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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흙 |
1. 개요
인산, 인, 암모니아가 많고 풍부한 부식토[2]로 이루어져 있는 검은 땅을 말한다. 흑토라고 부르기도 한다. 비옥하고 수분을 머금고 있는 양이 많아 농업 생산량이 뛰어나다. 주로 스텝 기후에 분포한다.
2. 어원
검은색의 땅이라는 뜻인데, 이는 러시아어 쵸르니(Чёрная, 검은색의)+지믈랴(Земля, 땅)에서 합성되었다. 부식토가 거름과 비슷한 색이기 때문인데, 고대 이집트도 자신들의 비옥한 나일강 유역은 검은 땅이라는 뜻을 가진 케메트라 부르고, 주변의 사막은 붉은 땅이라 불렀다.3. 세계 각지의 흑토
전 세계의 흑토 지대에는 다뉴브강 유역(헝가리/크로아티아 북부/세르비아 북부/불가리아 북부), 루마니아의 왈라키아/몰다비아 지대, 유라시아 대초원의 우크라이나의 상당 부분/러시아 중부 및 남부와 시베리아 일부/카자흐스탄 북부를 차지하는 넓은 흑토 지대, 북미의 대평원이 있다.[3] 유럽 전세계시베리아와 카자흐스탄 북부 또한 흑토이기는 하지만, 건조 지대의 알칼리 토양이기 때문에 현대 농경 기술이 도입되기 이전에는 경작이 힘들어서 20세기 이전에는 산림이나 목초지로 쓰여왔다. 카자흐스탄은 20세기 표트르 스톨리핀의 중앙아시아 이주 정책과 스탈린의 5개년 계획, 대조국 전쟁 시기의 인구 소개령, 흐루쇼프의 처녀지 개간 운동 등의 일을 거치면서 농경의 비중이 크게 증가했다.
동아시아는 중국 헤이룽장성의 하얼빈과 장춘에 거친 송화강 일대가 흑토 지대이며, 이 곳은 수량이 풍부한 강이 많아 농경에 적합한 조건들을 갖추었다. 그래서 20세기에 만주 지역을 개발할 때에 헤이룽장성의 흑토를 이용해서 많은 양의 농산물을 생산할 수 있었다. 이 송화강 지역에 위치한 고대 국가인 부여에 대해서도 땅이 비옥하여 오곡이 잘 자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발해 시대에도 발해가 송화강 유역을 따라 확장하고 도시를 세운 흔적이 남아 있으며, 많은 농업 유구가 발견되어 농업이 진흥한 지역이었다. 심지어 발해가 멸망하도 유목민이 주축이 된 요나라 시대에도 주요 도시인 황룡부가 세워졌으며 발해의 농법을 받아들여 농작물의 동파를 막는 농법들이 기록되어 있다. 금나라 시대에도 농경 지대가 더욱 북진하여 흑룡강성 지역에서도 정착지 유적에서 금나라 시대의 농기구와 농작 유구가 발견된다.
원대에는 동방 3왕가에서 이 지역을 관리했으며 여진인들의 정주화와 농경화는 점차 심화되어 갔다. 이러한 경향은 명대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졌으며 점차 그 속도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16세기 이후가 되면, 인구와 경제가 괄목할 만큼 성장한 여진 부족들이 선진 농경 기술을 가진 한인과 조선인을 납치하는 게 명 · 조선 양대 왕조의 골칫거리였으며 여진인들이 농기구를 비롯한 각종 물재를 거래하는 양도 늘어났다.
청대가 되면, 만주를 자신들의 근원으로 생각한 만주족들이 유사시에 대피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들의 고향인 만주의 개발을 제한했고, 그 때문에 근대 이전까지 송화강 일대는 낙후된 지역으로 남았다. 그러나 인구압 문제와 러시아 견제, 만주에 대한 인식 변화 등의 이유로 만주 개발을 결정한 청 왕조의 봉금령 해제로 인해 많은 한인들이 만주로 이주하고, 중국 외부에서는 조선인들이 국경을 넘어와서 개척을 시작했다. 또한 현대의 중화인민공화국 역시 쑹화강 일대에 60년대부터 인민해방군을 보내 꾸준히 개간을 한 결과 이곳은 대두 및 농산물의 주요 산지가 되었다.
