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椵[1]島 / Ka Island
1. 개요
평안북도 철산군 백량면 황해상에 위치한 섬.2. 상세
현재 행정구역상 가도리이다.[2] 철산반도 본토와 2km 떨어져 있으며, 남동쪽 가까이에 탄도가 있다. 서한다도해(西韓多島海)의 섬들 중에서 선천군의 신미도에 이어 두번째로 큰 섬이다.일명 가죽나무섬이라고 하여 피도(皮島)라고도 하며, 면적 19.2km², 해안선의 길이는 42.94km이다. 최고봉인 연대봉(333m)을 비롯한 여러 개의 구릉지가 분포하며, 소나무가 잘 자란다. 봄, 여름에 회유하는 난류성 어족이 풍부하여 좋은 어장을 이룬다.
조선 시대에는 가도장이라는 목장이 있어 감독관을 두고 말을 사육하였는데 목장의 둘레가 41리에 이르렀다고 한다.
한국 전쟁 당시 유엔군과 국군이 점령하였으나 휴전협정 체결 시 관리의 어려움 등으로 인해 북한에 양보하였다.
3. 여담
이익의 《성호사설》제2권 천지문(天地門)에는 가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가도(椵島)는 가죽섬[皮島]이다. 가수(椵樹)란 우리 말의 가죽나무다. 지금은 삼화현(三和縣)에 속하며 50리 밖의 바닷 속에 있다. 고려 원종 10년에 임연이 왕을 쫓아내고 안경공(安慶公) 창(淐)을 세웠을 때에 최탄(崔坦), 한신(韓愼), 이연령(李延齡), 계문비(桂文庇), 현효철(玄孝哲) 등이 임연을 토벌한다는 명목 아래 무리들을 모집하여 들어가서 섬의 병영을 점령하고 분사어사(分司御史) 심원준(沈元濬)과 감창(監倉) 박수혁(朴守奕)과 경별초(京別抄) 등을 죽이고 몽고에 가서 허위로 보고하기를, “고려에서 북계(北界) 모든 성에 있는 사람을 모조리 죽이려 한다.” 하였다.
몽고의 황제는 그에게 금패(金牌)를 주고 조서를 내리어 그곳을 몽고에 편입시키고 명칭을 동녕부(東寧府)라 하고 자비령(慈悲嶺)을 경계선으로 확정하고 탄(坦)을 총관(總管)에 임명하고 군대 3천 명을 서경(西京)에 보냈다. 뒤에 왕이 복위하여 여러 성을 반환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다가 16년에 이르러 황제는 동녕부를 폐지하고 서북 지방의 여러 성을 모두 반환하고 탄은 처형하였다.
이곳은 또 근세에 모문룡이 점령했던 땅이다. 고려 왕조부터 병영을 설치했다가 반란군들에게 점거된 곳이다. 지금 《여지승람》에는 그 전말을 기술했어야 할 터인데도 빠져 있기 때문에 일부러 수록한다.
몽고의 황제는 그에게 금패(金牌)를 주고 조서를 내리어 그곳을 몽고에 편입시키고 명칭을 동녕부(東寧府)라 하고 자비령(慈悲嶺)을 경계선으로 확정하고 탄(坦)을 총관(總管)에 임명하고 군대 3천 명을 서경(西京)에 보냈다. 뒤에 왕이 복위하여 여러 성을 반환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다가 16년에 이르러 황제는 동녕부를 폐지하고 서북 지방의 여러 성을 모두 반환하고 탄은 처형하였다.
이곳은 또 근세에 모문룡이 점령했던 땅이다. 고려 왕조부터 병영을 설치했다가 반란군들에게 점거된 곳이다. 지금 《여지승람》에는 그 전말을 기술했어야 할 터인데도 빠져 있기 때문에 일부러 수록한다.
1622년 14년 광해군은 모문룡을 가도에 머물게 했는데, 그는 이곳에 진을 치고 동강진(東江鎭)이라고 이름짓고, 명군과 난민 1만여 명을 받아들여 이곳을 기지화 시켰다. 그는 조선으로부터 식량을 지원받고, 명으로부터 무기를 지원받아 후금의 후방을 교란한다. 결국 가도로부터 발생한 금의 후방 불안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가장 큰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가도의 동강진 무너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