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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4 22:08:06

퀸투스 아우렐리우스 심마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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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투스 아우렐리우스 심마쿠스
라틴어: Quintus Aurelius Symmachus
생몰년도 345년 ~ 402년
출생지 로마 제국 이탈리아 로마
사망지 로마 제국 이탈리아 로마
지위 노빌레스
국가 로마 제국
아버지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아비아니우스 심마쿠스
부인 루스티치아나
자녀 갈라, 퀸투스 파비우스 멤미우스 심마쿠스
직업 로마 제국 원로원 의원, 프라이펙투스 우르비, 집정관
로마 제국 집정관
임기 서기 391년
1. 개요2. 생애3. 가족4. 저서

[clearfix]

1. 개요

로마 제국의 원로원 의원, 프라이펙투스 우르비, 집정관. 당대 최고의 라틴 연설가로 추앙받았으며, 로마 제국의 기독교화로부터 로마 다신교 전통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2. 생애

심마쿠스 가문은 콘스탄티누스 1세 치세 때 원로원 의원에 진출했다. 아버지 루키우스 아우엘리우스 아비아니우스 심마쿠스는 여러 차례 폰티펙스에 선임되는 등 로마 다신교 숭배 지지자였으며, 340년 또는 350년 "곡물 공급의 지사"(praefectus rei frumentariae)를 맡았다. 360년 황실 근위병 사령관의 부하이자 대리인인 비카리우스 우리비스 로마에(vicarius urbis Romae)를 맡았으며, 361년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파견된 로마 원로원 대표단의 일원이었으며, 364년 또는 365년 프라이펙투스 우르비를 맡았다. 377년 집정관으로 예정되었지만 그 전에 사망했다. 퀸투스 아우렐리우스 심마쿠스는 서신에서 아버지가 수사적 재능이 훌륭했으며 시인으로서도 탁월한 재능이 있다고 칭송했다.

심마쿠스는 라틴어 문학과 수사학을 철저히 교육받았고, 그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365년 지방 관직을 맡았고, 369년 황제 즉위 5주년을 맡아 원로원의 대표단으로서 트리어에 있는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궁전으로 가서 황제에게 금관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트리어에서 부르디갈리아 출신으로 수사학 교수직을 맡고 있었으며, 모젤 강에 관한 시인 모젤라의 집필자로 알려진 아우소니우스를 만났다. 현존하는 심마쿠스 편지 중 30개 이상이 아우소니우스에게 보낸 것일 정도로, 두 사람의 우정은 돈독했다. 기독교에 좀더 호의적이었던 아우소니우스는 숫자 3을 운율과 주제별로 변형하고 다음 구절로 결론을 내린 시 <그리푸스 삼항수(Griphus ternarii numeri)>를 심마쿠스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3이 가장 크며, 3이 유일한 하느님이시다!"

370년 트리어에서 세번째 집정관에 취임한 발렌티니아누스 1세를 칭송하는 연설을 해 황제의 칭찬을 받았으며, 같은 해 로마로 돌아온 뒤 373~374년 로마의 곡물 창고이자 서방의 가장 중요한 속주 중 하나인 아프리카 속주의 총독을 역임했다. 이때 그는 아프리카에서 군사 활동을 수행하던 대 테오도시우스과 친분을 맺었다. 대 테오도시우스는 군 사령관으로서 피르무스의 반란을 진압하고 마우레타니아 카이사리엔시스 일대의 심마쿠스 영지를 회복시켰다. 375년 발렌티니아누스 1세가 사망한 후, 심마쿠스는 원로원에서 '트리게티우스를 위하여(Pro Trygetio)' 연설을 했는데, 그 내용은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후계자인 그라티아누스를 추켜세우는 것으로, 수사학적으로 탁월한 논변을 선보여 큰 호응을 얻었다고 한다. 이후 심마쿠스는 자기 연설문을 출판했는데, 오늘날 팔림프세스트[1]에 단편적으로 전해진다.