아마존 강 유역 일부 지역에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만든 검고 영양이 풍부한 토양이 있는데, 이를 테라 프레타(Terra preta)라 부른다. 이 토양은 천연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기원전 450년부터 기원후 950년까지 원주민들이 만든 인공적인 토양으로 추정되고 있다. 원주민은 조리나 쓰레기 소각에 사용한 목탄, 동물 뼈, 도기의 파편, 퇴비 등을 몇 세대에 걸쳐 퇴적시켜 영양소와 유기물이 풍부한 토양을 만들었다. 이런 인공 흑토인 테라 프레타는 고대 아마존 문명 형성에도 영향을 끼쳤으며 현대에는 생태계 복원 프로젝트 사용에 고려되고 있다.#
4. 우크라이나 및 러시아의 흑토
카스피해-흑해 스텝(Pontic-Caspian steppe)의 우크라이나-러시아 흑토 지대를 설명합니다. |
우크라이나 오데사 근교의 밀밭
초르노젬은 서부와 북부 일부를 제외한 우크라이나 국토의 상당 부분, 러시아의 서남부 지역에 퍼져 있다.[5] 이 덕분에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세계적인 곡물 생산국이다. 2018년 유엔식량농업기구의 자료에 따르면, 러시아는 세계 1위의 보리, 귀리, 사탕무 생산국이며 세계 3위의 밀, 호밀 생산국이다. 2020년 기준으로는 전세계 밀 생산의 24.1%, 보리 생산의 14.2%를 점유했다.
2018년 기준으로 우크라이나는 감자(2250만 톤), 메밀(13만 7천 톤) 세계 3위, 옥수수(3580만 톤) 세계 5위, 보리(730만 톤), 호밀(39만 3천 톤) 세계 7위, 밀(2460만 톤) 세계 8위인 나라이다. 그리고 식용유의 원료가 되는 해바라기씨는 세계 최대 생산국이다.
초르노젬이 비옥한 이유는 이 지역의 기후와 식생, 지형적 특성에서 기인한다. 온난습윤한 기후라 숲보다는 초지가 더 많고, 나무에 비해 뿌리가 얇고 1M 이상으로 자라나는 1년생 식물들이 겨울을 나지 못하고 명을 다해 부엽토가 되어주면서 흑토 지대의 유지와 확대에 기여했다. 즉, 잎이나 줄기가 썩어서 흙이 된 부엽토가 쌓이는 것이 긴 세월 반복된 끝에 엄청나게 비옥한 흑토 지대가 탄생한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비옥한 토양은 식물의 타감 작용, 토양 유실, 병충해, 유해 물질 축적, 지력 소모 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연작 장해를 다른 토양에 비해 적게 겪는다. 물론, 별 다른 조치 없이 적당히 재배만 해도 작물이 잘 자란다는 이야기는 당연히 과장된 것이다. 농작물은 기후의 영향을 피할 수 없고 흑토 지대에서도 제초, 농약과 비료 살포, 수로 정비 등의 농경 작업은 필수적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휴경 또한 필요하다. 또한, 과수를 재배하는 경우에는 관개 시설을 조성해 주어야 한다.
대중적으로 우크라이나 - 러시아의 흑토 지대의 농업 생산력은 실제에 비해 과대 평가받고 있다.[6] 19세기 초를 기준으로 할 때, 우크라이나를 위시한 제정 러시아 남부 지역의 종자 대비 수확량은 1 : 4 ~ 5 정도로 프랑스, 영국, 저지대(네덜란드, 벨기에)에 비해서 유의미하게 우위를 가지지도 못했고 도리어 생산력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냉대 기후여서 작물의 생장 기간이 서유럽에 비해 짧았던 점, 상대적으로 서리나 안개 같은 한해 피해를 입기 쉬운 점, 정치적, 사회적 혼란과 전쟁으로 인한 노동력 부족, 서유럽에 비해 상대적으로 빈곤해 자본 투자가 미비하고 기술 수준이 낮았던 점 등이 작용했다.
