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鐙子 / Stirrup
1. 개요
말 안장 밑에 달린 발 받침대. 이 등자는 말에 오르거나 말 위에서 균형을 잡는 데 매우 유용한 발명품이다.[1] 등자가 발명되기 전에 승마는 평생을 갈고 닦아야 하는 고급 기술이었으므로, 스키타이처럼 평소에도 허구헌날 말을 타는 기마민족이 아닌 이상 기병=귀족=소수정예가 공식처럼 통했다. 그런데 등자를 이용하면 적은 훈련량으로도 기병이 될 수 있으므로 기병대의 대량 운용이 가능해졌다. 편자와는 다르다.2. 역사
등자의 기능과 역할을 보아 최소 안장이 먼저 발명된 후 등자가 발명되었을 것이다. 등자와는 달리 안장이 정확히 언제 어디에서 발명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이런 유용성과 간단한 디자인에도 안장이 발명된 지 무려 천 년 가까이 서구 문명에서 쓰이지 않았다.[2] 말은 기원전 4500년 무렵 길들여졌고 안장은 기원전 800년쯤 등장했다. 등자는 기원전 4세기 북방 유목민들이 처음 개발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한나라 기병들이 한쪽만 다는 등자를 사용하긴 했지만, 양쪽 다 등자를 쓰기 시작한 건 서기 2세기~3세기부터이다.[3] 그리고 유럽에는 8세기에야 등자가 전해졌는데 이 등자는 중세 유럽에서 기사들이 활약 가능하게끔 한 일등공신이라 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4세기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했을 것으로 보인다. 5세기의 고분인 고구려의 태왕릉, 만보정 1078호분과 신라의 황남대총에서 등자 실물이 출토되었으며, 비슷한 시기의 무용총과 쌍영총 벽화, 금령총에서 출토된 신라토기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 김해 덕산에서 출토된 가야토기 도기 기마인물형 뿔잔에서도 등자의 묘사가 분명히 보여 적어도 삼국시대 중반부터는 널리 쓰인 듯하다.
9세기쯤엔 서유럽에서 등자를 쓰기 시작했다. 등자가 도입된 덕에 기병 육성이 쉬워졌고 전투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그 덕분에 기병은 전투의 주력이 되었고 기사 계급과 봉건주의 출현에 공헌하였다.
일설에는 유럽에 등자가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훈족을 비롯한 중앙아시아계 유목민들이 400년쯤부터 이수한 뒤라고 한다. 하지만 이 설은 아직 검토 단계이고 실제론 약 700-800년대쯤은 되어서야 서유럽에 등자가 통용되었으므로 유럽의 등자 보급은 훨씬 이후일 수도 있다. 움베르토 로베르토가 주장한 바로는, 훈족 멸망 1세기 후인 558년 아바르족이 출현할 때 등자가 알려졌다고 한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궁정에 군사 동맹하려고 파견된 사절단은 "등자를 사용하여 전장에서 기동 작전에 능하고 투석기를 써서 전투에서 최고 능력을 보이는 아바르족 기동대"라고 했고, 동로마는 직접 전투했다. 다만 이때 문헌에 처음 등장했고 실용화는 훨씬 뒤일 테니, 동로마를 넘어 서로마까지 전파되기까지 상당히 시간이 걸렸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고대 로마는 등자가 없었을 때 특별한 안장을 활용했다고 한다. 또 승마술을 교습해 다리로 말의 옆구리를 졸랐다고. 등자는 물론 말을 제어하는 데 상당한 이점을 제공하지만, 가장 큰 역할은 기수의 안전과 입문자의 진입장벽을 떨어뜨리는 역할이다. 고대에 기병입네 하고 명함을 내밀 정도로 말에 익숙해지고 나면 등자가 없다 하여 전투력이 눈에 띄게 떨어지진 않았으리라 추측한다고 한다. 등자가 몸을 '완벽하게' 말과 밀착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어 오늘날 우리가 기병 하면 생각하는 기병돌격 같은 것을 이루게 해준 일등공신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등자 없는 기수가 말 등에 얹힌 깃털처럼 되지는 않는 셈.
애초에 등자는 안장의 앞쪽에 위치하는 물건이고 어디까지나 안장에 몸을 잘 밀착하게 하는 물건이다. 돌격시 충격을 받는건 안장의 역할이고 낙마방지 위주였던 고대 안장에서 등자가 생김으로 충격강화에 특화된 중근세 안장이 나온 셈.
