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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켄 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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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덴노의 황후
쇼켄 황후
昭憲皇后
파일:Empress_Shoken2.jpg
<colcolor=#dca600> 출생 <colbgcolor=#fff,#1f2023>1849년 5월 9일[1]
야마시로국 교토 가미교구 이치조 가라스마 히가시이루 · 이치조 가문 도카덴(桃花殿)
사망 1914년 4월 9일 (향년 64세)[2]
시즈오카현 슨토군 시즈우라무라 황실 별장(御用邸)
즉위 1868년 10월 12일 (교토고쇼)
능묘 교토부 교토시 후시미구
후시미모모야마 동릉(伏見桃山東陵)
재위기간 황후
1867년 1월 30일 ~ 1912년 7월 30일
황태후
1912년 7월 30일 ~ 1914년 4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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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dca600> <colbgcolor=#fff,#1f2023>[ruby(美, ruby=はる)][ruby(子, ruby=こ)](하루코)
부모 부친 이치조 다다카(一條 忠香)
모친 니이하타 다미코(新畑 民子)[3]
형제 1남 5녀 중 넷째 (3녀)
배우자 메이지 덴노
자녀 없음[4]
종교 신토
십이지 닭띠 (기유년)
오시루시[5] 신록(若葉) }}}}}}}}}
1. 개요2. 친정 가문3. 황후 책봉4. 황후로서의 활동
4.1. 일본 최초로 양장을 입은 황후4.2. 여성교육과 학문4.3. 구호사업4.4. 전통 보존
5. 자녀6. 손자들7. 사망8. 여담9. 관련 도서

[clearfix]

1. 개요

메이지 덴노의 정실 부인이자 일본 제국의 황후였던 인물이다. 다이쇼 덴노의 양어머니이기도 하다.

2. 친정 가문

이치조 다다카(一條忠香)와 측실 니이하타 다미코(新畑民子)의 3녀로 태어났다. 이름은 마사코(勝子)였고, 마사코라는 이름 외에 후키기미(富貴君), 후미기미(富美君) 등으로도 불렸다. 그러다가 스에기미(壽榮君)로 바뀌었는데, 이는 일본 황실에 후키노미야(富貴宮)[6]라는 공주가 있었기 때문이다. 후키노미야 공주는 고메이 덴노에이쇼 황후의 딸이기 때문에 이치조 스에코에게는 시누이가 된다.

이치조 가문은 고셋케 중 하나로 유서 깊은 명문 귀족이며, 메이지 유신 이후로는 공작 작위를 받아 화족이 되었다. 본래 고셋케는 후지와라 가문의 직계로 헤이안 시대부터 내려온 교토의 명문가이며, 각 가문들이 대를 돌아가면서 황후를 선발하는 전통이 있었다. 그래서 마사코와 형제들은 수준 높은 교육을 받으며 자라났다. 저명한 한학자이자 존황양이파인 와카에 니오코(若江薰子)를 가정교사로 모시고 한문와카 등의 문학, 서예, 다도, 꽃꽂이 등등을 배웠다. 마사코는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그런 마사코를 좋게 보았는지 훗날 니오코는 이치죠 가의 딸들 중 마사코를 황실 신붓감으로 추천한다.

한편 다다카에게는 치요(千代)와 미카코(美賀子)라는 양녀들도 있었는데, 본래 치요를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시집보내려 했다. 그러나 치요가 천연두를 앓는 바람에 요시노부와 치요의 약혼은 취소되었고, 대신 미카코가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정실이 되었다.

3. 황후 책봉

1867년 1월, 고메이 덴노천연두로 죽었다. 그리고 다음 달인 2월 13일, 고메이 덴노의 유일한 아들[7]인 무쓰히토 황태자가 메이지 덴노로 즉위했다.

