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담배의 역사를 설명한 문서.
2. 기원
마약으로서의 담배는 술보다는 역사가 짧지만 오랜 과거부터 존재했다.서기 7세기경 마야 신전의 벽에, 이미 제사장이 담배를 피우는 그림이 묘사되어 있다. 담배에 대해 말할 때 담뱃잎을 피운다는 개념을 떠나서 어떤 종류든 풀이나 약초 등에 불을 붙여 연기를 빨아들이는 '흡연' 문화는 기원전에도 인류 곳곳에 존재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불씨라는 게 쉽게 구해지는 것이 아니라서, 사제가 있는 신전 같은 곳에서 처방받아서(불까지 붙여줘서) 피우거나 한 경우가 많은 것으로 보인다.
흔히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주술의식에 사용하던 것을 유럽인들이 기호품화 시켰다고 알려져 있으나 신대륙 발견 이전부터 이미 남유럽에서 자생했었다는 설도 일부에서 제기된다.[1] 15세기~16세기 대항해시대 돌입과 함께 기호품으로 전 세계로 급속히 전파된 것은 사실이다.
3. 서구권 상륙
초기 식민지 시절 미국의 담배 재배에 관한 영상.
담배가 유럽의 문헌에 가장 처음 언급되는 것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1492년 항해를 통해 원주민에게서 잎담배를 받아온 뒤였다. 영국에선 16세기 후반에서야 귀족인 월터 롤리가 처음으로 담배를 피웠는데, 물론 당시에는 담배를 만드는 기술이 없었고, 원주민들에게 받아온 담배만으로 피워야 했다. 당연히 담배의 숫자가 제한되어 있었으므로 골초가 된 롤리는 방에서 몰래 혼자 피웠다. 어느 날 하인이 우연히 보니 주인 머리에서 연기가 나는 것에 기겁하고 다른 하인들에게 주인 머리에 불이 난다고 말하는 통에 하인들이 물을 가득 가져와 그냥 머리에 끼얹어버렸다.
막상 담배가 알려지긴 했어도 유행이 되는 것은 반세기나 지나서였다. 본격적인 담배 경작의 시초로 평가되는 것은 프랑스인인 장 니코가 약초로서 담배를 재배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담배의 주요 성분인 니코틴의 어원 또한 이 사람이다.
초기에는 시가만 있다가, 시가잎을 자르다가 남은것을 종이에 말아 피우는 궐련, 담배잎을 절여 파이프 등에 넣고 피우는 파이프 담배 등이 생겨났다. 물담배 역시 넓게 보면 파이프 담배라고도 할 수 있다. 요즘에 말하는 담배는 대개 궐련이다.
흡연자와 비흡연자와의 대결은 이미 담배 보급 초기인 15세기부터 존재했다.[2] 이때 열었던 토론회를 보면 지금과 매우 흡사한데 비흡연자는 입냄새, 건강 악화[3], 비흡연자에 대한 피해 등을 주장한 반면, 흡연자들은 구취 제거나 정신 안정[4], 입이나 손이 심심할 때 달랠 수 있다거나 초면에 어색한 분위기를 해소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옹호했다.
보급 초기에는 성적 흥분을 유발시킨다 하여 악마의 도구로 마녀사냥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력을 감퇴시킨다. 사실 이것 뿐만 아니라 당시 담배의 효능으로 알려져 있었던 것들 대부분이 실제로는 정반대다. 예를 들어 담배의 대표적인 효능으로 알려져 있던 소화에 도움, 기관지나 정신을 안정, 구취제거 모두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소화를 방해하며, 뇌세포를 파괴하고, 구강 상태를 망친다. 기관지를 악화시키는 건 말할 것도 없다.
심지어 지금과 달리 구취제거 등의 이유로 학교에선 학생들에게 담배를 강요하기도 했고, 현대에는 만악의 근원이지만 당시에는 약초로 취급하였다.
