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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7 11:47:38

혼란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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Смутное время
Time of Troubles
1. 개요2. 배경3. 경과4. 결과5. 그 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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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598년 루스 차르국(러시아 제국의 전신) 류리크 왕조차르 표도르 1세가 사망하고 1613년 미하일 로마노프가 새로운 차르 미하일 1세로 선출되면서 로마노프 왕조가 시작되는 시기까지의 혼란기. '동란 시대'라 번역하기도 한다.

흔히 러시아 역사에서 중세를 종식하고 근세로 이행하는 기준으로 여겨지는 시기이다.[1] 혹은 이 이전을 고전시대(Классическая эпоха)라고 명명하기도 한다.

2. 배경

소빙하기의 영향으로 농업생산량이 급락하며 이 때문에 민심이 흉흉해진 와중에 류리크 왕조라는 구심점이 증발하며 러시아가 난장판이 되어버린 시기이다.

862년 류리크벨리키 노브고로드 주변을 평정하고 홀름가르트란 이름의 정착촌을 건설한 이래로 러시아 역사에서 군주는 곧 류리크의 피를 이은 소위 '류리크 왕조'의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몽골의 침입과 함께 시작되는 러시아의 암흑기와 현대 러시아의 기틀을 닦은 모스크바 대공국까지 러시아인의 군주는 류리크의 부계 자손들이었다. 이로 인해 러시아 역사에서 류리크 왕조가 지니는 권위는 영원한 러시아의 지배자이자 군주에 해당할 정도로 절대적이었다.

그런데 1598년 류리크 왕조의 차르 표도르 1세가 적법한 후계자를 두지 못한 상태에서 급사하는 바람에 그만 그 혈통이 끊어지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물론 당시 러시아에는 여전히 류리크의 부계 혈통을 이어온 자손임을 주장할 수 있는 귀족들이 있었으나 전 러시아를 통일한 모스크바 공작 이반 3세와 초대 루스 차르 이반 4세의 직계가 아닌데다 마땅히 위신이 높은 인물이 없던 점에서, 귀족과 민중, 정교회 모두의 추대로 인정 받지 않는 한, 차르위 계승의 정통성을 스스로는 주장할 수 없는 인물들이었다.

당시 러시아가 서유럽마냥 살리카법귀천상혼 개념이 있어서 대가 끊기는 게 일상이라, 왕가 방계고 귀족이고 교회고 뭐고, 알아서 나서서 악착 같이 방계의 방계까지 억지로 찾아서라도 계승 시키고 그것도 안되면 그냥 왕조 교체를 받아들이던 것도 아닌데다가, 류리크 가문이 워낙 흥한 덕분에 사방에 널린게 류리크 직계 (...)였던 시기도 있었던지라 류리크가 단절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던 일이었다.

이 계승 문제로 인해 잠시 표도르 1세의 황후이자 보리스 고두노프의 여동생이었던 이리나 고두노바가 임시로 차르를 맡아 시간을 버는가 싶었는데, 얼마 못가 표도르 1세의 뒤를 이을 인물이랍시고 표도르 1세의 처남이자 섭정직을 맡고 있었던 보리스 고두노프가 선출됐고 이리나 고두노바는 힘에 이기지 못해 오빠에게 양보하며, 대놓고 적법하지 못한 인물이 어거지로 날치기 차르위에 오르면서 개판이 열리게 된다.

제 아무리 방계 계승에 익숙하지 않은 러시아라 해도 방계로 계승을 이어가는 것 자체는 별 문제가 없는 일이었지만, 보리스 고두노프는 류리크 가문과 부계 혈연이 전혀 없어 뭐 적법성을 어거지로 꾸미려해도 꾸밀 방법이 없다는게 엄청나게 문제가 되었다. 황후가 임시로 차르를 담당하거나 섭정을 하는 것은 별 문제가 없는 일이었지만[2], 그 황후의 가문 사람이 마땅한 부계 혈연 없이 류리크가 담당해야하는 차르의 권좌를 차지하는 것은 정말 많이 문제가 되었다. 이로 인해 많은 보야르(대귀족)들은 물론 민중들까지 보리스가 차르를 계승했다는 것에 상당한 반감을 품고 있었다.

통치를 맡던 황후가 사망하여 어영부영 인척이 차르위를 가져간것이라면 그나마 나았을텐데 황후가 멀쩡히 살아서 통치를 하는 상황에서 날치기 수준으로 차르위를 가져간건 동내에 지나가던 똥개도 말이 안된다 여길 상황이다. 직계가 끊겼을 때 자연스럽게 방계를 찾도록 하는 계승 전통이 있지 않아, 막상 직계가 끊기고 보니 비교적 가까운 관계인 외척 쪽으로 계승 불명확한 정황 하에 슬쩍 넘어갈 우려가 존재했는데 그게 실제로 터져버린 것이다.

