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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8-21 13:19:34

아부 사이드 미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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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티무르 아부 사이드.png
발굴된 유골로 재구성한 샤 루흐 두상

1. 개요2. 생애
2.1. 배신과 즉위2.2. 연이은 내전
2.2.1. 흑양 조와 휴전, 헤라트 장악2.2.2. vs 주키 미르자, 후세인 바이카라
2.3. 내치2.4. vs 백양 왕조
3. 사후4. 기타

1. 개요

페르시아어 ابو سعید میرزا
우즈베크어 Abu Said / Абу-Сеид
영어 Abu Sa'id Mirza

생몰 1424년 ~ 1469년 2월 8일
재위 1451년 6월 ~ 1469년 2월 8일

티무르 제국의 7대 군주. 샤루흐의 손자로, 울루그 베그 사후 벌어진 내전에서 우즈베크 칸국의 도움으로 사마르칸트를 장악한 후 1458년 헤라트까지 점령하여 제국 주요부를 통합하였다. 이후 아부 사이드는 호라산을 침공한 흑양 왕조의 자한 샤와 맞서 백양 왕조우준 하산과 동맹을 맺었고, 자한 샤는 백양 조에 맞서다 전사하였다. 티무르 시기의 판도 복원을 꿈꾸던 아부 사이드는 우준 하산의 복속 제의도 거부하고 백양 조를 침공했으나 카라바그 전투에서 대패하고 곧 살해되었다. 후손으로 손자 바부르가 있다.

2. 생애

1424년 티무르 조의 왕공 무함마드 미르자와 쿠르드계 하카리 후국의 공주 수흐랍의 아들이자 티무르의 증손자로 태어났다. 부친 미란샤, 형제 칼릴 술탄과 달리 제위 계승 분쟁에 뛰어들지 않은 무함마드 미르자는 사촌이자 사마르칸트 총독인 울루그 베그와 친하게 어울렸다. 무함마드 미르자는 15세기 초엽 임종 시에 울루그 베그가 방문하자 아들 아부 사이드로 하여금 그에게 손을 맞대게 하여 대부로 삼아달라고 유언하였다. 약속을 지킨 울루그 베그는 아부 사이드에게 관직을 주고 자신의 딸을 결혼시켜[1] 사위로 삼았다.

2.1. 배신과 즉위

1447년 샤루흐가 사망하고 울루그 베그가 즉위하자 북부 변경의 수비를 맡고 있던 아부 사이드는 대부 측에 가담하지 않고 있다가 1449년 자신의 6촌이자 울루그 베그의 아들 압둘라티프가 반란을 일으키며 혼란이 도래한 틈을 타 아르군 부족을 동원해 사마르칸트를 공격하였다. 울루그 베그의 다른 아들 압둘아지즈가 시타델에서 농성하는 동안 압둘라티프와 맞서던 울루그 베그가 돌아오자 아부 사이드는 철수하였다. 다만 이 기회를 틈타 압둘라티프가 추격에 나서 사마르칸트에 당도하자 울루그 베그와 압둘아지즈는 항복하였고, 같은해 메카 순례에 나선 둘은 압둘라티프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그후 아부 사이드는 압둘라티프에 맞서 남하했으나 역시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다.

1450년 초엽 아부 사이드는 탈출에 성공, 부하라로 향하였다. 현지 유지들은 그를 별로 환영하지 않았고, 오히려 감금해버렸다. 하지만 같은해 5월 압둘라티프가 귀족들의 정변으로 살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부하라 유지들은 아부 사이드를 석방하고 충성을 서약하였다. 이에 아부 사이드는 또다른 6촌인 압둘라 미르자[2]에 맞서 사마르칸트로 진격하였고, 한차례 실패한 공격 후 튀르키스탄 (야스)을 점거하였다. 그리고 압둘라 미르자가 반격으로 진군해오자 아부 사이드는 우즈벡 족을 이끄는 아불하이르 칸에게 지원을 청하였고, 함께 압둘라 미르자를 격파하고 그를 처형하였다. (1451년 6월) 그후 아부 사이드는 주인이 없는 사마르칸트를 무혈 점령하였다.

