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4-18 21:44:25

타락죽

한국의 전통음료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colbgcolor=#20B2AA> ㄱ~ㅂ · 경소탕 · 금분탕 · · 녹운탕 · · 두구탕 · 모과탕 · [1] · 배숙 · 봉수탕
생맥산 · 소주온미 · 송화밀수 · 수단 · 수문탕 · 수정과 · 수지탕 · 숙매탕 · · 식혜 · · 쉰다리 ·
ㅇ~ㅈ 암향탕 · · 오미탕 · 옥설탕 · 온조탕 · 원소병 · 유자차 · 자소탕 · 제호탕 · 지황고자탕
ㅊ~ㅎ 창면 · 청태전 ·타락죽 · · 화채 · 해성탕 · 행락탕 · 회향탕
[1] 물에 탄 미숫가루 또한 미숫가루로 칭하는 경우도 많다.
}}}}}}}}} ||

파일:밥 아이콘.png 죽의 종류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흰죽 · 계란죽 · 빼때기죽 · 과루죽 · 국묘죽 · 굴죽 · 깨죽 · 꽃게죽 · 납팔죽 · 문동죽 · 바지락죽 · 밤죽 · 방풍죽 · 보리죽 · 비지죽 · 상이죽 · 선인죽 · 소행죽 · 송이버섯죽 · 시래기죽 · 야채죽 · 오트밀 · 인삼죽 · 잣죽 · 재강죽 · 저신죽 · 전복죽 · 찹쌀죽 · 청모죽 · 콩나물죽 · 포리지 · 팅짜이죽 · 황정죽 · 도토리죽
퓨전/요리류 갱시기 · 김치죽 · 누룽지탕 · 라면죽 · 닭죽 · 덮죽 · 리소토 · 어죽 · 육죽 · 자라죽 · 장국죽 · 해장죽
비곡물 주류 뢰드그뢰드 메드 플뢰데 · 산약죽 · 서여죽 · 참포라도 · 타락죽 · 팥죽 · 포이 · 호두죽 · 호박죽
기타 꿀꿀이죽 · 라이스 푸딩 · 미음 · 숭늉 · 응이
}}}}}}}}} ||
파일:타락죽.jpg
1. 개요2. 어형3. 조리4. 역사
4.1. 조리법의 변천
5. 여담

[clearfix]

1. 개요

타락죽() 또는 우유죽(牛乳粥)[1]우유를 사용해 끓여내는 한국 요리의 죽을 말한다. 불린 을 붓고 블렌더맷돌에 간 뒤 고운 채에 밭쳐 찌꺼기는 버리고 쌀 간 물을 끓여서 흰죽이 어우러지게 쑨 후 우유를 넣고 더 끓여 만든다.

조선시대 역대 국왕들이 먹던 건강 보양식의 하나였으며 따라서 평소 궁중에서 음식을 조리하는 수랏간이 만들지 않고 내의원에서 만들어서 바쳤는데 음식이라기보다는 약으로 본 셈이다. 우유를 짜는 일도 내의원 의관 담당이었으니 우유를 약으로 관리하고 '처방'한 것이었다.

2. 어형

고려원 간섭기원나라에서 들어온 요리로 우유와 찹쌀을 함께 끓여서 만든 죽이다. ‘말린 우유’라는 뜻의 몽골어 '타륵(ᠲᠠᠷᠠᠭ, тараг)'을 음차하여 '타락(駝酪)'으로 불렀다고 한다. 말 그대로 음차기 때문에 낙타 타(駝)가 들어갔다고 해서 낙타 젖으로 끓인 것도 아니다.[2]

타락죽은 원나라에서는 제호(醍醐)라고 해서 우유에 갈분을 섞어서 끓인 죽 요리였다. 원래는 불교 용어로, 인도의 고급 요구르트(혹은 버터치즈)를 말한다. 명나라에서는 수락(酥酪)이라고 했는데 역시 우유에 곡물 가루를 섞어서 끓인 죽의 일종이다. 타락죽은 이들과 같은 계통의 유제품이다.

