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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30 02:50:49

다원론적 천하관

파일:고려 의장기 문양.svg 고려의 대외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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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탐구
2.1. 전기 고려의 사례
2.1.1. 반박(전기 고려의 사례는 다원론적 천하관에 속하는가?)

1. 개요

해동의 천자이신 지금의 황제께서는 부처님과 하느님을 보좌하여 교화(敎化)를 펴러 오셨네.
세상을 다스리시는 은혜가 깊으시니, 원근(遠近)과 고금(古今)에 드문 일이라네.
외국에서 친히 달려와서 모두 귀의(歸依)하여
사방의 변경이 편안하고 깨끗해져 창과 깃발을 내려놓을 수 있으니
성덕(聖德)은 요와 탕 임금에게도 견주기 어려우리.

또 태평시절을 즐기나니, 생황(笙簧)과 소(簫)의 소리 떠들썩하게 들끓는구나.
아울러 음악소리 가득하니 집집마다 기쁘게 기도하며, 아름다운 이삭 뽑아 향을 피우네.
오직 우리 임금님의 수명이 만세토록 영원히 산같이 높고, 하늘같이 끝없기를 바랄뿐이네.
사해(四海)가 승평(昇平)[1]하고 덕(德)이 있음이 모두 요 임금 시절보다도 낫구나.
변경과 조정에 아무런 사고도 없으니 장군은 보검을 휘두를 일 다시는 없겠구나.

남만북적이 스스로 내조(來朝)하여
온갖 보물을 우리 천지(天墀)[2]에 바치는구나.
금으로 만든 섬돌과 옥으로 지은 전각에서 만세를 외치면서
우리 임금님께서 오래도록 보위(寶位)에 계시기를 바라네.
고려사》 제71권 〈악지〉 풍입송 中#
고려의 다원적 외교관계는 몽골[元]이 등장하여 송과 금을 멸망시킬 때까지 지속되었는데, 고려 또한 ‘해동천자(海東天子)’라는 독자적인 천하관을 바탕으로, 주위 국가들과 대등한 외교관계를 유지하였다. 고려는 남당이나 오월과 동등한 외교 형식을 취하였으며, 고려의 군주인 대왕 또한 ‘왕중의 왕’으로 동등한 여러 천자(天子) 가운데 한 명으로 자처했다. 건국 초 고려의 위상과 관련해서는 왕건이 이웃 나라를 병탄하면서 자못 강대해졌다거나, 고려가 936년에 신라와 백제를 패배시키자 왜(倭)·탐부(眈浮·탐라)·환어라(歡於羅)·철륵(鐵勒)의 동이제국(東夷諸國)이 모두 고려에 내부하였다는 서술이 도움을 준다. 당시 고려 군주의 위상이 단순히 한 나라의 범위에서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었음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허인욱, 『동도성립기』의 구한과 고려 초 대외 인식, 전북사학 68

10~13세기 동아시아 세계에 존재했던 '천하관'의 일종.

중국이 유일한 천하의 중심이라는 것을 부정하고, 그 군주가 천명을 받은 천자국이듯이 고유의 토풍을 지닌 여러 나라들도 각 천하(소천하)의 중심이 되어 병존한다는 사상이다.

2. 탐구

2.1. 전기 고려의 사례

원 간섭기 이전의 고려 전기에도 이러한 사상이 주류였다는 의견이 학계의 통설적 견해이다. 이에 따르면 전기 고려는 이 같은 천하 다원론을 독자적인 해동천하관으로 구현하여 신성 혈통을 부여받은 용의 후손이자 해동 세계의 주인인 고려의 군주가 중원의 천자와 구별되는 해동의 천자로서 세상을 다스린다는 관념을 구체화 시켰다. 또한 자국의 군주를 '해동천자(海東天子)' , 그외 각국의 군주를 '송조천자(宋朝天子)', '거란주(契丹主)', '금주(金主)' 등으로 지역명을 덧붙여 지칭함으로써 그 세계를 명확히 구별하였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고려는 중화제국과의 수직적 관계를 맺으면서도 자율적-자존적인 다원적 세계관을 가졌다고 보았다.[3] 고려시대 천하관은 고려 군주의 천자-황제 위호 사용에 관한 입장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다. 다만 고려시대의 천하관은 단 한 가지만 존재했다고 보기 어려우며 그에 따르면, 고려시대 천하관은 크게 세 범주로 나뉜다. 첫번째는 고려 군주가 천자라는 입장이고 두번째는 유교적 명분론과 현실적 이유를 들며 고려 군주가 천자를 칭해서는 안된다는 입장 마지막 세번째는 다른 중원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고려도 독자적 천하(소천하)를 가진 천자국이라는 입장이었다.[4]

이처럼 천하관은 한 가지가 아닌 여러 갈래들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고려의 경우에도 크게 3가지의 천하관들이 공존하였다.

