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리스트 == null
{{{#!html 배우 하영의 조부 행적과 관련한 논란}}}에 대한 내용은 {{{#!if 문서명1 != null
[[하영 친일파 가문 업적 소개 논란]] 문서{{{#!if (문단1 == null) == (앵커1 == null)
를}}}{{{#!if (문단1 == null) != (앵커1 == null)
의 }}}}}}{{{#!if 문서명1 = 문서명1 != null ? 문서명1 : calleeTitle
{{{#!if 문단1 != null & 앵커1 == null
[[하영 친일파 가문 업적 소개 논란#s-|]]번 문단을}}}{{{#!if 문단1 == null & 앵커1 != null
[[하영 친일파 가문 업적 소개 논란#조부 안부호의 행적|조부 안부호의 행적]] 부분을}}}}}}{{{#!if 설명2 != null
, {{{#!html }}}에 대한 내용은 {{{#!if 문서명2 != null
[[]] 문서{{{#!if (문단2 == null) == (앵커2 == null)
를}}}{{{#!if (문단2 == null) != (앵커2 == null)
의 }}}}}}{{{#!if 문서명2 = 문서명2 != null ? 문서명1 : calleeTitle
{{{#!if 문단2 != null & 앵커2 == null
[[#s-|]]번 문단을}}}{{{#!if 문단2 == null & 앵커2 != null
[[#|]] 부분을}}}}}}}}}{{{#!if 설명3 != null
, {{{#!html }}}에 대한 내용은 {{{#!if 문서명3 != null
[[]] 문서{{{#!if (문단3 == null) == (앵커3 == null)
를}}}{{{#!if (문단3 == null) != (앵커3 == null)
의 }}}}}}{{{#!if 문서명3 = 문서명3 != null ? 문서명3 : calleeTitle
{{{#!if 문단3 != null & 앵커3 == null
[[#s-|]]번 문단을}}}{{{#!if 문단3 == null & 앵커3 != null
[[#|]] 부분을}}}}}}}}}{{{#!if 설명4 != null
, {{{#!html }}}에 대한 내용은 {{{#!if 문서명4 != null
[[]] 문서{{{#!if (문단4 == null) == (앵커4 == null)
를}}}{{{#!if (문단4 == null) != (앵커4 == null)
의 }}}}}}{{{#!if 문서명4 = 문서명4 != null ? 문서명4 : calleeTitle
{{{#!if 문단4 != null & 앵커4 == null
[[#s-|]]번 문단을}}}{{{#!if 문단4 == null & 앵커4 != null
[[#|]] 부분을}}}}}}}}}{{{#!if 설명5 != null
, {{{#!html }}}에 대한 내용은 {{{#!if 문서명5 != null
[[]] 문서{{{#!if (문단5 == null) == (앵커5 == null)
를}}}{{{#!if (문단5 == null) != (앵커5 == null)
의 }}}}}}{{{#!if 문서명5 = 문서명5 != null ? 문서명5 : calleeTitle
{{{#!if 문단5 != null & 앵커5 == null
[[#s-|]]번 문단을}}}{{{#!if 문단5 == null & 앵커5 != null
[[#|]] 부분을}}}}}}}}}{{{#!if 설명6 != null
, {{{#!html }}}에 대한 내용은 {{{#!if 문서명6 != null
[[]] 문서{{{#!if (문단6 == null) == (앵커6 == null)
를}}}{{{#!if (문단6 == null) != (앵커6 == null)
의 }}}}}}{{{#!if 문서명6 = 문서명6 != null ? 문서명6 : calleeTitle
{{{#!if 문단6 != null & 앵커6 == null
[[#s-|]]번 문단을}}}{{{#!if 문단6 == null & 앵커6 != null
[[#|]] 부분을}}}}}}}}}{{{#!if 설명7 != null
, {{{#!html }}}에 대한 내용은 {{{#!if 문서명7 != null
[[]] 문서{{{#!if (문단7 == null) == (앵커7 == null)
를}}}{{{#!if (문단7 == null) != (앵커7 == null)
의 }}}}}}{{{#!if 문서명7 = 문서명7 != null ? 문서명7 : calleeTitle
{{{#!if 문단7 != null & 앵커7 == null
[[#s-|]]번 문단을}}}{{{#!if 문단7 == null & 앵커7 != null
[[#|]] 부분을}}}}}}}}}{{{#!if 설명8 != null
, {{{#!html }}}에 대한 내용은 {{{#!if 문서명8 != null
[[]] 문서{{{#!if (문단8 == null) == (앵커8 == null)
를}}}{{{#!if (문단8 == null) != (앵커8 == null)
의 }}}}}}{{{#!if 문서명8 = 문서명8 != null ? 문서명8 : calleeTitle
{{{#!if 문단8 != null & 앵커8 == null
[[#s-|]]번 문단을}}}{{{#!if 문단8 == null & 앵커8 != null
[[#|]] 부분을}}}}}}}}}{{{#!if 설명9 != null
, {{{#!html }}}에 대한 내용은 {{{#!if 문서명9 != null
[[]] 문서{{{#!if (문단9 == null) == (앵커9 == null)
를}}}{{{#!if (문단9 == null) != (앵커9 == null)
의 }}}}}}{{{#!if 문서명9 = 문서명9 != null ? 문서명9 : calleeTitle
{{{#!if 문단9 != null & 앵커9 == null
[[#s-|]]번 문단을}}}{{{#!if 문단9 == null & 앵커9 != null
[[#|]] 부분을}}}}}}}}}{{{#!if 설명10 != null
, {{{#!html }}}에 대한 내용은 {{{#!if 문서명10 != null
[[]] 문서{{{#!if (문단10 == null) == (앵커10 == null)
를}}}{{{#!if (문단10 == null) != (앵커10 == null)
의 }}}}}}{{{#!if 문서명10 = 문서명10 != null ? 문서명10 : calleeTitle
{{{#!if 문단10 != null & 앵커10 == null
[[#s-|]]번 문단을}}}{{{#!if 문단10 == null & 앵커10 != null
[[#|]] 부분을}}}}}}}}}#!if 리스트 != null
한시적 넘겨주기로 연결되는 다른 문서에 대한 내용은 아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if 리스트 != null
{{{#!if 문서명1 != null || 문서명1 == null & (문단1 != null || 앵커1 != null)
* {{{#!if 설명1 != null
배우 하영의 조부 행적과 관련한 논란: }}}{{{#!if 문서명1 != null
[[하영 친일파 가문 업적 소개 논란]] {{{#!if (문단1 == null) != (앵커1 == null)
문서의 }}}}}}{{{#!if 문서명1 = 문서명1 != null ? 문서명1 : calleeTitle
{{{#!if 문단1 != null & 앵커1 == null
[[하영 친일파 가문 업적 소개 논란#s-|]]번 문단}}}{{{#!if 문단1 == null & 앵커1 != null
[[하영 친일파 가문 업적 소개 논란#조부 안부호의 행적|조부 안부호의 행적]] 부분}}}}}}}}}{{{#!if 문서명2 != null || 문서명2 == null & (문단2 != null || 앵커2 != null)
* {{{#!if 설명2 != null
: }}}{{{#!if 문서명2 != null
[[]] {{{#!if (문단2 == null) != (앵커2 == null)
문서의 }}}}}}{{{#!if 문서명2 = 문서명2 != null ? 문서명2 : calleeTitle
{{{#!if 문단2 != null & 앵커2 == null
[[#s-|]]번 문단}}}{{{#!if 문단2 == null & 앵커2 != null
[[#|]] 부분}}}}}}}}}{{{#!if 문서명3 != null || 문서명3 == null & (문단3 != null || 앵커3 != null)
* {{{#!if 설명3 != null
: }}}{{{#!if 문서명3 != null
[[]] {{{#!if (문단3 == null) != (앵커3 == null)
문서의 }}}}}}{{{#!if 문서명3 = 문서명3 != null ? 문서명3 : calleeTitle
{{{#!if 문단3 != null & 앵커3 == null
[[#s-|]]번 문단}}}{{{#!if 문단3 == null & 앵커3 != null
[[#|]] 부분}}}}}}}}}{{{#!if 문서명4 != null || 문서명4 == null & (문단4 != null || 앵커4 != null)
