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헌성 | |
국적 | 고구려 → 당 |
당 시호 | 변국 장공(卞國 庄公) |
이름 | 연헌성(淵獻誠) |
자 | 헌성(獻誠)[1] |
이명 | 천헌성(泉獻誠) |
아들 | 연현은, 연현정, 연현일 |
아버지 | 연남생 |
형제 | 연헌충 |
묘지 | ? → 당 망산(芒山) |
생몰연도 | 651 ~ 692 |
[clearfix]
1. 개요
논하여 말합니다:
...남생, 헌성은 비록 당실(唐室)에 명성을 알렸지만, 본국(本國)에서 말할 땐 반인자(叛人者)라 불려지는 걸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삼국사기》<개소문 열전> 발췌. 저자인 김부식이 남생과 헌성 부자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다.
고구려 말기의 귀족....남생, 헌성은 비록 당실(唐室)에 명성을 알렸지만, 본국(本國)에서 말할 땐 반인자(叛人者)라 불려지는 걸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삼국사기》<개소문 열전> 발췌. 저자인 김부식이 남생과 헌성 부자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다.
고구려 말기의 실권자였던 연개소문의 손자이자 연남생의 차남이었다. 아버지 연남생과 함께 고구려를 배반하고 당나라에 항복해 고구려의 멸망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고구려 멸망 후에는 당나라에서 공을 인정받아 높은 작위에 올랐다.
2. 생애
2.1. 고구려에서 지낸 삶
헌성의 고구려 관직 | |
고구려 관등 | 선인(先人) |
9살 때 관등 '선인(先人)'에 봉해졌다. 665년, 할아버지인 연개소문이 죽자 아버지 연남생이 대막리지의 지위를 잇게 되었다.
대막리지가 된 연남생은 이듬해(666년)에 지방의 여러 성을 순시하기 위해 수도를 비우게 되었다. 묘지명에 따르면 연헌성도 아버지를 따라 나갔다.
그러나 연남생은 수도에 남기고 온 동생들인 연남건과 연남산을 의심하여 밀정을 파견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연남건과 연남산은 형이 자신들을 해치려 한다고 생각하여 정변을 일으켰고, 곧 수도를 장악했다.
이때 연헌성은 숙부들의 손에 형인 연헌충이 살해당하는 참변을 겪었다. 본인의 묘지명에 따르면 당시 연헌성의 나이는 16살이었다고 한다.
지방에 나가 있었던 연남생은 수도 평양성이 동생들에게 장악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고구려의 옛 수도인 국내성에 숨었다. 이때 연헌성은 아버지의 명에 따라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구원을 청하게 되었다.
당고종은 당나라에 도착한 연헌성을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에 임명했으며, 수레와 말, 비단, 보도(寶刀) 등을 주어 국내성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666년, 연헌성은 아버지 연남생과 함께 당나라에 투항하게 되었다.
묘지명에 따르면 연헌성이 당나라로의 투항을 주도했다고 한다. 정변이 터지자 '국내고도성(國內故都城)'[2]에 숨자고 한 것도 연헌성의 아이디어였다.
연남생과 연헌성 부자는 여러 추장(酋長), 이장(夷長), 수령(首領)들을 데리고 국내성으로 갔다.[3]
다들 혼란스러워 하며, 누구는 맞서 싸우자고 주장했다. 이때 헌성이 홀로 나서서 아버지에게 말하니
지금 사(使)를 보내 조한(朝漢)[4]하여 성심껏 대하면, 국가(國家)는 대인(大人)이 올 것이라는 걸 알고 분명 기뻐하며 받아드릴 겁니다.
그리하여 병마(兵馬)를 청해 합쳐 토벌하는 것이 만전(萬全)하며 결승(決勝)할 계(計)입니다.
- 본인 묘지명 중 발췌. 당나라에 항복하자는 건의를 하고 있다.
그리하여 병마(兵馬)를 청해 합쳐 토벌하는 것이 만전(萬全)하며 결승(決勝)할 계(計)입니다.
