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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자르 술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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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별 명칭 Kasultanan Banjar (반자르어)
Kesultanan Banjar (마인어)
국기 파일:Banjar_Sultanate_Flag.svg.png[1]
존속기간 1526년 ~ 1860년,[2] 1862년,[3] 또는 1905년[4]
위치 인도네시아 남칼리만탄주
수도 반자르마신
언어 반자르어, 말레이어
종교 이슬람
성립 이전 다하 왕국, 다약인
성립 이후 네덜란드령 동인도

1. 개요2. 다하 왕국과 디파 왕국3. 역사
3.1. 16세기3.2. 17세기3.3. 18세기3.4. 19세기

[clearfix]

1. 개요

반자르 술탄국은 인도네시아 남칼리만탄 지역에 있던 술탄국이다. 항구도시 반자르마신과 인근 내륙의 마르타푸라(Martapura) 등의 반자르어[5]가 사용되는 도시를 중심으로 해양 무역을 통해 번성하였다. 16세기에 발흥하여 17세기 전반에 보르네오 남부, 남서부, 동부 전역을 영향권에 두고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간섭을 물리치는 전성기를 맞았으나, 결국 18세기 후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반독립적으로 종속되었다. 19세기 중반, 점차 네덜란드의 간섭이 심해져 반자르마신 전쟁이라는 반네덜란드 항쟁을 벌였으나 그 결과 해체되어 네덜란드령 동인도로 편입되었다. 반자르의 잔당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까지도 반네덜란드 항쟁을 벌였으나 결국 윤리정책 시대에 구 반자르 지역은 네덜란드령 동인도 치하에서 안정화되었다.

반자르 술탄국이 자리한 남칼리만탄 지역은 거의 전역이 우림 기후대인 보르네오 지역 기준으로는 비교적 강수량이 적당하고, 건기와 우기가 뚜렷하게 나뉘어 우기에 강수가 집중되며 땅이 비옥한 편으로 논농사를 기반으로 한 정주 생활이 용이하였다. 반자르 전통 의식 가운데는 벼농사의 풍작을 기원하는 것도 남아 있다. 남칼리만탄 지역은 오늘날까지도 인도네시아의 주요한 쌀 생산지이며, 인근 중부칼리만탄 및 동칼리만탄 지역에 쌀 잉여분을 공급하고 있다. 또한 반자르 지역은 교역에 적절한 위치에 있어 후추의 재배지로도 전통 시대부터 개발되었고, 동남아시아 해양 교역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에 따라 전통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이 지역은 서칼리만탄 일부 지역과 함께 오늘날 인도네시아령 칼리만탄 전체에서 가장 높은 인구 밀도가 유지되었다.

2. 다하 왕국과 디파 왕국

남칼리만탄과 중부칼리만탄 지역의 역사에서 중요한 사료인 17세기의 《히카얏 반자르》에 따르면, 반자르 술탄국이 성립하기 이전 남칼리만탄 지역에는 다하 왕국(Negara Daha, 1437?–1526)이라는 힌두 왕국이 존재하였다. 다하 왕국은 오늘날 다하슬라탄(Daha Selatan) 지역인 무후훌락(Muhuh Hulak) 지역에 도읍을 두었으며,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도기, 금속 공예품, 타일, 벽돌 등을 생산하며 무역하였다. 《히카얏 반자르》에 따르면 다하 왕국이 성립하기 이전에는 다른 힌두 왕국인 디파 왕국(Negara Dipa, 1387?–1495?)이 있었다고 한다. 디파 왕국 이전에는 '쿠리판'(Kuripan)이라는 나라가 있었다고 하는데, 쿠리판은 《히카얏 반자르》의 일부 판본에 언급되고 있지만 이 외에는 관련 사료가 거의 없으며[6], 고고학적으로 실체를 확실히 입증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히카얏 반자르》에는 디파 왕국과 다하 왕국 왕들의 계보와 간략한 행적이 실려 있다. 남칼리만탄 지역에 14세기 무렵 디파 왕국으로 추정되는 힌두 국가가 존재하였다는 사실은 지역에서 발굴된 당대 사원 유적들로 입증되고 있는데, 이러한 사원으로 아궁 사원(Candi Agung)과 라라스 사원(Candi Laras) 등이 있다. 아궁 사원은 14세기에 디파 왕국의 초대 군주 음푸 자트마카(Mpu Jatmaka, 또는 음푸 자트미카Mpu Jatmika)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라라스 사원은 스리위자야 왕가의 후손 지무타와하나(Jimutawahana)가 창건했다는 전승이 있는데, 사원 근처에서 발굴된 고대 비문에서는 스리위자야의 크두칸부킷 비문과 동일한 구절이 적혀 있어 스리위자야와의 연관성을 주장하는 설이 어느 정도 지지를 얻고 있다. 고고학적으로 라라스 사원 유적은 1300년 전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히카얏 반자르》에 따르면, 디파 왕국의 초대 군주 음푸 자트마카(자트미카)는 인도 동남부 코로만델 해안에서 온 남인도계 상인 출신이라고 한다. 남인도계 및 구자라트계 추종 세력을 이끌고 지역에 들어온 음푸 자트마카는 지역을 정복하고 라라스 사원 지역을 중심으로 왕도를 세워 디파 왕국을 창건하였다가 아궁 사원 지역으로 세력 중심을 옮겼다. 지역민들은 새로운 왕국이 만들어낸 질서에 만족했다고 한다. 디파 왕국의 2대 왕 람붕 망쿠랏(Lambung Mangkurat)도 《히카얏 반자르》 등에 실린 여러 일화로 반자르 지역에서는 유명한 왕이다.