첫번째는 자국중심 천하관으로 이는 자신의 나라를 온 천하의 중심국으로 보는 입장 또는 그렇게 될 운명을 타고났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자국 중심의 천하관은 고대부터 존재했던 오랜 관념으로서 고려시대에도 남아있었다고 보여진다. 이러한 자국중심 천하관에는 토속신앙의 요소가 내포되어 있었다.

두번째는 화이론적 천하관으로서 화이론적 천하관을 가진 이들은 중화문화를 선진적이고 절대적인 것으로 보았지만, 토속문화는 낙후한 것으로 간주하고 혁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화이론적 천하관에서는 고려를 중화의 변두리에 위치한 ''로 간주하여 중국에 대한 명분론적 사대를 주장하고 중국으로부터 책봉을 받는 것에 매우 큰 의미를 부여했다. 동시에 중국 문화는 선진 문화로서 반드시 받아들여야 하는 것으로, 토속 문화는 비루한 구습으로서 반드시 혁파해야 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세번째가 바로 다원적 천하관인데 일원적 천하관을 전제하는 자국중심적-화이론적 천하관들과 달리, 다원적 천하관은 여러 개의 소천하들이 병존하고 고려의 천자가 송-요-금의 천자와 마찬가지로 그 중 하나의 소천하를 지배한다고 보는 관점이다. 다만 다원론자들도 주변 강대국과는 사대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보았으며[5] 실제로 고려 전기에 '중국 왕조'와의 조공책봉관계를 보면 '외왕' 방면에서는 국왕(국가)의 대외적인 위상은 시종일관 제후(국)였다. 정확히 당대 고려는 중국과의 관계에서는 外臣제후(국)였으며 당시 고려와 '중국 왕조' 사이의 대외 관계는 조공책봉관계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고, 이 관계 속에서 고려 국왕은 외국의 군주이면서 황제의 신하(제후)로 규정되고 있었다.[6] 즉, 다원적 천하관이라 할지라도 아예 조공-책봉 질서에서 완전히 이탈하는 모습은 아니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그러나 이와 관련해 주목되는 사실은 고려가 북방민족이 세운 국가의 군주를 ‘帝’로 표기하면서도 국내적으로는 ‘국주’로 호칭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려사》 등의 기록을 보면, 고려가 거란(요)이나 여진(금)에 보내는 공식적인 문서에는 ‘帝’로 표기를 했지만, 내부적으로 ‘國主’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사례들이 빈번하게 찾아진다. 철리국주가 《고려사》 현종 13년(1022) 기록에는 ‘鐵利國首領’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고려사절요》에는 ‘鐵利國酋’로 표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國主=酋=首領’인 셈이다. 《고려사》를 보면, 酋는 금 건국 이전의 여진족 우두머리에게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렇다는 것은 고려의 대왕과 동등한 위상을 지니지 못했음을 뜻한다. 이를 바탕으로 생각하면, 고려가 거란과 금의 군주에게 국주라는 호칭을 사용한 것은 이 국가들의 군주가 고려의 군주보다 위상이 낮은 것으로 인식했다고 할 수 있다.[7]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전기 고려는 다원론적 천하관을 채택하여 자신들만의 소천하를 설정하고 그 안에서 외왕내제를 채택했다고도 볼 수 있다.[8] 다만, 전기 고려가 실제로 외왕내제를 채택한 게 맞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결론을 내기 어려운데 대표적으로 천자와 황제 같은 호칭들 보다는 왕으로 지칭한 경우들이 훨씬 더 많다는 문제점[9] 탓에 천자나 황제 같은 해당 용어들이 실제로 외왕내제라는 확고한 목적의식 하에서 사용된게 맞는지에 대해서는 학계내에서 논쟁(고려/외왕내제 여부)이 존재하는 상황이다.[10]
원 복속 이전의 고려는 중국 왕조와는 대외 방면에 한해 군신 의례를 매개로 결합하였을 뿐이었고 그리하여 국내적으로는 제후(신하) 위상이 의미 없었으며 중국 왕조로부터의 독자성을 의식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독자성은 당연시된 채 향유되었다. 그러다 원 복속기를 분수령으로 하여 국가(국왕)의 자기 정체성의 설정 방식은 혁명적으로 변화하였다. 원 복속 하에서 고려는 국내적으로도 ‘신하+군주’ 위상의 구현과 제후국 체제의 실현 그리고 외신제후이면서 황제의 관료와 황실의 부마이기도 한 위상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러한 현실에 직면하여, 고려는 자신이 ‘보통의 오랑캐’와는 달리 중화 문명(문화)을 추구·구현하였고 그로 인해 원의 천자를 정점으로 한 천하 질서를 수용․긍정시하며 천하 질서 내에서 자신의 위상인 이적 세계의 제후(국)라는 본분을 다하고 있다는 식으로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정당화하였다. 다만 당시 자기 정체성을 설정하는 방식은 피동적, 현실 추수적 면모를 뚜렷이 노정하였다. 원 복속기에 성립된 자기 정체성의 기본 틀은 그 이후 시기까지 존속하였지만 원 복속기와는 달리 고려말기와 조선초기를 경과하면서 내향적, 자기 신념적 면모가 대두·강화하는 방향으로 변모하였다. 즉 종족과 공간의 측면에서 이적이기는 해도 여타 이적들과 달리 문명 중화를 ‘주체적이고’ 철저히 추구하였고 그 일환에서 국내에서조차 중화 천자의 제후라는 위상을 ‘주체적으로’ 견지하고자 했다는 식으로 말이다.
최종석(2017), "13~15세기 천하질서 하에서 고려와 조선의 국가 정체성", 《역사비평》 121, 국문초록.

