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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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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명칭3. 역사
3.1. 자포로자 코자크
3.1.1. 기원 및 형성 과정3.1.2. 생활 및 문화3.1.3. 자립을 위한 노력3.1.4. 러시아 제국으로의 편입과 해체
3.2. 돈/쿠반 카자크
4. 전투민족5. 한국과의 관계6. 문화7. 각종 매체에서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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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현재의 러시아우크라이나에 해당하는 영역에 있었던 동슬라브계 민족집단.

카자크라는 집단을 구분하는 것에 대한 기준은 학자들이나 학계마다 다르다.[1] 카자크가 우크라이나의 기원이라고 주장한 제정 시대 민족주의적 역사가인 흐루셰우스키조차도 카자크가 원래는 일종의 자연발생한 '현상'이었다고 지적한다. 실제로도 대부분 마적단에 가까웠으며 농업, 상업, 어업 등의 생계에 종사하다가 특정 시기에 무리를 지어 타 세력에 공격을 감행하던 약탈꾼들이었다. 주변국들은 카자크들을 이용해 상대국에 대한 약탈을 부추겼다. 당시 각국에서 카자크가 일종의 사략 마적 같은 존재였다.[2][3]

굳이 분류를 하자면 크게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등록 카자크, 러시아 제국의 신분 혹은 군 소속의 카자크, 자포리자 코자키, 돈/쿠반 카자크 등으로 나뉠 수 있다. 전반적으로 1) 소속, 2) 법적 신분, 3) 지역, 4) 종교, 5) 당대인들의 인식[4] 등으로 세분화되는 걸 볼 수 있다. 이들은 단일한 세력이 아니었고 강대국들 사이의 힘의 공백으로 생긴 무법지대에서 끊임없이 경쟁하고 군웅할거한 집단이였다. 자포리자 코자키와 돈/쿠반 카자크 같은 분류로 큰 특징들과 역사적인 틀로 편의적으로 나눈 개념인 것.

2. 명칭

우크라이나어로는 Козаки(코자키)라 부르고, 러시아어로는 Казаки(카자키)라고 부른다. 폴란드어로는 Kozacy(코자치), 체코어와 슬로바키아어로는 Kozáci(코자치), 벨라루스어로는 Казакі(카자키). 영어로는 Cossack(코삭, 코사크)라고 한다.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족과 발음이 비슷한데, 영어로는 어느 정도 구별이 되지만 러시아어로는 Казаки와 Казахи로 한 글자 차이라 혼동하기 쉽다.[5] 그러나 코자키/카자크는 슬라브계이고, 카자흐는 튀르크계로, 둘은 별개의 민족이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코자키/카자크에 대한 어원은 튀르크어로 '얽매이지 않은 자들'이란 뜻의 카자크(Qazaq)라고 본다. 이 설이 맞다면 카자흐스탄과 같은 어원이다. 그러나 그 밖에도 많은 설이 있다. 이를테면 유명한 사전 편찬자인 'В. 달리'는 '방랑하다', '떠돌아다니다'를 뜻하는 중앙아시아의 '카즈마크'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면서 유목 생활을 한 키르기스인들은 자신을 '카즈마크'라고 불렀다고 하는 걸 그 근거로 삼는다.

골루봅스키와 같은 사학자들은 폴로베츠인들 사이에서 '수호자', '경비원'으로 쓰인 '카자크'란 단어가 러시아어로 쓰였다고 생각한다.[6] 폴란드어의 염소를 뜻하는 말인 코자(koza)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는데 그닥 지지를 못 받는다.

3. 역사

파일:DINtAWYXYAATy_v.jpg 파일:Zaporozhian Cossacks - Wikipedia.jpeg.jpg
우크라이나의 자포로제 카자크 헤트만 우크라이나의 자포로제 카자크 병사
파일:external/www.absolutrusia.com/Rusia15.jpg 파일:external/r.foto.radikal.ru/98a49d38cfa6.jpg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러시아 제국의 돈 카자크 기병(컬러 복원) 러시아 내전 당시 백군 소속 돈 카자크 기병
파일:external/www.roa.ru/Kos4.jpg 파일:external/www.rkka.ru/kaz_04.jpg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 소속의 돈 카자크들. 독일 국방군 마크가 붙어 있다. 소련군의 돈 카자크(= 쿠반 카자크) 예식복[7]
우크라이나인에게 카자크는 러시아와 차별되는 우크라이나 국가의 원형을 만든 민족 영웅으로 간주되고 있지만 현대 러시아인에게 카자크는 러시아의 변경을 개척한 애국주의의 상징이었다.[8]

크게 우크라이나의 자포리자 지역이 기원인 자포로제 카자크와 러시아의 돈강 하류가 기원인 돈 카자크(= 쿠반 카자크)로 구분하여 살펴 볼 수 있다. 우크라이나 드니프로강 유역의 코자키와 러시아 돈강 유역의 카자크는 최초 단계에서 유사한 역사적 배경과 유사한 경로를 거쳐 유사한 형태를 가진 '경계인 집단'으로 출발했으나 결과적으로 서로 다른 역사 과정의 길을 걷게 되었다.[9]

폴란드의 지배를 받던 우크라이나의 자포로제 카자크(Запорозькі козаки / Запоро́жские казаки́)는 주변의 폴란드, 루스 차르국, 크림 칸국 및 칸국의 후견국가인 오스만 제국 등과 때로는 협력을, 때로는 대립하면서 끊임없이 자립을 추구했다. 폴란드는 자포리자 코자키를 폴란드 사회에 편입시키고 통제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코자키 및 왕국 내 루스인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쳤다. 결과적으로 자포로제 카자크의 저항은 폴란드의 운명에 치명상을 입히고 말았다. 최종적으로 자포로제 카자크 집단은 18세기 말 폴란드 분할 이후 로마노프 왕조 러시아 제국에 편입되었다. 러시아의 대제 예카테리나 2세는 코자키 헤트만국을 해체하고 '소러시아' 관구를 설치했다. 이로써 자포로제 카자크의 역사도 함께 종언을 맞았다. 하지만 자포로제 카자크는 소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루스를 거쳐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민족 정체성의 토대가 되었다.

반면 돈 카자크(Донские казаки)는 일찌감치 러시아 치하에 편입되었고, 어느 정도의 자치를 허용받는 대가로 차르를 위해 복무하는 특수한 군사집단으로 변모했다. 즉 일종의 군사적 카스트 또는 '신분화' 과정을 거치게 된 것이다. 물론 러시아가 돈 카자크를 편입하는 과정이 마냥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폴란드 역시 코자키를 사회의 일원으로 편입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했던 것과는 대조적인 결과였다. 돈 카자크들은 러시아 제국의 선봉이 되어 영토 팽창에 앞장섰다. 이들은 캅카스, 중앙아시아, 시베리아는 물론 극동의 연해주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의 경계지역을 따라 널리 이주하였다. 결론적으로 돈 카자크들은 러시아 제국이 혁명으로 종언을 맞을 당시에도 계속 존속했고, 러시아 내전을 거쳐 소련이 수립되는 격동기에도 카자크는 '봉건제의 잔재'로 탄압받으면서도 명맥을 계속 이어갔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이 종결된 후 기병 병과의 해체로 카자크들은 일반 시민으로 돌아갔으며, 전통적인 사회조직과 자치권도 완전히 해체되었다. 이에 더해서 나치 독일에 부역한 백계 카자크들로 인해 소련에 충성한 카자크 역시 '잠재적 배신자'로 백안시당해야 했다. 하지만 소련 붕괴 이후에 카자크는 러시아 애국주의의 아이콘으로 인정받으며 긍정적인 면모가 부각되었다. 그 결과 돈 카자크들의 후손들을 중심으로 카자크 문화의 복원과 부흥이 러시아 정부 차원에서 장려되고 있다.

3.1. 자포로자 코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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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І покажем, що ми, браття, козацького роду
동포들아, 우리가 코자크의 후예인 것을 보여주리라
우크라이나의 국가의 후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Repin_Cossacks.jpg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4세에게 답장을 보내는 자포로제의 카자크'
(Запорожцы пишут письмо турецкому султану)
일리야 레핀
1891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박물관 소장
코자크, 나아가 우크라이나 민족정신을 상징하는 그림. 그림은 1676년 메흐메트 4세가 보낸 최후통첩에 우스꽝스러운 답장을 적고 있는 코자크들을 묘사하고 있다.[10] 비록 안락한 삶은 아니지만 외세의 억압 앞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의 길을 택하는 그들의 호탕함이 느껴진다.

3.1.1. 기원 및 형성 과정

자포로자 코자크는 우크라이나 민족적 사관에서 우크라이나의 직접적인 뿌리로 여겨지는 집단이다. 그러나 이는 우크라이나의 기원은 기원불명의 경계인 집단인 코자키보다 더 오래된 키예프 루스까지 거슬러올라간다는 주장과 호환되지 않을 수 있는데다가, 코자키야 말로 '진짜 우크라이나인'이라거나 코자키는 우크라이나인과 별개의 '민족'이라는 카자크 민족주의가 따로 존재하기 때문에 사장되는 중이다.

이 코자키 집단의 형성 과정에는 여러 복합적인 요인이 섞여 들어갔고, 형성 시기도 특정한 시기로 구체화시키기 어렵다. 더욱이 초기의 코자키 집단에 대한 문헌이 충분치 않기 때문에[11] 코자키가 구체적으로 언제 어디서 어떤 과정을 통해 우크라이나 땅에서 형성되었는지 확실히 설명하기는 어렵다.

코자키가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키예프 루스가 몽골의 침략으로 붕괴되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성립하는 15~16세기 무렵이었다. 다만 역사적 증거를 바탕으로 13세기 몽골 제국의 키예프 대공국 침략 이전에도 존재했다고 여겨진다. 그 근거 중 하나로 우크라이나의 역사학자 '바실리 글라즈코프'는 동로마 제국, 페르시아, 아랍의 문헌 기록에 따라 10세기에도 우크라이나 스텝 지역에 코자키, 또는 코자키의 원형이 되는 집단이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러시아의 사학자 카람진도 1223년 몽골군동유럽 침략 이전에도 존재했다고 언급하면서 힘을 보태고 있다.

드니프로강 유역과 우크라이나 스텝 지대는 유목문명과 정주문명, 스텝과 농경지대, 그리고 이슬람 문화권과 기독교 문화권이 맞닿아 있는 일종의 경계이기도 했다. 이러한 지역적 특성은 코자키 집단이 출현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어떤 세력도 이 지역을 확고하게 장악하지 못했다는 점이 예속을 피해 도주한 유이민 집단에서 비롯된 코자키의 탄생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주목할만한 점은 몽골제국이나 이슬람 세력의 진출 이전부터 우크라이나 지역은 이미 '경계지대'로 기능했다는 사실이다. 우크라이나 스텝지대에는 슬라브인이 유입되기 이전부터 이미 스키타이, 사르마티아, 알란 같은 아리아(이란) 계통의 유목민족들이나 킵차크, 쿠만, 페체네그, 노가이인 같은 튀르크계 유목민족들이 수시로 거쳐가거나 또는 정착해서 번성하고 있었다.

코자키의 형성 과정에 대한 정론은 몽골의 서방 침공으로 루스계 국가들이 몰락하여 현 우크라이나 일대에 힘의 공백이 발생하자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몽골이 본격적으로 진출하기도 전에 오늘날 우크라이나 땅은 각종 유목민족과 루스계 국가들간의 내전과 이합집산으로 이미 개판 5분 전이었다(...). 그렇기에 13세기 몽골 제국의 침략 이전에도 광활한 우크라이나 스텝 지대에서 예속과 착취를 피하며 반유목적 삶과 때로는 약탈을 영위하며 이후 등장할 코자키의 원형이 될만한 집단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설명은 꽤 개연성이 높다. 몽골의 침략과 키예프 루스의 몰락, 그리고 뒤이은 몽골 제국의 분열은 우크라이나 일대에 존재하던 코자키 집단을 역사의 전면에 등장할 만한 규모로 성장시킨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어쨌거나 키예프 루스는 13세기 중반에 몽골의 침공으로 인해 붕괴되었다. 그 뒤를 이어 몽골인들이 세운 킵차크 칸국(금장칸국)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약화되었고, 여러 후신 칸국들로 분열되었다. 그 결과 오늘날 우크라이나 일대는 일종의 힘의 공백지대가 되었다. 스텝 지대에 맞닿아 있는 드니프로강 유역 일대에서는 주변의 여러 국가와 세력 간의 주도권 경쟁이 벌어졌다. 이전투구 끝에 최종적으로 드니프로강 유역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의 남동부 변경으로 편입되었다. 하지만 폴란드는 이 지역에 아직 확고한 지배력을 행사하지는 못했고 우크라이나 일대는 사실상 여전히 열려있는 국경지대로 남아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부터 모스크바 공국에 이르기까지 동유럽 일대에서 봉건제도가 빠르게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농노로 전락할 위기에 몰린 루스계 농민들을 비롯하여 봉건제적 신분질서에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사회집단이 생겨났다. 이들은 '열려 있는 국경지대'인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변경인 드니프로강 하류 지역, 즉 자포리자 지역으로 몰려들었다. 이렇게 유입된 인구가 현지의 코자키 집단에 합류하면서 코자키의 세력은 급격히 확장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코자키는 종전의 단순한 유이민 집단 수준을 넘어서 하나의 확고한 사회로 조직화되어갔다.