3. 역사

3.1. 16세기

남칼리만탄 지역에 존재하던 힌두계 토착 왕국 다하 왕국의 왕족(다하 왕 수카라마Sukarama의 외손자) 라덴 사무드라(Raden Samudra)가 생존에 위협을 느끼고 바리토강(Barito강)으로 도망쳐 추종 세력을 규합하였다. 라덴 사무드라는 이 과정에서 1526년 이슬람교로 개종하는 등의 우여곡절 끝에 반자르의 술탄 수리안샤(Sultan Suriansyah, 군주 1520?–1526, 술탄 1526–1540/1546/1550)로 즉위하여 정복 사업을 펼쳐 최종적으로는 기존 다하 왕국의 영토를 지배 하에 두었다.

《히카얏 반자르》에 따르면 술탄 수리안샤는 활발히 원정을 펼쳐 남칼리만탄의 여러 지역과 민족뿐 아니라 동칼리만탄의 쿠타이, 브라우 지역까지 영향권에 편입하였다. 또 다하를 흡수하고 나서 술탄 수리안샤는 다하의 아리아 타랑가나(Aria Taranggana)를 대재상(mangkubumi)으로 임명하고, 행정 및 법률 제도를 정비하였다. 술탄 수리안샤가 사망하여 재위가 끝난 정확한 시점은 사료 간 불일치로 다소 불확실하며, 1540년, 1546년, 1550년 설이 있다.

반자르 술탄국은 초기에는 드막 술탄국에 조공하며 명목상 드막의 영향권에 속하였으며, 이때 자바 지역에서 상인, 학자, 선교사 등이 반자르를 드나들며 반자르의 이슬람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반자르는 드막 술탄국이 16세기 중반에 망한 후 독립하였고, 뒤를 이은 파장 왕국이나 마타람 술탄국에는 더 이상 조공하지 않았다. 드막을 종주국으로 할 때도 반자르는 자바 지역과 미묘한 긴장을 빚었는데, 관련하여 드막 술탄국의 술탄 트릉가나와 술탄 수리안샤가 주고받은 편지도 있다.

술탄 수리안샤를 계승한 술탄 라마툴라(Sultan Rahmatullah, 재위 1540/1546/1550–1570, 술탄 수리안샤의 장자)와 술탄 히다야툴라 1세(Sultan Hidayatullah I, 재위 1570–1595, 술탄 라마툴라의 아들)의 치세에 반자르의 세력권은 유지되었지만, 히다야툴라 1세의 아들이 자바의 투반(Tuban) 지역에서 마타람 술탄국 관리에게 붙잡혀 구금되었다가 다음 술탄 무스타인 빌라의 치세에 풀려나는 등 자바 세력과의 긴장은 유지되었다.

오늘날 반자르마신 시내에는 술탄 수리안샤, 술탄 라마툴라, 술탄 히다야툴라 1세의 세 술탄과 술탄 수리안샤의 모후 라투 인탄 사리(Ratu Intan Sari) 등 여러 반자르 왕족과 드막 술탄국에서 온 자바인 학자 하팁 다얀(Khatib Dayan) 등이 묻혀 있는 술탄 수리안샤 묘역군(Kompleks Makam Sultan Suriansyah)이 있다.