2.2. 연이은 내전

집권 후 아부 사이드는 동맹 아불하이르 칸에게 많은 선물을 주고 울루그 베그의 딸과 결혼시켜 자신의 동서로 삼았다. 하지만 이후 아불하이르 칸은 아부 사이드에 대한 왕공들의 반란을 지원하며 트란스옥시아나를 약탈하는, 그의 숙적으로 변모하게 된다. 1454년 아부 사이드는 티무르의 장남 우마르 샤이크의 증손이자 자신의 7촌 조카인 우와이스 미르자가 아불하이르 칸의 도움으로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였고, 우즈벡 군대는 대패하고 물러났다. 권력을 공고히 한 아부 사이드는 같은해 6촌 알라 앗 다울라가 지배하던 발흐를 병합하고 그를 처형하였다.

이에 헤라트[3]의 아미르인 6촌 아불 카심 바부르[4]은 대군을 이끌고 사마르칸트를 포위하였고, 아부 사이드는 협상에 나서 아무다리야를 경계로 하는 휴전에 합의하였다. 다만 1457년 아불 카심 바부르가 사망하고 후계자인 어린 아들 마흐무드가 알라 앗 다울라의 아들인 사촌 이브라힘 미르자에게 찬탈당하자 아부 사이드는 남하하였고, 그해 7월 이브라힘은 도주하였다. 아부 사이드는 헤라트를 무혈 점령, 샤루흐의 과부이자 헤라트 궁정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유지하던 작은 할머니 가우하르 샤드를 이브라힘과의 내통 혐의로 처형하였다.

2.2.1. 흑양 조와 휴전, 헤라트 장악

하지만 발흐에서 압둘라티프의 아들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아부 사이드는 헤라트에서 철수해야 했고, 발흐가 평정된 후에는 흑양 왕조의 도전에 직면해야 했다. 샤루흐가 세 차례의 원정으로 복속시킨 흑양 왕조는 그의 사후 점차 벌어진 티무르 조의 혼란을 틈타 세력을 키웠고, 1452년 흑양 조의 자한 샤는 아불 카심 바부르를 격파하고 이란 주요부를 장악하였다. 바부르가 사망하고 재차 혼란이 일자 1458년 자한 샤는 아스타라바드의 이브라힘을 격파하였고, 후자는 헤라트로 철수하여 (실명된) 부친 알라 앗 다울라와 합류했으나 결국 도시를 버리고 도주하였다. 따라서 그해 6월 자한 샤는 헤라트를 무혈 점령하였다. 다만 아들 하산 알리가 반란을 일으키고 서쪽에서 백양 왕조우준 하산이 아제르바이잔을 위협하자 자한 샤는 회군을 결심하였고, 아부 사이드와 협상하여 이란 북부와 호라산 남부의 반환을 골자로 하는 휴전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흑양 조가 물러나자 아부 사이드는 4년 간의 노력 끝에 헤라트를 무혈 점령하고 자신의 수도로 삼았다. (1458년 12월) 하지만 협상 중이던 10월 중순 7촌 조카이자 티무르의 고손인 후세인 바이카라가 1천 병력을 이끌고 고르간을 점령해 자립하였다. 따라서 헤라트 접수 후 아부 사이드는 곧바로 출정하였고, 후세인 바이카라는 고르간을 포기하고 호라즘으로 물러났다. 아부 사이드는 아들 술탄 마흐무드 미르자를 총독으로 두고 회군하였는데, 이번에는 알라 앗 다울라와 이브라힘 부자가 샤루흐의 증손이자 메르브 태수인 술탄 산자르와 동맹하여 아부 사이드에 맞섰다. 하지만 그해 3월에 벌어진 사락스 전투는 아부 사이드의 승리로 귀결되었고, 술탄 산자르는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알라 앗 다울라와 이브라힘 부자는 도주 중 차례로 객사하였고, 헤라트의 가우하르 샤드 영묘에 안장되었다.

2.2.2. vs 주키 미르자, 후세인 바이카라

파일:티무르 영토.png
1460년경 아부 사이드 하의 티무르 제국 영토

하지만 샤루흐 가문의 저항은 끊이지 않았다. 일전에 발흐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스텝으로 도주한 압둘라티프의 아들 무함마드 주키 미르자는 아불하이르 칸에게서 우즈벡 지원군을 얻어 남하하였고, 조부 울루그 벡의 옛 병력을 흡수하여 아부 사이드가 제대로 병력을 편성하기도 전에 그의 군대를 격파한 후 아무다리야 강가에 이르렀다. (1460년) 트란스옥시아나가 우즈벡 족에게 유린당하자 아부 사이드는 대군을 모아 헤라트에서 출정하였고, 이에 우즈벡 족은 시르다리야 너머로 철수하였다. 아부 사이드는 주키가 피신한 시르다리야 강변의 샤루키야를 포위하였는데, 포위 측의 승리로 기울던 중 아부 사이드에게 비보가 날라왔다.