3. 조리

만드는 법은 매우 간단하다. 우유와 쌀가루의 비율을 5:4로 하여 넣고 덩어리지지 않게 잘 풀면서 끓여내면 끝이다. 규합총서에 따르면 우유와 무리의 비율을 1:0.8로 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비율은 유동적으로 바뀔 수 있으나 무리의 양이 우유의 양을 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취향에 따라 설탕소금으로 간을 하기도 하지만 우유와 쌀만 넣고 끓여도 상관없다. 다만 다른 의견도 있다. 우유가 아니라 버터로 쌀가루를 볶은 뒤 우유를 넣어서 끓여내는 죽인데 밀가루를 볶은 를 써서 스프를 만드는 과정과 유사하다는 설도 있다.

송아지가 먹을 것을 뺏어 먹는다고 조선시대의 왕이 우유의 사용을 우려했던 만큼 유제품의 비중이 매우 적은 전통 한국 요리 중 우유를 재료로 사용하는 몇 안 되는 음식이다. 타락죽을 제외하면 한국 요리에서 우유를 재료로 사용하는 음식은 십중팔구 현대의 요리사들이 새로 개발한 '모던 한식'이다.

4. 역사

한반도에서는 전통적으로 우유가 매우 귀했다. 대형 가축을 키울 만한 평원이 적었으므로 조선뿐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 동남아에서도 근대까지 낙농업의 발달은 미약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우유는 이나 힘 있는 귀족, 부자나 먹을 수 있던 비싼 식재료였다. 게다가 냉장 기술을 비롯한 보관 기술이 매우 미약하던 시대라 차게 보관하지 않으면 쉽게 상하는 우유는 더더욱 귀한 음식일 수밖에 없었다.[3]

그나마 몽골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은 고려와 북방 민족들과 오랜 시간 동안 교류해 온 중국에서는 왕족이나 귀족들이라도 먹었지 북방 민족과의 교류가 거의 없다시피 했던 일본이나 동남아시아에서는 우유를 먹는다는 것 자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할 정도였다. 대신 유목민들이 많던 몽골이나 아랍 지역에선 염소 젖과 더불어 우유도 물과 같아서 많이 마셨고[4] 종교적으로 를 많이 키우던 인도 같은 서남아시아는 오래전부터 우유를 즐겨 마셨다.

대한민국에서 우유가 대중화된 것은 아무리 빨라도 1960년대의 일이다. 조선시대 국왕에게도 타락죽은 일상식이 아니라 보양식이었고 요리사가 아니라 의원이 처방의 일종으로 만드는 음식이었다. 임금이 기분 좋을 때면 신하들에게 한 숟갈 먹어 보라고 하사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국왕이 먹는 귀한 음식이었기 때문에 아무나 먹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국왕이 궁녀와 하룻밤을 같이 보내고 부부의 연을 맺는 사이를 "분락지간(分駱之間)"이라고 불렀는데 국왕만 먹을 수 있었던 귀한 타락죽을 같이 나눠 먹었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국왕 이외에는 대비, 세자, 중전 정도가 타락죽을 먹을 수 있었으며 기로소에 입소한 퇴직 관료들도 타락죽을 맛볼 수 있었지만 기로소에 입소하려면 최소한 종2품 벼슬직을 지내야했기 때문에 그 외의 관료들은 유우소나 타락색처럼 우유를 관리하는 관청에서 일하는 관원들 정도를 빼면 해당 사항이 없었다.
파일:external/www.mhj21.com/2009052020304777.jpg
우유를 짜는 내의원 의관들을 그린 그림. 왼쪽을 보면 송아지를 어미 소와 떼어내어 붙잡아두고 있는 것이 보인다.
우유가 귀한 이유는 당대에 자체가 매우 적었고 우유 생산을 목적으로 개량된 소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한우는 젖꼭지도 작고 우유를 많이 생산하지 않는다. 젖소는 나중에 기술이 발달하고 나서 개량된 품종으로, 주기적으로, 그것도 기계를 동원해서 젖을 무지막지하게 짜지 않으면 도리어 젖몸살이 심해져 염증 걸려서 죽는다. 조선 말고도 몽골 같은 유목을 주로 하는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동아시아에서 우유를 먹는 게 왕이나 부유층 같은 극히 일부만 오랫동안 가능했던 것도 똑같은 이유다.