게다가 흑토 지대는 중앙아시아에서 만들어지는 폭풍이 불어와 농사에 피해를 입히는 곳이었다. 키예프 루스 시기부터 수하베이(cyxoBeЙ)라 부르는 건풍(乾風)이 농사에 나쁜 영향(수분 증발, 토양 유실)을 미치는 것에 대해 기록한 바 있으며 맑은 날이나 가문 날씨에 발생하는 먼지 안개가 작물에 악영향을 미쳤다. 심지어 키예프 공국의 어떤 대공은 "맑은 날씨는 가뭄을 부른다."는 말을 남길 정도였다. 오래도록 이 문제를 겪은 제정 러시아와 소련은 숲을 조성해 열풍의 악영향과 토양 유실을 막으려 했다. 카자흐의 초지에서 폭풍을 막아주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스탈린은 농경으로의 전환이 카자흐 초지의 유지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고도 유목민들을 강제로 정착시켰고, 흐루쇼프는 처녀지 개간 운동을 진행해 초지를 초토화시켜 버렸다. 이 때문에 중앙아시아의 먼지 폭풍이 유럽 러시아 지역을 덮치는 참사가 일어났으며 소련은 농업 정책을 수정하고 방풍림의 규모를 늘려야 했다. [7]
결국, 우크라이나 - 러시아의 흑토 지대는 과거부터 서유럽의 발전된 농경지와 중국의 강남, 미국 - 캐나다의 대평원 지역에 비해 그렇게까지 나을 것이 없는 수준의 곡창 지대였고, 현대에도 마찬가지다. 농사는 토양이라는 이점만 있다고 해서 잘 되는 것이 결코 아니며 기후와 자본, 기술력 등의 다양한 요인들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흑토 지대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농경에 불리한 다양한 면을 갖고 있었고, 질적인 생산력이 아닌 거대한 규모의 평야 지대에서 만들어내는 양적인 생산량이 곡창 지대로서의 명성을 얻게 해주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즉, 언론에서 떠드는 "유럽의 빵바구니"란 별칭은 "빵바구니 중 하나"로 정정하는 게 적절할 것이다.
곡창지대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스키타이, 고트족 등 여러 민족들이 살아 갔고, 키예프 루스 같은 국가가 존재한 곳이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우크라이나를 지배했을 당시에도 초르노젬에서 생산된 농작물이 드네프르 강과 비스와 강을 거쳐 발트 해 연안의 단치히(현 그단스크)에 집산된 후, 유럽 전역으로 수출되었다. 그래서 우크라이나의 역사에서 초르노젬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고대부터 농경이 발전한 흑토 지대였으나, 평야 지대의 특성상 외부의 공격에 취약했다. 그래서 흑토 지대를 점령한 국가들은 전성기에는 흑토 지대의 생산력을 이용할 수 있었지만, 방어가 힘들어서 유지에 애를 먹었다.[8] 따라서 비옥한 토질에도 불구하고 다른 유라시아 곡창 지대에 비해서 인구 밀도가 상당히 적은 편이다. 이밖에도 우크라이나 대기근과 독소전쟁으로 인한 인구 감소, 인구 구조 변화와 빠른 출산율 감소, 연방 해체 이후의 출산율 급감과 해외 이민 등의 요인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초르노젬의 인구가 다른 지역에 비해 더 적은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9]
제정 러시아 시기의 흑토 지대는 밀 재배의 비중이 높았던 곳이었다. 그 뒤를 이은 소련 시절엔 무리한 집산화의 영향으로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발생하기도 했지만, 연방의 핵심적인 곡창 지대 중 하나였다. 연방이 해체된 이후에는 그 충격과 혼란으로 인해 체르노젬이 밀수되었고, 현재까지 약 수조원대의 가치를 지닌 체르노젬이 유출되었다. 여러 우크라이나 정권들은 이 토양 밀수를 저지하지 못했고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진 현재는 토양 밀수 문제가 더욱 심화된데다 전쟁으로 인한 농경지 파괴 문제까지 더해졌다.
