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역병>, 쥘 엘리 들로네 작(186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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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50년경부터 로마 제국에 창궐한 전염병. 전염병의 증상과 전염과정을 상세하게 서술한 카르타고 주교 키프리아누스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이 전염병은 3세기의 위기에 시달리던 로마의 혼란상을 가중시켰다.
2. 역병의 전파 과정
저명한 역사 저술가 카일 하퍼(Kyle Harper)는 에우세비우스의 <교회사>에 인용된 알렉산드리아 주교 디오니시우스의 편지 2통에서 역병이 언급된 점을 들어, 역병이 249년 부활절에 이집트에서 시작하여 제국 전역에 빠르게 확산되었고, 늦어도 251년 하반기에 로마에 도착한 뒤 십여년간 수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사빈 R. 휴브너를 비롯한 다른 학자들은 두 편지는 249년이 아니라 250년대 후반에 쓰여졌으며, 이집트는 역병이 제국 전역에 한참 퍼진 뒤에야 비로소 역병과 마주했을 거라고 본다.251년 6월 데키우스와 데키우스의 장남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 황제가 아브리투스 전투에서 크니바 왕이 이끄는 고트족에게 패사한 뒤, 도나우 전선 로마군은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를 새 황제로 추대했지만 원로원은 데키우스의 차남 호스틸리아누스를 황제로 세웠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는 로마군 주력이 고트족에게 섬멸당한 상황에서 내전을 벌이는 것은 무익하다고 보고 원로원의 결정을 존중해 호스틸리아누스를 공동 황제로 인정하고 아들 볼루시아누스를 카이사르(부황제)로 세웠다. 고고학자들은 비미나키움 조폐국이 251년 7/8월에 호스틸리아누스를 아우구스투스로 지칭한 동전을 주조한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나 호스틸리아누스는 얼마 안가 사망했는데, 조시무스는 갈루스가 그를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고대 역사가 아우렐리우스 빅토르가 집필한 <카이사르의 책>과 익명의 저자가 집필한 <카이사르의 전형>은 이때 호스틸리아누스도 전염병에 걸려 목숨을 잃었다고 기술했다. 갈루스와 데키우스 가족과의 사이가 매우 원만했고, 양자로 들인 호스틸리아누스를 굳이 해쳐야 하는 동기를 찾기 힘든 점 등을 들어, 다수의 학자들은 호스틸리아누스가 도나우 전선에서 발발한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을 거라 추정한다.
조시무스에 따르면, 스키타이[1]인들이 도나우 강, 저지 모이시아, 소아시아 일대에 심각한 파괴를 자행했고, 그 과정에서 전염병이 퍼졌다고 서술했다. 또한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가 로마로 돌아온 직후 전염병이 창궐했다고 한다. 학자들은 이 점을 근거로 전연병의 진원지는 도나우 전선이며, 고트족의 파괴를 피해 집단 이주한 피난민들과 로마군 사이에서 전염병이 돌기 시작해 제국 각지로 퍼졌으리라 추정한다.
3. 역병의 증상
키프리아누스가 묘사한 바에 따르면, 골수에서 시작한 열병이 얼굴의 종기로 발효되었으며, 지속적인 구토로 창자가 뒤틀렸고, 눈에 피가 찼으며, 입에서 악취가 났고, 목은 부어올랐으며, 발이나 팔다리 일부가 썩어갔다고 한다. 이로 인해 불구가 되거나 신체 기능이 저하되면서 걷는 것조차 힘들어지고, 청각이 막히거나 시력이 어두워졌다고 한다. 그렇게 며칠간 심각한 고통에 시달리다가 끝내 임종을 맞이했다고 한다. 그는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교를 박해하고 하느님을 거부한 로마인들에게 내리는 심판이며, 세상의 종말이 머지 않아 도래할 거라고 확신했다.역사가 윌리엄 하디 맥닐은 165년부터 180년까지 창궐한 안토니누스 역병은 천연두에 의해 발생했을 것이며, 키프리안 역병은 홍역에 의해 발생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반면 디오니시오스 스타타코풀로스는 두 역병 모두 천연두에 의해 발생했으며 홍역은 1000년 이후에 등장했다고 주장한다. 카일 하퍼는 키프리아누스가 묘사한 증상을 볼 때 천연두보다는 에볼라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4. 여파
3세기의 위기 당시에 대한 기록이 희소하기 때문에, 이 전염병으로 인한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는 파악하기 어렵다. 조시무스에 따르면, 로마에서 하루에만 5,000명이 넘게 사망했다고 한다. 역사가 카일 하퍼는 알렉산드리아의 50만 인구 중 19만 명만 살아남았다고 주장했지만, 학계에서는 그 정도로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고 볼만한 문헌상이나 고고학적 증거가 없다며 부정한다.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와 볼루시아누스는 전염병 퇴치를 위해 노력했고, 역병으로 죽은 이들의 시신 매장에 대해 가난한 이들의 시신도 제대로 묻어주라고 지시한 뒤 이를 엄격히 실행하도록 명령해 민심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전염병 퇴치에 정신없는 사이 다뉴브 전선에서 아이밀리아누스의 반란이 일어났고, 두 황제는 이를 막으려 했으나 아이밀리아누스에게 패한 뒤 부하들에게 살해되었다. 그 후 아이밀리아누스가 새 황제로 등극했지만, 일찍이 갈루스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고 라인 전선 로마군을 이끌고 남하하던 발레리아누스가 병사들로부터 황제로 추대된 뒤 선 황제를 죽음으로 몰아간 역적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아이밀리아누스를 공격해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253년 10월 로마에 입성한 발레리아누스는 장남 갈리에누스를 서방 황제로 삼고 자신은 동방을 맡아 각지의 반란자들을 토벌하고 사산 왕조의 샤한샤 샤푸르 1세와 맞섰다. 그러냐 260년 봄 에데사 전투를 치렀을 때 전염병이 도는 바람에 병사들이 대거 죽거나 드러누워버리면서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결국 페르시아군에 사로잡혀 다시는 로마로 돌아오지 못했다. 현직 황제가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는 소식은 로마 전역을 뒤흔들었다. 게르만족과 사산 왕조가 로마 제국의 영역 깊숙이 쳐들어와 약탈을 자행했고, 제국 각지에서 황제를 참칭하는 이들이 우후죽순으로 등장하더니 급기야 포스투무스의 갈리아 제국과 제노비아의 팔미라 제국이 로마 정부로부터 독립했다. 이 극심한 혼란은 아우렐리아누스가 274년 로마 제국을 재통합할 때까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