고려시대 이후 한국이나 중국은 그래도 우유를 자주 마시는 몽골을 비롯한 북방 민족들과 자주 교류해 온 역사가 있지만 일본은 그마저도 없었고 더욱이 살생을 금하는 풍조로 인해 육식금지령까지 있었을 장도로 고기를 먹는 문화도 미약했기 때문에 우유 마시는 것을 더더욱 괴상하게 여겼다. 예를 들면 19세기 중순 일본인들이 유럽에 가서 우유를 보고 "뭔 쌀 죽을 먹나?"고 했다가 동물 젖임을 알고 낯설어했을 정도다. 재미있는 점은 일본의 귀족인 구게(公家) 가문 중에 다이고(醍醐, 제호)라는 성씨가 있었다는 것이다. 다만 이것은 실제로 유제품인 제호를 먹거나 생산하는 가문이라는 뜻이 아니라 불교의 영향으로 생겨난 성씨이다.

게다가 조선시대까지 의 젖을 짜는 행위가 도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부적합하다고 여겨졌다. 우유를 생산하려면 소가 출산한 직후 젖이 나올 때 짜야 했는데 이러면 자연히 송아지가 먹을 양이 줄어들므로 '어린 송아지가 먹어야 할 젖을 사람이 훔쳐 먹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유교적인 이유로 유생들이 반대했다고 한다. 영조도 이를 옳게 여겨 손자 정조의 세손 책봉 전 일화 중 하나를 보면 두 돌 된 손자의 이유식으로 우유를 쓰게 된 나인에게 "어미 소에게도 키워야 할 송아지가 있는데 인간으로서 어찌 송아지가 먹어야 할 것을 먹겠는가."라고 타일렀다고 한다. 참고로 중동, 인도를 포함한 서방 문화권은 그냥 송아지를 도축해서 고기로 먹고 우유는 사람이 먹었다. 우유가 도의적으로 바르지 않은 음식이라는 생각 자체는 조선 외에도 있었다. 예를 들어 구약 성경에는 "너희는 새끼 염소를 그 어미의 젖에 삶아서는 안 된다."(탈출기 23:19)는 구절이 있는데 중세부터는 고기와 유제품을 섞어서 먹으면 안된다는 구절로 해석해 버렸지만[5] 최초에는 그 요리가 부도덕하다고 생각하여 말 그대로의 의미로 시작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 초기는 원나라 말기의 붕괴된 상업의 여파를 농업 진흥을 통해 경제력 복구를 행하던 시기였다. 조정의 입장에서 소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우경의 역사가 깊은 데다 나이 들고 병 들어도 도축을 통해 농가에 기여하는 등 이미 농업 기여도가 높은 동물이었다. 당시 기술력으로는 소의 품종 개량은 성패 여부가 불분명했다. 게다가 품종 개량에 성공한다고 해도 다량의 소 생산만을 위한 목초지를 만드는 것보다 그 자리에 그냥 농경지를 조성하는 게 더 나았다. 비용 대비 효익에 심각한 의문을 느낄 여지는 충분하다. 이처럼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시아권에서는 우경의 역사는 긴 반면 우유를 이용한 제품들은 특권층들만의 사치품에 지나지 않았다.