또한, 고려 전기의 다원론적 천하관은 원 간섭기에 고려가 제후국으로서의 위상을 강요받으면서 점차 축소되어 갔으며 오히려 성리학의 도입으로 화이론이 점차 확산되어 나가면서 원 간섭기 이후로는 사실상 사라지게 되었다.[11]

2.1.1. 반박(전기 고려의 사례는 다원론적 천하관에 속하는가?)

그런데 다중심적 국제질서 속에서 황제국 체제가 성립․운용되었다(될 수 있었다)는 견해는 실증면에서 매우 취약하다. 고려의 國制가 황제국 체제인지가 제대로 실증되지 못한 사실[12] 차치하고서더라도, 설령 황제국 체제가 성립-운용되었다(될 수 있었다)고 쳐도, 그것이 다중심적 국제질서를 배경으로 해서 가능하였다는 주장은 사실상 구체적인 논증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필자가 아는 한, 종래의 연구에서 다중심적 국제질서의 전개와 황제국 체제의 성립-운영이라는 두 항 간의 인과관계를 직접적인 근거 기록을 통해서 입증하는 작업은 이루어진 적이 없다. 고려의 國制가 황제국 체제라는 주장과 관련해서는 각종 황제 제도를 열거하는 식으로나마 입증이 시도되기라도 한 것[13]과는 대조적으로 말이다.

(중략...)

‘고려전기에 다중심적 국제질서 속에서 황제국 체제가 성립-운용되었다(될 수 있었다)’라는 견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데서 비교 대상으로 활용할 수 있 는 베트남 역사 전개의 양상은 동아시아에 일원적인 패권 국가가 존재하든, 다중심적 국제질서가 전개되든 관계없이 중심국 주변의 소국이 황제국제를 운영할 수 있었음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베트남에서 대내 방면의 황제국 체제 구현은 동아시아에서 다중심적 국제질서가 전개된 시기는 물론이요, 패권 국가인 --이 연이어 등장한 시기에도 철저하고도 일관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요컨대, 국제질서라는 변수는 황제국 체제의 성립-운영 여부와 직접적인 상관 관계가 없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중략...)

‘고려전기에 다중심적 국제질서 속에서 황제국 체제가 성립․운용되었다(될 수 있었다)’라는 견해가 전제한 바에 따르면, 동시대 베트남은 고려와 비교해서 중심국이 가하는 구심력이 강해 황제국 체제를 운영하는 데서 상대적으로 불리 할 수밖에 없고 이와 맞물려 황제국 체제의 실현 정도 면에서 제약이 있었으리라 예상해 볼 수 있다.[14] 그런데 이 예상과는 정반대로 베트남에서는 누구도 토를 달 수 없을 정도로 온전한 황제국 체제가 실현된 데 비해, 재삼 언급하듯 고려에서는 황제국 체제라 부르기에 민망한 수준으로 혼종적이고 불규칙한 양상으로 국제가 운영되었다. 대외 여건 면에서 베트남의 실제 처지는 고려와 비교해 더 좋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볼 순 있지만, 그렇게 보긴 어려운 게, 송으로부터 빈번한 침입 혹은 침입 위협에 시달린다든가, 자국의 국호(대월)조차 인정받지 못하고 安南國王 식으로 중국의 직접 지배를 당한 당시에 설치된 안남도호부 에서 비롯된 국호(安南)로 불린다든지 할 만큼,[15] 대외적 여건(위상)은 최소 고려보다 나은 게 없었다. 고려와 달리 황제국 체제를 철저히 구현한 것은 베트남을 대상으로 한 주변 중심국의 구심력이 상대적으로 약해서는 아닌 것이다.

