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永愚
1938년 7월 12일 ~ 2023년 2월 15일 (향년 84세)
1. 개요
대한민국의 역사학자. 본관은 청주(淸州)[1].2. 생애
1938년 7월 12일 충청남도 서산군(현 서산시) 해미면에서 아버지 한희동(韓禧東, 1911. 6. 22 ~ 1943. 5. 1)과 어머니 풍천 임씨(豊川 任氏, 1909. 6. 23 ~ 1987. 12. 24)[2]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2대조 한효순(韓孝純, 1543. 7. 11 ~ 1621. 11. 15)은 광해군 때 좌의정을 지냈으나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데에 가담한 죄로 인조반정 직후 관직이 추탈되었다. 이 때문에 그 후손들은 충청도 서산군으로 낙향해 은거하면서 살았고, 10대조 한정일(韓挺一, 1610. 1. 6 ~ 1653. 5. 22)이 참봉을 지내고 7대조 한종태(韓宗泰, 1681 ~ ?. 6. 15)가 1723년(경종 3) 식년 생원시에 3등 32위로 입격한 뒤로는 관직에 진출하거나 과거에 합격하지 못했다.한영우는 어려서 서당 훈장이었던 큰할아버지 한태원(韓台源, 1870. 10. 12 ~ 1950. 6. 10) 밑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조부 한국원(韓國源, 1884. 3. 16 ~ 1946. 9. 2) 아래에서 농사일을 배우며 성장했다. 이후 온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7년 서울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하여 1962년 졸업했다. 1967년 2월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학 석사 학위[3], 1981년 동 대학원에서 국사학 박사 학위[4]를 취득했다. 조선시대 연구와 근대사 연구에 업적을 남긴 학자로 평가 받고 있다.
1967년 12월부터 2003년 8월까지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2008년까지는 문화재청 사적사료연구위원장 겸 사적분과위원을 겸임하였다. 말년에는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명예교수, 이화여자대학교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겸 이화학술원장 등으로 재직하였다.
2023년 2월 15일 오전 숙환으로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향년 84세#
3. 저서
- 다시 실학이란 무엇인가
- 역사를 아는 힘
- 왕조의 설계자 정도전
- 정조의 화성행차, 그 8일
- 동궐도
- 유수원:꿈과 반역의 실학자
3.1. 다시찾는 우리역사
약칭은 다찾우 혹은 다찾사.1997년 쓰인 이래 몇 번의 개정을 거쳤다.
이기백의 <한국사신론>, 변태섭의 <한국사통론>과 함께 이 세 권의 책은 지금까지도 역사교육과 학생이 임용고시를 준비하려면 적어도 한 번 쯤은 읽어야하는 책으로 거론되고 있으며 신론과 통론의 명맥을 잇는 3세대 한국사 개론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리고 서울시 지방직 공무원 시험이 인사혁신처 출제로 통합되기 전 한국사 과목 심화 보충교재로 쓰이기도 하였으며, 과거 행정고시(현 5급 공채) 1차 과목에 한국사가 있던 시절(현재는 한능검 고급 취득으로 대체)에 한국사통론과 함께 고시생들의 사실상 필독 도서였다.
2000년대까지 고시생들을 중심으로 바이블로 여겨졌던 저서이지만 2010년대를 넘어 여러 개론서들이 나오면서 조금 시들해진 분위기이다. 그러나 학원 교재를 제외하면 이 정도의 압축된 분량으로 서술된 개설서를 찾기도 여전히 쉽지 않다.
고시 준비가 아니더라도 역사학과 학생들에게도 역사학을 공부하기 위한 필독서로 꼽히고 있다.
다만 고대사 부분에 한정해서는 평가가 박한데 학계 정설이 아닌 소수설과 근거가 부족한 서술이 많다. 예를 들어 양만춘이나 이세민 애꾸 이야기가 중국에 의해 은폐된 야사라는 서술이 있다.[5] 환빠급의 견강부회는 아니지만 상고사는 패스하고 타 서적으로 보충하는 것을 권하는 이들이 많다. 상고사 이후 부분부터는 문제가 없다.
중국에서 동이라고 불렀던 민족들을 아사달 문화권으로 묶어서 고대사를 서술한 것이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