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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09 00:16:18

카펠리아누스

이름 카펠리아누스
(Capellianus)[1]
출생 미상
사망 미상
직위 원로원 의원, 전직 법무관, 야전사령관, 누미디아 속주 총독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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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세베루스 왕조, 군인황제시대의 원로원 의원, 장군, 누미디아 총독.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황제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황제를 선포한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를 공격해 두 황제를 죽인 총독으로 유명하다. 그가 전직법무관 자격의 누미디아 속주 총독 재임 시절 제작된 비문을 통해,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쪽과는 큰 연관이 없는 인사로 확정된 상태다.

2. 생애

서기 238년 누미디아 속주 총독을 지낸 인물로, 흔히 카펠리아누스로 알려져 있다. 과거에는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부하 정도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최근 발굴된 누미디아 일대의 로마 시대 비문을 연구한 뒤셀도르프 대학의 비를리 등의 연구 기록에 따르면, L. Ovinius Pudens Capella로 나와 있고 세습 원로원 의원으로 법무관을 지낸 뒤 전직법무관 자격의 제3 아우구스타 군단 사령관 겸 누미디아 총독으로 파견됐다고 한다.

정식 이름은 '루키우스 오비니우스 푸덴스 카펠라'. 동시대 헤로디아누스 기록이나, 후대의 로마인 기록에 따르면 카펠라라는 이름 대신 카펠리아누스로 불렸기 때문에, 정황상 본인과 로마 원로원에서는 카펠리아누스라는 이름을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향과 가계 모두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분명한 것은 그가 오래된 로마 평민 귀족인 오비니우스 가문 출신의 세습 원로원 의원이며 부모 모두 원로원 귀족라는 점, 누미디아 총독직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개혁 이래 군경력을 가진 법률가, 변호사들이 부임한 만큼 상당한 지적 수준을 가진 엘리트 원로원 의원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그가 누미디아의 키르타 태생이라거나, 푸닉 지방 출신 원로원 의원의 후손일 확률은 떨어져 보인다. 당장 비문에 나온 성씨인 오비니우스 가문은 로마 평민귀족이며, 그가 누미디아 총독에 부임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푸닉 지방을 본적으로 두거나 이 곳 출신일 확률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 당시 벌어진 아비디우스 카시우스 반란 이후 "출신지와 그 근처 지방에는 본적자가 총독이나 군사령관으로 취임할 수 없다"는 규정이 신설됐기 때문이다.

자세히 알려진 바는 없으나, 세습 원로원 가문의 자제답게 군복무를 마친 다음 명예로운 경력을 밞은 뒤 가문에 배정된 원로원 의석을 세습한 것으로 보이며, 총독 파견 전 법무관에 입후보해 당선 후 법무관에 취임했다. 세습 원로원 의원임에도 성향 자체가 천상군인이고 법과 원칙을 중요시 여긴 성격에다, 푸피에누스의 두 아들과 마찬가지로 세습 원로원 의원임에도, 원로원에 적대적인 트라키아 군인 황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와 크게 대립하지 않은 덕에, 서기 238년 3군단 아우구스타 군단장이자 전직법무관 자격으로 누미디아 총독이 됐다.

대개의 속주 파견 원로원 의원 출신 총독들처럼 서기 238년 푸닉 일대의 지주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중립적인 자세를 취했다. 이때 그는 아프리카 속주 총독 고르디아누스와 민사 소송을 담당하고, 세금 징세 관련 업무를 함께 처리했다. 그런데 고르디아누스 총독이 함께 온 아들 고르디아누스 2세와 함께 지주들 편을 들고, 누미디아 총독 카펠리아누스를 고발한 다음 황제를 자처하고 반란에 동조했다. 이때 카펠리아누스는 격렬하게 반발했는데, 이들은 과거 로마에서 격렬하게 충돌한 전례도 있고 사적 원한도 깊어 적이 됐다.