1867년 6월 마사코의 황후 책봉이 확정되자 여러 가지 조치들이 취해졌다. 우선 마사코를 후궁 중에 일등인 뇨고(女御)로 삼고 이름을 하루코(美子)로 바꾼 다음, 하루코가 덴노보다 3살 더 많음이 불길하다는 이유로 서류상으로나마 1850년생으로 고쳐 2살 연상인 것으로 바꿨다. 일본의 오래된 궁중 관습에 따르면 덴노의 후손만이 바로 황후가 될 수 있고, 신하의 딸은 일단 뇨고로 입궁해야 신하로서 도를 지키는 처신이라고 여겼는데, 이 관습이 메이지 시대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그렇게 이치조 하루코는 1869년 정식으로 입궁했고, 곧 황후가 되었다. 이 시기 일본 황실은 천년고도(千年古都)였던 교토를 떠나 도쿄로 이주했고, 메이지 덴노와 하루코 황후 또한 도쿄로 거처를 옮겼다.

4. 황후로서의 활동

당시 일본일본 황실은 여러 가지 큰 변화들을 겪고 있었다. 쇄국정책을 폐지하고 본격적으로 나라의 문을 열어 서양 국가들과 교류하기 시작하여, 서구화와 근대화의 바람이 불었다. 또한 오랫동안 이어져 오던 막부의 통치가 끝나고 천황이 직접 일본을 다스리게 되면서(대정봉환) 여러 개혁 정책들을 펴게 되었다(메이지 유신).

자연히 하루코 황후도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따라야 했고, 황후로서 맡는 소임도 선대의 황후들과는 달라야 했다. 즉, 근대 국가의 퍼스트레이디가 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4.1. 일본 최초로 양장을 입은 황후

파일:200707292326288075.jpg
양장을 한 쇼켄 황후와 군복을 입은 메이지 덴노 부처의 그림

하루코 황후는 일본 황실의 여성 일원 중에서 최초로 서양식 의복을 입었다. 서양의 여성 황족들처럼 드레스를 입고, 보석이 박힌 왕관(티아라)을 썼다. 이러한 의생활의 변화는 일본의 양재, 재봉, 보석세공 기술이 발전되는 계기가 되었다. 동시에 일본의 전통적인 풍속인 오하구로[8]를 그만두었다. 식생활 면에서도 서구식을 따라, 남편 메이지 덴노와 함께 커피 등 서양 음식을 먹었다.

선대 천황들과 달리 메이지 덴노는 일본의 여러 지역을 행차했는데, 이 때는 하루코 황후도 동행했다. 서양의 군주들과 국가원수들처럼 일부일처부부가 함께 공식석상에 참석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다만 당시 일본 황실은 후궁 제도가 잔존해 있어서 메이지 덴노는 후궁들을 여럿 두고 있었다. 이는 전통적인 관습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탓도 있었겠지만, 쇼켄 황후가 불임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9]

4.2. 여성교육과 학문

파일:쇼켄 황후 여학교.jpg
도쿄여자사범학교 개교식에 참석하는 쇼켄 황후


근대화가 이루어지면서 자연스레 일본에도 근대식 학교들이 세워졌고, 특히 이전과 달리 여성교육도 시작되어 여학교들도 세워졌다. 서양인 그리스도교 선교사가 세운 여학교 외에도, 일본인이 세운 국립/사립 여학교도 있었다. 근대에 들어 일본에 생기기 시작한 여학교들은 훌륭한 아내와 어머니, 즉 현모양처 양성을 목표로 했다.

하루코 황후는 여성교육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도쿄여자사범학교[10]화족여학교[11]의 설립에 크게 관여하고, 개교식에 참석하고, 종종 방문하여 수업을 참관했다. 또한 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그녀는 <금강석(金剛石)>, <물은 그릇(水は器)> 등의 와카를 지어 이들 여학교에 하사했다.[12] 하루코 황후가 하사한 와카에 곡을 붙여 노래가 만들어졌고, 이 노래는 일본 전국의 여학교에서 널리 불렸다.

여성교육을 장려함과 동시에, 하루코 황후 본인도 학문을 좋아하여 공부를 열심히 했다. 하루코는 독서를 많이 하고 와카도 많이 지었다. 특별한 공무가 없을 때면 독서를 하거나 와카를 지었으며, 시녀들과 함께 강의를 듣기도 했다.