이렇게 살던 코자키 집단은 우크라이나 남동부 스텝 지대에 원래부터 살던 원주민들과 모스크바 대공국폴란드 왕국 등 여러 지역에서 정부와 지주의 억압을 피하고자 목숨 걸고 우크라이나 스텝으로 들어온 여러 민족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우크라이나 남동부, 즉 드니프로강 하류 지역에서 자신들의 공동체를 만들어 그곳에서 반농반목 생활을 했다. 인근의 크림 타타르인들의 침략 때문에 재산을 가지고 이동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해서 유목도 겸했으나, 우크라이나의 흑토 지대가 매우 비옥하여 농사가 쉽고 소출이 높다보니 농업도 병행되었다. 그러나 크림 칸국오스만 제국이 계속해서 심각한 위협을 가하자, 이들 '자유인 집단'은 자체적인 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자포리자 코자키에 대한 최초의 역사 기록은 14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492년 크림 칸국의 칸은 키예프 사람들과 체르카시 사람들이 티아기니아 부근의 타타르 선박을 불질렀다는 불만을 제기했고, 리투아니아 대공국알렉산드라스 대공은 우크라이나 코자키들 사이에서 범인을 찾아내겠노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다음해에 체르카시의 방백인 보흐단 글린스키 공은 오차키우에 있는 튀르크 요새를 파괴했는데 칸은 이 사람들을 코자키들이라고 불렀다.
《우크라이나의 역사》 / 미하일로 흐루셰우스키

자포리자 코자키가 본격적으로 역사속에서 주요 세력으로 등장하는 것은 15세기이다. 이 시기를 보통 우크라이나의 카자크 시대, 짧게 카자크 시대라고 하기도 한다. 16세기 중후반 즈음에 이르면 코자키는 드니프로강 하안 지대를 확고히 장악한 채 명목상으로 폴란드 왕국의 신민이지만 실제론 독자적으로 운영되는 사회조직으로 자리잡은 상태였다. 코자키는 이 당시에 이미 폴란드 정부, 크림 칸국이나 심지어는 합스부르크 제국과 같은 주변세력들과 교섭 또는 협력을 하거나 무력분쟁에 참여하는 등 독자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몽골 침략 이후 우크라이나 일대에서 발생한 힘의 공백과 이어서 벌어진 여러 국가간의 각축전, 그리고 동유럽 일대에서 급속히 진행된 봉건화라는 두 현상이 맞물리면서 코자키가 급속히 성장했다고 할 수 있겠다.[12][13]

3.1.2. 생활 및 문화

농민들은 크림 타타르족이 갑자기 습격해오면 조그만 요새로 피신하여 총으로 사격을 했다. 이런 경우에 대비해서 농민들은 들판에 나가 일할 때 반드시 총과 군도로 무장을 했다. 크림 타타르족들이 이곳에 끊임없이 출몰했던 까닭에 절대 그들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하다고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에리히 라소타 폰 슈테블라우의 일기》[14]

코자키들은 주로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용병으로 생계를 꾸려나가거나 국경 지대 마을에서 반 자치 조직을 유지하며 정부의 통제를 받는 '등록 코자키'와 요새화된 그들만의 수도, 드니프로강 유역의 자포리자 세치에서 경제적으로는 등록 코자키보다 궁핍하지만 자유롭고 독자적인 집단을 만들어 그들만의 공동체에서 생활하는 '시치 코자키'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엄연히 폴란드 국왕의 직속 봉신이기도 했고 폴란드군의 예하 부대로서 예편되었기 때문에 폴란드 왕국과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이들은 자발적으로 폴란드군을 돕기도 했다. 사실 폴란드 왕국도 오스만 제국이 우크라이나 전역을 점령하면 자신들도 위험해지기 때문에 자포리자 코자키들을 도와주었다. 자포리자 코자키는 바다에서도 유명했는데, 이들은 자신들이 건조한 작은 배로 흑해의 제해권을 완벽히 장악했다. 또한 발트해 전쟁에서도 자신들이 건조한 배를 인력으로 북방까지 운송하여 명성을 떨쳤다. 자포리자 코자키들은 비록 그들의 정교회 신앙과는 다른 가톨릭을 믿는 폴란드 정부와 종교 및 가치관이 달라 갈등도 있었으나, 코자키 최대의 위협을 크림 타타르족과 오스만 제국으로 생각했기에 그렇게 큰 불만을 느끼지는 않았다. '공생 관계'가 폴란드 정부와 등록 코자키의 관계를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 될 것이다.

당시 코자키의 이미지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자포리자 코자키는 '시치'(Sicz)란 요새화된 마을에 거주했으며 '헤트만'(Hetman)이라 불리는 단장 아래 단결된 공동체를 가지고 있었다. 코자키는 기본적으로 평등 사회였기에, 단장은 많은 코자키들에게 존경을 받는 원로들 중에서 선출되었다. 평시에는 단장에게 농담 따먹기를 하기도 하고, 공개적으로 모욕하기도 했지만 전시에는 단장이 생사여탈권을 갖고 있었다. 또한 헤트만은 구성원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축출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종신직이었다.

무지막지하면서도 재미있는 법으로도 유명했다. 빚을 갚지 못한 자에게는 누군가 대신 빚을 갚아줄 때까지 대포에 얼굴을 마주한 채 묶어둔다는 법이나, 물건을 훔친 자가 잡히면 마을 한복판에 묶어놓아 조리돌림을 시키면서 옆에 때릴 몽둥이도 놓아두는 형을 선고했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1대씩 치고 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동족 중 누군가가 노예로 끌려가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해내야 한다는 불문율도 있었다.

3.1.3. 자립을 위한 노력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보흐단 흐멜니츠키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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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타타르와 오스만 제국에 의한 위협이 많이 줄어들자, 폴란드는 코자키를 종교적 문제로 박해하기 시작했다. 상술했듯 폴란드는 가톨릭을 믿고 코자키는 정교회를 믿었기 때문이다. 물론 일부 코자키는 동방 가톨릭 교회로 개종하기도 했지만 폴란드 지주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기본적으로 포기하지 않았고, 이러한 박해에 자유가 상징인 자포리자 코자키들은 폴란드에 대해 거대한 투쟁을 시작했다.

그 투쟁은 마침내 루스 차르국이반 뇌제의 사망 이후 시작이 된 동란 시대를 끝낸 후, 동부 우크라이나로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했을 때, 우크라이나 코자키의 지도자인 보흐단 지노비 미하일로비치 흐멜니츠키폴란드-리투아니아에 대해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가 밀리게 되자 모스크바로 귀순하면서 체결한 페레야슬라프(페레야슬라우) 조약 덕분에 종식될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혼란에서 벗어난 로마노프 왕조가 자포리자 코자키를 본격적으로 지원해주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폴란드, 러시아, 스웨덴 3국이 얽히는 대전쟁이었던 대홍수가 일어났다. 니콜라이 고골의 소설로 후일 율 브리너 주연 영화로 유명해진 《타라스 불바》가 바로 이 투쟁을 다루고 있다.

3.1.4. 러시아 제국으로의 편입과 해체

결국 예카테리나 2세가 자포로제 카자크들의 공동체인 시치를 없애면서 러시아 제국의 직할령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 사건은 우크라이나 역사에 결정적인 분기점을 맞는다. 당시의 폴란드-리투아니아 체제에 익숙한 우크라이나 코사크 엘리트들은 폴란드 슐라흐타에 유사한 존재들이었다.[15] 반대로 전제정 체제하의 러시아 귀족들은 봉건영주라기보다는 지방관에 가까운 존재들이었으나 표트르 1세 사후 러시아 차르들이 쿠데타로 옹립되고 폐위되는 상황이 오면서 전제정의 붕괴와 함께 폴란드 슐라흐타적인 존재로 변모했다.[16] 이러한 상황에 이르자 코사크들은 자신들의 신분적 특권이 러시아라는 대제국에 의해 제도화되고 법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기대를 품었고 이것은 헤트만령의 자치권 폐지가 초기에 코사크 엘리트들로부터 큰 반발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던 주된 원인이었다.[17] 실제로 헤트만령의 자치권이 폐지된 이후 러시아 제국 정부는 그곳의 카자크 스타르쉬나들에게 러시아 귀족(Дворянство)로 편입시켜 주었으나, 여기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었다.

1. 오랜 역사를 가진 '슐라흐타'임을 증명하는 문서화된 증거를 당국에 제출할 것
2. 제국 정부에서 공무를 수행한 경력이 있을 것

때문에 카자크 사회에서는 대대적인 고문서 찾기 및 위조(...) 광풍과 이에 대응하는 제정 당국의 검증 강화가 악순환으로 나타났고, 옛 카자크 귀족층의 러시아 귀족층 편입은 1세기 동안 기나긴 진통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옛 전통적인 카자크에 대한 재인식이 시작되었으며, 이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기원이 되었다.
18세기 말 19세기 초에 이르자 드보랸스트보 편입을 두고 일어난 이러한 갈등 상황은 역사 인식에 있어 1764년 헤트만 국가 폐지 당시만 해도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역설적 결과를 빚어내기 시작하였다. 그전까지 자신의 카자크적 과거를 완전히 망각한 채 특권 귀족인 "슐라흐타로서의 현재"를 누려왔으나 이제 존재의 위기에 직면한 다수의 카자크 엘리트 사이에서 갑자기 자신들의 역사, 특히 "카자크적 과거"에 대한 관심이 폭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는 외견상으로는 드보랸스트보 편입 심사로 촉발된 고문서 찾기 광풍이 가져온 당연한 결과였지만, 1764년의 시점에서 제정 정부도 카자크 엘리트 자신들도 예상치 못했던 것은 카자크적 과거에 대한 이러한 호고주의(好古主義)적 관심의 폭발이 관방국의 깐깐한 심사 및 검증과 만나게 될 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한 예측이었다. 바로 이어지는 장에서 살펴보겠지만, 일단 이러한 카자크적 과거에 대한 자각과 제정 정부에 대한 카자크 엘리트들의 점증하는 불만이 맞물리자, "슐라흐타적 현재"와 "카자크적 과거" 사이의 이 모순적 만남은 카자크 엘리트 사이에 카자크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상상력의 탄생 및 집단기억의 전면적 재구성을 촉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헤트만 국가의 카자크 엘리트들이 스스로를 "슐라흐타"로 여기며 이에 따른 신분적 권리의 인정을 제정 정부에 촉구하던 이 상황이 이 시점의 소러시아가 사실상 완전히 탈카자크화한 완연한 신분제 사회가 되었다는 증거였다면, 제정 정부로부터 바로 그 슐라흐타 신분의 제도적 인정을 받기 위한 바로 그 노력이 상기한 "탈카자크화"에 의해 망각되고 거의 소멸되어 가던 "카자크 정체성"의 재발견을 촉발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카자크적 과거와 슐라흐타적 현재 간 이 모순적인 만남 속에서 구(舊) 카자크 헤트만 국가의 영토에서는 훗날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라 불릴 또 다른 "미래"를 구성하게 될 새로운 민족서사가 바로 이 아이러니로부터 태동하기 시작하였으나, 그 서사의 첫 시작을 알리게 될 저작이 바로 "우크라이나 민족의 [첫] 권리 선언" 「루시인의 역사」였다.

그렇다면 현재의 불만을 과거로 투사시킴으로서 미래를 위해 새롭게 재구성될 이 새로운 민족서사란 과연 어떠한 내용이었던 것일까? 그것은 소루시인이야말로 키예프 루스를 계승하는 진정한 정통 루시이며, 카자크야말로 이러한 루시 정통성의 역사적 계승자라는 "독자적 소루시 역사 담론"이었다.
구자정, 우크라이나 문제의 기원을 찾아서 (박영사, 2023), 120-122.

이후 몇몇의 자포로제 카자크들은 돈 카자크에 흡수되었고, 러시아 제국군에 종속되어 나폴레옹 1세에 맞선 1812년의 조국전쟁 시기에 유럽을 휩쓸며 <카자크는 두나이를 넘었다>(Їхав козак за Дунай)와 같은 우크라이나의 자포리자 코자키 민요들이 독일이나 프랑스와 같은 유럽으로 많이 전파되었고, 또한 돈 카자크와 같이 서유럽 국가들로부터 용맹과 잔혹함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후의 역사는 돈 카자크와 같다.

돈 카자크에 합류하지 않은 나머지 대부분의 자포로제 카자크들은 우크라이나에 거주하며, 돈 카자크와는 다른 길을 걸어 우크라이나 정체성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후의 역사는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참고. 시간이 흐르고 우여곡절 많은 과정을 거친 끝에 1991년 소련이 붕괴하면서 우크라이나가 독립한 이후에도 그들만의 문화를 지켜내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다 2014년 유로마이단 사태로 인한 러시아의 크림 반도 합병 사태와 동부 우크라이나 무력개입으로 인한 돈바스 전쟁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 러시아의 여러가지 선을 넘은 행위로 인해 우크라이나 중부-서부의 친서방파 우크라이나인들과 남부-동부의 친러파 우크라이나인들로 우크라이나 내의 여론이 분열될 것이라는 러시아의 기대와는 반대로 함께 분노하고 합심해서 러시아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2024년 러시아 점령 하의 자포로지예주예브게니 발리츠키 주지사에 따르면 현지 카자크를 편입 및 부대 부활이 추진 중인 듯하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국가에서 보듯 우크라이나의 민족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자포리자 카자크인 만큼, 대부분의 우크라이나인은 이를 인정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3.2. 돈/쿠반 카자크

파일:From the history of the Cossacks.jpg
인포그래픽: 역사 속의 카자크
범례
1900년 러시아 제국의 국경선
카자크의 정착지역
1570 각 카자크 군단의 창설연도

카자크인 인구수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bbd99f; font-size: .9em"
러시아 제국(1897년)}}} : 2,928,842명(전체 인구의 약 2.3%)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8dec7; font-size: .9em"
러시아 연방(2002년)}}} : 140,028명(전체 인구의 약 0.09%)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인물설명: 돈 카자크인
  • 군모:

    • 모자를 잃어버리면 큰 치욕으로 간주 됨
  • 견장

    • 나이 또는 부상 정도에 따라 달라짐
  • 채찍

    • 말에 사용하는 짧은 채찍
  • 줄무늬(바지의 재봉선)

    • 1801년에 재정됨
  • 군도

  • 14-17세기에 카자크는 (러시아 정부 등과) 계약을 통해 형성된 군사집단이었다.
  • 18세기 경에 카자크는 독립성을 상실하고 러시아 제국의 특수한 군사집단으로 변모했다.
  • 20세기 초엽에는 11개의 카자크 군단이 존재했다.
  • 1917년에 발생한 혁명 이후 카자크 탄압 정책으로 카자크는 대부분 사멸했다.
  • 1980년대 후반부터 카자크(문화)를 부흥하기 위한 움직임이 시작되다.
    정부는 1990년에 카자크인의 지위를 보호하는 법안들을 도입했다.