* {{{#!if 설명4 != null
: }}}{{{#!if 문서명4 != null
[[]] {{{#!if (문단4 == null) != (앵커4 == null)
문서의 }}}}}}{{{#!if 문서명4 = 문서명4 != null ? 문서명4 : calleeTitle
{{{#!if 문단4 != null & 앵커4 == null
[[#s-|]]번 문단}}}{{{#!if 문단4 == null & 앵커4 != null
[[#|]] 부분}}}}}}}}}{{{#!if 문서명5 != null || 문서명5 == null & (문단5 != null || 앵커5 != null)
* {{{#!if 설명5 != null
: }}}{{{#!if 문서명5 != null
[[]] {{{#!if (문단5 == null) != (앵커5 == null)
문서의 }}}}}}{{{#!if 문서명5 = 문서명5 != null ? 문서명5 : calleeTitle
{{{#!if 문단5 != null & 앵커5 == null
[[#s-|]]번 문단}}}{{{#!if 문단5 == null & 앵커5 != null
[[#|]] 부분}}}}}}}}}{{{#!if 문서명6 != null || 문서명6 == null & (문단6 != null || 앵커6 != null)
* {{{#!if 설명6 != null
: }}}{{{#!if 문서명6 != null
[[]] {{{#!if (문단6 == null) != (앵커6 == null)
문서의 }}}}}}{{{#!if 문서명6 = 문서명6 != null ? 문서명6 : calleeTitle
{{{#!if 문단6 != null & 앵커6 == null
[[#s-|]]번 문단}}}{{{#!if 문단6 == null & 앵커6 != null
[[#|]] 부분}}}}}}}}}{{{#!if 문서명7 != null || 문서명7 == null & (문단7 != null || 앵커7 != null)
* {{{#!if 설명7 != null
: }}}{{{#!if 문서명7 != null
[[]] {{{#!if (문단7 == null) != (앵커7 == null)
문서의 }}}}}}{{{#!if 문서명7 = 문서명7 != null ? 문서명7 : calleeTitle
{{{#!if 문단7 != null & 앵커7 == null
[[#s-|]]번 문단}}}{{{#!if 문단7 == null & 앵커7 != null
[[#|]] 부분}}}}}}}}}{{{#!if 문서명8 != null || 문서명8 == null & (문단8 != null || 앵커8 != null)
* {{{#!if 설명8 != null
: }}}{{{#!if 문서명8 != null
[[]] {{{#!if (문단8 == null) != (앵커8 == null)
문서의 }}}}}}{{{#!if 문서명8 = 문서명8 != null ? 문서명8 : calleeTitle
{{{#!if 문단8 != null & 앵커8 == null
[[#s-|]]번 문단}}}{{{#!if 문단8 == null & 앵커8 != null
[[#|]] 부분}}}}}}}}}{{{#!if 문서명9 != null || 문서명9 == null & (문단9 != null || 앵커9 != null)
* {{{#!if 설명9 != null
: }}}{{{#!if 문서명9 != null
[[]] {{{#!if (문단9 == null) != (앵커9 == null)
문서의 }}}}}}{{{#!if 문서명9 = 문서명9 != null ? 문서명9 : calleeTitle
{{{#!if 문단9 != null & 앵커9 == null
[[#s-|]]번 문단}}}{{{#!if 문단9 == null & 앵커9 != null
[[#|]] 부분}}}}}}}}}{{{#!if 문서명10 != null || 문서명10 == null & (문단10 != null || 앵커10 != null)
* {{{#!if 설명10 != null
: }}}{{{#!if 문서명10 != null
[[]] {{{#!if (문단10 == null) != (앵커10 == null)
문서의 }}}}}}{{{#!if 문서명10 = 문서명10 != null ? 문서명10 : calleeTitle
{{{#!if 문단10 != null & 앵커10 == null
[[#s-|]]번 문단}}}{{{#!if 문단10 == null & 앵커10 != null
[[#|]] 부분}}}}}}}}}| |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word-break: keep-all"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colbgcolor=#f5f5f5,#2d2f34>고흥군 | 거금도 · 나로도 · 득량도 · 백일도 · 소록도 · 시산도 · 수락도 · 쑥섬 · 지죽도 · 중구도 |
| 광양시 | 금호도 · 태인도 · 배알도 | |
| 목포시 | 고하도 · 달리도 · 율도 · 외달도 · 장좌도 | |
| 순천시 | 사기섬 · 장구도 | |
| 신안군 | 가거도 · 가란도 · 고이도 · 구리도 · 구굴도 · 도초도 · 만재도 · 문병도 · 매화도 · 비금도 · 칠발도 · 사옥도 · 상태도 · 안좌도 · 암태도 · 압해도 · 영산도 · 우이도 · 임자도 · 자은도 · 장산도 · 증도 · 재원도 · 팔금도 · 하의도 · 하태도 · 홍도 · 흑산도 · 황마도 · 마진도 · 암치도 · 수치도 · 신의도 · 막금도 · 장재도 · 대오지도 · 백야도 · 솔섬 · 율도 · 무명도 | |
| 여수시 | 거문도 · 고도 · 개도 · 금오도 · 나발도 · 낭도 · 대경도 · 대두라도 · 대륵도 · 대부도 · 대횡간도 · 돌산도 · 둔병도 · 묘도 · 백도 · 백야도 · 사도 · 상화도 · 섬달천도 · 소거문도· 소경도 · 소두라도 · 소횡간도 · 송도 · 송도 · 손죽도 · 연도 · 여자도 · 월호도 · 운두도 · 자봉도 · 적금도 · 제도 · 조발도 · 추도 · 초도 · 평도 · 하화도 · 화태도 · 안도 | |
| 영암군 | 등대섬 · 석화도 | |
| 영광군 | 안마도 · 송이도 · 상낙월도 · 하낙월도 · 칠산도 | |
| 완도군 | 고금도 · 구도 · 금당도 · 넙도 · 노화도 · 당사도 · 보길도 · 생일도 · 소안도 · 신지도 · 약산도 · 완도 · 여서도 · 조약도 · 주도 · 청산도 · 평일도 · 횡간도 · 허우도 · 충도 · 소랑도 | |
| 진도군 | 가사도 · 관매도 · 감보도 · 동거차도 · 맹골도 · 상조도 · 서거차도 · 진도 · 하조도 · 접도 · 금호도 · 모도 | |
| 강진군 | 가우도 · 호래비섬 · 외호도 · 내호도 · 대오도 · 소오도 · 비래도 · 죽도 | |
| 보성군 | 지주도 · 장도 · 해도 · 가지도 · 효도 · 다래도 | |
| 나주시 | 동섬 | |
| 장흥군 | 노력도 · 장재도 · 장환도 · 자라섬 · 소대구도 · 대대구도 · 탱자섬 | |
| 무안군 | 저도 · 탄도 · 야광주도 | |
| 해남군 | 어불도 · 상마도 · 중마도 · 하마도 | }}}}}}}}} |
| 소록도 小鹿島 Sorok Island |
| |
1. 개요
전남광주통합특별시 고흥군 도양읍에 위치한 섬. 이름만 보면 평범한 섬처럼 보이나 수술할 한센병 환자들의 수용소가 위치했던 섬으로 유명하다. 그만큼 아픔이 묻어 있고 한국의 근현대사의 부끄러운 부분을 많이 품고 있는 섬이기도 하다. 한센병이라 불리는 나병(癩病) 환자들이 격리된 섬이라고 하여서 과거에는 한센섬, 문둥섬, 나도(癩島), 나섬이라는 비하적인 이름으로도 불렸다.소록도 아래에는 제법 큰 섬이 하나 있는데 그 섬은 거금도이며[1], 거금도의 육로는 오직 소록도로만 연결되어 있다.
2. 한센인 주거지로서의 소록도
2.1. 소록도 한센인들의 시작
개항기에 입국한 개신교 선교사들은 주로 의료시설과 학교를 세우는 활동을 했는데 당시 전라도 일대에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병원이나 시설을 많이 세웠다. 한국통감부에서는 1909년 8월 대한제국 칙령 제75호로 "자혜의원"이라는 이름의 요양병원을 전국 각지에 세우는 작업을 했는데[2] 특별히 한센병 치료를 위한 전문 요양소로 소록도의 자혜의원을 운영하게 되었다.당시 한센병에 대한 정책은 나요양소를 마련하여 한센병 환자들을 격리수용하는 방식이었다. 당시 총독부의 위생고문이었던 야마네 마사츠구(山根正次)는 "조선의 나환자도 격리 수용시켜야 한다"고 건의했고[3] 당시 조선 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이를 수용하여 소록도가 한센병 요양소로 선택되었다.
그리고 1916년 2월 24일 조선총독부령 제7호가 공포되어 "소록도 자혜의원"이 설립되어 본격적으로 한센인 병원이 운영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이 과정에서 대대로 소록도에 살던 원주민들은 육지로 쫓겨나야 했다.
