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2395><colcolor=#ffffff> 마르그리트 뒤라스 Marguerite Duras | |
본명 | 마르그리트 도나디외[1] |
Marguerite Donnadieu | |
출생 | 1914년 4월 4일 |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사이공 근교 자딘성 | |
사망 | 1996년 3월 3일 |
프랑스 파리 6구 (향년 81세) | |
국적 |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작가, 소설가, 영화감독, 각본가, 극작가, 저널리스트 |
학력 | 소르본 대학교 (수학·법학·정치학 / 학사) |
데뷔 | 1943년 《철면피들》 |
대표작 | '연인', '태평양을 막는 제방', '모데라토 칸타빌레' (소설) |
'인디아 송', '박스터, 베라 박스터', '캘커타 사막의 베니스라는 그의 이름' (영화) | |
배우자 | 로베르 앙텔므 (1939~1947) 디오니스 마르콜로 (1947~1956) |
자녀 | 장 마르콜로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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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작가, 소설가, 영화감독, 각본가.소설가로서는 누보로망 사조의 대표주자로서 연인을 통해 프랑스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문학상인 공쿠르상을 수상하고, 영화 감독으로서는 누벨바그 분파 중 하나인 '센 강 좌안파'[2] 감독으로서 활동해 모던 시네마의 효시 중 한명으로 꼽히기에, 소설과 영화 양면에서 거대한 성취를 이뤄낸 거장으로 평가받는다.
2. 생애 및 작품 활동
2.1. 유년기
1914년 당시 프랑스 식민지였던 베트남 사이공 시 근교 자딘성에서 2남1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1921년 공무원이었던 아버지가 사망한 이후 프랑스어 교사인 어머니의 인사 이동에 따라 두 오빠와 함께 동남아시아 곳곳으로 이사를 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2.2. 성인기
1932년 프랑스로 귀국해 파리 대학교에서 수학, 정치학과 법학을 공부하였고, 이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소설과 연극에 탐닉하며 문학적 소양을 키우기 시작했다.1937년에는 대학을 졸업 후 식민성 공무원으로 취직하고 2년 뒤에는 법대 동문이었던 3살 연하의 로베르 앙텔므와 결혼한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자 일자리를 잃고, 1942년에는 첫 아이와 둘째 오빠가 모두 병으로 사망하면서 절망감을 극복하기 위해 자전적인 이야기가 담긴 《타네랑 가족》을 써냈으나 출판사에게 출판을 거부 당하고, 1년 뒤 남편의 지인 출판업자를 통해 《철면피들》로 제목을 수정한 뒤 작가로서 데뷔하게 된다.
1944년에는 문학 전문 출판사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두번째 소설 《평온한 삶》을 펴냈으며, 이때 편집자 디오니스 마르콜로를 만나 인연을 쌓게 된다. 이후 뒤라스와 남편 로베르 앙텔므, 디오니스 마르콜로는 후일 프랑스의 대통령이 되는 프랑수아 미테랑이 창설한 레지스탕스에 참여하기도 했다.[3]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7년에는 로베르 앙텔므와 이혼 후 디오니스 마르콜로와 재혼하였으며, 이듬해 아들인 장 마르콜로를 낳았다.
1950년에는 어린 시절 보았던 자신의 어머니를 모티브로 한 《태평양을 막는 제방》을 내놓으면서 프랑스가 식민지에서 저지른 만행들을 고발했는데, 당시 프랑스 정부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일으키고 있었기에 이러한 비판이 화제가 되면서 발간 첫 주에 5000부를 판매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후 《지브롤터의 뱃사람》,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 등의 작품을 내놓으며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문단에서의 입지가 점차 두터워졌다.