황해도 평산 신라 발걸이 | 청동 옻칠 발걸이 |
3. 등자 논쟁
등자의 도입과 기사 계급의 출현이 얼마나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는 논란이 있다. 일단 등자가 봉건주의 출현을 초래했다는 주장은 프린스턴과 스탠퍼드의 중세학과 교수를 역임했던 역사학자 린 타운젠트 화이트 주니어가 제기했다. 하지만 이것에 대한 반론도 만만찮은데, 등자가 기병 전력을 강화시켰지만 봉건주의를 낳을 정도로 대단한 영향은 주지 않았다는 견해가 있다. 가령 동방에 기사보다 천 년 전에 존재했었던 카타프락토이의 경우 매우 강한 돌격력을 발휘하였는데[4] 이들은 등자를 착용하지 않았다. 따라서 보병에 대해 기병이 가지는 우위는 등자의 유무와 무관하게 발휘될 수 있으며, 봉건주의의 출현은 시류에 불과하다는 견해이다.린 화이트 주니어는 등자로 인하여 기병들이 '카우치드 랜스', 즉 겨드랑이 사이에 창을 끼우고 돌격하는 것이 가능해짐에 따라 기병이 다수의 보병을 원활히 제압 가능했다지만, 등자의 발명과 카우치드 랜스의 등장 사이에 유의미한 인과관계가 있는지, 나아가 카우치드 랜스가 이전의 오버 핸드 차징[5]이나 양손으로 창을 잡고 돌격하는 방식에 비하여 보병 전열을 수월히 분쇄 가능한지도 논란의 대상이다. 이 논란은 의외로 심각하여 뚜렷이 결론짓지 못한 상태이다. 이를 '등자 대논쟁(Great Stirrup Controversy)'이라고 한다.
사실 위에서 고대 기병의 충격력이 중세 기병 못지않았다는 것 자체는 사실일지언정 그 정황이 같은 것처럼 여기는 것은 사실의 호도이다. 봉건주의의 출현이라는 개념도 봉건주의를 무엇으로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말장난의 대상이 될 수가 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기병은 문명사회에서는 고대부터 원래 상류층이고 지배계급이었다. 왜냐하면 등자가 없는 기마술은 오로지 순수한 허벅지의 근력으로만 말의 옆구리를 조이며 전투를 수행해야 하므로 어릴 때부터 훈련을 해야 하고 특히나 그 무거운 무장까지 걸치고 낙마하지 않으려면 허벅지만 튼튼할게 아니라 전신이 마른 근육질이어야 한다. 따라서 기마전투 훈련에 매진하려면 아예 말타는게 생업이나 마찬가지인 유목민족이 아니고서야 생업에 종사하지 않아도 되는 재산과 높은 사회적 지위가 필요하다. 따라서 기병은 페르시아나 마케도니아처럼 특수부대이거나, 아니면 로마처럼 일찍부터 엘리트 장교를 발굴하는 청소년사관학교에 해당하였다. 페르시아 기병의 돌격력이 아무리 좋아도 그 본질은 오직 페르시아 왕중왕만이 육성 가능한 고유 특수병종이었을 뿐, 중세 기사처럼 보편적일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6]
이렇게 기병을 운용하면서 중산층 중보병을 주력으로 하던 고대 시민사회는 중기 게르만족이라는 복병에 부딪혀 그 한계를 드러내게 된다. 게르만족은 수렵기마민족이면서도 원래 문명인들보다 체구가 커서 보병전을 마다하지 않았지만 3세기부터는 기마전사들을 동원해 국경을 넘어 민간인 도시를 오가며 분탕질을 치고 달아나는지라 중보병군단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를 막아보려고 어떻게든 기병을 늘려보지만, 기병육성의 효율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고대 시민사회에서 기병력 증강은 즉 사회적 비효율의 급상승이고 서로마 제국은 결국 급격히 쇠퇴하다 붕괴하게 되며, 양면전쟁 때문이었다지만 동로마 제국도 쇠퇴는 피할 수가 없었다.