각종 호족들의 세력이 강성하고 이들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통합되지 못하던 러시아에서 그나마 루스 라는 영역(Realm)의 개념을 보편적으로 인식되게 한 두 구심점이 바로 정교회 러시아 총대주교구와 류리크 가문이었다. 그래서 온갖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루스란 영역의 대공들은 죄다 류리크 가문 출신이었고, 이반 4세를 통해 러시아라는 하나의 군주 아래에 모인 국가가 영역을 대표하게 된 후로도 그 최고 군주인 차르는 류리크의 일원이었다.

즉, 루스라는 영역, 그것도 하나의 차르의 치하에 있는 러시아라는 영역은 정교회 신자[3] 중에서 류리크를 군주로 모시는 사람들이 모인 집합체와 그들이 지배하는 땅을 의미했다. 그런데 여기서 정교회 신자만 덜렁 남고 류리크가 사라져버리자 영역을 지탱하는 두 기둥 중 하나가 폭삭 무너졌고, 하필이면 이 치명적인 사태가 소빙하기로 흉흉하기 그지 없던 고통스러운 시기와 겹치면서 러시아가 난장판이 되어버린 것이다. 정교회로 인해 루스 사람이라는 개념은 두루뭉실하게 있었지만 정작 루스 사람의 "영역"이 증발해버린 것이다.

허나, 가문의 대가 끊길 지언정 이런 문제있는 방식으로 계승되지 못하도록 살리카 법 같은 전통으로 강제로 틀어막은 건[4] 또 아니라서, 계승이 불법이라고 확언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 불만스러워도 막무가내로 불법 계승으로 선포하고 당장 보야르와 교회가 나서서 반란을 일으키긴 무리였다.

그러나, 때마침 당시 소빙하기로 인해 신분에 무관하게 모두가 아주 불만이 많던 시기였던지라, 보야르들은 고두노프를 불법 왕조로 취급하며 사사건건 보리스 고두노프에게 디스를 퍼부어대었다. 종국에는 자연 재해로 발생한 피해도 류리크 왕가 출신이 아닌 보리스가 차르가 되어 막장 정치를 펼쳤기에 그렇게 된 것이란 소문이 돌 지경이 되어버리는데 여기에 의문을 표하는 이가 없다시피했다...

이런 혼란 속에서 자신이 류리크 왕가의 직계 혈통이자 그동안 죽은 걸로 알려진 이반 뇌제의 아들 우글리치 공작 드미트리임을 주장하는 인물이 나타나면서, 소빙하기로 팍팍 쌓인 스트레스가 뻥~! 하고 폭발, 마침내 헬게이트가 열렸다.

3. 경과

훗날 가짜로 판명되어 가짜 드미트리로 불리게 되지만 당시에는 사실 우글리치 공작 드미트리는 죽지 않았고 류리크 왕조를 부활시켜 러시아를 통치해나갈 것이란 믿음이 퍼져 있었다. 이에 드미트리를 자칭하는 인물의 등장은 보리스에게도 큰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이에 드미트리를 자칭하는 인물이 가짜임을 증명하기 위해 나섰으나 되려 역공을 당해 오히려 보야르와 백성들이 진짜 우글리치 공작 드미트리가 돌아왔다고 믿게 되는 상황까지 악화되고 말았다. 결국 차르와 가짜 드미트리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으나 1604년에 보리스가 사망하면서 내전은 일단락됐다. 보리스가 사망한 이후 그의 아들이 표도르 2세로 즉위했으나 민심은 이미 가짜 드미트리에게 쏠려 있었다. 결국 차르의 군대도 깃발을 바꿔들어 가짜 드미트리를 지지했으며 결국 표도르 2세가 살해당하면서 차르위는 가짜 드미트리에게 넘어갔다.