2.2. 일제강점기의 소록도
한편 소록도 자혜의원 2대 원장 하나이 젠키치(花井善吉: 1921~1929)는 일제강점기 역사에서 매우 독특한 인물이었다. 1대 원장 아리카와 토오루(蟻川亨: 1916~1921) 시기에도 의료 시설로서의 기능은 작동했고 최소한의 인간적인 생활은 보장되었으나, 환자들에게 일본식 생활[4]을 강제했다는 오점이 있었다. 하나이는 이러한 문화적 강제책을 전면 폐지하는 한편 자유로운 면회와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고, 일본인 기독교 선교사들을 통해 환자들이 종교활동으로 위안을 얻을 수 있도록 하였으며, 취미생활과 오락 활동까지 권장하는 등 극도로 소외받고 차별받던 한센인들에게 혜택을 주려고 노력했다. 하나이 원장은 소록도에서 떠나지 않고 환자들 곁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가 생전에 돌보았던 환자들은 없는 돈을 추렴하여 송덕비를 세웠다. 그에 관한 이야기하나이(花井善吉)원장 창덕비 건립(1930. 9.)해방 뒤 비석 철거 위기에 처하자 몰래 숨겼던 사연, 소록도병원 제2대 '하나이' 원장 이야기 그 후로 문제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 어찌됐건 설립 직후부터 3대 원장 야자와 슌이치로(矢澤俊一郞: 1929~1932) 시기까지는 조선의 한센인들에게 있어서 사실상 유일한 안식처로 남아 있었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 이때에도 병원 공사에는 그곳에 수용된 한센인들을 동원했다. 새로 건물을 짓기 위해 벽돌공장을 세우고 벽돌을 찍어냈다. 그 밖에도 일상에 필요한 생활용품인 짚신 만들기부터 환자들의 치료 보조까지 모든 작업에 한센인이 투입됐다. 애초에 이 당시에 근무하던 의사는 고작 3,4 명 정도 밖에 안됐던 만큼, 시설 자체는 매우 열악했다[5]. 이런 상황에서 일제는 적당한 작업이 '정신 위안', '체력 증진' 등 치료 효과를 낸다면서 환자들에게 작업을 독려했다. 게다가 독한 약을 먹기 때문에 영양소 공급이 중요한 사안이었지만 일제는 작업에 동원되는 한센인들에 충분한 음식을 주지 않았다. 작업의 대가로 소종의 작업장려금을 지급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한센인들이 이 돈을 실제 사용했을지는 의문이다.#
제대로된 음식을 먹지도 못하면서 각종 작업에 강제 동원된 사람들의 불만이 커져가면서 소록도를 탈출하는 환자도 생겨났다. 치료는커녕 가혹한 노동에 내몰린 한센인들은 어선을 타고 800m 남짓 떨어진 녹동항으로 도망쳤다. 무조건 바다에 뛰어들어 탈출을 시도하다가 죽은 한센인도 상당수였다고 전해진다.
1933년 부임한 4대 원장 스오 마사스에(周防正季)는 소록도를 자신의 탐욕을 실천할 도구로 삼아서 수많은 소록도 한센인들을 토목공사에 동원하고 심지어 자신의 동상을 만들어 매달 정기적인 참배를 강요하는 짓까지 벌였다. 1934년 명칭도 '소록도갱생원'으로 변경했고, 1941년부터는 전쟁물자 조달에 적극 동원했다. 결국 스오 원장은 1942년에 원생 이춘상의 의거로 사살되었다.# 이후 해방까지는 니시키 산케이(西龜三圭)가 5대 원장으로 있었다.
이춘상 의사는 국사범으로 취급되어 1943년 2월 19일 처형되었다.[6] 이춘상이 사회적으로 멸시받던 한센인이었다는 점 때문에 그의 의거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친척들마저 부정한 탓에 아무도 독립유공자로 신청하지 않았다. 2003년 '이춘상선생기념사업회(현 이춘상기념사업회)'가 세워져 국가보훈처에 총 세 차례 독립유공자 인정을 촉구했으나 보훈처 측은 "행적이 불분명하고, 논란의 여지가 있다"며 이를 기각해 왔다. 그나마 2022년 국립소록도병원 중앙공원에 '이춘상 6.20의거 기념비'가 세워졌다.
일제는 한센인의 탈출을 막기 위해 4㎞ 길이의 순찰도로를 만들었는데 그 작업에도 환자들을 동원했다. 1937년 말, 환자들은 추위 속에서 제대로 된 장비도 없이 삽과 지게 등에 의존해 도로를 닦아야 했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로 소록도의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일제는 한센인들에게까지 국방헌금·장병위문금 등의 명목으로 돈을 거둬갔다. 작업장려금도 헌금 명목으로 회수해갔을 정도다. 환자들은 필요한 전시 물품을 생산하는 데에도 동원됐다. 목탄 생산, 가마니 짜기, 송탄유용 송진 채취, 토끼 가죽 생산, 벽돌 제조 등이다. 1935년부터 소록도에서 생활한 한 한센인은 2005년 국사편찬위원회가 펴낸 <한센병, 고통의 기억과 질병 정책>이란 자료집에서 당시의 고통을 이렇게 회고했다.
"(병원) 확장 공사할 때는 새벽에 나가서 어두워져야 들어와요. 사람들이 많이 맞았어요. 당시 (일제는) 환자를 인간 취급을 안 했거든요. 동물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았죠."
노동력 착취는 물론이고 환자에 대한 폭행도 빈번하게 발생했다는 증언이다.당시 소록도의 인권 유린의 상황을 웅변해주는 시설물이 지금도 남아 있다. '자혜의원'이 '나요양소'라는 이름을 거쳐 1934년 10월 '소록도갱생원'으로 명칭을 바꾼 뒤 지어진 감금실·검시실 등이다. 부당한 대우에 항의하는 한센인 중에는 붉은색 벽돌로 지은 감금실에 끌려가서 최장 60일까지 갇혀 지내다가 사망한 경우도 많았다. 갱생원 원장은 정해진 금지행위를 한 한센인에 대해 직권으로 판결 및 징벌을 할 수 있었다.
구금·체벌이 아무런 법 절차 없이 이뤄졌다. 소록도 한센인이 지켜야 할 규정 등을 담은 '조선총독부 자혜의원 연보'에 따르면 '환자가 사망한 경우 학술연구를 위해서 시체 해부를 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 당시 시체 해부가 이뤄진 장소가 바로 검시실이다. 소록도 환자는 사망하게 되면 가족의 의사와 무관하게 검시 절차를 거친 뒤에야 장례식을 치를 수 있었다. 시신은 소록도 내 화장터에서 화장했다. 현재 검시실에는 당시 사용된 검시대와 세척 시설 등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감금실 등은 문화재청의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유지되고 있다.#
한센병 환자 단종수술은 1915년께 일본에서 처음 실시됐다. 우리나라에서는 1935년께 여수 애양원에서 먼저 실시된 후 소록도에서는 1936년께 부부 동거의 조건으로 단종수술을 내걸고 공식 도입됐다. 일제강점기에는 수용 환자를 징계하는 차원에서 폭행, 협박, 감금과 함께 단종수술을 시행하기도 했다. 소록도병원에는 당시 상황을 담은 '단종대'라는 제목의 시(詩)가 지금도 걸려 있다.
"그 옛날 나의 사춘기에 꿈꾸던/ 사랑의 꿈은 깨어지고/ 여기 나의 25세 젊음을/ 파멸해 가는 수술대 위에서/ 내 청춘을 통곡하며 누워 있노라./ 장래 손자를 보겠다던 어머니의 모습/ 내 수술대 위에서 가물거린다./ 정관을 차단하는 차가운 메스가/ 내 국부에 닿을 때/ 모래알처럼 번성하라던/ 신의 섭리를 역행하는 메스를 보고/ 지하의 히포크라테스는/ 오늘도 통곡한다."
