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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후

황실왕실의 구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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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타나는건 비록 황제(帝)의 힘이지만,
키우는건 바로 곤원(坤元)[1]이다.
문모(文母)[2]의 덕처럼 따뜻하고
강함에 날씨의 따뜻함까지 더했네.

버들나무는 따뜻함을 만나 놀래 눈을 뜨고,
새는 따뜻한 바람을 빌려 노래를 부른다.
동조(東朝)[3]의 수(壽)를 경하하기 위해
만년천자(萬年天子)[4]가 잔을 올린다.
發生雖帝力,
亭育本坤元.
文母仁風煦
剛添氣候喧.
柳迎韶景驚擡眼,
鳥倚和風快弄吭.
欲識東朝眉壽慶
萬年天子手稱觴.
- 고려시대 태후전에 붙힌 <춘첩자>(春帖子), 입춘을 맞이해 축하하는 뜻으로 전각 기둥에 붙히는 문장.
《동국이상국전집》 17권에서 발췌.
1. 개요2. 동양
2.1. 한국
2.1.1. 고려 이전2.1.2. 조선 ~ 대한제국
2.2. 중국
3. 서양
3.1. 오스만 제국
4. 나무위키에 항목이 개설된 태후들
4.1. 실존인물
4.1.1. 한국4.1.2. 중국4.1.3. 일본4.1.4. 오스만 제국4.1.5. 신성 로마 제국4.1.6. 독일4.1.7. 러시아4.1.8. 브라질 제국
4.2. 가상인물

1. 개요

皇太后
Empress Dowager

왕정 국가에서 선대 군주의 정처(正妻)가 갖는 지위. 정식 명칭이 황태후(皇太后)이고, '태후'(太后)는 약칭이다. 동아시아에서 태후급의 지위는 국가의 정체(政體)마다 명칭이 달랐는데, 천자국은 '황태후'(皇太后), 제후국은 '왕대비'(王大妃), 외왕내제 체제의 국가는 '왕태후'(王太后)라고 불렀다.

원래 현재 황제의 어머니가 되는 여성에게 주는 지위였기 때문에, 꼭 황후였던 여성만 황태후가 될 수 있는 건 아니었다.예를 들어 중국 전한의 고황후 박씨는 후궁이었지만 황제의 친모-친조모라서 황태후-태황태후가 되었다. 그녀가 황후의 지위를 얻은 건 후한 광무제 때다. 한국사에서 고구려의 부여태후와 신라의 지소부인은 남편이 왕으로 추존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왕의 친모라서 왕태후가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황후였던 사람만 황태후가 될 수 있는 걸로 체계화되어, 황제가 황후가 아니었던 자신의 어머니를 황태후로 만들려면 어머니를 추존 황후로 만들거나, 황후에 준하는 지위를 줘야 했다.

명대•청대로 넘어오면서 서자 출신의 황태자가 등극하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나자 호칭이나 격식의 차이를 두어 서열을 매겼는데, 명대의 경우 시기마다 다르다. 7대 경태제 시기를 살펴보자면 부황의 정실은 효공장황후 손씨였고, 친모는 효익황태후 오씨였다. 손씨는 상성황태후(上聖皇太后)로 부르고 오씨는 그냥 황태후로 두었다. 13대 만력제의 경우 적모가 효안황후 진씨, 친모가 효정황후 이씨였다. 두 황후 모두 모후황태후(母后皇太后)로 명칭의 구분은 없었으나, 인성황태후(효안황후)는 황후의 부축을 받고 자성황태후(효정황후)는 정귀비가 부축하여 적서의 차이를 두었다.

청대에는 전자의 경우 '모후황태후'(母后皇太后)로 후자는 '성모황태후'(聖母皇太后)로 구분하였다.

만약 현 군주가 죽고, 다음 군주가 즉위했을 때도 황태후(왕대비)가 살아 있다면 태황태후(대왕대비)로 격상 되었다.

황태후와 비슷한 단어로 태상황후가 있다. 중국, 베트남 등에서 쓰였는데 황태후는 태상황이 붕어했을 때, 태상황후는 태상황이 살아있을 때 쓰였다.

