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속어
기본적인 의미는 거짓말. 맥락까지 따진다면 속임수나 허풍, 허세, 페인트 등도 의미한다.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도 등재되어 있다.
초기 문헌으로 1964년 5월 6일 동아일보 기사 '어린이들의 은어 속어'라는 기사에 구라푼다(거짓말 한다)는 용례로 수록되어 있다.
세대와 지역을 가리지 않고 널리 퍼지게 된 것은 1990년대 후반 ~ 2000년대 초반 인터넷을 통해서였다는 증언이 있다.
어원이 일본어 [ruby(晦, ruby=くら)]ます(구라마스, 晦: 그믐 회)라는 주장이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晦ます는 '행방을 감추다, 남의 눈을 속이다'라는 뜻인데 이게 한국 도박판 등에서 타짜들이 속임수를 써서 승부조작을 한다는 뜻의 은어였지만 이것이 확장되어서 거짓말, 속임수라는 뜻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로는 일부 지역에서 화투를 밑장빼기 등의 꼼수를 써서 하는 것을 "구라", 그런 것 없이 하는 것을 "자연빵" 또는 "실화" 내지는 "시라"라고 하는데, 사실은 "시라"가 맞다면 사기는 "쿠라이(暗い)", 정직한 화투는 "시로이(白い)"로 대응된다.
그러나 학계에선 보통 일본어로 보기 어렵다고 본다. 실제로한국 문단에서는 입담이 뛰어난 작가들을 구라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다. 황석영 작가가 동료 문인들에게 황구라라는 별명으로 불린 게 좋은 사례다. 문단의 보수성을 생각한다면 일부러 일본식 별명을 지어 불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1]
게다가 정작 일제강점기에 일본식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에게 물어 보면 변말(속어)이란 말은 들을 수 있어도 일본어의 영향을 받았단 주장은 없다. 과거 우리말 운동가들이 쓴 기고문에 쓰메키리, 벤토란 말을 쓰지 말자는 주장은 있었어도 구라가 일본말이니 쓰지 말자는 글은 없었는데 최근에 인터넷상에서 이런 주장이 부쩍 나온 것을 보면 세대의 단절로 인해 나타난 오해일 가능성이 있다. 앞서 언급된 구라마스 유래설만 하더라도 2010년대나 되어서야 인터넷상에 등장한 것이며 정작 노년층에게선 들을 수 없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사실 일본어 잔재에 관한 내용은 과거 신문 기사에 오히려 자세히 적혀 있다. 당시엔 일제강점기에 교육을 받은 세대들이 사회 각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했으므로 기본적으로 일본어 지식 수준이 높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지 어감만으로 일본어라고 지레짐작하는 기사는 발을 붙일 수가 없었다. 1984년 10월 27일 동아일보 기사에서는 사회 각 분야에서 쓰이는 일본어를 총망라해 다루었으며 그 중에는 노년층이 습관적으로 쓰는 에또~(えーと:저 그건) 같은 말[2]도 언급되었지만 구라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기사
구라의 어원으로 추정되는 것 중 하나는 대지도론이라는 인도의 대승 불교 스님이 만든 저서에 나오는 가라구라충이라는 곤충이다. 이 구라라는 곤충은 "그 몸뚱이는 미세하지만, 바람을 받으면 커져서 모든 것을 삼켜버린다"고 표현되며 스님들께서 이야기해주신 바로는 풍파, 어려움을 만나면 점점 커져서 그 어려움을 이겨내는 곤충이라고 한다. 흔히 거짓말을 하면 한 번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고 그것이 불어나서 감당이 안 된다는 비유를 구라에 빗대어 표현된 것이라고 불교에서 설법하는 이야기도 있다.
어쨌든 정작 일본에서는 쓰지 않는데 기레기들이 광복절이나 한글날 무렵에 걸고 넘어지는 단어다. 심지어 이 기사에선 맞춤법도 틀렸다.