    20세기 초엽 카자크의 재정착지역(창설연도 순)
  • 돈 카자크(1570)
  • 오렌부르크 카자크(1574)
  • 텔레크 카자크(1577)
  • 우랄 카자크(1577)
  • 시비르 카자크(1582)
  • 자바이칼 카자크(1655)
  • 쿠반 카자크(1696)
  • 아스트라한 카자크(1750)
  • 세미레치옌스크 카자크(1852)
  • 아무르 카자크(1855)
  • 우수리 카자크(18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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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카자크, 또는 쿠반 카자크는 오늘날 러시아의 카자크들이다. 이들 또한 형성 과정에서 우크라이나의 자포로제 카자크처럼 여러 복합적인 요인이 섞여 들어갔고, 형성 시기도 특정한 시기로 구체화시키기 어렵다. 13세기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키예프 대공국과 여러 공국이 사라지고 몇몇 슬라브인들이 캅카스 산맥 북쪽 즉 남부 러시아 스텝 지역으로 흘러들어가 반유목화가 된 것을 기원으로 하거나, 몽골제국에서 떨어져 나간 타타르인들이 키예프 대공국이 몽골제국의 침략으로 멸망한 이후 이곳에 내려와 살던 슬라브인들과 만나 통혼하는 과정에서 슬라브화되어 카자크를 형성했을 것이란 학설도 있다. 아마 카자크 집단의 기초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이 두 가지의 민족 그룹이 가장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들 외에도 예카테리나 여제의 헤트만국 해체 이후 드네프르강 유역의 카자크들이 더 동쪽의 돈강 유역 이주하였는데 이들 역시 돈 카자크 집단의 형성에 중요한 요인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주류 러시아인과 구분되는 문화를 유지했고, 러시아 근현대 역사의 여러 전쟁에서 러시아 제국군 또는 소련군 소속의 정예 기마 군사집단으로 명성을 떨쳤다.

14세기에 돈 카자크의 모태가 되는 공동체가 만들어졌는데, 이들 돈 카자크들은 1380년에 모스크바 대공국의 '드미트리 돈스코이' 대공에게 돈강의 성모 이콘을 바치고 쿨리코보 전투에서 마마이 칸에게 대항해 함께 싸웠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들이 타타르에 대항한 슬라브족의 본격적인 첫 번째 반기라고 할 수 있는 쿨리코보 전투에 참전한 것으로 알 수 있듯이, 이들 자유인 집단은 드니프로강에서 더 남쪽에 있는 크림 반도의 크림 타타르(크림 칸국)의 위협에 직접 노출되어 있었다. 킵차크 칸국은 돈스코이 대공이 쿨리코보 전투에서 그들을 격파하고 이반 3세모스크바 대공국의 독립을 선언한 때부터 세력이 상당히 약화돼 있었지만 오스만 제국의 보호국이 되기도 한 크림 칸국은 18세기 이전까지 러시아엔 무시할 수 없는 위협이었다.

그러다가 15세기부터 정식으로 러시아군에 합류해서 현재까지 러시아 또는 러시아군에 충성을 바쳐왔다. 이들은 러시아의 시베리아 정복에 앞장섰고, 시베리아의 토착민들과 전투를 벌였다. 가장 유명한 것은 물론 이반 뇌제 시기에 이루어진 '예르마크'의 동방 원정으로, 예르마크는 전사했지만 시비르 칸국은 수도 튜멘도 잃고 마지막 칸 쿠춤이 살해되어 멸망했다.[18]

이들의 광속과 같은 확장은 러시아 제국이 편하게 시베리아 개척을 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굳이 강요하지 않았는데도 이루어진 카자크의 야쿠츠크 개척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야쿠츠크의 연교차는 약 섭씨 100도이다. 야쿠츠크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진짜 헬게이트다. 표트르 이바노비치 베케토프와 그의 동료 카자크 30명은 서유럽과 비슷한 크기이지만, 그보다 훨씬 혹독한 야쿠츠크 지역을 개척해냈다.[19]

또한 포야르코프, 데지뇨프, 아르라소프 등 다른 카자크 지도자들의 주도하에 사할린, 오호츠크 해, 서태평양 연안 등이 러시아 제국의 지도에 추가됐다. 덕분에 러시아 정부는 모피 무역에서 높은 이익을 거둘 수 있었고, 개척의 대가로 선물, 빵, 무기, 화폐를 줬다고 한다. 이 시기에 지간스크, 베르호얀스크, 자시베르스크, 스렛네콜림스크와 같은 도시들이 생겼다. 현지 박물관에선 이런 문건이 있다.
"12월 25일, 위대한 황제 미하일 표도로비치 로마노프가 온 나라에 선포하노니, 짐은 위대한 황자와 국가를 위해 종이 된 이들과 함께 레나 강가에 도시를 세웠다. 짐이 오기 전, 레나강과 야쿠츠크 땅엔 다른 도시가 없었다. 나 표트르는 야쿠츠크의 왕 마미코프의 진영 앞에 도시를 세웠다."

그리고 흑룡강을 배를 타고 내려와 청나라 군대와도 전투를 벌였으며, 조선 효종나선정벌에서 조선군과 맞붙기도 했다. [20]

그러나 카자크들의 영토 확장에는 잔혹한 일면도 뒤따랐다. 카자크들은 영토 확장 과정에서 식량을 제대로 보급받지 못했기 때문에 시베리아에 살던 현지 주민들과 갈등을 빚고 문제를 일으켰다. 카자크들이 원주민들의 토지를 강탈하는 일이 빈번했으며 사적으로 착취하고 노예로 삼는 등, 잔인무도한 짓을 저질렀다. 영미가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을 학살했듯, 러시아는 카자크를 앞세워 원주민을 학살하고 시베리아를 식민지로 정복한 셈이다. 제국 정부는 카자크와 시베리아 원주민 사이의 갈등으로 골머리를 썩혔고, 19세기 중엽에야 간신히 화해할 수 있었다.

러시아 제국의 영토 확장 초창기엔 볼가강 강가에 볼가 카자크가 생성됐으며, 후에 더 넓은 지역으로 확장하면서 18세기부터 캅카스의 테레크 카자크, 우랄의 야이크 카자크, 바이칼 카자크, 우수리 카자크, 시베리아 카자크 등이 더 형성됐다.

이들 중 캅카스나 더 밖의 지역으로 진출한 카자크들은 그곳의 타민족, 특히 캅카스의 산사람들이나 여타 무슬림들의 영향을 많이 받기도 했다. 톨스토이의 《카자크인들》의 '테레크 카자크'가 대표적이다. 테레크 카자크의 무곡(舞曲). 캅카스 문화적 요소가 뚜렷하다.

한편 정부와의 협력이 더 많아지는 동시에 정부와의 갈등도 심해져 갔다. 우크라이나의 자포리자 코자키와 폴란드와의 관계처럼 종교 문제로 인한 갈등이 심하지는 않았지만[21], 자유의 제약이 점점 강해지고, 농노들이 계속 카자크 마을로 도주하는 일이 발생하자, 카자크의 특권 중 몇 가지가 박탈되는 가운데 러시아 제국이 더 많은 봉사와 의무 이행을 요구하면서 자유로운 생활, 관습과 그 의무가 충돌하며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튀르크와의 관계도 갈등의 핵심 요소였다. 러시아 정부는 튀르크와 분쟁을 사서 겪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자치권이 있는 카자크들은 튀르크를 매우 혐오해 자신들 마음대로 국경 지대를 침범하고 약탈하는 일이 잦아졌던 것이다. 이걸 러시아 정부는 제약을 가하려 하고 자유에 제약이 계속 심해지자, 많은 봉기가 일어났다.

특히 정부와의 협력이 본격화된 17세기와 18세기 러시아 역사에서의 거대한 봉기는 카자크 주도하에 일어난 봉기에 농민 봉기나 다른 봉기가 함께 엮이면서 거대화된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으로 스테판 라진[22], 불라빈, 그리고 황제를 참칭했던 예멜리안 푸가초프의 봉기가 있다. 푸가초프의 난을 배경으로 알렉산드르 푸시킨은 《대위의 딸》을 집필했다.

어쨌든 많은 저항이 러시아 정부에 의해 진압됨에 따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카자크는 차츰 러시아 사회에 흡수됐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카자크의 자유는 계속 축소됐다. 불라빈의 봉기 이후 우크라이나의 자포리자 코자키와 마찬가지로 돈 카자크의 자치는 소멸됐고, 푸가초프의 난으로 반란의 주역이던 야이크 카자크는 '우랄 카자크'로 개칭됐다.

그러나 이들은 여전히 많은 전쟁에 동원돼 그 용맹을 떨쳤다. 러시아 차르의 근위대로 활약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차르는 카자크로부터 '카자크의 대수령' 칭호를 받아 겸임했다. 고용된 카자크는 그 대가로 황제의 친위세력으로서의 많은 혜택을 받아 그 숫자도 120만 명까지 늘어났다. 이런 배경으로 황제의 명령을 받아 체첸까지 달려가기도 했다.

다른 열강과의 싸움에서도 돈 카자크는 그 진가를 발휘했다.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그리고 특히 1812년, 러시아를 침략한 나폴레옹에 맞서 조국전쟁이 시작됐을 때, 카자크의 용맹성과 잔혹성은 같은 대불 동맹 연합군의 지휘관들도 학을 떼게 할 정도였다. 나폴레옹
"카자크는 존재하는 모든 경기병 중에서 최고이다. 내가 그들을 우리 군대로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나는 세계를 정복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평하기도 했다.

1800년대 중엽을 지나면서 카자크 간의 계층 분화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원래 카자크는 모두가 평등하게 땅을 경작했고, 누가 더 높은 계급인지, 아닌지에 대한 구분이 없이 모든 구성원이 평등했다.

그런데 앞서 설명한 여러 차례의 농민 봉기 이후 러시아 제국 정부는 카자크의 자유로운 기질을 억누르기 위해 그들을 군대식으로 서열화했고[23] 여러 특권을 박탈하는 대신 카자크의 상층부를 러시아 귀족으로 편입시키는 등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게다가 카자크들이 황제의 호위병 역할을 해주고, 많은 전쟁과 전역에 꾸준히 참여하자 카자크들에게 주어지는 토지가 급격히 늘어남과 동시에 알렉산드르 2세의 <농노 해방령>이 발표되면서 계층 분화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됐다.

1861년 <농노 해방령>이 시행되면서 해방된 농노 출신들이 카자크인이 보유한 비옥한 남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돈바스, 캅카스 등으로 일자리를 찾아 대거 이주하였다. 이들은 '이노고로드니예'(Inogorodnie)[24]라 불렸고 카자크인 지주들의 소작농이나 농번기에 품팔이로 생계를 어렵사리 꾸려나갔다. 혁명 직전인 1917년을 기준으로 남부 러시아의 이노고로드니예의 94.8%는 어떤 토지도 소유하고 있지 못했다.[25] 카자크 촌으로 과거 농노였던 사람들이 토지를 경작하기 위해 몰려오자 비 카자크 농민도 카자크 마을의 중요한 구성원이 됐다. 19세기 후반이 됐을 때, 카자크 마을엔 이미 카자크뿐만이 아니라 러시아인이나 바시키르인, 타타르인과 같은 여타 민족이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됐다. 이 같은 인구 유입의 결과, 남부 러시아에서 카자크인이 차지하는 인구 비중이 상당히 줄어들었다. 제1차 세계대전 무렵이 되면 돈-쿠반 일대에서 카자크인은 전체 인구의 약 43% 수준이 되었다.[26] 이들은 상층 카자크의 토지를 경작하며 하층 카자크와 비슷한 처지에 있었다.[27]

19세기 중후반부터 제정 러시아의 중앙집권화와 급속한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비 카자크인 뿐 아니라 카자크인 내부에서도 빈부격차가 심화되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토지를 넓게 경작하는 부유한 카자크들과 적은 토지를 경작하거나 토지가 없는 가난한 카자크의 구분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카자크인들의 본거지인 남부 러시아에서는 인구의 상위 25%가 전체 토지의 75%를 소유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르 2세의 대개혁으로 토지 분배와 계층 분화가 일어나긴 했지만, 돈 카자크들은 다른 러시아 농민들보다는 훨씬 여건이 좋았다. 카자크들은 원래부터 자유민들이었기에 대다수 러시아 농민들이 가지고 있었던 농지와 목초지 부족 문제, 토지 상환금 납부 문제에서 자유로운 편이었다. 카자크 마을이 가진 토지 안정성은 다른 유럽 러시아 지역의 농민 마을들보다 훨씬 높았다. 또한 카자크들은 대개혁 이후에도 러시아 가축 시장의 큰 손으로 군림했으며, 마을에선 상품 작물 재배와 와인 주조 등 상업적 농업이 성행했다. 그리고 카자크 마을은 대개혁 이후에도 그 규모가 축소되지 않았기에 카자크들은 대개혁의 충격을 잘 견뎌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빈곤한' 카자크인들은 비 카자크 농업 노동자(이노고르도니예)나 러시아 제국의 다른 지역 주민들보다는 경제적 여건이 양호했다고는 해도 현실에 대한 불만과 환멸이 계속 누적되고 있었다.

