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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석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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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서양3. 동아시아4. 한국

1. 개요

손이나 투석구[1]를 사용하여 돌을 던지는 투석 행위는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전 세계의 고대 전장에서 발견된다. 특히 지중해 세계나 일본에서는 투석을 전문으로 하는 정규 투석병을 운용하였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눈에는 투석 행위가 변변찮게 여겨지지만, 냉병기 시대의 전투에서는 상당한 위력을 발휘하는 무기로 질 좋은 투석병은 좋은 대접을 받으며 정예병의 위치에 서기도 하였다.

2. 서양

서양에서 투석병이 최초로 나타나는 지역은 중근동 지방이다. 아시리아 제국의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가 최초로 투석병을 운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의 시대에 새겨진 센나케리브의 부조 벽화에 아시리아 궁병과 아시리아 투석병이 공성전을 치르는 모습이 담겨져 있다. 당대엔 공성 무기의 발달이 미약하여 충차나 사다리 정도에 성벽 위와 너머로 투사무기를 쏟아붇는 것이 그나마 공성전에서 사용할 수 있는 수였는데, 투석은 고각 사격이 쉬워서 정복 국가였던 아시리아는 투석병을 양성하여 운용하였다. 실제로 이후의 아시리아 부조의 군사 그림엔 투석병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했던 아시리아의 전술 체계가 중동 전체에 영향을 미침으로 인해 중근동 전체에 투석병 운용이 전파되었는데, 이는 성경다윗골리앗 설화에 의해 추정되어진다. 해당 설화는 히브리인과 블레셋인의 전투를 다룬 이야기인데, 여기서도 투석이 등장한다. 그 외에도 전투 묘사에서 투석이 종종 등장한다.

이런 중동의 군사 문화는 에게 해를 넘어 그리스에게까지 전파되었다. 그리스인들은 유명한 호플리테스를 중심으로 하는 팔랑크스 대형 전술을 사용했는데, 이 전술은 얼핏 보면 단순히 갑옷 입은 병사들이 서로를 밀어 넘어뜨리는 전투 형태로 보이나, 실제로는 경보병과 기병이 유동성 있게 활용되어야만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이 경보병 역할에 투석병이 이용되었다. 갑옷을 사기 어려운 무산 계급들이 투석병으로 참전하였는데, 투석병의 운용 평가가 좋아 수요가 늘어나면서, 최초의 투석 정예병인 로도스 투석병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혹독한 훈련을 통해 육성되었는데, 그리스의 군인이자 문필가 크세노폰[2] 은 <페르시아 원정기>에서 납탄을 던지는 로도스 투석병의 사거리가 주먹만한 돌을 던지는 페르시아 투석병의 2배에 이른다고 기록했다(페르시아 원정기 3.3.16~17), 어떤 기록에는 탄속이 너무 빨라 공중에서 불이 붙더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이 로도스 투석병은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 시점까지 영광을 누렸다. 당대 그리스 세계에서 부와 문화로 순위권에 들던 로도스 섬의 양대 산업이 무역과 용병업이었을 정도.[3] 하지만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분열로 그리스와 중동이 침체기에 빠지면서 로도스 투석병은 쇠퇴하고, 새로운 투석병이 떠오른다. 스페인 발레아레스 제도에서 온 발레아레스 투석병이다. 이들은 로마카르타고의 전쟁에서 두각을 드러냄으로써 역사에 데뷔했다. 발레아레스 제도가 너무 척박했기 때문에, 이들은 생계를 위해 어릴 때부터 맹훈련을 받았는데, 일정 거리에 빵을 걸어놓고 투석으로 맞혀야만 이를 따서 밥을 먹을 수 있는 식의 훈련 방식을 애용했다. 이들은 단•중•장거리를 모두 커버할 수 있는 투석구를 하나씩 가지고 다녔는데, 고대 로마의 기록에 의하면 발레아레스 투석병은 200~300m 밖의 사람 크기 표적을 쉽게 맞추는 정확성과 당대에 존재하던 거의 모든 종류의 갑옷과 방패를 부수는 파괴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들은 보통 1므나(600g)짜리 탄을 이용했고, 가급적이면 돌 탄환이나 흙을 구운 탄환보단 납이나 철 탄환을 사용했다.