가끔씩 전대 군주와 후대 군주의 관계가 부자 관계가 아닐 때도 종종 있었고, 몇몇의 사례의 경우 후대 군주의 항렬이 더 높은 적도 많았지만[5] 이러한 경우에도 전대 군주의 정처는 황태후로 불렸다. 이 문단의 첫 문장부터 알 수 있듯이 황태후는 선대 임금의 정처를 지칭하는 말이며, 후대 임금이 아무리 항렬이나 나이가 위라고는 해도 과거나 현재나 선대 임금 앞에선 신하이기 때문에 마땅히 그의 아내를 황태후로 높여야 하는 것이 타당하다.

기본적으로 황태후의 칭호는 생전에만 부여되는 존호와 같은 것이며, 황태후 사후의 정식 시호는 황태후가 아닌 황후로 올리는 것이 원칙이다. 다만 고려와 같은 경우는 왕태후 사후에 시호를 왕후로 하지 않고 생전에 불린 대로 왕태후로 올렸다. 고려 예종 대에는 김부의가 이 점에 대해 중화의 예법에 어긋난다고 지적하였지만 예종이 듣지 않은 바 있다.

반면 조선의 경우에는, 왕대비 사후 시호를 왕대비가 아닌 왕후로 올렸다. 당시 왕대비는 오직 왕대비의 생전에만 불리는 존호였으며 정식 시호로 올려지지는 않았기에 중화의 예법을 철저히 따랐다고 볼 수 있다.[6]

2. 동양

2.1.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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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사상 및 유교의 예법상으론 황태후는 천자국, 즉 중국 왕조만 쓸 수 있었다. 천자국이 아닌 제후국은 왕대비 등 한 단계 격하된 지위만을 쓸 수 있었다.

하지만 외왕내제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한국 왕조는 왕태후(王太后)를 사용하면서도 종종 '황태후'(皇太后)를 사용했다. 즉, 왕태후(王太后)와 황태후(皇太后)가 혼용되었다.

한국의 고조선, 부여, 발해는 태후 지위를 썼는지 기록이 없다. 고구려, 신라는 위에서 말한 왕태후나 태후 지위를 쓴 부분적인 사용례만 있다. 백제는 왕대비 지위 사용례만 단편적으로 존재한다.

현 대한민국 시점에서 이에 대해 자세한 기록이 있는 국가는 고려, 조선 두 왕조이며 각각의 명칭으로 항목을 나누어 설명한다.

2.1.1. 고려 이전

한국사 최초의 태후는 고구려부여태후다. 이후엔 동천왕이 자신의 양어머니 왕후 우씨를 왕태후로 올렸다.

신라 또한 태후 사용례가 꽤 등장하는데, 기록상 신라 최초로 등장하는 태후는 제24대 진흥왕이 7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왕태후'가 섭정했다는 기록이다. 단 섭정을 한 태후가 법흥왕의 왕비이자 외할머니인 '보도부인'인지, 모친인 '지소부인'인지 불확실하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법흥왕의 딸이자 입종 갈문왕의 비, 즉 지소부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는 지소부인을 가리키는 걸로 본다.

신라 후반기 신문왕왕후이자 효소왕, 성덕왕의 모후인 신목태후(神睦太后) 이래로, 8세의 나이로 즉위한 혜공왕의 모후 만월부인(경수태후(景垂太后)라고도 함)의 섭정 기록 등 신라는 이후 현재 군주가 자신의 어머니를 왕태후, 혹은 황태후로 추존하는 사례가 자주 등장한다.

제도가 그나마 온전히 전해지는 고려는 선대의 황후나 모후을 태후로 올리는 중국과 예법이 달랐다. 원간섭기와 간섭기 이후 고려말을 제외하면 왕의 어머니는 예외없이, 자동적으로 태후가 되었다. 모후가 죽은 상태였다면 시호를 왕태후를 올렸다. 조선처럼 비의 가장 높은 시호가 왕후가 아니라 고려의 예법에서는 왕태후가 가장 높은 격의 칭호이며 시호였다. 거꾸로 말하면 아들이 왕이 아니라면 죽어서든 살아서든 절대 태후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원간섭기와 간섭기 이루 고려 말을 제외하고, 비가 죽어 시호가 왕후가 되었어도 아들이 왕이 되면 왕태후로 자동적으로 시호가 올라가는 경우가 많았다. 현종의 어머니 헌정왕후는 사후 경종의 왕후로서 왕후 시호를 받았다. 이후 아들 현종이 왕위에 오른 뒤 왕태후, 이어 현화사비 기록으로 대왕태후까지 시호가 올라간다. 고종(고려) 때는 황태후를 시호로 받은 왕후가 태황태후로 또 올라간 경우도 있다. 드문 사례로 자신의 왕비에게 왕태후 시호를 주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공민왕이 자신의 아내인 노국대장공주에게 왕태후 시호를 주었다. 원간섭기 이전에 왕태후 시호를 받은 경우로 신명순성왕태후, 신성왕태후, 헌애왕태후, 효숙왕태후, 원성태후, 원혜태후, 안혜태후, 순경태후 등이 있다.