일제강점기에 이동이라는 한센인이 소록도의 감금실에서 출감하며 단종수술을 받고 이 시를 지었다고 한다.#2.3. 1945년 한센인 학살 사건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소록도에는 끔찍한 사건이 있었다. 8월 22일 자치권을 요구하던 환자 84명을 직원들이 끌고 가 총살한 '84인 학살사건'이다. 세상과 단절된 섬 소록도에서 일어난 대규모 학살은 이듬해 4월이 돼서야 바깥세상에 알려졌으며, 진상 조사가 이뤄진 건 사건이 발생하고 56년이 지난 2001년 12월 8일이다. 소록도 환자들로 구성된 원생자치회는 숨진 환자들이 화장·매몰된 현장을 발굴했다. 2002년 8월 22일 매몰 현장에 추모 시설물이 세워졌다. 소록도병원 본관 앞 '애한의 추모비'다.당시 병원에서는 운영권에 대한 투표를 실시했고 운영권을 노렸던 의사 "석사학"은 주도권을 되찾으려는 음모를 꾸몄다. 당시 한센인 원생의 대표였던 이종규에게 "운영권을 장악한 자들이 원생들이 먹을 식량과 의약품 등을 반출하려 한다"는 거짓 정보를 주었고 결국 직원들과 원생들은 격렬하게 충돌하게 되었다. 다만 운영권에 대한 것은 하나의 견해일 뿐 이청준 소설 <당신들의 천국>의 주인공 조창원 원장은 "그것은 거짓말"이라고 말했다. 그의 인터뷰에 따르면 "소록도에 해방 소식이 전해진 것은 1945년 8월 18일이다. 원장이었던 니시키가 한국 의사 석사학을 불러 창고 열쇠를 주면서 "환자들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도록 창고의 식량과 약품을 잘 지키라"고 부탁했다. 석사학이 환자와 직원들을 찾아가 그 얘기를 그대로 전했다. 그러자 병원 직원이었던 오순재와 송희갑이 "'문둥이'들에게 먹을 것을 다 주면 우리는 어떻게 사냐"며 의사를 두들겨팬 뒤 열쇠를 빼앗았다. "해방 이후의 혼란을 틈타 창고를 강도질하려고 든 것이다." 라고 말했으며, 2018년 국립소록도병원에서 발간한 "소록도 100년, 한센병 그리고 사람, 백년의 성찰"에 따르면 "어떠한 시각에서 사건을 해석하든 적어도 8월 22일의 총격과 학살은 무장한 직원들에 의해 계획적으로 일어난 집단학살이었다"고 저술했다. 이 과정에서 직원들은 실탄사격을, 환우(환자)들은 직원 몇 명을 폭행치사하는 등 험악한 상황이 벌어졌고 결국 조선인 직원들은 원생들과의 협상을 제안했다. 하지만 직원들은 결코 운영권을 한센인들에게 넘겨 줄 생각이 없었고 고흥 치안유지대에 몰래 선을 넣어 지원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8월 21일 아침 원생들은 대표자 90명을 선발하여 협상 장소로 나갔으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협상 테이블 대신 죽창과 총이었다. 무장한 직원들과 이들이 동원한 치안유지대는 이들 90명을 포박하고 사격하거나 죽창으로 마구 찔러 죽여 버렸다. 이들 중에 아직 목숨이 끊어지지 않은 이들에게 직원들은 구덩이를 파고 이들의 시신과 생존자들을 전부 던져 버리고 기름[7]을 쏟아붓고 불을 질러 이들을 생화장시켰다. 이 사건으로 숨진 한센인들은 84명에 이르고 최근까지도 이 사건의 목격자와 생존자가 소록도에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소록도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지금도 소록도에서 벌어진 최악의 사건으로 구설에 오르고 있다. 2002년 8월 22일 11시 30분 사건 현장이던 국립소록도병원 치료본관 앞에 이 사건을 기리는 "애환의 추모비"가 건립되었다. 자유로운 사진 촬영이 가능한 장소며 방문객들이 묵념을 하고 가기도 한다.
2.4. 출산 제한 강제 답습
# 1945년 해방 이후 4년간은 비교적 자유로운 결혼이 허용되었으나, 김상태 원장이 1948년부터 정관수술을 전제로 한 부부동거제가 부활했다. 1949년부터 1958년까지의 연보에 의하면 1,191명이 정관수술(정계수술)을 받았으며, 여성 환자에게도 낙태수술이 시행되었다. 기존 동거부부에게 일제히 단종수술을 시행하고 이후 동거 희망자는 허가제를 실시한 것이다. 이는 이후의 산아제한정책보다도 이른 시점이었기에 명백히 일제시기의 관행을 답습한 것이다. 특히 김상태 원장 재직시기인 1953년까지 출생아가 거의 없었다가 1954년 원장교체 후 늘어나는 양상을 보인다.하지만 결혼 조건으로의 정계수술은 1960년대 이후에도 가족계획시책으로 이름을 바꾸어 80년대까지도 지속적으로 실시되었다. 낙태 또한 1964년 연보에서 입원 중 임신자에게 유산수술을 시행한다고 기재되어 있으며,[8] 부득이 분만하더라도 즉시 '미감아' 수용소에 격리 수용 양육케 했다. 다만 이례적으로라도 출생아가 존재했기에 일제 치하와 같은 극단적인 낙태수술은 줄어든 것으로 추정되었다. 소록도 보육소에서는 부모와 1달에 1회씩만, 수m 거리를 두고 바람 반대방향에서만 면회할 수 있었다. 이 아이들은 초등학교 진학 시에도 인근 지역 주민들의 반대와 폭력사태로 이어져 1961년 정착촌 측에 분교가 설립되었다.
| 수용환자수 | 동거부부수 | 정계수술수 | 출생아 수 | |
| 1949 | 6,111 | 959 | 181 | 45 |
| 1950 | 5,299 | 967 | 175 | 1 |
| 1951 | 6,124 | 978 | 126 | 5 |
| 1952 | 5,825 | 984 | 206 | 4 |
| 1953 | 5,608 | 996 | 90 | 2 |
| 1954 | 5,470 | 1,333 | 116 | 27 |
| 1955 | 5,587 | 1,011 | 127 | 29 |
| 1956 | 5,963 | 1,016 | 71 | 23 |
| 1957 | 5,886 | 1,118 | 59 | 4 |
| 1958 | 5,583 | 1,064 | 40 | 13 |
| 합계 | - | - | 1,191 | 153 |
2.5. 6.25 전쟁의 상흔
6.25 전쟁 때 소록도를 점령한 북한군은 피난가지 않고 남아 있던 섬의 10명의 직원과 1명의 목사를 총살했고 북한군 부역자들은 기독교인들을 인민재판에 회부하여 김민욱, 박순호 장로를 사형에 처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미군기가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했다는 전단지를 뿌렸고 인민재판을 종용하던 사람은 돈을 가지고 빠져나갔다.2.6. 강제격리와 강송
한센인의 강제격리 관련 법령은 해방이후 1954년까지는 일제의 격리제가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1954년에 정비되었다가 1963년에 전염병예방법이 개정되면서 폐지되었다. 2005년 설문조사에서 소록도 입소경험자 중 31.9%가 강제적으로 입소(강송)되었다. 강송은 1980년대까지 취체, 선도 등으로 명칭을 바꾸며 존속되었다. 초기의 강송은 어린아이 간 빼먹기 등의 잘못된 속설을 근거로 환자들을 잠재적인 범죄자 취급을 한 것이 이유였다. 이후에는 사회의 명랑화라는 명목으로 주요 지역의 부랑환자들을 단속했다. 1980년대 아시안게임 당시의 '사회 선도'가 대표적이다. 여기에는 1974년 나관리지침 기준 1년에 1000명 가량의 단속 목표치도 있었다. 지침상으로는 부랑 걸식환자가 대상이었으나 길거리에 보이기만 하면 대상이었다는 등 재가환자도 잡아갔다는 증언도 있다. 이러한 일제 단속을 일명 '후리가리'라고 했으며, 애초에 법적 규정도 없이 관행적으로 이뤄진 공권력의 불법행위였다.이외에는 정착촌 내에서 갈등이 발생하면 정착민을 국립나병원 곧 소록도로 강송을 보내기도 했으며, 60년대 말에는 여러 정착촌과 요양소들을 통폐합 정리하면서 환자들을 집단적으로, 강제적으로 소록도로 보냈다.