20세기까지만 해도 여성이 담배를 피는 것을 금기시하는 경향이 컸는데, 여성의 흡연은 남녀평등의 상징이라며 여성 흡연을 적극 권장하던 움직임도 이 때 일어났다. 럭키 스트라이크는 당시 PR의 달인이었던 에드워드 베네이즈[5]는 심리학자 A.A. 브릴과 함께 여성 흡연은 여성 해방의 상징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담배 소비량을 크게 늘렸다. 자유의 횃불 문서 참조. 이상론이 항상 좋은 쪽으로만 쓰이는게 아니라는걸 보여주는 사례. '페미니즘은 돈이 된다'의 첫번째 사례기도 하다.이 광고 이후로 늘어난 흡연량 때문에 폐단으로 인해 건강을 해친 자들 또한 크게 늘었다.[6]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는 동안 군대의 정식보급은 물론 미군은 아예 전투식량에 담배를 포함해 공급하는 통에 전세계에 걸쳐 대량으로 골초를 양성하는 혁혁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예를 들면 당시 미군이 지급하던 K-Ration의 경우 끼니마다 4개비씩의 담배가 레이션에 공식 포함되어 있다.# 미국서 나온 전시광고들을 보면 남녀공히 대놓고 흡연을 권장하며 여성이 담배를 물고 있는 장면들도 광고에 많이 나온다. 공식적으로 당시 미군은 전시 상황에서 심신을 혼미하게 하는 진정제인 술을 엄격하게 규제하는 대신 긴장 상태나 가혹한 상황에서 이성을 잡을 수 있는 각성제인 담배와 커피를 병사들에게 적극 권장했다.
반면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는 흡연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7]이었다. 그래서 흡연하는 병사, 장교들에게 담배의 공급을 막았다고 한다. 사족으로 패전 후 독일에선 미군의 담배가 대용화폐로 사용되기도 했다.[8]
4. 한국 상륙
우리 나라 사람이 몰래 남령초[南靈草](담배)를 심양(瀋陽)에 들여보냈다가 청나라 장수에게 발각되어 크게 힐책을 당하였다. 담배는 일본에서 생산되는 풀인데 그 잎이 큰 것은 7, 8촌(寸)쯤 된다. 가늘게 썰어 대나무 통에 담거나 혹은 은(銀)이나 주석으로 통을 만들어 담아서 불을 붙여 빨아들이는데, 맛은 쓰고 맵다. 가래를 치료하고 소화를 시킨다고 하는데, 오래 피우면 가끔 간(肝)의 기운을 손상시켜 눈을 어둡게 한다. 이 풀은 병진·정사년(1616~1617년)간부터 바다를 건너 들어와 피우는 자가 있었으나 많지 않았는데, 신유·임술년(1621~1622년) 이래로는 피우지 않는 사람이 없어 손님을 대하면 번번이 차[茶]와 술을 담배로 대신하기 때문에 혹은 연다(煙茶)라고 하고 혹은 연주(煙酒)라고도 하였고, 심지어는 종자를 받아서 서로 교역(交易)까지 하였다. 오래 피운 자가 유해 무익한 것을 알고 끊으려고 하여도 끝내 끊지 못하니, 세상에서 요망한 풀이라고 일컬었다. 심양으로 굴러 들어가자 심양 사람들도 또한 매우 좋아하였는데, 오랑캐 한(汗)은 토산물(土産物)이 아니라서 재물을 소모시킨다고 하여 명령을 내려 엄금했다고 한다.
