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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5-07 13:08:16

파피니아누스

<colbgcolor=#8B0000><colcolor=#FECD21> 이름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파피니아누스
( Aemilius Paulus Papinianus)
출생 142년
로마 제국 시리아 에메사
사망 212년
로마 제국 로마
직위 변호사, 법학자, 근위대장, 콘실리움[1] 위원, 원로원 의원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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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세베루스 왕조 시대의 법학자, 변호사, 원로원 의원이자 근위대장.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대를 대표하는 법학자로, 세베루스 왕조를 대표하는 법학자 3대장 중 한명이다. 서구권에선 울피아누스, 폴이라고 불리는 율리우스 파울루스와 함께 로마법 분야에서 그 명성이 대단하다. 당대부터 로마법 분야에 있어 가장 위대한 법 전문가 중 한명으로 평가받았던 만큼,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법전을 만들면서 로마 제국의 법학자 5인 중 한명으로 이름을 올렸고, 오늘날 법학자들에게도 명성이 대단한 로마 역사상 최고의 법학자다.

2. 생애

전체 이름은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파피니아누스. 페니키아인의 후손이라는 말도 있고, 로마 시민권을 가진 시리아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시리아 속주의 에메사 출신으로, 율리아 돔나, 율리아 마이사 자매와 동향이면서도 친척이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젊은 시절 법학자 스카이볼라 밑에서 후일 황제가 되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함께 법학을 배웠다고 한다. 이 저서가 3세기 군인황제시대 황제들의 일대기, 가계에서는 오류가 심각하나 고르디아누스 1세 전까지는 맞는 부분도 많아 사실로 보인다. 이를 증명하듯 파피니아누스는 스승으로 소개된 퀸투스 케르비디우스 스카이볼라를 따랐고, 제자인 것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율리아 돔나와 결혼하기 전부터 세베루스와 가장 친한 친구 중 한명이었던 만큼, 세베루스가 제위에 오른 뒤 승승장구했다. 물론, 파피니아누스는 세베루스가 제위에 오르기 전부터 제국에서 알아주는 최고의 법률 전문가, 변호사, 법학자라서 그 명성은 세베루스가 만들어준 선물이 아니었다.

조시무스에 따르면 파피니아누스는 엄격함과 정의감, 법률에 대한 깊은 이해와 지식 및 해석 능력이 탁월해 모든 로마인들에게 큰 존경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세베루스 황제는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가 몰락한 직후, 파피니아누스에게 근위대장 자리를 줬고 이때부터 그를 두 후계자 카라칼라, 게타 형제를 돕는 고문으로 삼았다. 세베루스는 파피니아누스를 대단히 신뢰해, 제국 안에서 법률, 법무행정과 관련된 모든 직책의 최고 책임자 자리를 모두 맡겼다.

세베루스 왕조 시대가 되면 근위대장과 프라이토리아니는 과거와 같은 근위, 본국 방어 사령관/군대에서 총리와 행정업무와 정보 수집 업무를 맡는 황제 직속 행정부 성격을 띠게 됐다. 그래서 파피니아누스 같은 법학자들이 플라우티아누스 숙청 이후 연달아 근위대장에 취임했고, 이들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했다. 그런데 파피니아누스는 단순히 역할만 성실히 수행하지 않고, 이를 체계화하고 적절하게 그 지식과 결정을 활용하는 매뉴얼까지 마련해 후기 로마 제국의 행정, 법률에 큰 기여를 했다. 더욱이 그는 울피아누스, 율리우스 파울루스와 달리 법률가 출신 근위대장임에도 프라이토리아니를 죽는 순간까지도 완전히 장악했고 그들의 불만을 사지 않았다. 어쩌면 파피니아누스 덕에 프라이토리아니를 이끄는 근위대장이 총리 비슷한 지위로 발전하고, 프라이토리아니는 조직 해체 뒤에도 황제 직속 행정부로 실체가 남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칼레도니아 원정길도 동행했고, 전장에서도 행정관, 지휘관으로 나쁘지 않았다. 이때 그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면서 콘실리움[2]을 에부리쿰[3]에서 위원장으로 사실상 지휘했고, 원로원에게 카라칼라, 게타 공동 이름으로 후임황제 결정을 통보한 실무자 대표가 이 사람이다. 칼레도니아 원정 내내 카라칼라와 게타 사이의 반목을 해소하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211년 2월 4일, 요크에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숨을 헐떡거리며, 자기가 가장 믿을 수 있고 제국의 존경을 한몸에 받던 그에게 두 아들의 미래와 세베루스 가문의 영속을 맡겼다. 이런 배경 때문에 파피니아누스는 세베루스 왕조의 카라칼라, 게타 형제의 공동변호사이자 근위대장이었고, 국고와 재무 분야 고문도 맡게 됐다.

파피니아누스는 오랜 친구 세베루스의 부탁, 율리아 돔나의 간청, 본인이 가지고 있는 책임감을 이유로, 게타가 암살되기 전까지 카라칼라, 게타의 반목을 막고, 두 사람을 화해시키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카라칼라와 게타가 법정에서 본인 파벌로 배심원을 심어 놓고 제 의견을 관철시키려고 했을 때마다 그는 본인이 가지고 있는 뛰어난 법지식과 논리로 중립을 유지했다. 형제가 제국을 나눠 가지겠다고 할 때, 돔나와 이를 막아냈다. 따라서 카라칼라는 게타를 죽이기 전부터 불만을 품었고, 게타 역시 중립적으로 대처한 파피니아누스에게 내심 불만이 있었는데, 확실히 그 불만이 더 큰 쪽은 카라칼라 쪽이었다. 그래서 카라칼라는 게타를 제 손으로 직접 찔러 죽이고, 게타의 지지자들과 자기 가정교사 등까지 살해한 다음 파피니아누스에게 자기를 변호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꼬투리를 잡기 위해 카라칼라가 한 것이지만, 파피니아누스가 카라칼라를 지지해주면 모든 것을 용서해주겠다는 최후 통첩이었다.

하지만 파피니아누스는 법학자로, 근위대장으로, 고명대신으로의 양심을 걸고 카라칼라의 마지막 제안을 거절했다. 이에 카라칼라는 원로원을 겁박해 죄없는 파피니아누스를 처형시키는 법령을 만들게 하고, 법 통과 직후 아이밀리우스 파피니아누스를 붙잡아 처형했다. 파피니아누스는 참수됐는데, 도끼로 머리를 내려 찍고 목을 벴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가 고통 속에 비참하게 죽자, 크게 겁 먹은 파피니아누스의 아들은 이를 보고 도망치다가 카라칼라 부하들 손에 인간사냥 당하듯 살해됐다. 카라칼라와 그 측근들은 파피니아누스를 증오해 파피니아누스의 머리를 트라세아 프리스쿠스 머리 등과 나란히 전시하고, 머리가 잘린 파피니아누스의 시신을 트라세아 등의 시신을 함께 로마 시내 거리를 돌아다니며 질질 끌고 다니며 조롱하다가 버렸다.
[1] 황제 자문회의[2] 황제 자문회의[3] 오늘날의 영국 요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