그가 헤라트를 비운 틈에 후세인 바이카라가 1461년 재차 고르간을 공격해 5월 자우지 왈리 전투에서 술탄 마흐무드 미르자를 격파, 압둘라흐만 아르군을 고르간 총독에 봉한 후 내침 김에 8월에는 헤라트를 포위했다는 것이다. 아부 사이드는 자신이 힘들게 얻은 수도를 구하기 위해 주키 미르자와 휴전을 맺고 포위를 풀어 헤라트로 향하였다. 그해 10월 아부 사이드가 접근하자 후세인 바이카라는 물러났고, 몇번의 전투 끝에 호라즘으로 도주하였다. 마잔다란과 고르간을 수복한 아부 사이드는 1462년 재차 주키의 샤루키야를 포위하였고, 1년간의 공방전 끝에 카와자 우바이둘라 아라르가 협상을 통해 항복하였다. (1463년 가을)

도시를 점령한 아부 사이드는 주민들을 건들지 않았고, 사마르칸트로 압송된 주키 역시 존중되었다. 다만 주키 미르자는 1464년 1월 헤라트의 이크티야렛딘 성채로 옮겨져 같은해 옥사하였다. 비슷한 시기 아불 카심 바부르의 아들 마흐무드 미르자 역시 사망하며 아부 사이드의 경쟁자는 점차 줄어들었고, 그는 티무르 본인도 명목상의 복속을 얻는데 그쳤단 바다흐샨을 점령하는 성과를 올렸다. 한편 후세인 바이카라는 1464년 들어 호라산에 대한 대한 습격을 자행했으나 별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이에 그는 아불 하이르 칸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후자가 1468년 사망하며 무산되었고, 한동안 후세인 바이카라는 이곳 저곳을 유랑하며 용병 노릇을 하며 지냈다.

2.3. 내치

아부 사이드는 샤루흐의 사후 10년 이상 이어지던 내전을 정리하고 호라산과 트란스옥시아나에 안정을 가져왔다. 다만 그 과정에서 티무르 시대의 잔혹함을 능가하는 암살과 처형이 있었다. 조정의 관료들은 사소한 잘못에도 해임 혹은 처형의 운명을 맞았고, 재상 쿠툽 앗딘 심나니의 경우 횡령죄로 처형되었다. 1462년 뇌물 수수와 세금 착취로 고발된 징세관 카와자 무이즈 앗딘과 샤이크 아흐마드에 대해 아부 사이드는 각각 헤라트 시타델 앞에서 가마솥에 끓이는 팽형과 성문 앞에서 산채로 피부를 벗기는 책형에 처하게 하였다. 이러한 잔혹한 처벌로 인해 질서가 유지되었지만, 작은 할머니인 가우하르 샤드에 대한 처형은 여론의 비판이 컸다.

전형적인 튀르크멘 군사 지도자였던 아부 사이드는 초기부터 자신을 부족장으로 선출한 핵심 지지 세력이던 튀르크계 아르군 부족을 정치, 군사 부문에 중용하였다. 아부 사이드의 왕비 역시 아르군 부족 출신이었고, 아르군 부족의 지배층과 그 자녀들에게는 후한 영지가 주어졌다. 성직자들 역시 아부 사이드의 지지 기반 중 하나로, 그들은 몽골 관습을 부활시키던 울루그 베그보다 수피 학자들의 영향을 받던 아부 사이드를 선호하였다. 특히 수피 낙쉬반디 종단의 셰이크 나시룻딘 우바이둘라 (카와자 알-아흐라르)와 친하게 지냈고, 그의 설득에 따라 사마르칸트와 부하라에 샤리아 법을 재정립하고 교리에 어긋난 상업 세금을 폐하였다.