이후 절친한 친구 아우소니우스가 그라티아누스의 가정교사로 선임되면서, 심마쿠스에게 유리한 정치적 환경이 조성되었다. 심마쿠스는 원로원 앞에서 그라티아누스의 연설을 낭독하는 역할을 맡아, 최근에 그라티아누스가 게르만족을 상대로 연전연승해 장병들의 칭송을 받고 있다고 밝혔다. 379년 그라티아누스가 알라만니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후, 심마쿠스는 다시 황제의 승리를 칭송하는 연설을 원로원에서 행했다. 한편, 심마쿠스는 사제단의 일원으로서 베스타 여사제였던 프리미게니아가 순결을 잃었다는 비난을 조사한 뒤 조상의 관습에 따라 프리미게니아를 포르타 콜리나[2]에 산 채로 매장하고 연인을 채찍형으로 처형하라고 권고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라티아누스가 로마 다신교 박해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하자, 그는 황제의 정책에 거세게 반발했다. 382년, 그라티아누스는 베스타 숭배에 대한 국가 재정 지원을 중단하고 카피톨리누스 언덕에서 승리의 제단을 철거하라고 명령했다. 심마쿠스는 원로원 사절단의 대표로서 밀라노로 가서 그라티아누스에게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 때문에 로마에서 추방되었다. 383년 그라티아누스를 처단하고 로마 황제가 된 마그누스 막시무스의 신임을 얻어 정계에 복귀했고, 384년 프라이펙투스 우르비에 선출되었다. 이후 그라티아누스의 아우이며 이탈리아를 다스리는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2세에게 승리의 제단을 복원하고 베스타 숭배 의식에 대한 국가 기금 지원 재개를 청원했다.
로마 여신이 참석하여 황제께 이렇게 말했다고 상상해보십시오.
"가장 존경하는 황제이시며 조국의 아버지이시여. 종교 관습을 준수하면서 이렇게 된 제 나이에 경외심을 가지십시오! 조상의 제사를 지키게 하소서! 이는 죄가 아닙니다. 나는 자유롭게 태어났으므로 나의 전통에 따라 살게 하소서! 이 종교는 세상을 내 법에 복종시켰고, 이 신성한 관습은 한니발을 도시 성벽에서, 갈리아인을 카피톨리누스 언덕에서 쫓아냈습니다. 그때 구원받았거늘, 지금은 어찌하여 나를 비난하십니까? 어떤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지 곧 알게 될 것입니다. (중략) 우리는 조상의 신들과 조국의 신들의 평화를 구합니다. 개별 종교 실천의 목표를 하나의 통일체로 이해하는 것이 공정합니다. 우리는 같은 별을 올려다보고, 하늘을 공유하며, 같은 우주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어떤 시스템에서 진실을 조사하는 게 무슨 상관입니까? 한 길만으로는 그러한 숭고한 신비를 분별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학술적인 토론이 될 것입니다. 현 상황에서는 주장이 아닌 요청을 하고있습니다."

그러나 밀라노 대주교 암브로시우스는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가 모든 비기독교 신들과 마찬가지로 악마이기 때문에, 그녀를 기리는 제단을 세우는 건 파문으로 징계받을 것이라고 위협하는 편지를 발렌티니아누스 2세에게 보냈고, 발렌티니아누스 2세는 이에 따라 심마쿠스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암브로시우스는 나중에 심마쿠스의 청원을 반박하기 위한 또다른 편지를 써서 대중에 공개하기도 했다.

384년, 심마쿠스는 원로원에서 프린켑스 세나투스("원로원 중 첫 번째")라는 명예 칭호를 수여받았고, 발렌티나아누스 2세는 자신의 세번째 집정관 취임식에서 연설을 하도록 심마쿠스를 초대했다. 또한 밀라노 시는 그를 수사학 의장 임명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심마쿠스는 당시 마니교 신봉자로서 로마에서 개인 강사로 일하고 있던 아우구스티누스를 수사학 의장으로 선택했다. 이렇듯 심마쿠스는 당대 최고의 수사학자로서 이탈리아 전역에서 추앙받았다. 그러나 그는 곧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다.

심마쿠스는 프라이펙투스 우르비로서 로마 시의 신전과 미술품 절도 사건을 조사해 신전 강도들을 체포했다. 그러자 그의 정적들은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설득해 신전 강도들을 풀어주고 심마쿠스의 억압적인 행동에 경고하는 칙령을 발송하게 했다. 심마쿠스는 황제에게 각서를 보내 비난에 대해 자신을 변호하는 데 성공했지만, 385년 그의 추종자였던 프라에텍스타투스가 집정관 직을 수행하던 중 사망하자 기독교 세력의 음모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줄 사람이 없다고 여기고 발렌티니아누스 2세에게 자신을 프라이펙투스 우르비 직책에서 해임해달라고 청원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러다가 정적들이 심마쿠스의 아내 루스티치아나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고 동료 관리를 축출한 후에야, 심마쿠스는 로마를 떠나 캄파니아에 있는 자신의 영지로 향했다.

