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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401년 |
로마 제국 아카이아 속주 아테네 | |
사망 | 460년 10월 20일 |
로마 제국 유대 속주 예루살렘 | |
아버지 | 레온티오스 |
형제자매 | 발레리우스, 게시우스 |
남편 | 테오도시우스 2세 |
자녀 | 아르카디우스, 플라킬리아, 리키니아 에우독시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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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테오도시우스 왕조의 아우구스타,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의 황후.2. 생애
401년경 로마 제국 아카이아 속주 아테네에서 이교도이자 아테네의 저명한 철학자였던 레온티우스의 딸로 태어났다. 초명은 아테나이스(Athenaïs)이다. 아버지가 죽은 뒤 두 오빠 발레리우스와 게시우스가 유산을 주지 않은 까닭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야 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레온티오스는 일부러 딸에게 금 100조각 이외에 아무것도 주지 않고, 유언장에 "그 아이는 행운을 타고났으니 어느 여자보다 높은 지위에 오를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아무튼 수도에 올라온 그녀는 곧 테오도시우스 2세의 누나이자 정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아일리아 풀케리아의 눈에 띄었다. 풀케리아는 아름다운 미모에 세련되고 매력적인 그리스어 구사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녀는 곧장 테오도시우스 2세와 아테나이스를 만나게 했고, 테오도시우스 2세는 첫 눈에 반했다. 다만 아테나이스는 부친처럼 이교도였던 게 문제였지만, 아티쿠스 주교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뒤 세례를 거쳐 기독교 신자로 개종하고, 이름도 에우도키아로 개명했다. 이때 풀케리아는 그녀의 대모가 되어주었다. 이리하여 421년 6월 7일, 에우도키아와 테오도시우스 2세의 결혼식이 열렸다.422년 에우도키아는 딸 리키니아 에우독시아를 낳았다. 그리고 423년 1월 2일 아우구스타 칭호를 받았다. 그녀의 존재는 풀케리아의 주도하에 기독교 신앙이 지배적이던 궁정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왔다. 물론 그녀 역시 풀케리아와 주교들의 철저한 지도를 받아서 기독교 신앙이 투철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릴 때부터 헬라 문화에 흠뻑 젖었던 그녀는 성서나 교부들의 저작보다 그리스 시인과 철학자에 더 익숙했다. 그녀는 420년대 중반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학을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풀케리아의 주도로 진행되던 유대인 박해의 강도를 줄이려 노력했다. 한편, 그녀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로마군의 활약을 칭송하는 시를 쓰는 등 문학 활동에도 힘을 기울였다. 에우도키아는 431년 딸 플라킬리아와 아들 아르카디우스를 낳았지만, 아르카디우스는 일찍 죽었다.
422년, 갈라 플라키디아가 자신을 해치려는 호노리우스에게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아들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데리고 라벤나에서 도망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망명했다. 이때 플라키디아는 딸 리키니아 에우독시아가 실제로 발렌티니아누스와 결혼해서 서방의 황후가 된다면, 자신은 감사의 뜻으로 예루살렘 순례를 떠나겠다고 맹세했다. 437년 여름 두 사람의 결혼이 이뤄지자, 에우도키아는 438년 예루살렘으로 출발했다. 그녀는 먼저 안티오크로 가서 그곳의 원로원 의사당에서 거행된 의식에 참석해 안티오크의 역사를 찬양하는 연설을 하고는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다음 문구로 끝을 맺었다.
나는 당신들의 민족과 혈통에 속함을 자랑스럽게 주장합니다.
그 후 예루살렘에 도착한 그녀는 1년간 머물며 평범한 순례자로서 모든 성지에 방문하고, 성당의 봉헌식에 참석하고, 자선 기관, 수도원, 빈민 수용소를 설립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갈 때 많은 유물을 가져갔는데, 그 중에는 성 스데파노의 유골과 성 베드로가 헤로데 왕에 의해 감금되었을 때 사용된 사슬도 포함되었다. 에우도키아는 사슬 중 하나를 딸 에우독시아에게 보냈는데, 에우독시아는 현재 빈콜리의 산피에트로 교회로 알려진 교회를 세워 그 유물을 보관했다. 나중에 다른 사슬들도 그 교회에 보내졌다고 한다.
그러나 성지 순례를 마치고 귀환한 그녀는 풀케리아와 갈등을 벌였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기록이 부족해서 확인하기 어렵지만, 남편을 지배하려는 에우도키아의 행동에 풀케리아가 분개했던 것으로 보인다. 에우도키아의 지지자였던 파울리누스가 처형되고 동방의 친위대 사령관 키루스가 에우도키아를 지지하다 축출되는 일이 벌어진 뒤, 에우도키아는 443년 예루살렘으로 떠났다. 에우도키아가 예루살렘으로 도착한 지 몇 달 후, 사투르니누스라는 이름의 황실 경호원이 에우도키아가 수도로부터 데려온 사제와 보제를 살해했다. 그러자 에우도키아는 사람을 시켜 사투르니누스를 죽이게 했다.
에우도키아는 예루살렘에서 여생을 보내며 문학 활동에 전념했다. 그러면서 단성론을 열렬히 지지하였고 453년 시리아 단성파의 반란에 연루되기도 했다. 그러다 로마 교황 레오 1세의 설득을 받아들여 정통교회 신앙으로 복귀하였다. 그녀가 생전에 집필한 문학 작품 중 '성인의 순교'라는 제목의 시 등 일부만 현존한다. 에우도키아는 460년 10월 20일 예루살렘에서 사망하였고, 성 스테파노 성당에 안장되었다.
[1] 그리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