이들은 로마가 떠오르던 시기부터 로마가 쇠퇴하는 시기까지 오랜 시간 로마 제국의 보조병으로 주로 근무했다. 이후에 투석병은 로마의 적들이 진화하면서 서서히 퇴역의 길을 밟기 시작했는데, 게르만족의 중장갑화와 합성궁을 사용하는 유목민의 등장으로 투석병들의 사거리와 파괴력의 장점이 상쇄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장궁, 석궁 등의 싸고 파괴력 강하고 사거리 긴 투사무기들이 개발된 탓이 크다. 하지만 그 후에도 게르만족의 돌격 전술에 보조적으로 활용되거나 이슬람권, 오스만 제국 등에서 운용된 기록이 있다.

3. 동아시아

의외로 중국은 투석병에 대한 기록이 적은데 활과 (쇠뇌, 석궁)의 운용이 일찍부터 보편화된 이유로 추측된다. 다만 수호전장청(몰우전)이라는 등장 인물이 투석을 주무기로 사용하는 정도. 동양에서 특히 투석을 즐겨 사용했던 국가는 한국일본이다. 일본은 일찌감치 투석병을 편제하여 대량 운용하였는데, 이를 츠부테라 한다. 방패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 일본군 전투방식과 공성전이 많은 전쟁 양상을 보면 투석병이 활약하기 아주 좋은 환경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센코쿠 시대의 기록을 보면 한 전투에서 사상자의 과반수가 츠부테 투석병에 의해 난 경우도 더러 있다. 이들은 16세기 말을 기점으로 쇠퇴하여 에도 막부 시대에 걸쳐 없어지는데, 조총의 대량 보급과 전투가 없어짐이 대표적인 이유다.

4. 한국

한국은 석전이라는 전통놀이[4]까지 있을 정도로, 투석을 중요시했다. 이는 산악 방어전이 많았던 한민족 국가의 전쟁 양상에 기인한다. 고지대에서 저지대로 투사하는 돌은 막강했기 때문이다. 고려 시대에는 군대 정규 편제에 투석병과가 있었으며, 조선 시대에는 일종의 민방위 편제에서 항시 고려되는데, 삼포왜란 때 안동의 유명한 석전 프로들이 용병으로 고용되어 막대한 전공을 올린 기록이 있고, 임진왜란 전반에도 일본군을 상대로 활약했다. 행주 대첩에서도 전투 후반에 화살이 떨어지자 투석을 시행하였다. 조선에서도 조총이 들어오자 군에서의 투석 사용은 쇠퇴하고, 민간에서만 전해지다 사멸한다.

[1] 돌을 던질 때 돌을 감아서 위력과 사정거리를 극대화하는 도구로, 순우리말로는 물매 또는 무릿매로 불렀다. 항목 참조.[2] 소크라테스의 제자로, 그리스 용병단 1만명을 이끌고 페르시아 내전에 참여했다. 고용주의 사망으로 인해 페르시아 한가운데서 그리스로 탈출, 성공한 인물이다. 이 경험을 쓴 책 아나바시스가 유명하다.[3] 고대 그리스 말기에서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인들은 그리스 중장보병, 테살리아 기병, 트라키아 투창병(펠타스트), 크레타 궁병, 로도스 투석병이라는 완전한 군 편제를 운용하게 된다.[4] 음력 5월 5일 단옷날, 마을 단위로 이웃마을과 소규모 전투를 치르던 놀이다. 양팀은 투석을 주력으로 서로에게 돌을 던졌으며 일부는 몽둥이로 근접전을 담당했다. 사상자가 너무 많이 나와 일제강점기 때 금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