(중략...)

국제 양상 면에서 베트남과의 비교 결과는 그간 의심 없이 받아들여 온 견해, 곧 정황 논리에 의해 뒷받침되어 온 ‘고려전기에 다중심적 국제질서 속에서 황제국 체제가 성립-운용되었다(될 수 있었다)’라는 견해를 의심하게 만든다. 구체적으로는 과연 황제국 체제 운영이 다중심적 국제질서 속에서 성립-운용되었다(될 수 있었다)는 주장이 타당한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또한, 변주라 할 수 있는 ‘다중심적 국제질서 속에서 황제국 체제가 성립-운영되었지만 (될 수 있었지만), 책봉국의 눈치를 봐야 하거나, 책봉국의 압력을 받은 데서 황제국제 운영에서 다소 제약이 있었다’라는 식의 견해도 의문의 대상이긴 마찬가지이다.

(중략...)

앞서 검토한 바와 같이, 고려전기에도 국제가 어떤 양상으로 구현되는지는 다중심적 국제질서와 상관없었을 것이다. 국제 구현의 방향은 기본적으로 베트남과 마찬가지로 국내 방면에서 국제에 대한 인식 방식에 좌우되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국제에 대한 인식 방식의 구체적 내용은 베트남과 달랐을 것이고, 이와 맞물려 국제의 구현 양상 면에서 차이가 발생하였을 것이다. 기우에서 첨언하자면, 어느 쪽이 바람직하다거나 우월하다고 보진 않는다. 양자의 차이를 주목 하면서 각각의 맥락을 파악하는 데 관심이 있을 뿐이다.
- 고려전기 다중심적 국제질서는 ‘황제국 체제’의 성립·운용과 상관관계가 있었을까? - 베트남 사례와의 비교를 통해서 - (최종석, 한국문화 2024, vol., no.106, pp. 149-185 (37 pages))

일반적으로 전기 고려의 국제가 다원론적 천하관에 기반하여 해동 천자를 자처하는 즉, 소천하속 외왕내제의 모습으로 운영되었다는 인식이 많지만 막상 이에 대해서 구체적인 실증이 이루어진적은 거의 없었다. 즉, 다중심적 국제질서 속에서 황제국 체제가 성립-운영되었다(될 수 있었다)는 견해는 일방적 주장에 가까우며 구체적인 근거 기록을 토대로 주장되고 있지 못한 상태이다.[16]

고려가 정말로 외왕내제 국가였느지에 대한 논란과는 별개로 고려가 이 같은 천하 다원론을 독자적인 해동천하관으로 승화시켜서 운영했다라는 주장의 가장 큰 근거는 동아시아에 일원적인 패권 국가가 존재하지 않고 반대로 동아시아에 중심국이 복수로 있는 국제 여건 속에서 (가령 북송과 요나라, 남송과 금나라) 각각의 중심국은 세력권 내에 있는 주변국들에 대한 구심력이 약해지고 이와 맞물려 고려를 비롯한 주변국들의 독립성은 상대적으로 강화되어, 주변국들은 황제국 체제를 갖추게 되었고 중심국은 주변국들의 황제국 표방을 막을 수 없었다는 논리였다.[17]

하지만 막상 --의 일극 패권체제가 확립된 상황속에서도 베트남이 확고한 외왕내제를 지속적으로 운영한것에 비해 반대로 다중심적 국제질서 속에서도 고려는 황제국 체제라 부르기에 민망한 수준으로 혼종적이고 불규칙한 양상으로 국제가 운영되었다는 사실을 볼 때 국제가 어떤 양상으로 구현되는지는 다중심적 국제질서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해석 할 수 있다. 즉, 고려의 국제구현의 방향은 기본적으로 베트남과 마찬가지로 국내 방면에서 국제에 대한 인식 방식에 좌우되는 것이었지 외부적 요인(다중심적 국제질서)은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겠다.[18]

요약하자면 다원론적 천하관속에서 고려가 외왕내제 국가였을거라는 견해 즉, 고려 또한 각 천하(소천하)들중 하나의 '소천하'를 다스리는 중심이 되어 다른 천하들과 병존했을 것이라는 주장과 달리 실제 고려는 다중심적 국제질서 속에서도 소천하를 다스리는 다원론적 천하관에 기반한 외왕내제 국가가 아니었고 애초에 다원론적 천하관의 전제와 달리 국제질서라는 변수는 생각외로 황제국 체제의 성립-운영 여부와 직접적인 상관 관계가 없었다는 것이다.