- 본인 묘지명 중 발췌. 당나라에 항복하자는 건의를 하고 있다.
이 말을 들은 남생은 제이장(諸夷長)[5]에게:
헌성(獻誠)의 언(言)은 심히 가택(可擇)하다.
- <천헌성 묘지명> 중 발췌. 헌성에게 동의하다.
- <천헌성 묘지명> 중 발췌. 헌성에게 동의하다.
그리하여 먼저 수령(首領) 염유(冉有)[6]를 보낸 뒤, 연헌성 본인이 직접 가 당고종으로부터 보라색 관복과 황금으로 만든 허리띠를 받았다. 묘지명에 따르면 연헌성이 당 조정으로부터 받은 대우가 조위의 장수 허저와 같았다고 한다.
당나라에 투항한 연남생 덕분에 당고종은 고구려 조정과 군사들의 허실을 잘 알 수 있게 되었고, 이후 연남생을 앞잡이로 삼아 고구려를 침공했다. 결국 668년에 고구려는 평양성이 함락되어 멸망했다.
2.2. 당나라에서 지낸 삶
헌성의 당 관직 | |
당 작위 | 변국공(卞國公)[7][8] |
당 훈위 | 상주국(上柱國) |
당 관직 | 우무위 장군(右武衛 將軍) 위위정경(衛尉正卿) 운휘장군(雲麾將軍) 우위 대장군 겸 우림위(右衛 大將軍 兼 羽林衛) 원외 치동정원(員外 置同正員) 우우림위 상하(右羽林衛 上下) 신무군 대총관(神武軍 大摠管) 용수도 대총관(龍水道 大摠管) 좌위대장군(左衛大將軍)[9] 우우림위 대장군(右羽林衛 大將軍)[10] |
당 검교직 | 검교 천추자 내사(檢校 天樞子 來使)[11] |
본인 묘지명엔 668년에 끝난 평양성 전투와 관련된 서술이 전혀 없고, 갑자기 679년 아버지 연남생의 죽음으로 넘어간다. 아버지가 죽자 연헌성은 엄청나게 슬퍼하며 며칠동안 음식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불쌍하게 여긴 연헌성의 '조모'(祖母)[12]는 손자가 밥을 먹지 않으면 본인도 먹지 않겠다면서 연헌성에게 슬픔을 견디라고 부탁했다.
679년 9월 당나라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양군'(襄軍)을 이끌고 진압에 참가했다고 한다. 연남생의 시호와 같은 이름을 가진 이 양군은 아마 연남생•연헌성 부자의 사병으로 보인다.
682년 조모가 죽자 관직을 사양하고 물러나지만 곧 다시 복직했다.
주나라 측천무후 천수[13] 연간에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 겸 우림위(羽林衛) 벼슬을 지냈고, 곧이어 좌위대장군(左衛大將軍)으로 옮겼다.
그러던 어느 날, 측천무후가 황금과 예물을 상품으로 내걸고 문무관료들 중에서 활을 잘 쏘는 사람 5명을 고르도록 했다. 이때 내사(內史) 장관보(張光輔)가 연헌성에게 먼저 쏘기를 양보하여 첫번째로 활을 쏘게 되었다.
그러나 연헌성은 뒤에 있는 우옥검위대장군(右玉鈐衛大將軍) 설돌마지(薛咄摩支)에게 양보했고, 설돌마지는 다시 연헌성에게 양보했다.
이렇게 엎치락뒤치락하며 순서를 미루다가 연헌성이 측천무후에게
"활을 잘 쏘는 사람 중에서 한인이 아닌 사람이 많으니 당나라 관인들이 활 쏘는 것을 수치로 여길 것 같아 두렵습니다."
라며 활쏘기를 그만둘 것을 청했다. 측천무후는 연헌성의 의견을 기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측천무후 시기 형옥(刑獄)[14] 벼슬을 지내며 위세를 떨치던 내준신(來俊臣)이라는 자가 있었다.[15] 하루는 내준신이 연헌성에게 뇌물을 요구했으나, 연헌성은 응하지 않았다. 잔인한 성격의 내준신은 이에 앙심을 품고, 연헌성이 모반을 꾀한다며 모함했다.