다만 아부 사이드의 죽음과 제국의 (재)분열을 초래한 백양 조에 대한 원정 역시 셰이크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다. 또다른 수피이자 '셰이크 올 이슬람' 부르한 앗딘 역시 궁정에서 큰 영향력을 지녔는데, 그는 알-아흐라르와 달리 몽골-튀르크 관습의 유지를 주장하여 몽골계 귀족들의 지지를 받았다. 아부 사이드는 대부분의 경우 알-아흐라르의 관점을 따르긴 했지만 상황에 따라 부르한 앗딘의 견해를 따르는 등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았다. 주로 알-아흐라르는 민중과 군대의 여론과 부합하였고, 부르한 앗딘은 민중의 통제와 문화 증진에 효과적이었다.

여러 반란 때문을 겪으며 아부 사이드는 농업과 농민들의 복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관개 수로를 보수하고, 농민들을 배려하는 조세 제도를 시행하였다. 특히 재상 쿠툽 앗딘 심나니는 헤라트 북쪽의 주이 솔타니 수로 건설을 적극 주도하였다. 아부 사이드 개인적으로는 잦은 군사 원정 때문인지 (전과 달리) 헤라트 성벽 밖에 세워진 왕궁인 아크 사라이 외에는 대규모 건축 사업을 벌이지 않았다. 다만 마슈하드 일대에 물을 공급한 굴리스탄 댐의 보수, 헤라트 모스크의 이완과 가리 카루크의 증축, 티무르 조의 여름 별장인 오베의 목욕탕 등이 아부 사이드 대의 것으로 확인되는 건축 사업들이다.

2.4. vs 백양 왕조

1458년의 협상 후 아부 사이드는 자한 샤와 자주 서신을 교환하는 등 우호 관계를 이어갔다. 그러던 1467년 말엽, 메르브에 머물던 아부 사이드는 자한 샤가 우준 하산에게 패하고 전사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티무르의 고토인 아제르바이잔 수복에 나서기로 결심하였다. 1468년 2월, 아부 사이드는 (이미 백양 조에게 잡혀 자살한) 하산 알리의 구원 요청을 명분 삼아 출정하였다. 우준 하산을 과소평가한 아부 사이드는 병력과 보급품이 전부 집결하기도 전에 진군하는 우를 범하였다. 30여년 만에 나타난 티무르 술탄에게 이라키 아잠, 파르스, 길란 등이 복속하며 원정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하였다. 다만 아부 사이드는 신임 총독을 봉하지 않았고, 라이와 같은 중요 거점을 그저 지나치기도 하였다. 또한 도중 전달된 우준 하산의 (가문 대대로 지속된) 우호 관계 지속을 제안하는 서신에 직접 와서 복속하라는 답변을 보내었다.
아부 사이드는 우준 하산의 복속 의사를 거짓이라 여겼고, 자한샤의 아들 유수프가 흑양 조의 베이로 옹립되자 그를 지지하였다. 티무르 군대가 아제르바이잔의 미야네에 당도하자 5만 튀르크멘 부대를 포함한 흑양 조의 아미르들이 아부 사이드에 합류하였다. 아라스강에 이르러서는 시르반샤 파루크 야사르 역시 합세하였다. 하지만 아부 사이드의 대군은 1468-69년의 혹독한 겨울 속에서 2,000 km에 달하는 호라산과의 보급로가 라이의 백양 군대에 의해 종종 끊기며 보급난에 시달렸다. 청야 전술을 구사한 우준 하산은 육상 뿐만 아니라 시르반에서 오는 해상 보급 역시 차단하며 티무르-흑양 군대를 점점 궁지에 몰리게 하였다. 여기에 더해진 간헐적인 기습 공격은 아부 사이드 진영의 사기를 현저히 낮추었다. 이는 시르반샤 파루크 야사르가 우준 하산의 설득으로 연합군에서 이탈하며 악화되었다.

물자가 부족한 채로 아르다빌을 거쳐 무간 평원에 진입한 티무르-흑양 군대는 적과 마주치기도 전에 지쳐버렸다. 14일간 술탄의 명마가 건초를 먹지 못해 쓰러지는 일도 있었으니 일반 병사들이 기아에 시달린 것은 명약관화 하였다. 탈영병이 줄을 이었고 아부 사이드 샤 역시 무질서하게 후퇴하였다. 기회를 포착한 우준 하산은 아들들에게 정예 기병대를 이끌고 그를 추격하게 하였고, 그들은 카라바흐에서 아부 사이드 샤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1469년 2월에 벌어진 전투는 백양 왕조의 압승이었고 포로가 된 아부 사이드는 3일 후에 그가 거두었던 7촌 조카인 술탄 무함마드의 아들 야드가르 무함마드 미르자에게 넘겨져 (가우하르 샤드 처형에 대한 복수로) 살해되었다. 이후 우준 하산은 아부 사이드의 수급을 맘루크 왕조의 술탄 카이트베이에게 보냈는데, 그는 이슬람식 장례를 치러주었다.

