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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2-27 01:03:10

요한 카시아누스

요한 카시아누스
Ioannes Cassianus | Ιωάννης ο Κασσιανός
파일:john cassian.jpg
<colbgcolor=#5b8f69,#2f3639><colcolor=#ffffff,#ffffff> 이명 고행자 요한 (John the Ascetic)
로마인 요한 카시아누스 (John Cassian the Roman)
출생 360년
로마 제국 소스키티아
사망 449년
로마 제국 갈리아 마르세유
직업 수도자, 사제
종교 기독교
성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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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b8f69,#5b8f69><colcolor=#ffffff,#ffffff> 성인명 요한 카시아노(가톨릭)
요한 카시아노스(정교회)
축일 7월 23일(가톨릭)
2월 29일(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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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저서4. 반(半)-펠라기우스주의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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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출신의 수도자이자 사제, 신학자. 동방 수도승 전통을 서방에 전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가톨릭, 성공회, 정교회에서 성인이자 사막교부로 공경받고 있다.

2. 생애

360년경 소스키티아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고전 교육을 받았고, 라틴어그리스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줄 알았다.

청년 시절에 친구인 게르마누스와 함께 팔레스티나로 갔고, 그와 함께 베들레헴 인근의 수도원에서 공동체 생활을 시작했다. 약 3년 동안 그곳에 머물렀고, 이후 더 깊은 영성생활을 추구하며 이집트의 스케티스로 향했다. 카시아누스와 게르마누스는 스케티스의 수많은 수도원을 방문했고, 여러 은수자수도자들의 가르침을 들었다. 이때 에바그리우스를 만나 그의 제자이자 동료가 되었다.

399년경 카시아누스와 게르마누스는 알렉산드리아테오필루스 주교가 촉발한 오리게네스 논쟁에 휘말리게 됐다. 그들은 약 300명의 오리게네스주의 수도자들과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도피했고, 그곳에서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주교의 보호를 받았다. 이때 카시아누스는 부제품을 받았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주교는 안티오키아 학파에 더 가까운 학자였기에 평소 오리게네스의 사상에 공감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집트에서 쫓겨 온 수도자들이 부당한 처우를 받았다고 생각한 크리소스토무스는 테오필루스에게 그들의 선처를 부탁했다. 그런데 403년경부터 크리소스토무스는 에우독시아 황후와 교회 안의 정적들로부터 끊임없이 공격을 받았고, 결국 주교직에서 파면되고는 유배를 가게 됐다. 카시아누스와 게르마누스는 그가 억울하게 누명을 썼다고 생각했고, 교황 인노첸시오 1세를 만나 크리소스토무스를 변호하겠다며 404년 로마로 향했다. 카시아누스는 그때부터 십여 년 가까이 로마에 머물면서 사제품을 받았고, 장차 교황이 될 레오 1세와도 깊은 친분을 쌓았다.

415년경 친구 게르마누스가 세상을 떠났고, 카시아누스는 갈리아 남부 마르세유에 이집트식 수도원을 설립해달라는 초대를 수락했다. 그는 마르세유에 2개의 수도원을 세웠는데, 하나는 남성 수도자들을 위한 성 빅토르 수도원이었고, 하나는 여성 수도자들을 위한 성 살바토르 수도원이었다.

435년 마르세유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3. 저서

420년경 압트의 카스토르 주교의 요청으로 『제도집』과 『담화집』을 저술했다. 이 두 책은 모두 라틴어로 쓰여졌으나, 금새 그리스어로 번역되었다. 사막교부들의 영적 가르침을 서방 교회의 상황에 맞게 풀어 쓴 것인데, 이는 베네딕투스의 수도규칙서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제도집』은 회수도승[1] 생활에, 『담화집』은 독수도승[2] 생활에 초점을 뒀다.

『성육신에 관하여,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논박』은 레오 1세 교황의 요청으로 쓰여졌다.

4. 반(半)-펠라기우스주의 논란

412년부터 시작된 아우구스티누스펠라기우스은총자유의지 논쟁은, 418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펠라기우스가 단죄되면서 일단락되었다. 그런데 이 논쟁을 기점으로 친구 사이였던 아우구스티누스와 카시아누스는 서로의 신학적 견해를 달리하면서 원수 같은 사이가 되어 죽을 때까지 화해하지 못했다.

카시아누스는 인간의 의로움과 구원에 있어 그 주도권은 하느님에게 있지만, 인간 쪽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약간의 반응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주도권이 전적으로 하느님에게만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에 대해 북아프리카의 수도자들과 카시아누스를 따르는 프랑스 남부의 수도자들이 그를 비판하고 나섰다. 왜냐하면 수도자들은 완덕을 향해 금욕적인 생활 전통을 지켜왔고, 인간의 의지가 먼저 작용하여 은총을 받아들일 최소한의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격한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들은 이마저도 받아들이지 않았고, 100년 이상에 걸친 논쟁 끝에 529년 제2차 오랑주 공의회에서 반-펠라기우스주의가 단죄되도록 관철시켰다.

오늘날에는 카시아누스와 아우구스티누스가 서로 처한 환경이 달랐기에 이러한 갈등이 생겼다는 새로운 관점이 제시된다. 카시아누스는 자신 스스로가 수도자로서 오직 수도자들만을 위한 글을 썼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주교로서 자신이 책임져야 할 평신도들의 영성 생활에도 관심을 가져야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카시아누스는 사변적 신학을 전개한 것도 아니고, 추상적인 개념을 논한 것도 아니다.

정교회에서는 카시아누스의 가르침에 직간접적인 의문이 제기되거나 비난을 가한 적이 없고, 오히려 그를 거부했던 가톨릭을 비난한다. 그러나 제2차 오랑주 공의회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가 전적으로 지지된 것은 아니었기에 오늘날의 가톨릭에서 카시아누스는 공식 성인 목록[3]에 포함되어 있고, 교리서에서도 그의 『담화집』이 인용된다.

사실 반-펠라기우스주의라는 용어는 카시아누스의 시대에 있던 말이 아니라 칼뱅의 제자인 테오도르 베자가 처음 사용한 말이다.


[1] 會修道僧[2] 獨修道僧[3] 우르바노 5세 때 추가