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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2 23:28:18

연헌성

연헌성
국적 고구려
당 시호 변국 장공(卞國 庄公)
이름 연헌성(淵獻誠)
헌성(獻誠)[1]
이명 천헌성(泉獻誠)
아들 연현은, 연현정, 연현일
아버지 연남생
형제 연헌충
묘지 ? → 당 망산(芒山)
생몰연도 651 ~ 692

1. 개요2. 생애
2.1. 고구려에서 지낸 삶2.2. 당나라에서 지낸 삶
3. 기타4. 가족5. 묘지명6.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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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논하여 말합니다:
...남생, 헌성은 비록 당실(唐室)에 명성을 알렸지만, 본국(本國)에서 말할 땐 반인자(叛人者)라 불려지는 걸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 삼국사기 개소문 열전 발췌. 저자 김부식이 남생 헌성 부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고구려 말기의 귀족.

고구려 말기의 실권자였던 연개소문의 손자이자 연남생의 아들이다. 아버지 연남생과 함께 고구려를 배반하고 당나라에 항복해 고구려의 멸망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고구려 멸망 후에는 당나라에서 공을 인정받아 높은 작위에 올랐다.

2. 생애

2.1. 고구려에서 지낸 삶

헌성의 고구려 관직
고구려 관등 선인(先人)
651년(보장왕 10), 당시 고구려의 실권자였던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맏아들 연남생의 아들로 태어났다.

9살 때 관등 '선인(先人)'에 봉해졌다. 665년, 고구려가 할아버지인 연개소문이 죽자 아버지 연남생이 대막리지의 지위를 잇게 되었다.

대막리지가 된 연남생은 이듬해에 지방의 여러 성을 순시하기 위해 수도를 비우게 되었다. 묘지명에 따르면 연헌성도 아버지를 따라 나갔다.

그러나 연남생은 수도에 남기고 온 동생들인 연남건, 연남산을 의심하여 수도에 밀정을 파견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연남건, 연남산은 형이 자신들을 해치려 한다고 생각하여 정변을 일으켰고, 곧 수도를 장악하였다.

이때 연헌성은 숙부들의 손에 형인 연헌충이 살해당하는 참변을 겪었다. 본인 묘지명엔 당시 연헌성의 나이는 16살이었다고 한다.

지방에 나가 있던 연남생은 수도 평양성이 동생들에게 장악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고구려의 옛 수도인 국내성에 숨었다. 이때 연헌성은 아버지의 명에 따라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구원을 청하게 되었다.

당고종은 당나라에 도착한 연헌성을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에 임명하였으며, 수레와 말, 비단, 보도(寶刀) 등을 주어 국내성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666년, 연헌성은 아버지 연남생과 함께 당나라에 투항하게 되었다.

묘지명은 연헌성이 당 투항을 주도했다고 한다. 정변이 터지자 '국내고도성(國內故都城)'[2]에 숨자고 한 것도 연헌성의 아이디어였다.

연남생 연헌성 부자는 여러 추장(酋長), 이장(夷長), 수령(首領)들을 데리고 국내성으로 갔다.[3]

다들 혼란스러워 하고 누구는 맞서 싸우자고 주장했다. 헌성은 홀로 나서서 아버지에게 말하니:
지금 사(使)를 보내 조한(朝漢)[4]하여 성심껏 대하면, 국가(國家)대인(大人)이 올 것이라는 걸 알고 분명 기뻐하며 받아드릴 겁니다.

그리하여 병마(兵馬)를 청해 합쳐 토벌하는 것이 만전(萬全)하며 결승(決勝)할 계(計)입니다.
- 본인 묘지명 중 발췌. 당에 항복하자고 건의하고 있다.

이 말을 들은 남생은 제이장(諸夷長)[5]에게:
헌성(獻誠)의 언(言)은 심히 가택(可擇)하다.
- 천헌성 묘지명 중 발췌. 헌성에게 동의하다.

그리하여 먼저 수령(首領) 염유(冉有)[6]를 보낸 뒤, 연헌성 본인이 직접 가 당고종으로부터 보라색 관복과 금으로 만든 허리띠를 받았다. 묘지명은 연헌성이 당에서 받은 대우가 위나라 허저과 같았다고 한다.

당나라에 투항한 연남생 덕분에 당고종은 고구려 조정과 군사들의 허실을 잘 알 수 있었고, 이후 연남생을 앞잡이로 삼아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결국 668년에 고구려는 평양성함락되어 멸망하였다.

2.2. 당나라에서 지낸 삶

헌성의 당 관직
당 작위 변국공(卞國公)[7][8]
당 훈위 상주국(上柱國)
당 관직 우무위 장군(右武衛 將軍)
위위정경(衛尉正卿)
운휘장군(雲麾將軍)
우위 대장군 겸 우림위(右衛 大將軍 兼 羽林衛)
원외 치동정원(員外 置同正員)
우우림위 상하(右羽林衛 上下)
신무군 대총관(神武軍 大摠管)
용수도 대총관(龍水道 大摠管)
좌위대장군(左衛大將軍)[9]
우우림위 대장군(右羽林衛 大將軍)[10]
당 검교직 검교 천추자 내사(檢校 天樞子 來使)[11]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로 연헌성은 아버지를 따라 당나라의 수도 장안으로 들어가서 당나라의 이민족 귀족이 되었다.

본인 묘지명엔 668년에 끝난 평양성 전투과 관련된 서술은 전혀 없다. 갑자기 679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넘어간다. 아버지가 죽자 연헌성은 엄청나게 슬퍼하며 며칠동안 음식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불쌍하게 여긴 연헌성의 '조모(祖母)'[12]는 손자가 밥을 먹지 않으면 본인도 먹지 않겠다면서 연헌성에게 슬픔을 견디라고 부탁한다.