― 인조실록 37권, 인조 16년(1638년) 8월 4일 갑오 1번째 기사
― 인조실록 37권, 인조 16년(1638년) 8월 4일 갑오 1번째 기사
조선에는 임진왜란 때 전리품으로 일본으로부터 고추, 호박 등과 함께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당시엔 남령초(南靈草), 연다(煙茶), 연주(煙酒), 담박괴(淡泊塊), 담파고(談婆姑), 담바구 등등 다양하게 불렸다. 현재 남아있는 문헌 중 가장 오래된 담배 언급은 1614년 이수광이 펴낸 지봉유설이다. 그리고 여기서도 약초로 와전되어 있다(…). 서구와는 다르게 말아 피우는 시가 대신 파이프 담배라 할 수 있는 '곰방대'부터 들어왔다. 조선시대 담뱃대의 길이마저 반상과 권력의 차이를 반영했으며 양반님네들이 피우던 장죽이 서민들에게 넘어오면서 곰방대로 간소화되었다. 담배라는 이름은 '조끼'(jaque)나 '빵'(pão)처럼 포어 tabaco의 일본식 표기인 タバコ가 담바고로 전해진 것에서 유래되었다. 어중에 ㅁ이 추가되어 음차된 이유는 당시 일본어의 비탁음화 때문이다. 담배를 만주어로 ᡩᠠᠮᠪᠠᡤᡠ(dambagu)라고 불렀는데, 위의 기록에서 보이듯이 조선의 담배가 청나라에 유입되어 인기를 끌면서 담배의 명칭으로 조선식 발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연장자 앞에선 안경도 쓰지 않는 게 예의였던 조선이지만 의외로 담배에 대해서는 그렇게까지 간섭을 하지 않아 상대적으로 남녀노소 모두 자유롭게 담배를 피었다. 서양처럼 여성흡연을 금기시하는 문화도 없어서 조선시대 담배와 가장 친숙한 직업군 중 하나가 궁녀였다. 서당에서도 훈장과 학도가 같이 맞담배를 피우고 심지어는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담배 피우라고 해놓고 귀엽다고 칭찬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어린아이들이 아무런 제한없이 담배 물고 다닌 풍경이 조선말 외국인들 기록에까지 꾸준히 나온다.
인터넷상에 지독한 혐연가인 광해군에 의해 어른 앞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이 한국의 예절이 되었다는 주장이 광범위하게 퍼져있는데 이건 사료가 아니라 이성주의 엽기조선왕조실록이 출처로 근거없는 이야기다.
대낮 큰 길가에서 홀옷 차림으로 담뱃대를 피워물고 대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어찌 할 수 없는 지경입니다. 앞으로 선비라는 이름으로 온갖 패악질을 해도 가만 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하지만 조선시대에도 어른 앞에서 담배를 피는 것을 어느 정도 제지하였던 것은 사실이며, 아예 금기가 없었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채제공과 유생의 충돌사건. 채제공의 위의 발언에서 담배가 패악질 중 하나로 언급된 것처럼, 웃 사람 앞에서 허락없이 담배를 피는 것은 올바르지 못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조선 왕 중에선 정조가 술과 함께 담배를 즐겼지만, 아들 순조는 혐연가라서 "애들이 젖만 떼면 담배부터 입에 문다"며 한탄했다고 한다.
실학자 이익이 자신이 접한 것들을 여러 주제에 걸쳐 기술한 성호사설에 담배에 관한 부분이 나와 있다.
“우리나라에 담배가 많이 유행된 것은 광해군(光海君) 말년부터 시작되었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로는, 남쪽 바다 가운데 있는 담파국(湛巴國)[9]이란 나라에서 들어온 것인 까닭에 속칭 담배[湛巴]라 한다는 것이었다. 어떤 이가 태호 선생(太湖先生)[10]에게, “지금 이 담배란 것이 사람에게 유익한 물건입니까?”고 묻는다. 태호 선생은, “담배란 가래침이 목구멍에 붙어 뱉아도 나오지 않을 때 유익하고 구역질이 나면서 침이 뒤끓을 때 유익하며, 먹은 것이 소화가 안 되고 동작이 나쁠 때 유익하고 가슴이 조이면서 신물이 올라올 때 유익하며, 한겨울에 추위를 막는 데 유익한 것이다.”[11]고 대답했다. 어떤 이는 또, “그러면 담배는 사람에게 유익하기만 하고 해는 없다는 말입니까?”고 묻는다. 태호 선생은, 〈몸에 이롭고 해로움을 따진다면〉 해가 더 심할 것이다. 안으로 정신을 해치고 밖으로 듣고 보는 것까지 해쳐서 머리가 희게 되고 얼굴이 늙게 되며, 이가 일찍 빠지게 되고 살도 따라서 여위게 되니, 사람을 빨리 늙도록 만드는 것이다. 