1954년에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 정부가 알제리 전쟁을 일으키자 샤를 드골 정권을 비난하면서 몰래 알제리 독립군 게릴라들을 지원하기도 하였고, 1955년에는 알제리 전쟁 반대를 위한 지식인들의 모임을 창립해 '프랑스 국내 및 해외 영토에서의 인종차별 금지'를 주장하는 등 정치적, 사회적 활동에 활발히 참여하였다. 좌익 운동에 흥미를 느껴 10년 동안 공산당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 이후로도 《모데라토 칸타빌레》, 《여름밤 열 시 반》, 《부영사》, 《롤 베 스타인의 환희》 등의 호평받는 작품들을 집필하며 그의 대표작을 늘리는 등 작가 활동을 계속했으며, 68혁명에도 참여했다.
2.3. 영화계 입문
뒤라스는 대학 시절부터 연극과 영화에 빠졌으며 일부 실험영화와 단편 영화들의 각본에 참여한 적은 있으나 영화계에 자리를 매김하지는 않았다.그러던 중 같은 누보로망 소설가이자 영화 감독이었던 알랭 로브그리예의 소개로 알랭 레네와 만나게 되고, 1959년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의 각본을 쓰며 제33회 아카데미상 각본상 후보에 오르는 등 화려하게 영화계에 입문하게 된다.
1966년 폴 세반과 공동 연출한 '라 뮤지카'를 통해 영화 감독으로서도 데뷔하게 되고, 자신의 소설과 희곡 등을 영화로 옮긴 《파괴하라, 그녀는 말한다》, 《나탈리 그랑제》 등의 작품을 여럿 연출하게 된다.
1975년에는 그의 최고작으로 평가받는 《인디아 송》을 내놓으며 그 독특한 형식과 미학을 인정받으며 영화 감독으로서의 입지를 구축했다.
이후로도 인디아 송의 속편인 《캘커타 사막의 베니스라는 그의 이름》, 《박스터, 베라 박스터》, 《밤의 선박》 등의 호평받는 작품을 내놓았으며, 1985년작 《아이들》이 영화 감독으로서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2.4. 노년기
1980년대에는 작품 외적인 스캔들로 화제를 모으게 되었는데, 뒤라스가 35세 연하인 얀 앙드레아 (Yann Andera)와 연인 관계임이 드러나면서 비난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이에 뒤라스는 자신의 연인과의 사랑을 구체화한 작품 《죽음의 병》을 1982년에 내놓으며 응수했고, 연이어 앙드레아와의 관계에서 비롯한 작품들을 내놓는다.[4]
연인 1985년판 표지.[5] |
1984년에는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을 토대로 수십년간 집필해왔던 뒤라스 평생의 저작 《연인》을 내놓는다. 연인은 실제와 허구가 구별이 안 될만큼 혼재되어있고 과거의 현재의 정서가 오가는 내용으로 호평을 받았으며 프랑스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문학상 공쿠르상까지 수상하게 되며 프랑스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임을 확고히 했다. 연인은 뒤라스 소설 중 가장 높은 인기를 자랑하며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1992년에는 장자크 아노 감독, 제인 마치, 양가휘 주연의 영화 연인으로 영화화까지 되었다.
연인 이후로는 1989년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아메리칸 병원에서 알코올중독증을 치료할 정도로 쇠약해져 있었음에도 후기작 《파란 눈 검은 머리》, 《에밀리 엘의 사랑》, 《여름비》 등을 내놓으며 인기를 끌었으나 결국 1995년 마지막 몇 년간의 글을 모은 《이게 다예요》를 내놓은 뒤 1년 뒤인 1996년 3월 3일 프랑스 파리 6구에 있는 자택에서 암으로 인해 향년 81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사후 몽파르나스 묘지에 안장되었다.
3. 작품 특징
3.1. 소설
도미니크 노게즈 : 만일 당신이 플로베르 같은 방식으로 '〈부영사〉는 바로 나다', 혹은 '〈롤 V. 슈타인〉은 바로 나다'라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닌가, 라고 묻는다면 지나친 것일까요?
마르그리트 뒤라스 : 나는 모든 것이에요. 나는 캘커타이고, 거지이며, 메콩 강이고, 직위이기도 해요. 캘커타 전부죠. 백인 구역 전부고요. 식민지 전체에요. 모든 식민지들의 쓰레기통이 바로 나예요. 그건 확실해요. 나는 거기에서 태어났어요. 거기에서 태어났고 그곳에 대해 썼어요.
