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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1 20:48:06

대 바르다스 포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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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b0000> 동로마 제국 카이사르
Βάρδας Φωκᾶς | 바르다스 포카스
제호 바르다스 포카스( Βάρδας Φωκᾶς)
생몰 년도 878년 - 968년
카이사르 재위 기간 963년 ~ 968년
아버지 대 니키포로스 포카스
형제 대 레온 포카스
아들 니키포로스 2세
레온 포카스
콘스탄티노스 포카스

1. 개요2. 행적

1. 개요

동로마 제국 마케도니아 왕조카이사르. 963년 황제에 오른 아들 니키포로스 2세에 의해 카이사르 칭호를 수여받았다.

2. 행적

남부 이탈리아에서 아랍인들을 상대로 맹활약한 명장 대 니키포로스 포카스의 아들이다. 968년 사망했을 당시 90세였다는 기록으로 볼 때, 출생년도는 878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형제로 대 레온 포카스가 있었으며, 아들로 니키포로스 2세레온 포카스, 콘스탄티노스 포카스를 두었다. 914~915년, 불가리아 제1제국의 차르 시메온 1세가 마케도니아, 테살로니카, 두라초 등 여러 동로마 속주들을 침략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이에 조이 카르보노프시나 황후는 917년 레온 포카스에게 불가리아를 향한 원정을 단행하라고 지시했다. 이때 그는 레온 포카스 휘하 장군으로서 원정에 동행했다.

917년 8월 20일, 레온 포카스가 이끄는 동로마군은 안키알로스 전투에서 시메온 1세가 이끄는 불가리아군에게 참패했다. 그는 레온과 함께 전장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와 흑해 연안의 메셈브리아로 도피했다. 동로마 역사가 레온 디아코노스는 75년이 지난 후에도 안키알로스 강둑의 들판에는 여전히 살해당한 동로마 병사들의 유골이 흩어져 있었다고 기술했다. 시메온은 여세를 몰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했고, 레온 포카스와 바르다스는 새로운 군대로 그를 맞아 싸웠지만 카사시르타이의 서쪽 외곽에서 또 다시 시메온에게 완패했다. 하지만 시메온은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넘을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불가리아로 철수했다.

조이 카르보노프시나 황후는 차례의 참패로 자신의 입지가 위태로워지자 자신과 아들을 지켜줄 후견인을 모색했다. 그녀는 그를 황궁으로 불려들어 조언자로 삼았다. 황제의 가정교사 테오도로스는 레온이 적임자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로마노스 레카피노스에게 보호를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이에 로마노스는 919년 3월 어린 황제를 받들어 모시겠다고 선언하고 함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진군했다. 결국 조이는 실각했고, 로마노스는 자신의 아름다운 딸 엘레니 레카피니와 콘스탄티노스 7세의 결혼식을 아야 소피아에서 치르고 자신은 바실레오파토르가 됨으로써 황제의 후견인이 되었다. 레온 포카스는 이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얼마 안가 진압당하고 두 눈을 뽑히고 쇠사슬에 묶인 채 콘스탄티노플로 끌려온 뒤 사람들의 조롱과 비웃음을 받으며 노새를 타고 광장을 돌았다.

형제가 이렇게 몰락해버린 후, 바르다스는 한동안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941년 흑해의 아나톨리아에 위치한 아르메니아콘 테마의 스트라테고스로서 기록에 등장했다. 당시 키예프 루스의 대공 류리크의 아들 이고리 류리코비치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쳐들어갔지만 성벽을 넘지 못하자 주변 지역을 황폐화시켰다. 그러나 이 함대는 941년 6월 11일 그리스의 불을 압세운 동로마 해군에 의해 괴멸되었다. 이고리는 잔여 병력을 수습해 흑해 연안으로 이동했지만, 바르다스가 지역 민병대를 이끌고 이들을 공격하여 진군을 저지시켰다. 그 사이에 요안니스 쿠르쿠아스가 이끄는 동로마 정규군이 도착하면서, 루스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이고리는 동로마 제국과 평화 협약을 맺은 뒤 귀환하다가 키예프 공국의 과도한 세금 징수에 반감을 품은 드레블랴네족에게 살해당했다.

944년 아나톨리아 방면군 총사령관 요안니스 쿠르쿠아스가 로마노스 1세에게 해임된 뒤 판테리오스가 새 사령관을 맡았으나 그해 겨울 알레포 인근을 공격했다가 사이프 알 다울라가 이끄는 함단군에게 격파당했다. 그 즈음에 로마노스 1세가 두 아들 스테파노스 레카피노스, 콘스탄티노스 레카피노스에게 폐위되어 수도원에 보내졌고, 스테파노스와 콘스탄티노스 역시 945년 1월 27일 콘스탄티노스 7세에 의해 긴급 체포된 후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이리하여 단독 황제로 군림한 콘스탄티노스 7세는 레카피노스 가문에게 억압당하던 포카스 가문을 우대했다. 그리하여 바르다스는 판테리오스를 밀어내고 아나톨리아 방면군 총사령관으로 선임되었다.