내가 이 담배는 유익한 것보다 해가 더 심하다고 하는 것은 냄새가 나빠서, 재계(齋戒)하여 신명(神明)을 사귈 수 없는 것이 첫째이고, 재물을 없애는 것이 둘째이며, 세상에 일이 많은 것이 진실로 걱정인데, 지금은 상하노소를 막론하고 해가 지고 날이 저물도록 담배 구하기에 급급하여 한시도 쉬지 않으니 이것이 셋째이다. 만약 이런 마음과 힘을 옮겨서 학문을 닦는다면 반드시 대현(大賢)이 될 수 있을 것이고, 글에 힘쓴다면 문장도 될 수 있을 것이며, 살림을 돌본다면 부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주역(周易)》에, ‘상륙(上六)은 오르는 이치에 어두우니, 곧고 바른 데에 한결같이 쉬지 않는 것만이 이롭다.’ 했다.”고 답하였다.” - 성호 이익, 성호사설(星湖僿說) 만물문(萬物門) 남초(南草)편
보다시피 담배가 대단히 해롭다며, 오죽하면 담배 구하러 다닐 시간에 공부하고 돈 벌면 뭐라도 되겠다며 비판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당시에 대단히 담배가 널리 퍼져 있던 것과, 흡연이 영 좋지 않은 행동이라는 인식 역시 존재했던 것을 알 수 있는 대목. 담배가 해롭다는 이유로 제시된 내용이 오늘날의 상황과 매우 비슷한 것이 담배 피우면 건강에 안 좋고 돈 많이 드는 건 당연히 옛날이라고 다를 바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 말고도 담배가 가져온 부작용으로 쌀 생산량의 감소를 드는데. 특용작물을 팔면 같은 면적에서 쌀농사를 할때보다 몇십배 이득이라는 말에 너도나도 쌀농사를 포기하곤 해서 재정적, 의식주적으로 골치였던 시기였기에 담배 때문에 굶주린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12] 사실 담배가 커피, 인삼 수준은 아니지만 땅의 기력을 빨아들여 크게 황폐화시키는 부작용이 있기에 더더욱 이런 말이 나올만도 하다. 미국 초기 개척시대에 원주민들의 땅을 야금야금 점령한 것도 당시 주력 수출품인 담배를 심을 땅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구한말(대한제국기)에 이르면 그 곰방대조차 호주머니에 들어갈 정도로 간소화된다.[13] 궐련은 개화기를 전후해서 생긴 것으로 보이며, 초기에는 독하고 비린 맛이었으나 이후로는 1mg 등 약한 담배가 꾸준히 나오고 있다. 과거 한국에서는 타르함량 10mg 이상의 담배는 팔지 못했다. 이 때문에 외국에서는 10mg 이상으로 팔리는 다비도프, 럭키 스트라이크 등도 모두 타르 함량을 상당히 깎아내 출시해야 했다. 현재는 타르 함유량 제한이 없어졌으나, 고타르 담배가 인기없는 국내 사정상 타르 함유량 10mg을 넘기는 담배를 찾기 힘들다.
일제강점기 직전인 1905년에는 일제에게 빚을 갚기 위해 대한매일신보에 '금연 동맹선언문'이 게재되기도 했다. 빚이란 일종의 강제적 차관으로, 조선을 경제적으로 지배하고자 하는 의도가 들어간 차관을 떠안겨 생겨난 빚이었다. 금연하여 담배값을 아껴 빚을 갚자는 운동이었고, 완전히 끊을 건 없이 몇 달간만 담배값을 모으면 빚을 갚을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기생들이나 고종도 운동에 동참했다고 한다. 이 운동은 결실을 맺어 실제 일부 빚을 갚기는 했다. 그러나 일본에서 수가 틀어지자 또 차관을 떠안기는 바람에 결국 실패. 이때 발생한 웃지 못할 아이러니로, 담배를 끊은 사람들 상당수가 대용품으로 은단을 구입했는데, 이게 일본 수입품이었다.
일제강점기에도 담배가 건강에 해롭다는 인식은 식자층 사이에서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며, 종교계와 사회 계몽 세력이 주축이 된 금연/금주 운동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이미 시작한 사람에게는 담배란 아무래도 끊기 힘들었을 뿐 아니라, 의료 여건이 미비했던 농촌 지역에서는 기생충에 대한 상비약으로써 쑥뜸 정도의 대접을 받으며 사용되었기 때문에 큰 의미가 없었다. 담배의 유해성을 인식하는 사람들마저도 '독한 싸구려 담배는 해롭지만 순한 고급 담배라면 괜찮다' 정도의 안이한 인식을 지닌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조선 내 흡연자 비율은 여전히 높았다. 게다가 당시 조선총독부는 흡연에 대해 관대했으며, 총독부 주도의 담배 전매제를 운영하면서 담배 판매를 쏠쏠한 수입원으로 삼았기에, 괜히 손해를 입으면서까지 금연 운동을 전개할 이유가 없었다.