3.2. 17세기

반자르 술탄국은 제4대 술탄 무스타인 빌라(Sultan Mustain Billah, 재위 1595–1642)의 치세에 전성기를 맞아 17세기 초 동남아시아에서 후추의 생산과 교역 중심지 가운데 하나가 되었으며, 보르네오섬 남부, 동부, 남서부 전역의 토착 호족들을 영향권 하에 두었다. 술탄 무스타인 빌라는 보르네오 내륙 및 중남부 지방의 다약인과 벌어진 전쟁을 잘 수습하였고 일부 다약인 지역으로 영향권을 넓혔는데, 특히 오늘날 중부칼리만탄 지역 해안 지대의 다약인들을 통제 하에 두고 봉신국 코타와링인 왕국(Kerajaan Kotawaringin, 1615–1948)을 세워 아들을 군주로 임명하였다. 마타람 술탄국술탄 아궁은 1622년 보르네오로 진출하여 반자르 술탄국의 지배 영역을 잠식할 계획을 입안하였지만, 자원이 부족하여 대규모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고 보르네오 남서부 수카다나(Sukadana) 지역을 점령하는 데 그쳤다. 무스타인 빌라의 치세에 반자르의 행정 및 사법 기구는 조금 더 정교해졌다.

무스타인 빌라는 17세기 초 군도에 도착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세력과도 교류하였다. 동인도 회사는 반자르 지역에서 후추 무역을 독점하려고 시도하였고, 술탄이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자 1634년에는 반자르 지역으로 함대를 보내 무력 시위까지 시도했지만 반자르 세력이 철저한 방비 태세를 갖추고 맞이하자 돌아가야만 했다. 그러나 이내 반자르는 17세기 전반에 긴장 관계를 유지하던 자바의 마타람 술탄국을 견제하는 데 유럽 세력을 이용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1635년 6월 17일 영국 동인도 회사도 반자르에 사절을 보내 상관 개설을 요청하였는데, 영국 동인도 회사는 남술라웨시의 마카사르인 세력을 선동해 반자르를 공격하게 한 전력이 있었으므로 술탄은 요청을 거절하였다. 술탄이 최종적으로 선택한 것은 네덜란드 세력이었고, 반자르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1635년 9월 4일 반자르에서 외부로의 후추 교역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배로만 수행한다는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마타람 술탄국의 위협에 대항해 반자르와 보조를 맞추며 반자르를 도왔다. 마타람과 반자르 간 대치 국면은 1637년에 양국 간 평화 협정이 체결되어 종료되었다. 이후 마타람 술탄국에서 군주의 눈 밖에 난 사람들에게 17세기와 18세기 동안 반자르는 인기 있는 망명처가 되었고, 이들은 당대의 자바 문화를 반자르로 퍼뜨리는 데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1630년대 반자르에서는 대외 정책에서 친네덜란드파, 친마타람파, 친영파가 모두 일정한 지분을 갖추고 있었다. 1635년 9월의 협정에서 반자르의 요구, 특히 인도차이나 반도로 반자르가 직접 수출할 권리가 조약에 포함되지 않아 반자르 측에서 불만을 품은 사람도 많았다. 1636년, 늙은 술탄 무스타인 빌라가 정신 쇠약으로 더 이상 정무를 볼 수 없게 되어 반자르에서는 무스타인 빌라의 장자이자 태자인 술탄 이나야툴라(Sultan Inayatullah, 집권 1636–1642, 술탄 재위 1642–1645)가 집권하였다. 마타람과의 긴장이 어느 정도 해소된 후인 1638년, 반자르는 마카사르 지역으로의 후추 수출을 네덜란드 상관에 요청하였지만 거절당했다. 이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반자르에서 반네덜란드 감정이 폭발하였고, 동년 반자르인들이 네덜란드 상관을 불태우고 네덜란드 선박을 파괴하며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고용된 108명의 네덜란드인과 28명의 일본인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후 반자르는 네덜란드, 영국, 포르투갈, 스페인 등 유럽계 세력 모두와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1638년의 사건으로 엄청난 손해를 입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일단 징벌 명목으로 반자르 해안 지역을 봉쇄하며 해안에서 77명의 반자르 민간인을 납치하여 귀를 자르는 등 마구잡이로 고문하였지만, 이들은 자신이 무슨 일로 붙잡혔는지도 모르는 무고한 자들이었고 고문은 단순히 동인도 회사의 화풀이에 불과하였다. 결국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군대를 동원하여 반자르로 보내 재차 무력 시위를 벌였지만, 수적 열세와 반자르군의 강성함으로 인해 아무 효과 없이 물러나야 했다. 마침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사절을 보내 1638년의 네덜란드 고용인 학살 사건에 대한 배상금을 요구했으나 반자르는 간단히 묵살하였고, 이후 한동안 네덜란드와 반자르 간에는 긴장 관계가 이어졌다. 이 반대급부로, 반자르와 마타람 간 관계는 상대적으로 가까워지게 되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로서도 군도 교역망의 중심지 중 하나인 반자르 지역은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곳이었고, 유럽의 경쟁 세력 영국 동인도 회사 등이 반자르에 접근할 가능성도 고려해야 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1640년대부터 오직 배상금만을 요구하다가, 결국 배상금 요구조차도 포기하고 1660년 12월 18일 다시 반자르 술탄 락야툴라(Sultan Rakyatullah, 재위 1660–1663, 술탄 무스타인 빌라의 아들)와 우호적인 무역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로 인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다시 반자르 지역에 상관을 개설하고 무역할 수 있게 되었다. 1661년에는 1635년의 협정과 유사하게 반자르에서 수출되는 후추는 네덜란드 배로만 넘어가야 하고, 그 후추는 네덜란드 세력권인 바타비아말라카로만 넘어가야 하며,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상관은 반자르 술탄의 보호를 받는다는 협정이 체결되었다.

