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유니우스 티베리아누스 라틴어: Gaius Junius Tiberianus | |
전체이름 | 가이우스 유니우스 티베리아누스 Gaius Junius Tiberianus |
생몰년도 | 230년경(추정) ~ ? |
지위 | 원로원 의원, 집정관 |
국가 | 로마 제국 |
종교 | 로마 다신교 |
경력 | 제10군단 게미나 트리부누스 밀리툼 판노니아 사령관 집정관(265, 291) 프라이펙투스 우르비(291~292) |
가족 | 가이우스 유니우스 티베리아누스(아들) 푸블릴리우스 옵타티아누스 프로피리우스(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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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군인황제시대,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의 원로원 의원, 집정관, 장군. 265년, 291년 두 번에 걸쳐 집정관으로 있었다.2. 생애
악명 높을 정도로 신뢰할 수 없는 위서로 불린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티베리아누스는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와 관련 있다고 하며, 실제로 그는 아우렐리아누스, 프로부스와 깊은 연관이 있는 엘리트 군인이자 원로원 의원이었다.가이우스 유니우스 티베리아누스는 대략 230년경에 태어나, 첫 공적인 삶을 249년 필리푸스 아라부스 혹은 데키우스 시절 당시, 판노니아 지방 중 하나인 판노니아 수페리오르 속주의 빈도보나에 주둔한 제10군단 게미나에서 트리부누스 밀리툼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따라서 출신 가문은 원로원 귀족으로 평가받는다. 오랜 시간동안 판노니아 지역에서 군 경력을 쌓고, 판노니아 야전사령관으로 무수한 경력을 쌓은 뒤, 265년경 집정관에 임명됐다. 이후 291년 생애 두번째 집정관을 디오 카시우스의 증손자[1] 카시우스 디오와 함께 지냈고, 291년 2월 18일부터 292년 8월 3일까지 로마의 프라이펙투스 우르비로 있었다. 이때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안의 기록 속에는 아우렐리아누스의 전기를 쓴 작가로 추정된 익명의 인물이 티베리아누스와 이 부분을 논의했고, 그의 기억과 저서 등을 참고했다고 한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가 정통성이 부족하고, 출신 배경의 한계가 명확한 당시 집권자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깊게 연관된 만큼, 이 저서 작성 과정의 일이 꼬투리 잡혀 프라이펙투스 우르비에서 해임됐다. 티베리아누스는 이때 아우렐리아누스 일대기를 기록한 저자와 면담 후의 자신이 모신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의 애국심을 떠올리면서 그가 숭고한 정신으로 엄격하고 위대했다고 눈물을 흘리며 찬사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황제인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어거지로 꼬투리 잡혔다고 한다. 또 다른 주장에 따르면, 그가 자신이 존경하며 모신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의 일대기와 업적을 솔직히 적어 기린 책을 저술한 것이 당시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명으로 작성된 악명 높은 위서 주장과 상반된 까닭에, 본인의 정통성을 중시한 황제에게 미움을 받는 이유가 되면서 해임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이 사건 당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그를 프라이펙투스 우르비에서 해임시킨 뒤, 원로원에서 만든 법령을 내세워, 둘째 아들과 함께 원로원에서 제명한 뒤, 이들 부자를 사실상 정계에서 추방시키는 식으로 숙청했다고 한다.
이름 미상의 아내와 사이에서 두 아들을 뒀다. 장남은 이름이 똑같은 가이우스 유니우스 티베리아누스이다. 그는 293년과 303년 아시아 속주 총독을 지냈고, 아버지와 함께 아우렐리아누스, 프로부스의 지지자였다. 그는 동생 푸블릴리우스와 함께 콘스탄티누스 1세를 지지했는데, 아시아 속주 총독 임기 직후인 303년 9월 12일부터 304년 1월 4일까지 로마의 프라이펙투스 우르비로 재임했다.
차남은 푸블릴리우스 옵타티아누스 프로피리우스이다. 그는 아버지, 형과 함께 원로원 안에서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귀족이자 원로원 안에서 11위의 재력을 갖춘 원로원 의원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가 원로원에서 제명될 때, 모종의 이유로 연좌제에 엮여 추방됐다. 그러다가 콘스탄티누스 1세의 등장과 함께 콘스탄티누스에게 기용되면서 복귀했고, 325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소환해 중용할 만큼 큰 신뢰를 받았다. 이교도였던 것으로 알려진 인물임에도 대제가 306년부터 337년까지의 재위 기간 내내 큰 신뢰를 표하면서, 중용했다. 그래서 그는 대제가 처음 등장한 직후 명예회복을 한 뒤, 콘스탄티누스 왕조 아래에서 2번(325, 329)에 걸쳐 아카이아 속주 총독이 됐고, 그 후 두 번에 걸쳐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그 아들들의 추천과 신임으로 로마의 프라이펙투스 우르비를 지냈다. 첫 번째는 329년 9월 7일부터 10월 8일 사이이고, 두번째 임기는 333년 4월 7일과 5월 7일 사이였다.
[1] 손자로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