한국에서 최초로 자체제작한 담배는 1945년 광복을 기념해서 바로 만들어진 승리 담배. 그 다음으로 동년의 장수연이 이어졌고, 이듬해 1월에 백두산, 무궁화, 백구 등이 생산되면서 국산 담배 역사가 시작되었다. 자세한 것은 링크 참고. 덤으로 한국 담배 가운데 긴 역사를 자랑하는 것은 1949년[14]에 제조가 시작되어서 1981년 11월에 단종된 군용담배 화랑이다.
참고로 북한 담배는 한국산과 차원이 다를 정도로 지독하다고 한다. <남쪽손님>을 보면 경수로 공사 일로 북한에 가서 일하던 한국 관계자들이 북한 측 인사들과 어찌 친해져서 담배를 교환하여 서로 피웠더니 북한 관계자는 "뭔 놈의 담배가 피우나마나한 느낌이냐?" 반응이었고 한국 측 관계자들은 담배 피우면서 눈물이 날 정도로 독한 거에 놀랐단다. 기 들릴이 그린 '평양'이라는 만화[15]에서도 보면 같이 일하는 북한인이 담배를 피는데 얼마나 지독한지 근처에 있으면 저절로 기침이 나왔다고. 월북군인 찰스 로버트 젠킨스의 회고록을 보면, 북한에서 담배라고 지급해 준 물건들은 하도 금방 타들어가서 침으로 축축이 적시지 않으면 단 3모금도 빨 수 없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아직까지 어른들에게 선물로 담배를 보루 (10갑) 단위로 사다 드리는 문화가 있는데 북한에서는 뇌물로도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수단이라 담배를 안 피워도 담배를 구매하면 제법 유용하다. 사용처도 다양해서 기차표를 얻는다거나 시장에서 자리를 얻는다거나, 열차에 짐을 싣는다거나[16], 뇌물을 바칠 때나 향응접대를 할 때에도 고위층들에게 비싼 담배를 주는것은 당연지사다. 북한 국내에서도 많은 담배가 생산되지만, 가장 인기있는 것은 이른바 고양이 담배라 불리는[17] 영국 RBH사의 CRAVEN "A"로 북한 내에 합작공장이 건설되어 이곳에서 담배를 생산한다. 장마당에서 보통 1갑에 3,000원 정도에 팔린다고 하는데, 북한에서 규정상 현금으로 지급되는 월급은 아무리 당간부라도 1만원을 넘지 못하는 것을 보면[18] 엄청난 고가상품이다. 보통 북한 중산층들이 월 생활비로 15~20만원 정도 쓴다는 점을 감안해도 한국에서 1갑에 3~6만원 하는 수준. 다만 요즘에는 고양이 담배는 한 물 갔고, 2012년 즈음부터 중국산 '장백삼' 담배가 주요 뇌물의 지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남한에서는 그나마 정책적인 노력에 힘입어 흡연율이 조금씩 줄고 있는 추세지만, 북한은 아직도 아시아 2위의 흡연율을 기록할 정도다. 북한 매체에서 말로는 금연정책을 취한다고 떠들지만, 애초에 먹고 살기 힘든 주민들이 건강 따위를 챙길 리가 없다. 어떻게든 낙을 찾으려 마약 구매도 서슴치 않는 판이다보니 차라리 담배를 피우는 게 애교로 보일 지경. 더군다나 아직도 담배 자체가 사회적인 지위와 권력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으니 인식 개선이 쉽지 않다.
