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mponius Bassus 폼포니우스 바수스 | |
<colbgcolor=#8b0000><colcolor=#fecd21> 전체 이름 | ??? 폼포니우스 바수스 ???? [...]스투스 ??? Pomponius Bassus ???? [...]stus[1] |
출생 | 220년(추정), 로마 제국 피시디아 술라 영지 |
사망 | 271년 이후 |
직위 | 원로원 의원, 집정관, 프린켑스 세나투스 |
가족 |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프로쿨루스(외조부) 안니아 코르니피키아 파우스티나(외조모) 폼포니우스 바수스(211년 집정관)(아버지) 안니아 파우스티나(어머니) 폼포니아 움미디아(여자형제) 폼포니아 크라티디아(아내) 폼포니아 바사(딸) 이름 미상의 아들(아들) 폼포니우스 세베루스(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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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세베루스 왕조 말 ~ 군인황제시대의 원로원 의원, 서기 259년 정규 집정관이자 프린켑스 세나투스.아우구스투스가 두 번의 조정 헌법을 통해, "로마 황제 = 프린켑스 세나투스"라는 공식을 만든 이래, 황제 또는 황족이 아닌 원로원 의원임에도 합법적으로 프린켑스 세나투스에 지명돼, 그 직책을 행사한 원로원 의원 중 한명이다.
2. 생애
전체 이름은 씨족 성씨(노멘), 가문 성씨(코그노멘)인 폼포니우스 바수스와 이름 뒷 부분 일부인 "[...]stus" 정도만 확인된 원로원 의원이다.다만, 그의 이름과 경력이 남은 그리스어로 된 비문에 따르면, 폼포니우스 바수스의 프라이노멘(개인이름)은 일부 추정이 가능하다. 아마도 개인 이름 또는 중간에 사용된 전체 이름 일부로 추정되는데, 이 비문에 따르면, "(...)β(...)"로 적혀 있다. 따라서 그의 외조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프로쿨루스 이름 중 하나인 티베리우스로 확인됐다는 추정이 많다. 따라서 이 추론이 확실할 경우, 그의 이름 중 맨 뒤의 이름 해석은 파우스투스라는 평 아래에서, "티베리우스 폼포니우스 바수스 파우스투스"로 보는 견해가 많다.
그렇지만 "β"는 다른 이름을 나타낼 수도 있어, 이 부분에서 여러 이름이 오르내린다. 예를 들면 (Φλά)β(іος)라고 해석하면, (Fla)b(ios)가 되어 이름 중간에 플라비우스로 볼 수 있으며, (Ούι)β(іος)로 해석하면 라틴어로 Ubius로 해석돼, 유비우스라고 해석할 수 있다는 추론이다. 하지만 대체로는 서기 1세기 후기부터 로마귀족들의 이름이 매우 길어지면서, 본인 부모의 조상들 이름을 전부 때려 박는 식으로 본인 혈통과 가문의 위엄을 강조한 점, 그의 이름 뒤에 어머니의 이름 파우스티나가 남성형으로 변형된 파우스투스라는 점 등으로 인해, 폼포니우스 바수스의 전체 이름 중 2안, 3안의 주장은 추정이라는 평이 많다.
할아버지는 서기 2세기의 원로원 의원, 장군 가이우스 폼포니우스 바수스 테렌티아누스이며, 아버지는 이 사람의 아들 중 한명인 폼포니우스 바수스(211년 집정관)이다.
조부의 이름 중 테렌티아누스에서 드러나듯이, 본래 혈연적 본가는 이탈리아의 오래된 평민귀족인 테렌티우스 가문으로, 입양을 통해, 이탈리아의 오래된 플레브스 씨족 가문인 폼포니우스 가문에 편입된 일가의 후손이다. 따라서 그의 아들들은 루키우스, 티투스를 애용한 가문 전통과 달리 가이우스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이유로 폼포니우스 바수스와 그의 아버지 폼포니우스 바수스의 개인이름은 정황상 가이우스가 유력하게 추정된다고 평가받는다.
친가는 당대의 권력가로 유명했다. 그의 조부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친구이자 협력자로, 다섯 황제의 해 기간 동안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에게 보결 집정관에 지명됐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게 수도 장관에 임명됨과 동시에 "황제의 친구" 중 가장 권력을 누릴 수 있는 "아미쿠스 세베리(세베루스의 친구)" 칭호를 받았다.