그렇게 러시아에 다시 평화가 찾아오나 했으나…… 가짜 드미트리는 차르위에 도전하는 과정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지원을 받은 전력이 있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가짜 드미트리를 모시는 사람들 중에는 폴란드인이 많았고, 폴란드인 귀족가의 여성과 결혼하는 등,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입김 아래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모스크바 대공국 시절부터 대립하던 경쟁국이었고[5], 러시아인 보야르들은 이러한 사태에 반감과 우려를 가지기 시작했다.[6]

결국 당시 보야르들의 실세였던 바실리 슈이스키는 현재 드미트리가 가짜임을 주장하면서 쿠데타를 일으켰고[7], 1605년 가짜 드미트리를 살해하면서[8] 스스로 차르 바실리 4세가 되었지만, 바실리 4세의 배경도 보리스 고두노프에 비교하면 별다를 바 없었다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9] 이로 인해 나라 꼬라지를 보고 열이 뻗힌 백성들과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런 혼란이 계속되는 와중에 다시 드미트리임을 자칭하는 인물(가짜 드미트리 2세)이 등장했다. 심지어는 자신이 살해당한 것으로 알려진 이전 드미트리라고 주장했는데 실제로는 외모나 목소리까지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하지만 바실리 4세를 인정하지 않던 세력들은 그런 사항을 잘 알고 있음에도 기꺼이 그의 존재를 인정했다(…)[10]. 바실리 4세는 이 골치아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웨덴 국왕 칼 9세에게 원조를 요청했고, 칼 9세는 켁스홀름(Kexholm)[11]을 얻는 대가로 바실리 4세를 지원했으나, 이에 가짜 드미트리 2세를 지원하고 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이를 빌미로 국왕 지그문트 3세가 직접 개입[12]하여 러시아로 군대를 파견했다.

바실리 4세는 러시아-스웨덴 연합군 3만을 거느리고 침입한 폴란드군을 격퇴하려 했으나 클루시노 전투에서 폴란드 헤트만 스타니스와프 주키에브스키(Stanisław Żółkiewski 1547~1620)[13]가 이끄는 5천의 윙드 후사르에게 문자 그대로 개같이 발렸고, 이 패전으로 인해 차르위에서 폐위된 다음 쫓겨났다.[14] 이후 러시아 귀족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와 협상을 진행하여 지그문트 3세의 맏아들 브와디스와프 왕자를 새로운 차르로 선출했다.

한편 당연히 차르위를 물려받을 것이라 생각했던 가짜 드미트리 2세는 강력히 반발했지만 모스크바에 입성하지 못하고 쫓겨났다. 결국 모스크바에서 밀려난 이후 지방에서 계속 기회를 엿봤으나 부하의 배신으로 암살당했다. 이후 가짜 드미트리 1세의 아내이자 가짜 드미트리 2세의 아내였던 마리나 므니셰흐가 전 남편의 아들 작은 악당 이반을 지도자로 추대했으나 결국 토벌당했다. 작은 악당 이반을 비롯하여 체포된 인물들은 대부분 처형당했으며 마리나 므니셰흐는 감옥에서 수감 생활을 하다가 1614년에 옥사했다.

한편 러시아 귀족들이 폴란드-리투아니아와 협상하면서 내건 조건은 "브와디스와프가 정교회로 개종한 다음 차르위에 오른다", "러시아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 "가톨릭을 강요하지 않는다"였다. 브와디스와프 자신은 정교회 개종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지그문트 3세가 극렬히 반대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15] 여기에 스웨덴 역시 브와디스와프를 차르로 지명한 것과 떼먹힌 급료(...)를 빌미로 1610년부터 러시아를 공격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가짜 드미트리임을 자칭하는 세번째 인물이 나타나 스웨덴, 폴란드-리투아니아, 러시아 국경 지역인 프스코프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우기도 했다. 결국 러시아인들은 침략자로부터 조국을 지켜내기 위해 저항할 수밖에 없었으며 1612년에 간신히 폴란드-리투아니아 세력을 축출할 수 있었다. 이후 1613년 이반 4세의 사돈 가문인 미하일 로마노프를 새로운 차르로 선출하여 정국을 안정시키고자 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세력을 몰아낸 뒤에도 차르위를 노리는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배반 행위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스웨덴의 새 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공격으로 위기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결국 1617년 스웨덴에게 이전에 약속했던 켁스홀름에 더하여 발트해로 향하던 유일한 출구 이조라(Ижора)[16]를 할양하고, 1618년에는 데울리노 조약으로 폴란드에게 스몰렌스크체르니고프, 세베리아를 할양하여 양국가를 달래면서 간신히 최악의 시기를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브와디스와프는 계속 차르위를 주장했고 러시아는 빼앗긴 스몰렌스크를 되찾고 싶었다. 결국 휴전 기간이 끝난 1632년 미하일 1세는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침공했으나 대패했다.[17] 아무튼 폴란드에게 수도를 점령당하고 영토까지 뭉텅 떼주는 등 제대로 굴욕을 당한 러시아는 폴란드에 대한 복수의 칼날을 갈고 대홍수 때 굴욕을 갚아주며 이후 폴란드 분할러시아 혁명 전까지 폴란드를 철저하게 짓밟았다. 스웨덴 또한 대북방전쟁과 1741년 전쟁으로 탈탈 털어버렸다.

