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Lucius Valerius Messalla | |
전체 이름 |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Lucius Valerius Messalla |
출생 | 미상 |
사망 | 미상 |
계급 | 파트리키 |
가족 | 부친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트라세아 프리스쿠스 모친 코엘리아 발비나 아내 클라우디아 아킬리아 프리스킬리아나 아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아킬리우스 프리스킬리아누스 막시무스 친척 발비누스 장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클레오불루스 |
경력 | 집정관(214년) 아시아 속주 총독(236~238) |
1. 개요
로마 제국 세베루스 왕조, 군인황제시대의 원로원 의원, 전직 집정관, 총독이다.카라칼라에게 게타와 지지세력이 살해될 때 살생부에 올라 죽임을 당한 전직집정관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트라세아 프리스쿠스의 아들로, 군인황제시대의 황제 발비누스 친척이다. 하지만 그는 푸피에누스의 친구이자 협력자로 세베루스 왕조 멸망 후 정국을 이끌었고,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238년 몰락한 이후 시작된 군인황제시대 동안, 아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와 함께 이탈리아 귀족 세력을 대표한 원로원 의원 중 구심점 역할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2. 생애
로마 시대의 비문과 기록에는 통상적으로 발레리우스 메살라으로 적혀 알려져 있다.아우구스투스부터 티베리우스 시대까지 총독, 집정관, 장군 등을 지내며 명성을 쌓은 세습 원로원 의원으로, 저명한 장군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메살리누스의 외손자 가이우스 빕스타누스 메살라 갈루스의 직계 후손이다. 그의 아버지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트라세아 프리스쿠스는 본래 루키우스 빕스타누스 메살라 트라세아 프리스쿠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의 일가는 직계조 가이우스 빕스타누스 메살라 갈루스가 출생 전부터 갈루스의 외조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메살리누스에게 직접 발레리우스 일족의 대표 파트리키인 메살라 가문의 코그노멘과 가문의 적통이라는 것을 상속받은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배경으로, 이 가문은 티베리우스 황제 시절부터 이미 메살라 가문의 데릴사위와 그 자녀들이라는 명분 아래에서 성씨만 빕스타누스일 뿐, 발레리우스 성씨로 인정받고 있었으며, 이들의 성씨 변경은 시간 문제로 여겨졌다. 그러다가 그의 아버지 트라세아 프리스쿠스가 성년식을 마친 뒤, 당시 로마 최고 명문가 규수와 결혼을 앞두고, 정식으로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메살리누스의 유지와 허락으로 인정받은 것을 공식화하면서 성씨를 발레리우스로 바꿨다. 이렇게 개창된 집안이 3세기부터 최소 서로마 제국 멸망과 동로마 제국 초기까지 로마를 대표한 파트리키로 찬사받은 신(新) 메살라 가문이다.
메살라는 트라세아 프리스쿠스와 그 아내 코엘리아 발비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코엘리아 발비나는 카라칼라의 절친, 친구 집단의 리더 중 한명인 발비누스의 친척 누이로, 가계는 2~3세기 내내 수많은 원로원의 정계인사를 배출한, 퀸투스 폼페이우스 팔코의 폼페이우스 팔코 가문과 1세기 때 활동한 섹스투스 율리우스 프론티누스의 피를 모두 물려받은 당대 최고의 명문가 출신 귀부인이었다. 이런 배경으로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메살라의 손자 이름엔 발비누스가 포함되어 있었다.
어릴 적의 삶은 미약하게나마 알려져 있다. 그는 발비누스의 친척으로, 친가와 외가 모두 위세가 대단했다. 더해 그리스계 로마 귀족인 원로원 의원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클레오불루스의 딸 클라우디아 아킬리아 프리스킬리아나와 일찍이 결혼했다. 장모는 186년 집정관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의 딸 아킬리아 프레스타나였고, 처가의 위세는 당시 엄청났다고 한다. 이런 배경으로 메살라는 212년 카라칼라가 2만명의 로마인을 잔혹하게 학살한 로마 대학살 당시, 그 첫 시작으로 아버지 트라세아 프리스쿠스가 파피니아누스, 루키우스 파비우스 킬로,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 등과 함께 잔혹하게 처형될 때, 게타 황제의 최측근 트라세아 프리스쿠스의 아들임에도 카라칼라조차 감히 건들 수 없었다. 여기에는 어머니의 사촌 또는 오촌이 발비누스였던 것도 한몫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런 배경으로 율리아 돔나는 아들 카라칼라와 함께 정치적 위기를 돌파할 목적으로 214년 집정관으로 카라칼라의 최측근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아피우스 수에트리우스 사비누스와 나란히 추천해 집정관 자리까지 내줬다.
하지만 메살라는 이 경력 이후, 전직 집정관임에도 세베루스 왕조가 무너지고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즉위해 236 ~238년까지 아시아 속주 총독으로 보낼 때까지 25년 가까이 모든 경력이 단절됐다. 이는 그가 목숨을 건지고, 가문을 존속시켰지만, 숙청만 면했을 뿐 세베루스 왕조에게 단단히 찍히거나 위험인물로 판단되어, 탄압받았다는 것을 뜻한다고 학자들은 일관되게 분석한다. 이런 배경으로 그는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235년 마인츠에서 로마군에게 불신임을 받고 몰락한 뒤, 전직 집정관 자격으로 총독 업무를 수행하는 이례적인 모습을 보였다.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에게 반기를 처음 들고, 군인황제시대의 난세를 심화시킨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 고르디아누스 3세의 등장 속에서 여섯 황제의 해부터, 아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와 함께 친척 발비누스보다는 푸피에누스와 가까웠고, 이들과 협력했다. 하지만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는 트락스가 몰락한 뒤 권력 투쟁을 했고, 이 과정 속에서 틈을 노린 고르디아누스 1세의 딸, 고르디아누스 2세의 여동생, 고르디아누스 3세의 어머니 안토니아 고르디아나가 프라이토리아니 일부를 움직여 두 황제를 잡아 고문하고 잔혹하게 죽였다. 이후, 메살라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고, 아들 막시무스만 고르디아누스 3세와 필리푸스 아라부스 몰락 직후부터 다시 등장한다. 따라서 메살라는 푸피에누스, 발비누스가 살해될 때, 함께 살해됐거나, 이후 고르디아누스 3세 시절 초반에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자녀로는 아내 클라우디아 아킬리아 프리스킬리아와의 사이에서 얻은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