2.7. 조창원 원장과 <당신들의 천국>
1960년 7월 1일 국립소록도병원이 정식으로 건립되었고 서울대 의대 출신으로 군의관으로 복무한 조창원 대령이 원장으로 부임했다. 맨 처음 그가 한 일은 환자들과 직원들의 숙소를 갈라놓은 철조망을 없애는 작업이었다. 그리고 섬 곳곳에 대문짝만한 표어들을 갖다 붙였는데, "나병은 낫는다." "나병은 유전되지 않는다."라는 문구들이었다. 또한 그는 일제강점기 나환자들의 한 맺힌 노동으로 지어진 벽돌 공장을 폭파하고 역시 한센인들의 피눈물이 아롱진 단종수술을 폐지했다. 조 원장은 당시 섬의 다수 세력인 개신교 교회와 충돌을 빚기도 했다. 소록도의 7개 부락(리)에는 각 부락민들을 위한 교회가 세워져 있다. 그런데 조 원장은 "각 부락의 예배당이 병원 건물이니, 건물을 즉시 반환하고 한 곳에서만 예배하라"는 강제 퇴거명령을 내리고 교회의 종탑을 철거하는 등의 강경 대책을 세웠다. 소록도는 개신교 선교사와 천주교 봉사자들의 영향으로 개신교인과 천주교인의 비율이 상당히 높은 편이어서 이러한 명령은 섬 주민들의 신앙과 부딪치는 일이었다. 그러나 1962년에 김두영 목사가 담임목사로 부임하면서 병원 측과 교회의 갈등은 수습국면에 접어들었다. 추가로 나환자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한 방편으로 병원 직원과 나환자들의 연합 축구팀을 만들어 맹훈련시켜 고흥 군민 체육대회에서 우승을 하는 쾌거를 이룩하기까지 했다.소록도의 이러한 소란이 잦아들면서 조창원 원장은 주민들을 위한 원대한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소록도 인근에는 "오마도"라는 무인도가 있는데 이곳에 간척사업을 벌여서 한센인들이 거주하며 농사를 짓게 하자는 아이디어를 낸 것이었다. 당연히 한센인들은 크게 호응했고 몸이 조금이라도 성한 사람들은 전부 간척지 개간 사업에 참여하여 1961년~1964년동안 진행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고흥 주민들에게서 나왔다. 고흥 주민들은 "문둥이들과 함께 살 수 없다!"면서 결사반대를 외쳤고 이러한 간척 사업은 곧 난항에 부딪치게 되었다. 결국 이 사건은 개척이 90% 이상 완료된 상황에 새로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민주공화당 소속 신형식 의원이 정책을 뒤집어 간척사업의 주체를 전라남도로 돌려 버리면서 해결되었다. 조 원장은 곧 국립의료원 부원장으로 강제 보직이동 조치를 당해 소록도를 떠나게 되었고 오마도 간척지는 1988년에 일반인들에게 불하하면서 소록도 주민들에게 아픔만 주고 끝나 버렸다. 이 사건을 각색하여 일반에 알린 사람이 바로 소설가 이청준이고 이 소설의 이름이 <당신들의 천국>이다. 위에 나와 있는 일화들 상당수가 똑같이 전개된다.[9]
2.8. 한센인들을 향한 차별
한센인들을 차별하고 핍박하는 일들은 일제강점기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199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2016년 7월 그것이 알고싶다 1042회에서 소록도 한센인들을 향한 끔찍한 일들이 폭로되면서 소록도는 다시 한 번 일반인들의 기억 속에 아픔으로 남게 되었다. 이에 관한 더 구체적인 이야기들은 한센병을 참고할 것.이 때문에 한때 소록도가 한센도, 한센섬, 나섬, 나도(癩島), 문둥섬이라는 등의 비하적인 이름으로도 불렸으며 또한 사람들이 기피하기도 하고 병자들이 격리된 섬이라고 하여서 가지 말아야 할 섬으로도 낙인되기도 했다. 2009년에야 녹동과 소록도를 잇는 소록대교가 개통하였을 정도인 것을 보면 그 이전부터 소록도는 병자들의 섬이라고 하여서 낙인을 받았던 비운의 섬이기도 했다. 녹동항에서 보면 녹동에서도 가까운 섬이었지만 이렇게 연륙교가 2009년에 뒤늦게 개통을 한 것으로 봐도 과거에는 도선으로 밖에 갈 수 없었던 소록도의 비운적인 역사를 알 수 있다.
2.9. 소록도에 방문한 특별한 손님들
소록도 주민들에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은 이들이 몇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영부인인 육영수는 이곳 주민들에게 인상 깊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소록도에 처음으로 방문한 높으신 분이 바로 육영수였기 때문이다. 당시 육영수는 소록도 병원에 방문하여 한센인 환자들을 직접 만나 위로하며 봉사활동을 하고 떠났다. 그녀는 이후에도 한센인들을 초청하고 주기적으로 위문품을 보내는 등 소록도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였다.[10] 당시 한센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생각할 때 처음으로 접근해 온 높으신 분이 주민들에게 얼마나 강렬한 인상을 남겼는지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영향으로 소록도는 호남 지역에서 보수세가 가장 강하며 특히 육영수의 딸에게 깊은 애정을 보였다. 아래 정치 성향 문단 참조. 그리고, 위의 오마간척과 결부한다면, 병을 핑계로 외지인들을 차별한 답없는 헛짓거리에 보수정당이 어부지리를 얻은 셈.
- 나훈아가 1997년 5월 14일 소록도에서 위문공연 '나훈아, 그리고 소록도의 봄'을 진행했다. 휠체어 50대를 소록도에 개인적으로 기증하기도 했다. 이 무대는 SBS에서 생방송되었다.
- 조용필은 소록도 주민들에게는 특별한 추억을 선사한 사람이다. 조용필은 2010년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소록도 우촌복지관에서 공연을 가졌다. 그때 조용필은 프로그램 상 꿈, 친구여 등 두 곡만 불렀고 "나중에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는데 실제로 그 약속을 지켰다. 2011년에는 아예 자신의 밴드와 함께 소록도를 다시 찾아 환자들과 병원 직원들을 위하여 무료 공연을 개최했다. 이 공연은 더욱 파격적인데 아예 자신이 프로그램을 짜서 오지 않고 즉석에서 신청곡도 받아 환자들과 어울렸다고 한다. 당시 강당은 거대한 노래방이 따로 없었다고. 병원 직원의 증언에 따르면 여태껏 이 곳을 찾은 수많은 유명인사들이 나중에 다시 오겠다고 하고 오지 않았지만 조용필은 거의 유일하게 다시 온 사례였다고 한다. 더욱 감동적인 것은 당시 조용필은 아예 객석 밑으로 내려가 한센인 어르신들과 일일이 악수도 하고 포옹도 하면서 마이크를 넘겨주고 함께 즐겁게 노래했다고 한다. 역시 가왕의 풍모는 다르다.
2.9.1.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방문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도 특별한 손님이다. 1984년 5월 역대 교황 중 최초로 한국을 방문한 요한 바오로 2세는 방한 전 "한국에서 가장 소외된 곳이 어디인가?"라고 한국 천주교회 측에 질문했는데 한국 천주교회 측이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있는 소록도를 언급했다. 이 때문에 광주 방문 직후 소록도에 방문하여 원생들을 위로했고 그의 방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병원 측은 그간 원생들과 일반인들이 따로 사용했던 선창과 배를 하나로 통합하여 이들에 대한 차별대우를 시정했다. 참고로 이 당시 전두환 정부는 교황의 소록도 방문에 대해 탐탁지 않아했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발전된 모습만 보여줘도 시원찮을 판에 한센병 환자가 모인 섬을 보여준다면 대한민국의 국격과 위상에 흠이 갈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11]
당시 교황은 "마음으로 친애하는 여러분. 머나먼 길을 떠나 대한민국에 올 채비를 하면서, 이 소록도에 계신 여러분과의 만남을 특별히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서 아름다운 글을 받은 후로는, 더더욱 여러분을 보러 오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과 함께 하고, 여러분을 위로하고, 여러분에게 내 사랑을 전하고 싶어서였습니다."라는 인사말을 직접 읽어주었다.
소록도중앙공원 내 천주교 부지에는 교황의 방한을 기념하는 자그마한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이 천주교 부지는 1940년대에 소록도의 건물을 짓기 위한 벽돌공장의 자리였다. 한센인들의 애환을 신앙의 힘으로 치유하려는 뜻에서 공장을 없애고 작은 연못 위에 성모상을, 그 앞에 자그마한 제대를 만들어서 천주교인들의 야외 미사터를 만든 것.