이런 배경 때문에, 테렌티아누스의 아들 중 장남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소 파우스티나의 외손자이나 권력에서 소외된 야심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프로쿨루스의 간곡한 요청 아래, 로마 최고 부촌들보다 곱절 이상이 비싼 피시디아의 옛 술라 영지를 공동명의로 해주는 대가를 받고 결혼했다. 그 사람이 바수스의 아버지이다. 바수스의 아버지는 데릴사위가 되어, 안니아 파우스티나 소유의 피시디아 영지로 건너갔다. 그리고 이곳과 로마를 오고 가면서 원로원 의원 생활을 했는데, 정략혼임에도 부부 사이가 아주 좋았다.
이런 배경으로 폼포니우스 바수스는 부모 양쪽을 통해, 로마와 이탈리아 귀족 혈통과 옛 폰투스 그리스 귀족 혈통을 물려받았다.
대략 220년경 피시디아에서, 211년 집정관을 지낸 폼포니우스 바수스와 안니아 파우스티나의 두 자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바로 위로는 후일의 3세기 대정치가로 이름을 날리게 되는 플라비우스 안티오키아누스의 아내인, 누나 폼포니아 움미디아가 있다.
피시디아에 있는 어머니 소유의 술라 영지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러다가 221년, 당시 황제 엘라가발루스가 정치적 위기를 탈출하고자 바수스의 어머니 안니아 파우스티나와 결혼하려고 아버지를 소환해 반역죄로 죽였다. 그렇지만 엘라가발루스와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를 앞세운 율리아 마이사 사이의 정쟁이 심화되면서, 어머니는 221년 겨울에 이혼한 뒤 피시디아로 추방됐다.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아주 일찍이 친가의 근거지이며 아버지의 고향인 이탈리아로 귀국해 이탈리아 귀족으로 성장했고, 일평생 이탈리아에서 살았다고 한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시대에 가문에게 배정된 의석을 물려받았고, 젊은 나이부터 두각을 나타냈다고 한다. 그는 30대 중반의 나이에 발레리아누스, 갈리에누스 부자의 지지자로 활약했고, 이를 배경으로 원로원 안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사 중 한명이 됐다.
259년경 대략 39세의 나이에 발레리아누스, 갈리에누스의 추천으로 첫 집정관이 됐다. 1년 뒤인 260년 아프리카 속주 총독, 아시아 속주 총독을 포함한 다양한 고위 총독 직책을 지냈다. 그러다가 갈리에누스가 암살되고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가 즉위하는데, 매형 플라비우스 안티오키아누스의 도움과 추천 등으로 황제의 이탈리아 행정 대리인 등에 임명됐다. 이후,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때인 271년 1월 아우렐리아누스가 직접 동료 집정관으로 지명해 함께 집정관을 지내고, 매형과 함께 아우렐리아누스의 정치적 책사이자 스승으로 활약했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존경하고 도움을 구한 인사답게, 두번째 집정관에 오른 뒤, 오늘날의 로마 시장 + 로마 경찰청장에 해당한 프라이펙투스 우르비가 됐고, 로마 재통합 전쟁 기간동안 아우렐리아누스의 추천으로 정식으로 프린켑스 세나투스에 올랐다. 271년 이후 기록이 없어, 프린켑스 세나투스 직을 맡았다가 아우렐리아누스가 암살된 이후, 매형 안티오키아누스처럼 은퇴한 것으로 보인다.
사촌 혹은 육촌 관계인 폼포니아 크라티디아와 결혼했다. 사이에는 이름 미상의 아들과 폼포니아 바사(250년경 출생)을 뒀다.
그의 손자로는 이름 미상의 아들이 낳은 폼포니우스 세베루스가 있었다. 딸 폼포니아 바사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오촌당숙 가이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아페르의 손자와 결혼했다. 그녀는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바수스라는 두 아들을 뒀다. 이중 폼포니우스 바수스의 외손자 셉티미우스 바수스는 딸 셉티미아 바사를 낳았는데, 셉티미아 바사는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의 후손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바실리우스와 결혼했다.
[1] 전체 이름 중 확실히 밝혀진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