945~946년, 함단 왕조의 사이프 알 다울라는 아나톨리아 반도의 카파도키아 테마를 습격해 전리품을 다소 확보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잡은 포로들은 전원 아랍인 포로 교환에 쓰였다. 948년 바르다스가 반격에 착수해 알레포까지 진군했다가 사이프에게 저지되었다. 하지만 그의 아들 레온 포카스가 유프라테스 강 연안의 수그르 지역의 주요 거점인 하다스를 약탈했다. 949년, 사이프 앗 다울라는 라칸도스 테마를 급습했으나 방비를 뚫지 못했다. 바르다스는 즉시 역공을 가해 게르마니케이아를 약탈하고, 안티오키아까지 급습했다.

950년, 사이프는 대규모 함단군을 이끌고 아나톨리아 반도의 라칸도스와 하시아논 테마로 쳐들어가 철저하게 약탈했다. 그러나 귀환하던 중 바르다스의 아들 레온 포카스의 매복 공격을 당했다. 가즈와트 알-무시바(ghazwat al-musiba : 죽음의 원정)로 알려진 이 전투에서, 사이프 앗 다울라는 8,000명의 병사를 잃은채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다. 그러나 그는 동로마 제국과 평화협약을 맺기를 거부하고 라탄도스와 멜리테네를 공격해 약탈을 자행한 뒤 겨울이 될 즈음 철수했다.

951년, 사이프 알 다울라는 게르마니케이아와 하다스를 포함한 킬리키아와 시리아 북부 요새를 재건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바르다스는 이를 저지하고자 군대를 이끌고 킬리키아로 진입했지만 사이프에게 격퇴당했다. 953년, 바르다스는 대군을 이끌고 다시 킬리키아로 진격했지만 게르마니케아 인근의 마라쉬 전투에서 참패했다. 그는 얼굴에 심각한 부상을 입은 채 가까스로 탈출했고, 막내 아들 콘스탄티노스 포카스는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이 일련의 패전으로 인해 위신을 잃은 바르다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소환되었고, 장남 니키포로스 포카스가 아나톨리아 방면군 총사령관으로 부임했다. 다행히 니키포로스 포카스는 동생 레온 포카스와 함께 사이프를 상대로 승승장구해 포카스 가문의 위신을 회복했다.

총사령관 직에서 물러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한 바르다스는 콘스탄티노스 7세의 궁정에서 근무했다. 후우마이야 왕조 에미르 아브드 알 라흐만 3세의 사절단을 맞이했고, 독일 왕국의 사절단을 접대하기도 했으며, 955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세례를 받고 957년 가을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머물렀던 올가 대공비를 접대했다. 그러던 959년 콘스탄티노스 7세가 붕어하고 아들 로마노스 2세가 황위에 올랐지만 4년만인 963년에 돌연사했다. 이에 로마노스 2세의 미망인인 테오파노 황후는 두 아들 바실리오스 2세콘스탄티노스 8세를 공동 황제로 옹립하고 섭정을 맡았다. 그녀는 바르다스의 장남이자 아랍인들을 상대로 탁월한 활약을 선보이고 있던 니키포로스 포카스를 후견인으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로마노스 2세의 수석 참사관이자 환관이었던 요세프 브링가스는 니키포로스 포카스가 이대로 후견인이 된다면 자신의 권력이 약해질 테고, 니키포로스가 한 걸음 더 나아가 군대와 민중의 지지를 받아 황위를 주장할 것을 두려워했다. 그는 니키포로스를 제거하기 위해 황궁으로 불러들여 죽이려 했다.그러나 니키포로스는 브링가스의 의도를 눈치채고 소피아 대성당에 가서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가 있다고 고발했다. 이에 시민들은 들고 일어났고 결국 브링가스는 원로원이 자신의 동의도 없이 니키포로스를 사령관에 유임시키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후 아나톨리아로 돌아간 니키포로스는 테오파노와 밀약[1]을 맺고 킬리키아 원정을 준비하는 명분을 내세워 군대를 소집한 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다.