한편 60대 이상 세대들 사이에서는 구라가 단순히 거짓말, 허풍을 일컫는 의미가 아니라 좀 더 복잡미묘한 뉘앙스가 있는 단어다. 링크
<꼬방동네 사람들>이란 소설로 유명한 전직 국회의원 이철용은 구라를 세 종류로 정의했다.
사람들이 말하는 구라에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쌩구라, 날구라, 왕구라지요. 쌩구라는 팩트 중심으로 유창하게 말하는 거고, 날구라는 믿거나 말거나 나오는 대로 하는 겁니다. 왕구라는 아름다운 구라지요. 문익환 목사님이 서울역에 가서 ‘평양행 기차표를 내놔라’ 하신 것처럼 불가능하면서도 힘이 있는, 그런 게 바로 왕구라예요.
이처럼 상황에 따라서는 화술을 속되게 표현하기 위해 쓰이는 말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 황석영도 그렇듯이 작가들 사이에서 많이 쓰이던 말이여서인지 국어사전에도 이야기를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오늘날로 치면 '썰 푼다' 할 때 '썰'에 대응된다. 다름아닌 방송인 김구라가 언더그라운드 시절부터 표방하던 '구라'가 이 뜻에 가까웠다. 오늘의유머에서 이 단어의 어원을 놓고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었는데 댓글을 보면 부산 남구 일부 지역에서는 처음에는 구다라고 하다가 나중에 구라로 바뀌었다고 한다. 지역마다 방언이 존재하는 듯하다. 링크
그런데 사실 일본에는 비슷한 단어로 구라사이(グラサイ)란 단어가 있는데 다름아닌 사기 주사위[3]를 뜻한다. 다만 도박 은어인 만큼 그다지 자주 쓰이는 용어는 아니기 때문에[4] 정말 여기서 유래했는지, 유래했다면 어떻게 한국에서만 이렇게 넓게 퍼졌는지는 알 수 없다.
한편 '사쿠라를 치다'라는 화투 용어, 나아가 과거 정치판 용어에서 파생된 설을 제시하는 블로거도 있는데 참조해 볼 만하다. #
PC 이용자의 주적 악질 ActiveX 등의 보안 구라를 제거할 수 있는 구라 제거기라는 한국산 프로그램이 있다.
예능 라디오스타와 아는형님에 나온 사유리가 세상을 떠난 외할아버지의 일화를 공개하는데 이름이 '타츠오'였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생전에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해서[5] 별명이 '구라타츠'였다고 하는데 이 영상으로 인해 구라가 일본어에서 유래한 것인지 궁금해 이 문서에 접근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전술한 '구라마스'와의 말장난인 것으로 보이지만 우연인지 한국어로도 뜻이 통하는 것을 보면 묘한 느낌이 든다. #
구라질로도 통용된다.
2. 대한민국의 지명
2.1. 관련 문서
3. 이름
3.1. 실존 인물
- 가우르 구라: Hololive EN 소속 버츄얼 유튜버
- 김구라: 방송인 김현동의 예명
- 채동훈: 해당 닉네임으로 활동하는 대전 격투 게임 플레이어
- 구스타브 루빅손: 울산 현대 소속 공격수의 별명
3.2. 가상 인물
3.2.1. 도돈파치 대왕생의 중간 보스
고공에 배치된 고속 기동 메카.
좌우의 거대한 가위로부터 흩뿌려지는 탄에 가세하여, 사출구에서 대형의 가시가 달린 탄을 토해냅니다.
좌우 가위와 본체는, 개별적으로 파괴가 가능.
도돈파치 대왕생 3스테이지 중간 보스. 정식 명칭은 준대형제공전투시제기 구라(準大型制空戦闘試作機 空羅).좌우의 거대한 가위로부터 흩뿌려지는 탄에 가세하여, 사출구에서 대형의 가시가 달린 탄을 토해냅니다.
좌우 가위와 본체는, 개별적으로 파괴가 가능.