사실 이건 중국과 다른 고려의 독자적인 예법이다. 원래 태후는 생전 존호로, 중국 왕조나 예법을 철저히 지킨 조선 왕조는 생전 황후(왕비)가 태후(대비)가 됐든 태황태후(대왕대비)가 됐든 시호는 무조건 황후(왕후)로 고정했다. 이는 황제(왕)도 똑같다. 예를 들면 이성계는 왕 → 상왕 → 태상왕까지 다 해봤지만 시호는 대왕(후 황제)으로 고정됐다. 고려 시대에 시호로 왕후를 받았는데 태후로 올려진 것도 중국의 예법과 다르다. 고려의 예법은 중국과 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학자 김부식이 이를 비판한 적 있으나, 올라간 태후 시호가 간혹 삭제되는 일은 있어도 태후 시호를 아예 없애지는 않았다.

살아있는 왕후를 태후로 올릴 땐 군주가 금부(金簿)와 옥책(玉冊)을 올리고 절일을 정했다. 각 도에선 하례하는 표문을 바쳤다. 대표적으로 숙종의 왕후이자 예종의 모후인 명의태후(明懿太后)는 아들 예종이 왕위에 오르자 황태후(皇太后)(동국통감 기록)로 올려지고 책문을 받았다. 또한 '천화전(天和殿) 숭명부(崇明府)'를 관저로 받고 절일이 '지원절(至元節)'로 정해졌다.

고려 말 원 간섭기부터 왕대비 제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지만, 충렬왕과 충선왕 때에는 기존의 천자국식 태후, 왕후 제도를 완전히 폐지하지 못하고 태후와 대비가 섞여서 쓰였다. 충렬왕이 어머니를 순경태후로 추존하거나 충선왕이 어머니 제국대장공주에게 태후 시호를 올렸던 것. 이후 대비만 쓰다가 공민왕 때 반원 자주 정책으로 인해 다시 태후가 섞여서 쓰인다.

원간섭기 이후 태후를 존호나 시호로 받은 여성들은 다음과 같다.

2.1.2. 조선 ~ 대한제국

조선 왕조는 초기에 왕태후를 사용했다. 삼국시대와 고려 시대엔 고인이어도 왕의 어머니에게 시호로 왕태후가 붙곤 했는데 신의왕후원경왕후에게도 이런 일이 있었다. 신의왕후는 태종 8년인 1408년에 승인순성신의왕태후(承仁順聖神懿王太后)로 격상하였다. 원경왕후는 훙서 후 창덕소열원경왕태후(彰德昭烈元敬王太后)의 시호를 받았다. 숙종 9년인 1683년에 태후라는 작위가 제후국인 조선에는 맞지 않다고 하여 둘 다 시호에 있는 왕태후에서 태(太)자를 뺐다.

이때를 마지막으로 갑오개혁 이전까지 시호에 왕후로 후의 칭호를 추존하는 것 이외에는 왕비에 대한 외왕내제의 형식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있을 동안에는 왕비, 중전, 대비, 왕대비, 대왕대비로 불렸다.

갑오개혁 이후에는 효정왕후가 왕태후로 격상받아 '명헌태후(明憲太后)'로 불린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1897년에 대한제국이 들어서면서 '황'태후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형평성 문제 때문. 남편 헌종은 1908년(융희 2년) 이전까지 시호가 '대왕'이었기에 그 왕비인 효정왕후가 '황'자를 쓸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다만, 황제국에서 '왕'태후라고 부르기는 좀 그랬던지, 효정왕후는 사망할 때까지 존호를 붙인 '명헌태후'로 불렸다. 1908년(융희 2년) 순종이 헌종을 성황제(成皇帝)로 추존하면서 효정왕후를 성황후(成皇后)로 같이 추존했다. 대한제국이 존속했다면 순종 사후에 태후가 되었을 순정효황후일제강점기대한제국 황실이 이왕가로 격하당함에 따라 순종 사후 이왕비에서 이왕대비가 되어 '창덕궁 대비 전하'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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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중국

유교라고는 했지만 부모에게 효를 다하는 것은 동아시아 지역의 문화라, 태후는 일찍부터 존재했다. 최초의 태후는 소양왕의 모친으로 섭정을 했던 선태후 미씨였다. 그리고 최초의 황태후는 진시황의 모후 조희였으며, 그 뒤를 이은 건 임조칭제를 행한 여후였다. 마지막 황태후는 청나라 광서제의 황후였던 효정경황후(융유황태후)였다.