말의 색채 -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말하는 나의 영화들 中
마르그리트 뒤라스 : 나는 모든 것이에요. 나는 캘커타이고, 거지이며, 메콩 강이고, 직위이기도 해요. 캘커타 전부죠. 백인 구역 전부고요. 식민지 전체에요. 모든 식민지들의 쓰레기통이 바로 나예요. 그건 확실해요. 나는 거기에서 태어났어요. 거기에서 태어났고 그곳에 대해 썼어요.
말의 색채 -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말하는 나의 영화들 中
경력 초기에는 리얼리즘 계열의 소설을 써냈으나, 이후로는 작풍을 바꿔 추상적인 심리 묘사, 암시적인 대화의 사용 등의 기법이 들어간 매우 사적인 소설을 쓰는 작가가 되었다. 극히 자전적인 내용이 섞여 들어간 소설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소설은 일평생 사랑에 대한 탐구가 돋보였으며[6], 인간의 정열·사랑·행동의 심연에 대한 미묘한 관계 추구, 부재와 사랑, 고통과 기다림, 글쓰기와 광기, 여성성과 동성애의 기이한 결합 등 다양한 사랑의 변주들을 주제로 해 작품들을 써왔다.
때문에 기억이나 감각에 따라 글을 쓰는 프랑스 문학사조인 누보로망 사조의 소설가 중 한명으로 꼽혔으나 뒤라스 본인부터가 그러한 분류를 거부한만큼 어린 시절 기억이나 나이차 많은 자신의 연인과의 관계가 반영되어 있는 등, 좀 더 자전적 요소가 매우 많이 투영되어있고[7] 특유의 반복과 비정형적인 문장이 자유롭게 구사된 독특한 글쓰기에 가깝다.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전통적인 프랑스 심리 소설의 계승자라고 보는 견해도 있는 편.
모더니즘, 실존주의, 포스트 모더니즘 같은 당대의 문학사적 흐름과는 궤를 달리한 채 혼자서 사적인 내용의 소설을 밀어붙였기 때문에 초기부터 중기까지 수십년동안 평단의 찬사와 혹평을 동시에 받은 작가이기도 하였으나, 일흔에 펴낸 '연인'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오히려 후기에 더 인기가 많아지고 재평가 받은 독특한 이력의 작가이기도 하다.[8]
3.2. 영화
평생 이미지의 재현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텍스트를 영화에 구현한 듯한 독특한 형식의 영화를 만들어왔는데[9], 이 때문에 이미지와 말을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가 실험적으로 탐구해온 장뤽 고다르와도 1979년, 1980년, 1987년 세 차례에 걸쳐 대담을 나눈 적이 있고, 해당 대담이 '뒤라스×고다르 대화'라는 책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다음은 해당 대담 중 일부 내용.장뤽 고다르 : 우리는 조금은 적대적인 형제와도 같군요, 제 잘못일 수도 있지만. 저는 글쓰기ecriture를 증오하거든요. 글쓰기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오는 순간을요. 글쓰기는 늘 그렇습니다… 당신의 경우, 만일 글이 없다면, 글이라 불러야 할지 텍스트라 불러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마르그리트 뒤라스 : 나는 쓰여진 것ecrit이라 부르지, 텍스트 또는 쓰여진 것.
장뤽 고다르 : 어느 쪽이든, 이미지는 그걸 좀 필요로 하지요…
마르그리트 뒤라스 : 나는 스크린에 두 가지가 필요하다네. 내가 “말의 진폭”이라 부르는, 방해할 수 없는 것이지. 대개 모든, 거의 모든 이미지는 텍스트를 방해하네. 이미지들은 텍스트가 들리는 걸 방해하지. 내가 바라는 건, 텍스트가 지나가는 걸 내버려두는 무엇일세 […]
장뤽 고다르 : 제 생각엔 영화는 말이 너무 많아요. 자신의 문장을 되풀이하고, 쓰여진 것을 반복하죠. 당신 영화를 좋아하는 건 그 말들이 영화에서 오는 게 아니라 영화를 가로지르기 때문이죠.