양쪽 가위 하나당 1,730점[6], 본체 격파 점수 7,120점
필드전에서 세번째로 나타나는 순양함 소우쿠를 파괴한 직후 구름 상공에서 출현해 플레이어와 전투를 벌인다. 이 때 최고조로 달아오르는 필드전 음악과의 싱크로는 3스테이지 최고의 명장면이다.
등장한 직후 동그란 볼 형태의 비트를 여러개 꺼내는데 이 비트를 파괴하면 조준식의 청분자 반격탄이 나오며 이후 양 쪽 2개의 파츠에서 고정 방향으로 5Way 청탄 발사. 이후 본체에서 반격탄 비트를 꺼내는 동시에 양 파츠에서 플레이어를 조준해 고속 청탄을 여러번 발사하는 것을 반복한다.
이 중보스의 파츠는 1스테이지 보스 스자쿠와 다르게 파츠를 하나만 부숴도 둘 다 격파가 안되기 때문에 각개 격파시켜야 하지만, 본체의 체력을 일정이상 깎아도 두 파츠가 한꺼번에 파괴된다.
파츠를 모두 파괴하면 본체만 남아 주기적으로 자폭탄 비트를 꺼내면서 부채꼴의 형태로 조준 고속 청탄을 발사하는데 패턴 자체는 단순하지만 탄속이 상당히 빠르기에 파츠를 파괴하기 전에 구석에 몰린채로 본체를 대면하게 될 시 꼼짝없이 갇혀 죽을 수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다. 여기에 이 녀석을 격파한 직후엔 3Way 적탄을 쏘며 플레이어를 향해 빠르게 돌격하는 자코들이 떼거지로 몰려나오므로 이에 대한 대비도 필요. 다만 하야마와시 구간은 왼쪽 하단 구석에 박혀 왼쪽으로 쭉 이동하는 동시에 레이저를 쏘면 단 한대도 맞지않는 안지가 있다. 이는 2주차도 동일.[7]
2스테이지 중간 보스의 라이소와는 다르게 콤보 잇기가 까다롭다. 콤보를 잇기 위해서는 등장 직전에 나오는 회전포대 텐쇼카쿠와 순양함 소우쿠의 매서운 공격을 피하는 동시에 순양함이 오라샷에 죽지 않을 정도로 화면 아래로 내려갔을때 옆에 붙어 하이퍼 오라샷으로 콤보를 유지하며 중간 보스가 출현하기 직전까지 버텨야 하고, 백판에서는 자폭탄을 뱉는 동그란 비트를 파괴해도 GP 게이지가 상승하지 않기 때문에 중간 보스가 등장하자마자 가까이 붙어서 오라샷으로 양쪽 파츠와 본체까지 세 파츠를 동시에 극딜하여 빠르게 쓰러트리는 방법이 요구된다. 문제는 이것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하이퍼를 써야하고, 하이퍼를 사용해도 성공률이 높지 않아서 엄청 까다롭다. 게다가 이 방법보다는 3스테이지에서 4스테이지 진입 전까지 하이퍼 5개를 모아서 4스테이지 개막에서 하이퍼를 터트리는게 리스크 대비 점수가 훨씬 더 잘 뽑히기 때문에 어지간한 스코어러들도 굳이 3스테이지 필드전에서 풀 콤보를 잇지는 않는다.
흑판에서는 백판에 비해 하이퍼 효율이 월등하게 좋은데다 사출하는 반격탄 비트도 부수면 GP 게이지가 상승하고, 무엇보다 백판에서는 중보스를 파괴하면 보스가 뱉는 동그란 비트도 같이 파괴되었으나 흑판에선 중보스를 파괴해도 비트는 남아 있어 콤보도 더 잇기 쉽게 되었다.
도돈파치 대부활에서도 등장한다. 오모테 루트에서만 3스테이지 중간 보스로 등장하는데 대왕생 때와는 다르게 모습도 판이하게 다르고 패턴도 달라져 알아보기 힘들다. 보스 명칭도 "구라 2008년 모델"로 변경되었다.