실제 중국의 황태후들은 황제가 어리거나, 또는 실권을 장악한 경우 임조칭제(臨朝稱制)를 행하여 황제 대신 섭정을 서서 정사를 돌보았다. 전한의 황제들은 대부분 황태후의 임조칭제를 받았으며 후한소제의 경우에도 모후인 영사황후가 임조칭제하여 대신 정사를 돌보았다. 또한 당나라 시기엔 측천황후가 임조칭제하여 중종예종시기에 섭정을 하였으며[7][8] 요나라에선 승천태후성종 야율융서를 대리하여 무려 27년이나 섭정하여 요나라 전성기의 기반을 닦았다.

명대 이전 중국에서 황태후가 되는 기준은 명확하게 확립되어있지 않았다. 전한의 고후 박씨는 문제의 친모 자격으로 태후가 되었으나 본래의 작호인 대왕태후(代王太后)에서 황태후로 신분이 상승한 느낌에 가깝고, 또 소의 부씨는 정도왕태후(定陶王太后)에서 손자인 애제가 즉위하자 제태태후(帝太太后)라는 태황태후에 준하는 작호를 받았으며 그 며느리 정씨 역시 정도왕후(定陶王后)에서 제태후(帝太后)로 황태후에 준하게 격상하였다.

후한대엔 영제의 모후인 동태후는 이미 죽은 부군이 효인황으로 추존 된 후 황태후가 되었고 후일 소제가 즉위하자 태황태후로 높여졌다.

위진남북조 시대에 들어선, 중국의 내명부 제도가 좀 더 세분화되면서 처첩의 구분이 확실해졌고 위의 고황후 박씨의 사례처럼 아들이 왕에 봉해지더라도 그 작위에 따라 왕태후에 봉해지는 예는 사라지게 된다.[9] 위진남북조 시대엔 서출인 황제가 즉위한다면 후궁 출신인 어머니에겐 황태후에 준하는 황태비(皇太妃)의 칭호를 올렸다.

대에 들어서면서 서출 출신의 황제들이 후궁인 모친을 황태후로 격상하기 시작하며 금상의 모친이 태후로 추존되는 제도가 확립된다. 그러나 선제의 정후와 후궁 출신이라는 신분의 차이와 정통성의 격은 명확히 달랐기에, 모친은 그대로 황태후로 두고 선황의 정실은 상성황태후로 부르거나 부축하는 인원을 황후와 황귀비로 구분하는 등의 차별을 두어 정후와 확실히 구분하였다.

에서는 유목민 특성이 남아있어서 장차와 적서에 차등을 두지 않고 능력 위주로 황사(皇嗣)를 뽑아 이전 왕조보다 태후가 두 명씩일 경우가 많았다. 선제의 정궁(선황 생존 시의 황후)을 '모후황태후(母后皇太后)'라 불렀고, 황제의 생모(선황의 후궁)는 '성모황태후(聖母皇太后)'라고 불렀다. 당연히 법적 정당성과 명령의 권위는 선황의 정후인 모후황태후가 더 우월하고 지위도 높았다.[10] 청 옹정제를 배경으로 한 옹정황제의 여인에서는 황제의 생모가 지위는 낮아도 권력이 있다고 하였다.[11]

즉 혈연상 황제에게 법적으로는 모후황태후가 모후지만 성모황태후가 생모이므로 황제와 더 가까워 어느 정도 권력이 있다는 것. 하지만 여전히 성모황태후는 후궁 출신이기 때문에 정궁 출신인 모후황태후한테 절을 하고 예의를 지켜야 했다. 청나라 말기의 서태후도 사실은 성모황태후였고, 모후황태후는 함풍제의 정궁이었던 동태후였다. 실제로 동태후가 죽기 전까지 서태후는 동태후에게 예를 다해야 했다. 물론 동태후는 평상시 정치에 관심이 없고, 서태후만큼 예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모든 일을 서태후한테 떠맡겼다고 전해진다.