게르만족의 군사제도에 토지급여를 반대급부로 한 복무요구가 있었다지만 이것만으로는 봉건제도의 발흥이라고 하기에는 미약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국 게르만족 전사의 기마능력을 유지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마저도 수조권, 즉 식읍 수여 정도에 그쳤을 뿐 사법 행정권이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등자의 등장으로 원래 말을 전혀 탈 줄 몰랐던 노르만이라는 족속이 중세 중무장 창기병 즉 기사의 개념을 확립하면서 조기교육식 기마술이 효율에서 밀리게 되었고 오히려 이러한 신종 등자기병이 더 뛰어난 기마민족인 마자르족까지 격퇴하면서 변방의 루스와 동로마, 알안달루스를 제외한 유럽 전체에서 너도 나도 기사를 도입하게 되는데 문제는 기사라는 병종의 전투력이 뛰어난 만큼 그 유지비용이 미쳐 돌아갔기 때문에 기존의 토지지급제도로는 도저히 유지를 할 수가 없게 되어 지역군벌에 준하는 권력의 작위와 장원을 근간으로 하는 본격적인 중세봉건제가 시작되었다-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7]
덧붙여 중세 시절 어린아이에게 승마를 가르칠 때 밧줄을 사용해 양다리를 고정하는 원시적인 등자가 종종 사용되었기도 하였는데, 이것을 등자라고 보아야 하느냐는 논란도 있다.
4. 나무위키에 문서가 생성된 등자 유물
5. 창작물에서
파일:external/4.bp.blogspot.com/gladiator-2000-40-g.jpg | |
영화 적벽대전의 한 장면. | 영화 글래디에이터 |
역사와 관련된 창작물에서 등자 사용 시기 재현 오류를 숱하게 찾아볼 수 있다. 의외로 재현 오류가 많은 것 가운데 하나인데, 구조가 단순하지만 실제로 개발된 시기는 상대적으로 매우 늦기 때문이다. 동양 계열이면 삼국시대 창작물에서, 서양 계열이면 고대 로마 창작물에서 오류가 잘 드러난다. 삼국지연의 시대는 첫 등자 유물이 발견된 시기(서진시대)와 가까우므로[8] 그 유물보다 원시적인 형태의 등자가 있긴 했다고 생각해도 큰 무리가 없지만[9] 로마제국 시기는 등자 개발 시기와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 소설 눈 속의 독수리에서는 아드리아노플 전투의 패배가 등자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현대 역사 연구가들은 여기에 대하며 부정적인 견해를 내비치고 있다.
하지만, 실사 영상물에서 재현을 지킨답시고 등자 없이 말을 타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이것은 배우의 안전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무등자 승마는 몇 년 이상의 오랜 숙련이 필요한 고난도 기술이며, 실제로 등자가 없던 시절의 기병은 어린 시절부터 발탁되어 수십 년간 승마를 훈련해온 전문 인력이었다. 현대에는 등자가 있어도 승마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드문데, 만약 등자가 없으면 거의 못 탄다. 영화에서 말 타는 장면 찍자고 무등자 승마 기술을 배우들에게 훈련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며, 무등자 승마는 사고 위험이 굉장히 큰 일이기에 안전을 고려해 시도하지 않는다. 이러한 현실적인 이유로 인해 무등자 승마를 재현하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가뜩이나 기마 전투가 등장하면 기병을 연기하는 사람들이 갑주를 두르고 창칼을 휘둘러야 하는데, 재현을 하겠다고 배우들에게 등자 없이 말을 태우고 찍으면 낙마 사고가 발생할 확률이 매우 커진다. 심지어 등자가 있는 말을 타고 연기해도 승마 연기는 배우나 스턴트맨이 낙마 부상하는 사고가 상당히 자주 일어난다.[10] 배우의 안전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일례로, 글래디에이터의 DVD에 수록된 감독 코멘터리에서 등자 없이 촬영하려 했지만 배우들도 아닌 스턴트맨들이 안전을 이유로 거절했다고 언급한다. 당연한게 영화 초반에 아예 기병대가 적군의 배후로 돌격하며 전투를 벌이기까지 하니 등자 없이 찍는 것 자체가 무리다. 이런 것 때문에 어지간히 재현 따지는 깐깐한 사람들도 등자 문제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주는 편. CG를 활용해 무등자 상태로 만드는 방법도 있지만 CG 인력 역시 고급 인력이기 때문에 자본의 투자가 필요하다. 제작진은 예산과 재현 사이에서 계속 저울질을 해야 하고, 결국 예산이 허락하지 않으면 재현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영화 트로이에서는 블록버스터 영화로서는 드물게 무등자 승마를 제대로 선보였다. 이쪽은 기원전 1200년경(추정)이 배경이라 등자가 있으면 지나치게 말이 안 되니까 이런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배우들에게 강도 높은 훈련을 시켰는지 에릭 바나 같은 유명 배우가 등자도 없는 말을 타고 격한 전투를 연기한다. 심지어 한손에는 창을 쥐고 전력으로 질주하는 장면도 나온다. 그래도 신경 조금 쓰고 살펴보면 영화 전체적으로 말을 탄 자세가 불안해 보인다.