1661년의 반자르–네덜란드 협정이 비록 반자르 지역에서 네덜란드의 후추 무역 독점을 규정하고 있기는 했지만, 이는 명목상에 불과하였고 17세기 후반 내내 반자르 지역은 타 세력, 즉 군도 지역의 자바, 말레이, 남술라웨시 상인들이나 영국, 포르투갈 세력 등과 반자르마신에서 후추와 등을 수출하며 자유롭게 교역하였다. 오히려 네덜란드 세력의 고압적인 태도는 반자르 내 반네덜란드 감정을 키웠고, 1667년 인근 남술라웨시 고와 술탄국 지역에서 체결된, 마카사르인들의 항해와 무역을 상세하게 제한하는 불평등한 붕아야 조약은 반자르인들이 네덜란드 세력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했다.

17세기 후반에 집권한 반자르의 술탄 아궁[7](Sultan Agung (dari Banjar), Sultan Dipati Anom, 재위 1663–1679) 시대 반자르는 균형 무역과 후추 플랜테이션의 융성으로 경제적 전성기를 맞았으며, 술탄은 네덜란드 세력의 영향력을 경계하였다. 1665년 7월에는 술탄이 반자르 영내 특정 지역에서 생산한 후추를 네덜란드를 배제하고 마카사르인, 영국인, 포르투갈인, 중국인 상인에게만 판매하는 일도 있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당시 이 사실을 알았지만, 반자르의 세력을 고려하면 별다른 조치를 할 수 없었다.

술탄 아궁은 당시 술탄 아긍 티르타야사의 치하에서 마타람으로부터 보르네오 남서부 수카다나 지역을 탈취하는 등 전성기를 맞은 반튼 술탄국에도 정치적으로 접근하였고, 반자르가 반튼의 영향권으로 편입하는 것을 타진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반튼 술탄국은 술탄 아긍의 치세 후반에 벌어진 내전으로 1680년대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종속되었다. 17세기 말 반자르는 잠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관심 범위에서 멀어졌고, 반자르와 네덜란드 세력의 교역은 뜸해지게 되었다.

3.3. 18세기

18세기 초 반자르와 네덜란드의 교역은 여러 협정이 체결되며 다시 조금씩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때 반자르와 네덜란드 양측의 이해 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술탄 수리아 알람(Sultan Suria Alam, 재위 1700–1717) 치세에 반자르는 중부칼리만탄 지역의 응아주(Ngaju)인들과 전쟁을 치르며 후추 생산이 감소하고 있었고, 당시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남술라웨시 부기스인들도 반자르 술탄국을 위협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술탄 수리아 알람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로 반자르의 후추 교역 독점권을 제안하며 교역 재개를 타진하였다. 그 반대급부로 술탄은 네덜란드 세력이 응아주인과 부기스인에 대항하여 반자르를 도와주기를 원했다.