러시아 제국 정부는 이러한 일련의 조치를 통해 카자크를 충분히 통제하고 이용할 수 있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러시아 혁명 이전까지, 러시아 제국 내에서 민중들의 항거가 계속되고 사회주의 사상과 노동 운동, 반봉건 운동이 널리 퍼지게 되자 카자크는 시위 진압대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로 떠올랐다. 특히 1905년의 1차 러시아 혁명 당시, 시위대에게 말을 타고 달려드는 그들의 모습은 오랫동안 러시아 민중들에게 각인됐다.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의 영화 <전함 포템킨>에서의 카자크들이 잔인하고 악랄한 모습으로 그려진 건 우연이 아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러시아에 볼셰비키 지지파인 적군과 황제, 멘셰비키, 입헌민주당 지지파인 백군 사이에 내전이 벌어지자 카자크들도 둘 중 하나의 세력을 선택해야만 했다. 원래 공동생활을 하던 카자크도 이때쯤이면 계급 분화가 어느 정도 벌어진 상태였고, 남부 러시아에서 카자크인 사회는 백군과 적군으로 갈라져 치열하게 대립했다. 대체로 귀족 계급 및 사회 상류층 카자크인은 반혁명군 편에, 빈농 계열 카자크인들은 소비에트 편에 섰다. 남부 러시아의 카자크인 및 카자크인 사회에서 같이 살던 이노고르도니예 출신들은 내전기간 동안 백군과 적군 양측 기병전력의 핵심이 되었다.

카자크의 대추장 아타만을 비롯한 여러 상층부는 백군 기병대로 활약했고, 계층 분화로 인해 하층민에 속하던 카자크는 많은 수가 세묜 부됸니 원수 휘하의 적군 기병대로 들어가 활약했다. 이 시기에 러시아인뿐만이 아니라 카자크간의 동족상잔이 자행됐다. 러시아 내전의 연장 선상에서 발발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선 카자크의 오랜 숙적이자 카자크와 함께 유럽 대륙 기병대의 투톱을 자랑하던 폴란드 기병대와 잦은 전투를 벌였다. 러시아 내전은 끝내 소비에트 정권의 승리로 끝났고, 패배한 백군 측의 카자크는 대부분 백군들의 말로가 그렇듯이 외국으로 망명하든, 추방당했든 결국 러시아를 떠났다.[28]

이 시기의 좌•우 갈등으로 쉴 새 없이 죽어나간 카자크들의 비극을 묘사한 작품으로 《고요한 돈강》이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 멜레호프는 카자크족 빈민 출신으로, 혁명과 내전이 벌어지자 계속 백군과 적군을 오락가락하면서 좌•우 갈짓자 행보를 보여준다. 바로 이것이 혁명에 휘말린 카자크족을 상징하는 모습이었다. 이 책의 저자 미하일 숄로호프노벨문학상을 받았고, 이 작품은 1950년대에 컬러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한국에서도 냉전 말기에 소련 영화 수입금지가 풀리자 비디오로 출시됐다. 사람을 마음대로 동원할 수 있는 소련에서 만든 영화답게 크고 웅장한 스케일에 CG 없이 그냥 사람들을 동원했다. 참고로 이 책은 서슬이 퍼렇던 스탈린 시절에도 높이 평가받았는데, 주인공의 갈짓자 행보 때문에 공산당 측에서 많은 비판을 했음에도 워낙 문학성이 뛰어나서 숄로호프는 큰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내전기의 카자크들이 보여준 행보는 굉장히 복합적으로 다뤄야 할 문제다. 미국인 존 리드가 쓴 《세계를 뒤흔든 열흘》이란 러시아 혁명 르포에서 블라디미르 레닌이 보여준 카자크관과도 너무 다르다. 《세계를 뒤흔든 열흘》에 따르면 당시 블라디미르 레닌과 레프 트로츠키는 "토지없는 카자크들", 즉 빈농 계열 카자크들이 소비에트를 조직해 볼셰비키에 합류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이미 2월 혁명 이후로 돈과 쿠반 지역에는 노동자 - 농민 - 병사 소비에트들이 조직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돈 지역에서는 아타만 칼레딘으로 대표되는 카자키 아타만 정부와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을 중심으로 구성된 평의회 간의 타협이 실패하고, 여기에 볼셰비키 · 사회혁명당 좌파 세력까지 힘을 키워 3파전이 벌어졌었다. 쿠반 지역의 경우에는 카자키 상층부들도 대다수가 멘셰비키, 사회혁명당, 입헌민주당을 지지하는 상황이어서 이들을 단순하게 극우 세력이나 반볼셰비키 우파 세력으로 간주하기가 어렵다. 프랑스의 방데 지역이 그랬던 것처럼 쿠반 지역의 카자키 상층부와 그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카자키 군사 정부는 반혁명이 아닌 볼셰비키의 10월 혁명에 반대하는 일종의 대항 혁명을 지지했다고 볼 수도 있을 정도이다.

스탈린 집권시기인 1932년 스탈린이 무자비한 농업집산화와 식량 징수를 하면서 그에 대한 역효과로 소련에 대기근이 닥쳤는데, 불행히도 이 기근이 우크라이나 외에도 쿠반강 유역의 돈 카자크들에게까지 직격탄을 먹여 그 지역 인구의 2~30%가 사망했다. 이 기근은 우크라이나 전역과 캅카즈 지역 전체, 그리고 러시아 남부 지역을 덮친 것으로 그 자세한 것에 대해선 (우크라이나 대기근 참조)

그러나 소련 정부는 이 기근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기는 커녕 얼마 없는 곡식들을 빼앗아 카자크족을 죽게 내버려둘 뿐만 아니라 겨울에 많은 카자크족들의 집을 부수고 협동농장에 부역하도록 했고, 이는 많은 카자크족들이 겨울에 아사하거나 얼어죽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들의 상황이 너무 참혹해 소련의 작가 미하일 숄로호프는 스탈린에게 상황 개선을 촉구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가의 청원을 어여삐 여겨 들어주는 척하긴 했지만, 결국 달라진 건 거의 없었다.

돈 카자크들이 소련 체제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는 친서방적이거나 반소적인 카자크[29]와 친소적인 카자크 간의 이야기가 매우 다르다.

친서방적이거나 반소성향의 카자크들은 카자크족이 다른 불온민족들처럼[30] 대대적인 탄압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주장하는 바로는 소비에트 정부 수립 직후부터 카자크의 민족성과 종교를 말살하려는 목적으로 수만명을 강제수용소에 집어넣고 죽였고, 이오시프 스탈린 치하엔 반유목생활을 하는 이들을 억지로 잡아다가 콜호스 등의 협동농장에 부역시켰다고 한다. 그래서 이러한 강압정책으로 사망한 카자크들이 약 30만 명 정도로 추정되며, 이래서 소련 당국에 대한 반감이 극심했다고 말한다. 특히 1930년대 중반부터 반소적인 카자크 부족들 사이에서 카자크족들의 국가를 세우자는 독립사상이 생겨 저항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친소적인 카자크들의 주장은 탄압 자체를 부정하는 경우와 탄압은 있었지만 과장된 면이 있다는 주장으로 갈린다. 친소적인 카자크들은 1936년에 카자크족의 전면적인 입대[31]가 허용되면서 소련군에 입대하기도 했다.

러시아 내전기 및 소련 치하의 카자크에 대한 탄압은 관점의 차이에 따라 의견이 갈려서 이분법적으로 단순히 나뉠 수 없다. 카자크들마다 성향이 달랐기 때문인데 당장 차르 정권은 역사적으로 카자크들을 러시아 내부의 소수 민족이나 사회주의자, 자유주의자 탄압에 특화된 내부 치안 부대로 중용했고, 이 와중에 많은 수의 카자크가 특히 돈강과 우크라이나 유역의 데니킨에서 시베리아의 콜차크까지 백군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중반기까진 별 활약이 없었으나 전쟁 말기 에게 초가지붕의 지푸라기를 먹여가면서 3일 동안 쉬지 않고 말을 달려 허둥지둥 내빼는 독일군 도륙하는 용맹함으로 독일군과 소련군 모두를 질리게 했다고도 한다.

러시아 내전 시기부터 소련군 기병부대엔 카자크 출신이 많았으며, 기병 총감인 세묜 부됸니 원수부터 카자크 출신으로 알려져 있었다.[32] 많은 카자크들이 나폴레옹 전쟁 때처럼 소련군에 복무해서 싸웠다.

산하에 카자크 기병을 부대로 둔 소련군이반 코네프 원수는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카자크의 용맹을 묘사하면서
"걔네들은 항복하겠다고 든 독일군의 두 손까지 잘라버리더군..."
이라고 이들의 용맹성을 묘사했다. 물론 덕분에 독일군도 카자크들에게 항복하면 어떤 꼴을 당할지 알고 있었기에 카자크들을 사로잡으면 대부분 사살했다. 카자크들이 이렇게 잔인한 전쟁범죄를 저지른 이유는 카자크들의 전근대적인 사고방식 탓도 있었지만 당시 독일군은 동부전선에서 집단학살을 계획적으로 진행했었고, 포로로 잡힐 시에 끔찍하게 죽을 것이란 공포감이 만연했던 이유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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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6월, 독소전쟁 승리 기념 퍼레이드에서 붉은 광장을 행진하는 카자크족 부대.

독일군에도 카자크가 있었다. 나치 독일독소전쟁에서 포로로 붙잡은 카자크들과 전향한 보수파 장군인 표트르 크라스노프가 함께 2개 카자크 기병 사단을 창설했으며[33] 독일인인 헬무트 폰 판비츠 장군이 지휘했다. 이들은 러시아 혁명 이후 망명했다가 후에 독일에 붙은 카자크 출신 러시아군 장군들에 호응하거나 소련의 문화적 억압에 대한 반감 때문에 독일 측에 부역했는데 독일은 이들을 완전히 믿지 못했기에 소련군에 대한 작전보단 후방의 빨치산을 진압하는 데 자주 동원했다. 대전 말기에 이들은 SS 15 카자크 기병군단으로 편입됐고, 대소련 방어전에 투입됐다.

이들은 후퇴하는 독일군을 따라 독일 영내로 진입했고, 독일이 항복하자 오스트리아의 린츠에서 연합군에 항복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카자크들은 연합군에게 항복했으니 안전하다고 믿고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의 후임으로 독일 대통령이 된 카를 되니츠도 이런 기대를 하고, 독일이 연합군과 강화를 맺으면 그나마 소련에게 넘겨지는 것보다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얄타 회담으로 소련과 협의된 영국군은 이들을 몽땅 스탈린에게 넘겨버렸다. 거의 유일한 예외는 호주로 도망치는데 성공한 이반 코노노프 정도다. 이 사람은 KGB의 추격도 받았으나 끝내 살아남았다가 나중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34] 다만 이들 중 헬무트 폰 판비츠는 주요 지휘관들 중 유일하게 독일인이라 송환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었으나 휘하 부하들을 버리지 않고 자신도 소련으로 자진해서 간, 굉장히 특이한 케이스이다.

이들은 결국 넘겨지자마자 지휘관급 인물들은 모두 교수형에 쳐해졌고, 나머지는 시베리아로 끌려갔다가 니키타 흐루쇼프 집권 시대에 사면되거나 일부는 그 사면마저도 다시 취소됐다. 일례로 헬무트 폰 판비츠 같은 경우에는 소련 해체 이후 스탈린 시대의 피해자로 규정되어 다시 재판을 받았다가 전쟁범죄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블라디미르 푸틴 집권 후 번복되었다.

여기에 연합군은 소련 시민이 아니었던, 러시아 혁명 당시 난민으로서 이주해 한 세대가 넘은 카자크들까지 전부 다 넘겼다. 민간인 포함 50,000명이나 된다.[35]

물론 독일 편에 선 카자크들도 나름의 입장이 있었다. 스탈린과 공산당은 순응하지 않는 카자크들을 포함해 반대파를 매우 가혹하게 탄압했으며, 그런 상황에서 자기들을 탄압하던 공산당원들을 무찌르고 좋았던 옛날로 돌아갈 수 있다는 감언이설을 들었으니 솔깃할 만도 했다.[36] 소련 입장에선 그저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들과 손잡은 반역자들일 뿐이었지만.자기네 한 짓은 생각 않고

007 골든 아이가 바로 이때 배신당한 카자크의 아들인 006 알렉 트리벨리언 요원(숀 빈 役)이 소련과 영국을 상대로 벌이는 복수극을 다루고 있다.[37]

돈 카자크들은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용맹으로 전투종족의 명성을 회복했지만, 소련군이 전후 대대적으로 기계화를 추진하면서 기병 병과 부대가 모두 기계화 보병, 혹은 기갑 부대 등지로 개편되자 기병 부대 담당 카자크들은 또 다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고, 카자크족 부대는 해체됐다. 이와 함께 카자크족 자치공화국도 폐지됐다. 그래서 이들은 그저 이후 농민이나 일반 시민으로 돌아갔다. 거기다 상술했듯 민간에서는 백계 카자크의 나치 부역으로 인해 충성파 카자크들도 '잠재적 배신자'로 여겨지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글라스노스트 &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소련 전역에서 카자크 부흥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고, 1989년 소련 정부가 약소민족에 대한 탄압을 인정했다.