올리버 스톤의 알렉산더 영화에서 가우가멜라 전투 장면의 헤타이로이 역들을 한 조연들과 비롯한 알렉산더 역을 한 콜린 패럴도 현실에 맞게 안장을 안 쓴 채로 질주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달리는 내내 장면들을 잘 보면 매우 불안해 보이기도 하는 데다가 가우가멜라 전투 장면 중에 베수스를 농락하고자 알렉산더 대왕이 기병을 우측으로 가다가 다시 돌아가면서 숨어있던 보병과 일부 헤타이로이들이 돌격하는 모습이 있는데, 뒤의 한 헤타이로이 조연 배우가 말의 안장을 잡고 매우 불안한 자세로 돌진하는 장면도 나온다.
아메리카 원주민이 나오는 서부영화에서는 등자는커녕 안장조차 없이 말을 타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나오기도 한다. 야만스럽거나 자연과 친화적인 모습을 보이려는 장치에 가깝지만 그들이 안장과 등자라는 걸 모르지는 않았다. 애초에 아메리카에는 유럽인 도래 이전까지 말이 없었다.[11] 아즈텍 군인들도 전부 다 보병이었고, 스페인 콩키스타도르들과 싸울 때 기동성과 충각력을 가진 기병을 상대하기 힘들어 했다.[12] 후에 아메리카를 정복한 유럽인들이 식민지를 건설 과정에서 말을 가져왔고, 당연히 등자도 같이 들어왔다. 서부극에서 숱하게 등장하는 말 타고 싸우는 미국 원주민들[13]도 당연히 스페인이 가져온 말과 등자의 영향을 받았고, 각지에서 가죽이나 천으로 만든, 아메리카에 원래 살던 사람들의 등자와 안장 유물이 숱하게 발굴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안장 없이 말을 타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사진도 남아 있으니 등자가 없다고 반드시 재현 오류라는 건 아니다. 요컨대 안장 없이 타는 때도 있었겠지만 대체로 안장과 등자를 쓰는 게 일반적이었다. 말과 많이 지내는 원주민들도 등자가 발명된 후라고 해서 등자 없이 타는 때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할 수 없다. 거기다 원주민들은 아시아의 몽골처럼 말을 태어난 후나 평상시에도 많이 타고 다니고 같이 지냈을 테니 일반 기병들보다 더 숙련되고 잘 다룰 수 있었기에 안장과 등자 없이 타도 별 상관 없었을 것이고[14] 각자의 재량에 따라 서로 달랐을 것이다.
안전 문제 등 현실적인 제약에서 자유로운 CGI나 그림에서는 재현에 신경 쓴다면 충분히 오류 없이 재현할 수 있다. |
초한전쟁 중 팽성대전(기원전 205년)을 그린 삽화. 고증을 떠나 멋으로 등자를 넣은 것 같다. |
죠죠 7부에서도 나온다. 물론 작품 내용 자체가 승마 레이스 쪽이니 단순히 '등장'한 것이라면 따로 언급될 이유는 없지만 황금장방형과 관련되여 '조명'되었다.
대표적인 판타지 소설인 반지의 제왕에서 요정들은 안장과 등자 없이 말을 타고 다닌다고 한다. 원작 소설의 간달프가 언급하는데, 자신은 엘프들의 승마기술을 배워서 안장과 등자 없이도 말 탈 수 있다고 한다. 반지의 제왕: 중간계 전투, 반지의 제왕: 중간계 전투 2에서도 원작 소설처럼 엘프들의 기병은 안장과 등자 없이 타고 다닌다.[15] 하지만 실사 영화에서는 배우와 엑스트라, 스턴트 대역의 안전을 위해서 안장과 등자를 채우고 촬영했다. 심지어 뉴질랜드에서 채용된 승마 스턴트 대역들은 다들 농장 출신이라 평생 말을 타서 승마에 익숙했음에도 그렇다.
백련의 패왕과 성약의 발키리의 2화에서 등자를 착용한 기마부대를 본 적군이 놀라는 장면도 있는데, "말 위에서 어찌 저렇게 싸울 수 있지? 말도 안 돼."라고 언급했다.[16]
수호전에는 무장들이 송강에게 감화돼 양산박에 들어오면서 '안장을 받치고 등자를 받드는 일이라 해도 기꺼이 하겠다'라는 표현이 많이 등장한다.
6. 말과 관련 없는 등자
쇠뇌의 앞부분에 달려있는 고리 같은 것도 등자라고 부른다.[17] 화살 장전 시 시위를 당기기 쉽게끔 발을 넣고 쇠뇌를 수평 상태로 고정하게 하는 역할.