우크라이나 초르노젬의 위용을 나타내는 지도. 1888년부터 1980년까지 우크라이나-볼가강 지역의 비옥도 감소 비율을 나타낸 지도다. 색이 붉어질수록 비옥도가 크게 감소한 것이다. 지나친 깊이 갈이와 연작, 휴경과 비료의 부족, 자연재해 등의 문제로 인해 시뻘겋게 변한 볼가강 중류의 카잔-사마라와 달리 우크라이나 지방은 토양 유실이 적은 것을 볼 수 있다.
2022년부터 이 곳이 전쟁터가 되면서 곡물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으며 전 세계 물가 급등에 영향을 주고 있다. 그나마 러시아, 튀르키예 및 UN이 이 지역에 발이 묶인 곡물을 흑해를 통한 지장 없는 수출을 보증하는 임시 협약을 체결해 진정되고는 있으나, 러시아가 협약을 파기할 수 있다는 협박을 가끔씩 날리고 있어 곡물 시장의 불안정성은 여전하다.
[1] 러시아어에서 ё는 'ㅛ'와 유사하게 읽힌다.[2] 부식질을 많이 함유하고 있는 땅. 동물, 식물(유기물)이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며 생긴다. 식물에 미네랄을 공급하며, 토지가 수분을 머금을 수 있는 양을 결정한다. 또한 좋은 토양구조가 되기까지의 시간을 촉진하는 등 농사에 많은 이점이 있다.[3] 물론 체르노젬 자체는 동유럽에 위치한 흑토를 얘기하는 거고, 미국에 있는 토양은 체르노젬이 아니라 프레리토라는 별개의 토양이다.[4] 실제로 우크라이나의 국기가 이 밀밭과 푸른 하늘을 보고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5] 동슬라브 3국으로 둘과 같이 묶이는 국가 벨라루스는 상대적으로 토양의 양분이 부족하고 산성인 경우가 많지만, 소련 시기까지는 축산업으로 유명하고 농업 생산량도 상당한 편이었다. 그러다 연방이 해체된 뒤부터는 자급자족 노선을 취했음에도 체제 변화의 혼란과 농업의 낮은 이익 문제 때문에 농업 비중이 크게 감소했다.[6] 당연한것이 현대의 농업은 과거와는 비교 불가능한 수준의 산업적 집약농업으로 생산력 자체는 평균화 되는것이 당연한 수순이다. 즉 흑토 지대의 가치는 생산력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작은 투입으로도 여전히 경쟁력있는 산출량을 뽑아내는부분에 존재한다.[7] 숲은 토양의 양분을 흡수해 지력을 소모하면서, 물과 바람이 일으키는 토양 침식, 가뭄과 홍수, 산사태 같은 자연 재해를 막아내고 물을 저장해 농사에 도움을 주는 이중적인 존재였다. 그리고 산업 혁명 이전까지는 중요한 소재면서 연료인 목재와 다양한 산림 자원을 제공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8] 훈족에게 밀려난 고트족, 몽골 제국에 정복당한 키예프 공국, 크림 칸국의 약탈로 이 지역 관리에 애를 먹었던 리투아니아 대공국 등의 사례가 있고, 학자들에 따라서는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로 우크라이나 흑토 지대가 포함되었다 보는 견해도 있다.[9] 1960년대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소련 전체에서 러시아, 발트 3국과 함께 출산율이 낮은 지역으로 당시 우크라이나의 출산율은 2명대 초반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