한편, 18세기 초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주요 후추 공급원인 수마트라 남부 람풍 지역(반튼 술탄국 통치) 및 수마트라 동부 잠비 지역(잠비 술탄국)에서 여러 요인으로 당시 후추 생산이 감소하고 있었으므로 네덜란드는 새로운 후추 공급원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결과적으로 동인도 회사는 술탄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반자르와 바타비아 간 교역이 재개되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술탄의 의향에 따라, 1711년 반자르 영내에서 발발한 응아주인의 반란에서 반자르 진압군 측에 합세해 반자르를 돕기도 했다.

18세기 중반에는 수수후난 나타 알람(Susuhunan Nata Alam, 술탄 타미둘라 2세Tahmidullah II, 재위 1761–1801)이 술탄[8]이 되었는데, 권력투쟁에서 밀린 왕자 아미르(Amir)가 파시르(Pasir)로 가서 부기스인(Bugis) 세력[9]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아룽 타라웨(Arung Tarawe)가 이끄는 3천 명의 부기스인 군대와 함께 1785년 반자르를 침공하였다. 아미르 왕자와 아룽 타라웨는 처음에 군사적 성공을 거두고 반자르 최대의 후추 집결지 타바니오(Tabanio) 항구를 점령했지만, 부기스인 병사들이 부주의하게 후추 플랜테이션을 파괴하고 무고한 민간인을 살해하는 등 패악질을 부려 아미르 왕자를 동정하던 반자르인들도 지지를 거두게 되었다.

아미르 왕자와 부기스 군대를 자력으로 막아내지 못한 수수후난 나타 알람은 결국 1787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동인도 회사가 파견한 호프만(Hoffman)의 군대는 즉각 반자르로 와서 동년 부기스인을 물리치고 아미르 왕자를 붙잡아 네덜란드령 실론으로 유배하였다. 수수후난 나타 알람은 도움을 요청하면서 1787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여러 협정을 체결하였는데, 이들 협정의 내용은 요약하면 (1) 코타와링인을 포함한 오늘날 중부칼리만탄주 서부 해안 지역 및 파시르(동칼리만탄주 남부)와, 본토(남칼리만탄)의 라웃섬(Pulau Laut)과 타바니오를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양도하고, (2) 반자르 술탄국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보호국이 되며, (3) 반자르의 태자와 대재상을 네덜란드의 승인을 거쳐 임명하도록 하고, (4) 이후 반자르의 술탄위는 수수후난 나타 알람의 후손만이 계승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1787년부터 반자르의 독립이 끝나고 반자르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산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18세기 말 이는 일단 명목상의 것이었는데, 중부칼리만탄과 파시르 지역에 대한 반자르의 지배는 간접적인 것이었으므로 반자르의 실질적 영토 상실은 본토의 타바니오와 라웃섬 지역에 국한된 것이었고, 이후 18세기 말까지 반자르에서 반네덜란드파도 계속해서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노련한 수수후난 나타 알람은 지속적으로 반자르 정계의 중심에서 최대한 네덜란드의 압력에 저항하며 반자르의 주권을 지켜냈는데, 네덜란드를 견제하기 위해 영국 세력에 접근하며 동시에 네덜란드로 이익이 넘어가지 않도록 네덜란드가 관리하는 후추 플랜테이션들을 파괴하기도 했다. 마침 유럽에서 벌어진 프랑스 대혁명프랑스의 군사적 간섭으로 네덜란드가 프랑스 치하에 놓여 바타비아 공화국이라는 프랑스 괴뢰국이 되자, 1799년까지 유지되었으나 경영난을 겪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그리고 그 이후의 프랑스 산하 네덜란드 세력의 반자르에 대한 입장은 점점 더 곤혹스러워졌다. 심지어 수수후난 나타 알람은 1797년 동인도 회사와 새로운 조약을 맺어 1787년 넘겼던 파시르와 라웃섬 지역의 종주권을 되돌려 받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수수후난 나타 알람의 플랜테이션 파괴는 양날의 검이었고, 이로 인해 무역 국가 반자르는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3.4. 19세기