692년, 결국 연헌성은 반역자라는 누명을 쓴채로 목이 매이는 형벌을 받아 끔살당하고 말았다. 그의 나이 42세였을 때였고, 시신은 어딘가에 매장되었다.
이후 연헌성에게 모함을 씌워 죽인 내준신이 그 죄가 드러나 697년에 처형되었고,[16] 측천무후도 연헌성이 억울하게 죽었음을 알고 나서는 우우림위대장군(右羽林衛大將軍)을 추증했다. 그리고 예를 갖추어 아버지 연남생이 묻힌 망산(芒山)에 다시 장사지내도록 조치했다.
사후 신분이 회복된 뒤 '장공'(庄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진 듯 하다. 본인의 묘지명엔 없지만 손자 연비의 묘지명에 언급된다.
3. 기타
- 아버지 연남생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험난한 삶을 살다가 간 사람이었다. 고구려에서는 숙부들의 손에 형제가 죽었고 당나라에 투항해서 잘 먹고 잘 사나 했더니 결국 반역자로 몰려 죽었으니 개인으로서는 파란만장하게 살다가 죽었다. 보통 고구려 멸망의 주 원인 중 하나로 연남생의 당나라 투항을 꼽는데 <연헌성 묘지명>에 의하면 당나라 투항은 연헌성 본인이 제안하면서 주도했다고 되어 있다. 연남생이 이를 허락하자 연헌성이 직접 당나라로 가서 협상했으니 만악의 근원인 셈이다. 물론 연남생이 따로 다른 해볼만한 계책이 있는 상태가 아니었으니 연헌성의 제안이 아니었더라도 결국에는 당나라에 항복했을 것이다.
- 아무래도 핏줄이 핏줄이라 그런지... 돌궐과 토번 등 당시 당나라 제1의 최전선에서 활약하고, 반란이 있던 시기마다 진급해서 동시대의 다른 번장들이나 혹은 아버지 이상의 최고위직에 오르는 것을 보면 당나라에서 16살에 장군을 준 것은 고구려의 위상과 아버지빨이었다 치더라도 무인으로서의 기량 자체는 그 이상으로 뛰어났던 모양이다. 측천무후 시기의 이민족들 중에 활을 잘 쏘는 사람이 워낙 많으니 중국인들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자처해서 활쏘기 시합을 멈춘 것을 보면 무재도 있고, 처신에도 상당한 신경을 쓴 것 같다. 《삼국사기》에서는 나라를 버리고 당나라에서 귀족이 되어 살았다하여 김부식에게 반역자라고 호되게 까였다. 특히 함께 당나라에 투항한 아버지 연남생과 함께 '당나라에서는 명성이 있을지 몰라도 우리나라에서는 반역자가 아니면 무엇이겠느냐.'라고 세트로 혹평을 들었다.
4. 가족
할아버지는 연개소문이었고, 할머니는 존재가 언급된다.아버지는 연남생이었으며, 어머니는 기록이 전무하다.
작은아버지였던 연남산은 죽을 때까지 수도 장안 근처에서 살며 관리 생활을 했다. 장안에서 남생•헌성 부자와 계속 마주쳤을텐데 서로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의문이다.
형으로 연헌충이 있었다. 형제의 이름에서 돌림자를 제외한 글자를 합치면 '충성'(忠誠)이 된다.
사촌으로 작은아버지 연남산의 아들 연광부가 있었다. 두 사람은 장안에서 계속 마주쳤을 가능성이 있다.
아들로 연현은(淵玄隱), 연현정(淵玄靜), 연현일(淵玄逸)이 있었다.
손자인 연비(淵毖)가 있었다. 손자의 묘지명에서 시호 '변국 장공'(卞國 庄公)이 언급된다.