소련 해체 이후 1992년러시아에서 억압받은 민족에 대한 복권을 보장하는 법이 제정되자 카자크 부흥 운동은 더욱 탄력을 받았다. 카자크에 대한 일련의 법들이 제정됨은 물론 1996년~1998년 2년 동안 10개의 보이스코(10,000명 이상일 경우)와 3개의 관구(2,000명 이상), 4개의 개별 집단이 등록됐다. 2002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14만 명이 러시아에 살고 있으며 95% 이상이 러시아 남부 관구에 살고 있다.

카자크는 또한 그들의 단합과 문화 복원, 전통전승 등을 위해 텔레비전 채널을 개통하거나 인터넷 방송을 만들고 자체적으로 영화를 만들기도 해 활발한 복원 운동을 벌이고 있다. 문화센터는 물론 카자크 자체 미인대회도 열리고 있을 정도. 이런 카자크 문화 강조 노력 중에서 가장 성공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쿠반 카자크 합창단이다. 유튜브에 동영상이 많이 있다.

특히 이들이 주로 거주하는 남부 관구는 캅카스 계통의 비슬라브 거주민이 상당히 많은 지역인데, 예로부터 이 지역의 다양한 민족들의 호전적인 기질은 유명했다. 특히 체첸인들이 악명이 높았다.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끌려간 고려인들도 같은 처지로 그곳으로 끌려온 체첸인들에게 크게 학을 뗄 정도로.[38] 그런데 이런 체첸인들이 유일하게 겁내는 사람들이 바로 카자크족들이라고 한다.[39] 그 영향으로 체첸 사태 당시 체첸 및 잉구세티야에 거주하던 카자크들인 테레크 카자크 공동체들은, 사태 당시 대규모 러시아인 탈출 혹은 추방으로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물론 아타만과 테레크 카자크 자체는 여전히 존속중이지만 그 숫자는 크게 감소했다.

러시아군에서의 대우 또한 매우 좋아졌다. 러시아 정부는 카자크족 대추장(아타만)에게는 원수의 계급을 수여했고, 군인의 용맹을 제일로 치는 카자크족들은 다시 군대로 들어가서 러시아가 관여하는 전쟁들의 선봉에 서고 있다. 특수부대 혹은 해외 원정군의 일원으로 체첸 전쟁이나, 남오세티야 전쟁에서 크게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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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크림 위기 당시 러시아군 소속의 카자크 병사들.

4. 전투민족

기마에 능했으며 매우 용맹하고 난폭하고 상무적인 기질을 갖고 있었다. 특히 우크라이나의 자포로자 카자크들이 그러했다. 그렇지 않으면 튀르크계 유목민인 크림 타타르족이 상습적으로 약탈과 납치 및 인신매매를 벌이는 체르노젬 대평원에서 농토를 지키며 살아남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40] 정확히는 방어를 잘해서 지킨게 아니라 똑같은 방법으로 타타르족을 습격해 약탈하고 주민을 납치해 노예로 팔아버리는 방식으로 지킨 것이었다. 거기에 방해가 되면 같은 슬라브인이라고 봐주지 않았다.

슬라브 민화에 카자크가 등장할 경우 그야말로 귀신도 때려잡는 초인적인 용사로 묘사된다. 어떤 시골 마을에 밤이면 밤마다 쵸르트(마귀)와 레쉬(망량)들이 몰려와서 주민들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던 와중에, 막 “차르의 군대”에서 제대한 카자크 전사가 귀향길에 우연히 들러 사정을 듣고 해가 지자마자 몰려온 쵸르트와 레쉬들을 혼자서 다 죽여버린 뒤 유유히 제 갈 길을 간다는 전개는 슬라브 민화의 클리셰 중 하나다. 그 무섭다는 마녀 바바 야가도 카자크 전사에게는 시비를 걸지 않는다. 물론 민화 자체는 창작물이지만, 슬라브 민족들이 카자크 전사들에 대해 갖고 있는 전반적인 인식이 어땠는지 반영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들의 용맹함은 러시아의 시베리아의 개척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16세기 이후 몽골로부터 독립한 러시아가 이들을 앞세워 시베리아를 차지하고 있던 몽골계 유목민족들을 모두 멸망시키고 시베리아 동쪽 끝까지 정복해 나간 것이다. 예니세이스크, 하바롭스크, 토볼스크 등의 시베리아의 도시들은 대부분 이들이 요새화한 정착지에서 기원하며 '예르마크 티모페예비치'(Ермак Тимофеевич)가 이끄는 카자크 부대는 1581년 사설원정대 주제에 시비르 칸국의 수도까지 정복해 시비르 영주로 인정받기도 했다.

그리고 러시아가 극동을 개척할 때 호랑이 사냥에 나선 것도 코사크였다. 극동에 서식하던 호랑이 개체수가 눈에 띄게 감소할 정도였다.

더군다나 기마민족답지 않게 해적질에 나선 적도 있다. 사하이다치니가 수령으로 있었던 17세기 초엔 '차이키'[41]란 소형선박을 300척 가량 건조한 후 그 선박을 가지고 흑해를 휩쓸었다.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코스탄티니예 근교까지 약탈하고, 크림 반도의 타타르족이 운영하는 흑해 최대의 슬라브 노예 거래소를 털면서 그 곳을 지키던 14,000명의 병력을 몰살시켜 버릴 정도로 활약하는 통에 흑해는 한때 '카자크의 바다'로 불리기도 했다.

나중엔 메흐메트 4세[42]가 보낸 오스만 제국 원정군을 패배시키고선 메흐메트 4세가 항복을 권고하는 편지를 보내자 어마어마한 욕설이 담긴 편지를 보내 보복했다. 다만 이들이 보냈다는 편지의 원본이 남아 있지 않고 18세기에 만들어진 사본만 현재 남아있어 그 사본이 원본을 얼마나 정확히 필사한 것인지를 따지고 들어가면 답을 할 수 없으며, 때문에 편지의 판본 또한 여러 개가 있다. 현재는 민간에서 전승되는 과정에서 과장됐거나 창작된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지만, 사실이야 어찌 됐든 19세기 러시아를 대표하는 화가 가운데 한 사람인 일리야 레핀이 이 이야기에 관심을 보여 그림을 그린 덕에, 이야기 자체는 널리 알려졌다.

그가 보낸 편지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Я, султан і владика Блискучої Порти, син Мухаммеда, брат Сонця і Місяця, внук і намісник Бога на землі, володар царств Македонського, Вавілонського, Єрусалимського, Великого і Малого Єгипту, цар над царями, володар над володарями, винятковий лицар, ніким непереможний воїн, невідступний хранитель гробу Ісуса Христа, попечитель самого Бога, надія і втіха мусульман, великий захисник християн, повеліваю вам, запорозькі козаки, здатися мені добровільно і без жодного опору, і мене вашими нападами не змушувати перейматись.
술탄이자 예언자의 아들, 해와 달의 형제, 천상의 자손이자 하느님의 지상대리인이며 마케도니아바빌론, 예루살렘, 상•하 이집트의 군주, 제왕 중의 제왕이자 군주 중의 군주, 이 시대의 걸출한 기사, 끈질긴 성묘의 파수꾼, 하느님께 기름부음 받은 자, 무슬림들의 희망이자 기쁨, 위대한 그리스도교의 수호자인 짐은 너희 자포로제 코자키들이 어떠한 저항없이 자발적으로 짐에게 복종할 것과 무의미한 공격으로 짐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을 것을 명하노라.[43]

Султан турецький Мухаммед IV
술탄 메흐메트 4세

이에 헤트만 이반 시르코(Іван Сірко, 1610~1680)를 비롯한 자포로자 카자크들은 술탄의 편지에 너무나 감동하고 기쁜 나머지 정성과 마음과 혼을 담은 사랑의 편지를 보냈는데...
Запорозькі козаки турецькому султану!
자포로자 코자키들이 터키 술탄에게 고한다!

Ти — шайтан турецький, проклятого чорта брат і товариш і самого Люцифера секретар!
"오오, 튀르크의 사탄이자, 저주받은 마귀들의 형제이자 벗, 이오스포로스의 부하놈아!
Який ти в чорта лицар, що голою сракою їжака не вб'єш?
너는 무슨 악마놈의 기사이길래 자기 똥구멍에 달라붙은 고슴도치 하나도 죽이지 못하느냐?
Чорт висирає а твоє військо пожирає. Не будеш ти синів християнських під собою мати, твого війська ми не боїмось, землею і водою будем битися з тобою!
네 군대는 악마들이 싼 똥이나 먹지 않느냐. 너는 절대로 그리스도인의 자손들을 발밑에 두지 못한다. 우리는 너의 군대가 전혀 무섭지 않으니 뭍에서건 물에서건 너와 대적할 것이다!
Вавілонський ти кухар, македонський колісник, єрусалимський бровирник, Олександрійський козолуп, Великого й Малого Єгипту свинар, вірменська свиня, татарський сагайдак, кам'янецький кат, подолянський злодіюка, і всього світу і підсвіту блазень, самого гаспида внук і нашого хуя крюк, а нашого Бога дурень. Свиняча морда, кобиляча срака, різницька собака, нехрещений лоб, мать твою вйоб!
너는 바빌론의 군바리, 마케도니아의 차륜공, 예루살렘의 양조꾼, 알렉산드리아의 염소치기, 상하 이집트의 돼지치기, 아르메니아의 수퇘지, 타타르의 좆집, 카먀니츠의 망나니, 포돌리아의 도둑 그리고 이승과 저승을 통틀어 가장 우스운 광대놈이다. 이 천상의 지진이자, 악령의 핏덩이, 우리의 발기한 자지, 돼지의 주둥이, 암탕나귀의 궁둥이, 도살장의 개대가리같은 이교도 놈아, 니 엄마다!
Отак тобі козаки відказали, плюгавче! Невгоден єсі матері вірних християн!
이것이 코자키 나으리들께서 그리스도인의 돼지를 몰 자격도 없는 너에게 하사하는 답장이다!
Числа не знаєм, бо календаря не маєм, місяць в небі,
끝맺으면서 말해두겠는데 우린 숫자도 모르고 달력도 없다.
місяць в небі, рік у книзі, а день такий у же, як і у вас,
달은 하늘에 떠 있는 것이며, 년도는 책에 쓰여있고, 날짜는 네가 있는 곳의 날짜와 똑같으니까.
поцілуй у голе гузно кожного з нас!
그러니 우리 엉덩이에 입이나 맞춰라!"

Підписали: Кошовий отаман Іван Сірко зо всім кошом запорізьким
코쇼비 오타만 이반 시르코 및 자포리자 형제들 일동[44]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Repin_Cossacks.jpg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4세에게 답장을 보내는 자포로제의 카자크'
Reply of the Zaporozhian Cossacks to Sultan Mehmed IV of the Ottoman Empire

- 일리야 레핀(Ilya Repin) 그림 1891년 출처 - 위키피디아[45]

참고로 이 그림은 한국사와도 인연이라면 인연이 있는데 그 유명한 모스크바 3국 외무장관 회의 때 이 그림이 걸려 있었다. 영국 외무장관 어니스트 베빈이 이 그림을 좋아했는데 이를 알게 된 몰로토프가 회담장에 이 그림을 걸어놓으라고 지시했고 베빈은 한참동안 그림을 감상했다고 한다.


위의 그림이 움직이는 버전.

저 '민족 기록화'는 러시아를 비롯한 러시아 제국 영항권 내에 있던 국가들에서 상당히 많이 패러디되었다.
스톨리핀 수상에게 답장을 보내는 1907년 두마 의원들
영국인 커즌에게 답장을 보내는 볼셰비키들
독일 총통에게 답장을 보내는 벨라루스의 파르티잔들 1980년, 니콜라이 솔로민(Nikolay Solomin)
러시아의 적들에게 답장, 2017년
우크라이나 전쟁 사태가 터지자 우크라이나에서 패러디하기도 했다.
모스크바의 차르에게 답장을 보내는 우크라이나 의원들, 2018년
우크라이나군 병사들의 답장, 2022년

5. 한국과의 관계

카자크, 그중에서도 특히 돈 카자크는 한국과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고 받았던 유럽계 민족 집단이다. 상술한 대로 러시아의 시베리아 및 극동 지역 확장에 돈 카자크가 주도적인 역할을 맡아 선봉에 섰기 때문이었다. 당장 17세기 나선정벌 당시 조선과 맞붙었던 러시아 병사들이 카자크였고, 19세기 말 러시아와 국경을 접한 이후에는 다양한 사유로 조선과 카자크의 접촉이 늘었다.

경제적으로는 함경도연해주의 커넥션이 더욱 깊어지면서 조선인들과 러시아인들의 인적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단적인 예로, 함경도에서는 카자크들의 전통춤인 '고팍'이 유행해 어린아이들까지 따라했을 정도였으며, 한편으로 카자크들은 국경에서 곡식이나 군마, 소 등의 생필품들을 사 가고는 했다. 코르사코프 동시베리아 총독이 보았을 때, 유럽에서 식량을 가져오는 것보다 가까운 조선에서 식량을 사는 것이 더 경제적으로 이득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열차도 제대로 개통되지 않은 미개척지에서 유럽산 식량만을 멍하니 바라볼 수는 없는 노릇이기도 했고. 매달 250~300마리의 소들이 조선에서 수입되었고, 1895년 한 해에는 밀매된 분량까지 합쳐 40,000마리 가량이 러시아에 판매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많은 수의 조선인들이 극동으로 이주하면서 카자크의 이웃이 되었다. 단적인 예로, 아무르 지역 최초의 고려인 마을인 블라고슬로벤노예는 시넬니코프 총독의 명령으로 이주된 조선인들이 카자크로부터 임차한 31 데사티냐의 땅이 기원이다.