4. 결과

류리크 왕조는 완전히 단절됐으며 더 이상 드미트리를 자칭하는 인물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러시아의 차르는 미하일 로마노프의 직계가 이어나갔으며 로마노프 왕조가 시작됐다.

위기를 수습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스웨덴에 영토를 내어주는 선택지를 취할 수밖에 없었으나 미하일의 아들 알렉세이의 치세에 대홍수로 위기에 빠진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침공, 폴란드를 탈탈 털어버리면서 빼앗긴 영토보다 훨씬 더 넓은 영토를 빼앗았으며 표트르 대제의 치세 대엔 스웨덴과의 대북방전쟁에서 승리하여 빼앗긴 영토는 물론 발트해로 통하는 출구를 추가로 확보하면서 북유럽의 패자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5. 그 외 이야기

이 때의 러시아를 그린 작품으로 요한 마테존의 오페라인 "보리스 고두노프"[18] 미하일 글린카의 오페라 "차르에게 바친 목숨"과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희곡 "보리스 고두노프"가 있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모데스트 무소륵스키에 의해 동명의 오페라로 작곡되었으며, 차르에게 바친 목숨은 제목 탓에 소련 시절에는 오페라의 주인공의 이름을 따온 이반 수사닌[19]으로 불렸고 1812년 서곡 피날레를 땜방할 때도 이 오페라의 곡 일부가 사용되었다.

바실리 슈이스키는 클루시노 전투에서 참패한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수도 바르샤바로 끌려가 지그문트 3세와 귀족들 앞에서 절을 하며 폐위당했다. 폴란드인 입장에서는 자국 역사상 최고의 순간이라 할 수 있으며 폴란드를 대표하는 역사화가 얀 마테이코는 이에 관련된 그림을 그려 남겼다. 여담으로 지그문트 3세의 입성은 러시아가 외국에 짓밟힌 마지막 사례이기도 하다.[20]

가짜 드미트리 2명과 그의 아내 마리나 므니셰흐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막장 드라마 수준의 황당무계한 스토리를 자랑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가짜 드미트리 항목에 서술한다.

브와디스와프의 차르위 계승 거부로 시작된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러시아의 전쟁에서는 의용군의 활약이 돋보였다. 이 때 큰 활약을 한 인물로 니즈니노브고로드의 상인 쿠지마 미닌[21]과 류리크 왕조의 핏줄인 수즈달의 귀족 드미트리 포자르스키가 있다. 이들의 활약을 기려 두 사람의 동상이 세워졌는데 원래는 미닌이 손을 뻗어 크렘린을 가리키는 모습으로 붉은 광장 한가운데에 있었다. 하지만 소련에서 군사 퍼레이드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모스크바의 성 바실리 성당 앞으로 옮겨버렸다.

안 그래도 정치적으로 혼란했던 시대였는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1600년에 일어났던 페루 화산 폭발로 인해 전세계적으로 한랭해졌고, 러시아도 이를 피해갈 수 없어 1601년~1603년대기근이 찾아왔다고 한다. # 정말 이 시대는 일단 살아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을 듯 하다.