2.9.2. 마리안느와 마가렛
소록도에서 40년간 헌신적으로 봉사하던 간호사[12]들이었던 마리안느와 마가렛[13]은 지금도 소록도 주민들에게 큰 감동으로 남아 있다. 오스트리아에서 온 두 사람은 한센인들을 위해 온갖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으나 더 나이가 들어 건강이 나빠지자 은퇴를 결심하게 되었다. 이에 소록도 주민들이 성대한 환송식을 준비하려고 하자 이들을 번거롭게 하기 싫다며 편지 한 장을 남긴 채 소록도를 떠났는데 2016년 마리안느가 다시 소록도를 방문하여 주민들과 눈물로 인사를 나누었다고 한다.2.9.2.1. 다큐멘터리 영화 <마리안느와 마가렛>
오스트리아 출신인 마리안느 스퇴거(Marianne Stoeger·[age(1934-04-24)])와 마가렛 피사렉(Margareth Pissarek·88)[14]은 각각 1962년과 1966년에 가톨릭 교회의 재속회인 오스트리아 그리스도왕 시녀회 회원으로 처음 소록도 땅을 밟았다. 간호사로서 이들은 한센병 환자들의 거주지인 소록도에서 구호활동에 매진했다. 이후 공식적인 파견 기간이 끝난 뒤에도 자원봉사자로 남아 반세기에 가까운 43년(39년) 동안 조건 없는 사랑으로 한센병 환자들과 그 자녀들을 보살폈다.2005년 11월 23일 소록도의 집집마다 편지 1통이 도착했다. 마리안느와 마가렛이 보낸 마지막 편지였다. 죽어서도 소록도에 묻히길 원했던 두 사람은 건강 악화로 예전처럼 일을 할 수 없고 오히려 소록도에 부담이 될까 염려하여 2005년 11월 편지 한 장만 남기고 홀연히 섬을 떠났다.[15]
두 사람이 소록도를 떠나 고국인 오스트리아로 돌아간 지 11년이 지난 2016년은 소록도병원 개원 100주년이 되는 해로 휴먼 다큐 <마리안느와 마가렛>(감독 윤세영·작가 양희·내래이션 이해인 클라우디아 수녀)은 두 사람의 아름다운 삶을 조명하는 의미에서 소록도성당 김연준 신부가 기획하였으며 소록도가 위치한 전라남도 고흥군과 사단법인 마리안느와 마가렛이 제작·지원하였다.
마가렛 피사렉은 2023년 9월 29일 오후 3시 15분(현지 시각)에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의 한 병원에서 급성 심장마비로 인해 향년 88세로 사망했다.#
다큐멘터리 '마리안느와 마가렛' 사랑 예고편
다큐멘터리는 소록도에서 자원봉사자로 40여 년 동안간 오직 한센병 환자들을 사랑으로 보살펴 온 마리안느와 마가렛의 소록도 생활과 주변인들의 이야기, 그리고 현재의 생활 모습과 오스트리아 현지 가족들의 인터뷰로 구성됐다. 또 인위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마리안느와 마가렛이 아닌 주변 사람들의 인터뷰를 통해 담담하게 두 사람의 삶을 조명하는데 초점을 뒀다.
특히 이 작품은 소록도의 아름다운 영상미가 더해져 다큐멘터리로써의 품격을 한 단계 더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2.9.2.1.1. 영화 오스트리아 현지 상영
한-오스트리아 수교 125주년을 맞아 2017년 6월 6일(현지시각) 오후 7시 오스트리아 빈 우라니아홀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마리안느와 마가렛> 상영회가 열렸다.'소록도 천사' 영화 <마리안느와 마가렛>, 오스트리아서 상영 (2017년 6월 6일)
2.9.2.1.2. 영화, 제27회 한국 가톨릭 매스컴 대상 특별상 수상
다큐멘터리 영화 <마리안느와 마가렛>이 2017년 5월 열린 제27회 한국 가톨릭 매스컴 대상 시상식에서 특별상을 수상했다.한국천주교주교회의 매스컴 위원회의 관계자는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다큐 영화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특별상 수상작으로 결정됐다"고 말했다.
영화 <마리안느와 마가렛> 가톨릭 매스컴 대상 '특별상'
3. 섬에 가는 방법
소록대교 건설 전에는 녹동항에서 배를 타고 이동해야 했으나 2008년에 소록대교가 건설되어 자동차를 타고 이동이 가능하다. 27번 국도의 종점이 이 섬 남쪽에 있는 거금도로, 거금대교로 소통이 가능하다. 그 27번 국도가 고속화도로 스펙으로 지어진 것도 소록도가 통제된 곳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동방고속에서 운행하는 광주~소록도 시외직행버스를 이용해서도 갈 수 있다.소록도는 섬 전체가 병원이다. 외부인은 일부 개방된 구역[16]만을 그것도 정해진 시간 동안만 탐방할 수 있다. 특히 마을은 그 자체가 일종의 거대한 생활치료센터 또는 요양원 역할을 하므로 병원의 허가를 받은 자 외에는 일절 들어가면 안 된다. 여전히 외부에의 노출을 극도로 꺼리는 주민들의 의사를 존중해 주어야하니 호기심에라도 무단출입하는 일은 결코 없도록 하자. 그나마 27번 국도가 자동차전용도로로 지정되지 않은 것이 외부인 출입 여지가 남아있기는 한데, 만약 소록도까지 이 특성을 반영하여 입체교차로로 지어졌다면 해당 구간은 자동차전용도로로 지정되었을지도 몰랐을 것이다.
소록도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싶다면 국립소록도병원 봉사안내 페이지를 참고하자. 사이트에도 소개되어 있지만 병원 측에서는 2주 이상 진득이 눌러앉아 환자들과 교감을 쌓을 수 있는 사람을 선호한다.
4. 역사적 장소
아무래도 장소의 특성상 유적지가 많다. 물론 어디나 다 가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소록도 내의 한센인들이 고령인 점을 감안한다면 10년 ~ 15년 뒤 소록도는 "한센인 거주지로서의 소록도"가 아니라 "역사유적지"로 바뀔 가능성이 높다. 혹시라도 봉사활동 등의 목적으로 소록도에 방문하게 된다면 다음 장소들을 참고해 볼 것.- 국립소록도병원 한센병박물관: 2016년 5월 17일 소록도 자혜의원 개원 10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졌으며 7월에 정식으로 개관한 박물관으로, 한센병 자체를 다루는 박물관으로는 전세계에서 유일한 곳이다. 소록도의 역사와 자료들을 상당히 잘 모아둔 곳이다. 소록도에 방문한다면 반드시 들려보아야 하는 곳. 특히 남도의 찌는 더위와 맞닥뜨릴 때 딱히 쉴만한 장소가 없는 소록도 내에서는 안식처의 역할도 할 수 있도록 건물이 잘 설계되어 있다. 개관 시간은 매일 09:30∼16:30까지이며 매주 월요일과 공휴일은 휴관한다.
- 소록도 자료관: 일제강점기에 건립되었던 나환자 요양소와 부속건물들을 보존하고 관련 유물들을 전시한 곳으로 소록도와 한센인들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곳이다. 다만 박물관의 개관으로 이제는 그 위상이 조금씩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 양지회 기념관: 육영수 여사가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인 1974년 7월 15일 건립한 시설로 1973년 10월에 소록도 성실고등공민학교 학생 16명은 육영수 여사의 초청으로 청와대를 방문하였고 이후에도 육 여사는 원생들의 노후생활을 염려하여 그들에게 편안한 안식처를 마련해 주고자 기부금을 희사하였는데 이 기부금으로 양지회 기념관이 준공되었다. 양지회 기념관 앞에는 육 여사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원생들의 순수한 모금액으로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 소록도중앙공원: 1934년부터 환자 위안장으로 가꾸었던 산책지를 대유원지로 만들어 2년 뒤인 1936년 12월 1일 준공한 곳이다. 그냥 방문하면 굉장히 아름다운 곳이지만 공원 곳곳에 한센인들의 피와 눈물이 서린 곳이기에 가볍게 볼 수만은 없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 한하운 시인의 시비(詩碑)가 있는데 시비가 기록되어 있는 돌은 악명높은 스오 원장 당시 수간호사로 재직하며 한센인들을 혹독하게 괴롭힌 "사토" 간호사가 한센인들을 채찍으로 때려 가며 옮겨놓은 돌이다. 이곳 어르신들은 이 바위를 "사토한테 맞아죽으나, 옮기다 깔려서, 혹은 지쳐서 죽으나 어쨌든 갖다 놓기는 해야 겠으니 죽어도 놓고 죽자"던 의미에서 "죽어도 놓고" 바위라고 부른다. 이런 바위를 "한낱"[17] 시비 "따위"로 썼기에[18] 한센인 어르신들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 이런 역사적인 흔적이 공원 곳곳에 널려 있다.
- 소록도 해수욕장: 소록도가 평범한 섬이었다면 상당히 인기를 끌었을 곳으로, 민간인에게 개방된 지 얼마 되지 않는 곳이다. 진입로로부터 해수욕장까지 이어지는 길이 아름답고 경치가 뛰어난 데다 소나무 숲이 울창하고 모래가 고와서 이국적인 느낌도 조금 드는 곳이다. 사람이 많지 않아 썰렁하고 수심이 깊지 않아서 발 담그고 놀기에 좋다. 다만 섬 안에서 숙박은 금지되어 있으므로 저녁 6시 이전에는 반드시 육지로 나오거나 거금도로 들어갈 것.