5. 효과
과거 편두통, 매독 등에 효과가 있는 만병통치약으로 유명하였다. 북미 원주민들 사이에서 한국의 인삼과 같은 취급을 받았으며, 그것이 그대로 유럽에도 이어지게 된다. 유럽의 몇몇 고서적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한국의 인삼을 소개하면서, "북미 원주민들 사이에서의 담배와 같이 인삼은 한국에서는 만병통치약으로 불린다"는 소개도 종종 있을 정도이다.소설 로빈슨 크루소를 보면 그 당시 담배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잘 알 수 있다. 담배 잎을 럼주에 침지시켜 마시며 열병을 이겨내는 묘사가 나온다. 물론 실제로 했다가는 니코틴 중독 때문에 저승길에 가기 딱이다. 작중에서도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났는데 얼마나 잠들어 있었는지 몰라 날짜 계산을 할 수 없었고, 아마도 최소한 하루 이상을 잠들었다고 추측할 뿐이었다. 작중 설명으로는 '토인들은 모든 병을 담배 잎으로 치료한다'라고 하는데 로빈슨이 체질적으로 건강했고, 섬에 들어와서도 영양섭취를 충분히 했기에 스스로 이겨냈다고 보는게 맞다. 사실, 담배를 약으로 쓰던 시기는 담배보다 훨씬 더한 것도 약으로 쓰던 시기이다. 당시에는 아무래도 환자 개개인의 목숨보다는 치료가 되는가 안되는가에만 초점을 맞추었기에 가능했던 일이고, 오늘날 의학이 발달하고 현대적인 관점에서의 인권이라는 것이 생겨난 이후부터는 당연히 환자를 한방에 골로 보낼 수 있는 그러한 위험한 물질은 효과 유무를 떠나서 사용을 안 하는 추세로 흘러 오늘날에 이르게 된다.
명말~청초에 쓰여진 경악전서에서도 연(烟)이라는 이름으로 담배를 써놓았는데 거의 만병통치약 수준이다. 저자가 골초였다는 야사가 남아있다. 여기서는 담배가 중국 남부에서 퍼지기 시작해 북상했다고 한다.
1950년대까지 집안 식구들이 배가 아픈 아이에게 담배를 물렸던 적이 있었다. 과학적으로 보면 당시 구충제가 널리 퍼지지 않았던 시점에서 뱃속에 기생충이 너무 많이 자라있는 경우에 담배를 피움으로써 잠시 기절시킨 것. 담배연기는 기도를 통해 들어가는 것 이외에도 식도에도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50년대에서는 아이들이 담배를 태우는 모습을 볼 수도 있었다. 뭐 이 시절 시골에서는 양귀비꽃도 약으로 쓰여서 어린아이가 아프면 이 가루를 달여마시게 했던 적도 있긴 하지만.
물론 이상의 담배 예찬론은 과학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대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고, 오늘날 담배는 건강에 나쁜 기호품일 뿐이다.
[1] 기원전 이집트 미라에서 니코틴이 대량 검출되었다는데, 이는 구대륙에도 담배가 자생했거나, 기원전부터 신대륙과의 교류가 있었거나 둘 중 하나를 의미한다. 다만 니코틴은 담배에만 들어있는건 아니다. 가지에도 니코틴이 소량 들어있기 때문에 여기서 추출되었을 수도 있다. 비판적인 학자들은 이 니코틴이 19세기에 이 미라를 발굴한 발굴대원이 골초여서 니코틴에 오염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2] 당장 아래 서술된 조선을 봐도 그렇다.[3] 의외로 담배가 위험하다는 걸 체감하는 사람들이 꽤 많긴 했다. 당장 피울 때부터 무지막지하기 독하다. 다만 몸에 좋은 약이 입에는 쓰지, 혹은 술도 이 정도는 독하다, 적응하면 괜찮다 식으로 넘어간 게 크다. 담배를 피운 사람들이 일찍 운명을 달리하는 모습을 보고 담배의 해악성을 눈치채고 이에 대해 논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암이 기생충 때문에 생긴다고 하던 시절이라 담배가 얼마나 해로운지 정확히 알지 못했기에 술이나 중금속, 독초만큼 중독이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 게다가 남성적인 이미지가 붙어 어딘지 모르게 강한 인상을 주는 담배에 대한 이런 주장은 다소 설득력이 떨어졌다. 특히나 예나 지금이나 보통 한번도 안 피워본 사람들이 금연을 주장했고 한번 피우기 시작하면 흡연자의 편으로 돌아서버렸기 때문에 '내가 피워봤는데 좋던데?' 