679년 9월 당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양군(襄軍)'을 이끌고 진압에 참가했다고 한다. 연남생의 시호와 같은 이름을 가진 이 양군은 아마 연남생 연헌성 부자의 사병으로 보인다.

682년 조모가 죽자 관직을 사양하고 물러나지만 곧 다시 복직했다.

주나라 측천무후 천수[13] 연간에는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 겸 우림위(羽林衛) 벼슬을 지내고 곧이어 좌위대장군(左衛大將軍)으로 옮긴다.

그러던 어느 날, 측천무후가 금과 예물을 상품으로 내걸고 문무관료들 중에서 활을 잘 쏘는 사람 다섯 명을 고르도록 하였다. 이때 내사(內史) 장관보(張光輔)가 연헌성에게 먼저 쏘기를 양보하여 첫 번째로 활을 쏘게 되었다.

그러나 연헌성은 뒤에 있는 우옥검위대장군(右玉鈐衛大將軍) 설돌마지(薛咄摩支)에게 양보했고, 설돌마지는 다시 연헌성에게 양보하였다.

이렇게 엎치락뒤치락하며 순서를 미루다가 연헌성이 측천무후에게 "활을 잘 쏘는 사람 중에서 한인이 아닌 사람이 많으니 당나라 관인들이 활 쏘는 것을 수치로 여길 것 같아 두렵습니다."라며 활쏘기를 그만둘 것을 청하였다. 측천무후는 연헌성의 의견을 기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측천무후 시기 형옥(刑獄)[14] 벼슬을 지내며 위세를 떨치던 내준신(來俊臣)이라는 자가 있었다.[15] 하루는 내준신이 연헌성에게 뇌물을 요구하였으나, 연헌성은 응하지 않았다. 잔인한 성격의 내준신은 이에 앙심을 품고 연헌성이 모반을 꾀했다고 모함하였다.

692년, 결국 연헌성은 반역자라는 누명을 쓴채로 목이 매이는 형벌을 받아 끔살당하고 말았다. 그의 나이 42살일 때였다.

이후 반역자로서 어딘가에 매장된다.

이후 연헌성에게 모함을 씌워 죽인 내준신이 그 죄가 드러나 697년 처형되어 죽게 되었고,[16] 측천무후도 연헌성이 억울하게 죽었음을 알고 우우림위대장군(右羽林衛大將軍)을 추증하였으며, 예를 갖추어 아버지가 묻힌 망산(芒山)에 다시 장사지내도록 하였다.

사후 신분이 회복된 뒤 '장공(庄公)'이란 시호가 내려진 듯 하다. 본인의 묘지명엔 없지만 손자 연비의 묘지명에 언급된다.

3. 기타

4. 가족

할아버지는 연개소문, 할머니는 존재가 언급된다.

아버지는 연남생, 어머니는 기록이 전무하다.

작은아버지 연남산은 죽을 때까지 장안 근처에서 살며 관리 생활을 했다. 장안서 남생 헌성 부자와 계속 마주쳤을텐데 서로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의문이다.

형으로 연헌충이 있다. 형제의 이름에서 돌림자를 제외한 글자를 합치면 충성(忠誠)이 된다.

사촌으로 작은아버지 연남산의 아들 연광부가 있다. 두 사람은 장안에서 계속 마주쳤을 가능성이 있다.

아들로 연현은(淵玄隱), 연현정(淵玄靜), 연현일(淵玄逸)이 있다.

손자인 연비(淵毖)가 있다. 손자의 묘지명에서 시호 '변국 장공(卞國 庄公)'이 언급된다.

5. 묘지명

천헌성 묘지명의 공식 이름은 '太周 故 左位大將軍 右羽林衛上下 上柱國 卞國公 贈 右羽林位大將軍 泉君 墓誌銘'이다.

해석하면 '주나라[17]의 고(故) 무슨무슨 관직을 가진 천(泉) 군의 묘지명'이란 뜻이다. 헌성이 반역자로 몰려서 죽었다 보니 묘지명 후반부터는 그냥 단순한 연헌성 찬양 뿐이다.

6. 대중매체



[1] 본인 묘지명 기록인데 희한하게 이름이랑 자가 똑같다.[2] 천헌성 묘지명 원문 기록.[3] 이 추장들은 고구려가 거느리던 수백 가지 부족과 그 수령들이다. 평양성에도 92명의 수령이 있었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있다.[4] 조는 조천(朝天)의 줄임말이고 한은 당나라의 별칭이다. 즉 당나라에 조천하자는 뜻.[5] 원문은 '제후(諸侯)'와 비슷하게 '제이장(諸夷長)'이라 표현했다.[6] 연남생 묘지명엔 대형(大兄) 염유로 나온다.[7] 아버지의 작위를 이어받음. 묘지명 원문 기록으론 '습봉(襲封)'.[8] 사후 작위 회복.[9] 최종 관직[10] 사후 추증.[11] 생전 최종 관직이다.[12] 연개소문의 아내, 연남생의 어머니.[13] 天授: 690년∼692년까지 사용됨.[14] 오늘날로 말하자면 사법관부 및 국가정보원 책임자 쯤은 되는 사람이다.[15] 잔인한 성격으로 유명했던 관리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큰 죄를 뒤집어 씌워 죽이거나 집안을 망하게 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16] 내준신은 그동안 온갖 사람들에게 모함을 씌우다가 정작 자신도 밀고를 당해 몸이 찢겨 죽었다.[17] 당시는 측천무후가 주나라, 즉 무주를 세운 시절이다.[18] 고려최충헌, 최이, 최항 삼부자도 진강, 진양, 진평과 같은 진주와 관련된 곳을 봉작받아 사실상 세습의 모습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