마르그리트 뒤라스 : 나는 내 텍스트들을 영화에서 접히도록 한다네. 난 이미지와 함께 보고 듣는 텍스트를, 내가 책에서 텍스트를 제공하는 것처럼, 책에서 그걸 읽게 하는 것처럼 제공하진 않을 걸세. 화면에서의 텍스트 읽기를 내가 조직해야 하네. 그건 같지 않지.
뒤라스×고다르 대화 中
마르그리트 뒤라스 : 나는 쓰여진 것ecrit이라 부르지, 텍스트 또는 쓰여진 것.
장뤽 고다르 : 어느 쪽이든, 이미지는 그걸 좀 필요로 하지요…
마르그리트 뒤라스 : 나는 스크린에 두 가지가 필요하다네. 내가 “말의 진폭”이라 부르는, 방해할 수 없는 것이지. 대개 모든, 거의 모든 이미지는 텍스트를 방해하네. 이미지들은 텍스트가 들리는 걸 방해하지. 내가 바라는 건, 텍스트가 지나가는 걸 내버려두는 무엇일세 […]
장뤽 고다르 : 제 생각엔 영화는 말이 너무 많아요. 자신의 문장을 되풀이하고, 쓰여진 것을 반복하죠. 당신 영화를 좋아하는 건 그 말들이 영화에서 오는 게 아니라 영화를 가로지르기 때문이죠.
마르그리트 뒤라스 : 나는 내 텍스트들을 영화에서 접히도록 한다네. 난 이미지와 함께 보고 듣는 텍스트를, 내가 책에서 텍스트를 제공하는 것처럼, 책에서 그걸 읽게 하는 것처럼 제공하진 않을 걸세. 화면에서의 텍스트 읽기를 내가 조직해야 하네. 그건 같지 않지.
뒤라스×고다르 대화 中
이러한 의식이 영화에 투영되었기 때문인지, 자신의 소설에서 나타난 모호한 시간 개념, 극도로 사적이면서도 내면적인 사고의 범주들을 넘나드는 대사와 독백이 영화에도 그대로 배어있다. 때문에 일반 관객은 물론이고 시네필들에게도 관람하기 쉽지 않은 영화 감독들 중 한명으로 꼽힌다.
모든 영화 작품에서 자신이 직접 각본을 썼거나 자신의 소설, 희곡을 각색해서 영화를 찍었다는 것도 특기할만한 점 중 하나이다. 때로는 미발표 희곡을 먼저 영화로 찍은 후 발표하거나 영화를 찍은 후 다시 소설로 만들어 출판하는 등 두 창작 활동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편.
4. 작품
4.1. 저서
<rowcolor=#fff> 년도 | 제목 | 소설 | 희곡 | 에세이 | 비고 |
1943 | 철면피들 Les Impudents | ○ | |||
1944 | 평온한 삶 La Vie tranquille | ○ | |||
1950 | 태평양을 막는 제방 Un barrage contre le Pacifique | ○ | |||
1952 | 지브롤터의 뱃사람 Le Marin de Gibraltar | ○ | |||
1953 |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 Les Petits Chevaux de Tarquinia | ○ | |||
1958 | 모데라토 칸타빌레 Moderato cantabile | ○ | [10] | ||
1960 | 여름밤 열 시 반 Dix heures et demie du soir en été | ○ | ['리피피',] | ||
1965 | 부영사 Le Vice-Consul | ○ | |||
1967 | 고독한 끌레르 L'Amante anglaise | ○ | |||
1966 | 롤 베 스타인의 환희 Le ravissement de Lol V. Stein | ○ | |||
1969 | 파괴하라, 그녀는 말한다 Détruire dit-elle | ○ | |||
1972 | 사랑 L'Amour | ○ | |||
1980 | 베라 박스터 또는 대서양의 해변 Vera Baxter ou Les Plages de l’Atlantique | ○ | |||
1980 | 복도에 앉은 남자 L'Homme assis dans le couloir | ○ | |||
1987 | 80년 여름[12] L'Été 80 | ○ | 단편집 | ||
1982 | 대서양의 남자 L'homme atlantique | ○ | |||
1982 | 죽음의 병 La Maladie de La Mort | ○ | |||
1984 | 연인 L'Amant | ○ | 공쿠르상 수상작 [13] | ||
1985 | 고통 La Douleur | ○ | |||