라는 경험은 착실히 쌓이는 반면 '내가 피워봤는데 별로더라' 하는 데이터는 전혀 나오질 않아서 더욱 그랬다.[4] 당시에는 건강 악화의 측면이 크게 부각되지 않았고, 오히려 구취 제거와 정신 안정에 특효약인 약초 취급을 받았다.[5] 1891~1995.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조카로 알려졌으며, 든든한 아침식사로 건강해지자는 PR로 베이컨 소비량을 크게 늘린 경력이 있다. 더불어 104세라는 경이로운 장수를 누리며 갔다.[6] 위에서 말한 베이컨 소비량 증가로 고지혈증이 크게 늘었으며, 과테말라를 기점으로 하는 미국의 과일 유통 회사를 위해 선거로 당선된 좌파 정권을 단 몇 문장만으로 공산당과 내통했다고 누명을 씌워 쿠데타로 몰락하게 만들기도 했다. 체 게바라가 미국에 학을 떼게 만든 사건이기도 하다. 이런 영향력 때문에 괴벨스가 이 사람이 쓴 책을 탐독했다는 말도 있다.[7] 종종 히틀러가 담배는 술과 매독를 가져오고 온갖 학살을 저지른 백인들에게 가장 크게 복수한 미국 원주민들의 특산품이라는 말을 했다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말 자체는 아득히 오래전부터 있던 말이라 히틀러과 무관하다.[8] 당시 기록을 보면 패전 전에도 수용소 등지에서는 대체화폐로 많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아우슈비츠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노동수용자들에게는 매일 담배 3개비가 보급되었다. 악착같이 안피우고 모아두었다가 돈으로 쓰기도 했다고.[9] 명나라의 홍무제에게 조공을 바쳤던 동남아시아의 소국이다. 오늘날의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 근방으로 비정되나 확실하지 않다. 당연하지만 명칭의 유사성에 기반한 민간어원일 뿐으로, 담파국은 《명사》에 딱 한번 등장한 뒤로는 전혀 사료에 나오지도 않는다.[10] 실학자 반계 유형원의 스승인 태호 이원진을 가리킨다. 이 분은 청백리로 유명했고 제주목사를 지낸 경험을 바탕으로 탐라지를 저술했는데, 제주목사 시절에 헨드릭 하멜의 표류를 경험했다.[11] 실제로는 따뜻하다는 거(...) 빼고 전부 사실이 아니다. 담배는 가래를 없애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가래를 유발하며, 소화를 방해하고,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게 만들며 가슴 통증을 악화시킨다. 따뜻한거야 담배가 아니라 불의 효능이니 담배는 진짜 백해무익한 것이다.[12] 농업, 그중에서도 쌀농사를 근간으로 치던 조선에서는 이러한 특용작물의 범람으로 인해 쌀 생산이 줄어들까 우려했다. 흥부전에서 놀부가 흥부 쫓아내고 한 악행 중 하나가 소작농들 쫓아내고 그 땅에 특용작물 심는 판본이 있을 정도.[13] 개혁운동의 일환으로 간소화된 것이었다. (비슷한 이유로 갓의 크기도 제한되었다.) 그전까지는 권력과시용으로 긴 장죽을 피는 경우가 많았다. 봉산탈춤에서 말뚝이가 양반 조롱하려고 평민들도 낚시대처럼 긴 담배 피우라고 하자 양반들이 역성을 내는 장면이 나온다.[14] 5월에 판매가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6월에 제조가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약간의 차이는 있다. 다만 창군이 이뤄진 1948년에는 제조가 되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15] 코르토 말테제 애니 하청을 위해 북한을 방문한 경험을 그린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2003년에 출판되었으며 지금은 절판되었다.[16] 북한 열차에는 개인 수하물 제한 규정이 있어서 규정 이상의 짐을 싣지 못하게 되어 있다. 때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1인당 손가방 2개 정도.[17] 별건 아니고 갑에 검은 고양이가 그려져 있다.[18] 아무리 잘 나가는 국가기관이나 외화벌이 기업이라 해도 임금의 대부분은 식량을 비롯한 현물로 지급하게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