5. 묘지명
<천헌성 묘지명>의 공식 이름은 <太周 故 左位大將軍 右羽林衛上下 上柱國 卞國公 贈 右羽林位大將軍 泉君 墓誌銘>이다.해석하면 '주나라[17]의 고(故) 무슨무슨 관직을 가진 천(泉) 군의 묘지명'이란 뜻이다. 연헌성이 반역자로 몰려서 죽었다 보니 묘지명의 후반부터는 그냥 단순한 연헌성 찬양 뿐이다.
- 연헌성의 선조는 고구려국인(高句驪國人)이며, 본인은 소맥지향(小貊之鄕)에서 왔다고 표현했다.
- <천헌성 묘지명>의 가장 큰 특징은 역시 아버지 연남생의 항복을 '자신이 주도했다고 하는 점'이다. 묘지명에서 아버지를 대인(大人) 혹은 양공(襄公)으로 부르며, 아버지를 크게 도왔다고 한다.
- 668년에 벌어진 평양성 전투에 대해 어떠한 언급도 없다. 아마 참전하지 않은 듯하다.
- 헌성의 조모, 즉 친할머니가 등장한다.
- 아버지 연남생과 사이가 좋았던 걸로 보인다. 연남생은 9살에 선인(先人)의 관등을 받았는데 아들인 연헌성도 9살에 선인 관등을 받았다. 아버지가 죽었을 때 크게 슬퍼했다는 기록이 있다.
- 묘지명엔 헌성이 16살 때 작은아버지들이 내전을 일으켰다고 한다. 연남건은 헌성의 형 연헌충(淵獻忠)을 죽였는데 연헌충의 나이는 최소 17살 이상이었을 것이고, 관등 또한 연헌성보다 높았을 것이다.
- 본인을 아버지 양공 연남생의 적자(嫡子)로 표현했다.
- 아버지 대는 '남'(男) 자 돌림, 본인 대는 '헌'(獻) 자 돌림, 아들 대는 '현'(玄) 자 돌림 이름을 가지고 있다.
- 사병으로 양군(襄軍)을 거느리고 있었던 듯 하다. 또한 아버지의 작위를 세습하여 현존 기록상 아들 현은까지 삼부자가 이어받았다.[18]
6. 대중매체
- 2006년 SBS 드라마 <연개소문>에서는 배우 서준영이 연기했다. 연남생 역을 맡은 안재모와 8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데다가 안재모가 동안이라서 부자지간보다는 형제지간으로 보였다는 평이 많았다.
[1] 본인 묘지명 기록인데 희한하게 이름이랑 자가 똑같다.[2] <천헌성 묘지명> 원문 기록.[3] 이 추장들은 고구려가 거느리던 수백 개의 부족과 그 수령들이었다. 평양성에도 92명의 수령이 있었다는《삼국사기》의 기록이 있다.[4] 조는 조천(朝天)의 줄임말이고, 한은 당나라의 별칭이다. 즉 당나라에 조천하자는 뜻이었다.[5] 원문은 '제후'(諸侯)와 비슷하게 '제이장'(諸夷長)이라 표현했다.[6] <연남생 묘지명>엔 대형(大兄) 염유로 나온다.[7] 아버지 연남생의 작위를 이어받음. 묘지명 원문 기록으론 '습봉(襲封)'.[8] 사후 작위 회복.[9] 최종 관직[10] 사후 추증.[11] 생전의 최종 관직이다.[12] 연개소문의 아내이자 연남생의 어머니.[13] 天授: 690년∼692년까지 사용됨.[14] 오늘날로 말하자면 사법관부 및 국가정보원의 책임자 쯤 되는 사람이다.[15] 잔인한 성격으로 유명했던 관리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큰 죄를 뒤집어 씌워 죽이거나 집안을 망하게 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16] 내준신은 그동안 온갖 사람들에게 모함을 씌우다가 정작 자신도 밀고를 당해 몸이 찢겨 죽었다.[17] 당시는 측천무후가 주나라, 즉 무주를 세운 시절이었다.[18] 고려의 최충헌, 최이, 최항 삼부자도 진강, 진양, 진평과 같은 진주와 관련된 곳을 봉작받아 사실상 세습의 모습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