하지만 군사적으로는 당연히 함경도 지방군과 러시아 제국군 간의 국지전이 때때로 벌어지면서 긴장 상태를 유지했다. 또한 이 당시 한양에서 돈 카자크들의 악명은 유럽 못지않았다. 다음은 황현이 《매천야록》에서 밝힌 증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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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일전쟁 중 한국인 마을을 습격하는 250년 전의 복수를 단행중인 카자크 기병을 묘사한 삽화[46]
아라사의 서북부에 가살극(코사크)이 있는데 그 사람들은 사납고도 악독하여 구라파 사람들이 두려워했다.
그들은 우리나라에 와전되어, '가살극 사람들은 퇴화되지 않은 꼬리가 있으며, 사람 고기를 식량으로 삼는다'고 소문났는데, 그들이 요즘 우리나라에 들어와 강토를 짓밟으며 남하하였다. 안주의 어느 백성이 암말을 잡아매고 편자를 박다가 갑자기 돌아다니던 아라사 병사를 만나자 말을 미처 풀지도 못하고 달아났다. 아라사 병사들이 이 암말을 보더니 돌아가며 음란한 짓을 하였다. (이 소문을 듣고)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이들이 가살극인데 성품이 가장 음탕해서, 부녀자를 만나면 늙었는지 젊었는지도 묻지 않고 문득 범한다.
숫양처럼 하루에 수십 번이나 교합하므로 그들이 지나가는 곳에는 부녀자의 그림자도 없었다."

그들은 또한 의심이 많아서, 늘 약탈하다가도 네댓 명이 모여있는 것을 보면 침입하지 못하며, 먹을 것을 보면 소나 말처럼 반드시 생채로 씹어먹었다. 그들은 말도 잘 타서 한번 휘파람을 불며 달리면 눈 깜짝할 사이에 10여 리를 달렸다. 용모가 비록 사납게 생겼다고는 하지만 사람을 만나도 죽이지 않았으며, 도리어 부드러운 빛을 보였다. 그들을 볼 때마다 이를 가는 자는 오직 왜놈뿐이었다.
이때 왜군은 황해에 퍼져 있으면서 자기 나라의 식량과 기계 운반 말고는 통행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는 다른 배를 타고 우리나라 사람으로 분장하여 평안도 지방을 드나들며 아라사를 정탐했는데, 아라사가 그것을 알고 엄히 수색하여 머리 깎은 자를 보면 그 자리에서 죽였다. 그래서 스님들 가운데 죽은 자가 수백 명이나 되었다.[47]
날씨가 추워서 사람들이 방한모를 썼는데, 아라사 군사들이 사람들을 만나면 칼 끝으로 모자를 벗겨 머리를 깎았는지 아닌 지를 조사했다.

-《매천야록》, 황현-

러시아 내전 당시 시베리아 전역에서도 적군과 백군 간에 혈전이 벌어졌다. 러시아인을 제외한 극동의 양대 축이었던 고려인과 카자크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상당수의 아무르 카자크들은 백군 편에 가담하였고, 고려인들은 반대로 각자의 이유[48]로 백군에 서거나 적군 편에 섰다. 이 때문에 두 민족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단적인 예로, 당시 연해주에서 대한의용군사회 중대장으로 적군 편에서 독립운동 중이었던 김홍일 국군 중장[49]볼로차예프카 전투[50] 직후 한인특립보병대 연대장으로 승진하여 아무르 일대의 넓은 지역을 경비하게 되었다. 회고록 《대륙의 분노》에서 밝히 바에 따르면, 이는 백군 지지층이었던 아무르 카자크 주민들을 감시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사상적 대척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는 두 민족이었지만, 의외로 사이는 좋은 편이었다. 처음에는 고려인 부대를 두려워하던 주민들도 일손을 거들어주는 대원들에게 점차 마음을 열었는데, 특히 문맹률이 높아 실생활에 어려움을 겪던 것을 고려인들이 도와주면서부터였다고 한다. 편지를 쓰고 읽질못하거나, 러시아어 《성경》을 가지고만 있고, 읽지는 못했던 것을 상대적으로 식자층이 많았던 고려인 병사들이 기꺼이 대필해주고 대신 읽어 주면서 친해졌다고 한다.

당시 김홍일 중장은 선봉에서 백군 및 일본군과 싸우지 못하는 것, 그리고 고려인 독립운동 세력 안에서 내분이 일어나는 것에 진저리를 내고 있었는데, 그런 상황에서도 한편으로는 자기 부하들과 관할 지역 카자크 주민들이 좋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에 내심 흐뭇해했던 듯하다. 이후 소비에트 러시아가 일방적으로 한인특립보병대를 해체시키자 격분하여 러시아를 떠나면서도, 그는 자기 부하들과 가족들의 안전을 보장받는 각서를 받아내고서야 출국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순수했던 시베리아 주민들이 그립다며 다시 한번 찾아가고 싶다는 소회를 밝히면서도, 소련 정부의 폭정 아래 이들이 얼마나 변했을지 모르겠다고 한탄했다. 불행히도, 연해주에 남은 그의 부하들과 가족들은 20년쯤 뒤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하게 되었다.

6. 문화

율 브리너 주연의 영화 대장 불리바로도 잘 알려진 니콜라이 고골의 소설 《타라스 불바》에 의하면, 어린아이 같은 식성을 가지고 있었다. 메밀죽을 얼마를 쑤든 간에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먹고, 남아돌면 남아도는 만큼 몽땅 먹어치워 버린 것. 게다가 도 무진장 퍼마신다. 《타라스 불바》에선 두꺼운 코트를 껴입고 땀을 뻘뻘 흘리는 한 코자키 남자가 나온다. 타라스 불바가
"왜 더운데 그렇게 옷을 껴입고 땀을 뻘뻘 흘리나? 꼭 삶은 문어 같군"
이라고 한마디 하자, 그 남자의 대답이 가관이다.
"벗을 수가 없어요! 이 옷마저 벗었다간 당장에 술로 맞바꿔 마셔버릴지도 모르니까요."
특히 고골은 우크라이나와 관련이 깊은 작가인지라, 자포로제 카자크가 소설의 소재로 자주 등장한다.

비이》(Вий)란 꽤 복잡한 소설이 있다. 대부분은 당시 부패하고 세속화된 정교회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호마가 마녀와 만나 벌어지는 사건을 그리는 단편소설이다. 또한 호마가 기도해줘야 하는 시체가 밤만 되면 살아난다. 이 《비이》(Вий)에서도 주인공 수도자 '호마 부르투스'가 코자키 족장의 마을에서 기도를 하게 되는 상황이 등장하는데, 이때 호마가 도망치려고 하자 족장이
"이 친구들, 보드카만 주면 네가 죽었는지도 모르고 두들겨 팰 텐데? 성공하면 금화 1,000개, 실패하면 빠따 1,000대야."
라고 정중히 협박한다.

상술한 페레야슬라프(페레야슬라우) 조약과 본격적으로 로마노프 왕조 러시아와 관계를 맺게 된 계기인 정교회만 해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1620년, 가톨릭 측의 정교회에 대한 공세가 절정에 달해 우크라이나 현지엔 신자들은 아직 많이 있어도 교회 구조와 주교좌는 텅텅 비었던 시절에 예루살렘 총대주교였던 테오파네스 3세가 모스크바 총대주교로 선출된 필라렛 로마노프[51]의 주교 임명을 축성하러 모스크바까지 가던 중, 키이우 근처에서 자포리자 코자키 한 일당에게 붙들렸다.

테오파네스 총대주교에게 코자키들이 루테니아 정교회 조직을 다시 만들고 사제들을 다시 축성해 달라면서 부탁하며 하는 말이,
"목자를 필요로 하는 양떼가 여기 있는데 이들을 버리고 가는 건 기독교인답지 못합니다. 하물며 이런 위험천만한 지방을 총대주교 성하께서 여행하시는데 중간에 맹수나 도적떼의 습격을 당하실 수 있어 걱정됩니다."

그러나, 위의 사례는 카자키의 '문화'에서 다루기 보다는 정치 분야에서 다루는 게 맞는 일이며, 실제 사건과는 상당히 큰 차이가 있다. 1620년, 카자키 아타만 사하이다치니 휘하의 카자키들은 모스크바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던 테오파네스를 납치해 키예프로 데려가고는, 공직 상태에 있던 루스 교회의 여러 성직에 성직자들을 서임하고 축성하는 일을 강요했다. 이는 성직자 서임권을 행사하던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였고, 이 소식을 접한 지그문트는 즉각 테오파네스가 서임한 루스 교회의 주교와 사제들을 체포할 것을 명령했다.

카자키들이 이러한 일을 한 이유는 폴란드 - 리투아니아 연방의 우크라이나 폴란드화 정책, 카톨릭과 정교회를 일치시킨 통합 교회(우니아트)의 출범, 통합을 빌미로 정교회를 카톨릭에 흡수시키려 하는 폴란드의 음모에 대항하고자 함이었다. 이를 통해 카자키들은 폴란드의 교회 통합에 맞서 정교회 신앙을 지킬 기반을 마련했고, 카자키들의 반항에 강경한 태도로 맞선 지그문트는 오스만과의 전쟁에서 카자키들의 군사력이 필요했기에 결국, 카자키들이 임명한 성직자들을 끌어내지도, 카자키들을 징벌하지도 못하게 되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37px-Russian_cossacks_in_Paris_streets_in_1814.jpg
1814년 나폴레옹의 패배 이후 파리에 들어온 카자크들은 파리의 카페란 카페는 온통 전세를 내서 당시 프랑스엔 없던 보드카를 달라고 난리를 피우는가 하면, 성질도 급해서 "빨리빨리!"를 외치면서 음식을 재촉하곤 했다고 한다. 러시아어로 '(더)빨리!'를 '브이스뜨러!'(Быстро)라고 하는데, 여기서 간단한 식사를 빨리 할 수 있는, 카페와 식당의 중간 정도 성격을 가진 프랑스 식당이란 뜻의 '비스트로'(Bistro)가 탄생했다.[52] 스탈 부인은 충격과 공포
"파리에 코사크 기병이라니!"
라고 한탄하기도 했다. 이때 카자크 민요인 <코자키는 두나이를 넘었다.>도 서유럽에 알려져서 베토벤 등 몇몇 작곡가들이 이를 모티브로 작곡하기도 했다.

전통적으로 카자크족 하면 머리꽁지만 남겨놓고 박박 민 머리와 긴 콧수염, 테트리스에서도 등장하는 따라하기 힘든 춤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보드카! 전통의상으로 '루바슈카'(рубашка)란 품이 넓은 셔츠와 파자마 비슷한 바지를 입는데 이건 말 타기에 특화된 복장이다. 카자크들은 오늘날에도 말 타는 법을 배우고, 실제로도 자주 타고 다닌다.

또 '쿠반카'(кубанка)라 불리는 털모자를 쓴다. 특히 '쿠반카'는 '샤쉬카'(шашка)라 불리는 기병도와 함께 카자크군의 상징으로 여겨져 오늘날까지도 의장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의외로 카자크들은 전통민요를 많이 갖고 있는데, 폴란드우크라이나에선 '반두라'라고 부르는 전통악기를 연주하는 카자크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많은 문학작품과 영화에서 카자크들이 등장하지만, 특히 추천할만한 작품은 역시 고골의 《대장 불리바》(원제: 타라스 불바), 그리고 폴란드의 예르지 호프만 감독의 영화 <불과 칼로써 - Ogniem i Mieczem)>가 있다. 본래 '헨리크 시엔키에비치'의 동명소설을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한국에도 개봉됐고, <007 골든 아이>와 <엑소시스트>에도 출연한 적 있는 여배우 '이자벨라 스코룹코'(Izabella Skorupko)가 주연을 맡은 데다 고증까지 거의 완벽해서 대히트를 쳤지만 180분이나 되는 영화분량 때문인지 우리나라에선 영화의 거의 1/3이 잘려나갔다. 하지만 잘려나간 버전으로도 재미있는 영화다.

몇몇 우크라이나측 비평가들과 여론은 흐멜니츠키를 비롯한 코자키 지도자들과 자포리자 코자키의 반란을 1차원적으로 나쁘게 묘사하고 모멸했다며 이 영화를 비난하였으나, 영화에서는 비록 주인공 측이, 한 결혼식을 앞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기병대원을 중심으로 한 폴란드인으로 나오지만, 흐멜니츠키는 나름 명분이나 인망도 있고, 카리스마도 대빵이며, 머리도 좋은 간지폭발 적군 두목으로 나오고, 폴란드 대영주들의 코자키들에 대한 오만과 잔인함 또한 제대로 묘사됐다. 코자키들 또한 이웃 폴란드인 지주들은 미워해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란 국가 자체엔 나름 소속감이나 의리도 가지고 있으나 귀족들과의 충돌로 점차 감정의 골이 심해지는 모습을 나름 설득력있게 묘사했고, 러시아와의 관계도 폴란드의 흔한 일방적인 주장인 러시아 앞잡이 따위가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관점에서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오히려 2000년대 이후 나온 폴란드, 러시아, 터키, 우크라이나 같은 동유럽 일대 역사영화들이야말로 노골적으로 없었던 사건을 있었던 양 뻥치는 1612, 대놓고 그냥 관영 프로파간다인 정복자 1453 따위 같이 시각적으론 기술이 발전했으니 당연히 나아졌지만 내용 면에선 전부다 국뽕성 일방적인 조국 미화+이웃국가 악마화 첨철인 저질 국뽕 영화들 일색인 반면 '불과 칼로써'는 영상미 뿐만 아니라 내용면에서도 훨씬 더 균형이 잡혀 있다. 물론 애초에 '타자'로 인식해 버리는 크림 타타르 쪽을 전형적인 무식한 남색가 내지는 악마스럽게 묘사하는거야 어쩔 수 없다 해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50px-Kozacka_piesn.jpg
전통악기 반두라(Bandura)를 연주하는 카자크족의 모습. 사진 속의 할아버지는 크림 반도에서 산다.[53] 이름은 Ostap Kindrachuk. 아내가 집을 보는 동안 여기저기를 떠돌며 악사 일로 돈을 번다. 몇몇 위키백과엔 반두라 소개용으로 사진이 실려있기도 하다.
Наливаймо, браття 자포리자 코자키의 민요

Наливаймо, браття,
Кришталеві чаші,
Щоб шаблі не брали,
Щоб кулі минали
Голівоньки наші.