387년, 갈리아의 황제 마그누스 막시무스가 이탈리아를 침공해 발렌티니아누스를 축출했다. 그러나 388년 8월 동방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에게 패배한 뒤 곧 생포된 후 처형되었다. 이때 심마쿠스는 원로원을 대신하여 마그누스 막시무스의 추도사를 발표했다. 이에 찬탈자를 옹호했다는 비난에 직면한 그는 교회에 숨은 뒤 노바티아누스 주교의 중재로 처형을 모면했다. 이후 수년간 조용히 지내던 그는 391년 테오도시우스 1세의 지명을 받고 집정관에 선임되었고, 그해 초 밀라노에 있는 테오도시우스 1세의 궁정으로 가서 자신의 승진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 이때 심마쿠스는 테오도시우스에게 추도사를 선포하면서, 이를 통해 비기도교 원로원 의원들의 우려 사항을 제시했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이 연설을 듣고 분노해 그날 심마쿠스를 밀라노에서 패딩이 없는 여행용 마차에 태워 보낸 뒤 궁정에서 100마일 이내로 접근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 후 테오도시우스 1세는 희생제, 사원 방문 및 이교 관습을 금지했으며, 사원 보전을 위한 기금 조성도 금지했다. 이에 깊은 반감을 품은 심마쿠스는 392년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사망한 뒤[3] 황위에 오른 에우게니우스를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에우게니우스가 승리의 제단을 복원하도록 독려했으며, 393년 검투사 경기를 계획했지만 기독교 의원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394년 9월 프리기두스 전투에서 테오도시우스 1세가 에우게니우스를 패사시키면서, 테오도시우스 1세가 로마 제국의 유일한 황제로 등극했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자신의 기독교 우선 정책을 받아들이는 대가로 심마쿠스를 비롯한 원로원 의원들을 사면했다.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사망했을 때 스틸리코, 암브로시우스와 함께 테오도시우스의 임종을 지키고 유조를 들었으며, 우호적인 행정관들에게 에우게니우스에 의해 집정관이 되었다가 에우게니우스가 패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살한 비리우스 니코마쿠스 플라비아누스의 후손들이 "플라비아누스가 집정관을 맡는 동안 모은 수입을 모두 갚으라"는 명령으로 인해 빚더미에 올라 파멸할 지경에 놓였다며 선처를 호소했다. 그 해 가을에는 원로원으로부터 서방의 황제 호노리우스가 머물고 있는 밀라노로 파견되어 아프리카에서 길도가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로마에 곡물 공급이 끊겨 곤란을 겪고 있다고 호소하는 사절단을 구성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심마쿠스는 로마에 도착한 뒤 아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대중 봉기가 매일 벌어지고 있고, 많은 귀족들이 시골로 도망가고 있으며, 나 역시 운명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한탄했다. 심마쿠스는 일단 비축된 식량을 최대한 분배해 로마 민중의 분노를 달랬지만, 스틸리코가 로마에 도착하기 전까지 사절단 구성을 해내지 못했다.

397년 호노리우스와 동방의 황제 아르카디우스 사이의 갈등의 중재자로 임명되었고, 원로원에게 길도를 국가의 적으로 선언하고 전쟁을 선포하도록 권고했다. 이후 로마 외곽 별장에 머물고 있다가 전쟁을 싫어하는 로마 민중들의 습격을 받고 오스티아로 달아났다. 며칠 후 프라이펙투스 우르비로부터 반군이 이미 폭력을 후회하고 있으니 돌아오라는 서신을 받고 로마로 돌아왔다. 399년 스틸리코의 호노리우스 궁정 초대를 거절하고 여생을 연구에 몰두하다가 402년에 "질병에 걸려서 밀라노로의 사절단 여행을 중단해야 했다"는 서신을 작성한 것을 끝으로 더 이상 언급되지 않았다. 많은 학자들은 그가 402년에 사망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그의 아들 퀸투스 파비우스 멤미우스 심마쿠스가 제작한 심마쿠스의 비문에는 아래의 내용이 기술되었다.
"퀸투스 아우렐리우스 심마쿠스, 가장 저명한 사람, 재무관, 법무관, 고위 제사장, [...] 아프리카 총독, 프라이펙투스 우르비, 집정관, 박식한 연설가"

3. 가족

4. 저서


[1] Palimpsest, 글을 썼다가 다시 사용하기 위해 긁거나 세탁하여 글을 지운 원고 페이지나 두루마리[2] 고대 로마의 세르비우스 성벽에 있던 성문[3] 대외적으로는 자살로 공표되었지만, 세간에서는 군 사령관 플라비우스 아르보가스트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