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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23 22:43:43

도도(신라)


1. 개요2. 행적3. 정말로 노비였나?4. 기타

1. 개요

都刀

신라의 인물. 신분이 장군 혹은 노비로 추정되는데, 이름 앞에 붙은 고간(高干)이 직책이 아니라 이름의 일부라고 봐서 고우도도(高于都刀)[1]로 보기도 한다. 일본서기에는 고도(苦都)로 기록되어 있다.

삼년산군[2] 출신, 김무력의 부장으로 관산성 전투에서 직접 성왕을 잡아 목을 벤다. 관산성 전투 문서 참조.

2. 행적

2.1. 삼국사기

백제의 왕인 명농(明襛, 성왕)이 가량(加良)과 함께 와서 관산성(管山城)을 공격하였다. 군주(軍主) 각간(角干) 우덕(于德)과 이찬(伊湌) 탐지(耽知)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新州) 군주인 김무력(金武力)이 주(州)의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교전하였는데, 비장(裨將)인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간(高干) 도도(都刀)가 급히 쳐서 백제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가 승세를 타고 크게 이겼으니, 좌평(佐平) 네 명과 군사 2만 9천 6백 명을 참하였고,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했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10년 (554)
가을 7월에 왕이 신라를 습격하기 위하여 직접 보기(步騎)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仇川)에 이르렀는데 신라의 복병(伏兵)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난병(亂兵)들에게 해를 당해 훙(薨)하였다. 시호를 성(聖)이라 하였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 32년 (554)

이 기록을 종합해보면, 백제가 관산성 일대에서 신라군과 격전을 벌이던 와중에 성왕은 50명의 보병과 기병만을 거느리고 밤에 길을 지나던 중에 매복해있던 신라군에게 기습을 당하여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에 복병들을 이끌고 백제 성왕의 목숨을 앗아간 신라의 용사가 바로 삼년산군의 고간이었던 도도였던 것이다.

『삼국사기』에 보이는 도도(都刀)의 관등은 고간(高干)이었는데, 이는 외위에 속하는 관등이다. 신라의 관등제는 왕경(王京)에 거주하는 왕경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경위와 지방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외위로 이루어져 있는 이원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삼국사기』 잡지에 따르면, 고간은 경위에 견주면 17관등 중 9관등인 급찬(級飡)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또한 그 직책은 하급장교에 해당하는 비장(裨將)이었다.

2.2. 일본서기

신라는 명왕(明王, 성왕)이 직접 왔음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내어 길을 끊고 격파하였다. 이 때 신라에서 좌지촌(佐知村)의 사마노(飼馬奴) 고도(苦都)【다른 이름은 谷智이다】에게 "고도는 천한 노(奴)이고 명왕은 훌륭한 임금이다. 이제 천한 노로 하여금 훌륭한 임금을 죽이게 하여 후세에 전해져 사람들의 입에서 잊혀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얼마 후 고도가 명왕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명왕이 "왕의 머리를 노(奴)의 손에 줄 수 없다"고 하니, 고도가 "우리나라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노(奴)의 손에 죽습니다"라 하였다.【다른 책에는 "명왕이 호상(胡床, 의자)에 걸터 앉아 차고 있던 칼을 곡지(谷知)에게 풀어주어 베게 했다"고 하였다.】

명왕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 흘리며 허락하기를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라 하고 머리를 내밀어 참수당했다. 고도는 머리를 베어 죽이고 구덩이를 파묻었다.【다른 책에는 "신라가 명왕의 머리뼈는 남겨두고 나머지 뼈를 백제에 예를 갖춰 보냈다. 지금 신라왕이 명왕의 뼈를 북청(北廳) 계단 아래에 묻었는데, 이 관청을 도당(都堂)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일본서기』 흠명기 15년 12월 (554)

