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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18 06:25:43

선갑도


파일:인천광역시 휘장_White.svg 인천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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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정전협정에 의해 북한의 영역으로 규정됐으나, 국토등기에는 남한 영역으로 등록되어 있다. }}}}}}}}}

1. 개요2. 선갑도 부대3. 여담

1. 개요

서해에 존재하는 화산으로 인천광역시 옹진군 자월면에 속한다. 다만 이곳과 가장 가까운 육지는 충청남도 서산시태안군이다. 6.25 전쟁 당시 미군 부대가 주둔 했었다. 이후에 선갑도 부대라는 대한민국 육군 산하의 특수 부대가 주둔하기도 했으나 1974년에 철수했다. 면적은 3.65ha로 국내 섬중에서 94번로 큰 섬이며, 섬 전체는 사유지이다. 최근에는 4명이 주민등록 전입신고를 경료하고 실제 거주하고 있다. 섬의 최고봉은 선갑산으로 해발 352m이다. 섬의 서쪽 안쪽은 작은 만이 위치하는데, 이 만은 과거 화산활동으로 생긴 분화구라 추정하나 분명치 아니하다. 때문에 주상절리 등 화산활동으로 생긴 지질지형이 발달되어 있다.

2. 선갑도 부대

1968년 1.21 사태 이후 우후죽순으로 창설된 보복 침투부대들 중 육군 소속으로, 선갑도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다. 부대 구성은 크게 기간요원(교관기간병 용도의 하사)과 교도소 모병으로 선발한 이들로 나뉘는데, 모병 기준은 다음과 같았다.
* 가족이 없는 자
* 군법으로 처벌받아 안양교도소에 수감된 자[1]
즉, 자신이 죽어도 울어주거나 항의할 가족이 없고 군복무 중 상관살해나 강력범죄를 저질러 장기 혹은 무기수가 되어 미래가 없는 자들을 따로 불러내 북파 임무까지 완수 후 생환하면 사면 및 3천만원을 주겠다는 제안을 개개인에게 했고, 그렇게 12명이 선갑도에서 체력과 인내심을 시험받았다. 그리고는 북파시 교관과 기간병, 죄수들이 각각의 팀들로 기능할 수 있게 훈련받았다.

하지만 7.4 남북 공동 성명의 화해 분위기를 전후해 각지의 보복부대들에 대한 관심이 식어버리고, 실미도 사건까지 벌어지자 각 보복부대들에 대한 인식은 잠재적 시한폭탄으로 추락,[2] 그렇게 선갑도 부대도 1974년 비밀리에 해단식과 비밀유지각서를 쓰고 신속히 해체되었다.

게다가 북파를 하지 못하게 되었더라도 이미 위와 같은 약속을 한 상태였기에 이들과 행정부를 적절히 달래고 무마하는 것도 만만찮았다. 일단 대통령 사면장을 보여주며 생활 태도를 평가해 감형시켜 주겠다며 달랜 뒤[3] 대중과 언론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나씩 하나씩 행정 절차를 마치고 사회로 내보냈다. 하지만 정식 사면이 아니었기에 나중에 알고 보니 그동안의 전과들이 말소된 게 아닌 만기출소로 대체되었고, 2명의 무기수들은 수년간의 형기로 감형돼 1976년 4월이 되어서야 출소했다.[4]

그리고 세월이 흘러 실미도의 684부대를 소재로 한 영화 실미도에서 부대장이 직접 교도소를 돌며 모병한 것[5]과 당시 부대 사정에 대한 각종 폭로가 잇따르자 덩달아 선갑도 부대에 대한 관심도 부각되었다. 하지만 부대원들 스스로가 장기 및 무기수였던 사실을 부끄럽게 여기고, 당시 악몽같던 시절과 비밀유지서약을 깼다가 보복당할 수도 있다는 PTSD[6], 크든 작든 사면받아 사회로 복귀한 것 자체만으로 만족해 덮어두려고 하기에 기간요원이나 일부 죄수병에 의해서만 당시 상황이 폭로될 뿐이다. 신동아 인터뷰

3. 여담


[1] 당시는 군 재판소에 회부되어 6년 이상의 금고형을 선고받은 자는 국군교도소가 아니라 군번을 말소시키고 안양교도소에 수감하였다.[2] 후술할 신동아 인터뷰에 따르면 68년 대원 하나가 임무 투입이라는 명목으로 사라진 뒤, 69년에도 하나가 사라졌고, 70년에도 아무리 인내해도 북파될 기미가 없자 도끼를 들고 교관을 해치려던 대원 하나가 사라졌다. 이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들은 인천의 안가로 이송돼 전화선으로 교살당한 뒤 화장되어 인근 야산에 뿌려졌다고 한다. 게다가 북파가 요원해지자 죄수들 뿐만 아니라 기간요원들도 기강이 해이해져 하사관이 장교에게 대드는가 하면 인천에서도 시비가 걸려 해병 헌병대를 습격하는 등 어쨌든 신속히 해체되지 않았다면 이들도 제2의 실미도 사건을 일으켰을 것으로 보인다.[3] 어찌되었건 사회로 내보내는 건 기정사실이었기에, 다들 상당히 유순해졌다고 한다.[4] 게다가 일 처리가 이러다 보니 약속했던 거액도 개개인에게 온전히 지급되지 않았다.[5] 다만 실제로는 물색관이 하층민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거액을 미끼로 모병했다.[6] 2004년 신동아 인터뷰에 따르면 이들은 수십년 간 북파되어 김일성에게 쫓기는 악몽과, 입막음을 위해 암살당할 수 있다는 트라우마에 시달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