Щоби Україна
Повік не плакала,
Щоби наша слава,
Козацькая слава,
Повік не пропала.

А козацька слава кровію полита,
Січена шаблями, рубана мечами,
Ще й сльозами вмита.

Наливаймо, браття, поки ще є сили,
Поки до схід сонця, поки до походу
Сурми не сурмили.

잔을 들어라, 형제들아
크리스탈 잔으로
우리들의 심장을,
칼이 찌르지 못하도록
총알이 꿰뚫지 못하도록.

그리하여 우크라이나여
결코 울지 마라.
그리하여 우리들의 영광은
코자키들의 영광은
결코 무너지지 않으리.

코자키들의 영광을 위해 피가 쏟아지고,
도끼에 토막나고, 칼에 쪼개지고,
눈물로 씻겨나가네.

노래하자, 형제들아
해가 솟을 때까지, 행진하기 전까지
피리소리는 멈추지 않는다.

※우크라이나어 전공자 분의 번역을 기다립니다.
수르마를 피리로 대체했습니다.

7. 각종 매체에서

러시아 및 동유럽 일대의 기병세력으로 등장한다.

한국 대중매체의 경우 러일전쟁을 다루거나 17-19세기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에서 한국이 러시아와 얽히게 될시 무조건 등장한다. 전반적으로 꽉막히고 구시대적인 러시아 군대에서 유격전과 기병전을 수행하는 유능한 병사들로 자주 등장한다.

물론 특유의 야만성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주로 개그 용도나 강렬한 인상을 보여주기 위해서지, 나쁘게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7.1. 문명 시리즈

고유 유닛이라는 시스템이 처음 생긴 문명 3 이래 최신작인 문명 6에 이르기까지 줄곧 러시아 문명의 고유 유닛으로 개근하고 있다.

7.2.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항목 참조.

7.3. 토탈 워: 나폴레옹

러시아의 고유 창기병인데 취급이 안 좋다.[54] 울란보다 모든 능력치가 약간 낮은 대신에 유지비도 적어서 거의 울란의 하위호환 유닛이나 마찬가지다.

사실 유지비도 기병 치곤 적게 들고 기병 종류 중 제일 싼 가격으로 양성할 수 있기 때문에 물량을 모아야 하거나 돈 없을 때 기병 수 채우기 좋은데다 다른 창기병들과 비교해서 약하다는 거지 자기 할 일은 충분히 할 수준은 된다.

잘 훈련되지 않은 약한 보병진에 후방에서 박으면 충분히 적 보병진을 분쇄할 수 있으며 또 창을 든 만큼 적들의 경보병, 경기병들에게 꽤나 강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중기병처럼 방어 수치가 높은 유닛에게는 초반 돌격을 제외하고는 이득을 볼 수 없다. 또한 근접공격이 겨우 4밖에 안되기 때문에 다른 창기병들과도 싸우면 속수무책으로 밀리기 때문에 그냥 싼 맛에 쓰는 돌격력 원툴 기병이라 보면 된다.

전략적으론 정말 요긴하게 쓰인다. 기병으로만 병력을 구성할 경우 상당한 기동력을 보이고, 자동전투 시 기병들은 높은 전투력 수치가 부여돼[55] 있어 이기는 전투만 하게되는 이러한 부대에게 큰 시너지를 주지만 비싼 가격과 유지비로 망설여 지는데 코사크는 가격과 유지비가 값싸 손쉽게 부담없이 뽑아내 정찰, 증원병력 잘라먹기, 패퇴한 병력 끝장내기, 후방의 빈 도시 털기[56] 및 견제로 적 본대의 시선 돌리기, 아군 본대의 유연하고 빠른 병력 회전 돕기, 임시 치안유지 대타로 빠른 진군 돕기 등등 중반까지 여러 방법으로 적을 괴롭힐 수 있다. 실제 역사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샘.

7.4. Europa Universalis IV



( 영어 자막 )
O Sultan, Turkish devil, secretary to Lucifer himself.
You demand our surrender that we turn our back on a noble Christian King who has given us dominion over the steppes and recognized our power.
We give him our horses out of loyalty, for he has honored us.
We do not fear him.
and we do not fear you.
Babylonian scullion.
We can concede to you the respect you deserve - that of a horse's ass, a lowlife scoundrel, and dog.
For they are your peers in battle, and equals as rulers.
We, the Cossacks, defy you and your army.
We will battle you on land and sea.
May whatever god you worship have mercy on you.
We will have none.

( 자막 번역 )
오 술탄, 터키놈 악마이자 루시퍼의 비서여.
그대는 우리에게 항복을 요구해 우리의 고귀한 기독교의 왕에게 등을 돌리라고 했소. 우리의 힘을 인정해주고 대초원의 통치권을 약속한 왕에게 말이오.
그는 약속을 지켰고, 우리는 그에게 말과 칼을 바쳤소.
우리는 그를 두려워하지 않소. 그리고 그대도 두렵지 않소.
바빌론 쌍것아.
우리는 그대에게 마땅한 대접을 해줄 것이다 - 말궁둥이, 건달놈, 개새끼처럼 말이다.
이들이 당신이 전우라 부를 자들이며, 신하들도 똑같은 놈들 뿐이다.
우리, 코사크는, 네놈과 군대를 작살낼 것이다. 땅이든 바다든 나가 싸울 것이다.
그대가 섬기는 신이 무엇이건 간에 네놈에게 자비를 베풀길.
우리는 자비가 없으니.
- 위의 그림과 편지 내용을 토대로 만든 게임 유로파 유니버설리즈 4의 DLC 트레일러. 간지나는 목소리가 일품이다.

직접적으로 병종으로 등장하거는 것은 아니고, 코사크 DLC에서 추가된 계층 시스템에서, 동구권 테크를 가진 국가들이 스텝 프로빈스를 가지고 있다면 계층으로 등장한다. 카자크 계층에겐 오직 스텝 지형의 프로빈스만 수여할 수 있으며, 카자크가 통제중인 지역엔 인력 버프와 함께 적 소모율 +1%가 붙는다. 물론 계층이 다 그렇지만, 최소 자치도는 25%로 고정되며, 인력만 귀족계층과 동일하게 자치도와 상관없이 100% 수급된다. 카자크 계층을 잘 관리한 상태라면 상당한 수준의 기병 전투력 보너스[57]와 기병 유지비 감소를 얻을 수 있다.

카자크 계층에게선 카자크가 보유한 모든 프로빈스에서 프로빈스당 1연대씩 기병을 공짜로 뜯어오거나, 카자크 계층으로부터 육군 리더인 정복자를 선출하거나,[58] 반값 육군 개혁가 조언자[59]를 가져올 수 있다. 모든 계층을 통틀어서 유일하게 군사 조언자를 제공하는 계층이 바로 카자크다.

최소 땅 개발도 지분 요구량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똥땅이기 마련인 스텝지역만 주면 되는 등 비교적 단순한 구성을 가지고 있으나… 훼이크다. 카자크 계층이 계층 재앙을 일으키면 딤미 계층처럼 수여받은 모든 땅을 가지고 독립한다. 거기다, 계층 중 유일하게 주변의 다른 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악화시키는 이벤트가 있다. 카자크가 국경을 넘어가서 깽판을 치는 이벤트인데, 카자크를 옹호하면 피해국과의 관계도가 50이나 떨어진다. 해당국의 편을 들어주면 카자크의 충성도가 15 포인트만큼 떨어진다. 참고로, 이 이벤트는 피해국 입장에서 민폐인데, 당사자가 카자크가 깽판치게 놔두는 선택지를 찍어버리면 이벤트가 걸린 프로빈스에 매우 해로운 변동치가 달린다. 괜히 관계도가 50이나 떨어지는 게 아닌 걸 당해보면 안다.

안그래도 높은 기병전투력 보너스가 국가 아이디어로 있데 카자크 계층 보너스까지 받는 폴란드의 기병이 정말 무서운 이유. 국가 아이디어 개방 후, 귀족주의, 질, 마지막으로 첩보 아이디어를 찍고, 정책까지 틀어준 다음에, 카자크 계층 버프까지 받으면 거의 2배 수준으로 기병 전투력이 올라가는 무시무시한 광경을 볼 수 있다.

7.5. 인피니티(게임)

파일:AriadnaArt1.jpg

러시아 연방은 아리아드나 개척민 선정 당시 혹독한 던 행성의 기후와 환경들에 맞서기 위해 카자크인들의 여러가지 체제들을 참고해 그것들을 기반으로 사회 체계를 계획했고 그에 걸맞게 카자크계 군인 및 군인 가족들을 주로 뽑았다. 이들 카자크 개척민은 아리아드나에 성공적으로 정착했고 가장 거대한 국가로 성장해 아리아드나의 지배권을 쥐고 있다.

자세한 건 아리아드나타르타리 전단 참고.

7.6. Hearts of Iron IV

폴란드의 대체역사 선택지 중 하나인 섭정의회 소집에서 카자크 왕을 뽑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카자크 왕의 능력은 기병공방 15%이다(...).그냥 말박이 컨셉질용 아닌가 그런데 그 특유의 예능감과 파시스트[60]라 독일과 친하게 지낼 수 있어서인지 멀티에선 의외로 많이 고르는 선택지다. 모드인 카이저라이히에서는 표트르 크라스노프를 지도자로 하는 카자크 국가 돈-쿠반 연합이 설립되어 있지만 얼마 안 가 러시아에 의해 삭제된다. 그리고 0.23 패치로 완전히 사라졌다.

7.7. 라이즈 오브 네이션즈

자포리자 코자키로 추정되는 카자크 기병과 쿠반 카자크인 돈 카자크 기병이 화약시대와 계몽 시대의 러시아 경기병으로 등장한다.

7.8. 테메레르 시리즈

드래곤으로 전쟁하는 세계관 답게 드래곤을 타고다닌다. 작중에서는 나폴레옹 전쟁 시대이라서 러시아 편부터 등장한다.

주로 뛰어난 정찰병으로 등장해서 적의 동향을 살피는 모습으로 나온다. 단 이들이 타고 다니는 드래곤이 크기가 작아서[61] 실제 전투에서는 활약이 적은 편.

7.9. 스틸 디비전 2

게임 배경이 1944년 바그라티온 작전이라 독일군과 소련군 모두 카자크 부대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기병이 구현이 안 되어 트럭을 탄 일반 보병으로 등장한다.

독일군에서는 주로 소련 노획무기를 사용하며 무장 수준은 조금 떨어지는 정찰대로 사용되며 소련군에선 자동화기로 무장하고 근접전에서 독일군을 갈아버리는 근위기병사단들의 메인 주력 보병대다.