예외적으로 도광제의 후궁이었던 효정성황후는 황후도 아니었고 함풍제의 생모도 아니었지만 죽기 직전에 황태후로 올려지고, 사후 황후로도 추존되었다.

3. 서양

로마 제국에서 황태후와 대응되는 칭호는 서기 3세기 율리아 돔나가 받게 된 칭호 '피아 펠릭스 아우구스타(Pia Felix Augusta)'다.

서양에서는 죽은 남편으로부터 재산과 지위를 상속받은 과부를 Dowager라고 불렀고, 황후도 마찬가지로 황제가 죽으면 Empress에 Dowager를 붙어서 Empress Dowager라고 불렀다.

중세 후기 이래 독일인만의 제국이 된 신성로마제국은 형식상은 황제가 선출직이지만 사실상 합스부르크 가문이 세습해서 한 가문으로 황제가 이어지다보니 전대 황제의 황후를 태후(Kaiserinwitwe)라 호칭하였다.[12]

3.1. 오스만 제국

오스만 제국의 경우 유목사회의 풍습 및 외척 경계 목적으로 황제가 정식 황후나 황태자를 임명하지 않고 하렘의 여러 후궁들에게 아들들을 얻은 후 황제가 죽으면 아들들이 서로 싸워 이긴 아들이 다음 황제가 되고 패한 아들들은 사형당하거나 평생 감금당하는 제도가 있었다. 따라서 황제의 모후인 태후(Valide Sultan, 발리데 술탄)는 궁정 내에서 황제 다음가는, 때로 황제가 어리거나 유약할 경우 황제보다도 더 큰 권력을 갖게 되었다.

4. 나무위키에 항목이 개설된 태후들

4.1. 실존인물

살아서 태후가 된 경우만 넣는다. 태황태후가 된 경우는 제외.

4.1.1. 한국

4.1.2. 중국

4.1.3. 일본

4.1.4. 오스만 제국

4.1.5. 신성 로마 제국

4.1.6. 독일

4.1.7. 러시아

4.1.8. 브라질 제국

4.2. 가상인물


[1] '곤원'은 태후를 비유하는 별칭이다.[2] 문모는 중국 주나라 문왕의 왕비이다.[3] 역시 태후를 비유하는 별칭.[4] 고려 국왕이 10,000년을 산다는 뜻으로 황제를 찬양하는 것이다. 외왕내제의 예시이다.[5] 가령 군주가 자식 없이 죽고 가장 혈연이 가까운 왕족이 죽은 군주의 숙부였다든지 등.[6] 당장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수대비의 경우만 해도 정식 시호는 소혜왕후이며 인수대비는 생전에 불렸던 존호이다.[7] 사실 이시기는 무측천이 를 세우기 위해 빌드업 하는 과정에 가까웠다.[8] 당나라 시기에 수렴청정(垂簾聽政)이란 표현이 문헌에 처음 등장했다.[9] 이후 대엔 친왕의 친모에게 태비(太妃)라는 칭호를 올리는 것으로 정리한다. 대표적인 예시가 부여태비.[10] 그러나 동태후서태후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모후황태후가 정사에 어둡고 성모황태후가 정사에 밝다면 성모황태후가 실권을 잡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동태후와 서태후는 애당초 격이 완전히 달랐기에 서태후는 동태후의 살아생전엔 그녀를 깍듯이 모시며 몸을 사렸다.[11] 실제로 청나라는 아니나 한나라의 소의 부씨는 자신의 손자가 즉위하자 손자에게 태황태후에 버금가는 제태태후(帝太太后)라는 작위를 받았고 당시 태황태후였던 효원황후 왕씨의 일가를 전부 파직시키고 부씨 일가를 중용하도록 했었다. 허나 애제가 후사없이 떠나자 태후의 존호를 박탈당하고 과거 후궁이었을때 품계인 소의로 강등되었으며, 부씨 일족도 모두 파직당하고 왕씨 일족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12] 독일어권인 신성로마제국에서 황제를 카이저라 하고, 황후는 그 여성형인 Kaiserin이라 했기 때문이다.[13] 후일 를 건국한 이후 황제가 되었고, 중종이 복위한 후 당나라로 돌아간 이후엔 태상황으로 말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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