3. 사후

아부 사이드는 헤라트와 사마르칸트를 동시에 지배한, 아제르바이잔까지 진군한 마지막 티무르 군주였다. 그의 죽음과 함께 티무르 제국은 호라산시스탄을 제외한 이란의 영토를 모두 상실하였고, 백양 조가 득세하게 되었다. 우준 하산은 야드가르를 티무르 조의 술탄으로 선포하고 호라산으로 파견, 1470년 아부 사이드 사후의 혼란을 틈타 헤라트를 장악한 후세인 바이카라를 축출하였다. 하지만 그해 8월 후세인 바이카라를 헤라트를 수복, 야드가르를 처형한 후 루트 사막을 경계로 우준 하산과 휴전을 맺었다.

이후 양국은 충돌하지 않았고, 호라산은 후세인 바이카라의 36년에 이은 지배 하에 상대적으로 안정을 누릴 수 있었다. 한편 아부 사이드의 아들들은 트란스옥시아나와 아프간 등지의 군소 세력을 이루었다. 장남 술탄 아흐마드는 사마르칸트, 차남 술탄 마흐무드는 바다흐샨 및 히사르, 삼남 울루그 베그 2세는 카불 및 가즈니, 막내 우마르 샤이크 2세는 페르가나를 영지로 삼았다. 그중 후자의 아들 바부르는 1497년, 1500년, 1513년 세 차례에 걸쳐 사마르칸트를 점령하며 제국의 부활을 꿈꾸었으나 실패하자, 북인도로 눈을 돌려 무굴 제국을 세웠다.

4. 기타

파일:아부 사이드 몽고 1 (2).jpg
아부 사이드의 후예인 무굴 제국에서 그를 묘사한 그림

15세기의 역사가 미르 카반드는 자신의 저서 라우자트 앗-사파에서 아부 사이드를 티무르 가문에서 가장 뛰어난 안목과 출신을 지닌 군주라며 칭찬하였다. 또한 학자, 성직자, 문인들의 벗이자 후원자였으며 그의 치세 동안 투르키스탄, 투란, 호라산, 자불리스탄, 시스탄, 마잔다란은 전성기를 누렸다고 평하였다. 다만 아부 사이드는 그의 야망이었던 티무르 대의 제국은 물론, 샤루흐 급으로도 재건하는 데에 실패하였다.


[1] 6촌 지간 결혼[2] 샤루흐의 아들 이브라힘 술탄의 아들[3] 샤루흐 사후 손자 알라 앗 다울라가 다스렸으나 1448년 울루그베그의 아들 압둘라티프가 점령하였다. 하지만 1449년 마잔다란-고르간의 아불 카심 바부르가 점령하였다. 이때 부친의 지원을 받지 못한 압둘라티프는 같은해 정변을 일으켜 부친을 죽인다. 그리고 같은해 이번에는 바부르의 감금에서 탈출한 알라 앗 다울라의 제안으로 이스파한-파르스의 술탄 무함마드가 동진하여 헤라트를 점령하였다. 이후 카불 총독으로 있던 알라 앗 다울라는 1450년 술탄 무함마드의 부재를 틈타 헤라트를 수복하였다. 하지만 이내 바부르가 재차 진군하여 헤라트를 점령하였고, 발흐로 철수한 알라 앗 다울라는 사마르칸트의 압둘라 미르자와 대결했으나 휴전을 맺었다. 한편 바부르는 1451년 술탄 무함마드를 사로잡아 처형하고 파르스와 이스파한을 얻었다. 다만 1452년 흑양 조의 자한 샤가 티무르 조에 대한 복속을 철회하고 동진하자 이란 주요부를 모두 상실하였고, 반격에 나서려 했으나 알라 앗 다울라가 또다시 헤라트를 노리자 철수하여 그를 사로잡아 실명시킨다.[4] 샤루흐의 아들인 바이순구르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