1986 | 파란 눈 검은 머리 Les Yeux bleus, Cheveux noirs | ○ | |||
1987 | 물질적 삶 La Vie matérielle | ○ | 단편집 | ||
1987 | 에밀리 엘의 사랑 Emily L. | ○ | |||
1990 | 여름비 La Pluie d'été | ○ | |||
1991 | 북중국의 연인[14] L’Amant de la Chine du Nord | ○ | |||
1993 |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글 Écrire | ○ | |||
1995 | 이게 다예요 C'est Tout | ○ | 유작 |
4.2. 필모그래피
<rowcolor=#fff> 년도 | 제목 | 연출 | 각본 | 제작 | 비고 |
1959 | 히로시마 내 사랑 Nathalie Granger | ○ | 알랭 레네 감독작 제33회 아카데미상 각본상 후보 | ||
1960 | 모데라토 칸타빌레 Moderato cantabile | ○ | 피터 브룩 감독작 | ||
1961 | 이토록 긴 부재 Une aussi longue absence | ○ | 앙리 콜피 감독작 | ||
1962 | 선원의 여행 L'itinéraire marin | ○ | 장 롤랭 감독작 | ||
1966 | 마드모아젤 Mademoiselle | ○ | 토니 리처드슨 감독작 | ||
1967 | 라 뮤지카 La musica | ○ | ○ | 장편 연출 데뷔작, 폴 세반과 공동 연출 | |
1969 | 파괴하라, 그녀는 말한다[A] Détruire dit-elle | ○ | ○ | ||
1971 | 노란 태양[A] Jaune le soleil | ○ | ○ | ||
1972 | 나탈리 그랑제 Nathalie Granger | ○ | ○ | ||
1974 | 갠지스의 여인 La femme du Gange | ○ | ○ | ||
1975 | 인디아 송 India Song | ○ | ○ |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 선정 | |
1976 | 캘커타 사막의 베니스라는 그의 이름[A] Son nom de Venise dans Calcutta désert | ○ | ○ | ||
1977 | 나무에서 지낸 일생[A] Des journées entières dans les arbres | ○ | ○ | ||
1977 | 화물차 Le camion | ○ | ○ | 제30회 칸 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 | |
1977 | 박스터, 베라 박스터[A] Baxter, Vera Baxter | ○ | ○ | ||
1978 | 카이사레아 Césarée | ○ | ○ | 단편, 다큐멘터리 | |
1978 | 부정적인 손들 Les Mains négatives | ○ | ○ | 단편, 다큐멘터리 | |
1979 | 밤의 선박 Le navire Night | ○ | ○ | ||
1979 | 아우렐리아 슈타이너 (멜버른) Aurelia Steiner (Melbourne) | ○ | ○ | 단편, 다큐멘터리 | |
1979 | 아우렐리아 슈타이너 (밴쿠버) Aurélia Steiner (Vancouver) | ○ | ○ | 단편, 다큐멘터리 | |
1981 | 아가타와 끝없는 독서 Agatha et les lectures illimitées | ○ | ○ | ||
1981 | 대서양의 남자[A] L'homme atlantique | ○ | ○ | ||
1982 | 로마에서의 다이얼로그 Il dialogo di Roma | ○ | ○ | ||
1985 | 아이들 Les Enfants | ○ | ○ | 제35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 카예 뒤 시네마 선정 1985년 올해의 영화 8위 |
5. 기타
- 1943년 등단한 이래 죽기 1년 전까지도 저작을 멈추지 않아 70여 편에 달하는 저서를 내고, 20여 편의 영화를 찍을만큼 평생 일중독에 가까운 다작을 해온 작가다.