[1] 이를 기점으로 류리크 왕조 국가의 붕괴와 로마노프 왕조 국가의 형성, 정부 주도의 의식적이고 본격적인 서구화가 시작되었다. 서구화 개혁 자체는 이반 4세 시대에 이미 시작되었지만 혼란시대로 국가 체제가 붕괴되는 바람에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타타르의 멍에 종결을 근세로 이행하는 기준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2] 서유럽에서나 동유럽에서나, 여왕의 부군이나 왕의 비가 섭정을 하는 것은 비교적 무난하게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흔한 섭정 유형은 아니었지만.[3] = 잠재적 루스인[4] 여자 가문원의 상속 자격을 완전히 막은 것은, 이런 상황이 생겼을때 아예 대놓고 외척으로 깔끔하게 넘어가든지, 아니면 애초에 외척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하든지 둘 중 하나만 가능하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5] 원래는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러시아가 루스의 패권을 두고 서로 충돌했지만, 러시아가 리투아니아를 압도하자 리투아니아와 동군연합이었던 폴란드 왕국이 리투아니아를 원조하여 리투아니아-러시아 분쟁에 끼어들었다.[6]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폴란드-리투아니아의 평민 출신이었던 리투아니아인 예카테리나 1세와 그녀의 직계 후손들이 러시아 제국 제위를 대대로 계승하게 되었다.[7] 이 때, 처음 가짜 드미트리 1세를 인정했던 진짜 드미트리의 어머니였던 마리아 나가야는 바실리 슈이스키와 손을 잡고서 가짜 드미트리를 가짜라고 말을 바꾸었다.[8] 얼마나 폴란드-리투아니아와 가짜 드미트리에게 열 받았는지 가짜 드미트리를 죽이고 난도질한 후 시신을 대포속에 집어넣고 폴란드 쪽으로 발사했다.니들 쓰레기는 니들이 치워라[9] 바실리 4세의 가문인 슈이스키 가문은 류리크 가문의 방계이긴 하다. 하지만 방계 계승을 인정하지 않는 러시아 계승법상 당연히 정통성이 떨어젔다.[10] 아니나 다를까 또 진짜 드미트리의 어머니인 마리아 나가야가 나타나서 가짜 드미트리 2세를 자신의 아들이라 인정 해주어 그쪽에 힘을 실어주었다. 권력욕 때문에 그랬다는 설이 유력한데, 정말 이른 나이에 죽은 드미트리에게는 자기 애비를 자칭하는 두 명의 가짜를 인정한 것은 상처가 깊은 일이었을 것이다.[11] 핀란드어로는 캐키살미(Käkisalmi). 당시의 카렐렌 방면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현재 러시아의 프리오제르스크.[12]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군주 지그문트 3세는 본래 스웨덴 바사 왕조의 사람으로 아버지는 스웨덴 국왕 요한 3세였고 어머니 카타지나 야기엘론카가 폴란드 국왕 겸 리투아니아 대공 지그문트 1세의 딸이었기 때문에 야기에우워 왕조 단절 후 선거군주제로 전환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왕위에 오를 자격이 있어서 이모부 스테판 바토리 사후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덕분에 잠시나마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스웨덴의 군주였다가 스웨덴의 재가톨릭화 정책에 대한 반대를 명분으로 본인이 스웨덴 왕위를 차지하려던 숙부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이 일으킨 반란으로 스웨덴 왕위에서 폐위당한 상황이었다. 지그문트 3세는 당연히 숙부가 칼 9세로 즉위한 것을 인정하지 않아 폴란드-스웨덴 관계는 악화되었고 칼 9세가 죽고 그 아들인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즉위한 상황에서도 자주 전쟁을 벌였다.[13] 얀 카롤 코드키에비츠의 명성에 가려져서 그렇지, 스테판 바토리 시절부터 군대를 지휘한 명장이었다. 나중에 제2차 빈 공방전에서 을 구원하는 얀 3세 소비에스키의 외증조할아버지이다.[14] 쫓겨난 바실리는 전리품으로서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로 압송, 지그문트 3세 앞에 무릎을 꿇는 치욕을 당하고 강제로 수도승이 되어 바르샤바 근교의 고스티닌 성에 유폐되었다가 1612년 사망했다.[15] 지그문트 3세에게 있어 폴란드-리투아니아는 가톨릭 방어의 보루인 동시에 가톨릭 포교의 교두보였기에 들어줄 수 없는 조건이었다.[16] 현재 러시아제2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있는 레닌그라드 주 일대의 역사적인 지역으로 주로 정교회를 믿는 핀란드계 민족인 이조라인이 거주했다. 보통은 라틴어 명칭인 잉그리아(Ingria)로 알려져있으며 스웨덴어로는 잉에르만란드(Ingermanlamd)로 표기한다.[17] 러시아가 스몰렌스크에 파견한 주력군이 폴란드 구원군에게 전멸했다. 폴란드는 스몰렌스크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는 공세를 펼쳤지만 러시아 군대는 수비에 성공했다.[18] 보리스 고두노프 시대와는 다르게 바로크 오페라 답게 사랑과 정치적 암투를 담은 조용한 곡이라 역사적 사실과는 전혀 무관하다. 게다가 1710년에 초연되었다는 기록이 없어서 부분적인 초연은 1965년에, 전체곡 초연은 2005년에 이루어 졌다. 그래도 표도르 1세의 황후이자 보리스 고두노프의 여동생인 이리나 고두노바 등 나올 인물은 다 나온다.[19] 전설상의 인물로, 혼란 시대에 살았던 농민이라고 한다. 러시아에 쳐들어온 폴란드군을 숲 속으로 유인해 혼란시켰고 보복으로 살해되었다.[20]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모스크바를 점령하기는 했지만 당시 러시아 제국의 수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였고, 러시아 원정의 결과는 처참한 패배와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이어졌다.[21] 정육 사업. 그러니까 도축일로 재산을 모은 백정 출신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