탈 수 있다고 한다. 반지의 제왕: 중간계 전투, 반지의 제왕: 중간계 전투 2에서도 원작 소설처럼 요정들의 기병은 안장과 등자 없이 타고 다닌다.[17] 하지만 실사 영화에서는 배우와 엑스트라, 스턴트 대역의 안전을 위해서 안장과 등자를 채우고 촬영했다. 심지어 뉴질랜드에서 채용된 승마 스턴트 대역들은 다들 농장 출신이라 평생 말을 타서 승마에 익숙했음에도 그렇다.
백련의 패왕과 성약의 발키리의 2화에서 등자를 착용한 기마부대를 본 적군이 놀라는 장면도 있는데, "말 위에서 어찌 저렇게 싸울 수 있지? 말도 안 돼."라고 언급했다.[18]
수호전에는 무장들이 송강에게 감화돼 양산박에 들어오면서 '안장을 받치고 등자를 받드는 일이라 해도 기꺼이 하겠다'라는 표현이 많이 등장한다.
고대를 배경으로 다루는 대체역사물에서는 항상 먼저 발명되는 물건 중 하나. 다른 미래 발명품들에 비해 만드는데 품은 적게 들어가면서 승마술 교습 난이도를 낮춰 기병 양성에 큰 도움을 주기 때문으로 보인다.
4. 승마 이외 분야에서
석궁의 앞부분에 달려있는 고리 같은 것도 등자라고 부른다. 화살 장전 시 시위를 당기기 쉽게끔 발을 넣고 석궁을 수평 상태로 고정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 모든 석궁에 달려있는 것은 아니며, 유럽식석궁에만 달려있다. 동아시아에서는 활대에 발을 넣고 고정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중고등학교 생물 시간에 소리를 증폭하게 하는 역할로 흔히 배우게 되는 청소골(聽小骨)은 작은 뼈 세 개로 구성되는데, 순서대로 망치뼈(Malleus), 모루뼈(Incus), 등자뼈(stapes)이다. 실제 등자와 매우 유사하게 생겼다. #
[1] 잘 상상이 안 된다면 꼬꼬마 시절 해보았을 말뚝박기를 연상해보자. 등자가 없는 상태에서 균형을 잡기는 의외로 대단히 어렵다. 다만 말에는 등자 외에도 안장과 말고삐가 추가로 달려있기에 '멈춰있는 상태'라면 말 위가 사람 등 위보다는 균형잡기가 더 쉬울 것이다.[2]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켄타우로스가 등장한 계기가 말 위에 직접 탄 기마민족을 보고 느낀 충격으로 생겼다는 가설이 있다.[3] 사실 이것은 안장 자체도 마상전투에 적합한 형태로까지 발전하는 데에 많은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최초의 안장은 그야말로 좀 편안한 방석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옛날 사람들은 왜 등자를 쓰지 않았는가? 에 대해[4]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등자 관련 유물은 손오시대의 무장 정봉의 무덤에서 나온 기마용이며, 쌍등자 유물의 경우엔 동진시기의 신하 왕이의 무덤에서 발굴된 것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5] 창을 머리 위로 들고 찍는 방식.[6] 다만 이들이 기사들을 능가하는 돌격력을 발휘했는지는 그것대로 의문스럽다. 돌격 방식의 차이도 있고 이들의 마갑과 무장은 돌격 이후 백병전에 상당한 비중을 둔다. 이것은 동로마 제국의 카타프락토이에서는 더욱 명확하게 나타나는데 이들의 주된 무장은 철퇴였고, 일부만이 기창으로 무장했다. 다만 마르켈리누스의 기록을 보면 동로마보다도 고대 시기의 파르티아와 사산조의 카타프락토이들이 로마군 중보병 2~3명을 돌격 한 번에 꿰뚫어버렸다는 기록이 나오기에 이들의 돌격력 역시 기사 못지않았음을 알 수 있다. 동로마와 같은 경우는 그저 이런 페르시아 계통 왕조들과는 다른 전술 스타일이라 봐야 할 듯.[7] 페르시아는 고대 아케메네스 왕조부터 기병 비중이 높은 나라였다. 이는 유목세계와 인접해 있는 것이 원인으로, 페르시아 왕중왕이나 사트라프와 같은 군주나 고위 귀족만이 아니라 그보다 낮은 계급의 귀족들도 기병을 양성하였다. 특히 사카족이나 다하이족 등 유목민들이 기마귀족으로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이란 7대 가문의 구성원이 되기도 하였으며, 파르티아처럼 아예 정권을 장악하기도 했다.[8] 참고로 여기에 대처하고자 이와 더불어 발달한 것이 축성인데, 결과적으로는 성주를 중심으로 한 지방분권을 유도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9] 이전 시대에 롬바르디아, 이베리아, 작센 등 카롤루스 대제가 벌인 일련의 전쟁들에서 보듯, 중세 초에는 다른 게르만 왕국이나 이교도 왕국 등을 상대로 정복과 약탈에 나서는 일이 많았다.[10] 당장 삼국지 후반부에 서진이 건국된다.[11] 상술했듯이 한나라 때 이미 한쪽을 이용하는 형태의 등자가 쓰였다.[12] 특히 전쟁 사극 같은 경우에는 말들도 놀라는 상황이 많이 생기기 때문에 낙마 사고가 더욱 잦다. 판타지이기는 하지만 반지의 제왕 실사 영화에서도 펠렌노르 평원의 전투 장면의 경우 촬영 당시 낙마사고가 일어났으나 천운으로 사람이 죽거나 다치지는 않은 일이 두고두고 회자될 정도로 승마상태에서 무언가를 한다는 행위 자체가 위험을 수반한다.[13] 북미의 야생말은 12000년전 멸종했으며, 현재 북미 땅에 사는 말은 가축이든 야생마든 전부 유럽인과 함께 건너온 구대륙 출신 말이다. 중남미도 사정은 같다.[14] 이들도 나중에 말을 집중해서 노리거나 창 끝을 겨누어 말을 놀래키고 기수가 낙마하면 곧바로 달려들어 죽이는 등의 대응법을 터득했다.[15] 대표적인 수우족과 라코타족들과 같이 기병을 쓰기로 잘 알려진 아메리카 북부 원주민 부족들.[16] 코만치족의 경우는 미국 측의 장군 윌리엄 T. 셔먼이 "저것들 너무 오래 말 타고 다니는데 이제 걷는 방법을 까먹은 건 아닐까?"라고 평했을 정도로 말을 잘 다루었다.[17] 인게임에서 요정 진영은 궁수 위주라 기병은 거의 견제나 기습용으로 쓰이지 대체로 허약하다.[18] 이 장면 때문에 한동안 이세계물의 바보 만들기 클리셰냐 아니냐의 논쟁이 있었다. ## 다만 작품에 등장하는 위그드라실은 전체적인 배경이 청동기 문명에 가까운 데다 등자가 없어서 전차를 운용한다. 등자는 철기 시대인 기원후 3세기에 등장한 물건이니 바보 만들기로 보기에는 곤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