4.3. 구호사업

파일:쇼켄 황후 적십자사.jpg
일본적십자사 제11회 총회에 참석한 쇼켄 황후
[clearfix]
1877년 발생한 세이난 전쟁은 많은 사상자를 낳았다. 양측 모두의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구호하기 위해, 이듬해 1878년에 하쿠아이샤(博愛社)라는 단체가 창설되었다. 하루코 황후는 하쿠아이샤에 기부금을 내어 활동을 도왔다. 하쿠아이샤는 1886년 일본적십자로 개편되었고, 하루코는 적십자 관련 활동도 열심히 했다. 1912년 적십자 국제회의가 미국 워싱턴 DC에서 개최되었을 때는, 적십자에도 큰돈을 기부하여 구호사업을 도왔다. 또한 한센병 환자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였다. 한센병 환자 복지와 구호활동은 훗날 며느리 데이메이 황후가 이어받았다.

메이지 덴노 시절, 일본청일전쟁, 의화단 운동 진압, 러일전쟁 등에 참여하며 제국주의의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침략 전쟁에 참전한 많은 일본군이 부상당하거나 전사했을 당시 하루코 황후는 그들을 위한 활동을 했다. 황족화족 부인들을 지휘하여 의약품 및 위문품을 마련하여 보내고, 붕대와 옷가지 등을 만들어 보내고, 직접 병원을 방문하여 부상자들을 위문하기도 했다.

국모인 황후가 먼저 나서니, 자연스레 상류층들과 백성들도 동참하게 되었다. 1901년 사가현에서는 오쿠무라 이오코(奥村五百子)[13]가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일본 적십자사 산하에는 간호부인회가 조직되었다. 참가자는 황족화족 여성들이었는데, 그들은 붕대 감는 법, 의복 및 침상 교환하는 법 등을 배웠고 간호학 수업도 받았다. 이방자 비의 외할머니 나베시마 나가코(鍋島榮子)와 어머니 나시모토노미야 이츠코(梨本宮伊都子) 비도 이때 간호부인회에서 활동했다.

이러한 전통은 현재까지 이어져서 일본적십자사 명예총재 및 명예부총재는 황후 및 황태자비가 담당하는데, 적십자사 공무는 일본 황실의 중요한 공무로 취급받는다.

4.4. 전통 보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mpress_Consort_Haruko.jpg

이 시대는 근대화와 서구화가 한참 진행되던 시절이었고, 하루코 황후는 그 흐름을 충실히 따랐지만 한편으로는 전통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일본 전통의 연극, 미술, 공예 발전에도 힘썼다. 서양식 드레스와 양장을 즐겨 입었지만, 때에 따라 기모노도 입었다.

5. 자녀

이렇듯 하루코 황후의 성품으로나 황후로서나 모든 것이 다 완벽했으나, 황후로서 부족한 점이 단 한 가지가 있었다. 그녀는 병약하여 평생 아이를 낳지 못했다.[14]

대신 메이지 덴노는 여러 후궁들을 거느려 5남 10녀가 태어났지만, 대부분은 1~2살 안팎으로 주로 뇌막염 때문에 일찍 죽었다. 야나기하라 나루코의 아들 1명과 소노 사치코의 딸 4명 만이 살아남았다.

때문에 나루코의 아들 하루노미야 요시히토 친왕(다이쇼 덴노)은 아버지 메이지 덴노의 정실 하루코 황후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요시히토는 오랫동안 하루코 황후를 친어머니인 줄 알았기에, 나이를 제법 먹은 후에야 야나기하라 나루코라는 생모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6. 손자들

1900년, 요시히토 황태자는 구조 사다코를 황태자비로 맞이했다. 시어머니 하루코 황후나 남편 요시히토 황태자와 달리 사다코 황태자비는 건강했으며, 하루코 황후 생전에 아들을 3명이나 낳았다.

1901년 첫 손자 미치노미야 히로히토 친왕이 태어났고, 이듬해 1902년 둘째 손자 아츠노미야 야스히토 친왕, 1905년 셋째 손자 데루노미야 노부히토 친왕이 태어났다.[15]

오랫동안 일본 황실은 황후가 아들을 낳지 못하고 후궁 소생의 아들로 계승되어 왔으나, 사다코 황후는 아들 넷을 낳아서 이 때부터 적장자가 계승했다. 다이쇼 덴노는 후궁을 들이지 않았고, 이를 계기로 후궁 제도가 사라지고 일본 사회에서 본격적으로 완전한 일부일처제가 자리잡았다.