4. 救癩
하나이 원장의 한센병 환자를 생각하는 '선의'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덧붙여 말하자면 (그는) 일본 나학계의 "나 예방법 폐지 요구"(1995)의 '통일 견해'에서 말하는 "구라의 기치 아래 격리를 최선책으로 믿고, 그에 생애를 바친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 조선의 나(癩) 정책과 의료에 관여했던 사람이었다.[8][9]
滝尾英二[10], 《朝鮮ハンセン病史 - 日本植民地下の小鹿島(ソロクト)》, 2001. 한국어 번역본
滝尾英二[10], 《朝鮮ハンセン病史 - 日本植民地下の小鹿島(ソロクト)》, 2001. 한국어 번역본
일본어에서 유래된 명사로, 한센병 환자를 구제함.
위의 예문은 일제강점기 한센병 환자 격리수용소인 소록도 자혜의원의 2대 원장으로, 강제노역과 거세, 인체실험, 인권 탄압이 만연하던 소록도 자혜의원을 정말 제대로 된 시스템을 갖춘 환자 중심 병원으로 바꿔 놔 '의료인다운 의료인'으로 칭송받았던 하나이 젠키치(花井善吉, 1863~1929, 구 일본 육군 2등군의[11])에 대한 내용이다.[12] 지금도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 소록리의 국립소록도병원 앞 공원에는 하나이 씨가 사망한 직후 이를 안타까워한 자혜의원 환자들이 세운 창덕비가 남아 있다.
가톨릭에는 한센병 환자를 위해 기도하는 구라주일이 있다. 위에 언급된 소록도 중앙공원에는 한센병 완치의 희망을 담은 구라탑이 있다. 소록도 기행문
한센병 환자에게 무료로 틀니를 만들어 주는 '구라봉사회도 있다. #
5. 볼트액션 소총
자세한 내용은 그라 소총 문서 참고하십시오.6. 폴란드어 단어
Góra폴란드어로 산(山, mountain)을 뜻한다.
[1] 문학인들은 아름다운 우리말을 보존할 의무가 있다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만약 문인들이 이를 일본어로 인식하고 있었다면 작품 속에서 이러한 단어를 즐겨 쓴 황석영을 오히려 비난했을 가능성이 높다.[2] 다만 마~는 그냥이란 뜻으로 쓰이는 경상도 방언이다. 일본어에도 그런 말이 있긴 하지만 뜻은 그럭저럭이므로 쓰임 자체가 다르다.[3] 무게 중심을 바꿔서 의도적으로 특정 눈이 더 자주 나오게 만든 주사위를 가리킨다. 뒤의 사이는 주사위를 의미하는 사이코로(サイコロ)를 축약한 것이며 앞의 구라는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안정되지 못하고 흔들리는 모양을 나타내는 ぐらぐら에서 왔다는 설(무게중심을 조작해서 불안정하므로)이 있다.[4] 구글 기준으로 2만 건이 검색된다. 상호나 게임 용어도 섞여있어서 실제로는 이보다도 적다.[5] 외할머니와 원치않는 결혼을 하고 흑화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외할아버지의 아버지가 외할머니 집안에 돈을 빌려놓고 못 갚게 생겨서 아들을 빚 대신 데릴사위로 팔다시피 하였고 그 과정에서 아들을 속여서 결혼식날 그 집안에 물건배달 명목으로 들어가게 했었기 때문에 이후 붙잡혀 강제결혼을 했는데 본인이 부친에게 속아서 결혼했다는 생각에 혼인 후부터 남을 속이고 산 듯하다. 사유리의 말로는 할아버지께서 혼인 후에도 중국으로 밀항하여 도망치려는 계획도 세우기까지 했다가 포기하셨다는 이야기도 들었다고 한다.[6] 다만 본체의 체력이 일정 이상 내려가서 파괴된 경우는 점수 지급이 안 된다.[7] 흑판에서는 안되게 수정되었다.[8]