- 프랑스의 배우 델핀 세리그와 페르소나 관계였다.
- 인종간 연애 작품을 얘기할 때 자주 언급되는 작가이기도 하다. 작가 본인부터가 그러한 경험이 있기도 하고, 무엇보다 해당 소재로 쓴 두 작품 히로시마 내 사랑과 연인이 해당 장르에서나 뒤라스 본인에게나 대표격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 다소 난해한 작풍을 감안하면 의외로 한국에 고정 팬덤이 있는 작가다. 소설은 물론이고 직접 만든 영화도 시네마테크에서 은근히 자주 틀어주는 편이며, 히로시마 내 사랑 같은 영화 각본집도 번역해 출간할 정도.
- 예지 스콜리모프스키의 출발을 보고 상당히 좋아해 열변을 토할 정도였다고 한다.
6. 외부 링크
7. 관련 문서
[1] 흔히 알고 있는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필명이다.[2] Seine Left Bank. 센 강 좌측에 있고, 좌파적인 정치 견해를 보였기에 붙여진 별명. 문학사조인 누보로망과 연계되어 있었으며, 누벨바그보다 훨씬 일찍 활동했고 기억에 대한 고찰과 영화의 형식을 실험하는 난해하고 급진적인 스타일로 유명했다. 알랭 레네, 크리스 마커, 아녜스 바르다, 알랭 로브그리예, 장 마리 스트로브가 이 분파에 속한다.[3] 이때 남편이 게슈타포에게 끌려가서 프랑수아 미테랑의 도움으로 다하우 강제수용소에 있던 남편을 구출해오기도 했다.[4] 후대 비평가들은 해당 작품들을 ‘얀 앙드레아 연작’ 혹은 ‘대서양 연작’으로 분류하기도 했다.[5] 뒤라스 본인의 어린시절 사진을 직접 표지로 사용했으며, 1992년에 나온 영화판 포스터는 이 표지를 오마주해 주연 배우 제인 마치가 같은 분위기로 촬영한 얼굴 사진을 사용했다.[6] 뒤라스 본인은 생전에 "나는 사랑을 사랑했고, 사랑하기를 사랑했다."는 말을 남긴 바 있다.[7] 대표적으로 '태평양을 막는 제방'은 어린 시절 인도차이나에서 어머니가 땅위로 밀려오는 바닷물을 막기 위해 방파제를 쌓던 기억에서 써낸 소설이고, '연인' 또한 어린 시절 중국계 연인과의 기억에서 비롯되었다.[8] 대중적인 인기로만 따지면 후기작들인 '파란 눈 검은 머리', '에밀리 엘의 사랑', '여름비' 등의 작품이 초기작들보다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9] 대표작 <인디아 송> 같은 경우 화면에 인물이 거의 등장하지 않거나, 등장해도 움직임이나 말, 행동을 하지 않으며, 스토리는 전적으로 내레이션을 통해 진행되는 독특한 미학을 선보였다. 1975년 칸 영화제에서 경쟁 부문이 아닌 비경쟁부문에 초청받았음에도 당해 가장 논쟁적인 영화 중 한편으로 거론되었을 정도.[10] 피터 브룩 감독에 의해 영화화 되었으며 잔느 모로는 이 영화를 통해 제13회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게 된다.['리피피',] '밤 그리고 도시', '일요일은 참으세요' 등을 연출한 줄스 다신 감독의 작품으로 1966년 영화화 되었다.[12] 국내에는 프랑스 작가들의 산문을 엮어낸 산문집 '가만히, 걷는다'에 수록되었다.[13] 장자크 아노 감독, 제인 마치, 양가휘 주연의 연인으로 영화화 되었다.[14] 1984년작 연인의 내용과, 연인의 모티브가 되었던 자신의 경험을 3인칭 시점에서 다시 풀어낸 작품.[A] 본인 저서 연출작.[A] 본인 저서 연출작.[A] 본인 저서 연출작.[A] 본인 저서 연출작.[A] 본인 저서 연출작.[A] 본인 저서 연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