7.10.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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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소련의 적통설 }}}}}}}}}



[1] 실제로는 말 탄 무장농민, 무장상인들도 죄다 카자크라고 불렀다. 예를 들어 혼란 시대에 러시아 의용병으로 수많은 카자크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그냥 농사일 하다가 자기 고향이 침략받자 무기 들고 말 타고 나온 농민들이었다. 하도 전쟁이 잦으니 그냥 일반 평민들도 전투민족화된 것. 반면에 이교도인 오스만으로부터 돈 받고 동포들을 공격하던 용병 카자크, 무력을 바탕으로 주변 읍촌민들로부터 조공을 받던 마적단 카자크, 수많은 농노와 재물을 소유한 봉건귀족/지방군벌 격인 카자크도 있었다. 사실상 러시아 제국이 이들을 체계화하기 이전 시기에 엄격하게 정의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2] 실제로 독자적인 체계와 관습을 가진 문화세력이라는 점에서 해적 공화국, 바이킹과 유사성이 많은 편이다.[3] 예를 들어 카자크들은 크림 칸국과 오스만의 흑해 노예 무역에 동조하여 돈을 벌거나 협상수단으로 사용했다. 오스만 여행가 에블리아 첼레비(Evliya Çelebi)는 크림 칸국의 이슬람 3세 기라이와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수십만의 포로를 잡아왔고 나중에는 크림 칸국에서 크림 타타르인들보다 슬라브인 노예가 몇 배나 더 많이 살고 있다고 기록했다. 이 수치는 크게 과장된 것으로 여겨지고 주 대상은 폴란드인들이었지만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을 비롯한 다른 슬라브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실제로 흐멜니츠키가 동포를 타타르인에게 넘긴다고 원망하는 우크라이나 민요가 있었을 정도다. 16~17세기 러시아, 리투아니아 연대기들에서 카자크들이 사람들을 죽이고 약탈을 일삼는다고 타타르인들보다 더 악랄하다고 맹비난한 기록들까지 남아있고, 노가이 칸 유수프는 이반 4세에게 카자크들이 노가이인 상인, 민간인들을 약탈한다고 불만을 제기했을 정도.[4] 시골동네 무장 농민이나 자경단들도 카자크라고 불릴 수 있었다.[5] 그래서 러시아 제국 시대엔 카자흐인을 키르기스라고 부르고 지금의 키르기스는 카라 키르기스라 불렸다. 물론 그 당사자들은 이런 용어를 쓰지 않았지만. 사실 지금의 키르기스인과 카자흐인은 매우 밀접한 유목민 집단을 사는 지역별로 분류한 거라 이렇게 명칭이 혼용되기도 했던 것이다.[6] 미하일 숄로호프(2008), 숄로호프 단편선』 이항재(역), 민음사 268p~269p[7] 돈 카자크는 러시아 내전 당시 소련을 지지한 카자크 중 상당수를 차지했다.[8] Tabolina, T. V.(1994) Vozrozhdenie Kazachestva: 1989-1994 Istoki, Khronika, Perspektivy, (Moscow: Rossiiskaia akademiia nauk, Institutetnologii i antropologii im. N.N. MIklukho-Maklaia, Tsentr po izucheniiu mezhnatsionalnykh otmoshenii), pp294[9] 구자정, <"경계인"으로서의 까자끼 : 까자끼의 역사적 기원과 형성에 대한 소고>, (러시아 연구 vol20 1권, 2010)[10] 오스만 제국과 코자크간에 도발적인 편지들이 오갔다는 구전이 많지만, 현대의 역사가들은 대부분 이것이 문예적 창작이라 추정한다.[11] 카자크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 예속을 피해 도망한 농민들임을 고려하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12] 구자정, <16세기 말 17세기 초 자포로지예 코자키 집단을 통해 본 우크라이나 역사의 카자크적 기원과 루스(Rus') 정체성> 중 II. 카자크 현상의 태동과 자포로지예 세치의 형성(슬라브연구 vol33, 2017)[13] Mykhailo Hrushevsky, Istoriia Ukrainy-Rusy, 10 vols. (Livov-Vienna-Kiev, 1898-1936), HIstory of Ukraine-Rus' 10 vols., translated from Ukrainian to English (Toronto-Edmonton: Canadian Institute of Ukrainian Studies Press, 1999-ongoing), Vol 7, pp 101 (Citations are to the English edition)[14] 저자는 16~17세기 인물로 1594년에는 자포리자 코자키들을 합스부르크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목적으로 자포로제 시치를 방문한 뒤 코자키들을 만나 다양한 기록을 남겼다.[15] 같은 맥락에서 제정 시대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적 성향의 역사학자인 니콜라이 코스토마로프도 이반 마제파를 사실상의 '폴란드인'이라 지적한 바 있다.[16] 이게 단순한 비유가 아닌게 당장 아담 차르토리스키조차 러시아 귀족들이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모델로 하는 서구화를 원한다고 지적했다. 애시당초 당시 차르토리스키를 비롯한 폴란드인들이 러시아 제국의 고위관료가 되고 훗날 전제정을 다시 형성하려는 니콜라이 1세 시대에 탄압받은 것은 이러한 연유였다.[17] 같은 맥락에서 동란 시대에 폴란드 왕족을 러시아 차르로 추대했던 러시아 귀족, 대홍수폴란드 분할 때 러시아 편에 선 폴란드 귀족, 헤트만령 폐지 당시에 오히려 그것을 반겼던 우크라이나 코사크 엘리트들의 동기는 모두 동일했던 것이다.[18] 레프 톨스토이가 예르마크의 원정을 다룬 단편 《예르마크》를 쓰기도 했다.[19] 해마다 몇만 제곱킬로미터를 개척하는 수준은 아니였다. 시베리아 개척이라는 것이 사실상 수십~수백 킬로미터마다 마을을 한 개씩 만들면 촘촘한 편이었고, 대부분 특정한 지역에 도달한 후 차르의 영토임을 선포하는 식이었다.[20] 기병으로 유명하지만 카자크는 도 잘 탔다. 시베리아 •서를 왔다갔다하려면 종으로 흐르는 예니세이강, 레나강 등 큰 강과 지류들을 드나들어야 했기 때문이다.[21] 이 당시 대다수 카자크들은 '고의식파'라고 불리는 '전통의식파 정교회'를 믿었기에, 아예 다른 종파인 가톨릭을 믿는 폴란드만큼은 아니었지만, 주류 러시아와도 종교적으로 차이가 좀 있긴 있었다. 러시아 제국 정부 입장에서 보면 카자크들 덕분에 영토를 확장하고 우수한 기병대를 얻을 수는 있었지만, 카자크들의 활동으로 고의식파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은 썩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제국 정부는 카자크들을 전례를 바꾼 정교로 개종시키려고 애썼지만, 큰 성과는 없었다.[22] 스텐카 라진이라고도 한다.[23] 1775년 예카테리나 2세가 돈 카자크와 이웃한 자포리자 코자키의 시치(Січ)를 해체한 것도 이런 조치의 일환이었다.[24] иногоро́дн|ий, 문자적으로는 '다른 지역 출신' 이라는 뜻. 카자크 지역에 사는 비 카자크 농민(주로 러시아계나 우크라이나계)[25] Vladimir A. Zolotov and Aleksandr P. Pronshtein, Za zemliu, za voliu:Iz isorii narodnykh dvizhenii na Donu (Rostov: Rostovskoe knizh, izd., 1974) pp214[26] Semen S. Khromov, Grazhdanskaia voina i voennaia interventsiia v SSSR:Entsiklopedia (MOscow:Sovetskaia entsiklopediia, 1983)[27] 카자크들은 이주민들에게 자신들이 가진 군사용 토지를 임대해줬고, 그 대가로 받은 임대 수익을 실용적으로 썼다.[28] 미국으로 간 이들이 미국의 '돈 카자크 합창단'을 이뤘다.[29] 러시아 내전 이래 공산정권을 피해 고국을 떠나 다른 곳에 정착했거나 그대로 남아서 소련의 탄압을 받았던 경우.[30] 소련 체제에 저항한 민족들을 일컫는 말로 대표적으로 체첸인우크라이나인이 불온민족으로 지정되었다. 지정된 민족들은 소련 내에서도 이동의 제약 및 지원이 적었으며 고위 진급 제한도 있었다. 반대로 우수 민족도 있었는데 대표적으로는 제정 러시아 때부터 친러적이었던 오세트인이었다.[31] 이런 입대는 개별적 입대가 아니라 부락 전체가 1개 부대로 재편되는 것이다.[32] 사실은 카자크 마을에서 자란 러시아인.[33] 소련 카자크는 17개 사단.[34] 교통사고로 위장한 암살이라는 설도 있었으나 조사결과 운전도중 심장마비가 와서 사망한 것으로 판결났다.[35] 이 일련의 사건들을 "카자크 송환"(Repatriation of Cossacks), "카자크 배신"(Betrayal of the Cossacks), "린츠의 카자크 학살"(Massacre of Cossacks at Lienz)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36] 당시엔 카자크 이외에도 탄압받다가 독일 편에 선 소수민족들이 많았다[37] " 부모님은 등산 사고로 사망했지만, 나의 부모님은 배신자 영국과 도살자 스탈린 사이에서 살아남으셨다. 결국은 수치심 속에서 함께 자살하셨다."[38] 그러나 의외로 고려인과 체첸인들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체첸인들이 중앙아시아의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을 당시 중앙아시아 지역에 기반을 마련했던 고려인들이 이들이 적응할 수 있도록 많이 도와줬기 때문이었다고. 이 영향으로 캅카스 지역에서 고려인에 대한 평가는 굉장히 호의적이었고 체첸 분쟁 당시 체첸 반군이 버스를 점거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버스 승객 중에 있었던 고려인들만 사과를 건넨 뒤 특별히 풀어줬다고 한다.[39] 반대로 카자크족들도 체첸인들을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인식했는지 남부 지역 전통 카자크 자장가엔 아기를 안심시켜서 재우기 위해 너희 아버지는 위대한 전사라서 체첸인들도 습격하지 못할 것이란 가사가 있다.[40] 크림 타타르족의 주요 수출품은 오스만 술탄과 고관들의 하렘에 납품되는 슬라브인 여자 노예였다.[41] 러시아어로 바다갈매기란 뜻[42] 참고로 이 사람의 모후인 투르한 하티제 술탄이 슬라브족 출신인데, 오스만 제국으로 끌려오기 전엔 본래 카자크의 딸이었다는 야사가 있다.[43] 사실 패배했으면서도 항복을 권고한 술탄이 편지까지 이리 썼으니 욕먹을 짓을 하긴 했다. 술탄이 예수기독교를 언급한 것은 술탄은 어찌 됐든 간에 '예루살렘의 지배자'였기에 명목상으로나마 기독교의 수호자란 직위를 붙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위의 사건보다는 좀더 후대의 일이지만, 18~19세기 오스만 제국과 유럽 열강 사이에 맺은 조약들을 보면, 항상 "오스만 제국 내의 기독교인의 권리 보호의 보장"이 명시된 걸 볼 수 있는데, 이걸 내건 유럽 열강의 명분은, "예루살렘도 니들 거고, 니네 황제는 로마 황제이자 예루살렘의 수호자기도 하지? 그럼 너네 기독교인 신민들의 권리도 지켜줘야지?"였다. 물론 목적은 따로 있었으니... 이후 프랑스,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 내 기독교인들의 처우를 문제삼아 시시때때로 내정 간섭을 벌여왔다. 그리고 오스만 제국내의 그리스인과 아르메니아인, 마론파 기독교인의 봉기를 뒤에서 부추기고, 지원하는 등으로 오스만 제국을 와해시키는 공작을 했다.[44] '오타만'(Otaman)은 카자크 지도자의 호칭. 지역에 따라 Ataman, Wataman, Vataman 등으로 조금씩 변하기도 한다.[45] 후에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3세가 35,000루블을 주고 이 그림을 구입했는데, 이는 당시까지 러시아 화가가 그린 그림 중 최고가에 팔린 것이라 한다.[46] 프랑스의 르 쁘띠 주르날(Le ptit Journal) 지에 1904년 3월 게재된 삽화로 르 쁘띠 주르날은 남대문 전투를 묘사한 삽화나 중국이라 써진 팬케이크를 열강들이 나눠먹는 모습의 풍자만화로도 잘 알려져있다.[47] 일본군은 모두 머리를 박박 깎았다. 일본군은 스킨헤드는 아니었지만 스님들도 요즘처럼 면도를 자주 하지 못했으므로 머리 스타일은 비슷했다.[48] 사회주의자도 있었지만, 독립을 위해 소련의 힘을 빌리고자 했던 민족주의자들도 많았다.[49] 후에 중국국민당국민혁명군대한민국 임시정부한국광복군에서 복무하며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대일 항전을 이어나갔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전쟁 초반에 패퇴하던 국군을 수습해 시흥전투지구사령부란 이름으로 제1군단을 직접 창설해 북한군을 막아섰다. 이 지연전으로 북한군의 공세는 상당히 둔화되어 훗날 유엔의 반격을 이끌어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후 군의 원로이자 독립운동의 거두로써 박정희 정권의 독재에도 반대하였으며, 하나회의 12.12 군사반란 직후인 1980년 서울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50] 시베리아 내전의 결정적인 회전이었다. 이 전투에서 공세종말점에 다다른 백군이 괴멸되면서 적군이 확실한 승기를 잡게 되었다. 적군의 고려인 부대가 선봉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유명하다.[51] 미하일 1세의 아버지이다.[52] 다만 비스트로라는 단어가 처음 문헌에 등장한 건 18세기 말이기 때문에 카더라에 가깝다.[53] 크림 사랑이 정말 각별하시다. 비록 자신이 외국인일지라도, 죽기전에 마지막으로 내뱉는 말이 "아, 아름다운 크림이여!"(о, наш прекрасный Крим!) 일 거라고.[54] 사실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이들에 대한 평이 대체로 좋지 못했음을 감안해야 한다. 후퇴 중이던 나폴레옹의 입장에선 아픈데를 찔러대는 이들을 높이 평가할 수 있었겠지만, 정작 이들과 한편이었던 러시아, 프로이센 장군들의 입장에선 "전황이 불리할 때는 제대로 싸우지 않고 꽁무니나 빼는 주제에, 아군이 고생해서 승리하면 그제서야 돌격해서 전리품이나 챙기는 도적놈들"로 보이기에 충분했다.[55] 자동전투 시엔 적에 카운터칠 유닛이 있어도 전투력만으로 일괄적인 채점을 해 비교해 승률을 정하고 주사위를 던진다.[56] 털어놓곤 적 군대가 앞에 도달할 즈음에 그냥 다른 나라에 팔아버리면 적군은 이미 발목은 잡혔는데 탈환도 못해 영토에 구멍이 송송 난 상태가 된다. 다만 어느 나라에 어느 도시를 팔지는 신중히 선택하자. 무작정 팔아재꼈다간 나중에 외교관계 꼬이는 수가 있다.[57] 최대 15%. 기병 전투력 보너스 아이디어 효과 1개와 맞먹는다.[58] 당연하지만 개척관련 아이디어가 있어야한다.[59] 육군 사기 +10%[60] 그리고 다른 파시 루트에 비해서 비교적 빠르게 정권이 바뀌기도 한다.[61] 작중 전투용 드래곤들의 밥값은 대영제국도 감당하기 힘들어하는데 카자크들이 감당하기는 어려웠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