[1] 높이 올라간다는 뜻. 고려 만월대 궁성의 정문 이름도 승평문이다.[2] 천자의 궁궐을 의미함.[3] 노명호, 〈高麗時代의 多元的 天下觀과 海東天子〉《韓國史硏究》105, 1999. 6.[4] 노명호, 〈高麗時代의 多元的 天下觀과 海東天子〉《韓國史硏究》105, 1999. 6.[5] 노명호, 〈高麗時代의 多元的 天下觀과 海東天子〉《韓國史硏究》105, 1999. 6.[6] 베트남 外王內帝 체제와의 비교를 통해 본 고려전기 이중 체제의 양상 (최종석, 진단학보, 2015, vol., no.125, pp. 1-38 (38 pages))[7] 「君主號로 본 고려 전기의 대외인식, 한국중세사연구 제55호, 허인욱」[8] 노명호, 〈高麗時代의 多元的 天下觀과 海東天子〉《韓國史硏究》105, 1999. 6.[9] 베트남 外王內帝 체제와의 비교를 통해 본 고려전기 이중 체제의 양상 (최종석, 진단학보, 2015, vol., no.125, pp. 1-38 (38 pages)) ; 왜 고려전기의 國制는 황제국 체제로 보일까? - 후대 감각과 지식의 소급 적용으로 탄생한 고려전기 황제국 체제 - (최종석, 역사학보, 2021, vol., no.250, pp. 1-42 (42 pages))[10] 단 "왕"은 왕 중의 왕, 즉 천자를 뜻하는 "대왕"의 약칭으로 볼 수도 있다.[11] 노명호, 〈高麗時代의 多元的 天下觀과 海東天子〉《韓國史硏究》105, 1999. 6.[12] 이 사안에 관해서는 최종석, 2015 「베트남 外王內帝 체제와의 비교를 통해 본 고려전기 이중 체제의 양상」 진단학보 125; 최종석, 2021a 「왜 고려전기의 國制는 황제국 체제 로 보일까?―후대 감각과 지식의 소급적용으로 탄생한 고려전기 황제국 체제―」 역사 학보 250을 참조하기 바란다.[13] 물론 이러한 입증 방식은 문제가 있다. 이러한 방법대로라면, 고려전기에 운영된 제후 (왕) 제도만을 모아 열거하는 방법으로 고려의 국제가 제후국 체제였다고 증명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할 때 황제 제도를 열거하는 식으로 황제국 체제를 입증하기 위 해서는 적어도 반례가 없거나 극히 희박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반례가 적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려 군주의 공식 位號는 왕이었다(박재우, 2005 「고려 君主의 국제적 위상」 한국사학보 20, 50-53면). 황제 제도를 열거하는 식으로는 황제국 체제를 입증할 수 없는 것이다.[14] 기존 연구가 전제하는 정황 논리에 따르면, 고려는 베트남에 비해 상대적으로 독자성을 누릴 여지가 크고 이와 맞물려 책봉국이 고려의 황제국 체제 운영을 제어하기는 더 어려 웠을 것이다. 따라서 고려는 베트남에 비해 더 철저한 황제국 체제를 운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15] 片倉穰, 1972 앞의 논문 참조[16] 고려전기 다중심적 국제질서는 ‘황제국 체제’의 성립·운용과 상관관계가 있었을까? - 베트남 사례와의 비교를 통해서 - (최종석, 한국문화 2024, vol., no.106, pp. 149-185 (37 pages))[17] 고려전기 다중심적 국제질서는 ‘황제국 체제’의 성립·운용과 상관관계가 있었을까? - 베트남 사례와의 비교를 통해서 - (최종석, 한국문화 2024, vol., no.106, pp. 149-185 (37 pages))[18] 고려전기 다중심적 국제질서는 ‘황제국 체제’의 성립·운용과 상관관계가 있었을까? - 베트남 사례와의 비교를 통해서 - (최종석, 한국문화 2024, vol., no.106, pp. 149-185 (37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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