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B0000><colcolor=#FECD21> | |
출생 | 164년 |
로마 제국 로마 또는 볼케이 (현재 부치노) | |
사망 | 191년 |
로마 제국 카프리 섬 | |
아버지 |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프라이센스 |
어머니 | 발레리아 |
형제자매 | 루키우스 브루티우스 킨티우스 크리스피누스 |
남편 | 콤모두스 |
[clearfix]
1. 개요
로마 제국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아우구스타, 로마 황제 콤모두스의 황후. 과거에는 남편 콤모두스 지시로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최근에는 콤모두스가 아닌 에클렉투스나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가 보낸 자객 손에 남편에 앞서 암살된 것이 유력시된다고 평가받는다.2. 생애
164년경 로마 제국 로마 또는 볼케이(현재 부치노)에서, 두번이나 집정관을 역임한 아버지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프라이센스와 어머니 발레리아의 딸로 출생했다. 친가의 조부모는 집정관을 지낸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프라이센스와 그 아내로 두 번에 걸쳐 집정관을 지낸 로마 귀족 마니우스 라베리우스 막시무스의 외동딸로 라베리우스 가문의 부유한 상속녀 라베리아 호스틸리아 크리스피나였다. 오빠 루키우스 브루티우스 킨티우스 크리스피누스 역시 집정관을 역임했고, 조카들 역시 3세기 동안 집정관, 법무관을 지냈다.그녀의 가문은 이탈리아 루카니아 주 볼케이 출신이었고, 할머니 집안의 클리엔테스들을 물려받아, 로마 근교의 라누비움 일대에 대한 영향력이 상상 이상으로 대단했다. 특히, 할머니의 증조부 마니우스 라베리우스 막시무스, 조부 루키우스 라베리우스 막시무스 아래에서 로마 제국 안의 원로원, 관료 사회에 쌓은 인맥과 깊이는 상상을 초월했다. 이런 집안의 위세처럼 그녀의 친정 아버지는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와 밀접한 관계였다. 조부와 외조부는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가 즉위하기 전부터 친분이 두터웠다. 119년생인 부친 브루티우스는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즉위 직후부터 황제에게 다양한 후원을 받았다.
그렇지만 크리스피나의 아버지가 모두에게 자랑할 점은 그가 당시 최고의 귀족 자제임에도 제국의 다양한 환경에서 군지휘관으로 탄탄한 경력을 자랑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또래 귀족 청년들과 달리 전통적인 로마 엘리트 육성 교육 속에서, 공적 경력 대부분을 군대에서 보냈다. 이중 눈길을 끈 것은 시리아에 주둔한 갈리카 군단에서 트리부누스 밀리툼으로 군복무를 시작한 이래, 아프리카, 마우레타니아, 모이시아, 달마티아, 갈리아, 게르마니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환경에서 야전사령관과 총독으로 탁월한 역량을 수없이 증명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마르코만니족으로 대표된 게르만족들과 도나우 강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그는 최전선을 맡아, 탄탄한 병참 운영과 지휘 역량으로 로마군의 전투수행 능력을 끌어 올렸다.
이런 모습처럼 그는 딸이 콤모두스의 아내로 낙점되기 전부터, 군대 경험이 전무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든든한 조력자로 명성을 떨쳤고, 마르쿠스 황제의 맏사위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의 조력자로도 활약했다. 마르쿠스 황제는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반란 이후, 이런 점에서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프라이센스를 주목했다. 마르쿠스 황제는 동방 순행을 마치고, 콤모두스를 공동황제로 승격시킨 직후, 브루티우스 프라이센스가 장인이 되면 콤모두스를 든든히 지켜줄 거라고 믿었다. 따라서 178년 여름 크리스피나와 콤모두스를 결혼시켰다. 이 결혼식은 상당히 소박하게 이뤄졌다. 그렇지만 콤모두스는 신혼을 즐길 겨를도 없이, 결혼 직후 장인이 된 브루티우스와 큰매형 폼페이아누스를 따라 본국 이탈리아의 북부 국경으로 떠나 아버지를 보필했다.
