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위 지도자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color: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00b4b4> 초대 묘청 | 제2대 조광 |
고려 국왕 |
1. 개요
趙匡(? ~ 1136년)
묘청의 난의 가담자.
2. 생애
서경 세력이 묘청을 앞세워 서경 천도 운동을 벌이다가 개경 세력의 반대로 실패하자 1135년 정월에 반란을 일으켜 대위국을 세웠을 때 조광도 참가했지만, 조정에서 김부식이 이끄는 관군을 보내 서경을 공격하자 조광 등은 저항할 수 없음을 알고 항복하려 했고, 김부식에게 서너 번 항복을 권유받고도 죄가 무거운 것을 알고 주저해[1]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이후 그나마 죄를 면하기 위해 묘청, 유참, 유호[2]를 다 죽이고 이들의 목을 보내 협상을 시도했다. 김부식은 대장의 목을 베어 공이 크니 살려줄 것을 권유해 일단 인종은 따르긴 했지만, 김부식 외의 다른 세력들이 조광이 사신으로 파견한 윤첨을 비롯한 항장들을 하옥시키고 죽이자 어차피 항복해도 목이 달아나는 건 당연한 수순이 돼버린 것을 직감한 조광은 다시 서경에서 항전을 시작했다.
이후 김부식의 지구전 전략에 의해 1년 2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항전을 지속했으나, 고립된 채로 계속 있으니 식량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사기가 떨어지고 탈출하는 이들도 속출했다. 이를 본 김부식이 총공격을 위해 토산을 쌓아올리자 조광도 성을 얼른 더 높이 쌓아올리려 했다.
그러나 이 틈을 타 마침내 늦은 밤 관군이 총공격을 가해왔고, 결국 동이 틀 무렵에 성문이 뚫리며 조광은 가족들과 함께 분신자살을 택해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