일본서기에 따르면 성왕의 아들 왕자 여창(餘昌)이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 나아가 함산성(函山城, 관산성)을 빼앗고 구타모라(久陀牟羅)에 요새를 쌓았다. 이처럼 전황이 백제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자 성왕은 전선에 나가 고생하고 있을 아들을 걱정하여 직접 이를 위로하러 갔다. 즉 이때 50명만 데려간 건 이 일대를 백제군이 장악했다고 생각해서 방심한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 정보를 입수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신라군은 성왕이 전선으로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는 군사를 내어 길을 막았고, 결국 성왕은 신라의 고도(苦都)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고도는 고간 도도와 동일한 인물인데, 여기서는 도도의 신분을 좌지촌(佐知村)의 사마노(飼馬奴), 즉 말을 부리는 노비로 묘사하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신라인들이 천한 노(奴)인 도도로 하여금 백제의 성왕을 죽여 후세의 입으로 전하게 하려는 속셈으로 고도로 하여금 성왕을 죽이도록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머리를 구덩이에 파묻었다고 하는데,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조에 전하는 것처럼 백제의 의자왕이 대야성을 빼앗은 후에 김춘추의 딸인 고타소와 사위인 김품석의 시신을 감옥 바닥에 묻어버린 것도 이 일을 의식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비장에 불과했던 도도가 독단적으로 그런 결단을 내렸다는 점은 의아하게 생각되지만, 당시 신라군이 처한 위급한 상황을 생각해보면 어느정도 이해가 될 법한 부분도 있다. 비록 도도가 성왕을 사로잡았다고는 하지만, 멀지 않은 곳에 백제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언제 다시 백제군이 들이닥쳐 성왕을 구출할지 모르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도도는 성왕을 본국까지 압송할 여유가 없다고 판단하여 그 자리에서 목을 베었던 듯 하다.[3]

2.3. 이후

성왕이 죽은 이후로 도도에 대한 기록은 더이상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그가 어디서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사실은 도도가 성왕의 목을 벤 남자로서 그 이름을 역사 속에 남기게 되었다는 점이다.

굳이 추정해보자면 상관 김무력이 관산성 전투 이후 2년만에 3관등이나 초고속 승진을 했고, 도도가 공을 세웠음이 지금까지 기록에 잘 남아있는 걸 봐서는 관산성 승리의 군공을 인정받고 상을 받았을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다. 이후 행적에 대한 기록이 남지 않은 것이야 그냥 전반적인 기록이 부족한 시대다보니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 당장 같은 6세기 중반 인물 중에서도 가야안라국 왕은 이름조차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기록이 부족한 시대인데 지방민 출신 하급 장교야 말할 것도 없다.

3. 정말로 노비였나?

노비가 전장에 나와 다른 군사들을 지휘하여 적국의 왕을 사로잡아 손수 그 목을 베었다는 이야기를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비록 도도의 직책인 비장이 아주 높은 자리라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고간이라는 외위를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지방의 유력자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싶다. 아마도 도도가 말을 타고 전장에 나선 비장이었던 점을 들어서 왕의 목을 베어 죽인 원수에게 "사마노"라는 비하적인 명칭을 사용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사실 도도에 대하여 "사마노"(말을 먹이는 노비)라고 했던 점을 보더라도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말은 매우 값비싼 가축이었기에 아무나 다룰 수는 없었다. 더욱이 전란의 긴장감이 끊이지 않았던 고대의 한국에서 말이 지니는 가치는 두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백제인 사기는 실수로 국마(國馬)의 발굽을 상하게 한 후에 벌을 받을까 두러워하여 고구려로 달아났고,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백제의 아직기는 유학 경전에 능통하여 박사(博士)라는 직책을 지니고 있었으나 동시에 말을 기르는 법에도 능숙하여 마굿간일도 담당했다고 전한다. 이처럼 고대에 말을 부린다고 해서 반드시 노비라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사마노라는 직책이 이름만 천하지 실제로는 상당한 지위가 있는 군사직책이라는 주장도 있다. 고대에 군마는 중요한 군사 자산이어서 군마 관리자도 상당한 책임과 권한이 있는 직책이었다. 고대 중국의 대사마라던지, 조선 전기에 국왕을 경호하는 부대인 '겸사복(兼司僕)'이라는 정예기병으로 이루어진 친위대의 이름도 말을 관리하는 하인이라는 뜻이고, 비슷하게 중세 유럽에서 국왕군 총지휘관 비슷한 지위였던 'constable'이나. 부르봉 왕조 시절 프랑스 근위군 고위직인 'Grand Écuyer de France'도 '국왕의 마굿간지기'라는 의미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주보돈 교수는 『일본서기』에서 고간 도도에 대하여 "좌지촌의 사마노" 운운한 것에 대하여 흥미로운 해석을 내놓은 바 있다. 그에 따르면 고간 도도는 비교적 최근에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된 변방 지역인 좌지촌에 속하는 지방 유력자이며, 그를 "사마노"라 일컬은 것은 좌지촌의 주민들이 국가에서 사용할 말을 양육하는 국역(國役)을 부담했던 이른바 집단적 예속민에 속하는 계층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비록 추정에 의거한 부분이 많기는 하지만 분명 곱씹어볼만한 가설이라 생각된다.

