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플라키디아 (Placidia ) |
출생 | 미상 |
사망 | 미상 |
아버지 | 발렌티니아누스 3세 |
어머니 | 리키니아 에우독시아 |
남편 | 올리브리우스 |
자녀 | 아니키아 율리아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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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로마 제국의 아우구스타. 서로마 황제 올리브리우스의 황후.2. 생애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와 리키니아 에우독시아의 둘째딸이다. 언니로 에우도키아가 있었다. 453년 서로마 제국의 권신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가 발렌티니아누스 3세에게 플라키디아와 자신의 아들 가우덴티우스의 약혼을 요청했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처음에는 이를 받아들였지만, 아에티우스가 자신을 폐위시키고 자기 아들을 황제로 세우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의심해 원로원 의원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 헤라클리우스와 함께 아에티우스 암살을 모의했다. 결국 454년 9월 21일 아에티우스는 라벤나 궁궐에 입궐하여 황제에게 제국의 재정 상태를 보고하던 중 발렌티니아누스가 갑자기 칼을 뽑아 헤라클리우스와 함께 공격하는 바람에 피살되었다. 이후 가우덴티우스를 비롯한 아에티우스 일가족이 숙청되면서, 약혼은 자연스럽게 파기되었다.455년 3월 16일,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의 사주를 받은 병사들에게 피살되었다. 그 후 황위에 오른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는 리키니아 에우독시아를 황후로 삼고 에우독시아의 딸 에우도키아가 반달족의 왕 가이세리크의 아들 후네리크와 약혼했던 걸 취소시키며 자신의 친아들 팔라디우스와 결혼시켰다. 가이세리크는 이에 격분해 로마를 침공하기로 마음먹었다.[1] 455년 5월, 가이세리크는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로마를 침공했다.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는 대항할 방법이 없다고 여겨 로마에서 탈출하려 했다가 성난 군중에게 피살되었다.
그 후 로마에 도착한 가이세리크는 로마를 약탈하는 한편, 에우독시아 황후와 두 딸을 비롯한 많은 시민들을 포로로 끌고 가 북아프리카로 돌아갔다. 이후 플라키디아는 어머니, 언니와 함께 7년간 카르타고에 연금되었다. 그러던 중 카르타고로 끌려온 올리브리우스와 결혼했다.[2] 가이세리크는 플라키디아와 결혼한 올리브리우스가 자신과 연관되어 있다고 여겼고, 그를 이용한다면 로마 제국에 자신의 영향력을 좀더 확대할 수 있다고 여겼다. 가이세리크는 이때부터 올리브리우스가 로마 제국의 황제로 등극하도록 주선했다.
462년, 플라키디아는 리키니아 에우독시아와 함께 연금에서 풀려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갔다.[3] 472년 서로마 황제 안테미우스가 권신 플라비우스 리키메르와의 내전 끝에 살해당했다. 이후 리키메르는 가이세리크의 의중대로 올리브리우스를 차기 황제로 세우기로 했다. 그리하여 올리브리우스는 서로마 황제가 되었고, 플라키디아는 아우구스타가 되었다. 그러나 40일 후 리키메르가 급사했고, 올리브리우스 역시 사망했다.[4] 그 후 플라키디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갔다.
478년, 반달 왕국의 사절단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방문했다. 그들은 후네리크가 로마에 충실한 동맹자가 되겠다고 맹세했고, 레오 1세가 후네리크의 아내 에우도키아가 보유했던 재산을 몰수했던 일에 대해 따져묻지 않을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올리브리우스의 아내이자 에우도키아의 누이인 플라키디아에게 경의를 표했다. 이후 플라키디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3. 후손
플라키디아는 올리브리우스와의 사이에서 딸 아니키아 율리아나를 낳았다. 그녀는 막대한 부와 황실의 혈통이라는 우수한 신분을 등에 업고 예술, 문학 분야를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성 폴리엑토스 성당(Ἅγιος Πολύευκτος,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아야 소피아가 건립되기 이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가장 거대하고 화려한 성당이었다.) 등 여러 성당과 수도원을 세워 인망을 얻었다. 그러면서 사산 왕조를 상대로 활약한 명망높은 장군 아레오빈두스와 결혼해 아들 올리브리우스를 낳았다. 491년 아직 어린 아이였던 올리브리우스가 집정관에 선임되고 아나스타시우스 1세의 조카딸 이리니와 결혼했을 정도로, 그녀의 위상은 대단했다.아나키아 율리아나는 내친 김에 아들을 장차 황제로 세울 야심을 품었던 것으로 보이나, 512년 단성론을 공개적으로 옹호하는 아나스타시우스 1세에 반발한 녹생당원들이 아레오빈두스를 황제로 옹립하려 했다가 아레오빈두스가 이를 거부하고 잠적해버리는 바람에 실패한 뒤 위세가 꺾였고, 518년 아나스타시우스 1세가 붕어한 뒤 근위대장 유스티누스 1세가 황위에 오르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528년경 율리아나가 사망한 뒤, 아들 올리브리우스는 532년 니카의 반란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의해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추방당했다.
[1] 당대의 또다른 사료에 따르면, 에우독시아 황후는 페트로니우스가 자신의 전 남편을 암살했다고 의심했고 페트로니우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가이세리크에게 구원을 호소했다고 한다.[2] 일설에는 올리브리우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었고, 두 사람의 결혼은 동로마 황제 레오 1세와 가이세리크의 협상 결과였다고 한다.[3] 다만 언니 에우도키아는 가이세리크의 아들 후네리크와 결혼해 카르타고에 남았다.[4] 안티오키아의 요한은 올리브리우스가 부종에 걸려 사망했다고 밝혔지만, 리키메르의 뒤를 이어 서로마 제국의 권신이 된 군도바트가 살해했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