니키포로스는 963년 7월 2일 카이사레아에서 황제를 자칭했다. 그후 그는 콘스탄티노플에 자신을 공동 황제로 받아들이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자 브링가스는 콘스탄티노플의 수비를 강화하고 니키포로스의 아버지 바르다스를 인질로 삼으려 했다. 바르다스는 자신을 잡으려는 경비원들을 피해 아야 소피아로 피신했다. 브링가스가 보낸 경비원들이 성당에 진입하려 하자, 니키포로스를 지지하던 군중들이 분노하여 경비원들을 쫓아냈다. 이에 브링가스는 두 명의 어린 황제와 함께 아야 소피아로 가서 바르다스에게 계속 저항한다면 신변을 보장할 수 없다고 위협했고, 바르다스는 어쩔 수 없이 브링가스를 따라갔다.

그날 오후 바르다스가 성당에 없는 것을 확인한 군중은 궁전을 향해 진격했다. 이에 폴리에욱토스 총대주교가 중재에 나서 군중들을 진정시킨 뒤 궁궐로 들어가서 바르다스를 아야 소피아로 모셨다. 브링가스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되자 군인들을 이끌고 아야 소피아로 향하자, 군중이 분노하여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켰다. 브링가스는 도시에서 쫓겨났고, 폭도들은 몇 주 동안 도시를 약탈하고 곳곳을 불살랐다. 이윽고 963년 8월 14일 니키포로스 포카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하여 도시를 안정시킨 뒤 8월 16일 아야 소피아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폴리에욱토스의 주관하에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날 대관식에 참석한 바르다스는 아들로부터 카이사르 칭호를 수여받았다. 한편 브링가스는 다시는 정치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신변을 보장받고 그의 고향인 파플라고니아로 추방되었다.

니키포로스 2세는 사전에 맺은 약속에 따라 바실리오스 2세와 콘스탄티노스 8세를 보호해주기로 하고, 그들의 모후인 테오파노와의 결혼을 추진했다. 하지만 종교계는 두 사람의 결혼을 거세게 반대했다. 그래서 니키포로스는 일단 테오파노를 황금뿔 상류에 있는 낡은 페트리온 성채에 가서 4달간 살게 하고, 자신은 황제의 침소에서 검약하게 생활했다. 그러다 963년 9월 20일 팔라딘 성당에서 결혼식을 거행했다. 이때 폴리에욱토스는 결혼식이 끝날 무렵 니키포로스가 관례에 따라 주제단에 입맞춤을 하기 위해 접근하자, 앞을 가로막으며 "재혼자는 먼저 참회부터 해야 하니 1년을 기다려라"라고 통보했다. 며칠 후 궁정 사제 스틸리아노스가 몇년 전 니키포로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잠깐 방문했을 때 테오파노의 자식 중 한 명의 대부가 되어준 일을 거론하자, 폴리에욱토스는 니키포로스가 테오도라의 아들의 대부가 되어줬으니, 두 사람은 '영적인 인척'이므로 결혼은 무효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니키포로스는 총대주교의 요구에 굴복하지 않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체재하던 모든 주교와 교회, 국가의 유명인사들을 불러 회의를 열고 해결책을 의뢰했다. 그 결과, 폴리에욱토스가 내세운 교회법은 성상 파괴 운동을 주도한 콘스탄티노스 5세의 시대에 반포된 것이므로 무효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러나 폴리에욱토스는 그 회의는 사안을 해결할 만한 권위가 없다며 황제에게 파문을 선고했다. 이에 황제는 다른 방식을 써먹기로 하였다. 며칠 후, 스틸리아노스가 교회와 정부의 공동 위원회 앞에서 자신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니키포로스의 아버지 바르다스도 아들이 대부를 서준 적은 없다고 단언했다. 결국 폴리에욱토스는 고집을 꺾고 파문을 취소했다.

968년 6월 4일 크레모나 주교 리우트프란트가 이끄는 신성 로마 제국 사절단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다. 이때 바르다스가 사절단을 접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훗날 리우트프란트는 바르다스와의 만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니키포로스 2세)의 아버지가 그와 함께 앉아 있었는데, 그 아버지는 150세였다. 그와 그의 아들 앞에서, 그리스 인들은 찬송가를 불렀고 하나님께서 그가 오래도록 건강하기를 빌었다. 우리는 이로부터 그리스인들이 얼마나 어리석고, 그러한 명성에 얼마나 만족하고, 얼마나 아첨하고, 얼마나 탐욕스러운지를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완전히 쇠약해진 노인을 원하기 때문에 자연조차도 그에게 건강을 주지 않을 것임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쇠약해진 노인은 소원을 빌게 된 것을 기뻐했다.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주시지 않으실 것이며, 설령 그렇게 하신다 해도 그것이 자기에게 유익이 아니라 해가 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바르다스는 사절단과 접견한 지 얼마 후인 968년경에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로부터 1년 후인 969년 12월 11일, 니키포로스 2세는 외조카 요안니스 1세에 의해 피살당했다.


[1] 바실리오스와 콘스탄티노스의 권리를 보호해주는 대신 그 자신도 공동 황제가 된다는 약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