남편인 콤모두스가 부친과 함께 공동 황제였기 때문에, 그녀는 결혼하자마자 아우구스타 칭호를 받았다. 이때 마르쿠스 황제는 소박한 결혼 속에서 지참금을 가지고 오지 못하게 했다. 그렇지만 크리스피나의 부모는 당시 국고 상황이 빠듯한 점을 생각해, 지참금으로 많은 재산을 가지고 온 다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마르코만니 전쟁을 치르면서, 징세 없이 전시체제를 운용하는 데 큰 힘을 줬다.
크리스피나는 현대에 이르러 진행된 흉상, 동상을 통한 복원 등에서 증명된 그대로, 키가 크고 늘씬한 미인이었다. 그렇지만 훌륭한 미모보다 주목받고 찬사받은 크리스피나의 덕목은 예의바르고 조신한 행동가짐이었다.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선량한 성품의 소유자였고, 교양이 풍부함에도 내세우지 않아, 사람들의 호감을 쉽게 샀다고 한다. 따라서 시아버지 마르쿠스 황제와 남편 콤모두스, 당시 로마인에게 "세심한 마음을 가진, 우아한 사람"이라고 평가받았다. 이런 크리스피나의 평가는 콤모두스의 큰누나 루킬라 심기를 건들었다. 루킬라는 크리스피나를 질투했다. 루킬라는 아우구스타 칭호는 자신만이 누려야 하는데, 크리스피나가 그걸 가로챘다고 믿었다.
결국 콤모두스가 즉위한지 2년이 지난 182년, 루킬라는 콤모두스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콤모두스는 이 사건에 심한 충격을 받았고, 이로 인해 폭군으로 변모하고 만다. 이 사건에 관해, 마이클 그랜트, 올리비에 헥스터, 맥휴, 메리 할로우 등 현대 고전학자들은 브루티아 크리스피나가 첫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했다는 뜻을 직간접적으로 보여준 크리스피나 얼굴의 발행 주화들의 상징적 문구 Diana Lucifera, Iuno Lucina를 주목한다. \크리스피나가 첫 출산을 하고, 콤모두스 부부가 안정적으로 2년 동안 국가 통치 운영을 보여준 부분이 루킬라가 동생을 죽이는 데 결정적인 동기가 됐다는 추정과 연구 결과인데, 이 추정은 당대부터 꾸준히 거론된 이야기였고,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대체로 평가받고 있다.
루킬라의 황제 암살 미수 사건 후 남편이 폭주하는 동안, 크리스피나는 별다른 행적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크리스피나는 불안증세를 보인 남편과 사이가 완만했고, 남편이 두 번의 암살 미수 음모를 겪은 뒤부터 운둔생활을 할 때 함께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다 188년경, 여자 노예 마르키아를 총애한 콤모두스의 명으로 간통 혐의를 뒤집어쓰고 카프리 섬으로 강제 추방되었다. 이 사건에 관해 현대 학자 중 헥스터 등은 아마도 후계자 생산 문제에서 크리스피나가 더이상 아이를 갖지 못해, 반드시 아내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얻고자 한 콤모두스와 불화가 생겼을 가능성, 또는 콤모두스의 후계 생산을 막아야 될 필요성이 강한 클레안데르 등 황제 주변 측근세력의 음모가 유력한 원인이 된 일로 거론 중이다. 특히, 해당 사안에서 당시 침실시종으로 이들 부부를 보필한 클레안데르가 등장해 몰락하기 전까지 콤모두스 후사 문제에 관여하고, 크리스피나 죽음 시점에 에클렉투스가 전면에 등장한 부분을 떠올리면, 전자와 후자 모두 마냥 추정이라고 평가할 수 없다고 평가받는다. 그렇지만 고대 기록에선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가 없다.
카프리 섬으로 추방된 뒤, 티베리우스 황제가 후계자 칼리굴라, 손자 티베리우스 게멜루스와 함께 거주한 빌라 요비스에서 살다가 라이투스, 에클렉투스 등의 지시를 받은 자객 손에 암살됐다. 그녀의 이름은 191년까지 비문에 언급되는데, 이로 볼 때 사망 날짜는 191년 전후인 것으로 추정된다. 아내를 카프리 섬으로 보내긴 했지만, 아내와 이혼하지 않은 콤모두스는 이후 재혼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이 마지막으로 언급된 191년에서 1년 뒤인 192년 12월 31일 콤모두스는 라이투스, 에클렉투스와 공모한 나르키수스 손에 교살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