다만 성왕이 도도를 가르켜 굳이 "노(奴)"라 칭한 점은 좀 더 생각해볼 만한 필요가 있을 듯 하다. 이 기록은 대체로 백제인들의 입장이 강하게 반영된만큼, 도도를 폄하하기 위해 그와 같이 칭하게 하였을수도 있겠으나 또 한편으로는 지방민에 대해 차별적인 대우를 가했던 당시 고대인들의 입장 또한 반영되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울진봉평신라비에서 그 지역 일대의 지방민을 "노인(奴人)"이라 칭하면서 왕경민들과는 다른 별도의 "노인법(奴人法)"으로 다스렸던 흔적에서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비록 도도가 삼년산군의 고간이었다고는 하지만, 고귀한 왕실의 혈통을 타고난 성왕에게는 감히 왕의 목을 벨 수 없는 천한 이로 여겨졌거나 스스로 여겼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그리고 《삼국사기》에 언급된 인물이 사실은 고간(高干)의 지위에 있는 도도(都刀)가 아니라 이름 자체가 고우도도(高于都刀)이며 이는 《일본서기》의 고도와 같은 이름이라고 보기도 한다. 실제 《삼국사기》 판본들을 봐도 '간(干)'이 아니라 '우(于)'에 가까운 모습이다. 또한 외위 3등인 고간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 일개 비장을 맡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하필 신라 외위에 고간이라는 관등이 딱 있는데다가 외위 자체의 위계가 경위보다 대폭 낮았기에[4] 외위의 관등을 가졌던 자들의 역할이나 위상에 대해서는 아직도 다소 논란이 있다. 그리고 아무리 지방민 출신이라 해도 한국계 인물 중 성씨를 제외한 이름만 4글자인 건 (당대 기록상으로도) 매우 이례적이고 음가 자체도 저렇게 표기할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기묘해서 언어학적으로도 논쟁의 여지가 있다.[5]

4. 기타

KBS의 만화 초롱이의 옛날여행 성왕 편에서는 진흥왕이 부리는 자객으로 등장해서[6] 성왕을 암살한다.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이동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여담으로 이 만화에서 성왕 편은 비현실적이고 판타지스런 요소가 유별나게 많이 들어 있다. 도도가 아니었으면 신라가 멸망할것처럼 묘사했는데 실제 역사에서 신라를 살린것은 김무력의 활약이었다. 물론, 도도의 공도 공정하게 일정해야 하지만 말이다.

이름이 언어학적으로도 의의가 있는데, 현대 한국어 한자음으로는 , 의 발음이 완전히 같지만, 당대 신라어로는 발음의 차이가 있었기에 다른 한자로 음차되었다고 유추해볼 수 있다.
[1] 삼국사기는 여러 탁본이 있는데 정덕본과 을해목활자본에는 "고우도도(高于都刀)"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이 중 정덕본은 현존하는 삼국사기 중 가장 오래된 판본으로서 于 설을 뒷받침한다.[2] 오늘날 충청북도 보은군이다.[3] 물론 김무력의 명령에 따른 행위일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지만, 당시 신라군이 처한 급박한 상황 탓이 컸을 것이라 생각한다.[4] 고간은 외위로는 3등임에도 경위 9등인 급찬에 상당했다.[5] 여담으로 한국사에서 우산국의 지도자인 성주(원문에는 우릉성주羽陵城主라 기록되었다)의 아들 부어잉다랑(夫於仍多郞)이 가장 괴악한 이름을 가진 인물로는 단연 톱으로 꼽히는데, 우산인들이 모두 한반도 본토로 피란한 뒤에 갑툭튀하는 인물이라 그냥 아예 한국계가 아니었다고 보기도 한다.[6] 이 때문에 김무력이 등장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