238년 고르디아누스 부자가 원로원에게 자신들을 황제로 임명해줄 것을 요구하면서, 카펠리아누스 해임을 요청한다. 이때 원로원은 이들 부자의 황제 승인 요청을 통과시키고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를 반역자로 규정하나, 카펠리아누스를 해임하지 않고 단순권고 차원에서 개인 의사를 묻고 넘어가버린다. 이는 당시 원로원 의장 역할을 하던 집정관 두명과 프린켑스 세나투스 직에 있던 발레리아누스, 푸피에누스의 대리인이기도 한 원로원 중진의원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등이 자신들의 정치적 책임을 최소화하고 자신들과는 사이가 괜찮은 카펠리아누스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는 원로원에서 두 사람의 황제 승인을 통과시킨 공문을 제국 전역에 보내기도 전에, 아프리카 총독이자 황제 명령으로 누미디아 총독 관저에 사람을 보내 "당장 속주를 떠나라"고 명령을 보내 협박하고 본인 가문 대리인을 후임자로 보낸다. 이는 카펠리아누스에게 원로원에서 정식 공문이 도착하고, 그에게 원로원이 단순권고 차원에서 의사를 보내는 순간 파국을 초래한다.

머리 끝까지 열받은 카펠리아누스는 현직 총독 신분으로, 황제에 오르기 전에 반란에 동조한 고르디아누스 부자를 반역자로 규정하고 막시미누스에게 충성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휘하 군대에게 전투 명령을 지시내린다. 이는 막시미누스 쪽의 요청이 아닌, 카펠리아누스 판단에 따라 내려진 결정이었다.

누미디아에 주둔 중인 3군단 아우구스타는 카펠리아누스가 누미디아 부임 이후 매일 같이 병사들을 조련하고 변방의 이민족들과 전투를 치른 까닭에 실전경험이 풍부하고 군율이 잘 확립되어 있었다. 따라서 카펠리아누스가 푸닉에서 벌어진 농장주들의 반란을 먼저 제압한 이후, 아프리카 속주의 주도 카르타고를 공격했을 때 승부는 사실상 끝나고 만다.

오늘날 카르타고 시가전으로 부르는 서기 238년 4월 12일 당시, 카펠리아누스의 군대의 침공에 맞서기 위해 고르디아누스 부자는 경비병과 반란에 동조한 농장주들의 노예들을 합쳐 약 1천명을 이끌고 저항한다. 그러나 전투 직후 이를 맨 앞에서 이끈 고르디아누스 2세는 바로 전사한다. 이때 고르디아누스 1세는 카펠리아누스 측의 입장을 들은 뒤 체념 후, 체포 직전 스스로 목을 매 자살한다.

승리 직후, 카펠리아누스는 로마법 반란 처리 규정에 따라, 카르타고 시가지를 약탈케 하고 반란을 일으켜 로마 제국 공무원들을 살해한 농장주와 그 가족들의 농장, 저택을 모조리 불태운다. 따라서 카르타고에서 고르디아누스에 동조한 이들은 모조리 죽임을 당하고, 살아남은 이들은 추방됐다.

동시대 사가 헤로디아누스에 따르면, 카펠리아누스는 사건 당시, 로마 원로원에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언했기 때문에, 카펠리아누스는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스스로 총독 직에서 물러났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막시미누스 진영에 합류하지 않았다.

후일 푸피에누스, 발비누스가 살해되고 고르디아누스 3세가 제위에 오른다. 당시 고르디아누스 3세는 외삼촌 고르디아누스 2세의 양자였기 때문에, 239년 카르타고 시가전의 책임을 이유로 카펠리아누스가 이끈 북아프리카 일대 로마군 최정예 군단인 3군단 아우구스타는 없어진다. 이는 명백한 정치보복이었는데, 여러 기록에서 카펠리아누스에 대한 처벌이나 언급이 없는 것을 볼 때 카펠리아누스는 총독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 은퇴 혹은 불출석 형태로 조용히 살다가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2]

[1] 누미디아에서 발견된 비문에 따르면 L. Ovinius Pudens Capella로 표기되어 있다.[2] 고르디아누스 3세의 3군단 아우구스타 폐지 조치는 240년 북아프리카 일대의 치안이 흔들리는 원인을 제공해, 푸닉 일대의 쇠퇴와 치안 공백을 초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