유교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당시의 송아지는 한 마리, 한 마리가 후일 노동력의 근간인 소가 되는 중요한 자원이었는데 이로 인해 충분한 영양을 공급받지 못하면 성장이 더뎌져서 일을 제대로 못 하게 되므로 경제적으로도 손해였다. 게다가 냉장고가 없던 당시에는 오래 보관도 못 했다.
강에 놀러 갔을 때 있었던 일이다. 우리는 강변에서 젖소 한마리를 발견했다. 그곳에서 며칠 머무를 생각이었기에 우리 요리사를 보내어 그날 저녁과 그 다음날에 소젖을 짜도 되는지를 물었다. 그러지 소 주인은 이렇게 말했다:

"뭐라고? 소의 젖을 짜겠다고? 아니 되오, 아니 되고말고.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이라 이 소는 밭을 갈고 짐을 싣는데 쓰고 있소. 우리는 소랑 송아지를 축내게 할 만한 여유가 없소. 자칫하면 둘다 죽을텐데, 외국 사람들에게 작은 즐거움을 주기 위해 그런 손해를 감당 할 여유가 우리에게는 없단 말이오."
이규진. (2013). 근대시기 서양인 시각에서 본 조선음식과 음식문화 - 서양인 저술을 중심으로 -

그래서인지 당시 조선의 한우는 체격이 크고 힘이 셌다고 한다. 이 시기면 애초에 조선뿐 아니라 어느 나라든 동물의 품종 개량 기술은 별로 발달하지 않았다. 품종 간의 차이는 있더라도 한우에 비해 우유랑이 그렇게 큰 차이가 있진 않았을 거고 성장기에 젖을 적게 먹으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조선의 소는 키가 크고 힘이 세다. 조선인들은 우유를 먹지 않고 송아지에게 모두 먹였는데, 그래서 덩치가 커진 게 아닌가 싶다."
V.P 카르네프, 조선시대 당시 조선으로 파견 온 러시아 장교가 한우를 보고 느낀 점을 이야기할 때.

그래서 당시에는 관청에서 따로 우유를 관리할 정도였다. 고려시대부터 '유우소'라는 관청이 있었어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는데 한때 거기 종사하는 관원이 200명이었다. 조선시대에도 '타락색'이라고 해서 우유만 관리하는 관청이 따로 있었다. 서울 낙산(현재의 한성대학교 근처)에는 왕실 전용 목장도 있었다.

4.1. 조리법의 변천

유방이 좋은 암소의 젖을 송아지에게 빨린다. 젖이 나오기 시작하면 유방을 씻고 젖을 받는다. 많을 때에는 1사발, 적을 때에는 반 사발 정도 받을 수 있다. 체로 3번 걸러서 끓인다. 끓여서 익힌 숙타락(熟駝駱)을 오지항아리에 담는다. 여기에 작은 잔 1잔 분량의 본타락(本駝駱)을 섞어 따뜻한 곳에 놓아두는데, 그 위를 두껍게 덮는다. 밤중에 나무꽂이로 찔러 보아 누런 물이 솟아나면 오지항아리를 시원한 곳으로 옮겨 둔다. 만약 본타락이 없으면 좋은 탁주(濁酒)를 중간 정도 크기의 종지[鍾子]로 한 종지 넣어도 좋다. 본타락을 넣을 때 좋은 초 약간을 함께 넣으면 더욱 좋다.
수운잡방의 타락 만드는 법
초기 타락죽은 몽골의 영향 때문인지 요구르트에 가까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6] 궁중에서 만드는 원래 방식은 쌀을 곱게 간 다음 그냥 우유가 아니라 유산균으로 발효된 우유를 말려서 가루를 낸 건락을 넣어서 만든다는 얘기도 있다.