중고등학교 생물 시간에 소리를 증폭하게 하는 역할로 흔히 배우게 되는 청소골(聽小骨)은 작은 뼈 세 개로 구성되는데, 순서대로 망치뼈(Malleus), 모루뼈(Incus), 등자뼈(stapes)이다. 실제 등자와 매우 유사하게 생겼다. #
[1] 이게 이해가 안 간다면, 꼬꼬마 시절 해보았을 말뚝박기를 연상해보자. 등자가 없는 상태에서 균형을 잡기는 의외로 대단히 어렵다. 다만 말에는 등자 외에도 안장과 말고삐가 추가로 달려있기 때문에 멈춰있는 상태라면 말 위가 균형잡기가 더 쉬울 것이다.[2] 이 때문에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켄타우로스가 등장한 계기가 말위에 직접 탄 기마민족을 보고 느낀 충격으로 생겼다는 가설이 있다.[3]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유물이 서진시대의 유물이다.[4] 다만 이들이 기사들을 능가하는 돌격력을 발휘했는지는 또 의문스럽다. 돌격 방식의 차이도 있고 이들의 마갑과 무장은 돌격 이후 백병전에 상당한 비중을 둔다. 이것은 동로마 제국의 카타프락토이에서는 더욱 명확하게 나타나는데 이들의 주된 무장은 철퇴였고, 일부만이 기창으로 무장했다. 다만 마르켈리누스의 기록을 보면 동로마보다도 고대 시기의 파르티아와 사산조의 카타프락토이들이 로마군 중보병 2~3명을 돌격 한 번에 꿰뚫어버렸다는 기록이 나오기에 이들의 돌격력 역시 기사 못지않았음을 알 수 있다. 동로마와 같은 경우는 그저 이런 페르시아 계통 왕조들과는 다른 전술 스타일이라 봐야 할 듯.[5] 창을 머리 위로 들고 찍는 방식[6] 다만 고대 아케메네스 기록을 보면 샤한샤보다는 계급이 낮은 사트라프가 중기병을 양성했다 했기에 귀족들도 양성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 페르시아에서는 이런 기마귀족들의 영향력이 상당했다.[7] 동로마 제국 또한 제국 스케일로 클리바노포로이라는 등자 초중기병을 굴리기는 했으나, 관구제로 중기병단을 육성하고 유지하기에는 그 비용이 지나치게 비쌌고 결국 그 돈으로 서유럽 기사들을 라티니콘 용병으로 고용해서 쓰게 되었다.[8] 당장 삼국지 후반부에 진이 건국된다.[9] 상술했듯이 한나라 때 한쪽을 이용하는 형태의 등자가 쓰였다.[10] 특히 전쟁 사극 같은 경우에는 말들도 놀라는 상황이 많이 생기기 때문에 낙마 사고가 더욱 잦다.[11] 북미의 야생말은 12000년전 멸종했으며, 현재 북미 땅에 사는 말은 가축이든 야생마든 전부 유럽인과 함께 건너온 구대륙 출신 말이다. 중남미도 사정은 같다.[12] 이들도 나중에 말을 집중해서 노리거나 창 끝을 겨누어 말을 놀래키고 기수가 낙마하면 곧바로 달려들어 죽이는 등의 대응법을 터득했다.[13] 대표적인 수우족과 라코타족들과 같이 기병을 쓰기로 잘 알려진 아메리카 북부 원주민 부족들.[14] 코만치족의 경우는 미국 측의 장군 윌리엄 T. 셔먼이 "저것들 너무 오래 말 타고 다니는데 이제 걷는 방법을 까먹은 건 아닐까?"라고 평했을 정도로 말을 잘 다루었다.[15] 인게임에서 엘프 진영은 궁수 위주라 기병은 거의 견제나 기습용으로 쓰이지 대체로 허약하다.[16] 이 장면 때문에 한동안 이세계물의 바보 만들기 클리셰냐 아니냐의 논쟁이 있었다. ## 다만 작품에 등장하는 위그드라실은 전체적인 배경이 청동기 문명에 가까운 데다 등자가 없어서 전차를 운용한다. 등자는 철기 시대인 기원후 3세기에 등장한 물건이니 바보 만들기로 보기에는 곤란하다.[17] 모든 쇠뇌에 달려있는 것은 아니며, 유럽에서 쓰는 서양식 쇠뇌에만 달려있다. 동아시아에서는 활대에 발을 넣고 고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