- 수탄장(愁嘆場): 본래는 소록도 병원(당시 이름으로는 소록도 갱생원)의 직원지대와 한센인들이 생활하는 병사(病舍) 지대를 나누는 경계선이었고 1950년대 ~ 1960년대에는 철조망이 쳐져 있었던 곳이었다. 자녀들의 감염을 우려하여 병사지대의 부모들은 아이를 키울 수 없었고 감염되지 않은 가족과 이 선을 경계로 1달에 1번만 만나는 것이 허락되었다. 그래서 이 슬픈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이 "근심(愁)과 탄식(嘆)의 장소(場)"라고 하여 붙인 이름이 수탄장이다. 표지판 하나만 달랑 세워져 있어서 눈썰미가 좋지 않은 사람들은 그냥 휙 지나갈 수 있는 곳으로, 소록도 입구에 위치해 있다.
- 소록도 자혜의원 구 본관: 1916년에 세워진 병원의 본관 건물인데 본래는 T자형 건물이었다.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다. 병원 앞에 하나이 원장 송덕비가 세워져 있다. 소록도 내부 깊숙이 위치해 있어서 일반인들은 가 보기 쉽지 않고 딱히 볼만한 것도 있지는 않으나 역사적 의의가 있어서 한 번은 가볼만한 곳이다. 그런데 진짜 건물 하나만 달랑 있고 주변이 울창한 소나무로 가려져 있어서 가면 실망할 확률이 매우 높다. (…) 하나이 원장 송덕비는 한반도에 잔존하는 유일한 일본인의 송덕비이다.[19] 하나이 원장이 해왔던 많은 덕행을 기억한 환자들이 철거를 원하지 않았기에 해방 후에도 그대로 남았다.
- 순천교도소 소록지소: 정확한 명칭은 고흥 순천교도소 구 소록도지소 여사동(高興順天矯導所舊小鹿島支所女舍棟)으로, 소록도 지소에서 여성 한센인 수감자들을 가두던 곳이었다. 1935년에 세워졌고 1998년 재소자 감소로 인해 63년 만에 문을 닫았다. 일제강점기 당시 한센인들의 인권유린 현장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건물의 훼손은 심각한 상태. 2010년 8월 24일 등록문화재 제469호로 지정되었다.
4.1. 고흥 구 소록도갱생원 신사
대한민국 영토에 남아있는 마지막 일본식 신사이다.#!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소록도갱생원 신사#s-|]]번 문단을#!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if 문서명 = 문서명 != null ? 문서명 : calleeTitle
의 [[소록도갱생원 신사#|]] 부분을}}} 참고하십시오.4.2. 고흥 소록도 병사성당
| | ||||
| 658호 | ← | 659호 | → | 660호 |
| 간호교과서 | 고흥 소록도 병사성당 | 고흥 소록도 마리안느와 마가렛 사택 | ||
등록문화재 제659호 (2016년 6월 14일 지정)
소록도 거주 한센인들이 직접 공사에 참여하여 지은 벽돌조 성당 건축물로, 그들의 육체적·정신적 아픔의 치유를 위한 영적 장소가 되었던 건물이며 소록도라는 지역적 특징 속에서 한센인과 함께 한 역사적 가치가 있다.
국가유산청 - 국가유산 정보
4.3. 고흥 소록도 마리안느와 마가렛 사택
| | ||||
| 659호 | ← | 660호 | → | 661호 |
| 고흥 소록도 병사성당 | 고흥 소록도 마리안느와 마가렛 사택 | 의병장 유인석 심의 | ||
등록문화재 제660호 (2016년 6월 14일 지정)
40여 년간 한센인들에 대한 적극적인 의료 봉사활동을 하였던 마리안느와 마가렛이 거주했던 벽돌조 주택으로, 한센인들이 겪었던 아픔을 함께 나누었던 마리안느와 마가렛의 희생과 봉사의 상징적인 주택으로 역사적 가치가 있다.
국가유산청 - 국가유산 정보
5. 대중매체에서
- 에세이
- 천국의 하모니카 (김범석 저)
- 공연
- 시사/다큐멘터리
- PD수첩: 소록도의 외침 우리는 인간이 아니었다 (2001.7.3. MBC)
- 아, 소록도 (2001.12.19~20. 광주MBC): #1, #2
2002년 3월 14일 MBC에서도 전국방영. - 소록도, 그곳에서 희망을 보다 (2004.12.3. MBC)
- 100년의 참회록 (2009.4.23. KBS순천)
-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낙인 -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섬 (2025.04.03, SBS)
6. 여담
- 소록도는 '작은 사슴(小鹿)모양의 섬'이라는 뜻인데 이름값이라도 하듯 실제로 꽃사슴들이 서식한다. 섬의 상징성을 부각하고 투병 중인 한센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자 한 독지가가 1992년부터 꾸준히 방사한 것인데, 현재는 원래 취지와 달리 소록도의 골칫거리로 전략했다. 천적이 없는 환경에서 번식한 사슴들의 수가 40마리에서 230마리로 늘어났고, 대책 없이 늘어난 사슴들이 주민들의 텃밭을 망치거나 주변 식물들을 죄다 뜯어먹고 있기 때문이다.
- 섬 안쪽은 일반인 출입제한구역이기 때문에 인프라 개발 등이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래서 현재도 일제강점기 시대 소나무에서 송진을 약탈한 흔적과 일본식 가옥, 건물, 소록도갱생원 신사 등이 남아 있다.
7. 정치 성향
| 역대 대통령 선거 소록도 개표 결과 | |||
| <colbgcolor=#eeeeee,#353535> 진영 | 민주당계 정당 | 보수정당 | 투표수 |
| 후보 | 김영삼+김대중 | 노태우 | 투표율 |
| 13대 (도양12, 13투) | 296 (17.13%) | 1,428 (82.64%) | 1,780 |
| ◁ 65.51%p ▶ | 96.5% | ||
| 후보 | 김대중 | 김영삼 | 투표율 |
| 14대 (도양12, 13투) | 137 (11.67%) | 1,019 (86.80%) | 1,200 |
| ◁ 75.13%p ▶ | 95.4% | ||
| 후보 | 김대중 | 이회창 | 투표율 |
| 15대 (도양9투) | 220 (28.17%) | 489 (62.61%) | 811 |
| ◁ 34.44%p ▶ | 84.3% | ||
| 후보 | 노무현 | 이회창 | 투표율 |
| 16대 (도양9투) | 212 (39.11%) | 318 (58.67%) | 554 |
| ◁ 19.56%p ▶ | 84.6% | ||
| 후보 | 정동영 | 이명박 | 투표율 |
| 17대 (도양7투) | 182 (40.18%) | 196 (43.27%) | 460 |
| ◁ 3.09%p ▶ | 81.6% | ||
| 후보 | 문재인 | 박근혜 | 투표율 |
| 18대 (도양7투) | 158 (36.74%) | 270 (62.79%) | 431 |
| ◁ 26.05%p ▶ | 85.5% | ||
| 후보 | 문재인 | 홍준표 | 투표율 |
| 19대 (도양6투)[20] | 87 (27.02%) | 117 (36.34%) | 327 |
| ◁ 9.32%p ▶ | 78.42% | ||
| 후보 | 이재명 | 윤석열 | 투표율 |
| 20대 (도양6투) | 130 (37.57%) | 207 (59.83%) | 355 |
| ◁ 22.26%p ▶ | 74.42% | ||
| 후보 | 이재명 | 김문수 | 투표율 |
| 21대 (도양4투) | 108 (44.95%) | 118 (51.21%) | 239 |
| ◁ 6.26%p ▶ | 67.70% | ||
그래서 거주자들이 투표할 수 있는 도양읍 일부 투표소는 민주당계 정당보다 보수정당 득표율이 훨씬 더 높다. 실제로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민주정의당 노태우 표가 김대중의 표보다 훨씬 많이 나왔으며 제18대 대통령 선거, 제19대 대통령 선거,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호남권에서 보수정당 득표수가 많은 투표소가 유일하게 이곳뿐이었다. 최고 득표율은 민주계 출신인 김영삼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기도 하지만, 김영삼이 최고 득표율을 올린 시점은 이미 3당 합당 이후 보수 계열 정당으로 넘어간 이후의 일이니 그럴 만도 한 부분이다.