△ 사진은 소록도 자혜의원에 영구 격리된 환자(사진 오른쪽)와 그 미감염 자녀들의 월 1회 정기 상봉 장면. 언제 촬영된 사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한센병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한센병은 전염력이 매우 약하기로 소문난 병이고, 요즘은 아예 발병 초장에 약 몇 번 먹으면 더 이상의 신체 손상도 막고 균을 소멸시킴으로써 손쉽게 퇴치할 수 있는 수준까지 왔다. 한센병의 원인균인 나균은 부모-태아 간 수직감염 또한 일으키지 않는다. 다만 당시에는 이런 사실을 몰랐을 뿐. 완치 여부가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가족끼리 한지붕에 부대끼고 살면 멀쩡한 가족마저 감염될 우려가 있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이렇게 사회로부터 영원히 격리 수용하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60년 동안 6천 명이나 데려다가 강제노역과 인체실험을 하면서 죽을 때까지 괴롭혔다는 것이 정말 비극.[9] "구라의 기치 아래 격리를 최선책으로 믿고"라는 대목에 오해의 소지가 있어 첨언한다. 우선 '한센병 환자를 사회로부터 영원히 격리시키는 것이 최선'이라는 주장은 약물치료에 의해 병원균 사멸(=완치)이 가능해진 현대적 관점에는 맞지 않는 주장이다. 본 문장은 일본 의학계가 1995년 4월 13일 채택한 대정부 성명서에서 따 온 것인데 당시의 잘못된 치료법에 근거한 데다 파시즘까지 가미된 악법 '나 예방법(1907년 제정·1931년 개정으로 절대격리주의 방침을 채택·1935년 조선 도입·1953년 독립한 일본에서 또다시 제정)' 때문에 환자와 그 주변인이 막대한 고통을 받았음을 역사를 되짚어보며 재확인하는 부분에 해당한다. 참고로 문제가 된 '나 예방법'은 일본 내 환자와 일본 의학계가 한목소리로 법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투쟁을 벌인 결과 1996년에야(...) 폐지됐으며 위헌 판결 내리는 걸 대놓고 꺼리는 것으로 유명한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2001년, 위헌 판결까지 나왔다. 위헌 판결 직후 보상 규정이 만들어져 일본 정부는 '나 예방법' 때문에 격리수용소에 갇혔던 사람에게 보상을 실시하고 있다. 물론 조선·대만·팔라우·미크로네시아 연방의 야프·마셜 공화국의 잴루잇 등 일제 식민지였던 지역의 피해자에게는 어떻게든 보상비를 지급하지 않으려고 하다가 오랜 세월 지속해 온 시민단체 활동과 민권투쟁의 결과 연대의식이 높아진 일본 국내 피해자들의 분노를 사 엄청난 비난의 쓰나미가 몰아닥치는 상황을 맞았고 일본 정부는 2006년에 법을 바꿔 국외 피해자에게도 보상비를 지급하기 시작했다. 2009년부터 2014년까지 일제강점기 한센병 수용소 생존자 중 상당수에 해당하는 약 580명 가량의 한국인에게 일본 정부가 바치는 직접적인 사죄의 말과 함께 인당 800만 엔의 일괄보상비가 지급되었다.무슨 놈의 주석이 본문보다 더 길어[10] 타키오 에이지. 1931년생. 사망 여부 불명. 히로시마에서 활동하는 일본의 향토 인권연구가. 본업은 히로시마 현 지방정부 교육공무원으로, 1992년 정년퇴임 후 현재 서점 운영 중. 히로시마현 현립도서관 부관장 역임. 2005년 현재까지 발표된 논문 및 저작 13편 전부가 근현대 일본, 특히 식민지 조선 지역의 한센병 정책에 관한 것일 정도로 이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쏟았다.[11] 나중에 소장으로 진급한다.[12] 하나이 젠키치 원장은 재직 중 석연찮은 이유로 사망하는데 그가 실시한 개혁은 말짱 도루묵이 되고 소록도는 다시 생지옥으로 변한다. 1945년 조선 해방 직후에는 친일반민족행위자 의료진이 탄압 중단을 요구하는 환자들을 고흥군 본토에서 건너온 조선인 자경단의 손을 빌려 산 채 불태우는 일까지 벌어졌는데 이때 살해된 환자 72명, 직원 9명, 개신교 목회자 3명의 유골은 2001년 12월 8일 국립소록도병원 앞뜰에서 무더기로 발굴되었다. 2013년 보건복지부 발표에 따르면 191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소록도에서 폭행 또는 살해당하거나 강제노역에 동원된 사람의 수는 총 6,462명으로 집계되었다.기사
