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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2 20:18:27

문장필

1. 개요2. 생애3. 가족관계


文章弼
(? ~ 1190)

1. 개요

고려의 무신. 강릉군 출신으로 강릉 문씨의 시조이다.

2. 생애

친가와 외가 양쪽에서 무관을 지냈기에 문장필 역시 무관의 길을 택했다. 음서로 동정에 임명됐다. 인종 4년(1126) 이자겸의 난 때 공을 세워 임시로 대정(隊正, 정9품) 직급을 받았다. 견룡반(牽龍班), 즉 용호군에 속해 태자[1]가 있는 동궁(東宮)을 시위했으며 산원(散員, 정8품)으로 승진했다.

의종 24년(1170) 무신정변이 일어난 뒤에는 중랑장(정5품)으로 승진하고 상서공부낭중 등을 지냈으며 곧 왕태자부지유로 관직이 바뀌었다. 무신이 정권을 잡은 뒤로 각지에서 반란이 빈발했는데, 금오위 정용(精勇)의 임시 장군(정4품) 겸 어사잡단, 부사 직함을 달고 본군(本軍)을 통솔해 북쪽 국경을 지켰다. 이후 창주(昌州)의 분도장군을 지냈으며 이 때 비로소 장군 직급에 올랐다. 한편 중앙 관청의 승(丞)을 지내며 사회 기강을 바로잡기도 했다.

조위총의 난 토벌군
원수(元帥)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윤인첨
부원수(副元帥)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기탁성
<rowcolor=#fff> 중군(中軍)
병마사(兵馬使)
좌군(左軍)
병마사(兵馬使)
우군(右軍)
병마사(兵馬使)
전군(前軍)
병마사(兵馬使)
후군(後軍)
병마사(兵馬使)
상장군(上將軍)
최충렬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진준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경진
상장군(上將軍)
조언
상장군(上將軍)
이제황
<rowcolor=#fff> 지병마사(知兵馬使) 지병마사(知兵馬使) 지병마사(知兵馬使)
섭대장군(攝大將軍)
정균
섭대장군(攝大將軍)
문장필
사재경(司宰卿)
하사청
기타 지휘관
동로 가발 병마부사(東路加發兵馬副使) → 후군 총관사(後軍摠管使)
두경승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지병마사(知兵馬事)
이의민




명종 4년(1174) 서경에서 조위총의 난이 일어났다. 11월, 섭대장군(종3품) 문장필은 지병마사로서 원수 윤인첨, 부원수 기탁성 등을 따라 반란 진압에 참여했다. 명종 6년(1176) 반란을 종식시켰고, 정3품 문관직인 우승선에 임명됐다. 이 해 9월에 양온령동정 노약순, 주사동정 한수도가 망이를 끌어들여 반란을 일으키려다가 노약순의 형 약충이 이를 알게 되고 동생에게 형장을 채워 개경으로 보냈다. 문장필은 승선으로서 노약순 등을 국문했는데, 무신인 문장필 앞에서 노약순은
"지금 임금시해한 도적들이 당도(當途)하여 대관이 되었으니, 우리들은 분하고 화가 나는 것을 참을 수 없어 외적을 끌어들이고 그 무리를 베어버리려고 했다."[2]
라며 왕을 시해하고 권력을 잡은 무신들을 비난했다. 명종은 노약순이 의로운 행동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무신 기구인 중방에서는 엄벌을 요구했고, 노약순 등은 자형을 당했다.

이듬해 명종 7년(1177) 5월 조위총의 잔당이 서경유수 판관 박녕을 죽이고 재차 반란을 일으키니, 문장필은 장군으로 종군해 대장군 이경백, 낭중 박소 등을 따라 서경을 진압했다.

명종 9년(1179) 송유인문극겸, 한문준과 불화하자 왕명을 받고 그를 타일렀다. 곧 좌승선에 올랐다. 명종 11년(1181) 왕이 연등회를 크게 열고 밤새 술을 마시며 놀았는데, 크게 취한 왕이 춤을 추려고 하자 문장필이 왕을 말렸다. 같은 해 추밀원지주사 좌산기상시에 임명됐다. 이듬해 추밀원부사로 승진했고, 또 그 다음해에 동지추밀원사 어사대부에 올랐다.

명종 14년(1184) 8월, 군졸 출신으로 문하시랑평장사에 오른 이광정이 별의 위치 변화를 핑계로 사직을 청할 때 문장필이 함께했다. 별의 위치가 원래대로 돌아갔다며 10월에 복직했는데, 그럼에도 재액을 당할 것을 걱정해 일부러 뒤에 아전이 따라오게 했다. 12월 참지정사에 올랐다. 명종 15년(1185), 병마사를 지낼 때 백성들을 착취한 전적이 있는 정세유가 형부상서에 임명되자 참지정사 상장군 문장필이 여러 장군을 이끌고 대궐에서 그를 탄핵했다. 문장필은 정세유를 먼 섬으로 유배할 것을 청했고, 명종이 이를 받아들이니 나라 사람들이 기뻐했다.

명종 20년(1190) 병에 들어 죽었으며 대부, 개부의동삼사에 추증되고 시호를 받았다.

나이를 보면 알겠지만 최소 1110년대 생으로 추정할 수 있다. 즉, 정중부, 이소응으로 대표되는 주요 무신정변 노장들과 같은 세대라는 것이다. 그런 그가 무신정변 때 까지 하급직에 있었다는 건 꽤 놀라운 일이다. 다른 비슷한 나이대의 무신들이 상장군, 대장군, 장군을 달고 있었는데 무신정변 이후에 중랑장이 되었기 때문이다.[3]

3. 가족관계

증조부는 검교상장군 행홍위위섭장군, 조부 문영은 행중랑장, 부친은 수사공 상서복야로 용호군에서 무관직을 지냈다. 외조부 윤선(尹先)은 중대광 병부상서 상장군을 지냈다. 문자수(文子脩), 문부(文富), 문의혁(文義赫) 등 다섯 아들을 뒀다.


[1] 인종의 아들 의종 또는 의종의 아들 효령태자.[2] 今, 弑君之賊當途爲大官, 吾輩不勝憤激, 欲引外賊, 與之誅翦.[3] 다만 이 시기를 다룬 유일한 드라마인 무인시대에서는 이후에도 생존해 최충헌에 의해 죽은 것으로 각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