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6-30 22:11:25

카이딘 황제

홍종에서 넘어옴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cccc02, #FAFA00 20%, #FAFA00 80%, #cccc02); color: #DD1E1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DD1E1F>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세조 성조 헌조 익종
<rowcolor=#DD1E1F>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공종 협화제 간종 함의제
<rowcolor=#DD1E1F>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경종 성태제 유신제 홍종
<rowcolor=#DD1E1F> 제13대
보대제
조조 · 태조 · 희종 · 신종 · 태종
영종 · 현종 · 숙종 · 세종 · 예종 · 흥조
}}}}}}}}}

<colbgcolor=#FAFA00><colcolor=#DD1E1F>
응우옌 왕조 제12대 황제
카이딘 황제
啓定帝 | Khải Định
파일:Khai_Dinh_throne.jpg
출생 1885년 10월 8일
프랑스령 안남 보호령 후에 황궁
(現 베트남 후에시)
사망 1925년 11월 6일 (향년 40세)
프랑스령 안남 보호령 후에 황궁
(現 베트남 후에시)
능묘 응릉(應陵)
재위기간 제12대 황제
1916년 5월 18일 ~ 1925년 11월 6일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FAFA00><colcolor=#DD1E1F> 성씨 응우옌(Nguyễn, 阮/완)
푹브우다오(Phúc Bửu Đảo, 福寶嶹/복보도)
→ 푹뚜언(Phúc Tuấn, 福昶/복창)
부모 부황 경종 순황제
모후 우천순황후
형제자매 6남 4녀 중 장남
배우자 단휘황태후 외
자녀 1남
묘호 홍종(弘宗)
시호 사천가운성명신지인효성경이모승열선황제
(嗣天嘉運聖明神智仁孝誠敬貽謨承烈宣皇帝)
연호 카이딘(Khải Định, 啓定/계정, 1916년 ~ 1925년)
}}}}}}}}} ||

1. 소개2. 생애3. 가족

[clearfix]

1. 소개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제12대 황제. 묘호는 홍종(弘宗), 시호는 사천가운성명신지인효성경이모승열선황제(嗣天嘉運聖明神智仁孝誠敬貽謨承烈宣皇帝). 즉위 전 이름은 완복보도(阮福寶嶹)이었으나, 즉위 후에 이름을 완복창(阮福昶)으로 고쳤다. 경종 동경제(景宗 同慶帝)의 아들. 유신제(維新帝)의 숙부. (Nguyễn Phúc Cường 응웬 푹 끄엉 / 완복창의 베트남어 표기이다.)

2. 생애

1916년, 유신제가 폐위되자, 그 뒤를 이어서 황제로 즉위했다. 계정제는 베트남 제국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프랑스의 도움과 협력을 받지 않았다 라고 스스로는 생각했지만, 전세계는 베트남을 프랑스의 식민지로 인정하고 있었다.

1919년, 계정제는 공식적인 언어로 한문 대신 베트남어(꾸옥응으)를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 해의 시험을 끝으로 과거 제도가 폐지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치세'의 전부라고 봐도 된다.

1925년, 계정제가 40세의 나이로 결핵으로 사망하였는데, 그가 묻혔던 응릉([ruby(Ứng lăng, ruby= 應 陵)])은 계정제가 사망하기 5년 전인 1920년부터 만들기 시작하였고, 1931년에 완성된 황릉이다. 그리고 베트남 황릉 및 다른 국가의 황릉과는 다른 모습인데, 그 이유는 프랑스의 식민 통치로 인하여 서양 건축 양식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 외아들인 보대제 완복전이 황제가 되었다.

3. 가족


어느 후궁이 계정제가 "성에 흥미없어 한다"는 글을 남겼을 정도로 많은 여자를 두지 않았고, 자녀들도 많지 않았다.


[1] 응우옌 왕조의 후궁 제도에는 대부분 황후가 없이 황귀비가 사실상 황후 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