△ 사진은 소록도 자혜의원에 영구 격리된 환자(사진 오른쪽)와 그 미감염 자녀들의 월 1회 정기 상봉 장면. 언제 촬영된 사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한센병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한센병은 전염력이 매우 약하기로 소문난 병이고, 요즘은 아예 발병 초장에 약 몇 번 먹으면 더 이상의 신체 손상도 막고 균을 소멸시킴으로써 손쉽게 퇴치할 수 있는 수준까지 왔다. 한센병의 원인균인 나균은 부모-태아 간 수직감염 또한 일으키지 않는다. 다만 당시에는 이런 사실을 몰랐을 뿐. 완치 여부가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가족끼리 한지붕에 부대끼고 살면 멀쩡한 가족마저 감염될 우려가 있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이렇게 사회로부터 영원히 격리 수용하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60년 동안 6천 명이나 데려다가 강제노역과 인체실험을 하면서 죽을 때까지 괴롭혔다는 것이 정말 비극.[9] "구라의 기치 아래 격리를 최선책으로 믿고"라는 대목에 오해의 소지가 있어 첨언한다. 우선 '한센병 환자를 사회로부터 영원히 격리시키는 것이 최선'이라는 주장은 약물치료에 의해 병원균 사멸(=완치)이 가능해진 현대적 관점에는 맞지 않는 주장이다. 본 문장은 일본 의학계가 1995년 4월 13일 채택한 대정부 성명서에서 따 온 것인데 당시의 잘못된 치료법에 근거한 데다 파시즘까지 가미된 악법 '나 예방법(1907년 제정·1931년 개정으로 절대격리주의 방침을 채택·1935년 조선 도입·1953년 독립한 일본에서 또다시 제정)' 때문에 환자와 그 주변인이 막대한 고통을 받았음을 역사를 되짚어보며 재확인하는 부분에 해당한다. 참고로 문제가 된 '나 예방법'은 일본 내 환자와 일본 의학계가 한목소리로 법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투쟁을 벌인 결과 1996년에야(...) 폐지됐으며 위헌 판결 내리는 걸 대놓고 꺼리는 것으로 유명한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2001년, 위헌 판결까지 나왔다. 위헌 판결 직후 보상 규정이 만들어져 일본 정부는 '나 예방법' 때문에 격리수용소에 갇혔던 사람에게 보상을 실시하고 있다. 물론 조선·대만·팔라우·미크로네시아 연방의 야프·마셜 공화국의 잴루잇 등 일제 식민지였던 지역의 피해자에게는 어떻게든 보상비를 지급하지 않으려고 하다가 오랜 세월 지속해 온 시민단체 활동과 민권투쟁의 결과 연대의식이 높아진 일본 국내 피해자들의 분노를 사 엄청난 비난의 쓰나미가 몰아닥치는 상황을 맞았고 일본 정부는 2006년에 법을 바꿔 국외 피해자에게도 보상비를 지급하기 시작했다. 2009년부터 2014년까지 일제강점기 한센병 수용소 생존자 중 상당수에 해당하는 약 580명 가량의 한국인에게 일본 정부가 바치는 직접적인 사죄의 말과 함께 인당 800만 엔의 일괄보상비가 지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