조선 후기로 가면 민간에선 타락죽이 요구르트에서 우유죽으로 변한다.
쌀을 담가다가 무리(물에 불린 쌀을 매에 갈아 체를 밭치어 가라앉힌 앙금)를 정갈하게 갈아 밭이고, 생우유가 한 사발이면, 무리는 조금 적게 하되, 묽고 되기는 잣죽 무리 심만큼 하여, 먼저 쑤다가 만약 익으려 하거든 우유를 부어 화합하여 쑤나니, 이것이 내국의 타락법(駝酪法)이니라.
규합총서의 타락 만드는 법

다만 1936년에 편찬된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는 초기의 그것과 비슷하게 써 놓은 것으로 보아[7] 왕실과 민간의 제법이 달랐거나 했던 모양이다. 왕실에서는 민간과 달리 요구르트를 계속 먹었는데 민간에서 전분을 넣어 따라하다 보니 제법이 바뀐것일 수도 있다.

5. 여담



[1] '타락'은 '우유'의 동의어이다. 표준국어대사전의 "타락1(駝酪) 명사「1」소의 젖. 백색으로, 살균하여 음료로 마시며 아이스크림, 버터, 치즈 따위의 원료로도 쓴다.=우유." 참조.[2] 단, 팔진 문서에도 서술되어 있지만 원나라 시기에는 실제로 낙타 젖으로 만든 타유미(駝乳糜) 혹은 타내죽(駝奶粥)라는 음식이 있었다. 현재 몽골에는 낙타젖으로 만든 술인 '잉게니 아이락(ᠢᠩᢉᠡ ᠨᠢ ᠠᠶᠢᠷᠠᠭ, ингэний айраг)'이 있다.[3] 사실 우유도 우유지만 쌀 역시 풍족한 생산량은 아니었다.(이 시절의 풍년 생산량은 오늘날의 평년에 가깝다.) 프리츠 하버가 질소 비료를 개발하고 나서도 한참 지난 1970년대에 접어들어서야 한국(남한)도 쌀 생산량이 풍족해졌다. 괜히 쌀을 이용한 가공품인 술이나 떡이 귀한 대우를 받은 게 아니다. 하술하는 것처럼 우유와 쌀을 모두 쓰는 타락죽이 왕이 즐기는 보양식이자 신하에게 귀한 하사품 취급을 받은 게 당연할 수밖에 없다.[4] 애시당초 이런 지역에선 오히려 물을 구하기가 더 어려웠기 때문에 우유나 양의 젖을 더 자주 마실 수밖에 없었다.[5] 유대교코셔 푸드는 이 구절의 영향으로 현재까지도 육류와 유제품의 동시 섭취를 금한다.[6] 현대 한국어에서 '타락'은 우유를 뜻하지만 중세 한국어에서는 발효유 등 좀더 넓은 의미의 유제품을 타락이라고 불렀다. '타락'이란 말이 쓰인 가장 오래된 기록은 《월인석보》(1459)이다. '타락'의 어원으로는 돌궐어 torak에서 왔다는 설과 몽골어 тараг과 어원을 같이 한다는 설 등이 있다.(오사다 사치코; 신선미; 김상숙; 한영숙 (2014년 8월). “한국 전통 발효유 타락(駝駱)에 대한 문헌 연구”. 《동아시아식생활학회지》 24 (4).)[7] "이왕젓을 걸을에 몬저 달듸단타락(酪)을만드러 밋(酵)츨만드나니 밋이라하는것은 술밋과가티피야을으게하는것이니라 대범익은젓한되에 첨락만수가락을 국이에담고 숟가락으로 몹시휘저서 다 풀리거든익은젓에붓고 구긔로휘저어 고루풀리게하고 전氈이나솜(綿)으로병을싸서 하게하야 한참에 흣헌겁으로덥허두면 그잇튼날앗침에 타락되나니"[8] 사실 이 '완벽한 음식'이라는 평은 케빈의 주관이 매우 짙게 들어간 평가. 작중에서 케빈은 광적으로 우유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언제나 본인 우유를 지참하고 다니는 건은 물론, 커피도 라떼만 마시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