재밌게도 보수정당으로의 정권교체가 확실했던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명박 후보가 이기긴 했으나 정동영 후보와의 득표차가 고작 14표에 불과했으며, 이는 2026년 현재도 해당 지역 투표소에서 기록된 보수 정당 후보와 민주당계 정당 후보 간의 득표율 최소 격차이기도 하다. 이는 앞서 언급된 육영수-박근혜에 대한 지지와도 관련이 있는데, 이명박과 박근혜의 관계가 매우 나빠 박근혜를 지지하는 노인들이 이명박 대신 이회창을 찍으면서 보수표가 분산되었기 때문이라는 관측이 있다.[22]
아울러 1980년대와 비교하면 갈수록 보수세가 약해지는 모습도 눈에 띈다. 18대 대선에서는 그 박근혜가 나왔음에도 득표율이 60%대에 머물렀으며, 정권 교체가 확실시되던 19대 대선에서는 홍준표 후보와 2위 안철수 후보[23]의 격차가 매우 적었던 데다 여기에 문재인 후보의 득표율까지 합치면 범야권에서 훨씬 높은 득표율을 기록한 셈이 됐다.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에선 더불어시민당 + 민생당 123표, 미래한국당 101표로 민주당계 정당이 앞섰다. 22대 총선에서는 도양4에서 투표자 255명 중에서 더불어민주연합 + 조국혁신당 84표, 국민의미래 + 자유통일당이 127표를 기록하면서 보수정당이 다시 앞섰다. 개혁신당은 단 3표로, 새로운미래와 똑같이 최하위를 찍었다. 신기하게도 극우정당인 자유통일당이 16표, 진보정당인 녹색정의당이 7표가 나왔다. 심지어, 이낙연이 전라남도지사였던 새로운미래는 더 큰 굴욕인 셈.
제21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재명 후보가 상당히 선전하여 민주당계 정당 대선 후보 최고 득표율을 올렸다. 이는 상술했듯 점점 약해지는 보수세와 해당 대선이 탄핵 정국으로 치러지는 선거인 것도 있지만, 이재명 후보의 부인인 김혜경 여사가 소록도를 방문한 것 역시 크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24] # 당선/취임 이후인 2025년 6월 25일에도 이재명 대통령이 비공식적으로 소록도를 찾았다고 한다.
개표 결과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통계시스템을 기초로 작성했다.
8. 관련 문서
[1] 실제로 1962년 이전까지는 거금도가 속한 금산면 관할이었다.[2] 그러나 이듬해에 국권피탈을 당하면서 이 사업은 조선총독부에서 승계하여 진행했다. 이렇게 전국에 세워진 자혜의원은 총 19개소였다.[3] 일본에서 1907년 3월 19일 나예방법(癩豫防法)을 제정하여 큰 효과를 보았기 때문에 이런 방법을 건의한 것이다.[4] 일본식 의복, 다다미를 비롯한 일본식 주거문화, 일본 음식 등[5] 의사가 사명감을 가지고 일한다고해도, 시설이 열악한 것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도 가봉의 정글 지대 한복판에 병원을 차린 지라서, 유지비 절감을 위해 병원의 보수나 신축 공사에 간호사들과 경증 환자들까지 동원해야했다.[6] 해당 사건은 2003년 10월 27일 SBS <백만불 미스터리>에 소개되었다.[7] 정확하게는 당시 일제가 만들게 한 송탄유(松炭油)였다. 전쟁 물자가 부족했던 일제는 소나무를 베어 숯을 만들고 그 숯에서 기름을 짜내 비행기나 탱크를 돌리려고 했는데 소록도에도 이 송탄유가 제법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8] 혹은 퇴소를 해야 했는데, 당시 병원을 나선 한센병 환자에게 먹고 살 방도가 없었기에 사실상 피할 수 없었다.[9] 조창원 전 원장은 2017년 한센인들을 상대로 자행된 단종수술에 대한 국가배상이 확정되는 것을 지켜보고 2018년 향년 92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10] 당시 육영수는 소록도뿐만 아니라 전국의 한센인 마을을 방문하여 위로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기와 전화를 지원하고 씨돼지를 보급하여 한센인들의 치료와 자활을 지원하였다. 이런 이유로 지금도 한센인들은 육영수의 기일이면 추모식을 연다고 한다.[11] 여담으로 당시 정부는 소록도에 앞서 진행했던 광주 방문에 대해서도 두려워했다. 방한 당시가 하필이면 5.18 민주화운동 이후 불과 4년밖에 되지 않은 1984년 5월이었고 교황이 광주공항에 도착한 이후 바로 무등경기장으로 가지 않고 5.18 당시 최후의 항쟁지였던 금남로와 옛 전라남도청 앞을 지나가겠다고 공표했기 때문이었다. 정부가 이 루트를 특히나 두려워했던 것은 혹시나 교황의 방문이 상처 받은 광주시민들을 자극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교황의 광주 방문 당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교황도 광주무등경기장에서 미사를 봉헌한 뒤 소록도로 향했다.[12] 처음 언론에서 수녀라고 오보해서 지금도 수녀로 아는 사람들이 있지만 정식 수도자는 아니고 재속회원이다. 다만, 수녀 이상으로 거룩한 삶을 살았고, 후술하는 바와 같이 한센인들에게 '수녀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린 것도 사실이다.[13] 오스트리아 시간으로 2023년 9월 29일 오후 3시 15분 경에 수술을 받다가 세상을 떠났다.[14] 두 사람의 신분에 대해 약간의 혼선이 있는데 재속회원으로 수녀(수도자)는 아니고 가톨릭 신자로서 성자처럼 봉사했기 때문에 '수녀님'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마리안느와 마가렛의 삶' 영화와 책으로[15] 수도회 소속 재속회원으로 수녀가 아니었던 만큼 이들이 고국인 오스트리아로 돌아가서의 생활은 40여 년 가까이 얼굴도 보지 못한 친척들에게 신세를 져야 하는 처지였다. 그럼에도 소록도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오스트리아로 갔다고 한다. 오스트리아로 돌아간 후 최저 수준의 연금으로 생활해야 하는 상황에 마리안느는 암에, 마가렛은 치매에 걸리기까지 했다. 다행히 구본무 LG그룹 회장이 두 간호사가 사망할 때까지 매달 생활비를 지급하도록 조치했다고. 두 사람은 큰돈이라며 고사했지만 구본무 회장측에서 계속 설득해서 받아들였다고 한다.[16] 27번 국도 서쪽으로는 중앙공원과 박물관, 국도 동쪽으로는 해수욕장이 외지인에게 개방돼 있다.[17] 실제 한센인 어르신의 표현이다.[18] 한하운은 출소 이후 한센인들을 시켜셔 앵벌이를 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평가가 좋은 편이 아니다.[19] 물론 다른 비들도 많았지만 해방 후 다 부서졌고 어쩌다 살아남은 것들도 뭔지도 모른 채 기둥이나 주춧돌 같은 걸로 사용되었다. 참고로 아미동 비석마을로 가보면 진짜 기둥이나 주춧돌로 쓰인 일본인 묘비를 볼 수 있다.[20] 여기에서 문재인 후보는 안철수 후보(111표, 34.47%)에도 밀리며 3위를 기록했다.[21] 실제로 소록도 한센인들에게서 쉽게 들을 수 있는 사투리는 아이러니하게도 동남 방언이다. 물론 전라도 사투리가 다수이긴 하지만 기대하지 않았던 경상도 사투리가 꽤 자주 들린다는 것이 이채로운데, 이는 섬 특성상 가능한 일이다.[22] 그 영향으로 친이와 친박도 윤석열이라는 새로운 구심점이 나타날 때까지는 오랫농안 서로 원수지간이었다. 지금은 친윤으로 대부분 흡수되었지만, 윤석열이 박근혜의 구속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적이 있다보니 서병수, 김용판, 김도읍 등 옛 친박 중에는 지금도 비윤이 남아 있다.[23] 현재는 보수 정당에서 활동하고 있으나 당시만 하더라도 새정치민주연합에서 분당해 나온 직후라 민주당계 계열 출신 정치인이라는 이미지가 더 강했다. 아울러 소록도도 보수 강세 지역이라고는 해도 엄연히 호남에 속하는 만큼, 20대 총선부터 시작된 국민의당의 호남 열풍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점쳐볼 수 있다.[24] 특히나, 한센인 생활동을 방문하려고 했는데, 그간 수많은 정치인들이 소록도를 갔지만, 한센인 생활동을 가보려고 하는 건 역대 최초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