수수후난 나타 알람이 1801년에 사망하고 뒤를 이은 술탄 술라이만(Sultan Sulaiman Saidullah, 재위 1801–1825)의 치세 초기에도 바타비아 공화국은 반자르에 대해 일단 저자세를 유지해야 했다. 1802년과 1806년에 반자르와 바타비아 공화국 간 새로운 협정들이 체결되었는데, 여기서도 바타비아는 반자르와의 우호를 강조하며 사실상 반자르의 주권을 존중하였고, 정치나 무역 방면에서 최대한 반자르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 총독 헤르만 빌럼 단덜스(재임 1808–1811)는 영국 세력의 위협 등으로 반자르까지 신경쓸 여력이 없었고, 결국 1809년 네덜란드 세력은 반자르에서 잠시 전면 철수해야 했다. 그러나 1811년 자바를 점령한 영국 세력은 기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확보한 보르네오 남부 지역을 다시 점령하고, 반자르와 18세기 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조약을 체결하였다.

나폴레옹 전쟁의 전개에 따라 영국 세력은 1816년 자바를 포기하였고, 이어 네덜란드령 동인도 각지에서 네덜란드의 지배권이 빠르게 회복되었다. 1817년 1월 1일 돌아온 네덜란드 세력은 반자르 술탄국과 새로운 협정을 체결하였는데, 1787년의 협정보다 더한층 많은 영토를 반자르에서 빼앗는 것을 골자로 하였다. 이때부터 사실상 반자르는 돌아온 네덜란드 세력에 다시 종속되게 되었다. 1845년, 반자르 술탄국 지역과 타 네덜란드령 동인도 지역 간 국경이 확정되었다. 이 시점에 반자르 술탄국은 반자르마신 등 해안 도시를 완전히 상실하고 내륙만을 통치하고 있었고, 반대로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보르네오 총독은 반자르의 옛 수도였던 반자르마신에서 집무하였다.

19세기 중반, 네덜란드가 반자르 영토를 계속해서 잠식하고 술탄위 계승에 심하게 간섭하자 반발이 일어나 네덜란드와 반자르 사이에 반자르마신 전쟁(1859–1863)이 발발했다. 전쟁 와중인 1860년 술탄국은 네덜란드에 의해 해산되었지만, 반자르의 마지막 술탄 히다야툴라 2세(Hidayatullah II, 재위 1859–1862)는 네덜란드와의 항쟁을 지속했다. 히다야툴라 2세는 1862년 3월 2일 네덜란드에 체포되어 자바의 치안주르(Cianjur)로 유배되었으나, 반자르 세력은 안타사리 공(Pangeran Antasari)의 통솔 하에 곧 다시 뭉쳐 항쟁을 지속하였다. 안타사리 공이 1862년 10월 11일 병사하자 안타사리 공의 아들 무하맛 스만(Muhammad Seman)이 이어서 반자르 잔당을 통솔하였다.

반자르마신 전쟁 이후, 반자르의 구 내륙 영토는 마르타푸라(자야 프므낭 공Pangeran Jaya Pemenang 통치)와 아문타이(다누 라자 공Raden Adipati Danu Raja 통치)의 네덜란드 산하 번왕들이 통치하게 되었다. 이후 19세기 말 이들 지역은 네덜란드 직할령으로 흡수되었다. 반자르 술탄국의 마지막 항쟁 지도자 무하맛 스만은 계속해서 보르네오 남부 내륙에서 반네덜란드 반군을 통솔하며 20세기 초까지 항쟁을 지속하였지만 구 반자르 술탄국 영토를 회복할 힘은 없었다. 무하맛 스만은 1905년에 사망하였고, 20세기 초 윤리정책 시대 구 반자르 지역은 네덜란드령 동인도 치하에서 안정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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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스트리아 제국의 국기와 유사하나 상하가 뒤집어진 모습이다.[2] 네덜란드의 반자르 술탄국 해산.[3] 실질적인 마지막 술탄 체포로 퇴위.[4] 반자르 잔당을 이끌던 마지막 항쟁 지도자 사망.[5] 반자르 술탄국 시대 남부 보르네오 전역의 공용어가 되었으며 말레이어와 아주 가깝다.[6] 그나마 쿠리판 왕국을 14세기 자바 문헌 《나가라크르타가마》(1365)에 실린 '타발롱'(Tabalong)과 동일시하는 의견이 있기는 하다.[7] 유명한 마타람의 술탄 아궁과는 다른 인물이다.[8] 술탄으로서의 명칭 '타미둘라 2세'보다 '수수후난 나타 알람'이라는 명칭으로 더 유명하다.[9] 전통적으로 남술라웨시의 마카사르인과 부기스인은 보르네오 동부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