메이지 덴노는 무뚝뚝한 성품이어서, 자녀들과 손주들에게도 다정다감하게 대하거나 잘 놀아주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하루코 황후가 손주들을 귀여워하며 종종 놀아주었다고 한다.

7. 사망

1912년, 남편 메이지 덴노가 먼저 죽었다. 몇 개월에 걸친 성대하고 복잡한 장례의식을 치른 후, 메이지 덴노의 시신을 도쿄에서 교토로 옮겨 후시미모모야마능에 묻었다. 이때 한 사건이 있었는데, 노기 마레스케 장군과 그의 아내 시즈코(靜子)가 천황의 뒤를 따른다며 자결한 것이었다. 이는 천황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이기지 못해 발생한 사건은 아니다. 실은 그 이전에 러일전쟁에서 막대한 희생을 낸 것에 책임을 지고 노기가 자결하려고 하였으나, 메이지 덴노는 "내가 죽기 전까지는 안 된다."고 만류했다. 그래서 노기 부부는 메이지 덴노가 죽자 비로소 자결한 것이었다.

메이지 덴노가 사망하자 아들 요시히토 황태자가 다이쇼 덴노로 즉위했고, 며느리 사다코 황태자비는 황후가 되었다. 이후 하루코 태후는 누마즈(沼津) 궁에 머무르며 요양하다가, 2년 후인 1914년에 사망했다. 하루코 태후는 남편의 능 옆인 후시미모모야마 동릉에 매장됐고, 남편과 함께 메이지 신궁에 신으로 모셔졌다. 시호는 쇼켄(소헌)황후다.

8. 여담

담배를 몹시 좋아했으나, 남편 메이지 덴노의 앞에서는 절대로 피우지 않았다고 한다.

9. 관련 도서


[1] 태양력 기준. 음력으로는 4월 17일이다[2] 순종실록부록이나 메이지 신궁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사망일을 4월 11일로 설명한다. 또한 일본의 당시 신문들도 4월 11일을 쇼켄 황후의 사망일이라고 급전으로 보도했다. 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실제 사망은 4월 9일이 맞으나, 당시 궁내성 대신 와타나베 치아키(渡辺千秋)가 궁내성 내장두(內蔵頭) 시절 뇌물을 받았다가 문제가 되어 와타나베를 경질하고자 여러 절차가 겹쳐서 이렇게 되었다고 한다.[3] 정실 부인이 아닌 측실이었다.[4] 단, 측실 소생인 하루노미야 요시히토 친왕을 양자로 삼았다.[5] 일본 황족에게 주어지는 개인 표식. 주로 식물이며, 사용하는 물건 등에 붙는다.[6] 1858년에 태어나, 불과 이듬해에 죽었다.[7] 본래 고메이 덴노는 여러 자녀를 낳았지만 모두 일찍 죽었고, 생존한 자녀들 중에서 아들은 후궁 나카야마 요시코 소생인 메이지 덴노가 유일했다.[8] 치아를 검게 물들이는 것. 자세한 것은 오하구로 항목 참조.[9] 일본 황실의 후궁 제도는 다이쇼 덴노가 후궁을 두지 않음으로써 쇠퇴해갔고, 쇼와 덴노가 공식적으로 폐지하였다.[10] 現 국립 오차노미즈여자대학[11]가쿠슈인 여자중등과, 여자고등과, 여자대학의 전신.[12] <금강석>은 '원석을 갈고 닦아 보석이 되듯, 열심히 공부하여 훌륭한 여성이 되어라.'는 내용이고, <물은 그릇>은 '똑같은 물이라도 어떤 그릇에 담기느냐에 따라 모양이 달라지듯, 사람도 어떤 벗을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다. 그러니 좋은 벗을 사귀어라.'는 내용이다.[13] 대처승의 딸. 폭력 우익조직 흑룡회의 등을 업고 전라남도 광주에 들어와, 일본 불교를 포교하고 일본인들을 정착시키는 따위의 활동들도 했다.[14] 그녀가 근친혼으로 태어나서 병약해서 아이를 낳지 못한게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15] 넷째 손자 스미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은, 쇼켄황후가 사망하고 1년 뒤인 1915년에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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